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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ytalk 오리지널 · 장면 15 · 챕터 5

삼국상사

국내 1위 주류 대기업 동명주조의 창립 기념식에서, 부러진 만년필 반쪽을 든 청년이 회장을 아버지라고 부르자 회장은 아내가 앉던 앞줄 의자에 청년의 어머니를 앉힌다. 친정의 양조장을 팔아 창업 자금을 댔던 부회장은 축하주를 내려놓고 두 아들과 함께 회사를 떠난다. 큰아들 비류는 바다 건너 수입에 승부를 걸겠다며 항구 도시 미추홀에 회사를 차리고, 작은아들 온조는 일본 사케·위스키 수입사 위례무역을 세워 내륙 유통부터 다진다. 경주 식당주들이 함께 세운 신생 주류 유통조합은 위례무역의 술을 팔겠다며 손을 내밀지만, 동명주조는 형제의 거래처를 하나씩 끊어간다.

결국 비류의 회사가 무너진 날, 온조는 형에게 위례무역의 자리를 내밀어야 할지 결정해야 한다.

  • 등장인물 8
  • 장소 4
  • 장면 15
  • 줄거리 2,685자
삼국상사

인물 · Characters

등장인물들

소서노

여성

친정 양조장을 팔아 동명주조의 창업 자금을 댄 뒤 부회장 자리를 지켜온 공동창업자

프로필

소서노는 동명주조에서 두 아들의 지분을 지키고, 온조의 위례무역이 대기업의 유통망에 기대지 않는 회사로 서도록 투자금을 건넨다. 대신 경영권을 요구하면 온조의 첫 독립을 꺾을 수 있고, 요구를 거두면 주몽이 회사의 현금과 가족의 몫을 계속 한데 묶게 된다. 온조는 어머니의 돈을 받는 순간 이사회 의석까지 내놓으라는 조건을 마주한다.

주몽이 보낸 꽃은 버리지 않고 매일 물을 갈지만, 꽃병은 그가 앉던 자리에서 가장 먼 창가에 둔다. 회의에서 지분율을 읊을 때는 숫자 하나도 틀리지 않으면서, 온조가 투자 계약서에 서명하기 전에는 펜을 그의 손에서 빼앗지 못한다.

배경

친정 양조장을 팔아 창업 자금을 마련한 뒤, 소서노는 동명주조의 장부와 거래처를 함께 키우며 부회장 자리를 지켰다. 창립 기념식에서 주몽이 서정희를 앞줄에 앉히고 유리를 후계자로 세우자, 소서노는 회사 밖으로 나가서야 자신의 이름이 붙은 지분이 두 아들의 몫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걸 확인한다. 위례무역의 첫 주문이 들어온 날, 소서노는 온조의 사무실에 투자 조건을 들고 찾아간다.

묘사

소서노는 값비싼 옷을 과시하지 않는다. 몸에 맞춘 짙은 남색 재킷과 매끈한 실크 블라우스, 오래 신어 굽이 낮아진 가죽 구두가 창업자의 실무 감각을 드러낸다. 숫자를 말할 때는 등을 곧게 세우지만, 아들의 계약서 앞에서는 손을 무릎에 모은 채 펜을 쥔 손을 바라본다. 주몽이 보낸 꽃은 버리지 않고 매일 물을 갈면서도, 꽃병은 늘 창가의 가장 먼 자리에 둔다.

주몽

남성

동명주조를 국내 1위로 키웠지만 가족의 지분과 회사의 현금을 구분하지 못하는 회장

프로필

동명주조의 이름과 지배권을 자기 손으로 지키려 하지만, 소서노가 돌아오면 회장직을 내놓겠다는 말은 끝내 하지 못한다. 유리를 후계자로 세워 적통을 증명하는 대가로 비류를 공장 안으로 끌어들이고 온조를 경쟁사 대표로 밀어낸다. 소서노가 위례무역에 투자한 돈의 흐름을 이사회에 공개하면, 주몽은 가족을 붙잡으려 쓴 회사 자금까지 설명해야 한다.

회의 때는 임원들의 말을 끊지 않고 듣다가, 결론을 내리면 자기 서명부터 문서 맨 위에 적는다. 소서노가 보낸 꽃병은 치우지 않으면서도 그녀의 빈 의자를 유리에게 내주고, 비류가 공장에 나타난 날에는 야간조의 임금표를 직접 챙겨 본다.

배경

동명주조가 첫 공장을 세울 때 주몽은 소서노의 친정 양조장을 판 돈과 자기 이름을 한 장의 계약서에 묶었다. 회사가 커진 뒤에도 가족의 몫과 회사의 돈을 따로 기록하지 않아, 소서노가 떠나자 이사회는 창업자의 약속과 회장의 권한 중 무엇이 우선인지 묻기 시작했다. 유리를 후계자로 세우면 그 질문을 잠재울 수 있다고 믿었지만, 비류는 공장에 들어왔고 온조는 위례무역의 첫 주문을 받았다.

묘사

주몽은 예순한 살의 나이에 맞게 관자놀이가 희고 눈가에 깊은 주름이 잡혔지만, 동명주조의 회장실에서 몸을 작게 보이지 않으려 등을 곧게 세운다. 짙은 남색 맞춤 정장과 광택을 죽인 검은 구두는 흐트러짐이 없고, 임원들의 말을 끝까지 들은 뒤 문서 맨 위에 먼저 서명하는 손만큼 단단해 보인다. 소서노가 보낸 꽃병을 치우지 않은 채 빈 의자를 유리에게 내준 그의 손에는, 오래된 금테 만년필이 늘 들려 있다.

유리

남성

어머니의 존재를 모른 채 자라 동명주조의 전략기획실에서 후계 구도를 짜는 회장 아들

프로필

유리는 아버지 주몽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이사회 표결권으로 바꿔 소서노의 지분을 밀어내고, 자신을 회사의 공식 후계자로 만들려 한다. 하지만 소서노가 앉던 앞줄 자리를 차지한 뒤에도 어머니가 남긴 편지를 공개하지 못해, 출생 기록을 내놓는 순간 주몽의 인정까지 잃을 수 있다. 유리가 편지의 존재를 감추는 동안 소서노는 그를 단순한 후계 경쟁자가 아니라 자신의 두 아들이 돌아갈 자리를 흔드는 사람으로 맞게 된다.

회의에서는 지분율과 의결 정족수를 빠르게 계산하지만, 자기 출생을 묻는 질문에는 만년필의 부러진 끝을 엄지로 문지르며 답을 늦춘다. 주몽이 자신을 아들이라 부르면 웃음부터 보이고, 소서노가 그 호칭을 듣고도 축하주를 내려놓는 순간에는 잔을 끝내 들지 못한다.

배경

유리는 어머니 서정희가 동명주조의 회계 장부를 정리하던 시절, 주몽에게서 받은 부러진 만년필 반쪽을 성인이 될 때까지 간직했다. 서정희는 유리에게 출생 서류를 건네며 회사의 공식 기록에 자기 이름을 남기라고 했지만, 유리는 그 서류를 숨긴 채 전략기획실에서 소서노의 지분을 포함한 승계안을 짰다. 창립 기념식에서 주몽이 서정희를 앞줄에 앉히자, 유리는 자신이 차지한 자리가 어머니의 기록을 대신할 수 있는지 처음으로 의심한다.

묘사

유리는 서른넷의 나이보다 조금 더 단정하고 피곤해 보인다. 동명주조 전략기획실에서 입는 짙은 남색 맞춤 정장과 빳빳한 흰 셔츠는 흐트러짐이 없지만, 회의실 문턱을 넘을 때마다 시선이 먼저 빈 앞줄 의자를 확인한다. 표결 수를 셈할 때는 미소를 잃지 않다가도 출생을 묻는 순간 입을 다물고, 엄지로 부러진 만년필의 금속 끝을 문지른다.

비류

남성

37 · 남성 · 소서노의 장남. 어머니·동생과 함께 동명주조를 떠나 항구 도시 미추홀에서 해외 직수입 회사를 차린다. 바다에 모든 걸 거는 승부사지만 성급하다.

프로필

비류는 미추홀의 호텔과 선박 급식업체에 동명주조가 아직 다루지 않는 유럽 증류주를 먼저 공급해, 집안의 새 회사가 단순한 온조의 보조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려 한다. 독점 계약을 따내려면 소서노가 마련한 공동 창고의 보증금을 담보로 걸어야 하고, 비류의 서명은 어머니가 두 아들에게 나눠 준 몫의 안전까지 흔든다. 소서노는 그에게 투자 결정을 미루는 대신 첫 항해의 견적과 손실 가능성을 이사회에 직접 설명하게 된다.

비류는 회의가 길어지면 얼음이 녹기 전에 잔을 비우고, 자기 제안이 거절되면 반박보다 납기표부터 다시 펼친다. 거래처 앞에서는 큰 물량을 장담하지만, 소서노가 담보 서류를 읽는 동안에는 의자 끝에 앉아 손톱 밑의 잉크를 긁는다.

배경

동명주조에서 비류는 신제품 시음회보다 반품된 술통과 납품 지연을 처리하는 일을 오래 맡았다. 주몽이 공장에 출근하는 비류를 붙잡아 두려 하자, 비류는 그 일을 모른 척하는 온조에게도 등을 돌리지 못한 채 미추홀의 첫 사무실을 계약했다.

묘사

비류는 서른일곱의 나이보다 조금 지쳐 보이는 얼굴에, 소매를 걷어 올린 셔츠와 바닷바람에 구겨진 남색 재킷을 입는다. 손목에는 늘 방수 시계를 차고, 대화 중에도 휴대전화의 선박 입항 일정을 확인한다. 숫자를 말할 때는 동생보다 빠르고 크게 말하지만, 손실을 말할 때는 시선을 창밖 바다로 돌린다. 어머니를 닮은 고집이 그를 가장 먼저 바다로 이끌고, 가장 먼저 무너뜨린다.

온조

남성

소서노의 막내아들로, 일본 사케와 위스키를 들여오는 위례무역을 세운 신생 사업가

프로필

온조는 동명주조의 유통망에 기대지 않고 위례무역을 키워, 어머니의 이름이 아니라 자기 판단으로 주문을 따내고 싶다. 소서노의 투자금을 받으면 첫 창고를 열 수 있지만, 경영권까지 내주면 회사의 이름과 거래 조건을 어머니 뜻에 맞춰야 한다. 비류가 동명주조 공장에 드나드는 사실을 알고도 덮어두는 온조의 침묵은 강태식에게 거래처의 신뢰를 얻는 대신, 형을 언젠가 직접 추궁할 빚으로 남는다.

거래처 앞에서는 병목과 납기일을 먼저 확인하고, 술을 권받아도 계약서에 서명하기 전에는 잔을 들지 않는다. 소서노가 투자 조건을 말할 때마다 온조는 수첩에 숫자를 적지만, 어머니가 돌아서면 그 페이지를 뜯지 못한 채 접어 주머니에 넣는다.

배경

온조는 동명주조의 창고에서 반품된 수입주 병을 분류하며, 대기업의 유통망이 한 번 문을 닫으면 작은 거래처의 매출도 함께 끊기는 모습을 봤다. 그래서 위례무역의 첫 창고는 번듯한 사무실 대신 냉장 설비가 낡은 임대 창고로 정했고, 첫 주문을 받은 날에도 비류가 공장에 있다는 말을 듣고 형에게 전화하지 않았다.

묘사

온조는 낡은 냉장 창고와 거래처를 오갈 때도 짙은 남색 재킷과 다림질 자국이 남은 셔츠를 입지만, 소매 끝에는 종이 상자에 쓸린 잔보풀이 일어 있다. 상대가 잔을 권해도 계약서의 병목 수량과 납기부터 확인하는 곧은 자세에는 조급함이 없고, 어머니의 투자 조건을 적은 수첩은 접힌 페이지 그대로 안주머니에 남아 있다. 기억에 남는 것은 숫자를 적은 손으로 수첩 모서리를 꾹 누르는 버릇이다.

서정희

여성

유리의 어머니로, 동명주조의 창립 기념식에 초대받아 회장 부부의 앞줄에 앉은 전직 회계 담당자

프로필

서정희는 동명주조의 공식 연혁에 자신의 이름과 창업 초기 회계 장부를 함께 남기려 한다. 주몽이 마련한 앞줄 자리를 받아들인 대가로 소서노의 자리를 빼앗은 사람처럼 보이지만, 유리가 소서노의 지분을 노리자 출생 서류를 내밀어 표결을 늦추고 아들의 승리도 미룬다.

서정희는 회의에서 숫자를 말할 때마다 손톱으로 장부 모서리를 두 번 두드리고, 누가 자신을 ‘회장님의 옛사람’이라 부르면 정정하지 않은 채 그 사람의 이름을 회의록에 적는다. 주몽이 보낸 꽃은 받아 두면서도 유리의 서류에는 서명하지 않는다. 아들이 자신을 위해 싸우길 바라면서, 그 싸움이 소서노의 몫을 삼키는 순간에는 먼저 손을 뻗어 막는다.

배경

동명주조가 아직 작은 양조장이던 시절, 서정희는 거래처 외상과 급여를 맞추며 주몽의 사업을 버티게 했지만 회사의 공식 기록에는 회계 담당자로만 남았다. 창립 기념식 초청장을 받은 뒤 오래된 장부와 유리의 출생 서류를 다시 꺼내 놓았고, 그 서류는 유리가 후계 구도를 밀어붙일 때마다 주몽의 인정과 회사의 기록을 따로 묻게 만든다.

묘사

55세의 서정희는 오래된 양조장 회계실에서 익힌 단정함을 고수한다. 몸에 꼭 맞는 먹빛 재킷과 매끈한 아이보리 블라우스, 손때 묻은 가죽 장부철은 화려한 창립 기념식에서도 그녀를 임원보다 기록을 지키는 사람처럼 보이게 한다. 숫자를 말할 때마다 장부 모서리를 손톱으로 두 번 두드리며, 입가에는 초대받은 자리와 빼앗긴 자리를 모두 기억하는 얇은 미소가 걸려 있다.

강태식

남성

경주 식당주들이 출자해 만든 주류 유통조합을 이끄는 전직 동명주조 지역 영업소장

프로필

강태식은 조합원들이 대기업 판촉 조건에 끌려다니지 않도록 위례무역과 장기 계약을 맺고, 온조가 첫 거래처를 넘어 경주 유통망의 선택권까지 얻도록 돕고 싶다. 그러나 조합원들의 보증금이 묶일 위기에 놓이자 동명주조에 비상 물량을 요청하고, 그 사실을 온조에게 숨기지 못해 새 계약의 첫 신뢰를 흔든다.

의원 앞에서는 계약 철회를 요구받자 조합원들 이름을 하나씩 불러가며 거부하지만, 창고에선 빈 병과 보증금 장부를 맞춰 본 뒤 동명주조에 전화한다. 통화가 끝나면 온조에게 먼저 사실을 털어놓고도, 그가 대답하기 전까지 잔을 채우지 않는다.

배경

전직 동명주조 지역 영업소장으로 일할 때 강태식은 식당주들이 판촉 물량을 받는 대신 창고 한 칸을 비우고, 팔리지 않은 술값까지 떠안는 장면을 여러 번 봤다. 경주 식당주들이 출자해 조합을 만들자 그는 동명주조의 거래 관행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으로 대표를 맡았지만, 그 지식은 위례무역과의 독립 계약을 밀어붙일 때마다 비상 물량을 구할 옛 회사의 전화번호로 그를 되돌린다.

묘사

강태식은 쉰을 앞둔 얼굴에 영업소장 시절의 단정함을 남겨 두었지만, 낡은 창고 점퍼 소매에는 빈 병을 옮기며 생긴 희끗한 마찰 자국이 번져 있다. 의원 앞에서는 조합원들의 이름을 또렷이 부르며 등을 곧게 세우고, 장부 앞에서는 입술을 다문 채 보증금 숫자를 다시 맞춘다. 그의 왼손 엄지에는 병뚜껑에 베인 가느다란 흉터가 있고, 동명주조에 비상 물량을 부탁한 뒤에는 그 엄지로 잔의 가장자리만 문지르며 온조의 대답을 기다린다.

오명환

남성

동명주조 후원 상인회와 지역 유통조합 사이에서 재선을 준비하는 지역구 의원

프로필

오명환은 재선에 필요한 상인들의 표와 동명주조의 후원금을 모두 붙들기 위해, 소서노가 위례무역과 맺은 계약을 철회하게 만들려 한다. 하지만 상인회 축사 원고에는 위례무역을 지역 기업으로 키우겠다는 문장을 남겨 두고, 그 문장을 읽는 순간 소서노가 공개적으로 계약을 지키겠다고 답하도록 몰아간다. 오명환이 끼어들면 소서노는 협상 상대가 아니라 두 편의 약속을 동시에 증명해야 하는 사람이 된다.

회의장에서는 상대가 말을 마칠 때까지 물컵을 들지 않고, 결론이 나면 양쪽의 요구를 서로 다른 색 펜으로 회의록 여백에 적는다. 악수를 청할 때는 손을 오래 잡지만, 사진기 앞에 서면 늘 상인회와 조합 사이의 반걸음 뒤를 고른다.

배경

오명환은 지역 상인회가 동명주조의 판촉 지원으로 버티던 시절부터 행사 축사와 납품 민원을 함께 맡아 왔다. 강태식이 유통조합을 세운 뒤에는 조합의 계약서에도 의원실 도장을 요구받았고, 오명환은 그 도장을 찍지 않은 채 다음 선거의 후원 약속부터 받아냈다.

묘사

오명환은 63세의 나이에 맞게 눈가와 입가에 깊은 주름이 잡혔지만, 짙은 남색 정장과 빳빳한 흰 셔츠는 흐트러짐 없이 다려 입는다. 상대가 말을 마칠 때까지 물컵에 손대지 않고, 결론을 내린 뒤에는 회의록 여백에 서로 다른 색 펜으로 양쪽의 요구를 나란히 적는다. 악수할 때 유난히 오래 붙드는 손이 그의 서명처럼 남는다.


줄거리 · Synopsis

줄거리

소서노는 동명주조의 창업 기념식에서 남편 주몽이 자신이 앉던 앞줄에 서정희를 앉히고, 부러진 만년필 반쪽을 든 유리를 아들이라 소개하는 모습을 지켜본다. 그녀는 축하주를 내려놓고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식장을 나간다. 주몽은 뒤따라오지 않는다. 대신 다음 날 소서노의 집으로 꽃을 보내고, 동명주조 영업사원들은 위례무역과 거래하는 도매상에서 빈 병을 거둬 간다. 온조는 첫 주문을 지키려 창고에서 직접 병을 세고, 비류는 미추홀 항구의 독점 수입 물량을 잡겠다며 공동 창고 보증금에 형제들의 몫까지 걸겠다고 나선다. 소서노는 두 아들의 손에서 서류를 거둬들여, 위례무역에 투자하되 온조의 경영권과 비류의 담보 책임을 계약서에 따로 적는다. 온조는 어머니의 돈으로 창고 문을 열면서도, 자기 회사의 첫 결정이 어머니의 서명에 매였다는 사실을 수첩에 적는다.

경주에서 강태식은 조합원들과 함께 위례무역의 첫 계약을 체결한다. 오명환은 동명주조가 후원하는 상인회 행사장으로 소서노를 불러, 공개적으로 계약을 확인해 달라고 요구한다. 소서노가 망설이는 사이 주몽이 직접 행사장 입구에 나타나 비류와 온조에게 집으로 돌아오라고 말한다. 비류는 대답 대신 미추홀 수입 계약서를 아버지 앞에 내민다. 주몽은 그 서류를 보고도 아들들을 데려가려 한다. 소서노는 조합원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위례무역 계약을 유지하겠다고 말하고, 강태식은 그녀의 말을 회의록에 남긴다. 그날 밤 동명주조는 경주 조합의 냉장고 지원과 빈 병 회수 일정을 늦춘다. 조합원들은 창고에 쌓인 빈 병을 손으로 옮기고, 강태식은 비상 물량을 부탁하려 동명주조에 전화한다. 그는 통화가 끝난 뒤 온조에게 먼저 사실을 털어놓는다. 온조는 거래를 끊지 않지만, 조합의 외상 한도를 줄여 위례무역이 대신 떠안을 돈을 확보한다. 첫 계약은 살아남고, 강태식은 조합원들에게 자신의 서명 때문에 생긴 손실을 설명해야 한다.

미추홀에서는 배가 늦어져 비류가 걸어 둔 보증금이 매일 줄어든다. 비류는 항만 창고에서 수입 술 상자를 직접 옮기며 통관 물량을 쪼개 먼저 경주로 보낼 방법을 찾는다. 온조는 허가된 도매망과 세금 신고가 확인되지 않은 물량은 받지 않겠다고 막는다. 두 형제는 녹슨 셔터 앞에서 서로의 팔을 붙들고 밀치며 다툰다. 비류는 온조가 어머니의 투자금을 방패 삼아 자기 몫만 지키려 한다고 쏘아붙이고, 온조는 형이 형제의 돈을 담보로 걸면서도 손실을 자기 결단이라고 부른다고 맞선다. 결국 보관료와 지연 위약금이 보증금을 모두 삼키고, 비류의 회사는 문을 닫는다. 위례무역은 예정된 납품량을 채우지 못해 경주 식당들의 주문 일부를 놓치지만, 강태식은 남은 술을 조합원들과 나눠 한 병씩 팔아 현금을 만든다. 텅 빈 미추홀 창고에서 비류는 항로를 독점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온조는 형에게 위례무역의 자리를 내밀지 망설이다가, 다음 물량의 납기와 손실을 온라인 장부에 함께 공개하자고 제안한다. 온조는 그 장부를 열어 형의 담보액까지 조합원들이 보게 한다.

서울 본사 지하 기록실에서 서정희는 창업 초기의 원본 장부를 꺼내 주몽과 유리를 불러 세운다. 장부에는 회사 돈으로 처리한 가족의 집과 생활비가 적혀 있고, 주몽의 서명도 남아 있다. 유리는 그 사본을 이사회에 내면 소서노의 지분을 밀어내는 표결을 늦출 수 있지만, 동시에 아버지의 후계자 자격과 자신이 주장해 온 적통의 근거도 흔들린다는 걸 안다. 그는 서정희의 손에서 장부를 빼앗으려 하고, 서정희는 장부를 가슴에 끌어안은 채 놓지 않는다. 주몽은 둘 사이에 끼어 장부를 가져가려다 손을 멈춘다. 서정희는 유리의 출생 서류와 장부를 함께 이사회에 내놓는다. 유리는 자기 출생을 증명하는 자료가 소서노의 지분을 공격하는 무기가 되지 않도록, 후계자 표결을 미루는 데 동의한다. 주몽은 장부 공개로 법적 책임과 직원들의 불신을 감당하게 되고, 공장 직원들은 밀린 야간조 임금표를 그의 책상 위에 올려놓는다. 하지만 공개된 장부는 동명주조의 과거를 끝내지 않는다. 주몽은 가족의 지출을 회사 돈으로 처리한 책임을 인정하고, 그 돈을 갚기 위해 자신의 지분 일부를 처분하겠다고 발표한다.

연말 이사회 전날, 오명환은 상인회와 경주 조합을 한자리에 불러 소서노가 계약을 철회하면 동명주조의 지원을 복구하겠다고 제안한다. 소서노는 거절하지만, 위례무역의 현금은 항구 보관료와 미지급 납품 대금에 묶여 있다. 이사회가 열리는 본사 회의실에서 유리는 후계자 표결을 막는 대신 동명주조의 임금 지급을 먼저 하라고 요구한다. 주몽은 가족을 붙잡으려고 마련해 둔 돈을 직원 임금으로 돌리겠다고 밝히고, 이사회는 그 대가로 그의 지분 처분과 회장 권한 축소를 의결한다. 오명환은 회의실 밖에서 소서노에게 다시 악수를 청하지만, 이번에는 그녀가 손을 내밀지 않는다. 소서노는 투자 계약서의 경영권 조항을 온조 앞에서 확인하고, 온조는 그 조항을 받아들이되 위례무역의 다음 투자 결정은 자기 이름으로 하겠다고 답한다. 비류는 문 닫은 회사의 남은 수입 물량과 직원들을 위례무역에 넘기고, 강태식은 조합원들의 빈 병 회수 비용을 계약서에 새로 넣는다. 동명주조 공장에서는 임금이 지급되고, 금색 삼족오 간판 아래 주몽은 회장실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는 자기 이름으로 처음 세운 작은 공장 간판 앞에 혼자 서서, 문을 여는 직원들에게 먼저 고개를 숙인다. 소서노는 그곳을 지나 위례무역 창고로 향한다. 창고 안에서 온조는 첫 주문 장부의 마지막 줄에 자기 서명을 남기고, 소서노는 그 옆에 투자자란만 채운다.


세계관 · World

세계

설정

대한민국의 주류 산업을 장악한 동명주조와, 그 유통망의 가장자리에서 생존을 모색하는 경주·미추홀의 거래처들이 무대다. 동명주조 본사는 서울의 오래된 공장 부지에 세워진 유리와 검은 화강암 건물이다. 지하에는 창업 당시의 장부와 시제품을 보관하는 기록실이 있고, 꼭대기 층 회장실에서는 새벽마다 트럭들이 정문을 빠져나가는 모습을 내려다볼 수 있다.

경주의 독립 유통조합 사무실은 식당가 뒤편의 낮은 창고 건물에 있다. 비가 오면 골판지 상자에서 눅눅한 종이 냄새가 나고, 장부 위로 빈 병이 굴러간다. 미추홀 항구의 공동 창고는 바닷바람에 녹슨 셔터와 컨테이너 사이에 끼어 있다. 수입 술은 이곳에서 통관을 기다리고, 납기가 하루만 밀려도 보증금과 거래처의 신뢰가 함께 흔들린다. 세 장소는 서로 다른 권력을 품는다. 서울은 자본과 기록, 경주는 판매와 표, 미추홀은 물량과 시간을 쥔다.온조의 위례무역은 수도권 외곽의 내륙 물류 거점에 자리 잡고, 일본 사케·위스키를 그곳에서 전국으로 풀어낸다.

시대

현재의 대한민국, 2020년대 후반. 사케와 위스키를 찾는 소비자는 늘었지만, 국내 주류 유통은 여전히 대기업의 냉장 창고와 빈 병 회수망에 크게 의존한다. 창립 기념식에서 유리가 나타난 뒤 몇 달 동안, 동명주조의 후계 구도와 위례무역의 첫 계약이 동시에 시험대에 오른다.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시기라 항구에는 안개가 자주 끼고, 경주 식당가의 창문에는 밤마다 결로가 맺힌다. 연말 이사회까지 남은 시간은 짧고, 그 전에 위례무역은 독립된 거래처와 안정적인 현금 흐름을 증명해야 한다.

규칙

- 동명주조는 대리점에 냉장고, 간판, 빈 병 회수와 외상 한도를 묶어 제공한다. 대리점이 경쟁사 술을 들이면 지원을 줄이거나 회수 일정을 늦출 수 있어, 강태식은 계약서에 서명한 뒤에도 조합원들의 생계를 담보로 결정을 지켜야 한다.

- 주류 거래는 허가된 도매망과 세금 신고를 거쳐야 한다. 위례무역은 대기업의 등록 유통망을 빌리지 않는 한 모든 납품과 세금 처리를 직접 책임져야 하며, 작은 실수도 거래 정지와 보증금 손실로 이어진다.

- 수입 술의 재고는 통관일과 항구 창고의 보관료에 묶인다. 비류가 독점 물량을 잡으려면 공동 창고 보증금을 걸어야 하고, 배가 늦어질수록 형제 모두가 지키려는 자금이 줄어든다.

- 동명주조의 이사회에서는 지분과 의결권이 서류로 확인된 몫만 표결에 반영된다. 가족이라는 말은 표를 대신하지 않으므로, 소서노는 투자금을 건네는 순간 온조의 경영권 조건까지 문서로 남겨야 한다.

- 창업 초기의 회사 자금은 지금도 가족의 사적 지출과 뒤섞인 흔적이 장부에 남아 있다. 그 내역을 공개하면 주몽은 법적 책임과 직원들의 신뢰를 함께 감당해야 하고, 감추면 유리에게 후계자 자격을 내세울 근거를 내준다.

- 거래처와 창업자 사이의 약속은 행사 사진과 회의록에 남는다. 오명환이 공개 석상에서 소서노에게 계약을 확인시키면, 그녀는 그 자리에서 답해야 한다. 침묵도 철회로 읽히고, 번복은 조합원과 직원들에게 돌아간다.

- 회사의 과거를 증언하는 사람은 장부 원본과 서명된 문서로만 기억을 입증할 수 있다. 서정희가 낡은 회계 장부를 꺼내는 순간, 창업 연혁은 가족의 사적인 기억이 아니라 이사회의 증거가 된다.

기술과 철학

주류 산업의 힘은 술의 맛만이 아니라 냉장 창고, 빈 병 회수, 외상 결제, 행사 후원으로 만들어진다. 대기업은 이 연결망을 편리함으로 제시하고, 그 편리함에 의존한 소매상은 경쟁사의 술을 한 병 들이는 일조차 비용으로 치른다. 위례무역은 수입 일정과 재고를 공유하는 단순한 온라인 장부로 이 구조를 비켜 가려 하지만, 장부에 기록되는 순간 누가 위험을 떠안았는지도 드러난다.

동명주조 안에는 창업자가 가족의 몫을 챙기는 것이 곧 회사를 지키는 일이라는 오래된 믿음이 남아 있다. 소서노는 지분과 서명을 구분해 그 믿음에 제동을 걸고, 주몽은 회사를 가족에게 남기는 일과 직원들에게 임금을 지급하는 일이 같은 돈을 두고 다툰다는 사실을 피할 수 없다. 지역 정치의 후원과 상인회 행사는 거래를 공적으로 보이게 하지만, 사진 속 악수는 계약의 대가를 감추지 못한다. 이 세계에서 술은 잔에 따르기 전에 이미 누군가의 지분, 임금, 보증금으로 계산되어 있다.

시각적 묘사

서울 본사의 색은 먹빛 유리, 검은 화강암, 서류철의 누런 종이다. 낮에는 통유리에 도시가 차갑게 비치고, 밤에는 회의실 조명이 사람의 얼굴만 밝힌 채 바깥을 지운다. 회장실의 금테 만년필과 기념식의 맑은 축하주는 오래된 권력을 반짝이게 하지만, 잔을 내려놓는 소서노의 손에는 그 빛이 닿지 않는다.

경주의 창고는 바랜 청색 셔터와 형광등 아래 놓인 갈색 상자들로 채워져 있다. 병목에 남은 물방울이 장부 위로 떨어지고, 유리병이 바닥을 구를 때마다 짧은 울림이 난다. 미추홀은 짙은 녹색 바다와 산화된 철의 붉은빛이 지배한다. 새벽 안개 속 컨테이너의 번호는 흐려지고, 창고 사무실의 작은 난로 옆에는 배 도착 시간표가 테이프로 붙어 있다. 이 세계를 구분하는 시각적 표식은 병의 목에 묶인 색띠다. 동명주조는 금색 띠, 위례무역은 아직 인쇄비가 없어 손으로 적은 흰 종이띠를 쓴다.색띠에는 각 회사의 문양이 찍혀 있다. 동명주조는 금색 삼족오(세 발 까마귀), 위례무역은 백제 칠지도를 단순화한 문양, 경주 조합은 신라 금관의 出자 장식을 여섯 갈래로 바꾼 문양이다. 동명주조 본사 로비 벽과 임원 배지에도 같은 삼족오가 금색으로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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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 & 음향
미장센이 화려한
분위기가 압도적인
현장감 있는

장소 · Locations

장소들

위례무역의 첫 주문 창고

위례무역의 첫 주문 창고는 낮은 천장 아래 골판지 상자와 마른 나무 팔레트가 줄지어 선 넓은 실내로, 열린 셔터 틈에서 들어온 낮빛이 호박색 전구와 겹쳐 흰 종이띠를 환하게 드러낸다. 온조의 손가락이 병목을 하나씩 짚을 때마다 짧은 소리가 나고, 접힌 장부의 페이지가 넘어가며 그 수량을 받아 적는다. 팔레트 끝에는 일본 사케와 위스키 상자가 주문별로 나뉘어 있고, 손으로 쓴 흰 종이띠마다 위례무역의 칠지도 문양이 작게 찍혀 있다.

미추홀 녹슨 셔터 창고

넓고 낮은 미추홀 항만 창고 안으로 짙은 녹색 바다빛이 반쯤 열린 셔터 아래 길게 번지고, 젖은 콘크리트 바닥에는 컨테이너 번호가 흐릿하게 비친다. 바람이 붉게 녹슨 셔터를 덜컹이며 때릴 때마다 멀리서 선박 경적이 낮게 울리고, 통관을 기다리는 술 상자들이 그 진동에 미세하게 흔들린다. 셔터 안쪽 기둥에는 보증금과 하루치 보관료가 적힌 종이가 테이프로 붙어 있고, 그 아래 녹슨 바닥 고리에 묶인 낡은 계류용 밧줄이 젖은 채 늘어져 있다.

소서노의 햇빛 드는 식탁

낮은 원목 식탁과 넓은 창이 오후의 꿀빛 햇살을 받아, 매끈한 결 위에 길고 따뜻한 사각형을 드리운다. 식탁 한쪽에는 펼쳐 둔 계약서와 식은 찻잔이 놓이고, 소서노가 찻잔을 받침에 내려놓을 때마다 작은 소리가 벽시계 초침 사이에 또렷하게 박힌다. 의자 등받이에 걸린 부드러운 리넨 천은 햇빛에 옅은 금빛을 띠고, 꽃병의 물은 창가에 선 꽃줄기만큼 조용히 흔들린다.

동명주조 창립 기념식 연회장

검은 옻칠 무대와 금빛 삼족오 장식이 연회장 안쪽 벽을 채우고, 원형 샹들리에의 빛이 상아색 식탁보와 잔의 얇은 테두리에 번쩍인다. 현악 사중주의 활이 매끈한 대리석 바닥 위로 길게 울리고, 박수가 그 위에 겹쳐 천장 아래를 가득 메운다. 앞줄 한가운데 비워 둔 의자에는 펼쳐진 검은 장부가 놓여 있고, 그 옆 축하주 잔이 내려앉으며 맑은 소리를 낸다.


장면 · Scenes

장면별 이야기

챕터 01

장면 01·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저녁, 창립 기념식 연설 도중

맨손의 연설

맨손의 연설
장소동명주조 창립 기념식 연회장
시간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저녁, 창립 기념식 연설 도중
사건주몽은 금빛 삼족오가 새겨진 검은 무대 앞에서 잔을 들어 동명주조를 맨손으로 세웠다고 선언한다. 소서노는 상아색 식탁보 위에 축하주 잔을 든 채 그의 연설을 듣고, 비류가 의자를 밀며 일어서려 하자 손목을 눌러 앉힌다. 주몽의 말은 친정 양조장을 팔아 댄 창업 자금과 소서노의 몫을 공식 연혁에서 지운다.
영향소서노는 모욕에 맞서 즉시 연설을 끊는 대신 잔을 든 손을 고정하고, 두 아들이 공개적으로 편을 고르도록 몰리지 않게 비류를 붙든다. 주몽의 이야기가 박수 속에 받아들여지며, 그녀가 자리를 지키는 일이 그 배치를 승인하는 것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축하주를 내려놓을 선택은 다음 장면으로 미뤄지고, 연회장의 앞줄과 가족의 자리가 권력의 무대가 된다.

소서노는 축하주 잔을 든 손을 상아색 식탁보 위에서 멈춘 채, 주몽의 연설이 울리는 검은 무대를 바라봤다. 샹들리에가 잔의 얇은 테두리에 번쩍였고, 현악 사중주의 활 소리는 대리석 바닥을 타고 테이블 다리까지 길게 떨렸다. 주몽이 금빛 삼족오 아래에서 마이크를 가까이 당겼다.

“동명주조는 제 손으로 시작했습니다. 담보도, 공장도, 거래처도 없던 때였습니다. 맨손으로 첫 병을 만들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박수가 퍼지자 앞줄의 잔들이 한꺼번에 빛났다. 소서노의 엄지는 잔 굽을 눌렀다. 잔 안의 축하주가 테이블 조명에 흔들렸지만, 그녀는 들이켜지 않았다.

주몽은 무대의 양옆을 짚으며 창업 초기를 설명했다. 첫 공장의 셔터가 내려오던 밤, 거래처가 끊겼던 겨울, 직원들과 밤새 병을 닦았던 일을 차례로 말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문장마다 소서노가 기억하는 숫자와 날짜가 빠져 있었다. 친정 양조장을 판 돈도, 첫 원료 대금이 모자라 그녀가 건넨 수표도 나오지 않았다.

“그때는 가진 게 없었습니다.” 주몽이 말했다. “믿고 따라온 사람들과 버틴 덕분입니다.”

비류의 의자가 바닥을 긁었다. 소서노는 잔을 든 손을 놓지 않은 채 다른 손으로 아들의 손목을 눌렀다. 비류가 그녀를 내려다봤다.

“어머니.”

“앉아 있어.”

짧은 말에 비류의 팔이 굳었다. 그는 다시 의자에 앉았지만 손은 테이블 아래에서 주먹을 쥐었다. 온조는 접힌 프로그램지를 반듯하게 펴더니, 주몽의 연설이 적힌 면을 손바닥으로 덮었다.

무대 위에서 주몽은 축하객 쪽으로 잔을 들었다. “오늘 이 자리에 함께한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맨손으로 쌓은 것을 다음 세대에 넘기겠습니다.”

박수가 다시 솟았다. 소서노는 잔을 쥔 손가락을 하나씩 풀었다가, 굽을 다시 감쌌다. 잔은 아직 그녀의 손에 있었다. 검은 무대 뒤 금빛 삼족오가 박수에 맞춰 번쩍이는 동안, 그녀의 손목 아래 상아색 식탁보에는 잔 밑바닥의 물방울만 둥글게 번졌다.

장면 02· 창립 기념식 연설 직후, 박수가 잦아들기 시작한 저녁

맞물린 반쪽

맞물린 반쪽
장소동명주조 창립 기념식 연회장, 앞줄과 검은 옻칠 무대 사이
시간창립 기념식 연설 직후, 박수가 잦아들기 시작한 저녁
사건연회장 문이 열리고 유리가 부러진 만년필 반쪽을 든 채 들어온다. 그는 무대 앞까지 걸어가 주몽에게 그 조각을 내민다. 주몽은 안주머니에서 나머지 반쪽을 꺼내 두 조각을 맞물리고, 유리를 자신의 아들이라고 축하객들에게 소개한다. 이어 서정희에게 앞줄 한가운데의 빈 의자를 가리키며 앉으라고 한다. 그 자리는 소서노가 앉아 있던 자리다.
영향주몽은 두 만년필 조각을 맞춰 혈연의 증거처럼 내보이고, 소서노의 창업자 자리를 공개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넘긴다. 유리는 후계 구도에 모습을 드러내고, 서정희는 주몽의 손짓을 받아 소서노의 앞줄 자리에 앉는다. 소서노가 그 자리를 지키면 배치를 받아들인 듯 보이고, 일어서면 비류와 온조까지 사람들 앞에서 선택을 강요받는다.

주몽은 검은 옻칠 무대에서 마이크를 쥔 손을 들어 박수를 가라앉혔다. “동명주조는 제 손으로 시작했습니다. 담보도 공장도 거래처도 없던 때, 맨손으로 첫 병을 만들었습니다.” 금빛 삼족오가 그의 어깨 뒤에서 빛났다. 앞줄에서 소서노는 축하주 잔을 든 손을 고정했다. 그녀의 입술이 가늘게 다물리고, 잔 속 술이 손끝의 떨림에 한 번 흔들렸다.

“친정 양조장을 팔아 마련한 돈은 어디 있습니까?” 비류가 의자를 밀며 일어서려 했다. 소서노는 잔을 든 손을 그대로 둔 채 다른 손으로 그의 손목을 눌렀다. “앉아.” 비류는 턱을 굳게 다물고 다시 의자에 앉았다. 온조는 접힌 프로그램지를 손바닥 아래 감췄다. 무대에서 박수가 번졌고, 소서노는 잔을 놓지 않았다.

박수가 잦아들 때 연회장 문이 열렸다. 유리가 부러진 만년필 반쪽을 들고 들어와 무대 앞에 멈춰 섰다. 주몽은 마이크를 내려놓고 안주머니에서 나머지 반쪽을 꺼냈다. “그걸 아직 갖고 있었구나.” 유리가 손을 내밀자 주몽은 두 조각을 맞물렸다. 금속 끝이 딱 소리를 내며 붙었다. 주몽은 만년필을 들어 축하객들에게 보였다. “내 아들 유리입니다.” 유리는 고개를 숙였지만 만년필을 놓지 않았다.

주몽은 소서노 쪽을 보지 않고 서정희에게 앞줄 한가운데의 빈 의자를 가리켰다. “여기 앉으시죠.” 서정희는 무릎 위 낡은 장부를 두 손으로 붙든 채 잠시 멈췄다가, 주몽이 의자를 빼 주자 앉았다. 의자 다리가 대리석을 긁었다. 소서노 앞의 축하주 잔이 가늘게 울렸다. 비류가 다시 몸을 일으키자 소서노의 손가락이 그의 손목을 감쌌다. 온조는 접은 프로그램지를 주머니에 넣고 어머니를 바라봤다.

소서노는 잔을 식탁보 위에 내려놓았다. 맑은 소리가 박수의 끝을 잘랐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연회장 문으로 향했다. 주몽은 금빛 삼족오 아래 남아 있었고, 서정희는 소서노가 앉던 의자에서 검은 장부를 무릎 위에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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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 동명주조 창립 기념식 연회장 - 밤

박수가 잦아든다. 샹들리에의 빛이 검은 옻칠 무대와 대리석 바닥에 차갑게 번진다. 금빛 삼족오가 무대 뒤에서 빛난다.

연회장 문이 열린다.

유리가 들어선다. 손에는 부러진 만년필 반쪽이 들려 있다. 그는 축하객들 사이를 지나 무대 앞에 멈춘다. 몇몇 임원이 서로 눈길을 주고받는다. 앞줄, 소서노의 손에 든 축하주 잔이 조명 아래 투명하게 빛난다.

주몽은 마이크를 내려놓는다. 안주머니에서 만년필의 나머지 반쪽을 꺼낸다.

**주몽**
(낮게)
그걸 아직 갖고 있었구나.

유리가 손을 내민다. 주몽은 두 조각을 맞춘다.

딱.

금속 끝이 맞물리는 소리가 연회장의 잔향을 가른다. 유리는 펜을 놓지 않는다. 주몽은 함께 쥔 만년필을 들어 축하객들에게 보인다.

**주몽**
내 아들 유리입니다.

유리가 고개를 숙인다. 박수가 다시 일어나지만, 앞줄에서는 몇몇 손만 조심스럽게 움직인다. 소서노의 잔 속 술이 가늘게 흔들린다.

주몽은 소서노 쪽을 보지 않는다. 서정희에게 앞줄 한가운데의 빈 의자를 가리킨다.

**주몽**
여기 앉으시죠.

서정희는 무릎 위 낡은 장부를 두 손으로 붙든 채 멈춘다. 장부의 닳은 모서리가 그녀의 손바닥에 눌린다. 주몽이 의자를 빼 준다.

서정희가 앉는다.

의자 다리가 대리석을 긁는다. 그 소리에 소서노 앞의 축하주 잔이 가늘게 울린다. 금빛 삼족오 아래, 주몽의 손에는 맞물린 만년필이 들려 있다. 앞줄 한가운데에는 서정희와 낡은 장부가 자리한다.

장면 03· 창립 기념식 연설이 끝난 직후, 샹들리에 아래 박수가 다시 번지는 순간

잔이 남긴 소리

잔이 남긴 소리
장소동명주조 창립 기념식 연회장
시간창립 기념식 연설이 끝난 직후, 샹들리에 아래 박수가 다시 번지는 순간
사건비류가 일어서려 하자 소서노는 그의 손목을 붙들어 의자에 다시 앉힌다. 온조가 접은 프로그램지를 주머니에 넣고 소서노를 바라보는 사이, 소서노는 축하주 잔을 상아색 식탁보 위에 내려놓는다. 세 사람은 앞줄을 떠나 연회장 문으로 향하고, 주몽은 금빛 삼족오 아래에 남는다.
영향소서노는 두 아들이 그 자리에서 주몽에게 맞서도록 두지 않고, 자신이 가족의 배치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뜻을 공개적으로 행동으로 남긴다. 잔이 식탁에 닿는 소리는 박수와 현악 사중주를 가르고, 앞줄의 빈자리는 주몽이 감당해야 할 공개적인 결손이 된다. 주몽은 그들을 따라오지 않는다.

비류가 의자를 밀어내며 일어서자 소서노는 축하주 잔을 든 손을 내리고 그의 손목을 붙들었다. 대리석 바닥을 긁던 의자 다리가 멎었고, 상아색 식탁보 위에서 잔 속의 술이 한 번 흔들렸다.

“앉아 있어.” 소서노가 말했다.

“그 자리를 내주고도요?” 비류가 낮게 물었다.

손목 아래에서 비류의 힘이 버텼다. 소서노는 놓지 않았다. 온조가 접은 프로그램지를 주머니에 밀어 넣고, 의자에서 일어나 그녀의 옆에 섰다. 무대 위 주몽은 맞물린 만년필을 쥔 채 축하객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서정희는 앞줄의 의자에 앉아 검은 장부를 무릎에 붙들고 있었다.

“어머니.” 온조가 불렀다. “가시죠.”

소서노는 비류의 손목을 놓았다. 비류는 다시 일어섰지만 이번에는 무대를 향하지 않았다. 세 사람 사이로 의자 하나가 비켜나며 통로가 열렸다. 소서노는 잔을 식탁에 내려놓았다.

맑은 소리가 났다. 박수는 잠깐 늦게 이어졌고, 현악기의 활이 그 틈을 길게 긁었다. 잔 바닥에 맺힌 물방울이 식탁보에 둥근 자국을 남겼다. 소서노는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앞줄을 빠져나갔다.

연회장 문이 닫힐 때까지 주몽은 무대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금빛 삼족오 아래, 소서노의 빈자리와 내려놓은 잔만 남았다.

챕터 02

장면 04· 창립 기념식 다음 날부터 이어지는 초봄의 오전

장부가 묻는 값

장부가 묻는 값
장소소서노의 햇빛 드는 식탁, 경주 조합 창고, 위례무역의 첫 주문 창고
시간창립 기념식 다음 날부터 이어지는 초봄의 오전
사건소서노는 햇빛 드는 식탁에서 온조의 경영권과 비류의 담보 책임을 분리한 투자 계약서에 서명한다. 경주 조합 창고에서 강태식은 보증금과 빈 병 회수 비용을 장부에 맞춰 조합원들에게 위례무역의 첫 계약을 감당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 위례무역 창고에서 온조는 주문서와 납기표를 병 수량에 대조해 부족분을 찾아낸다.
영향소서노의 서명으로 위례무역은 첫 주문에 필요한 자금을 얻지만, 온조의 경영권과 비류의 담보 위험은 문서상으로도 갈라진다. 강태식은 조합원들에게 계약의 비용을 숨기지 않고, 그들이 감당해야 할 보증금과 병 회수 지출을 펼쳐 보인다. 온조가 납품 부족을 확인하면서 첫 계약은 약속만으로 지킬 수 없게 된다.

소서노가 계약서 마지막 장을 눌러 서명하자, 햇빛 드는 식탁 위에서 나무 의자가 짧게 밀렸다. 온조 앞에는 경영권 조항이, 맞은편에는 비류의 담보 책임을 분리한 문서가 놓여 있었다. 소서노는 펜을 내려놓고 두 장을 나란히 밀었다. “네 회사의 결정은 네가 해.” 온조는 서명란을 훑은 뒤 계약서를 접지 않고 수첩 밑에 끼웠다.

같은 오전, 강태식은 경주 조합 창고의 장부를 상자 위에 펼쳐 놓고 보증금 총액과 빈 병 회수 비용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조합원들이 장부 가장자리를 둘러싸자 그는 빈 병 하나를 들어 회수 비용이 적힌 줄 옆에 놓았다. “이 계약을 감당할 수 있습니까? 보증금은 묶이고, 병을 돌려보내는 돈도 우리 몫입니다.” 누군가 장부를 자기 쪽으로 당겼다. 강태식은 손을 놓지 않고 미수금 칸을 열어 보였다. “빠진 비용까지 보고 답해 주십시오.”

위례무역의 첫 주문 창고에서는 온조가 병목을 하나씩 짚으며 주문서 수량을 맞췄다. 낮은 천장 아래 상자들이 팔레트마다 주문별로 놓였고, 열린 셔터의 빛이 호박색 전구와 겹쳐 손으로 쓴 흰 종이띠를 밝혔다. 온조가 마지막 상자의 병을 세자 납기표의 숫자와 수량이 맞지 않았다. 그는 표를 비류 쪽으로 돌렸다. “이 수량으로는 약속한 날에 다 못 보냅니다.” 비류는 답 대신 팔레트 끝의 빈 자리를 손바닥으로 쓸었다.

온조는 납기표에 부족분을 적고, 계약서 옆에 놓인 장부를 펼쳤다. 병목을 세던 손가락이 빈칸에서 멈췄다.

장면 05· 창립 기념식 다음 날, 낮

회의록에 박힌 대답

회의록에 박힌 대답
장소경주 조합이 마련한 상인회 행사장
시간창립 기념식 다음 날, 낮
사건오명환은 강태식의 회의록 옆에 축사 원고를 펼쳐 소서노가 답할 문장을 손가락으로 짚는다. 주몽은 비류와 온조에게 집으로 돌아오라고 요구하고, 비류는 미추홀 수입 계약서를 내밀어 자신의 선택을 밝힌다. 소서노는 조합원들 앞에서 위례무역과의 계약을 유지하겠다고 말하고, 강태식은 그 약속을 회의록에 적는다.
영향오명환이 준비한 행사는 소서노에게 공개적으로 계약을 지키겠다고 선언하도록 압박하는 자리가 된다. 주몽의 귀환 요구에 비류는 계약서로 맞서고, 온조는 어머니가 결정하기 전에 주몽의 손이 회의록 쪽으로 향하는 것을 막는다. 소서노의 대답은 조합원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기록으로 남아, 위례무역과의 거래를 되돌리기 어렵게 만든다.

오명환이 축사 원고를 강태식의 회의록 위에 펼치자, 경주 조합 행사장의 접이식 탁자가 종이 무게에 눌려 삐걱였다. 열린 창문으로 들어온 비 냄새가 젖은 외투와 섞였고, 탁자 끝에는 신라 금관 문양이 찍힌 조합의 잔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 원고의 마지막 문장에는 ‘위례무역과의 계약을 계속한다’는 말이 이미 적혀 있었다.

“이 문장만 확인해 주시면 됩니다.” 오명환이 소서노 쪽으로 펜을 밀었다. “상인들 앞에서 직접 말씀하시고, 회의록에도 남기시죠.”

강태식은 펜을 집어 들지 않았다. 대신 회의록을 반쯤 접어 원고 밑에서 빼냈다. “답을 미리 적어 놓고 확인만 받으실 일은 아닙니다.”

주몽이 탁자 반대편에서 비류와 온조를 불렀다. “이제 그만하고 집으로 돌아와라. 회사 문제는 내가 정리하겠다.”

비류는 재킷 안쪽에서 계약서를 꺼내 주몽 앞으로 밀었다. 종이 모서리가 탁자를 쓸며 지나갔다. 미추홀 항구의 물량과 납기, 보증금이 적힌 서류였다. “제가 잡은 물량입니다. 돌아가서 없던 일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주몽은 계약서를 집어 들지 않고 비류를 바라봤다. 온조가 한 걸음 옮겨 주몽과 회의록 사이를 막았다. “형의 계약을 아버지가 정리할 일은 아닙니다.”

오명환은 원고를 다시 소서노 쪽으로 돌렸다. “그럼 부회장님께서 말씀해 주십시오. 이 계약을 유지하실 겁니까?”

소서노는 탁자 위의 축사 원고를 덮지 않았다. 조합원들이 의자에서 몸을 앞으로 기울였고, 강태식은 회의록을 펴고 펜촉을 종이에 댔다. “위례무역과의 계약은 유지하겠습니다.” 소서노가 말했다. “오늘 여기 계신 분들 앞에서 약속합니다.”

강태식은 그 말을 그대로 받아 적고 날짜를 썼다. 소서노가 회의록 아래에 서명하자, 오명환의 원고는 손도장 없는 축사처럼 탁자 한쪽에 남았다. 강태식은 회의록을 조합원들 쪽으로 돌려놓았다.

장면 06· 상인회 행사장에서 계약 약속을 회의록에 남긴 직후, 비 내리는 저녁

줄어든 외상 한도

줄어든 외상 한도
장소경주 조합 창고
시간상인회 행사장에서 계약 약속을 회의록에 남긴 직후, 비 내리는 저녁
사건동명주조의 빈 병 회수가 늦어지자 강태식과 조합원들은 창고 바닥에 쌓인 병을 손으로 상자에 옮긴다. 강태식은 온조에게 동명주조에 비상 물량을 요청한 사실과 그로 인해 생긴 비용을 장부째 내민다. 온조는 거래를 끊지 않겠다고 말하면서 위례무역의 외상 한도를 낮춰 조합이 당장 마련할 현금을 확보한다.
영향강태식은 숨겨 둔 요청을 먼저 털어놓지만, 온조가 정한 새 한도는 조합원들이 감당할 몫을 더 키운다. 온조는 첫 계약을 살리는 대신 거래처에 위험을 나눠 넘기고, 강태식은 그 선택을 조합원들 앞에서 설명해야 한다. 계약은 이어지지만, 둘 사이의 신뢰에는 새로 계산해야 할 금액이 생긴다.

강태식이 빈 병 상자를 들어 창고 안쪽으로 밀자, 유리병들이 서로 부딪혀 낮은 천장 아래 짧게 울렸다. 경주 조합 창고의 바랜 청색 셔터는 반쯤 열린 채 비를 들였고, 젖은 바닥에는 병 회수 일정이 적힌 종이가 구겨져 붙어 있었다. 조합원들이 병을 한 상자씩 옮기는 동안, 강태식은 장부를 팔레트 위에 펴고 회수 비용 칸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동명주조가 회수를 미뤘습니다. 빈 병이 쌓이니 다음 납품도 막혔어요.” 그가 말했다. “그래서 비상 물량을 요청했습니다. 그 비용은 제가 장부에 넣었습니다.”

온조는 장부를 자기 쪽으로 당겼다. 강태식이 내민 영수증에는 동명주조 물량의 대금과 급송 비용이 나란히 적혀 있었다. 온조는 계산기를 두드린 뒤 외상 한도 변경란을 찾아 펜을 들었다.

“요청한 걸 숨기지 않은 건 잘하셨습니다. 거래는 끊지 않겠습니다.” 온조가 숫자를 적었다. “대신 다음 납품부터 외상 한도를 줄입니다. 줄어든 만큼은 조합에서 먼저 마련해 주세요.”

강태식의 손이 장부 모서리를 붙들었다. “그럼 식당 몇 곳은 현금으로 받아야 합니다.”

“알고 있습니다.”

조합원 하나가 빈 병 상자를 옮기다 멈췄다. 강태식은 고개를 돌려 그쪽을 본 뒤, 다시 장부 위에 손바닥을 얹었다. “그 조건을 조합원들 앞에서 제가 설명하겠습니다. 비상 물량 비용도 감추지 않겠습니다.”

온조는 변경된 한도 옆에 서명했다. 강태식은 장부를 덮지 않고 조합원들 쪽으로 돌렸다. 뒤편에서 병이 든 상자가 팔레트에 놓였고, 강태식은 빈 상자를 다시 들어 젖은 바닥에서 옮겼다.

챕터 03

장면 07· 동명주조가 빈 병 회수와 냉장고 지원을 늦춘 뒤, 비가 그치지 않는 오후

비상 물량의 값

비상 물량의 값
장소경주 조합 창고
시간동명주조가 빈 병 회수와 냉장고 지원을 늦춘 뒤, 비가 그치지 않는 오후
사건강태식은 동명주조에 비상 물량을 요청한 사실을 온조에게 털어놓고, 급송 비용이 찍힌 영수증을 장부 위에 놓는다. 온조는 조합원들의 보증금과 미수금을 하나씩 맞춰 현금 부족분을 계산한다. 강태식이 거래를 끊지 말아 달라고 요구하자, 온조는 거래는 유지하되 외상 한도를 더 낮추고 그만큼의 현금을 조합에서 먼저 마련하라고 통보한다.
영향위례무역은 경주 조합과의 거래를 이어가지만, 부족한 현금은 조합원들의 몫으로 더 많이 넘어간다. 강태식은 새 한도를 받아들이고 조합원들에게 손실을 직접 설명해야 한다. 온조의 서명으로 외상 한도가 줄어든 장부가 공개되며, 계약을 지키는 선택의 비용이 숫자로 남는다.

강태식이 젖은 영수증을 장부 위에 내리치자 빈 병 하나가 굴러 온조의 손등에 부딪혔다. 경주 조합 창고의 바랜 청색 셔터 틈으로 빗물이 스며들고, 형광등 아래 갈색 상자 사이에는 회수되지 못한 병들이 높게 쌓여 있었다. 영수증에는 동명주조 비상 물량의 대금과 급송 비용이 따로 찍혀 있었다.

“동명주조에 물량을 요청했습니다. 회수 일정이 밀리면 우리 창고가 더 막힐 것 같아서요.” 강태식은 영수증을 손끝으로 눌렀다. “숨기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비용도 장부에 넣었습니다.”

온조는 대답 대신 장부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조합원별 보증금 옆에 미수금이 적혀 있었고, 그는 계산기를 두드리며 둘을 번갈아 짚었다. 숫자가 맞지 않을 때마다 강태식이 장부를 돌려 설명했고, 온조는 빈 병 상자를 발로 밀어 통로를 만들었다. 상자 밑에서 물이 번져 나와 장부 모서리를 적셨다.

“거래를 끊지 말아 주십시오.” 강태식이 말했다. “그렇다고 이 비용을 다음 달로 밀어 넣을 수도 없습니다.”

온조는 계산기 화면을 그에게 돌렸다. “거래는 유지하겠습니다. 대신 외상 한도를 더 낮춥니다. 줄어든 만큼은 조합에서 현금으로 마련해야 합니다.”

강태식의 엄지가 장부 가장자리를 눌러 종이가 휘었다. “식당 몇 곳은 주문을 줄여야 합니다.”

“그 숫자도 장부에 적으십시오.”

잠시 뒤 강태식은 한숨 대신 펜을 들었다. 온조가 새 한도를 변경란에 적고 서명하자, 강태식은 장부를 조합원들이 볼 수 있도록 상자 위에 펼쳤다. 구겨진 급송 영수증이 보증금과 미수금 사이에 눌려 있었고, 온조는 굴러온 빈 병을 세워 그 종이 끝을 고정했다.

장면 08· 경주 조합 창고에서 외상 한도를 다시 낮춘 뒤, 배의 도착이 늦어진 항구의 오후

셔터 아래의 계산

셔터 아래의 계산
장소미추홀 항만 창고, 녹슨 셔터 안쪽
시간경주 조합 창고에서 외상 한도를 다시 낮춘 뒤, 배의 도착이 늦어진 항구의 오후
사건온조는 보관료 안내문과 새로 밀린 배 도착 납기표를 나란히 펼쳐 비류에게 독점 물량을 포기하라고 요구한다. 비류는 통관 확인이 끝나지 않은 술 상자를 팔레트에서 내려 경주행 트럭 쪽으로 밀고, 온조는 세금 신고가 안 된 물량은 받지 않겠다며 상자 앞을 막는다. 형제는 젖은 바닥의 녹슨 셔터 앞에서 서로의 팔을 붙들고 밀치며, 비류가 걸어 둔 보증금과 소서노의 투자금이 누구 몫인지 맞선다.
영향온조는 경주 조합의 주문을 지키고 싶어도 불법적인 선출고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선을 몸으로 긋는다. 비류의 독점 계약은 배의 지연과 하루치 보관료 앞에서 더는 버틸 수 없고, 보증금은 빠르게 줄어든다. 두 형제의 다툼은 다음 장면에서 비류의 회사 폐업과 책임 인정으로 이어진다.

온조가 비류의 팔을 붙들어 트럭 쪽으로 향하던 상자를 멈춰 세웠다. 반쯤 열린 미추홀 항만 창고 셔터 아래로 짙은 녹색 바다빛이 젖은 콘크리트에 길게 번졌고, 바람이 붉게 녹슨 철판을 덜컹 때렸다. 기둥에 붙은 보관료 안내문은 습기를 먹어 한쪽 모서리가 들떠 있었다.

“오늘도 배가 안 들어오면 하루치가 더 붙어.” 온조는 납기표 위에 안내문을 눌러 놓았다. “물량을 포기해. 남은 보증금까지 태우기 전에.”

비류는 팔을 비틀어 손아귀를 풀고, 팔레트에 쌓인 상자 하나를 바닥으로 내렸다. 병들이 안에서 부딪혔다. “독점 물량을 지금 놓으면 계약금도, 다음 거래도 끝이야. 일부라도 먼저 보내면 돼.”

그가 상자를 경주행 트럭 쪽으로 밀었다. 온조가 반대편 모서리를 잡아 끌어당겼다. 젖은 종이상자가 두 사람 사이에서 삐걱였고, 밑바닥이 물을 먹어 찢어지기 시작했다.

“통관 확인이 안 됐어. 세금 신고도 끝나지 않았어.” 온조가 손을 놓지 않은 채 말했다. “이걸 받으면 위례무역까지 멈춰.”

“네 회사만 살리면 된다는 거냐?” 비류가 상자에서 손을 떼고 온조의 팔을 잡아 밀었다. “어머니 돈으로 세운 창고에서 내 물량을 가로막으면서?”

온조는 셔터 옆 기둥에 어깨를 부딪혔다. 녹슨 철판이 등 뒤에서 울렸다. 그는 비류의 손목을 밀어냈지만, 비류는 다시 팔을 붙들었다. 팔레트 위의 수입 술 상자들이 선박 경적에 맞춰 가늘게 떨렸다.

“그 돈은 네 보증금이 아니야.” 온조가 말했다. “형제들 몫까지 담보로 걸지 말라고 어머니가 계약서에 적었어.”

비류의 손이 느슨해졌다. 바닥에 내려놓은 상자 하나가 기울며 셔터 안쪽의 젖은 밧줄에 걸렸다. 온조는 그 틈에 상자를 트럭에서 떼어 팔레트 쪽으로 밀어 넣었다. 비류는 보관료 안내문을 떼어 손바닥에 구겼고, 납기표에는 새 도착일 옆으로 또 하루의 비용이 적혔다.

장면 09· 배가 예정일을 넘긴 뒤, 창고 보관료가 마지막 하루씩 더해지는 날

빈 병과 빈 계좌

빈 병과 빈 계좌
장소미추홀 항만 창고와 경주 조합 창고
시간배가 예정일을 넘긴 뒤, 창고 보관료가 마지막 하루씩 더해지는 날
사건경주 조합 창고에서 강태식은 남은 술을 조합원들에게 나눠 주고, 한 병씩 현금으로 팔아 빈 병 회수와 다음 납품에 필요한 돈을 마련한다. 식당들이 주문을 취소하거나 수량을 줄이는 대로 장부에 적는다. 같은 시간, 미추홀 항만 창고에서는 보관료와 지연 위약금이 비류의 보증금을 잠식하고, 비류는 온조 앞에서 폐업 서류에 서명한다. 독점 물량을 끝까지 지키려 한 판단이 회사를 무너뜨렸다고 인정한다.
영향강태식은 조합원들에게 거래를 이어 갈 현금을 마련하지만, 경주 식당들은 약속한 물량을 받지 못해 주문 일부를 놓친다. 비류의 보증금은 보관료와 위약금으로 전부 사라지고, 미추홀의 회사는 문을 닫는다. 온조는 형의 실패를 어머니의 투자금이나 동명주조의 압박만으로 설명할 수 없게 된다. 비류가 자기 판단의 책임을 입 밖에 내면서, 다음 장에서 형제는 남은 물량과 손실을 공개적으로 나눌 수 있는 문턱에 선다.

강태식은 경주 조합 창고의 상자들을 조합원들 쪽으로 밀어 나누고, 형광등 아래서 병 하나씩 현금과 바꿨다. 바랜 청색 셔터 틈으로 찬 바람이 스며들고, 빈 병들이 상자 안에서 부딪힐 때마다 장부 위의 동전이 달그락거렸다. 온조는 팔레트 끝을 붙들어 상자가 기울지 않게 받쳤다.

“한 병씩만 가져가십시오. 오늘 팔린 돈부터 회수 비용으로 넣겠습니다.” 강태식은 술병을 받아 든 조합원에게 잔돈을 건네고, 다른 손으로 장부의 판매 수량을 적었다. “이 식당은 스무 병에서 열두 병으로 줄였습니다. 이쪽은 이번 주 주문을 취소했습니다.”

온조가 장부를 돌려 읽는 동안 강태식은 줄어든 주문 옆에 빈 병 회수 비용을 덧붙였다. 취소된 수량은 지우지 않았다. 그는 마지막 병을 상자에서 꺼내 직접 돈을 받고, 그 지폐를 장부 아래 끼워 두었다.

그때 온조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화면에 미추홀 항만 창고가 잡혔다. 통화 너머로 셔터가 바람에 덜컹이는 소리가 났고, 비류는 짧게 말했다. “보증금이 끝났어. 와서 확인해.”

미추홀에서는 녹슨 셔터 아래로 짙은 녹색 바다빛이 젖은 바닥을 가로질렀다. 온조가 도착했을 때 비류는 기둥에 붙은 보관료 안내문과 정산서를 팔레트 위에 펼쳐 놓고 있었다. 하루치 보관료와 지연 위약금이 줄마다 찍혀 있었고, 맨 아래 잔액 칸은 영으로 닫혀 있었다.

온조가 정산서를 집으려 하자 비류가 손바닥으로 눌렀다. “내가 끝까지 독점을 고집했어. 배가 늦어져도 놓지 않으면 계약을 지킬 수 있다고 봤다.” 비류는 폐업 서류를 그 위에 올렸다. “그 판단으로 회사가 무너졌어.”

“남은 물량은 아직—”

“그것도 내 회사 이름으로는 못 지켜.” 비류는 펜을 들어 서명란을 채웠다. 펜촉이 젖은 종이를 긁었고, 그는 서류를 온조 쪽으로 밀었다. “네가 받을 수 있는 물량이 있는지 확인해. 없는 건 없다고 써.”

온조는 서류를 접지 않고 팔레트 위에 그대로 두었다. 경주에서 강태식이 보낸 사진에는 현금 상자와 줄어든 주문을 적은 장부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온조는 사진을 비류에게 보여 주었다. 비류는 대답하지 않고, 바닥 고리에 묶인 젖은 밧줄을 상자 밑에서 빼냈다. 밧줄 끝이 풀리자 정산서가 드러났고, 보증금 잔액 칸에는 비류의 서명만 남았다.

챕터 04

장면 10· 겨울 끝자락, 폐업 정산이 시작된 직후

빈 창고의 계산

빈 창고의 계산
장소미추홀 녹슨 셔터 창고
시간겨울 끝자락, 폐업 정산이 시작된 직후
사건비류는 폐업 서류에 적힌 상자 수와 팔레트 위에 남은 물량을 번갈아 세며 마지막 재고를 맞춘다. 온조는 남은 술을 위례무역에 합류시켜 팔되, 다음 물량의 납기와 손실을 형과 함께 공개하자고 제안한다. 비류는 대답하지 않고 기둥에 붙은 보증금 안내문을 떼어 접는다.
영향온조의 제안은 비류에게 회사 이름만 내려놓는 것이 아니라 항로 독점과 손실을 함께 공개하라는 요구가 된다. 비류는 즉답 대신 안내문을 접어 주머니에 넣고, 폐업 서류와 남은 물량의 계산을 계속한다. 형제가 함께 일할 가능성은 열리지만, 비류가 감당해야 할 손실은 아직 종이에 남아 있다.

비류가 폐업 서류의 상자 수를 짚는 동안 온조는 팔레트에서 남은 술 상자를 끌어내 바닥에 내려놓았다. 미추홀 녹슨 셔터 아래로 짙은 녹색 바다빛이 젖은 콘크리트를 가로질렀고, 선박 경적이 울릴 때마다 병들이 상자 안에서 서로 부딪쳤다.

“서류에는 마흔여덟 상자야.” 비류가 장부를 팔레트 위에 펴고 말했다. “여기 있는 건 마흔둘. 여섯 상자는 정산에서 빠진 거다.”

온조는 상자마다 붙은 종이띠를 확인하고 숫자를 적었다. “빠진 게 아니라 깨진 수량일 수도 있어. 확인 전에는 팔 수량에 넣지 말자.”

“확인하는 동안 보관료가 붙어.” 비류는 정산서를 손가락으로 눌렀다. “팔 수 있는 걸 먼저 빼야 해.”

온조는 셔터 쪽으로 밀려난 상자 하나를 발로 막았다. “위례무역에 합류해. 남은 물량은 내가 받겠다. 다음 물량은 납기와 손실을 같이 공개하자. 형이 건 보증금도 장부에 올리고.”

비류는 펜을 쥔 손을 멈췄다. “내가 실패한 숫자까지 네 거래처에 보여 주겠다는 거냐?”

“숨기면 다음에도 형 혼자 다 떠안게 돼. 나도 그 물량을 받을 거면 같이 책임져야 해.”

바람이 셔터를 세게 때렸다. 비류는 대답 대신 기둥으로 가서 보증금과 하루치 보관료가 적힌 안내문을 떼었다. 젖은 테이프가 철판에서 길게 늘어났고, 그는 종이를 반으로 접어 폐업 서류 위에 올려놓았다. 온조는 그 옆에 상자 수를 다시 적은 장부를 펼쳤다.

장면 11· 미추홀 항만 창고에서 돌아온 뒤, 같은 날 저녁

숫자를 올리는 손

숫자를 올리는 손
장소위례무역의 첫 주문 창고
시간미추홀 항만 창고에서 돌아온 뒤, 같은 날 저녁
사건온조는 위례무역 창고의 온라인 장부에 비류의 담보액과 미추홀에서 건질 수 있는 물량을 입력해 경주 조합원들에게 공유한다. 비류가 담보액 공개를 막으려 하지만, 온조는 남은 상자 수와 정산서를 나란히 놓고 실제로 배분 가능한 수량만 기록한다. 공개된 숫자를 확인한 비류는 항로 독점권을 포기하고 위례무역과 경주 조합에 나눌 물량을 다시 계산한다.
영향비류의 실패는 감춰야 할 개인의 빚에서 공동으로 감당할 거래 조건으로 바뀐다. 온조는 형의 이름과 담보액을 장부에 남기며, 거래처에 약속한 투명성의 대가를 자기 회사의 책임으로 받아들인다. 형제는 독점의 손실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물량과 위험을 함께 나누기로 한다.

온조가 위례무역 창고의 접이식 책상 위에 노트북을 펼치고 비류의 정산서를 옆에 눌렀다. 낮은 천장 아래 호박빛 전구가 골판지 상자와 마른 팔레트를 비추고, 흰 종이띠의 칠지도 문양이 화면의 푸른 빛과 겹쳤다. 비류는 젖은 항만 작업복 소매로 정산서의 잔액 칸을 가렸다.

“담보액은 빼. 남은 물량만 올리면 돼.”

“조합이 받을 물량을 정하려면 형이 걸었던 돈도 알아야 해.” 온조가 손을 뻗자 비류가 종이를 끌어당겼다. 책상 모서리에 걸린 정산서가 찢어질 듯 팽팽해졌다.

“내 이름까지 팔아야 같이 일할 수 있냐?”

온조는 손을 놓지 않았다. “내가 그 숫자를 감추면, 형 혼자 결정하고 형 혼자 숨긴 일이 돼. 물량을 받는 우리도 그 위험을 나눠야 해.”

비류가 종이를 놓았다. 온조는 정산서의 담보액을 화면에 입력하고, 미추홀에서 확인한 상자 수와 깨진 수량을 구분해 적었다. 입력란마다 손가락으로 숫자를 다시 짚었다. 경주 조합원들에게 공유 버튼을 누르자 화면에 확인 표시가 차례로 떴다.

“이제 내 실패까지 주문서에 붙었네.” 비류가 말했다.

“형이 정한 독점 조건도 같이 붙었어.”

비류는 팔레트의 상자를 주문표 쪽으로 당겨 수량표를 새로 썼다. 독점 출고란에 그은 선을 지우고, 위례무역 몫과 경주 조합 몫을 나눠 적었다. 상자 하나를 경주 칸으로 옮긴 뒤, 그는 남은 수량을 다시 세어 온조에게 숫자를 불러 주었다. 온조가 화면에 그 배분을 입력하자 비류는 정산서 원본을 장부 옆에 펼쳐 두었다.

장면 12· 연말 이사회에 원본 장부와 출생 서류를 제출하기로 한 날, 오후

원본을 품은 팔

원본을 품은 팔
장소서울 본사 지하 기록실
시간연말 이사회에 원본 장부와 출생 서류를 제출하기로 한 날, 오후
사건유리는 출생 서류를 후계 표결에 쓰려면 주몽의 서명이 찍힌 가족 지출 장부도 함께 드러날 수밖에 없다고 서정희를 몰아붙인다. 서정희가 장부와 서류를 내놓지 않자 유리는 장부를 빼앗으려 손을 뻗고, 서정희는 원본을 가슴에 끌어안아 막는다. 주몽은 두 사람 사이로 손을 뻗지만 장부에 찍힌 자기 서명을 보고 손을 거둔다. 서정희는 출생 서류와 원본 장부를 이사회에 제출하겠다고 선언한다.
영향유리는 출생을 증명하는 서류를 후계 싸움의 무기로 쓸 수 있지만, 그 선택이 아버지의 회사 자금 사용 내역까지 공개한다는 사실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주몽의 서명이 남은 원본은 가족의 기억을 회사의 책임 문제로 바꾸고, 서정희는 아들의 승리보다 기록을 지키는 쪽을 택한다. 두 문서는 이제 감춰진 과거가 아니라 이사회가 확인할 증거가 된다.

서정희가 기록실 금속 서랍에서 원본 장부를 꺼내자 유리가 손목을 움켜잡았다. 지하 기록실의 차가운 형광등 아래, 장부의 누런 가장자리가 서정희의 팔에 눌렸고, 옆 서류철에서 유리의 출생 서류가 반쯤 미끄러져 나왔다.

“그 서류를 표결에 쓰면, 이 장부도 같이 나갑니다.” 유리가 서류를 집어 들었다. “아버지 서명이 여기 있어요. 당신이 내 이름을 내놓는 순간 아버지 이름도 함께 내놓는 겁니다.”

“네 이름을 지키겠다고 회사 돈을 감추게 하진 않겠다.” 서정희가 장부를 당겨 가슴에 안았다.

유리는 출생 서류를 장부 위에 겹쳐 놓고 두 문서를 한꺼번에 잡아당겼다. 서정희가 팔꿈치로 서류철을 밀어내며 장부를 더 단단히 끌어안자, 종이 모서리가 그녀의 블라우스를 구겼다. 주몽은 서정희의 어깨 너머로 손을 뻗었다. 장부가 펼쳐지며 오래된 지출 항목과 그 아래 찍힌 그의 서명이 드러났다.

“그건 회사 기록이오.” 주몽의 손이 서명 위에서 멈췄다.

“그래서 내놓는 겁니다.” 서정희는 그의 손을 밀어내지 않았다. 대신 출생 서류를 장부 위에 반듯하게 놓고 두 문서의 모서리를 맞췄다. “이사회에 제출하겠습니다. 둘 다요.”

유리는 서류를 다시 잡지 않았다. 주몽은 손을 거두었고, 서정희는 장부와 출생 서류를 함께 품에 안은 채 기록실 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챕터 05

장면 13· 연말 이사회가 열리기 직전, 원본 장부와 출생 서류가 제출되는 오후

원본의 무게

원본의 무게
장소서울 본사 지하 기록실
시간연말 이사회가 열리기 직전, 원본 장부와 출생 서류가 제출되는 오후
사건서정희가 원본 장부와 유리의 출생 서류를 품에 안고 지하 기록실 문을 나선다. 온조와 소서노, 비류가 그녀와 함께 본사 회의실로 들어가자, 서정희는 두 문서를 이사회 서기 앞에 내려놓고 제출 확인란에 서명한다. 유리는 출생 서류를 후계자 표결의 근거로 내밀면서도, 장부에 적힌 가족 지출과 주몽의 서명을 보고 표결을 미루겠다고 선언한다. 주몽은 장부를 덮으려 손을 뻗지만, 온조가 야간조 임금표를 그의 손앞에 밀어 넣는다. 장부의 서명과 체불 임금의 숫자가 같은 회의록에 기록되며, 승계 다툼은 직원들에게 지급되지 않은 돈의 책임을 묻는 자리로 바뀐다.
영향유리의 출생은 공식 기록으로 제출되지만, 그는 그 기록을 후계자 표결의 무기로 쓰지 않기로 한다. 주몽은 가족의 집과 생활비를 회사 자금으로 처리한 책임을 인정하고, 임금을 먼저 지급하겠다고 약속한다. 온조는 장부가 가족 간 권력 다툼의 방패로만 쓰이지 않도록 임금표를 회의 테이블 한가운데 고정한다. 다음 장면에서 이사회가 그 약속의 대가로 주몽의 지분과 회장 권한을 결정하도록, 책임의 근거가 문서와 숫자로 남는다.

서정희가 원본 장부를 회의실 테이블 위에 내려놓자 누런 종이 가장자리가 검은 화강암을 긁었다. 유리의 출생 서류도 그 옆에 놓였다. 지하 기록실에서 함께 품고 나온 두 문서 위로 형광등이 차갑게 번졌고, 서정희는 이사회 서기 쪽으로 장부를 밀었다.

“원본과 출생 서류입니다. 제출 시각을 적어 주세요.”

서기가 확인란을 펼치자 주몽이 의자를 밀며 일어섰다. “가족 기록은 먼저 검토해야 하오.”

“회사 돈으로 처리한 가족 지출은 회사 기록입니다.” 서정희는 장부 표지를 손바닥으로 눌렀다. “제출을 막으실 수 없습니다.”

주몽의 손이 표지 위로 내려왔다. 소서노가 그 손과 장부 사이에 계약서 한 장을 끼워 넣었다. 서류 모서리가 주몽의 손등에 닿았지만 그녀는 손을 거두지 않았다.

“내 이름을 지우려던 기록도, 이제는 이사회가 읽겠군요.”

온조는 테이블 끝에서 야간조 임금표를 꺼내 장부 옆에 펼쳤다. 붉은 연체 표시가 찍힌 이름과 금액이 줄마다 이어졌다. 비류가 임금표가 말리지 않도록 모서리를 눌렀고, 강태식은 회수 지연 비용이 적힌 조합 장부를 그 옆에 놓았다.

“이 숫자도 같이 회의록에 넣으십시오.” 온조가 말했다. “가족 지출을 심의하는 동안 직원 임금을 또 미루지 못하게요.”

오명환은 준비해 온 회의 자료를 당겨 상인회 지원 복구 제안서를 임금표 위에 얹으려 했다. 소서노가 종이를 들어 그의 손앞에 돌려놓았다.

“그 제안은 여기서 다룰 안건이 아닙니다.”

“지원이 복구되면 조합도 숨통이 트입니다.” 오명환은 회의록을 펼쳐 놓았다. “계약을 철회하실 의사가 있는지만 확인하면 됩니다.”

“없습니다.” 소서노가 서류를 그의 쪽으로 밀었다. “그 답도 그대로 기록하세요.”

서기는 제출 시각을 적고 두 문서의 접수란에 도장을 찍었다.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유리가 출생 서류를 집어 들었다. 그는 자기 이름이 적힌 줄을 한 번 짚고, 장부에 찍힌 주몽의 서명과 나란히 놓았다.

“이 서류로 표결을 밀어붙이면, 이 장부도 함께 심의해야 합니다.” 유리가 종이를 내려놓았다. “후계자 표결을 미루겠습니다.”

주몽이 장부에서 손을 뗐다. “초기에는 집과 생활비를 회사 돈으로 처리했소. 내 서명이 맞소.” 그는 임금표를 자기 앞으로 끌어당겼다. “그 책임을 인정하겠소. 직원 임금을 먼저 지급하겠소.”

강태식이 조합 장부를 닫지 않은 채 물었다. “지급 날짜도 회의록에 적어 주십시오.”

“적으시오.” 주몽은 펜을 들었지만, 서명란 앞에서 잠시 멈췄다.

온조가 임금표를 장부 바로 아래로 밀어 넣었다. 주몽의 서명은 두 문서의 접수 도장 사이에 놓였다.

장면 14· 연말 이사회 당일 오후, 야간조 임금표가 주몽의 책상에 오른 직후

삼족오 아래의 표결

삼족오 아래의 표결
장소동명주조 본사 회의실, 삼족오 문양이 박힌 검은 화강암 벽 아래
시간연말 이사회 당일 오후, 야간조 임금표가 주몽의 책상에 오른 직후
사건온조는 야간조 임금표를 주몽의 책상 한가운데 놓고, 지급을 미루지 못하도록 원본 장부와 나란히 고정한다. 유리는 후계자 표결을 연기하겠다고 선언하고, 주몽은 가족을 붙잡으려 따로 마련한 돈을 직원 임금으로 돌리겠다고 발표한다. 이사회는 지급을 조건으로 주몽의 지분 처분과 회장 권한 축소를 의결한다. 회의실 문 앞에서 오명환은 지원 복구를 내세워 소서노에게 악수를 청하지만, 소서노는 손을 내밀지 않고 제안서를 그의 가슴팍으로 밀어 돌려보낸다.
영향후계자 자리는 비워지고, 주몽의 가족 지출은 임금 체불과 회사의 책임으로 공식 기록된다. 직원 임금은 가족의 지배권보다 먼저 지급되지만, 그 돈을 내놓은 주몽은 지분과 회장 권한을 잃는다. 오명환의 지원 복구 제안은 소서노의 계약 철회로 이어지지 못하고, 위례무역은 대기업의 손을 잡지 않은 채 다음 주문을 감당해야 한다. 온조는 어머니의 투자금으로 시작한 회사를 자기 서명으로 이어 갈 마지막 문턱에 선다.

온조가 야간조 임금표를 주몽의 책상 위로 밀어 넣었다. 검은 화강암 벽의 금빛 삼족오 아래, 붉은 연체 표시가 찍힌 종이 모서리가 원본 장부의 누런 표지를 덮었다. 주몽의 펜촉은 지급 날짜가 비어 있는 칸 위에서 멈췄다.

“임금 지급을 먼저 의결해 주십시오.” 온조가 임금표의 말린 끝을 손바닥으로 눌렀다. “지급 날짜와 액수까지 회의록에 남겨야 합니다.”

오명환이 지원 복구 제안서를 임금표 위에 얹으려 하자 강태식이 조합 장부로 종이의 반을 막았다. “빈 병 회수 비용도 밀려 있습니다. 지원을 되살린다는 말만으로는 창고가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 비용은 별도 협의로 돌리죠.” 오명환은 장부를 밀어내고 소서노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계약만 철회하시면 지원은 다시 시작됩니다. 지금 악수하시고, 오늘 안에 정리합시다.”

소서노는 제안서에 손을 대지 않았다. “거래를 조건으로 만든 지원은 받지 않겠습니다.”

오명환이 손을 내밀었다. 소서노는 악수를 거절하고 제안서를 그의 가슴 쪽으로 밀었다. 종이가 재킷 단추에 걸렸다가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비류가 구두 끝으로 종이를 밟아 문 쪽으로 더 밀어냈다.

이사회 의장이 유리에게 표결 의사를 확인했다. 유리는 출생 서류를 자기 앞에 끌어당겼다가, 그 위에 손바닥을 얹어 덮었다. “후계자 표결은 미루겠습니다. 이 장부가 심의되는 동안 제 출생을 표로 바꾸지 않겠습니다.”

주몽은 원본 장부의 서명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가족의 집과 생활비를 회사 돈으로 처리한 건 내 결정이었소. 마련해 둔 돈은 임금으로 돌리겠소. 지급 명단과 날짜를 오늘 확정하시오.”

의장이 수정된 안건을 읽었다. 이사회는 임금 우선 지급을 의결한 뒤 주몽의 지분 일부 처분과 회장 권한 축소를 차례로 표결에 부쳤다. 찬성표가 더해질 때마다 주몽의 앞에 놓인 금테 펜이 회의록 쪽으로 밀려났다. 마지막 표결이 끝나자 서기가 결의서를 그의 앞으로 돌려놓았다.

주몽은 지분 처분란에 서명했다. 소서노는 회의록에 붙은 오명환의 제안서를 떼어 그의 자료철에 끼웠고, 온조는 임금표의 지급 날짜가 적힌 칸에 손가락을 대고 확인했다. 그 아래에서 주몽의 서명이 마르기 시작했다.

장면 15· 연말 이사회가 끝난 뒤, 첫 주문 출고 직전의 저녁

투자자란

투자자란
장소위례무역의 첫 주문 창고
시간연말 이사회가 끝난 뒤, 첫 주문 출고 직전의 저녁
사건온조는 비류가 넘긴 직원 명단과 남은 물량을 첫 주문 장부에 대조한다. 강태식은 빈 병 회수 비용을 계약서에 추가하고, 소서노는 온조의 경영권 조항을 한 줄씩 확인한다. 온조는 주문 장부에 서명하고 소서노는 투자자란만 채운다.
영향비류의 남은 물량과 직원은 위례무역의 책임 아래 들어오고, 강태식의 회수 비용은 계약서에 명시된다. 소서노는 투자자로 남아 온조의 경영권을 건드리지 않는다. 온조는 어머니의 돈으로 시작한 회사의 첫 주문을 자기 이름으로 책임진다.

온조가 첫 주문 장부를 팔레트 위에 펼쳐 비류의 직원 명단과 남은 상자 수를 맞춰 보았다. 위례무역 창고의 낮은 천장 아래 호박빛 전구가 골판지 상자를 비추고, 열린 셔터로 들어온 저녁빛이 병목의 흰 종이띠를 환하게 드러냈다. 종이띠마다 손으로 찍은 칠지도 문양이 조금씩 번져 있었다.

“직원은 세 명입니다. 이번 달 급여는 여기까지 정산됐고, 다음 출고부터 우리 쪽 급여표에 넣어야 해.” 비류가 명단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남은 물량은 쉰두 상자. 깨진 건 빼고 셌다.”

온조는 장부의 수량 칸을 확인한 뒤 상자 하나를 팔레트에서 내려 바닥에 놓았다. “형 이름으로 남은 미수금은 별도란에 두자. 직원들 급여와 섞지 않을게.”

비류가 상자 모서리를 잡아 다시 팔레트에 올리려 하자 온조가 손을 얹어 막았다. “출고 수량부터 확인해야 해. 빠뜨리면 조합이 또 감당해.”

“그래. 이번엔 내가 세겠다.” 비류는 상자마다 붙은 흰 띠를 손끝으로 짚으며 숫자를 불렀다. 온조가 장부에 받아 적는 동안, 비류는 틀린 수량을 발견할 때마다 상자를 옮겨 표시를 바로잡았다. 마지막 상자가 놓이자 그는 직원 명단에 서명하고 그 종이를 온조 쪽으로 밀었다.

강태식은 계약서를 접이식 책상에 펼쳐 병 회수 일정표와 맞췄다. “회수 비용은 납품 대금에서 빼지 말고 따로 적어야 합니다. 동명주조가 늦춘 물량까지 조합원이 손으로 옮겼어요.”

“비용과 회수 날짜를 적으세요.” 온조가 말했다. “이번 계약부터 위례무역이 부담합니다.”

강태식은 펜으로 계약서에 회수 비용과 날짜를 기입했다. 잉크가 마르기 전에 온조가 숫자를 대조하고 서명했다. 강태식은 계약서 사본을 접어 장부 옆에 놓고, 빈 병 회수 칸에 자기 도장을 찍었다.

소서노는 식탁에서 가져온 투자 계약서를 창고 책상 위에 펴고 경영권 조항을 손톱으로 따라 읽었다. “이사회 의석과 일상 경영은 온조에게 있다. 투자자의 동의가 필요한 항목은 지분 처분과 추가 차입뿐이야. 문구가 그대로인지 확인해.”

온조는 조항을 한 줄씩 읽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로입니다. 첫 주문도 제 책임으로 서명하겠습니다.”

“그럼 네 이름을 써.” 소서노는 계약서를 온조 앞에 놓고 펜을 건넸다. “나는 여기만 채우마.”

온조는 첫 주문 장부에 자기 이름을 적고, 주문 수량과 납기 날짜를 다시 확인했다. 그 옆에서 소서노는 투자자란에 서명했다. 비류가 명단과 정산서를 장부 밑에 끼워 넣고, 강태식은 계약서에 적힌 병 회수 비용을 손가락으로 짚어 온조에게 마지막 확인을 받았다. 온조가 출고표를 팔레트 첫 상자에 붙이자, 세 사람의 서명이 나란히 남은 장부가 그 아래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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