줄거리
정서윤은 군인 아버지의 엄격한 규율 아래에서 성장하며, 삶과 죽음의 경계에 대한 집요한 질문을 품게 되었다. 대학 시절, 그녀는 권력의 부당함에 맞서다 상처를 입고 후퇴했으나, 그 경험이 오히려 그녀를 더욱 냉철하고 철저하게 만들었다. 정부 산하의 비밀 실험실에서 일하게 된 서윤은, 그곳의 삭막한 공기 속에서 자신의 질서와 원칙을 유일한 방패 삼아 버텨왔다. 그녀는 동료들과 거리를 두고, 희귀 식물과 오래된 과학 논문에 몰두하며 외로움을 감췄다. 하지만 어느 날, 정부의 최고 기밀 실험 대상으로 지정된 ‘뱀 인간’의 관찰과 해부를 맡게 되면서, 그녀의 내면에 잠재된 미지의 감정과 이질적인 연민이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알렉세이 드라골라브는 실험실의 보안 책임자로, 러시아 군 정보부 출신답게 무표정하고 철두철미하다. 실험실 내부에서 벌어지는 비인간적 실험과 폭력에 점점 무뎌져 가는 자신을 경계하면서도, 명령과 임무라는 족쇄에 묶여 감정을 억누른 채 살아간다. 그는 서윤을 관찰하며 그녀의 질서와 원칙,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뱀 인간에게 드러나는 연민을 감지한다. 알렉세이는 자신의 내면에서 문득 터져 나오는 분노와 불신, 그리고 약자에 대한 이중적인 연민을 억누르려 애쓰지만, 실험실의 어두운 비밀과 점점 더 잔혹해지는 실험을 마주하면서 자신이 지키는 것의 의미에 혼란을 느낀다. 그의 유일한 위안은 감시 카메라 속 반복되는 일상과, 새벽녘에 홀로 읊조리는 러시아 시 구절들뿐이다.
루카 체르벨리는 젊은 나이에 연구 책임자가 되었으나, 어린 시절부터 주입된 완벽주의와 인정 욕구로 인해 심리적으로 불안정하다. 그는 실패의 공포에 쫓기면서도, 인간과 비인간 존재의 경계를 넘어서는 연구에 집착한다. 실험 대상에 대한 냉소와 잔혹함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내면 깊은 곳에서는 자신이 벌이는 일의 윤리성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한다. 루카는 실험 결과에 집착하는 한편, 서윤과 알렉세이의 미묘한 동요를 감지하고 그 균열을 이용하려 한다. 그는 실험실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심리적 게임의 설계자이자, 누군가의 약점을 드러내기 위해 집요하게 파고든다.
실험실의 유리벽 너머, 뱀 인간과 서윤은 서로를 의식하며 점차 조심스러운 연대를 형성한다. 반복되는 잔혹한 실험과 폭력 속에서, 서윤은 뱀 인간의 고통과 두려움, 그리고 인간적인 슬픔을 읽어내기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그녀 자신의 내면에도 억압되었던 감정과 본능이 기이하게 꿈틀거린다. 한편, 알렉세이는 감시와 명령 사이에서 흔들리며, 서윤의 변화를 감지하고 경계심을 키운다. 실험실 내에서는 뱀 인간의 예기치 못한 폭주와 남성적 야수성이 드러나며, 그로 인해 실험실 전체가 일촉즉발의 불안에 휩싸인다. 이 사건 이후, 정부는 알렉세이에게 더욱 잔혹한 실험을 지시하고, 그는 점차 자기 자신조차 통제할 수 없는 분노와 혼돈에 휘말린다.
이야기는 현재와 과거가 교차하며 전개된다. 플래시백을 통해 서윤의 대학 시절, 권력에 맞섰던 순간과 그로 인해 얻은 깊은 상처가 드러난다. 알렉세이 역시 과거 러시아에서 겪었던 군부의 폭력과 그로 인한 후회, 그리고 처음으로 인간을 보호하고자 했던 순간이 교차하며, 그가 왜 지금의 냉철함과 거리감을 선택했는지 밝혀진다. 루카는 어린 시절 가족의 기대와 사랑의 결핍, 그로 인한 집착적 완벽주의가 점차 드러나며, 세 인물 모두가 각자의 트라우마와 욕망에 발목이 잡혀 있음이 드러난다.
결국 서윤과 뱀 인간은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서로의 상처와 고통을 공유하는 유일한 존재가 된다. 점점 더 극단적으로 변해가는 실험과 감시, 그리고 정부의 통제 속에서, 알렉세이는 자신의 충성심과 인간성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서윤을 도울 결심을 하게 된다. 하지만 루카는 이들의 연대를 간파하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들을 실험의 도구로 삼으려 한다. 실험실은 점차 광기와 불신, 절망으로 물들어가고, 각 인물은 자신이 정해놓은 경계와 원칙이 무너지는 순간을 맞이한다.
결말에서, 치명적인 폭주와 폭력 끝에 실험실은 붕괴 직전의 혼란에 빠진다. 서윤과 알렉세이는 뱀 인간을 데리고 탈출을 시도하지만, 루카의 방해와 정부의 무자비한 진압이 이어진다. 최후의 순간, 서윤은 자신의 원칙과 감정 사이에서 결정적인 선택을 하게 되고, 알렉세이 역시 자신을 희생하는 방식으로 서윤과 뱀 인간의 도주를 돕는다. 루카는 실험실의 잔해 속에서 자신의 신념과 실패의 경계에 홀로 남겨진다. 탈출에 성공한 서윤과 뱀 인간은 어두운 숲속 어딘가에서 서로의 상처를 보듬으며, 인간성과 비인간성의 경계가 완전히 허물어진 세계에서 새로운 길을 모색한다. 실험실에 남겨진 루카와 알렉세이의 마지막 표정에는, 인간 본성의 어둠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아 있는 희망이 엇갈리며, 이야기는 차갑고 불길하면서도 기묘하게 아름다운 여운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