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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ytalk 오리지널 · 장면 9 · 챕터 3

짝사랑에 수프 추가함

매일 밤 9시 20분, 학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같은 서브웨이에서 허니오트 빵에 아메리칸 치즈와 랜치 소스를 넣은 에그마요를 주문하는 대학생인 나는, 알바생이 묻는 “빵은요? 치즈는요? 소스는요?” 에만 하루 중 가장 또렷하게 대답한다. 그런데 오늘은 그가 미리 만든 샌드위치를 건네며 내일부터 오전 근무로 바뀐다고 말하고, 나는 마지막 저녁 대화를 늘리려고 난생처음 수프까지 시킨다. 하필 새 수프를 데우는 동안 내 가방 지퍼에 걸린 줄 이어폰이 의자 세 개를 끌고 나오고, 그는 웃음을 참느라 종이컵에 수프 대신 국자를 넣는다.

그가 앞치마를 벗으며 버스 정류장까지 같이 가겠다고 나서지만, 전광판의 막차 도착 시간은 2분이고 내 쟁반에는 아직 김이 오르는 수프와 두 사람이 나눠 들기에도 어색한 샌드위치가 놓여 있다.

  • 등장인물 2
  • 장소 6
  • 장면 9
  • 줄거리 1,414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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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 Characters

등장인물들

오수빈

여성

대학 수업 뒤 컴퓨터 자격증 학원에 다니며 밤 9시 20분 버스 환승길에 저녁을 먹는 대학생

프로필

오수빈은 강태훈에게 샌드위치 재료 말고도 대답할 기회를 얻으려고, 미리 완성된 저녁 앞에서 식비 계산을 접고 처음으로 수프를 추가한다. 늘 주문만 받으면 됐던 강태훈을 계산대 밖으로 나오게 한 오수빈 앞에는 막차 도착까지 2분이라는 표시가 뜬다. 버스를 잡으면 못다 한 말을 삼켜야 하고, 말을 꺼내면 다음 교통편에 쓸 돈부터 다시 세어야 한다.

오수빈은 주문 전에 휴대전화 계산기로 잔액을 확인하면서도, 강태훈이 “소스는요?”라고 물으면 메뉴판에서 눈을 떼고 또박또박 “랜치요”라고 대답한다. 가방 지퍼에 걸린 줄 이어폰이 의자 세 개를 끌어내자 오수빈은 의자부터 줄 맞춰 돌려놓고, 수프 컵에 국자를 넣은 강태훈에게 “그건 추가 요금 없죠?”라고 묻는다. 정류장까지 같이 가겠다는 말에는 곧장 고개를 끄덕이지만, 오수빈은 뜨거운 컵을 넘겨주면서도 샌드위치 봉투만큼은 두 손으로 붙든다.

배경

스물두 살이 된 이번 학기, 오수빈은 학원에서 집으로 가는 버스 시간을 휴대전화에 저장하고 밤 9시 20분의 서브웨이를 저녁 동선에 넣었다. 허니오트에 아메리칸 치즈와 랜치를 넣은 에그마요를 며칠째 주문한 뒤에도 강태훈이 같은 질문을 하자, 오수빈은 학원이 일찍 끝난 날에도 매장 옆 문구점에서 시간을 맞추기 시작했다. 오수빈의 가계부에는 같은 샌드위치 가격이 줄지어 있고, 마지막 저녁 날짜 아래에만 수프값이 작은 글씨로 끼어든다.

묘사

오수빈은 턱 아래에서 똑바로 잘린 검은 단발에 숱 짙은 일자 눈썹을 지닌 스물두 살 대학생으로, 보풀이 조금 인 회색 집업 후드와 남색 면바지 차림에 컴퓨터 자격증 교재로 각진 검정 나일론 가방을 멘다. 가방 지퍼 고리에 늘 한 번 감겨 있는 흰 줄 이어폰이 유독 눈에 띄며, 평소에는 가방끈을 쥐고 어깨를 좁히다가도 대답할 차례가 오면 턱을 들고 상대의 눈을 정확히 바라본다. 둥근 볼에는 아직 웃음을 거두지 못한 기색이 남아 있고, 입술은 할 말을 한 번 더 고르듯 살짝 다물려 있다.

강태훈

남성

저녁 실습 수업에 복귀하려고 서브웨이 마감 근무를 오전 근무로 옮긴 복학생

프로필

강태훈은 오수빈이 샌드위치를 사지 않는 날에도 자신을 만나러 왔으면 하지만, 그 말을 꺼내려면 친절한 직원으로 남을 수 있는 계산대 밖으로 나가야 한다. 마지막 저녁, 미리 준비한 주문 때문에 인사마저 짧아지자 강태훈은 앞치마를 벗고 정류장까지 동행하겠다고 나서 오수빈에게 처음으로 매장 밖에서 함께할 시간을 청한다. 막차까지 2분, 강태훈은 다음 만남을 묻는 대신 오수빈의 뜨거운 수프 컵부터 받아 든다.

24세 남성 강태훈은 오수빈의 주문을 외우고도 매번 빵부터 묻고, 오수빈이 고개를 들어 대답하면 집게로 이미 꺼내 둔 허니오트를 집는다. 손님에게 부담을 주면 안 된다며 동료가 건네는 연락처 쪽지는 돌려주지만, 오수빈이 추가 주문을 고민할 때는 퇴근 시간이 지나도 메뉴판을 치우지 않는다. 의자 세 개를 달고 나온 오수빈 앞에서 강태훈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수프 컵에 국자를 꽂고, 결국 “이건 제가 더 이상하네요”라며 먼저 웃는다.

배경

강태훈은 스물넷이 된 올해 생활비를 마련하려고 저녁 근무를 이어 왔고, 밤 9시 20분이면 소스 통을 채우면서도 출입문 종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오수빈이 주문을 마칠 때마다 자신을 똑바로 보자 강태훈은 다른 단골에게 하던 “늘 드시던 걸로요?” 를 오수빈에게만 건너뛰었다. 새로 잡힌 오후 직업교육 때문에 오전 근무를 신청한 강태훈은 마지막 저녁에 오수빈을 기다리지 않게 하려고 샌드위치를 포장해 두었다가, 건넬 말까지 없어져 포장지 모서리만 두 번 접는다.

묘사

강태훈은 짧은 검은 머리와 곧은 눈썹, 웃음을 누르면 한쪽 입꼬리만 먼저 접히는 얼굴을 지닌 스물네 살 청년이다. 어깨가 적당히 벌어진 마른 체형에 짙은 초록색 폴로셔츠와 검은 면바지, 여러 번 빨아 접힌 자리가 희어진 검은 앞치마를 입고, 손님과 눈을 맞출 때면 긴 목을 조금 숙인다. 입술은 다물어도 눈가에는 웃음이 남아 있고, 뜨거운 컵을 받아 드는 두 손은 상대의 손끝이 빠져나갈 자리를 넉넉히 비워 둔다.


줄거리 · Synopsis

줄거리

밤 9시 20분, 컴퓨터 학원 계단을 내려온 오수빈은 습관처럼 주머니 속 휴대전화 계산기를 두드려 남은 교통비와 식비를 확인한 뒤 1층 서브웨이 출입문을 민다. 여섯 걸음 앞 진열대 너머에서 강태훈은 주문을 묻는 대신 이미 흰 종이에 단단히 말아 둔 에그마요 샌드위치를 내밀고, 내일부터 복학 일정 때문에 저녁이 아닌 오전 근무로 옮긴다는 말을 덤덤히 덧붙인다. 매일 “빵은요? 치즈는요? 소스는요?”라는 질문에 대답하며 눈을 마주치던 유일한 틈이 닫히자, 오수빈은 식비 잔액이 깎이는 것을 감수하고 난생처음 따뜻한 양송이 수프를 추가로 주문한다. 태훈이 새 수프를 덥히기 위해 보온통으로 몸을 돌린 사이, 수빈은 당황해 뒤로 물러서다 가방 지퍼에 엉킨 줄 이어폰으로 통로의 가벼운 금속 의자 세 개를 한꺼번에 와르르 끌어당긴다. 쇠붙이가 바닥을 긁는 굉음에 매장 안 손님들의 시선이 쏠리고, 놀란 태훈은 웃음을 참으려 입술을 깨물다 종이컵 안으로 국물 대신 묵직한 국자 자체를 통째로 꽂아 넣는다. 엉망이 된 쟁반을 사이에 두고 수빈이 “그 국자는 추가 요금 없죠?”라고 묻자, 태훈은 참지 못하고 소리 내어 웃으며 쓰고 있던 검은 앞치마를 단숨에 벗어 계산대 안쪽 동료에게 넘긴다. 태훈은 창밖 비스듬히 보이는 정류장 전광판에 막차가 2분 뒤 도착한다는 붉은 숫자가 뜨는 것을 보고, 뚜껑을 덮어도 가방에 넣을 수 없는 펄펄 끓는 수프 컵을 제 양손으로 감싸 쥐며 정류장까지 함께 뛰자고 출입문을 밀어젖힌다.

늦가을 밤공기가 얼굴을 때리는 인도 위로 두 사람은 나란히 달린다. 수빈은 가슴에 샌드위치 봉투와 무거운 책가방을 꽉 끌어안고, 태훈은 찰랑거리는 뜨거운 국물이 넘치지 않도록 손목을 세운 채 보폭을 맞춘다. 그러나 정류장에 닿기도 전에 헤드라이트 불빛과 함께 환승 막차가 매섭게 미끄러져 들어와 앞문을 열고, 승객 두 명을 태우자마자 닫힘 부저를 울린다. 버스를 타면 막차를 놓쳐 택시비를 쓰지 않아도 되지만 그와 나눌 말은 영영 끊기고, 버스를 보내면 당장 내일 점심을 굶어야 하는 찰나, 수빈은 버스 계단 대신 태훈의 뻗은 손 앞자리에 우뚝 멈춰 선다. 닫힌 버스 문이 덜컹거리며 매연을 뿜고 떠나가 버리자, 태훈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손에 쥐고 있던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종이컵과 플라스틱 스푼을 수빈의 손바닥에 조심스레 쥐여준다. 막차가 사라진 텅 빈 도로의 가로등 불빛 아래, 태훈은 늘 샌드위치 레시피 뒤에 숨겨 두었던 질문의 형식을 깨고 수빈의 감색 바지 끝과 땀 맺힌 이마를 똑바로 바라보며 묻는다. 매일 아침 8시 반, 이곳 매장 문을 열 때 들르면 어떤 빵을 구워 두면 되겠느냐고. 숟가락으로 따뜻한 수프를 한 홑 떠 넣은 수빈은 다음 날 빈털터리가 될 통장 잔고 따위는 잊은 채, 하루 중 가장 환하고 단단한 목소리로 내일 아침의 빵과 치즈, 그리고 소스의 이름을 하나씩 고르기 시작한다.


세계관 · World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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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정

대학가와 오래된 아파트 단지 사이, 컴퓨터 학원 건물 1층에 있는 서브웨이 매장. 밤 9시 20분이면 위층에서는 수강생들이 내려오고, 매장에서는 마지막 저녁 손님들이 포장 봉투를 받아 간다. 오수빈에게는 수업과 귀가 사이에 앉을 수 있는 유일한 자리다.

출입문에서 주문대까지는 여섯 걸음. 재료 진열대를 따라 이동하면 계산대 끝에서 창가 좌석과 마주친다. 좁은 통로 옆의 가벼운 금속 의자 세 개는 등받이 모서리가 일렬로 돌출되어 있어, 가방에 늘어진 이어폰 줄이 걸리기 쉽다. 의자가 끌리는 소리는 천장 음악보다 크다.

창밖 비스듬한 방향으로 버스 정류장 전광판이 보인다. 앉아서는 가로수에 가려지고, 쟁반을 들고 일어나야 도착 시간이 온전히 읽힌다. 수빈은 늘 먹고 나서 일어났지만, 오늘은 수프가 식기도 전에 그 숫자를 보게 된다.

시대

현재의 늦가을, 평일 저녁. 바깥에서는 후드 집업의 지퍼를 목까지 올려야 하고, 안에서는 따뜻한 빵 냄새 때문에 금방 옷깃을 느슨하게 한다.

대학의 저녁 실습 수업이 다시 시작되는 주다. 강태훈은 복학 일정에 맞춰 다음 날부터 오전 근무로 옮긴다. 매장 영업시간도, 수빈의 학원 시간도 그대로다. 매일 만나게 해 주던 두 사람의 시간표에서 태훈의 근무 칸 하나만 움직였다.

규칙

- 재료와 추가 메뉴는 손님이 결정하고 결제해야 하므로, 태훈이 주문을 미리 준비했더라도 수프를 추가해 대화를 늘릴 권한은 수빈에게 있다.

- 이 매장 직원은 근무 중 계산대 안에서 응대하며, 밖으로 동행하려면 동료에게 자리를 넘기고 앞치마를 벗어야 한다. 태훈이 정류장까지 가겠다는 말은 실제 퇴근 행동으로 확인된다.

- 수빈의 집까지 환승이 이어지는 마지막 버스를 놓치면 택시비가 필요하므로, 대화를 더 하는 데 드는 비용은 다음 날 식비에서 빠진다.

- 뜨거운 수프는 뚜껑을 닫아도 곧바로 가방에 넣을 수 없다. 버스를 향해 서두르려면 두 사람 중 한 명이 컵을 들고, 다른 한 명이 샌드위치와 가방을 맡아야 한다.

기술과 철학

수빈의 휴대전화 계산기는 주문 전에 켜진다. 샌드위치 값과 교통비를 빼는 데 익숙한 손가락이 오늘은 수프 가격 앞에서 멈춘다. 적립 앱은 방문 횟수를 세어 주지만, 그동안 두 사람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 남기지 않는다.

버스 전광판은 매장 안에서도 읽을 수 있지만 도착 시각을 협상해 주지는 않는다. 휴대전화로 노선을 다시 검색할 수는 있어도, 끊긴 환승을 되살릴 수는 없다.

태훈은 단골의 주문을 기억하는 것과 단골에게 사적인 답을 요구하는 것을 구분한다. 그래서 그동안 허니오트를 꺼내 놓고도 “빵은요?”라고 물었다. 수빈에게는 그 반복이 번거로운 확인이 아니라 눈을 들 기회였다. 오늘 미리 완성된 샌드위치는 친절하게 대화를 없애 버린다. 수빈이 새로 주문한 수프가 데워지는 동안에만, 두 사람은 다음 질문을 직접 골라야 한다.

시각적 묘사

짙은 초록색 띠와 노란 메뉴판 아래로 따뜻한 백색 조명이 내려온다. 유리 진열대에는 손자국을 닦은 둥근 자국이 남아 있고, 토스터가 열릴 때마다 은색 작업대가 잠깐 환해진다. 창가 유리는 실내를 더 선명하게 비춘다. 수빈은 버스 시간을 보려다 수프를 든 태훈의 반사된 얼굴부터 발견한다.

허니오트 표면의 부스러기, 접힌 포장지에 밴 작은 기름 자국, 회색 후드의 보풀과 검은 앞치마의 바랜 접힘이 가까운 화면을 채운다. 창밖은 푸른 가로등빛인데 컵 위의 김은 실내 조명에 노랗게 보인다.

이어폰 줄에 걸린 의자들이 비뚤게 밀려나도 매장은 위협적으로 변하지 않는다. 고무 발이 바닥을 끄는 소리 뒤로 냉장고 모터가 계속 웅웅거리고, 태훈이 잘못 꽂은 국자는 작은 종이컵 위로 터무니없이 높게 솟아 있다.

해당 세계관의 테마 음악
Lyria
트랙 01 (세계관 테마 음악)

장소 · Locations

장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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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 학원 귀가 계단

닳은 돌계단이 회백색 벽 사이로 좁게 꺾이고, 천장 형광등 아래 매끈한 손잡이에는 아래층을 향해 긴 흰 반사광이 이어진다. 밤 9시 20분이면 내려오는 수강생들의 발소리가 층 사이에서 겹쳐 울리고, 계단 한가운데 얕게 팬 디딤면을 책가방 그림자가 잇따라 덮는다. 마지막 꺾임의 벽에는 투명 테이프 네 귀퉁이만 남은 네모난 자국이 있고, 그 아래 잠깐 멈춘 회색 후드 소매 위로 휴대전화 계산기의 숫자가 작게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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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브웨이 저녁 주문대

주문대의 짙은 초록색 띠와 노란 메뉴판 아래, 따뜻한 백색광이 허니오트 부스러기와 흰 포장지의 바삭한 접힌 귀를 비춘다. 유리 진열대 끝에는 포장된 샌드위치와 수프 컵 하나를 놓으면 꽉 차는 쟁반이 있고, 컵에 잘못 꽂힌 국자가 메뉴판 아래까지 우뚝 솟아 있다. 좁은 통로로 비뚤게 끌려 나온 금속 의자 세 개의 고무 발이 바닥을 긁고, 주문대 안팎에서 터진 웃음이 천장 음악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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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학생의 저녁 실습실

넓은 실습실의 옅은 베이지색 작업대마다 균일한 조명이 내려앉고, 앞쪽 칠판에는 저녁 실습 시간표가 붙어 있다. 단단한 상판 위에 펼친 교재들은 마른 종이 모서리를 드러내며, 한 권의 눌린 책등에는 서로 다른 두 학기의 연도가 나란히 적혀 있다. 준비하느라 당겨 놓은 의자들 사이로 한 자리만 반듯하게 들어가 있고, 등받이 너머 작업대에는 새 진도표가 아직 접힌 채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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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프 들고 달리는 인도

도로변 인도에는 푸른 회색 보도블록이 길게 깔리고, 성긴 가로등 아래 뿌리에 밀려 솟은 이음매 하나가 가느다란 그림자를 만든다. 찬바람 속에서 나란한 운동화 마찰음과 급한 숨이 이어지다가, 수프 컵을 든 쪽의 발소리가 그 턱 앞에서 반 박자 짧아진다. 샌드위치 봉투와 책가방을 가슴에 안은 수빈 옆으로 태훈이 손목을 곧게 세운 채 보폭을 줄이고, 컵 뚜껑 틈의 흰 김이 두 사람 뒤로 납작하게 흩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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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차가 떠난 정류장

정류장의 붉은 전광판 아래, 차가운 표지 기둥에는 버스 문이 서는 자리를 향해 손바닥만큼 벗겨진 도장이 드러나 있다. 문 닫힘 부저 뒤로 엔진음이 잦아들고, 건너편 차로의 흰 전조등도 멀어지면 탁 트인 승차 구역에는 가로등 아래 두 사람의 그림자만 길게 남는다. 기둥 곁에서 건네받은 종이컵 위로 김이 피어오르고, 컵을 감싼 손 바로 아래에서 아직 쓰지 않은 플라스틱 숟가락이 붉은 전광판 빛을 받는다.

로케이션 6

실제 로케이션 추천

전주영화종합촬영소 실내 스튜디오

•주소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 완산구 원상림길 125-14

•추천 이유

야간 버스 정류장을 세트로 구현해 붉은 전광판 빛과 두 사람의 긴 그림자를 정밀하게 조절하기에 적합합니다. 실제 도로의 교통과 소음에 구애받지 않고 종이컵의 김과 기둥의 벗겨진 도장을 세밀하게 촬영할 수 있습니다.

•현장 답사 시 고려점


장면 · Scenes

장면별 이야기

챕터 01

장면 01· 늦가을 평일 밤 9시 20분

남겨 둔 저녁값

남겨 둔 저녁값
장소컴퓨터 학원 계단 마지막 꺾임에서 1층 서브웨이 출입문까지
시간늦가을 평일 밤 9시 20분
사건오수빈은 학원 계단에서 휴대전화 계산기로 교통비와 샌드위치값을 빼고, 남은 금액을 확인한다.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은 뒤 서브웨이 문을 밀고 들어간다. 강태훈이 인사를 건네자 지퍼를 내리던 손을 멈추고 대답한 다음, 주문대 쪽으로 발을 옮긴다.
영향오수빈이 남겨 둔 저녁값은 늘 먹던 샌드위치 한 개에 맞춰져 있다. 계산을 마친 손이 옷깃으로 옮겨가고, 계단에서 화면을 내려다보던 시선은 강태훈에게 향한다. 아직 주문은 시작되지 않았고, 오수빈은 익숙한 재료 이름을 말할 차례를 기다린다.

오수빈은 컴퓨터 학원 계단 마지막 꺾임에서 걸음을 멈추고, 회색 후드 소매 밖으로 휴대전화를 꺼냈다. 밤 9시 20분이 찍힌 화면 아래 계산기를 열어 교통비와 샌드위치값을 차례로 뺐다. 남은 숫자에 엄지를 잠깐 얹었다가 화면을 끄고, 책가방을 어깨 위로 추켜올렸다.

1층으로 내려온 오수빈은 서브웨이 출입문을 밀고 따뜻한 빵 냄새 속으로 들어섰다. 여섯 걸음 앞 주문대 안에서 강태훈이 고개를 들었다. “안녕하세요, 오늘도 수업 끝나셨어요?” 지퍼를 내리다 턱 아래에서 손이 걸린 오수빈은 손잡이를 다시 잡으며 “네, 오늘은 좀 길었어요”라고 대답했다.

강태훈은 고개를 끄덕이고 작업대 쪽으로 손을 내렸다. 오수빈은 지퍼를 가슴께까지 내린 뒤 휴대전화가 든 주머니에서 손을 빼고, 진열대를 향해 걸어갔다. 노란 메뉴판을 올려다보며 입술로만 ‘허니오트’를 한 번 연습한 다음, 마지막 한 걸음을 좁혀 강태훈 앞에 섰다.

장면 02· 늦가을 평일 밤 9시 20분 직후

대답할 틈 없는 포장지

대답할 틈 없는 포장지
장소서브웨이 저녁 주문대, 유리 진열대 앞
시간늦가을 평일 밤 9시 20분 직후
사건강태훈은 오수빈이 주문하기 전에 평소 재료로 만든 에그마요를 포장 봉투에 넣어 내민다. 오수빈은 주문을 기억한다는 말에 웃으며 봉투 끝을 잡지만, 강태훈이 복학 때문에 내일부터 오전 근무로 옮긴다고 말하자 손을 멈춘다. 이어서 나올 설명까지 들은 뒤, 봉투의 접힌 귀를 눌러 펴며 짧게 대답한다.
영향주문을 기억해 준 친절 때문에 오수빈이 준비한 재료 이름 세 개는 말할 차례를 잃는다. 근무 변경 소식은 다음 저녁에도 찾아오면 된다는 선택까지 막는다. 샌드위치는 이미 완성됐지만, 오수빈은 봉투를 가져가지도 다음 말을 꺼내지도 못한 채 주문대 앞에 남는다.

강태훈은 작업대에서 흰 종이로 싼 샌드위치를 들어 봉투에 넣고, 유리 진열대 너머 오수빈 쪽으로 내밀었다. “허니오트에 아메리칸 치즈, 랜치 넣은 에그마요 맞죠? 오늘은 미리 해 뒀어요.” 벌려 놓았던 입을 다문 오수빈은 봉투 끝을 잡으며 웃었다. “제 거 다 외우셨어요?”

“네, 매일 같은 시간에 오시니까요.” 강태훈은 봉투 밖으로 나온 포장지 끝을 안으로 밀어 넣다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저 내일부터 오전 근무예요.” 오수빈의 손가락이 봉투 끝에서 멎자, 강태훈은 앞치마에 붙은 빵 부스러기를 떼며 덧붙였다. “복학해서요, 저녁에 실습 수업을 들어야 해서 바꿨어요.”

“아, 내일부터요.” 오수빈은 웃던 입술을 붙이고 봉투의 접힌 귀를 엄지로 눌렀다. 강태훈이 봉투를 조금 더 밀어 주자, 오수빈은 그것을 가져오는 대신 납작해진 귀를 다시 세웠다.

장면 03· 늦가을 평일 밤 9시 20분을 조금 넘긴 때

처음 고르는 수프

처음 고르는 수프
장소서브웨이 저녁 주문대 끝 계산대
시간늦가을 평일 밤 9시 20분을 조금 넘긴 때
사건오수빈은 계산대 끝으로 옮겨 샌드위치값을 결제한다. 강태훈이 봉투를 건네려 하자 양송이 수프 가격과 휴대전화 계산기를 번갈아 보고 그를 붙잡는다. 계산기 화면을 끈 뒤 수프를 추가 결제하고, 강태훈이 빈 컵을 꺼내 돌아서는 동안 봉투를 내려놓고 계산대 가장자리에 두 손을 모은다.
영향샌드위치를 받아 떠나면 끝날 저녁에 오수빈이 직접 추가 주문을 넣는다. 다음 날 식비는 줄지만, 강태훈은 봉투를 건네던 손을 거두고 수프를 준비한다. 재료 이름을 대답하는 대신 먼저 말을 꺼낸 오수빈에게, 아직 다음 말이 정해지지 않은 짧은 시간이 생긴다.

오수빈은 봉투 끝을 놓고 계산대 끝으로 옮겨 휴대전화를 결제 단말기에 댔다. 결제음이 나자 강태훈이 봉투 밑을 받쳐 들어 건넸지만, 오수빈은 휴대전화를 쥔 채 노란 메뉴판으로 고개를 들었다. “잠깐만요, 저 하나 더요.”

강태훈은 내밀던 봉투를 계산대 위에 내려놓고 “어떤 걸로 드릴까요?”라고 물었다. 오수빈은 양송이 수프 가격을 확인하고 계산기를 다시 켜 남아 있던 숫자에서 그 값을 뺐다. 메뉴판과 화면을 한 번씩 더 본 뒤, 엄지로 화면을 껐다. “양송이 수프 주세요.”

“처음 드시는 거죠?” 강태훈이 계산대 화면에 추가 메뉴를 눌렀다. “네, 오늘은 먹고 가려고요.” 오수빈은 휴대전화를 다시 단말기에 댄 뒤 주머니 깊이 넣었다. 강태훈이 빈 수프 컵을 꺼내 보온통 쪽으로 돌아서자, 오수빈은 봉투를 쟁반에 내려놓고 계산대 가장자리에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챕터 02

장면 04· 늦가을 평일 밤 9시 20분을 조금 넘긴 시각

국자는 얼마예요

국자는 얼마예요
장소서브웨이 계산대 끝과 금속 의자 세 개가 놓인 통로
시간늦가을 평일 밤 9시 20분을 조금 넘긴 시각
사건오수빈은 수프를 데우는 강태훈에게 말을 붙이려다 뒤로 물러서고, 가방 지퍼에 걸린 이어폰 줄로 의자 세 개를 끌어낸다. 의자를 돌려놓는 사이 강태훈은 웃음을 참다가 빈 종이컵에 국자를 꽂는다. 오수빈이 국자의 추가 요금을 묻자 강태훈은 소리 내어 웃는다.
영향추가 주문으로 마련한 대화 시간이 의자를 수습하는 시간으로 바뀐다. 그러나 강태훈도 실수하면서 오수빈만 당황하던 상황이 뒤집힌다. 오수빈은 재료 이름 대신 농담을 건네고, 두 사람은 계산대 양쪽에서 처음으로 함께 웃는다.

오수빈은 계산대 가장자리에서 손을 떼고, 보온통 앞에서 수프를 데우는 강태훈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저, 실습은……” 하고 말을 꺼내자 강태훈이 국자를 든 채 돌아봤고, 오수빈은 가방을 고쳐 메며 반걸음 물러났다. 지퍼에 늘어진 이어폰 줄이 첫 의자의 등받이에 팽팽히 걸리더니, 맞붙어 있던 금속 의자 세 개가 통로로 딸려 나오며 바닥을 요란하게 긁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걸렸어요.” 오수빈은 손님들이 고개를 든 쪽으로 허리를 숙이고, 가방을 내려 이어폰 줄부터 풀었다. 첫 의자를 밀어 넣고 두 번째 의자의 방향을 돌리는 동안, 강태훈은 입술을 붙인 채 빈 종이컵을 작업대에 놓았다. 마지막 의자를 줄 맞춰 놓은 오수빈이 고개를 들자, 강태훈의 손에서 놓인 국자가 종이컵 안에 꽂혀 있었다.

오수빈은 계산대로 돌아와 컵 위로 길게 솟은 손잡이를 가리켰다. “그 국자는 추가 요금 없죠?” 강태훈은 국자를 붙잡으려다 손을 멈추고 소리 내어 웃었고, 오수빈도 계산대에 손을 짚으며 웃었다. “이건 제가 더 이상하네요.” 강태훈은 빈 컵이 따라 들리지 않게 다른 손으로 눌러 잡았다.

장면 05· 늦가을 평일 밤 9시 20분을 조금 넘긴 때, 막차 도착 2분 전

앞치마 밖의 두 사람

앞치마 밖의 두 사람
장소서브웨이 계산대 끝에서 출입문까지
시간늦가을 평일 밤 9시 20분을 조금 넘긴 때, 막차 도착 2분 전
사건강태훈이 국자를 빼고 수프를 담자, 쟁반을 들어 몸을 세운 오수빈이 창밖 전광판에서 막차 도착까지 2분이라는 표시를 발견한다. 서둘러 포장하려는 오수빈에게 강태훈은 정류장까지 동행하겠다고 말한다. 동료에게 자리를 넘기고 앞치마를 벗은 강태훈이 뜨거운 수프를 맡고, 오수빈은 샌드위치와 책가방을 끌어안은 채 그가 열어 준 문을 지난다.
영향웃으며 늘린 주문 시간이 막차를 잡기 위해 서둘러야 하는 시간으로 바뀐다. 강태훈은 계산대 밖으로 나와 오수빈의 짐을 나눠 든다. 두 사람은 수프를 쏟지 않으면서 정류장까지 가야 한다.

강태훈은 종이컵을 눌러 잡고 국자를 빼낸 뒤, 보온통에서 수프를 떠 계산대 끝 쟁반에 내려놓았다. 오수빈은 책가방을 어깨에 걸치고 쟁반을 들어 몸을 세우다가, 가로수 너머 전광판 쪽으로 턱을 들었다. “저 버스, 2분 남았어요.”

“뚜껑 닫아 드릴게요.” 강태훈이 컵 가장자리를 차례로 누르는 동안 오수빈은 쟁반을 내려놓고 샌드위치 봉투를 집어 들었다. 가방 입구로 컵을 가져가려던 손이 멈추자, 강태훈이 컵 밑을 받쳐 가져갔다. “뜨거워요, 이건 제가 들게요, 정류장까지 같이 가요.”

강태훈은 계산대 안쪽 동료에게 “저 퇴근할게요, 여기 부탁해요”라고 말하고 검은 앞치마를 벗어 건넸다. 오수빈이 “같이 가셔도 돼요?”라고 묻자, 계산대 옆으로 나온 강태훈은 “네, 이제 끝났어요”라며 수프 컵을 한 손에서 다른 손으로 옮겨 잡았다. 오수빈은 쟁반을 계산대 안쪽으로 밀어 놓고 샌드위치 봉투와 책가방을 가슴에 붙였다. 강태훈이 빈손으로 출입문을 밀어 잡자, 오수빈은 그 팔 아래를 지나 찬바람이 부는 인도로 먼저 발을 내디뎠다.

장면 06· 늦가을 평일 밤, 막차 도착까지 2분도 남지 않은 때

반 박자 짧아진 발소리

반 박자 짧아진 발소리
장소서브웨이 밖 인도에서 버스 정류장 직전까지
시간늦가을 평일 밤, 막차 도착까지 2분도 남지 않은 때
사건오수빈과 강태훈은 샌드위치와 수프를 나눠 들고 정류장으로 달린다. 솟은 보도블록 앞에서 강태훈이 컵을 바로잡느라 속도를 늦추자 오수빈도 보폭을 줄인다. 그사이 정류장에 들어선 막차가 승객 두 명을 태우고, 두 사람이 다다르기 전에 문 닫힘 부저를 울린다.
영향오수빈은 먼저 달려가는 대신 강태훈과 나란히 움직인다. 그러나 맞춘 보폭 때문에 막차에 오를 여유가 줄어든다. 문 닫힘 부저가 울리면서, 두 사람이 함께 달려 대화와 귀가를 모두 지키려던 시도는 당장 방향을 골라야 하는 순간에 닿는다.

오수빈은 샌드위치 봉투와 책가방을 가슴에 붙이고 인도를 달렸고, 출입문을 놓은 강태훈이 곧 옆으로 따라붙었다. “가방, 제가 멜까요?”라는 말에 오수빈은 팔꿈치로 흘러내리는 끈을 밀어 올리며 “수프나 잘 부탁드려요”라고 대답했다. 강태훈은 컵을 받친 손에 다른 손까지 포개고 오수빈과 발을 맞췄다.

가로수 뿌리에 들린 보도블록 앞에서 강태훈의 발소리가 반 박자 짧아졌다. 기울던 컵을 바로 세우는 동안 오수빈도 두 걸음을 작게 디디며 그의 팔꿈치 바깥으로 자리를 비켜 주었다. “먼저 가세요.” 강태훈이 턱으로 정류장을 가리키자, 오수빈은 “저기까지만 같이요”라며 다시 달렸다.

막차가 두 사람을 지나 정류장에 멈췄고, 기다리던 승객 두 명이 차례로 앞문 계단을 올랐다. 오수빈은 봉투를 가방 위로 끌어올려 한 손을 빼냈지만, 손을 들기도 전에 문 닫힘 부저가 울렸다. 강태훈이 수프를 몸 쪽으로 당기며 버스 앞문을 향해 몸을 틀자, 오수빈의 다음 발이 그의 운동화보다 반 걸음 앞으로 나갔다.

챕터 03

장면 07· 늦가을 평일 밤, 막차 문 닫힘 부저가 울리는 순간

계단 아닌 쪽으로

계단 아닌 쪽으로
장소버스 정류장 앞문 승차 구역
시간늦가을 평일 밤, 막차 문 닫힘 부저가 울리는 순간
사건오수빈은 버스 계단으로 향하던 발을 틀어 강태훈 앞에 멈춘다. 강태훈이 아직 탈 수 있다며 버스를 가리키지만, 오수빈은 내일 점심값을 택시비로 써야 한다는 말을 꺼내면서도 비켜서지 않는다. 강태훈이 수프를 든 몸을 오수빈 쪽으로 되돌리는 사이 막차가 출발한다.
영향오수빈은 막차를 잡으려던 동행을 자기 선택으로 끝내고 강태훈 곁에 남는다. 귀가 비용은 늘었지만, 아직 다음 만남을 청하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강태훈도 버스 쪽으로 재촉하던 자세를 풀면서 두 사람은 처음으로 서둘러 헤어질 이유가 사라진 자리에 마주 선다.

오수빈은 반 걸음 앞서 내디딘 발을 옆으로 틀어, 정류장 앞문 승차 구역에서 강태훈 앞을 막아 섰다. 샌드위치 봉투를 가슴에 붙인 채 나머지 발까지 모으자, 강태훈이 수프 컵을 끌어안고 빈손으로 버스를 가리켰다. “아직 탈 수 있어요.”

“택시 타면 내일 점심값인데.” 오수빈은 주머니 입구에 댄 손을 떼고 흘러내린 가방 끈을 어깨 위로 당겼다. 강태훈이 “그럼 빨리……” 하며 옆으로 비켜 주려 하자, 오수빈은 그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저, 여기 있을래요.”

강태훈은 버스 쪽으로 향했던 어깨를 돌려 오수빈과 마주하고, 가리키던 손을 내려 컵 밑에 받쳤다. 닫힌 앞문이 두 사람 곁을 지나가자 오수빈은 봉투를 조금 내려 그 너머로 멀어지는 버스 번호를 보았다. 강태훈은 더 이상 버스를 가리키지 않고, 수프 컵이 닿지 않을 만큼만 오수빈 쪽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장면 08· 늦가을 평일 밤, 막차의 엔진음이 멀어진 직후

국자 없이 한 숟갈

국자 없이 한 숟갈
장소막차가 떠난 정류장, 도장이 벗겨진 기둥 곁
시간늦가을 평일 밤, 막차의 엔진음이 멀어진 직후
사건강태훈은 오수빈에게 수프 컵과 숟가락을 건넨다. 한 숟갈을 먹은 오수빈은 이번에는 국자가 없다며 농담을 건네고, 강태훈은 웃으며 받아친다. 웃음이 잦아들자 오수빈은 다음 말을 꺼내려다 멈추고 컵 가장자리로 시선을 내린다.
영향두 사람은 음식을 건네고 농담을 주고받으며 달리느라 끊겼던 대화를 되찾는다. 그러나 주문 없이도 웃을 수 있게 된 것과 다음 만남을 청하는 일 사이에는 아직 틈이 남는다. 오수빈의 짧게 끊긴 말 앞에서 강태훈도 자리를 떠나지 않는다.

강태훈은 도장이 벗겨진 정류장 기둥 곁으로 비켜서며, 샌드위치 봉투를 가방과 옆구리 사이에 끼운 오수빈의 손에 수프 컵을 받쳐 주었다. “뜨거우니까 여기 잡으세요.” 컵 아래쪽으로 손가락을 옮긴 오수빈에게 그는 주머니에서 꺼낸 플라스틱 숟가락도 건넸다. “고맙습니다.” 오수빈은 뚜껑 한쪽을 열어 컵 옆에 붙들고, 한 숟갈을 떠 입김으로 식혀 먹었다.

“이번에는 국자가 없네요.” 숟가락으로 컵 안을 한번 저어 보이자 강태훈이 고개를 숙이며 웃었다. “확인했어요, 놓고 왔어요.”

오수빈도 웃으며 숟가락을 들어 보였다가, 강태훈이 고개를 들자 컵 안으로 도로 내려놓았다. “저, 내일은…….” 말끝을 멈춘 오수빈은 컵 가장자리만 내려다보며 들뜬 뚜껑을 엄지로 눌렀고, 강태훈은 주머니에 넣으려던 손을 빼 그 뚜껑을 대신 받아 들었다.

장면 09· 늦가을 평일 밤, 수프의 김이 옅어질 무렵

아침 여덟 시 반

아침 여덟 시 반
장소막차가 떠난 정류장, 기둥 옆 벤치
시간늦가을 평일 밤, 수프의 김이 옅어질 무렵
사건강태훈은 컵을 내려다보는 오수빈에게 몸을 낮춰 눈을 맞추고, 내일 아침 여덟 시 반에 오면 어떤 빵을 준비해 둘지 묻는다. 오수빈은 벤치에 앉아 샌드위치 봉투를 무릎에 내려놓는다. 주문을 미리 완성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한 뒤 허니오트와 아메리칸 치즈를 고르고, 소스를 묻는 강태훈을 보며 웃는다.
영향강태훈이 먼저 시간을 지정하면서 다음 만남이 오수빈 혼자 바라던 일이 아니게 된다. 오수빈은 귀가 비용을 다시 계산해야 하지만 아침에 찾아오겠다는 대답을 건넨다. 이야기는 두 사람이 함께 완성할 주문 하나를 남기고 끝난다.

강태훈은 정류장 기둥 곁에서 무릎을 조금 굽혀, 김이 옅어진 컵을 내려다보던 오수빈과 눈을 맞췄다. 받아 든 수프 뚜껑을 가장자리만 잡고 옆으로 옮기며 그가 물었다. “내일 아침 여덟 시 반에 오시면, 무슨 빵 준비해 둘까요?”

오수빈은 기둥 옆 벤치에 앉아 옆구리에 끼웠던 샌드위치 봉투를 무릎에 내려놓았다. “내일은 미리 만들지 마세요, 제가 말할게요.” 강태훈이 벤치 옆으로 자리를 옮기며 “그럼 빵은요?”라고 묻자, 오수빈은 컵을 무릎 위 봉투 옆에 받치고 “허니오트요”라고 또박또박 대답했다.

“치즈는요?”라는 물음에 “아메리칸 치즈요”라고 답한 오수빈은 주머니 밖으로 나온 휴대전화를 다시 밀어 넣었다. 강태훈은 손에 든 뚜껑을 내려다보다가 입꼬리를 올렸다. “소스는요?” 오수빈은 숟가락을 컵 가장자리에 걸쳐 놓고, 대답하기 전에 고개를 들어 강태훈을 보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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