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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ytalk 오리지널 · 장면 30 · 챕터 6

(동아제약)번호표 뽑았으면 좀비도 줄 서요

감염 첫날 밤, 올리브영 매장 아르바이트생은 명동점 유리문을 진열대와 할인 배너로 막고, 손님 열두 명과 함께 파티온 노스카나인 트러블 크림 코너 뒤 창고로 몸을 숨긴다. 땀과 먼지로 뒤덮인 아이돌 연습생은 애크논 크림을 찾으러 계산대 아래로 기어가고, 얼굴을 긁힌 택배기사는 노스카나를 쥔 채 쓰러진 매니저를 끌고 오며, 중년 관광객 부부는 검가드 샘플컵으로 서로의 피 묻은 입안을 헹군다. 카운터 냉장고에는 박카스 디카페 여섯 병과 오쏘몰 바이탈 선물세트 하나가 남아 있고, 아르바이트생은 그것을 번호표처럼 나눠 주며 지하철 4호선 통로까지 달릴 순서를 정한다.

밤 11시 58분, 자동문 배터리가 다시 살아나며 문이 양옆으로 열리고, 바깥에서 형광 조끼를 입은 감염자 무리가 행사 매대 박스를 밀며 매장 안으로 들어온다.

  • 등장인물 6
  • 장소 7
  • 장면 30
  • 줄거리 4,699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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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 Characters

등장인물들

윤다솜

여성

폐점 정산 중 감염 사태에 갇힌 올리브영 명동점 야간 아르바이트생

프로필

윤다솜은 박카스 디카페 여섯 병과 오쏘몰 바이탈 선물세트를 손에 쥔 사람부터 지하철 4호선 통로로 내보내며, 열두 명을 한 줄로 살려 보내려 한다. 순서를 정하는 손끝이 늦어질수록 자동문 앞 진열대가 밀리고, 윤다솜이 한 사람을 먼저 부르면 다른 한 사람은 파티온 노스카나인 트러블 크림 코너 뒤 어둠에 더 오래 남는다. 백이안은 윤다솜이 창고에 숨겨 둔 폐기 예정 간식 상자를 알고 있어, 윤다솜이 무전기를 꽉 쥐고 차갑게 굴 때마다 그 상자를 입에 올려 그녀의 질서를 흔든다.

윤다솜은 겁이 나면 계산대 바코드 스캐너를 켰다 껐다 하며 삑 소리로 사람 수를 다시 센다. 손님 앞에서는 “다음 분”을 또렷하게 말하지만, 돌아서면 박카스 디카페 병뚜껑을 손톱으로 긁어 번호 대신 작은 흠집을 낸다. 백이안이 간식 이야기를 꺼내면 윤다솜은 먼저 화를 내지 않고, 창고 선반 아래로 발을 밀어 넣어 숨겨 둔 박스를 더 깊이 찬다.

배경

윤다솜은 낮에는 취업 준비 학원에 다니고 밤에는 명동점 마감조로 일하며, 관광객이 버리고 간 영수증 뒷면에 면접 답변을 적어 왔다. 매니저가 폐기 간식을 그냥 버리라고 할 때마다 윤다솜은 유통기한 스티커를 떼어 창고에 모았고, 그걸 본 사람은 늦은 밤 애크논 크림을 찾으러 자주 오던 백이안뿐이었다. 감염 첫날 밤 매니저가 쓰러지자 윤다솜은 그의 허리춤에서 열쇠를 빼고 무전기를 켰으며, 그 순간부터 매장 안의 모든 시선이 할인 배너보다 먼저 윤다솜의 손을 따라 움직였다.

묘사

윤다솜은 올리브영 초록 조끼 위에 구겨진 검은 앞치마를 두르고, 한 손에는 매니저의 열쇠 꾸러미와 무전기를, 다른 손에는 흠집 낸 박카스 디카페 병뚜껑을 쥔 채 카운터 냉장고 앞에 선다. 겁에 질린 눈은 자동문 쪽을 보면서도 입술은 “다음 분”의 모양으로 굳어 있고, 운동화 앞코는 창고 선반 아래 숨겨 둔 폐기 간식 박스를 더 깊이 밀어 넣고 있다. 그녀의 손톱 밑에는 병뚜껑을 긁다 묻은 파란 도료가 끼어 있어, 누가 살고 누가 남을지 세는 사람의 표식처럼 보인다.

백이안

남성

데뷔 평가 전날 얼굴 트러블을 가리려 명동 올리브영에 뛰어든 중소기획사 아이돌 연습생

프로필

백이안은 붉게 올라온 턱선을 가리려고 애크논 크림 하나를 찾아 계산대 아래 먼지와 깨진 아크릴 조각 사이로 기어든다. 그가 파티온 노스카나인 트러블 크림 진열대를 붙잡고 버티는 바람에 다솜이 박카스 디카페와 오쏘몰 바이탈로 짜 둔 탈출 순서가 흐트러지고, 창고 안 사람들은 누가 먼저 뛸지 다시 싸우기 시작한다. 문태경이 백이안의 연습실 출입증을 주워 쥔 채 매니저를 끌고 오자, 백이안은 그 출입증 없이는 내일의 자신도 없다는 얼굴로 도망칠 발을 멈춘다.

백이안은 겁이 나면 숨을 짧게 끊어 쉬며 손톱으로 목 뒤 라벨을 긁고, 울면서도 휴대폰 전면 카메라를 켜 턱의 붉은 자국부터 확인한다. 누가 “지금 얼굴이 문제냐”고 쏘아붙이면 바로 고개를 숙이지만, 감염자가 유리문에 이마를 박는 순간에는 진열대 밑으로 어깨를 밀어 넣어 시야를 막는다. 백이안은 부탁할 때마다 존댓말 끝이 떨리고, 거절당하면 입술을 깨문 채 더 낮은 곳으로 기어가 원하는 물건을 직접 집어 온다.

배경

백이안은 데뷔조 막차를 탄 뒤부터 연습실 거울 앞에서 여드름 자국을 세며 하루를 끝냈고, 트레이너가 “카메라는 피부부터 잡는다”고 말한 날부터 파우치에 샘플 크림을 모았다. 감염 소식이 명동 전광판 아래로 번질 때도 백이안은 숙소로 가지 않고 올리브영 행사 매대 앞에 섰다. 계산대에 떨어뜨린 연습실 출입증은 월말 평가 때마다 목에 걸던 유일한 증명서라, 문태경의 손에 그것이 있는 한 백이안은 혼자 지하철 통로로 뛰지 못한다.

묘사

백이안은 땀에 젖은 검은 연습복 위에 얇은 회색 후드집업을 걸치고, 목에는 끊어진 출입증 줄 자국만 남긴 채 계산대 아래 먼지 속으로 반쯤 기어 들어가 있다. 울어서 붉어진 눈으로도 휴대폰 전면 카메라에 비친 턱의 트러블을 확인하고, 다른 손은 애크논 크림 튜브를 움켜쥔 채 파티온 노스카나인 트러블 크림 진열대를 어깨로 버틴다. 그의 기억에 남는 표식은 목 뒤 라벨을 긁어 벌겋게 만든 손톱자국과, 겁먹을수록 더 낮게 엎드리는 마른 어깨다.

문태경

남성

마지막 배송 구역이 명동 화장품 거리였던 새벽 상차 택배기사

프로필

문태경은 쓰러진 매니저를 창고까지 끌고 들어오며 노스카나 튜브를 매니저 손에 쥐여 주려 하지만, 정작 자기 목깃 아래에는 감염자 이빨인지 깨진 진열대 모서리인지 모를 상처를 숨기고 있다. 그는 다솜에게 뒷문 비밀번호가 적힌 배송 송장을 봤다고 털어놓고, 자신을 풀어 주면 매니저와 손님들을 지하 하역장까지 안내하겠다고 버틴다. 다솜은 문태경을 믿으면 탈출 순서를 다시 짜야 하고, 묶어 두면 유일하게 뒷문을 아는 사람을 버리는 셈이 된다.

문태경은 겁이 날수록 송장 모서리를 반듯하게 접고, 피 묻은 손가락으로 바코드 자리를 문질러 숫자를 다시 확인한다. 누가 자기 상처를 보려 하면 웃으며 노스카나를 흔들어 “이건 내 얼굴값이 아니라 저 사람 퇴직금”이라고 말하지만, 목덜미에 땀이 차면 턱을 어깨에 붙인 채 한쪽으로만 고개를 돌린다. 박카스 디카페 병이 굴러가면 본능적으로 발끝으로 세워 놓고, 다음 순간 자신이 아직 배송기사처럼 굴고 있다는 사실에 입술을 깨문다.

배경

감염이 터지기 전 문태경은 명동점 리뉴얼 행사 물량을 세 번이나 잘못 배정받아, 매니저에게 뒷문 비밀번호와 검수 위치가 적힌 송장을 직접 확인받았다. 낮에는 노스카나와 파티온 박스를 나르고 밤에는 병원비 독촉 전화를 피하던 그는, 마지막 배송을 끝내면 계약을 그만두겠다고 마음먹은 참이었다. 매장 앞 도로에서 형광 조끼를 입은 감염자들이 오토바이를 덮쳤을 때, 문태경은 반품 박스 대신 쓰러진 매니저의 팔을 잡았고 그 손에 아직 노스카나 한 튜브가 남았다.

묘사

문태경은 땀에 젖은 회색 택배 조끼 위로 찢어진 송장 뭉치를 끼워 넣고, 한 손에는 노스카나 튜브를 부러질 듯 움켜쥔 채 쓰러진 매니저의 팔을 질질 끌고 온다. 오른쪽 뺨에는 길게 긁힌 자국이 번져 있지만 그는 그보다 목깃을 더 신경 쓰며, 누가 다가오면 턱을 어깨에 붙이고 웃는 척 고개를 비튼다. 그의 운동화 앞코에는 굴러가던 박카스 디카페 병을 세우다 묻은 끈적한 갈색 얼룩이 남아 있고, 그 사소한 정리 습관이 오히려 그를 더 불안해 보이게 만든다.

고명례

여성

남편의 임플란트 점검 여행을 핑계로 서울 야경 투어에 온 부산 반찬가게 주인

프로필

고명례는 서봉춘의 입가에 번진 피가 감염자의 흔적이 아니라 터진 잇몸 때문이라는 것을, 검가드 샘플컵에 남은 액체 한 모금으로 모두에게 보여 주려 한다. 다솜이 박카스 디카페 병뚜껑으로 탈출 순서를 정하자 고명례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남편의 병뚜껑을 두 번째 순서로 바꿔 놓고, 그 장면을 본 이안에게 오쏘몰 바이탈 한 포를 쥐여 주며 침묵의 값을 부탁한다. 그 선택 때문에 다솜의 질서는 처음으로 흔들리고, 창고 안 사람들은 감염보다 먼저 서로의 손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고명례는 겁이 나면 손가락으로 종이컵 가장자리를 눌러 타원형으로 만들고, 말끝마다 “잠깐만 보이소”를 붙이며 상대의 눈보다 입술과 잇몸을 먼저 본다. 남편 앞에서는 목소리를 낮추고 물티슈로 피를 닦아 주지만, 누군가 서봉춘을 밀쳐 내면 검가드 샘플컵을 방패처럼 들어 올린 채 한 발도 물러서지 않는다. 거짓말을 할 때는 꼭 남에게 먹을 것을 건네는데, 이안에게 오쏘몰 바이탈을 내밀던 순간에도 포장 모서리를 너무 세게 쥐어 은박이 구겨진다.

배경

고명례는 서봉춘이 임플란트 수술 뒤 피가 자주 나는 것을 숨기고 단체 여행에 나온 일을 아직 용서하지 못했지만, 명동 거리에서 첫 감염자가 사람을 물어뜯는 것을 본 뒤부터는 그의 입안만 확인했다. 낮에는 올리브영 행사대에서 검가드 샘플을 받아 “공짜라도 약은 약”이라며 가방 안쪽 지퍼칸에 넣었고, 그 작은 컵이 밤에는 남편을 사람으로 남겨 둘 유일한 증거가 된다. 부산으로 돌아가면 딸에게 줄 생각으로 산 오쏘몰 바이탈 선물세트는 이제 사과도 선물도 아니고, 고명례가 누군가의 침묵을 사는 데 쓰는 마지막 깨끗한 물건이다.

묘사

고명례는 부산 반찬가게 앞치마를 접어 넣은 듯한 낡은 꽃무늬 점퍼에 여행사 스티커가 붙은 크로스백을 메고, 한 손에는 찌그러진 검가드 샘플컵을 쥔 채 남편의 턱밑으로 몸을 반쯤 밀어 넣고 선다. 겁에 질린 눈은 사람들의 얼굴을 보지 않고 입술과 잇몸만 훑으며, 누가 서봉춘을 의심하면 컵 가장자리를 손가락으로 눌러 타원형으로 만들고 “잠깐만 보이소”라고 낮게 밀어붙인다. 그녀의 기억나는 표식은 오쏘몰 바이탈 포장 모서리를 너무 세게 쥔 탓에 은박이 구겨진 손, 그리고 주머니 속에서 몰래 바뀐 박카스 디카페 병뚜껑이 작게 부딪히는 소리다.

서봉춘

남성

임플란트 시술 후 첫 여행에서 명동 한복판에 발이 묶인 은퇴 버스정비공

프로필

서봉춘은 검가드 샘플컵에 고이는 붉은 침을 볼 때마다 물린 자국이 아니라 흔들리던 잇몸이 터진 것이라고 우기며, 아내 고명례를 먼저 지하철 통로로 내보내려 한다. 자동문 앞에서 행사 매대 박스가 밀리는 소리를 듣자, 그는 버스 차고지에서 쓰던 쇠막대 지렛대질로 문을 다시 물릴 방법을 다솜에게 알려 주고 대신 자기 번호표를 맨 뒤로 옮기라고 요구한다. 고명례가 박카스 디카페 병뚜껑을 바꿔치기한 것을 서봉춘은 알고도 모른 척하지만, 그 침묵 때문에 다솜은 생존 순서를 물건이 아니라 사람의 거짓말까지 계산해 다시 짜야 한다.

서봉춘은 겁이 나면 혀끝으로 어금니를 밀어 보고, 피 맛이 올라오면 검가드 컵을 흔들어 거품부터 확인한다. 남들 앞에서는 “잇몸이 약해서 그래” 하고 웃지만, 형광 조끼 감염자들이 유리를 긁는 소리가 나면 진열대 밑 쇠받침의 휘어진 각도부터 눈으로 잰다. 고명례가 손을 잡으려 하면 손등을 슬쩍 빼면서도, 그녀의 운동화 끈이 풀리면 무릎을 꿇고 매듭을 두 번 묶는다.

배경

서봉춘은 삼십 년 동안 새벽 첫차가 나가기 전 차고지에서 문짝, 발판, 비상망치를 손으로 점검했고, 고장 난 자동문은 힘보다 받침점이 먼저라는 말을 후배들에게 반복했다. 퇴직 기념으로 고명례와 명동에 왔다가, 잇몸 약 광고가 붙은 약국을 찾던 길에 올리브영 검가드 행사 매대 앞에서 발이 묶였다. 몇 달 전 임플란트 수술비를 아끼겠다고 진료를 미룬 뒤부터 서봉춘의 칫솔에는 매일 붉은 줄이 남았고,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고명례뿐이다.

묘사

서봉춘은 낡은 베이지색 등산 조끼 위에 얇은 남색 점퍼를 걸치고, 한 손에는 반쯤 찌그러진 검가드 샘플컵을, 다른 손에는 진열대 밑에서 뽑아낸 짧은 쇠막대를 쥐고 있다. 입가에는 헹궈도 지워지지 않는 붉은 물기가 남아 있지만 그는 턱을 단단히 물고 웃는 척하며, 자동문 틈과 행사 매대 바퀴의 높이를 버스 차고지 바닥처럼 재고 있다. 그의 기억에 남는 표식은 오른쪽 엄지손톱 아래 검게 밴 기름때와, 겁이 날 때마다 혀로 어금니를 밀어 올리느라 한쪽 볼만 미세하게 부푸는 버릇이다.

류하민

남성

본사 판촉 지시와 야간 매출 압박 사이에서 행사 매대를 끝까지 치우지 못한 올리브영 명동점 매니저

프로필

류하민은 피가 묻은 셔츠 소매로 바닥을 짚은 채, 다솜이 파티온 노스카나인 트러블 크림 행사 배너를 접어 창고 문틈에 밀어 넣게 만들고 싶어 한다. 낮에 받은 오쏘몰 바이탈 샘플 박스 안에는 류하민이 숨겨 둔 비상용 보조배터리가 있고, 그것을 꺼내면 자동문을 살릴 수 있지만 동시에 바깥의 감염자들에게 길도 열릴 수 있다. 태경이 류하민을 끌고 온 순간부터 다솜은 구조와 협박 사이에서 순서를 다시 짜야 하고, 류하민은 뒷문 비밀번호를 말하는 대신 손가락으로 바닥의 먼지만 긁는다.

류하민은 매대 각도를 맞출 때 손님 발끝이 닿는 선까지 재는 사람이라, 쓰러진 뒤에도 삐뚤어진 할인 배너를 보면 떨리는 손목을 들어 바로 세우려 한다. 직원에게는 늘 “재고는 거짓말 안 한다”고 말했지만, 정작 류하민은 중요한 물건을 오쏘몰 바이탈 샘플 박스 바닥에 숨겨 두고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통증이 올라오면 류하민은 이를 악물기보다 입술 안쪽을 씹고, 검가드 샘플컵이 굴러가는 소리에도 눈꺼풀을 번쩍 뜬다.

배경

류하민은 본사 점검 전날마다 박카스 디카페를 마시며 새벽까지 행사 매대를 갈아엎었고, 동아제약 판촉 담당자에게 받은 샘플과 POP를 누구보다 깔끔하게 쌓아 두었다. 감염이 터진 날 오후, 류하민은 자동문 배터리 불량을 보고받고도 매출 마감과 행사 세팅을 먼저 끝내려다 보조배터리를 창고가 아닌 오쏘몰 바이탈 박스에 넣었다. 태경에게 뒷문 비밀번호를 알려 준 적이 있는 사람은 류하민뿐이라, 류하민이 정신을 잃는 순간 매장 안의 탈출구도 함께 흐려진다.

묘사

류하민은 구겨진 올리브영 검은 조끼와 흰 셔츠 차림으로 바닥에 반쯤 기대어 있고, 목에 걸린 매니저 명찰은 피와 먼지에 젖어 한쪽으로 돌아가 있다. 의식이 끊길 듯한 눈으로도 삐뚤어진 파티온 노스카나인 트러블 크림 행사 배너를 보고 떨리는 손가락을 들어 창고 문틈을 가리키며, 다른 손은 오쏘몰 바이탈 샘플 박스 모서리를 놓지 못한다. 입술 안쪽을 씹어 붉게 번진 입가와, 손목시계 위에 붙은 작은 재고 라벨이 그가 마지막까지 매장을 정리하려 했던 사람임을 드러낸다.


줄거리 · Synopsis

줄거리

밤 11시 47분, 윤다솜은 올리브영 명동점 계산대 앞에서 박카스 디카페 병뚜껑 여섯 개를 손바닥에 굴린다. 유리문 밖에서는 형광 조끼를 입은 감염자들이 행사 매대 박스를 밀고 있고, 문틈에 끼워 둔 파티온 노스카나인 트러블 크림 배너가 젖은 종이처럼 휘어진다. 다솜은 손톱으로 병뚜껑마다 흠집을 내 번호를 만들고, 오쏘몰 바이탈 선물세트 포장 끈을 뜯어 사람들 손목에 묶는다. 먼저 뛸 사람은 박카스 디카페를 마시고, 다음 사람은 오쏘몰 바이탈 한 포를 씹는다. 물자가 아니라 순서다. 순서가 있어야 사람들이 서로를 밀치지 않는다.

그러나 백이안이 계산대 아래로 기어들며 그 질서를 깨뜨린다. 그는 먼지와 깨진 아크릴 조각 사이에서 애크논 크림을 움켜쥐고, 턱에 오른 붉은 자국을 손등으로 가린 채 울먹인다. “저 감염 아니에요. 내일 평가라서요.” 누군가 욕을 하며 그를 끌어내려 하자, 백이안은 파티온 진열대 밑으로 어깨를 밀어 넣어 버틴다. 그가 붙잡은 진열대가 밀리지 않으면서 자동문 앞 방어선은 잠깐 버티지만, 동시에 통로가 막혀 첫 번째 탈출자가 나갈 길도 좁아진다. 다솜은 그를 야단치려다가, 감염자 하나가 유리에 이마를 박는 소리에 바코드 스캐너를 켠다. 삑. 한 번. 바깥의 감염자들 고개가 동시에 돌아간다. 다솜은 손가락을 얼어붙은 듯 멈추고, 스캐너를 계산대 아래로 던진다.

문태경은 그때 뒷문 쪽 복도에서 류하민을 끌고 나타난다. 류하민의 흰 셔츠 소매는 먼지와 피로 뭉개져 있고, 손에는 오쏘몰 바이탈 샘플 박스가 들려 있다. 문태경은 다른 손에 노스카나 튜브를 쥔 채 “매니저님이 아직 숨 쉽니다”라고 말하지만, 턱을 어깨에 붙이고 목덜미를 끝까지 보이지 않는다. 다솜은 그 상처를 보려 하고, 문태경은 배송 송장 뭉치를 가슴에 눌러 숨긴다. 그는 뒷문 비밀번호가 적힌 송장을 봤다고 말한다. 자기를 묶지 않으면 하역장까지 안내하겠다고 한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창고 안 손님들이 그를 밀어붙인다. 문태경은 반듯하게 접던 송장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류하민의 몸을 방패처럼 끌어안는다. 다솜은 무전기 줄로 그의 손목을 선반 기둥에 묶는다. 그 순간 유리문 쪽 진열대가 한 뼘 밀린다.

고명례는 남편 서봉춘의 입가를 물티슈로 닦는다. 서봉춘은 검가드 샘플컵에 남은 민트색 액체를 입에 머금고 헹군 뒤, 붉게 탁해진 침을 바닥에 뱉는다. 사람들의 눈이 그의 입으로 몰린다. 고명례는 컵을 들어 보이며 “잇몸이라 안 캅니까”라고 말하지만, 목소리는 낮게 떨린다. 다솜이 두 번째 박카스 병뚜껑을 다른 손님에게 주는 순간, 고명례는 몸을 돌려 남편의 병뚜껑과 바꿔 놓는다. 백이안은 그 장면을 본다. 고명례는 그에게 오쏘몰 바이탈 한 포를 쥐여 주며 “턱에 바를 거 찾았으면 입도 닫아 주소”라고 속삭인다. 은박 포장이 그의 손 안에서 구겨진다. 백이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휴대폰 전면 카메라에 비친 자기 얼굴 뒤로 다솜이 병뚜껑을 다시 세는 모습이 들어온다.

류하민은 의식을 잃었다가 깨어나며 바닥의 먼지를 손가락으로 긁는다. 다솜은 그가 비밀번호를 쓰는 줄 알고 몸을 낮추지만, 류하민은 삐뚤어진 파티온 행사 배너를 가리킨다. 다솜이 배너를 접어 창고 문틈에 밀어 넣자, 류하민은 그제야 오쏘몰 바이탈 샘플 박스를 내민다. 박스 바닥에는 얇은 보조배터리가 테이프로 붙어 있다. 자동문을 살리면 문이 열리고, 동시에 모터음이 감염자를 부른다. 류하민은 입술 안쪽을 씹어 피를 삼키며 고개를 젓는다. 그는 살리라는 뜻인지, 쓰지 말라는 뜻인지 끝까지 말하지 못한다. 다솜은 박스를 받아 들고 처음으로 손님들에게 등을 돌린다. 그녀는 창고 선반 아래 숨겨 둔 폐기 예정 간식 상자를 발로 더 깊이 밀어 넣는다. 백이안이 그것을 본다.

밤 11시 54분, 냉장고 컴프레서가 규칙적으로 웅 하고 울린다. 바깥 감염자들이 유리문에서 냉장고 쪽으로 몸을 돌린다. 다솜은 냉장고 플러그를 뽑으려 달려가고, 문태경은 묶인 손목을 비틀어 피가 배도록 줄을 느슨하게 만든다. 그는 발끝으로 굴러온 박카스 디카페 병을 세워 놓고, 자신이 아직도 물건을 정리하고 있다는 사실에 얼굴을 찡그린다. 다솜이 플러그를 잡는 순간, 고명례가 남편을 먼저 내보내 달라고 다솜의 앞을 막는다. 백이안은 고명례가 바꾼 병뚜껑을 꺼내 보인다. 창고 안 공기가 얼어붙는다. 서봉춘은 아내의 손에서 병뚜껑을 빼앗아 바닥에 던지고, 자기 번호를 맨 뒤로 옮기라고 다솜에게 말한다. 고명례가 그의 팔을 붙잡자, 그는 손등을 빼지만 곧 무릎을 꿇어 그녀의 풀린 운동화 끈을 두 번 묶는다. “당신은 넘어지면 안 된다.”

그때 자동문 배터리가 죽은 줄 알았던 전원에 잔광이 돌아온다. 류하민의 보조배터리가 바닥에서 미끄러져 단자에 닿은 것이다. 문이 양옆으로 몇 센티미터 열린다. 모터음이 길게 울리고, 감염자들이 한꺼번에 매장 안으로 밀려든다. 서봉춘은 진열대 밑 쇠받침의 휘어진 각도를 보고 쇠막대를 꽂는다. 그는 버스 차고지에서 하던 손놀림으로 자동문 레일을 비틀어 문이 반쯤 열린 채 걸리게 만든다. 틈은 한 사람씩 겨우 빠져나갈 만큼 남는다. 대신 서봉춘의 손등이 레일에 눌려 찢어진다. 피가 흐르자 사람들은 뒤로 물러서고, 고명례는 검가드 샘플컵을 들고 그의 앞에 선다. 컵 안의 마지막 액체가 흔들린다.

다솜은 이제 순서를 다시 짜지 않는다. 그녀는 병뚜껑을 모두 계산대 위에 쏟아 버리고, 사람들을 몸으로 밀어 줄 세운다. 첫 번째는 아이를 안은 손님, 두 번째는 고명례, 세 번째는 류하민을 부축한 문태경이다. 문태경은 묶인 줄을 끊어낸 뒤 도망칠 수 있었지만, 류하민의 겨드랑이에 어깨를 넣고 일으킨다. 누군가 그의 목덜미를 잡아채 상처를 보려 하자, 문태경은 웃으려다 실패하고 노스카나 튜브를 그 손에 밀어 넣는다. “나중에 흉터 남으면 바르세요. 지금은 밀어요.” 상처는 물린 자국처럼 보이지도,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다솜은 그를 놓아 준다. 신뢰가 아니라 시간이 없어서다.

백이안은 탈출 틈 앞에서 멈춘다. 바깥 네온빛에 젖은 유리문에 자기 얼굴이 비치고, 턱의 붉은 자국이 더 도드라져 보인다. 그는 애크논 크림을 주머니에 넣고, 파티온 진열대 아래로 다시 기어든다. 다솜이 그의 이름을 부르자, 백이안은 울면서도 진열대 바퀴를 발로 걸어 감염자들의 시야를 막는다. 그가 낮은 곳에서 몸을 밀어 넣은 덕분에 서봉춘이 비튼 문틈이 몇 초 더 버틴다. 감염자 하나가 그의 후드 끈을 붙잡지만, 문태경이 류하민을 내려놓고 달려와 백이안의 목덜미 라벨을 찢어 끊는다. 백이안은 바닥을 구르며 빠져나오고, 손에 쥔 애크논 크림은 찌그러져 내용물이 손바닥에 묻는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다솜과 서봉춘이다. 고명례는 통로 밖에서 남편을 부르며 다시 들어오려 하고, 다솜은 그녀를 밀어낸다. 서봉춘은 쇠막대를 놓으면 문이 열린다는 걸 안다. 그는 다솜에게 자기 대신 류하민의 오쏘몰 박스 안쪽을 보라고 말한다. 다솜이 박스 바닥을 찢자, 비상구 열쇠 하나와 직원용 뒷문 카드가 떨어진다. 류하민은 비밀번호를 숨긴 것이 아니었다. 그는 본사 행사 지시 때문에 막아 둔 하역장 문을 열 열쇠를 샘플 박스에 숨겨 두고도, 매출과 책임이 두려워 마지막까지 꺼내지 못한 것이다. 다솜은 열쇠를 쥐고 서봉춘을 끌어당기려 하지만, 서봉춘은 쇠막대를 더 깊이 박는다. 그의 손이 떨리고, 입가에서 다시 피가 번진다. “문 닫히면 뛰어라.”

다솜은 그를 버리지 않는다. 그녀는 카운터로 달려가 남은 박카스 디카페 병 하나를 바닥에 던져 깨뜨린다. 유리가 튀고 단 냄새가 퍼진다. 감염자들은 소리가 아니라 자동문 모터음에 몰려 있지만, 바닥에 흐른 병이 레일에 스며들며 문이 덜컥 멈춘다. 다솜은 그 짧은 멈춤 사이 서봉춘의 허리띠를 붙잡고 온몸으로 잡아당긴다. 쇠막대가 빠지며 문이 크게 열리고, 감염자들의 팔이 쏟아진다. 백이안이 통로 쪽에서 파티온 배너를 다시 밀어 넣고, 문태경이 류하민의 몸을 기대 세운 채 진열대를 걷어찬다. 고명례는 남편의 피 묻은 손을 잡고, 이번에는 그가 빼지 못하게 손가락을 얽는다. 모두가 한 덩어리처럼 하역장 문으로 밀려간다.

하역장 입구에서 다솜은 류하민의 카드로 문을 연다. 전자음이 짧게 울리고, 멀리 있던 감염자 몇이 방향을 튼다. 다솜은 문이 열리는 순간 카드를 뽑아 부러뜨린다. 다시는 이 문이 쉽게 열리지 않게 하려는 행동이다. 류하민은 그것을 보고 힘없이 웃다가, 삐뚤어진 명찰을 바로 세운다. 문태경은 송장 뭉치를 찢어 젖은 바닥에 뿌린다. 이제 그 숫자들은 누구를 먼저 살릴 힘이 없다. 백이안은 휴대폰을 꺼내려다 멈추고, 화면 대신 자기 손에 묻은 애크논 크림과 먼지를 바지에 문지른다. 고명례는 검가드 샘플컵을 버리지 못하고 주머니에 넣는다. 서봉춘은 피 맛을 삼키며 아무렇지 않은 척 걷지만, 고명례가 그의 팔을 어깨에 올리자 이번에는 거절하지 않는다.

지하상가로 내려가는 계단 앞, 다솜은 마지막으로 매장 안을 돌아본다. 형광등은 아직 켜져 있고, 냉장고는 꺼져 있으며, 파티온 코너에는 발자국과 손자국이 어지럽게 남았다. 그녀가 세운 질서는 무너졌지만, 그 무너진 틈으로 사람들이 빠져나왔다. 다솜은 손에 남은 병뚜껑 하나를 계단 난간 위에 올려놓는다. 누가 몇 번째였는지 더는 중요하지 않다. 아래 4호선 통로에서는 비상등이 깜박이고, 멀리서 또 다른 자동문 모터음이 들린다. 사람들은 그 소리를 듣고 동시에 숨을 죽인다. 다솜은 무전기를 버리고, 두 손으로 하역장 철문을 닫는다. 문이 잠기는 소리는 작지만 분명하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어둠 속으로 내려간다. 각자 몸에 제품 하나씩, 거짓말 하나씩, 빚 하나씩을 품고.


세계관 · World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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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정

서울 명동 한복판, 폐점 직후의 올리브영 명동점과 그 앞 화장품 거리. 관광객용 네온 간판, 약국 십자가, 지하철 4호선 입구 표지판이 한 시야 안에 겹쳐 보이는 상권이다. 매장 안은 밝지만 좁고, 바깥은 넓지만 죽은 사람처럼 흔들리는 감염자들로 막혀 있다. 파티온 노스카나인 트러블 크림 행사 매대 뒤 창고는 임시 대피소가 되고, 계산대 아래 먼지 낀 전선 공간은 백이안이 기어드는 통로가 되며, 자동문 앞 유리벽은 모두가 서로의 숨소리를 들으며 죽음을 기다리는 얇은 경계가 된다.

거리에는 낮에 뿌린 샘플 전단과 찢어진 면세점 쇼핑백이 빗물에 눌어붙어 있다. 넘어진 행사 배너에는 “트러블 진정”이라는 문구가 아직 선명하고, 그 아래로 피 묻은 운동화 자국이 지나간다. 카운터 냉장고의 푸른 빛 속에는 박카스 디카페 여섯 병이 남아 있고, 선물 포장된 오쏘몰 바이탈 세트는 창고 선반 위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당긴다. 이 세계에서 생존 물자는 총이나 식량만이 아니다. 작은 병, 샘플컵, 크림 튜브, 보조배터리, 배송 송장 한 장이 사람의 순서를 바꾸고, 거짓말의 값을 정한다.

시대

가까운 현재, 초여름 장마가 막 시작된 감염 첫날 밤. 시간은 밤 11시 40분대에서 자정 직전으로 수축되어 있다. 휴대폰 통신은 간헐적으로 끊기고, 재난 문자는 같은 문장을 반복하며 늦게 도착한다. 경찰 사이렌은 멀어졌다 가까워지지만 아무도 매장 앞까지 오지 않는다. 사람들은 아직 세상이 완전히 끝났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계산대 영수증과 포인트 적립, 배송 시간, 데뷔 평가, 임플란트 진료 예약 같은 어제의 질서에 매달린다.

감염은 이미 명동 상권 전체로 번졌지만, 공식 발표는 “원인 미상 군중 이상 행동”이라는 말에 멈춰 있다. 자동문 배터리, 매장 보안 셔터, 지하철 통로 조명, 냉장고 전원 같은 도시의 작은 장치들이 아직 살아 있어 오히려 사람들을 함정에 가둔다. 완전히 무너진 세계가 아니라, 너무 많은 것이 반쯤 작동하는 세계다.

규칙

감염자는 피 냄새와 큰 소리보다 자동문 모터음, 바코드 스캐너음, 냉장고 컴프레서처럼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전자음을 더 빠르게 따라온다. 그래서 다솜이 사람 수를 세려고 스캐너를 켤 때마다 안심과 위험이 동시에 생기고, 류하민의 보조배터리로 자동문을 살리는 선택은 탈출로를 여는 동시에 감염자들을 부르는 선택이 된다.

물린 자국과 단순 상처는 첫 한 시간 동안 육안으로 구분하기 어렵고, 입안 출혈이나 피부 트러블도 의심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문태경의 목덜미 상처, 서봉춘의 잇몸 피, 백이안의 턱 트러블은 모두 생존 순서를 흔드는 증거가 되며, 애크논·노스카나·검가드 같은 제품은 치료제라기보다 “아직 사람”임을 증명하려는 도구가 된다.

명동 지하상가와 4호선 통로로 이어지는 문은 매장 직원용 비밀번호와 하역장 동선을 알아야만 안전하게 접근할 수 있다. 그래서 류하민과 문태경은 부상자이면서도 버릴 수 없는 열쇠가 되고, 다솜은 의심스러운 사람을 묶어 둘수록 탈출 가능성도 함께 묶어 두게 된다.

남은 물자는 공개적으로 나눠야 질서가 유지되지만, 누군가 하나라도 숨기거나 바꾸면 모든 번호표의 의미가 무너진다. 박카스 디카페 병뚜껑, 오쏘몰 바이탈 포장, 검가드 샘플컵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누가 먼저 뛰고 누가 남는지를 정하는 임시 화폐가 되며, 고명례의 작은 바꿔치기는 감염보다 먼저 사람들 사이의 신뢰를 갉아먹는다.

기술과 철학

이 세계의 도시는 편의와 판촉을 위해 너무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다. 자동문은 손님을 끌어들이기 위해 쉽게 열리고, 매장 조명은 밤에도 꺼지지 않으며, 행사 매대는 통로를 좁히고, 재고 시스템은 마지막 순간까지 숫자를 남긴다. 재난이 오자 그 편리함은 방어선이 아니라 약점이 된다. 사람들은 총보다 바코드 스캐너, 보조배터리, 냉장고 전원, 배송 송장, 샘플 세트에 더 많이 의존한다.

명동의 상권 철학은 “보이는 것이 가치가 된다”에 가깝다. 피부는 깨끗해야 하고, 피는 닦여야 하며, 피곤함은 드링크로 가려지고, 불안은 선물세트 포장지로 감싸진다. 감염 첫날 밤에도 사람들은 자신의 상처가 어떻게 보이는지, 남들이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는지에 따라 살거나 밀려난다. 백이안은 얼굴을 가리려 하고, 문태경은 목을 숨기며, 서봉춘은 입안을 헹군다. 다솜은 매장 직원으로 배운 친절과 진열의 질서를 생존 규칙으로 바꾸려 하지만, 그 질서는 사람을 구하는 동시에 사람을 줄 세워 버린다.

제품들은 노골적인 구원의 물건이 아니라 이 세계의 작은 의식 도구다. 박카스 디카페는 밤새 버틸 차례를 뜻하고, 오쏘몰 바이탈은 뇌물과 선물이 동시에 되며, 애크논과 파티온은 무너지는 얼굴을 붙잡는 마지막 자존심이 된다. 노스카나는 상처가 나중에도 남을 것이라는 믿음을 붙들게 하고, 검가드는 피가 감염이 아니라 잇몸에서 난 것이라고 주장하게 만든다. 이 세계에서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몸을 치료하기보다 먼저 서로에게 설명해야 한다.

시각적 묘사

형광등의 흰빛과 냉장고의 푸른빛, 바깥 네온의 붉은빛이 유리문에 겹쳐져 사람들의 얼굴을 얇게 찢어 놓는다. 매장 내부는 지나치게 깨끗한 진열대와 무너진 할인 배너, 흩어진 마스크팩, 밟혀 터진 샘플 파우치가 뒤섞여 있다. 파티온 코너의 연분홍·흰색 패키지는 먼지와 손자국을 뒤집어쓰고, 애크논 크림 진열대 아래에는 깨진 아크릴 조각이 얼음처럼 반짝인다. 노스카나 튜브는 피 묻은 손안에서 작고 하얗게 보이고, 검가드 샘플컵의 민트색 액체는 붉은 침과 섞여 탁하게 흐린다.

바깥의 감염자들은 찢어진 행사 조끼와 관광객 우비, 배달 가방, 직원 명찰을 달고 있다. 이들은 괴물처럼 멀리 있지 않고 방금 전까지 영수증을 들고 줄 서 있던 사람들처럼 보인다. 유리문 너머에서 이마가 부딪히는 둔한 소리, 진열대 바퀴가 밀리는 끼익거림, 빗물이 간판에서 떨어지는 소리가 계속 이어진다. 카메라는 넓은 종말보다 좁은 매장 안 손끝을 본다. 병뚜껑의 흠집, 송장 모서리, 운동화 끈, 입술에 묻은 피가 이 세계의 지도가 된다.


장소 · Locations

장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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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뚜껑 계산대

계산대 표면에는 긁힌 박카스 디카페 병뚜껑 여섯 개가 동전처럼 굴러다니고, 형광등의 흰빛과 카운터 냉장고의 푸른빛이 매끈한 플라스틱 모서리를 차갑게 잘라 낸다. 바코드 스캐너는 계산대 아래 먼지 낀 전선 사이에 반쯤 걸려 있고, 누군가 손끝으로 건드릴 때마다 짧은 삑음이 숨죽인 숫자 세는 소리 위로 튄다. 깨진 아크릴 진열판 조각들이 발밑에서 얼음처럼 반짝이고, 손톱으로 새긴 병뚜껑의 작은 흠집들은 여기서 줄이 아니라 목숨의 순서를 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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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티온 창고 뒤

연분홍 파티온 노스카나인 트러블 크림 박스들이 천장 가까이까지 쌓여 있고, 흐린 비상등이 포장 비닐을 낮게 훑어 사람들의 무릎 높이에만 색을 남긴다. 접힌 종이 배너가 창고 문틈과 선반 다리 사이에 끼워져 눅눅하게 휘어 있으며, 밟힌 샘플 파우치에서는 흰 크림이 얇게 터져 박스 모서리에 묻어 있다. 선반은 바깥 충격이 올 때마다 작게 떨리고, 누군가 손에 쥔 오쏘몰 은박 포장이 구겨지는 소리만 이 좁은 뒤편에서 유난히 크게 들린다. 가장 안쪽 선반 아래에는 폐기 예정 간식 상자 하나가 더 깊이 밀려 들어가 있어, 발끝이 닿을 때마다 마른 과자 봉지가 숨죽인 사람들보다 먼저 바스락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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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 네온 화장품 거리

붉은 화장품 간판과 초록 약국 십자가가 빗물 위에서 서로 번져, 보도블록마다 깨진 립틴트처럼 얼룩진 빛이 고인다. 낮에 뿌린 파티온 샘플 전단과 면세점 쇼핑백은 발바닥에 눌어붙어 미끄럽게 찢어지고, 넘어진 행사 배너의 “트러블 진정” 글자 위로 젖은 운동화 자국이 길게 끌린다. 간판 모서리에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 사이로, 유리문에 이마가 부딪히는 둔탁한 박자가 거리 한복판까지 퍼진다. 방금 전까지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던 넓은 노면은 이제 도망칠 공간처럼 보이지만, 네온 아래 흔들리는 형광 조끼와 우비들이 골목마다 느리게 모여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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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문 배송 복도

누런 보안등 아래, 길고 좁은 배송 복도는 거친 콘크리트 벽과 낡은 고무 몰딩으로 양쪽 어깨를 밀어붙인다. 바닥에는 피가 번진 배송 송장 몇 장이 신발 자국에 접혀 있고, 문태경이 흘린 송장 뭉치가 떨어질 때마다 마른 종이가 콘크리트에 납작하게 부딪히는 소리가 복도 끝까지 굴러간다. 회색 먼지 속에는 끌린 운동화 밑창 자국이 한 줄로 이어지다 갑자기 비틀리고, 낮은 문손잡이 근처에는 누군가 급히 움켜쥔 듯 고무 몰딩이 손톱만큼 뜯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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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가드 샘플 테이블

허리 높이의 작은 판촉 테이블 위에 검가드 샘플컵들이 반원으로 놓여 있고, 따뜻한 매장 조명 아래 민트색 액체는 종이컵 안쪽의 붉은 침 자국과 섞여 탁하게 가라앉아 있다. 눌린 컵 가장자리는 손가락 힘을 기억하듯 타원형으로 찌그러져 있고, 옆에 쌓인 물티슈에는 잇몸을 닦아 낸 섬유 결이 보풀처럼 일어나 끈적한 자국을 붙들고 있다. 낮은 부산 사투리가 테이블 모서리 아래로 깔릴 때마다 누군가 종이컵을 다시 움켜쥐고, 얇은 컵벽이 바스락 접히는 소리가 주변의 숨소리보다 또렷하게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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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쯤 열린 자동문

유리문 두 장은 사람 어깨 하나가 겨우 빠져나갈 만큼 벌어진 채 멈춰 있고, 흰 형광등은 안쪽 얼굴을 창백하게 깎고 바깥 붉은 네온은 틈새의 손가락들을 피 묻은 것처럼 물들인다. 모터는 목이 잠긴 기계처럼 길게 울며 같은 자리에서 떨고, 레일에 박힌 쇠막대는 압력을 받을 때마다 짧고 날카로운 금속음을 낸다. 문턱 아래에는 깨진 박카스 디카페 병에서 흘러나온 끈적한 액체가 레일 홈을 따라 번져 유리 조각과 엉기고, 그 옆에 눌린 손등 자국은 아직 붉고 젖어 있다. 차가운 유리 안팎으로 숨결이 번갈아 흐려졌다 지워지며, 이 낮은 틈은 출구라기보다 누가 몸을 낮추고 누가 버틸지를 재는 좁은 저울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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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상가 하역장 계단

넓은 계단참은 깜박이는 주황 비상등 아래서 한 칸씩 검게 꺼져 내려가고, 닳은 논슬립 고무줄마다 빗물과 흙이 얇게 끼어 발을 잘못 디디면 바로 미끄러질 것처럼 번들거린다. 젖은 철문 옆 카드 리더는 짧게 삑 울린 뒤 침묵하고, 그 소리의 꼬리를 따라 멀어지는 자동문 모터음이 깊은 통로 안쪽에서 낮게 되감긴다. 찢어진 배송 송장들이 계단 모서리에 달라붙어 번호와 바코드를 반쯤 잃은 채 흔들리고, 난간 위에는 흠집 난 박카스 병뚜껑 하나가 주황빛을 받을 때마다 작은 신호등처럼 번쩍인다.


장면 · Scenes

장면별 이야기

챕터 01

01· 감염 첫날 밤 11시 47분

여섯 개의 병뚜껑

여섯 개의 병뚜껑
장소올리브영 명동점 병뚜껑 계산대
시간감염 첫날 밤 11시 47분
사건윤다솜은 계산대 위에 박카스 디카페 병뚜껑 여섯 개를 쏟고, 손톱으로 각각 다른 흠집을 낸다. 그녀는 오쏘몰 바이탈 선물세트의 포장 끈을 잡아 뜯어 짧게 자르고, 백이안의 손목을 붙잡아 첫 번째 끈을 묶으려 한다. 백이안은 턱을 가리며 물러서고, 계산대 아래로 떨어진 병뚜껑 하나를 잡으려 몸을 낮춘다. 다솜은 그의 팔을 다시 끌어올리며 “줄부터 서요”라고 말하지만, 바깥 자동문 쪽에서 행사 매대 박스가 밀리는 소리가 난다.
영향병뚜껑은 단순한 쓰레기가 아니라 탈출 순서를 정하는 번호표가 된다. 다솜은 물건을 나누는 직원의 손놀림으로 사람들을 통제하려 하지만, 백이안이 그 순서 안에 들어오기를 거부하면서 첫 균열이 생긴다. 박카스 디카페, 오쏘몰 바이탈, 계산대, 자동문이 한 프레임 안에서 생존 규칙으로 바뀐다. 이제 누구를 먼저 내보낼지보다, 누가 그 규칙을 믿을지가 더 급해진다.

윤다솜은 박카스 디카페 병뚜껑 여섯 개를 계산대 위에 쏟아 손바닥으로 눌러 멈췄다. 차가운 플라스틱 판 위에서 병뚜껑들이 동전처럼 튀며 돌았고, 카운터 냉장고의 푸른빛이 긁힌 은색 가장자리를 얇게 잘랐다. 그녀는 손톱으로 첫 번째 뚜껑에 한 줄, 두 번째 뚜껑에 두 줄을 파내며 오쏘몰 바이탈 선물세트의 노란 포장 끈을 이로 물어 뜯었다. 백이안은 계산대 옆에 웅크린 채 후드 소매로 턱을 가리고 있었다. 다솜이 그의 손목을 잡자 그는 반사적으로 팔을 빼며 속삭였다. “저 먼저 아닌데요. 아니, 저 감염 아니에요.”

다솜은 대답 대신 끈을 그의 손목에 감았다. “순서표예요. 차면 살아서 나가요.” 그때 계산대 아래로 병뚜껑 하나가 굴러 떨어졌고, 백이안이 먼저 몸을 낮춰 먼지 낀 전선 사이로 손을 뻗었다. 깨진 아크릴 조각이 그의 손등 밑에서 반짝였고, 그는 병뚜껑이 아니라 안쪽 진열대 아래의 작은 애크논 크림 튜브를 보고 멈췄다. 다솜은 그의 팔꿈치를 움켜쥐고 끌어올렸지만, 바깥 유리문 너머에서 무너진 행사 매대 박스가 한 뼘 밀려 들어오며 둔한 소리를 냈다.

백이안의 손목에 묶다 만 오쏘몰 포장 끈이 풀려 계산대 모서리에 매달렸다. 다솜은 떨어진 병뚜껑을 발끝으로 막고 다시 집어 올렸지만, 손톱으로 새긴 세 번째 흠집이 피곤한 선처럼 비뚤어졌다. 유리문 밖 형광 조끼를 입은 감염자 하나가 네온빛에 젖은 이마를 문에 대고 흔들렸다. 다솜은 여섯 개의 병뚜껑을 일렬로 세우고, 백이안은 아직 계산대 아래 어둠을 보고 있었다.

02· 감염 첫날 밤 11시 48분

냉장고 푸른빛 아래

냉장고 푸른빛 아래
장소올리브영 명동점 병뚜껑 계산대
시간감염 첫날 밤 11시 48분
사건윤다솜은 카운터 냉장고 문을 팔꿈치로 밀어 닫고, 푸른빛 앞에 굴러간 박카스 디카페 병뚜껑 하나를 손바닥으로 눌러 세운다. 백이안은 계산대 옆 바닥에 무릎을 대고 앉은 채 오쏘몰 바이탈 포장 끈이 묶인 자기 손목을 빼내려 한다. 유리문 밖 형광 조끼 감염자들이 행사 매대 박스를 밀자, 다솜은 “다음 분”이라고 말하며 병뚜껑을 다시 줄 세우지만 손끝이 흔들려 두 개가 서로 부딪힌다. 백이안이 낮은 목소리로 “저도 순서 주세요”라고 말하자, 다솜은 그의 손목을 붙잡아 계산대 안쪽으로 끌어당기고 병뚜껑 하나를 그의 손앞에서 치운다.
영향다솜이 만든 번호표 의식은 유지되는 듯 보이지만, 백이안이 그 질서 밖에서 자기 자리를 요구하면서 균열이 커진다. 다솜은 손님을 부르는 직원의 말투로 상황을 누르려 하지만, 병뚜껑이 흔들리는 모습이 그녀의 통제력이 이미 약해졌음을 드러낸다. 냉장고의 푸른빛, 박카스 디카페 병뚜껑, 오쏘몰 바이탈 끈은 더 이상 상품 진열의 일부가 아니라 생존 순서를 증명하는 물건이 된다. 장면 끝에서 다솜은 백이안이 곧 계산대 아래로 기어들 틈을 만들고 있다는 것을 막지 못한 채, 유리문 쪽으로 밀려오는 감염자들의 압박을 동시에 감당해야 한다.

윤다솜은 카운터 냉장고 문을 팔꿈치로 밀어 닫고, 푸른빛 아래로 굴러간 박카스 디카페 병뚜껑을 손바닥으로 찍어 눌렀다. 차가운 플라스틱 계산대 위에서 병뚜껑 여섯 개가 짧게 떨렸고, 손톱으로 낸 흠집들이 형광등 아래 은색 가루처럼 번쩍였다. 유리문 밖 형광 조끼 감염자 둘이 행사 매대 박스를 어깨로 밀자, 매장 안쪽 진열대가 끼익 하고 한 뼘도 안 되게 밀렸다. 다솜은 목을 곧게 세우고 말했다. “다음 분.” 목소리는 또렷했지만, 그녀의 엄지손톱은 세 번째 병뚜껑 가장자리를 계속 긁고 있었다.

백이안이 계산대 옆 바닥에서 몸을 낮췄다. 그의 손목에는 오쏘몰 바이탈 포장 끈이 느슨하게 걸려 있었고, 그는 그것을 빼내려다 다솜에게 손등을 잡혔다. “저도 순서 주세요. 저 밖에 나가야 돼요.” 백이안의 턱 아래 붉은 자국이 냉장고 빛에 더 짙어 보였다. 다솜은 대답 대신 그의 앞에 있던 병뚜껑 하나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고, 백이안은 입술을 깨문 채 계산대 아래 먼지 낀 전선 쪽으로 시선을 내렸다.

바깥에서 젖은 손바닥들이 유리를 문질렀다. 다솜은 병뚜껑들을 다시 한 줄로 세웠지만, 두 번째와 네 번째가 서로 맞물려 엎어졌다. 백이안은 다솜이 고개를 돌린 사이 한쪽 무릎을 계산대 밑 그림자 속으로 밀어 넣었다. 냉장고의 푸른빛이 그의 후드 끝을 잘라 내듯 비추고, 다솜의 손바닥 아래 마지막 병뚜껑 하나가 납작하게 눌린 채 더는 굴러가지 않았다.

03· 밤 11시 49분

계산대 아래의 손

계산대 아래의 손
장소올리브영 명동점 병뚜껑 계산대
시간밤 11시 49분
사건백이안이 계산대 아래 먼지 낀 전선 사이로 몸을 밀어 넣고, 깨진 아크릴 조각 너머에 떨어진 애크논 크림을 움켜쥔다. 윤다솜은 그를 끌어내려 계산대 모서리를 돌아가지만, 이안은 턱의 붉은 자국을 손등으로 가린 채 감염이 아니라고 외친다. 그의 움직임에 바코드 스캐너 선이 당겨지고, 박카스 디카페 병뚜껑 하나가 계산대에서 떨어져 아크릴 조각 사이로 굴러 들어간다.
영향다솜이 만든 순서는 처음으로 눈앞에서 물리적으로 흐트러진다. 백이안의 얼굴 트러블은 감염 의심과 자기 생존 주장을 동시에 불러오며, 병뚜껑을 믿고 있던 질서가 흔들린다. 다솜은 이안을 단순한 방해물로 끌어낼지, 그가 들어간 낮은 틈을 새로운 방어선으로 볼지 판단해야 하는 지점으로 밀려난다.

백이안이 계산대 아래로 팔을 뻗어 깨진 아크릴 조각 사이의 애크논 크림을 낚아채자, 윤다솜은 박카스 디카페 병뚜껑을 손바닥으로 눌러 세우던 동작을 멈추고 카운터를 돌아 뛰었다. 냉장고의 푸른빛이 바닥 전선 위에 걸린 그의 손목을 잘랐고, 먼지 묻은 후드 소매가 바코드 스캐너 선을 잡아당겼다. 병뚜껑 하나가 계산대 끝에서 떨어져 딸깍, 하고 굴렀다. 다솜은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나오세요. 지금 그거 바를 때 아니에요.” 다솜이 낮게 말하자, 백이안은 애크논 크림을 가슴에 붙이고 더 깊이 기어들었다. “저 감염 아니에요. 내일 평가라서요.” 그는 턱을 손등으로 가렸지만 붉게 올라온 자국은 형광등 아래 더 선명했다. 다솜의 손끝이 그의 운동화 뒤축을 놓치는 순간, 계산대 위 남은 병뚜껑들이 한꺼번에 흔들리며 서로 부딪혔다.

유리문 쪽에서 행사 매대 박스가 밀리는 소리가 났고, 백이안은 몸을 움츠리다 파티온 노스카나인 트러블 크림 진열대 아래쪽으로 어깨를 밀어 넣었다. 좁은 통로가 반쯤 막혔고, 다솜이 정해 둔 첫 번째 길도 함께 좁아졌다. 하지만 그가 버틴 진열대는 바깥 충격에 밀리다 멈췄다. 다솜은 그의 손에 찌그러진 애크논 크림과 바닥에 굴러간 병뚜껑을 번갈아 보다가, 계산대 아래 어둠 속에서 바코드 스캐너의 붉은 빛이 한 번 깜박이는 것을 보았다.

04· 밤 11시 49분

막힌 통로, 버틴 진열대

막힌 통로, 버틴 진열대
장소올리브영 명동점 병뚜껑 계산대와 파티온 진열대 앞
시간밤 11시 49분
사건윤다솜은 계산대 아래로 기어든 백이안의 발목을 붙잡고 끌어내려 한다. 백이안은 애크논 크림을 움켜쥔 채 파티온 노스카나인 트러블 크림 진열대 밑으로 어깨를 밀어 넣고 버틴다. 그 바람에 첫 번째 탈출자가 지나갈 통로는 막히지만, 진열대가 자동문 앞에서 밀려오던 행사 매대 박스를 받치며 방어선이 잠깐 멈춘다.
영향다솜은 백이안을 단순한 방해물로 끌어내면 오히려 유리문 방어선이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을 본다. 백이안은 자신의 얼굴을 숨기려는 행동으로 모두의 탈출로를 막지만, 동시에 감염자들이 밀고 들어오는 힘을 몇 초 늦춘다. 병뚜껑으로 세운 순서는 처음으로 몸의 위치와 물건의 무게 앞에서 흔들린다.

윤다솜은 계산대 밑으로 팔을 집어넣어 백이안의 운동화 뒤축을 움켜쥐고 잡아당겼다. 깨진 아크릴 조각들이 바닥에서 밀리며 짧게 긁혔고, 백이안의 손에는 찌그러진 애크논 크림 튜브가 하얗게 끼어 있었다. “나와요. 지금 거기 막으면 안 돼요.” 다솜이 이를 악물고 당기자, 백이안은 반대로 몸을 비틀어 파티온 노스카나인 트러블 크림 진열대 밑으로 한쪽 어깨를 깊이 밀어 넣었다.

진열대가 덜컥 내려앉듯 기울었다. 연분홍 박스 몇 개가 쏟아져 백이안의 등과 바닥 사이에 끼었고, 그가 짧게 숨을 삼켰다. “저 감염 아니에요. 진짜 아니에요.” 그의 말끝이 갈라지는 순간, 유리문 쪽에서 밀려오던 행사 매대 박스가 파티온 진열대 모서리에 걸려 멈췄다. 자동문 틈으로 들어오던 형광 조끼 감염자의 손가락이 허공을 긁었지만 더 안쪽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다솜의 손에서 백이안의 발목이 빠져나갔다. 그녀는 무릎을 꿇은 채 계산대 위를 돌아보았다. 박카스 디카페 병뚜껑 여섯 개는 줄에서 벗어나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흩어져 있었고, 첫 번째 흠집 난 뚜껑 하나가 카운터 가장자리에서 빙글 돌다 멈췄다. 백이안은 진열대 밑에서 어깨를 떨며 버티고 있었고, 그의 손등에 묻은 애크논 크림이 먼지와 섞여 회색으로 번졌다.

05· 감염 첫날 밤 11시 49분

삑, 한 번

삑, 한 번
장소올리브영 명동점 병뚜껑 계산대와 파티온 진열대 앞
시간감염 첫날 밤 11시 49분
사건윤다솜은 흩어진 박카스 디카페 병뚜껑을 다시 세며 사람 수를 맞추려다가 계산대 아래 전선에 걸린 바코드 스캐너를 습관처럼 집어 든다. 파티온 노스카나인 트러블 크림 진열대 밑에 낀 백이안은 빠져나오려 하지 않고, 어깨로 진열대 바퀴를 눌러 자동문 쪽 방어선을 버틴다. 다솜이 백이안에게 나오라고 손을 뻗는 순간, 스캐너가 그녀의 손바닥에서 켜져 짧게 삑 울린다. 유리문 밖 감염자들의 고개가 동시에 계산대 쪽으로 돌아가고, 다솜은 스캐너를 계산대 아래 어둠 속으로 던져 넣는다.
영향감염자들이 반복적인 전자음에 반응한다는 규칙이 처음으로 몸으로 확인된다. 다솜은 자신의 직원 습관이 사람들을 줄 세우는 도구이면서 동시에 감염자들을 부르는 위험이 될 수 있음을 보게 된다. 백이안은 질서를 망가뜨린 방해자가 아니라, 낮은 곳에서 몇 초를 벌어 주는 방어물이 된다. 병뚜껑으로 만든 순서는 그대로 남아 있지만, 이제 다솜은 숫자보다 소리와 몸의 위치를 먼저 계산해야 한다.

윤다솜은 계산대 아래로 팔을 찔러 넣어 바코드 스캐너 줄을 잡아당겼다. 먼지 낀 전선이 같이 끌려 나오고, 박카스 디카페 병뚜껑 하나가 그녀의 무릎 옆에서 딸깍 멈췄다. 파티온 노스카나인 트러블 크림 진열대 밑에서는 백이안이 어깨를 더 깊이 밀어 넣고 있었다. 그의 손등에 묻은 애크논 크림은 회색 먼지와 뭉쳐 있었고, 연분홍 박스 두 개가 그의 갈비뼈 옆에서 찌그러졌다. 다솜이 이를 악물었다. “나와요. 거기서 빠져야 길이 생겨요.”

백이안은 고개를 세게 저었다. “빼면 저 문 밀려요.” 그 말과 함께 유리문 쪽 행사 매대 박스가 다시 밀렸고, 진열대 바퀴가 바닥을 긁다 백이안의 어깨에 걸려 멈췄다. 다솜은 한 손으로 병뚜껑을 세고 다른 손으로 스캐너를 움켜쥐었다. 손가락이 방아쇠를 눌렀다. 삑. 아주 짧은 소리였다.

유리문 밖 형광 조끼 감염자들의 턱이 한꺼번에 들렸다. 네온빛에 젖은 얼굴들이 계산대 쪽으로 돌아섰고, 유리에 붙은 손바닥들이 방향을 바꿔 미끄러졌다. 다솜은 숨을 삼키고 스캐너를 계산대 아래 가장 어두운 곳으로 던졌다. 플라스틱 몸체가 전선 더미에 부딪혀 한 번 튀고, 붉은 스캔 불빛이 먼지 속에서 짧게 깜박이다 꺼졌다. 백이안은 진열대 밑에서 입을 틀어막은 채, 애크논 크림이 묻은 손으로 바퀴를 더 세게 눌렀다.

챕터 02

06· 밤 11시 49분

누런 복도에서 끌려온 것

누런 복도에서 끌려온 것
장소뒷문 배송 복도에서 파티온 창고 뒤편 입구
시간밤 11시 49분
사건윤다솜은 파티온 창고 뒤 눅눅한 배너를 젖히고 누런 보안등이 켜진 배송 복도로 뛰어든다. 문태경이 류하민의 겨드랑이를 붙든 채 콘크리트 바닥 위로 끌고 나타나고, 피 묻은 배송 송장 몇 장이 두 사람 발밑에서 구겨진다. 다솜은 류하민의 맥을 확인하려 손을 뻗지만, 문태경이 송장 뭉치를 가슴에 눌러 안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선다. 그가 “살아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류하민의 손에 들린 오쏘몰 바이탈 샘플 박스가 바닥에 부딪혀 둔하게 울린다.
영향다솜은 매장 안 질서가 유리문 앞에서만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뒷문 쪽에서도 무너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문태경은 구조를 요청하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송장을 숨기는 손과 목덜미를 가리는 자세 때문에 즉시 의심의 대상이 된다. 류하민이 살아 있다는 사실은 희망이지만, 동시에 다솜이 버릴 수 없는 짐이 하나 더 생겼다는 뜻이 된다. 배송 복도는 탈출로가 아니라 협상과 의심이 시작되는 좁은 함정으로 바뀐다.

윤다솜은 파티온 노스카나인 트러블 크림 배너를 팔꿈치로 밀쳐 젖히고 뒷문 배송 복도로 뛰어들었다. 누런 보안등 아래 문태경이 류하민의 겨드랑이를 끼고 끌려오듯 나타났고, 류하민의 운동화 뒤축이 피 묻은 배송 송장 위를 긁으며 접힌 종이를 콘크리트에 납작하게 눌렀다. 문태경의 한 손에는 구겨진 송장 뭉치가 가슴팍에 붙어 있었고, 다른 손은 류하민의 몸을 놓지 않으려 손가락 끝까지 하얗게 힘이 들어가 있었다. “매니저님 살아 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고, 턱은 이상할 만큼 오른쪽 어깨에 붙어 있었다.

다솜이 류하민의 목덜미가 아니라 손목을 잡으려 몸을 낮추자, 문태경이 반 발짝 뒤로 물러나며 류하민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류하민의 손에서 오쏘몰 바이탈 샘플 박스가 미끄러져 바닥에 부딪혔고, 안쪽에서 작은 플라스틱 같은 것이 한 번 덜컥거렸다. 다솜은 그 소리에 눈을 내리지 않고 문태경의 가슴에 눌린 송장 끝을 보았다. 피가 번진 종이 모서리 사이로 숫자 몇 개가 보였다가 그의 손바닥 아래 사라졌다. “그거 내려놔요.” 다솜이 말하자 문태경은 웃으려다 입술만 비틀었다. “이거 없으면 뒷문도 못 갑니다.”

바깥 유리문 쪽에서 진열대가 다시 끼익 하고 밀리는 소리가 창고 뒤까지 들어왔다. 파티온 박스들이 선반 위에서 작게 떨렸고, 밟힌 샘플 파우치의 흰 크림이 박스 모서리에 더 넓게 묻었다. 류하민은 바닥에 한쪽 무릎이 끌린 채 고개를 들지 못했지만, 손가락으로 오쏘몰 박스 끈을 놓지 않았다. 다솜은 무전기를 쥔 손을 허리 뒤로 숨기고, 문태경과 류하민 사이의 좁은 틈에 발을 밀어 넣었다.

07· 밤 11시 49분

노스카나를 든 손

노스카나를 든 손
장소뒷문 배송 복도와 파티온 창고 뒤편 입구
시간밤 11시 49분
사건윤다솜은 류하민의 팔을 붙잡아 숨을 확인하려 하고, 문태경은 노스카나 튜브를 흔들며 그 손을 막는다. 문태경은 류하민이 살아 있다고 주장하지만, 턱을 어깨에 붙여 목덜미를 끝까지 가리고 피 묻은 배송 송장 뭉치를 가슴에 눌러 숨긴다. 다솜이 송장을 빼앗으려 하자 문태경은 류하민의 몸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고, 송장 몇 장이 콘크리트 바닥에 떨어진다.
영향다솜은 문태경이 구조자이자 위험물일 수 있다는 사실을 동시에 받아들인다. 노스카나 튜브는 상처를 치료하는 물건이 아니라, 문태경이 의심을 돌리기 위해 흔드는 작은 방패가 된다. 류하민이 아직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은 희망을 만들지만, 문태경의 숨긴 송장과 목덜미는 다솜이 그를 믿지 못하게 만든다.

윤다솜은 누런 보안등 아래로 무릎을 밀어 넣고 류하민의 축 늘어진 손목을 잡아 올렸다. 뒷문 배송 복도의 거친 콘크리트 바닥에는 피 묻은 배송 송장들이 신발 자국에 접혀 있었고, 문태경은 류하민의 겨드랑이를 붙든 채 한 손으로 작은 노스카나 튜브를 다솜 앞에 들이밀었다. “숨 쉽니다. 매니저님 아직 숨 쉬어요.” 그의 말은 급했지만, 턱은 오른쪽 어깨에 단단히 붙어 있었다.

다솜이 류하민의 셔츠 깃을 젖히려 손을 뻗자 문태경은 노스카나 튜브로 그 손등을 툭 쳐냈다. “상처부터 보면 늦습니다.” 다솜은 대답하지 않고 그의 가슴팍을 눌렀다. 피가 번진 송장 뭉치가 회색 조끼 안쪽에서 반쯤 드러났고, 문태경은 류하민을 더 세게 끌어안았다. 그 바람에 송장 몇 장이 빠져나와 콘크리트에 납작하게 떨어졌고, 마른 종이 부딪히는 소리가 복도 끝까지 굴러갔다.

파티온 창고 뒤편 선반이 바깥 충격에 작게 떨렸다. 연분홍 파티온 노스카나인 트러블 크림 박스들 사이로 눅눅한 배너가 접힌 채 밀려 있었고, 류하민의 입술은 피가 말라 검게 갈라져 있었다. 다솜은 떨어진 송장 한 장을 발끝으로 자기 쪽에 끌어오며 문태경의 목덜미를 보았다. 그는 더 낮게 웃으려다 실패하고, 노스카나 튜브를 쥔 손만 하얗게 굳혔다.

08· 밤 11시 50분 무렵

비밀번호가 적힌 종이

비밀번호가 적힌 종이
장소뒷문 배송 복도와 파티온 창고 뒤편 입구
시간밤 11시 50분 무렵
사건문태경은 류하민을 바닥에 완전히 내려놓지 않은 채 피 묻은 배송 송장 뭉치를 가슴에 더 세게 눌러 붙인다. 그는 뒷문 비밀번호가 적힌 송장을 봤다고 말하며, 자신을 풀어 주면 하역장까지 가는 동선을 안내하겠다고 버틴다. 윤다솜은 류하민의 창백한 얼굴과 문태경 손아귀 밖으로 삐져나온 숫자 조각 사이에서 손을 뻗지 못한다. 문태경이 송장 한 장을 반쯤 꺼내 보이자, 바깥 충격에 파티온 박스 선반이 흔들리고 종이 모서리에 번진 피가 비밀번호 일부를 가린다.
영향비밀번호는 처음으로 탈출 가능성을 가진 정보가 되지만, 그것을 쥔 문태경은 동시에 의심스러운 상처를 숨긴 위험한 사람으로 남는다. 다솜은 류하민을 살리려면 문태경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문태경을 믿으려면 그의 목덜미를 보지 못한 채 시간을 써야 한다. 송장은 물류 기록이 아니라 협상 카드가 되며, 복도는 구조 통로가 아니라 서로를 인질로 잡는 좁은 장소가 된다. 이 장면은 다솜이 곧 문태경을 묶으면서도 송장을 빼앗으려 하게 만드는 압력을 만든다.

문태경은 류하민의 겨드랑이를 한 팔로 걸어 올린 채, 다른 손으로 피 묻은 배송 송장 한 장을 뭉치에서 반쯤 뽑아 윤다솜 앞에 들이밀었다. 누런 보안등 아래 송장 모서리는 젖은 잎처럼 휘었고, 콘크리트 바닥에는 류하민의 운동화가 끌린 자국이 검게 이어졌다. “뒷문 비번, 여기 있습니다.” 문태경은 턱을 오른쪽 어깨에 붙인 채 말했다. “나 풀어 주면 하역장까지 데려갑니다.”

다솜은 손을 뻗다가 멈췄다. 송장 끝에는 숫자 네 개 중 앞자리 둘만 보였고, 나머지는 문태경의 엄지와 피에 눌려 있었다. 류하민이 낮게 숨을 들이키며 오쏘몰 바이탈 샘플 박스를 놓칠 듯 흔들자, 안쪽에서 작은 플라스틱이 다시 덜컥거렸다. 다솜이 한 발 다가서자 문태경은 류하민의 몸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겨 세우고 송장을 가슴에 붙였다. “먼저 약속해요. 나 묶지 않는다고.”

파티온 창고 뒤 선반이 바깥 충격에 떨리며 연분홍 박스 두 개가 떨어졌다. 밟힌 샘플 파우치에서 터진 흰 크림이 송장 위로 튀어 숫자 하나를 흐리게 덮었다. 다솜은 무전기를 쥔 손을 허리 뒤에서 꺼내지 못한 채, 류하민의 창백한 입술과 문태경의 숨겨진 목덜미를 번갈아 보았다. 문태경의 손아귀 안에서 종이가 구겨지는 소리가 좁은 배송 복도 끝까지 납작하게 밀려갔다.

09· 감염 첫날 밤, 11시 50분대

목덜미를 보이라는 말

목덜미를 보이라는 말
장소뒷문 배송 복도와 파티온 창고 뒤편 입구
시간감염 첫날 밤, 11시 50분대
사건윤다솜이 문태경의 목덜미 상처를 확인하려고 류하민의 몸 너머로 손을 뻗는다. 문태경은 류하민을 끌어안아 자기 앞에 세우듯 버티고, 가슴에 숨긴 배송 송장 뭉치를 더 세게 눌러 쥔다. 바깥 충격으로 파티온 박스 선반이 흔들리자 송장 몇 장이 문태경의 조끼 안에서 빠져나와 콘크리트 바닥에 떨어진다. 다솜은 목덜미를 보이라는 말을 끝까지 물리지 않고, 떨어진 송장과 문태경의 숨긴 상처 사이에서 다음 선택을 강요받는다.
영향문태경은 류하민을 살려 온 사람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류하민을 방패로 쓰는 사람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다솜은 문태경을 완전히 믿을 수 없고, 그렇다고 뒷문 비밀번호와 하역장 동선을 아는 그를 버릴 수도 없다. 송장은 탈출 정보가 아니라 인질이 되고, 류하민의 몸은 구조 대상이자 협상 도구가 된다. 이 장면은 다솜이 다음 순간 문태경을 묶고 송장을 빼앗으려는 결정을 밀어낸다.

윤다솜은 류하민의 축 처진 어깨를 붙잡고 문태경 쪽으로 몸을 밀어 넣으며 말했다. “목덜미 보여요.” 누런 보안등 아래 뒷문 배송 복도는 세 사람의 어깨를 한 줄로 눌렀고, 바닥의 피 묻은 배송 송장들이 젖은 운동화 밑창에 접혀 들러붙었다. 문태경은 류하민의 겨드랑이를 더 깊이 끌어안고 턱을 오른쪽 어깨에 박았다. “지금 그거 볼 시간 없습니다.” 그의 손에 쥔 노스카나 튜브가 류하민의 셔츠 앞에서 작게 찌그러졌다.

다솜이 한 손으로 류하민의 깃을 젖히고 다른 손으로 문태경의 조끼 앞섶을 잡아당기자, 문태경이 몸을 틀었다. 류하민의 무릎이 콘크리트에 부딪히고, 품에 끼워져 있던 오쏘몰 바이탈 샘플 박스가 벽에 닿아 덜컥거렸다. 파티온 창고 뒤편 선반이 바깥 충격에 떨리며 연분홍 박스 두 개가 기울었고, 문태경의 가슴에서 송장 몇 장이 빠져나와 바닥에 납작하게 떨어졌다. 그중 한 장 끝에는 피에 번진 숫자 네 개가 보였다가 문태경의 발이 급히 밟아 가렸다.

다솜은 그의 발목을 걷어차 송장 한 장을 빼냈지만, 문태경은 류하민의 몸을 방패처럼 세운 채 뒤로 물러났다. 류하민의 입술 안쪽에서 피가 번져 나왔고, 그는 눈을 반쯤 뜬 채 파티온 배너 쪽으로 손가락을 허공에 들었다가 떨어뜨렸다. 복도 끝에서 유리문 쪽 진열대가 밀리는 둔한 소리가 다시 들어왔다. 다솜의 손에는 피 묻은 송장 한 귀퉁이만 남고, 문태경의 목덜미는 끝까지 어깨 뒤에 숨었다.

10· 밤 11시 50분대, 바코드 스캐너 소리가 감염자들을 돌려세운 직후

무전기 줄의 매듭

무전기 줄의 매듭
장소뒷문 배송 복도와 파티온 창고 뒤편 선반
시간밤 11시 50분대, 바코드 스캐너 소리가 감염자들을 돌려세운 직후
사건윤다솜은 무전기 줄을 풀어 문태경의 손목에 감고, 그를 파티온 창고 뒤편 선반 기둥에 묶는다. 문태경은 류하민을 놓지 않으려 몸을 비틀고, 송장 뭉치를 가슴에 눌러 숨기지만 몇 장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다솜은 떨어진 송장을 발끝으로 끌어당겨 자기 쪽에 모으고, 류하민의 오쏘몰 바이탈 샘플 박스까지 선반 안쪽으로 밀어 넣어 통제하려 한다. 그 순간 유리문 쪽에서 진열대가 한 뼘 밀리는 소리가 창고 뒤까지 들어오고, 선반 위 파티온 박스들이 흔들린다.
영향다솜은 문태경을 믿지 않기로 선택하지만, 그를 버리지는 못한다. 문태경은 협상력을 일부 잃고 묶인 채 남지만, 뒷문 비밀번호와 하역장 동선을 아는 사람이라는 가치 때문에 여전히 위험한 열쇠로 남는다. 류하민과 송장과 오쏘몰 박스가 모두 다솜의 손이 닿는 범위 안에 들어오지만, 그만큼 탈출 준비는 더 느려진다. 유리문 쪽 진열대가 밀리는 소리는 다솜의 통제가 시간을 벌지 못하고 오히려 시간을 묶어 버렸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윤다솜은 허리 뒤에서 무전기를 낚아채 줄을 뽑아 문태경의 손목에 감았다. 누런 보안등 아래, 뒷문 배송 복도의 콘크리트 벽이 세 사람의 어깨를 밀어붙였고, 파티온 창고 뒤편 선반 기둥에는 연분홍 노스카나인 트러블 크림 박스들이 천장까지 쌓여 있었다. 문태경은 류하민의 겨드랑이를 놓지 않으려고 몸을 틀었고, 류하민의 운동화 뒤축이 피 묻은 배송 송장을 긁어 접었다. “묶으면 길 못 갑니다.” 문태경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다솜은 대답하지 않고 줄을 한 번 더 돌려 손목뼈 아래에서 매듭을 당겼다.

문태경이 가슴에 눌러 숨긴 송장 뭉치가 흔들리며 세 장이 바닥에 떨어졌다. 마른 종이가 콘크리트에 납작하게 부딪히는 소리가 좁은 복도 끝까지 굴렀다. 다솜은 한 손으로 류하민의 어깨를 선반에 기대게 하고, 다른 발끝으로 떨어진 송장을 자기 쪽으로 끌어왔다. 문태경은 노스카나 튜브를 쥔 손을 들어 보이려 했지만, 무전기 줄이 선반 기둥에 걸려 팔이 반쯤에서 멈췄다. 류하민의 손에 들린 오쏘몰 바이탈 샘플 박스가 바닥으로 기울자, 다솜은 그것까지 무릎으로 밀어 선반 안쪽에 붙였다.

그때 유리문 쪽에서 진열대가 끼익 하고 밀렸다. 한 뼘쯤, 그러나 충분히 큰 소리였다. 파티온 박스들이 선반 위에서 떨리고, 눅눅한 종이 배너가 문틈 사이로 더 깊게 구겨졌다. 다솜은 매듭 끝을 손바닥에 감아 세게 당겼고, 문태경의 손목 살이 줄 아래로 붉게 눌렸다. 바닥의 송장 한 장에는 피와 흰 샘플 크림이 번져 숫자 절반이 지워져 있었다.

챕터 03

11· 밤 11시 50분대, 문태경이 묶인 직후

민트색 증거

민트색 증거
장소검가드 샘플 테이블
시간밤 11시 50분대, 문태경이 묶인 직후
사건고명례가 검가드 샘플 테이블 앞에서 서봉춘의 입가를 물티슈로 닦고, 민트색 액체가 남은 종이컵을 들어 윤다솜과 백이안에게 보인다. 서봉춘은 입안을 헹군 뒤 붉게 탁해진 침을 컵 안에 뱉고, 고명례는 그것이 물린 흔적이 아니라 임플란트 잇몸에서 난 피라고 낮게 우긴다. 윤다솜은 병뚜껑 계산대 쪽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서봉춘의 입술을 확인하려 다가오고, 백이안은 파티온 창고 뒤편 낮은 곳에서 그 장면을 지켜본다.
영향검가드 샘플컵은 서봉춘이 아직 사람이라는 증거처럼 쓰이지만, 컵 안의 붉은 자국은 오히려 의심을 더 선명하게 만든다. 고명례는 남편을 지키기 위해 처음으로 다솜의 질서와 정면으로 부딪히고, 다솜은 병뚜껑 순서에 서봉춘의 몸 상태까지 계산해야 한다. 백이안은 고명례가 얼마나 절박한지 가까이서 보게 되며, 이후 그녀의 바꿔치기를 목격할 위치에 놓인다.

고명례는 서봉춘의 턱을 한 손으로 붙잡고 물티슈를 그의 아랫입술에 세게 눌렀다. 검가드 샘플 테이블 위에는 반쯤 찌그러진 종이컵들이 반원으로 놓여 있었고, 가장 앞 컵 안의 민트색 액체는 붉은 침과 섞여 흐린 회색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서봉춘이 고개를 빼려 하자 고명례는 팔꿈치로 그의 가슴을 막고 컵을 윤다솜 쪽으로 들어 보였다. “잠깐만 보이소. 물린 게 아이라 잇몸이라니까예.”

윤다솜은 병뚜껑 계산대에서 한 걸음 내려와 박카스 디카페 병뚜껑 하나를 손안에 쥔 채 멈췄다. 그녀의 눈은 컵보다 서봉춘의 입가에 먼저 꽂혔고, 서봉춘은 웃는 척하다가 피 맛을 삼키며 검가드 컵 가장자리를 손가락으로 눌러 찌그러뜨렸다. 파티온 창고 뒤편 낮은 선반 아래에서 백이안이 숨을 짧게 끊어 쉬었고, 그의 손에는 아직 애크논 크림 튜브가 잡혀 있었다. 다솜이 “입 안 좀 볼게요”라고 말하자 고명례는 컵을 더 높이 들어 두 사람 사이를 가렸다.

서봉춘은 결국 검가드 액체를 한 모금 더 머금고 헹군 뒤, 컵 안에 조심스럽게 뱉었다. 붉은 줄 하나가 컵 안쪽 종이를 타고 내려가 민트색 웅덩이에 퍼졌고, 고명례는 그 컵을 증거처럼 테이블 한가운데 세워 놓았다. 윤다솜은 병뚜껑을 다시 계산대 위에 올렸지만 손을 떼지 않았고, 백이안은 파티온 박스 그림자 속에서 고명례의 손과 그 병뚜껑을 번갈아 보았다.

12· 밤 11시 50분경

컵벽이 접히는 소리

컵벽이 접히는 소리
장소검가드 샘플 테이블과 병뚜껑 계산대 사이
시간밤 11시 50분경
사건서봉춘은 검가드 샘플컵을 쥔 채 웃어 보이려다 피 맛을 삼키고, 컵 가장자리를 손가락으로 눌러 찌그러뜨린다. 고명례는 그의 손등과 입가를 몸으로 가리며 윤다솜의 시선을 막으려 한다. 윤다솜은 계산대 위 박카스 디카페 병뚜껑을 쥔 채 서봉춘의 입술과 컵 안의 붉은 자국을 번갈아 보고, 백이안은 파티온 창고 뒤편 낮은 그림자 속에서 그 장면을 지켜본다.
영향서봉춘의 출혈은 검가드로 해명될수록 더 의심스러운 증거가 된다. 고명례는 남편을 지키기 위해 다솜의 질서 안에서 얌전히 기다릴 수 없다는 것을 몸으로 받아들인다. 다솜은 아직 순서를 바꾸지 않지만, 병뚜껑과 상처를 함께 계산하기 시작하고, 백이안은 고명례가 곧 무언가를 할 사람이라는 위치를 보게 된다.

서봉춘은 검가드 샘플컵을 들어 입가를 가리려다 손가락에 힘을 너무 줘 컵벽을 바스락 접었다. 허리 높이의 작은 판촉 테이블 위에서 반원으로 놓인 종이컵들이 하나씩 밀렸고, 민트색 액체에 섞인 붉은 침 자국이 따뜻한 매장 조명 아래 탁하게 흔들렸다. 고명례는 곧장 서봉춘의 손등 위에 자기 손을 덮고, 물티슈 뭉치를 그의 입술 쪽으로 밀어 올렸다. “웃지 마이소.” 그녀가 낮게 말했다. 서봉춘은 그래도 입꼬리를 올리려다 목울대를 움직였고, 컵 안에 남은 액체가 가장자리까지 올라왔다 내려갔다.

윤다솜은 병뚜껑 계산대 앞에서 움직임을 멈췄다. 그녀의 손아귀 안 박카스 디카페 병뚜껑 하나가 플라스틱 상판을 긁었고, 손톱으로 새긴 흠집이 푸른 냉장고 빛을 받아 짧게 번쩍였다. “입 안을 보여 주세요.” 다솜이 말하자 고명례는 서봉춘 앞에 반 걸음 더 섰고, 찌그러진 검가드 컵을 증거처럼 들어 올렸다. “보이소, 헹궜다 아입니까. 잇몸 피라예.” 파티온 창고 뒤편에서는 백이안이 애크논 크림 튜브를 쥔 손을 무릎 사이에 숨긴 채 숨을 짧게 끊었다.

서봉춘은 아내의 팔을 살짝 밀어내려 했지만, 고명례는 물러서지 않았다. 다솜의 눈은 컵에서 서봉춘의 입술로, 다시 계산대 위 병뚜껑들로 갔다. 유리문 쪽에서 행사 매대가 한 번 더 밀리는 소리가 났고, 테이블 위 종이컵들이 얇게 떨렸다. 고명례는 컵 가장자리를 엄지로 다시 펴 보려 했지만, 눌린 자국은 돌아오지 않았다. 찌그러진 컵은 그녀의 손바닥 안에서 작은 방패처럼 납작해져 있었다.

13· 감염 첫날 밤 11시 50분대 초반

두 번째 흠집

두 번째 흠집
장소검가드 샘플 테이블과 병뚜껑 계산대 사이
시간감염 첫날 밤 11시 50분대 초반
사건윤다솜이 병뚜껑 계산대에서 두 번째 흠집이 난 박카스 디카페 병뚜껑을 집어 다른 사람에게 넘기려 한다. 고명례는 검가드 샘플 테이블 위 물티슈 뭉치를 일부러 바닥에 떨어뜨리고, 허리를 숙이는 척 계산대 가장자리로 손을 뻗는다. 서봉춘은 피 묻은 입술을 다문 채 그녀를 말리려 하지만, 고명례는 그의 병뚜껑과 앞순서 병뚜껑을 재빨리 바꿔 놓는다. 백이안은 파티온 창고 뒤 어둠에서 그 움직임을 거의 보지만 아직 확신하지 못한다.
영향고명례는 처음으로 다솜이 세운 생존 질서를 직접 조작한다. 서봉춘은 아내가 자신을 살리려 거짓말을 넘어서 행동까지 저질렀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도 그 자리에서 막지 못한다. 다솜의 병뚜껑 순서는 겉으로는 유지되지만, 작은 흠집 하나의 위치가 바뀌면서 다음 장면의 목격과 거래가 가능해진다. 백이안은 고명례를 협박할 수 있는 위치에 놓이고, 검가드 샘플컵의 해명은 병뚜껑 조작이라는 더 위험한 거짓말로 이어진다.

고명례는 검가드 샘플 테이블 위 물티슈 뭉치를 팔꿈치로 밀어 바닥에 떨어뜨렸다. 젖은 물티슈가 계산대 아래 깨진 아크릴 조각 사이에 납작하게 펼쳐졌고, 윤다솜은 두 번째 흠집이 난 박카스 디카페 병뚜껑을 손가락 사이에 끼운 채 “잠깐만요” 하고 몸을 돌렸다. 고명례는 “아이고, 미안합니더”라고 낮게 말하며 허리를 숙였고, 다른 손으로 서봉춘의 손바닥 안에 있던 병뚜껑을 빼냈다. 서봉춘이 그녀의 손목을 잡으려 했지만, 피 묻은 입술을 다문 그의 숨이 먼저 흔들렸다.

윤다솜이 물티슈를 발끝으로 밀어 치우는 사이, 고명례의 손이 계산대 모서리 위를 스쳤다. 두 번째 흠집이 난 병뚜껑과 서봉춘의 뒤순서 병뚜껑이 서로 자리를 바꾸며 작게 맞부딪혔다. 딱. 그 소리에 파티온 창고 뒤편의 백이안이 고개를 들었고, 손에 쥔 애크논 크림 튜브가 찌그러졌다. “뭐 하셨어요?” 윤다솜이 물었다. 고명례는 물티슈를 주워 서봉춘의 입가에 다시 눌렀다. “피 닦는다 아입니까. 보이소, 잇몸이라니까예.”

서봉춘은 고명례의 손등을 내려다보다가 말없이 검가드 샘플컵을 들어 입가를 가렸다. 윤다솜은 바뀐 병뚜껑들을 다시 줄 맞춰 세웠지만, 손톱으로 새긴 흠집의 방향이 조금 틀어진 것을 바로잡지 못했다. 파티온 창고 뒤에서 백이안의 휴대폰 화면이 잠깐 켜졌고, 검은 유리에 고명례의 굽은 어깨와 계산대 위 두 번째 흠집이 함께 비쳤다.

14· 감염 첫날 밤, 자정 직전

거울 속 목격자

거울 속 목격자
장소파티온 창고 뒤편과 병뚜껑 계산대 가장자리
시간감염 첫날 밤, 자정 직전
사건백이안이 파티온 창고 뒤편 선반 아래에서 휴대폰 전면 카메라를 켜고 턱의 붉은 자국을 확인한다. 화면 가장자리에는 병뚜껑 계산대가 비치고, 고명례의 손이 물티슈를 주우려는 척 박카스 디카페 병뚜껑 두 개를 바꿔 놓는 장면이 잡힌다. 백이안은 숨을 짧게 삼키며 휴대폰을 떨어뜨릴 뻔하고, 고명례는 그 작은 반응을 듣고 고개를 돌린다. 윤다솜은 아직 바뀐 병뚜껑을 모른 채 유리문 쪽 소리에 맞춰 사람들을 낮은 목소리로 재촉한다.
영향고명례의 거짓말은 이제 혼자만의 행동이 아니게 된다. 백이안은 그녀를 폭로할 수 있는 목격자가 되고, 고명례는 남편 서봉춘을 살리기 위해 그 목격자의 침묵까지 사야 하는 자리로 밀린다. 병뚜껑 순서는 겉으로는 그대로지만, 그 안의 신뢰는 처음으로 손안에서 바뀐 물건 하나 때문에 흔들린다. 다음 장면에서 고명례가 백이안에게 오쏘몰 바이탈을 건네며 거래를 시도할 압력이 생긴다.

백이안은 파티온 창고 뒤편 선반 밑으로 몸을 더 낮추고 휴대폰 전면 카메라를 켰다. 연분홍 파티온 노스카나인 트러블 크림 박스들이 그의 머리 위에서 흔들렸고, 화면 속에는 땀에 젖은 턱과 애크논 크림을 쥔 손가락이 먼저 떠올랐다. 그는 붉게 올라온 자국을 엄지로 가리려다 멈췄다. 화면 오른쪽 끝, 병뚜껑 계산대의 푸른빛 위로 고명례의 손이 들어왔다.

고명례는 물티슈 뭉치를 떨어뜨린 척 허리를 굽힌 채, 서봉춘의 찌그러진 검가드 샘플컵을 팔꿈치로 가리고 있었다. 그녀의 손끝이 흠집 난 박카스 디카페 병뚜껑 하나를 밀어내고, 앞순서 병뚜껑을 서봉춘 쪽으로 끌어왔다. 딱. 플라스틱이 계산대 모서리에 부딪히는 소리가 작게 났다. 백이안의 숨이 끊기듯 튀었고, 휴대폰이 손바닥에서 미끄러져 깨진 아크릴 조각 위에 반쯤 걸렸다. 고명례가 고개만 돌렸다. 두 사람의 눈이 휴대폰 검은 화면 위에서 마주쳤다.

윤다솜은 유리문 쪽을 보며 “소리 낮춰요, 지금 움직이면 안 됩니다”라고 말했다. 그녀의 손은 아직 바뀐 병뚜껑 위를 지나가지 않았다. 서봉춘은 피 묻은 입술을 검가드 컵 뒤에 숨긴 채 고명례의 소매를 잡으려 했지만, 고명례는 그 손을 조용히 떼어 냈다. 백이안은 휴대폰을 주워 가슴에 붙였고, 화면에는 고명례의 구부린 등과 서봉춘 앞에 놓인 새 병뚜껑이 작게 흔들렸다.

15· 밤 11시 50분경

은박 포장의 값

은박 포장의 값
장소파티온 창고 뒤편과 병뚜껑 계산대 가장자리
시간밤 11시 50분경
사건고명례가 파티온 창고 뒤편으로 다가가 백이안의 손바닥에 오쏘몰 바이탈 한 포를 눌러 쥐여 준다. 백이안은 휴대폰 화면을 끄지 못한 채 고명례가 바꾼 병뚜껑을 봤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고명례는 낮은 목소리로 그의 침묵을 요구한다. 윤다솜은 계산대에서 병뚜껑을 다시 세우지만, 은박 포장이 구겨지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다. 서봉춘은 검가드 샘플컵을 움켜쥔 채 두 사람 사이를 보지만, 아내를 막지 못한다.
영향고명례의 거짓말은 병뚜껑 바꿔치기에서 끝나지 않고, 목격자의 침묵을 사는 거래로 번진다. 백이안은 폭로할 수 있는 힘을 얻지만, 오쏘몰 바이탈 한 포를 손에 쥐면서 그 질서 안에 함께 묶인다. 다솜의 탈출 순서는 겉으로는 유지되지만, 이제 계산대 위 숫자보다 사람들 손안에 숨은 물건이 더 위험해진다. 다음 장면에서 고명례의 조작이 드러날 수 있는 압력이 생긴다.

고명례는 오쏘몰 바이탈 한 포를 찢어질 듯 움켜쥔 채 파티온 창고 뒤편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연분홍 파티온 노스카나인 트러블 크림 박스들이 무릎 높이에서 흔들렸고, 백이안은 선반 아래에 웅크린 채 휴대폰 전면 카메라를 끄지 못하고 있었다. 화면 검은 유리에는 계산대 위 박카스 디카페 병뚜껑 두 개와 고명례의 굽은 손목이 작게 비쳤다. 고명례는 그의 손을 잡아 펴고 은박 포장을 손바닥 한가운데 눌렀다.

백이안이 입술을 떼자 고명례가 먼저 속삭였다. “턱에 바를 거 찾았으면 입도 닫아 주소.” 그의 손가락이 반사적으로 오쏘몰 바이탈 포장을 쥐었고, 은박이 파티온 박스들 사이에서 바스락 구겨졌다. 그 소리에 윤다솜이 병뚜껑 계산대에서 고개를 돌렸지만, 고명례는 곧장 몸을 돌려 서봉춘의 입가에 물티슈를 다시 눌렀다. 서봉춘은 검가드 샘플컵을 든 손에 힘을 주다 컵벽을 또 찌그러뜨렸고, 붉게 흐린 민트색 액체가 가장자리까지 올라왔다.

백이안은 오쏘몰 바이탈 포장을 주머니에 넣지 못하고 손안에서만 숨겼다. 휴대폰 화면이 꺼지며 그의 얼굴과 턱의 붉은 자국, 그리고 고명례가 바꿔 놓은 두 번째 병뚜껑의 흠집이 한꺼번에 사라졌다. 계산대 위에서는 윤다솜이 병뚜껑들을 다시 일렬로 세웠고, 파티온 창고 뒤편에서는 은박 포장의 모서리 하나가 백이안의 손가락 사이로 날카롭게 삐져나와 있었다.

챕터 04

16· 밤 11시 53분

오쏘몰 박스의 바닥

오쏘몰 박스의 바닥
장소파티온 창고 뒤
시간밤 11시 53분
사건류하민이 파티온 창고 뒤 선반에 기대어 떨리는 손으로 오쏘몰 바이탈 샘플 박스를 다솜 쪽으로 밀어 낸다. 윤다솜은 고명례가 서봉춘 앞을 막아서는 사이 박스를 낚아채 바닥 포장을 손톱으로 뜯는다. 박스 밑면의 이중 종이가 찢어지며 얇은 보조배터리가 테이프에 붙은 채 드러난다. 류하민은 그것을 가리키고, 곧바로 유리문 쪽을 가리킨다.
영향류하민이 숨긴 물건은 단순한 비상 물자가 아니라 자동문을 다시 살릴 수 있는 위험한 장치로 드러난다. 다솜은 매니저가 왜 그것을 숨겼는지, 지금 꺼내라는 것인지 절대 쓰지 말라는 것인지 판단해야 한다. 고명례는 보조배터리보다 서봉춘의 순서를 먼저 붙잡으려 하고, 서봉춘은 아내의 팔을 밀어내며 상황을 보려 한다. 탈출은 이제 병뚜껑 순서가 아니라 전원을 켤지 말지에 걸린다.

류하민이 피 묻은 손가락으로 오쏘몰 바이탈 샘플 박스를 선반 아래에서 밀어 냈다. 파티온 창고 뒤편의 연분홍 박스들이 바깥 충격에 잘게 떨렸고, 눅눅하게 접힌 행사 배너가 선반 다리 사이에서 바닥을 긁었다. 윤다솜은 무릎으로 깨진 샘플 파우치를 누르며 박스를 잡아챘고, 고명례는 서봉춘의 가슴 앞에 팔을 세운 채 “우리 영감 먼저 내보내야 합니더”라고 낮게 말했다. 서봉춘은 검가드 샘플컵을 쥔 손으로 아내 팔꿈치를 밀었지만, 손끝이 미끄러져 컵벽만 다시 찌그러졌다.

다솜은 박스 뚜껑을 열지 않고 뒤집었다. 밑면 종이가 이상하게 두꺼웠다. 그녀가 손톱을 세워 포장지를 찢자 오쏘몰 로고가 인쇄된 판지가 길게 갈라졌고, 그 안쪽에서 검은색 얇은 보조배터리가 테이프에 붙어 딸려 나왔다. 류하민은 갈라진 입술을 벌렸다가 소리를 내지 못하고, 보조배터리를 가리킨 다음 유리문 쪽을 가리켰다. 다시 파티온 배너를 가리켰다. 쓰라는 뜻인지 막으라는 뜻인지, 그의 손은 끝까지 한 방향에 머물지 못했다.

고명례가 한 발 다가와 박스를 빼앗으려 하자 다솜은 팔꿈치로 막고 보조배터리를 가슴에 붙였다. 서봉춘은 그제야 컵을 내려놓고 바닥의 쇠막대 쪽으로 몸을 틀었다. 창고 가장 안쪽 선반 아래, 폐기 예정 간식 상자가 다솜의 뒤꿈치에 밀려 바스락 울렸다. 류하민의 손끝에는 뜯긴 테이프 조각이 붙어 있었고, 오쏘몰 박스의 찢어진 바닥이 입을 벌린 채 형광등 아래 하얗게 드러났다.

17· 밤 11시 53분

쓰면 열린다

쓰면 열린다
장소파티온 창고 뒤에서 자동문 전원 단자 앞
시간밤 11시 53분
사건윤다솜이 오쏘몰 바이탈 샘플 박스 바닥에서 떼어 낸 얇은 보조배터리를 들고 자동문 전원 단자 덮개를 뜯어낸다. 류하민은 바닥에 쓰러진 채 파티온 배너와 유리문 쪽을 번갈아 가리키며 다솜의 손목을 붙잡으려 한다. 고명례는 서봉춘을 자기 뒤로 밀어 넣고 “쓰면 문 열리는 거 아입니까”라고 재촉하지만, 서봉춘은 쇠막대를 집어 들고 단자와 레일을 번갈아 본다. 다솜은 보조배터리 케이블을 단자 가까이 가져갔다가, 모터음에 반응하던 감염자들의 고개를 떠올리고 손을 멈춘다.
영향보조배터리는 탈출을 여는 물건이면서 감염자들을 부르는 물건으로 확정된다. 류하민의 신호는 여전히 모호해 다솜은 그를 믿을 수도, 무시할 수도 없는 상태에 놓인다. 고명례는 남편을 살리기 위해 위험을 앞당기려 하고, 서봉춘은 문이 열릴 경우 레일을 직접 막아야 한다는 사실을 몸으로 받아들인다. 장면 끝에서 보조배터리는 아직 연결되지 않았지만, 단자 앞 바닥에 놓이며 다음 사고를 불러올 위치에 남는다.

윤다솜은 자동문 옆 플라스틱 전원 덮개를 손톱으로 뜯어내고, 오쏘몰 바이탈 샘플 박스 바닥에서 떼어 낸 얇은 보조배터리를 맨손에 움켜쥐었다. 파티온 창고 뒤편의 흐린 비상등은 연분홍 박스 비닐을 낮게 훑었고, 찢어진 배너 끝은 젖은 종이처럼 선반 다리에 붙어 있었다. 류하민은 콘크리트 바닥에 팔꿈치를 박고 몸을 끌어 올리더니, 삐뚤어진 파티온 노스카나인 트러블 크림 배너를 가리켰다가 유리문 쪽을 가리켰다. 그의 손가락은 곧장 떨어지지 않고 허공에서 떨렸다.

고명례가 서봉춘의 팔을 잡아 앞으로 당겼다. “쓰면 열리는 거 아입니까. 우리 영감부터 보내 주이소.” 서봉춘은 그녀의 손을 떼어 내고 검가드 샘플컵 대신 바닥의 짧은 쇠막대를 집어 들었다. 그는 자동문 레일 홈을 내려다보고, 다시 다솜 손의 케이블 끝을 보았다. 류하민은 입술 안쪽을 깨문 채 고개를 세게 저었다가, 다시 배너를 가리켰다. 쓰라는 건지, 막으라는 건지 말은 나오지 않았다.

다솜은 보조배터리 케이블을 단자에 대기 직전 멈췄다. 바깥 유리 너머 형광 조끼를 입은 감염자 하나가 문틈에 이마를 붙이고 있었고, 그 뒤로 젖은 행사 매대 박스가 조금씩 밀려왔다. 그녀는 케이블을 빼서 바닥에 내려놓았지만, 고명례가 서봉춘의 소매를 잡아끌며 한 걸음 더 다가오는 바람에 보조배터리가 단자 바로 아래로 밀렸다. 서봉춘은 쇠막대를 두 손으로 고쳐 쥐고 레일 앞에 무릎을 굽혔다.

18· 밤 11시 54분

11시 54분의 웅음

11시 54분의 웅음
장소병뚜껑 계산대와 카운터 냉장고 앞
시간밤 11시 54분
사건카운터 냉장고 컴프레서가 규칙적으로 웅 하고 울리자 바깥 감염자들의 몸이 동시에 냉장고 쪽으로 틀어진다. 윤다솜은 보조배터리를 자동문 단자 앞 바닥에 둔 채 병뚜껑 계산대를 가로질러 냉장고 플러그를 뽑으러 달려간다. 고명례는 서봉춘의 팔을 붙든 채 다솜의 움직임을 따라오고, 류하민은 파티온 창고 뒤에서 몸을 일으키려다 오쏘몰 바이탈 샘플 박스를 떨어뜨린다.
영향감염자들이 큰 소리보다 규칙적인 전자음에 끌린다는 규칙이 다시 확인된다. 다솜은 자동문 전원을 살릴지 말지 결정하기도 전에, 냉장고의 작은 기계음부터 끊어야 하는 상황에 몰린다. 보조배터리가 단자 가까운 바닥에 남겨지면서 다음 장면의 사고가 준비되고, 고명례가 남편을 앞세우기 위해 다솜을 막아설 압력이 커진다.

윤다솜은 보조배터리를 자동문 단자 앞 바닥에 내려놓고 병뚜껑 계산대를 향해 뛰었다. 밤 11시 54분, 카운터 냉장고가 목을 가다듬듯 웅 하고 울었고, 유리문 밖 형광 조끼 감염자들의 어깨가 한꺼번에 냉장고 쪽으로 틀어졌다. 계산대 위 박카스 디카페 병뚜껑 여섯 개가 그녀의 팔꿈치에 밀려 흩어졌고, 손톱 흠집 난 두 번째 병뚜껑이 바닥으로 떨어져 깨진 아크릴 조각 사이를 굴렀다. “플러그부터 뽑아야 돼요.” 다솜이 낮게 말하며 냉장고 뒤쪽으로 몸을 숙였다.

고명례가 서봉춘의 팔을 끌고 따라와 다솜의 어깨를 붙잡았다. “잠깐만, 우리 영감 먼저 보내 주소.” 서봉춘은 검가드 샘플컵을 든 손으로 아내의 손목을 밀어냈지만, 컵 안의 흐린 민트색 액체가 흔들려 그의 손등에 튀었다. 파티온 창고 뒤에서는 류하민이 팔꿈치로 바닥을 짚고 몸을 세우려다 오쏘몰 바이탈 샘플 박스를 놓쳤고, 박스가 선반 다리에 부딪혀 얇게 벌어졌다. 다솜은 고명례의 손을 떼어내며 냉장고 전원선을 잡아당겼고, 플러그가 콘센트에서 빠지는 순간 푸른빛이 꺼졌다.

웅음이 끊기자 매장 안이 짧게 납작해졌다. 그러나 유리문 밖 감염자들은 이미 냉장고 쪽 유리 앞까지 붙어 있었고, 젖은 손바닥들이 네온빛에 붉게 눌렸다. 다솜이 몸을 돌리는 사이, 바닥에 남겨 둔 보조배터리가 류하민이 떨어뜨린 오쏘몰 박스에 밀려 자동문 단자 쪽으로 한 뼘 미끄러졌다. 계산대 아래에서 굴러간 병뚜껑 하나가 보조배터리 모서리에 닿아 멈췄다.

19· 밤 11시 54분 직후

바뀐 병뚜껑

바뀐 병뚜껑
장소병뚜껑 계산대와 카운터 냉장고 앞
시간밤 11시 54분 직후
사건윤다솜이 꺼진 냉장고 뒤에서 플러그를 손에 쥔 채 몸을 일으키는 순간, 고명례가 서봉춘의 팔을 잡아끌고 그녀 앞을 막아선다. 고명례는 서봉춘을 먼저 내보내 달라고 요구하고, 다솜은 흩어진 박카스 디카페 병뚜껑들을 다시 세우려다 두 번째 흠집의 위치가 바뀐 것을 확인한다. 서봉춘은 아내가 바꿔 둔 병뚜껑을 집어 바닥에 던지고, 자기 순서를 맨 뒤로 보내라고 말한다.
영향고명례의 숨긴 조작이 다솜 앞에서 드러나며 병뚜껑으로 유지되던 질서가 공개적으로 금이 간다. 서봉춘은 자신을 살리려는 아내의 거짓말을 덮지 않고, 오히려 자기 몸을 뒤로 물리겠다고 선언해 탈출 순서의 기준을 흔든다. 다솜은 더 이상 병뚜껑만으로 사람들을 통제할 수 없고, 바닥에 미끄러진 보조배터리는 자동문 단자에 더 가까워진다.

윤다솜은 냉장고 플러그를 뽑은 손 그대로 일어서다 고명례의 어깨에 가로막혔다. 병뚜껑 계산대 아래 푸른빛은 꺼졌지만 흰 형광등은 더 차갑게 남아 있었고, 바닥에 굴러간 박카스 디카페 병뚜껑 하나가 보조배터리 모서리에 걸려 있었다. 고명례는 서봉춘의 팔을 자기 가슴 쪽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우리 영감 먼저 보내 주소. 저 사람 입은 내가 책임질게예.” 서봉춘의 손에 들린 검가드 샘플컵은 눌려 납작했고, 컵 안의 흐린 민트색 액체가 그의 손등에 묻어 있었다.

다솜은 고명례의 손을 밀어내고 계산대 위로 흩어진 병뚜껑들을 한 줄로 세웠다. 손톱 흠집 두 개가 있어야 할 자리에 다른 병뚜껑이 놓여 있었다. 그녀가 고명례를 쳐다보기 전에 서봉춘이 먼저 몸을 숙였다. 그는 바닥의 깨진 아크릴 조각 사이에서 두 번째 흠집 병뚜껑을 집어 들고, 피 묻은 입술을 다문 채 고명례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가 곧바로 빼앗아 콘크리트 바닥에 던졌다. 딱, 하는 소리가 유리문 쪽까지 튀었다. “내 거 맨 뒤로 미루소.” 서봉춘이 말했다.

고명례가 그의 팔을 붙잡자 서봉춘은 손등을 빼냈지만, 바로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그녀의 운동화 끈 한쪽이 풀려 젖은 바닥에 끌리고 있었다. 그는 무릎을 굽혀 끈을 두 번 묶었고, 다솜은 그 옆에서 다시 병뚜껑을 세우지 못한 채 손을 멈췄다. 파티온 창고 뒤편에서 류하민이 떨어뜨린 오쏘몰 바이탈 박스가 선반 다리에 밀려 한 번 더 움직였고, 바닥의 보조배터리가 자동문 단자 아래로 미끄러졌다. 유리문 밖 젖은 손바닥들이 꺼진 냉장고 자리에서 다시 문틈 쪽으로 돌아붙었다.

20· 밤 11시 54분 직후

깨어난 문

깨어난 문
장소반쯤 열린 자동문 앞, 병뚜껑 계산대와 유리문 사이
시간밤 11시 54분 직후
사건바닥에 미끄러진 보조배터리가 자동문 전원 단자에 닿고, 죽어 있던 모터가 길게 울며 살아난다. 윤다솜은 케이블을 떼어 내려고 몸을 던지지만 고명례가 서봉춘의 팔을 잡아당기며 길을 막는다. 유리문이 양옆으로 벌어지고 바깥의 감염자들이 행사 매대 박스를 밀어 넣는다. 서봉춘은 쇠막대를 자동문 레일 홈에 꽂아 넣고 온몸으로 비틀어 문을 반쯤 열린 채 걸어 잠근다. 레일이 튕기며 그의 손등을 찍고, 피가 문턱 아래로 떨어진다.
영향자동문이 다시 작동하면서 매장은 방어선이 아니라 입구가 된다. 다솜은 보조배터리를 통제하지 못했고, 류하민이 숨긴 물건은 탈출 가능성과 침입 위험을 동시에 현실로 만든다. 고명례는 남편을 먼저 내보내려는 손을 놓지 못하지만, 서봉춘은 자기 몸을 문틈에 걸어 모두의 시간을 산다. 탈출로는 넓게 열린 문이 아니라 사람 어깨 하나가 겨우 빠져나갈 낮은 틈으로 줄어든다. 이제 다음 장면의 생존은 번호표가 아니라 누가 그 틈으로 몸을 낮출 수 있는지에 달린다.

보조배터리가 병뚜껑에 밀려 자동문 단자에 닿는 순간, 윤다솜은 계산대 모서리를 박차고 몸을 던졌다. 반쯤 어두워진 냉장고 앞 바닥에서 검은 배터리가 짧게 떨렸고, 유리문 위 모터가 목 막힌 기계처럼 길게 울었다. 다솜의 손끝이 케이블에 닿기 전에 고명례가 서봉춘의 팔을 끌어당기며 그녀의 어깨를 막았다. “지금 열렸잖아예, 지금!” 고명례의 손에는 찌그러진 검가드 샘플컵이 아직 들려 있었고, 컵 안의 흐린 민트색 액체가 손목까지 튀었다.

유리문 두 장이 양옆으로 벌어지며 바깥 붉은 네온이 틈새를 찢고 들어왔다. 형광 조끼를 입은 감염자들이 젖은 행사 매대 박스를 밀어붙였고, 유리 아래쪽으로 손가락들이 포개져 들어왔다. 류하민은 파티온 창고 뒤에서 팔꿈치로 몸을 끌며 파티온 배너를 가리켰지만, 소리는 모터음에 묻혔다. 서봉춘은 고명례의 손을 뿌리치고 바닥의 쇠막대를 집어 들었다. “비켜라.” 그가 짧게 말하고, 자동문 레일 홈에 쇠막대를 세워 박았다.

서봉춘은 무릎을 꿇은 채 쇠막대를 양손으로 비틀었고, 레일이 찢기는 듯한 금속음을 냈다. 문은 완전히 열리기 직전 덜컥 걸려 멈췄고, 틈은 사람 어깨 하나가 겨우 빠져나갈 만큼만 남았다. 다음 충격에 쇠막대가 튕기며 서봉춘의 손등을 눌렀고, 그의 피부가 레일 모서리에 길게 찢어졌다. 고명례가 비명을 삼키며 그 앞에 몸을 세웠고, 다솜은 바닥에 떨어진 박카스 디카페 병뚜껑 하나를 발로 밀어 문턱 밖으로 차냈다. 유리 안팎의 숨결이 번갈아 흐려지는 사이, 서봉춘의 피가 레일 홈을 따라 끈적하게 번졌다.

챕터 05

21· 밤 11시 54분 직후

병뚜껑이 쏟아진 자리

병뚜껑이 쏟아진 자리
장소반쯤 열린 자동문 앞, 병뚜껑 계산대와 유리문 사이
시간밤 11시 54분 직후
사건윤다솜은 계산대 위에 남아 있던 박카스 디카페 병뚜껑들을 손바닥으로 쓸어 바닥에 쏟아 버린다. 더 이상 번호를 부르지 않고, 반쯤 열린 자동문 틈 앞에서 사람들의 어깨와 허리를 직접 밀어 낮은 출구로 보내기 시작한다. 문태경은 묶였던 손목을 비틀며 류하민 쪽으로 몸을 당기고, 백이안은 깨진 아크릴 조각 사이에서 애크논 크림을 움켜쥔 채 다솜의 손짓을 본다. 쇠막대가 레일 안에서 튕길 듯 떨리고, 감염자들의 손가락이 문틈 아래로 더 깊게 들어온다.
영향다솜이 병뚜껑을 포기하면서, 지금까지 사람들을 붙들어 둔 순서의 규칙이 눈앞에서 끝난다. 탈출은 번호가 아니라 몸을 얼마나 낮출 수 있는지, 누가 누구를 밀고 받칠 수 있는지에 달리게 된다. 문태경과 백이안은 더 이상 의심받는 방해물로만 남을 수 없고, 류하민은 누군가가 들어 옮겨야 할 무게로 장면의 중심에 놓인다. 자동문 틈은 모두에게 같은 출구가 아니라, 한 사람씩만 통과시키는 좁은 압박으로 바뀐다.

윤다솜은 계산대 위 박카스 디카페 병뚜껑들을 한 손으로 쓸어 바닥에 쏟아 버렸다. 흠집 난 은색 뚜껑들이 콘크리트와 깨진 아크릴 위로 튀며 흩어졌고, 반쯤 열린 자동문에서는 붉은 네온에 젖은 손가락들이 문턱을 더듬었다. “번호 끝났어요.” 다솜은 목소리를 낮추고, 맨 앞에 선 사람의 허리를 잡아 자동문 틈 아래로 밀었다. 어깨가 유리 모서리에 걸리자 그녀는 무릎으로 진열대 하단을 눌러 틈을 조금 더 만들었다.

쇠막대가 레일 안에서 짧게 울었다. 문태경은 무전기 줄 자국이 벌겋게 남은 손목을 당기며 류하민 쪽으로 기어갔고, 류하민은 오쏘몰 바이탈 샘플 박스를 가슴에 끌어안은 채 바닥에 한쪽 뺨을 댔다. 백이안은 계산대 아래에서 애크논 크림을 주머니에 밀어 넣다가 다솜과 눈이 마주쳤다. 다솜은 그를 부르지 않고 손가락 두 개로 바닥을 가리켰다. 낮게. 더 낮게.

첫 사람이 문틈 밖으로 빠져나가자 유리문이 다시 덜컥 밀렸다. 감염자의 젖은 손 하나가 레일 위 피 묻은 홈을 긁고 들어왔고, 다솜은 발끝으로 흩어진 병뚜껑들을 걷어차 길을 비웠다. 병뚜껑 하나가 깨진 박카스 디카페 액체에 붙어 멈췄고, 그 옆으로 류하민의 손끝이 힘없이 끌렸다. 다솜은 더는 계산대 쪽을 보지 않고, 다음 몸의 어깨를 잡아 자동문 틈으로 접어 넣었다.

22· 밤 11시 55분 직전

노스카나를 건네는 손

노스카나를 건네는 손
장소반쯤 열린 자동문 앞
시간밤 11시 55분 직전
사건문태경이 끊어진 무전기 줄 자국이 남은 손목으로 류하민의 겨드랑이를 받쳐 일으킨다. 자동문 틈으로 감염자들의 손가락이 들어오고, 누군가가 문태경의 목덜미를 확인하려고 그의 옷깃을 잡아당긴다. 문태경은 버티다 노스카나 튜브를 그 손에 쥐여 주며, 지금은 상처를 따질 때가 아니라 길을 밀어야 한다고 말한다.
영향문태경은 도망칠 수 있는 순간에도 류하민을 놓지 않으면서, 의심스러운 사람에서 필요한 사람으로 위치가 바뀐다. 다솜은 그의 목덜미를 끝까지 확인하지 못하지만, 류하민을 옮기려면 문태경을 통과시켜야 한다는 선택을 받아들인다. 자동문 앞 탈출은 더 이상 깨끗한 사람과 의심스러운 사람을 가르는 절차가 아니라, 서로의 무게를 떠안고 좁은 틈을 밀어내는 일이 된다.

문태경이 끊어진 무전기 줄 자국이 붉게 남은 손목으로 류하민의 겨드랑이를 파고들어 그를 일으켜 세웠다. 반쯤 열린 자동문은 쇠막대에 걸린 채 덜컥거렸고, 흰 형광등 아래 류하민의 오쏘몰 바이탈 샘플 박스가 그의 가슴팍에서 삐뚤게 눌렸다. 윤다솜은 문턱 옆에서 사람들의 허리를 낮추어 밀어 넣다가, 문태경의 어깨가 틈을 막는 순간 손을 뻗었다. “먼저 나가요. 매니저님 끌고.” 문태경은 대답 대신 류하민의 팔을 자기 목 뒤로 넘겼다.

그때 뒤쪽에서 손 하나가 문태경의 옷깃을 잡아챘다. 목덜미를 가리던 천이 반쯤 들리고, 땀과 먼지에 젖은 피부 위로 애매한 상처가 붉게 보였다. 백이안이 파티온 박스 옆에서 숨을 삼켰고, 류하민은 힘없이 미끄러지며 문태경의 무릎을 꺾었다. 문태경은 류하민을 놓지 않은 채 주머니에서 노스카나 튜브를 꺼내, 자기 옷깃을 잡은 손바닥에 세게 눌러 쥐여 주었다. “나중에 흉터 남으면 바르세요. 지금은 밀어요.”

다솜은 문태경의 목덜미를 더 보려고 하지 않았다. 그녀는 류하민의 오쏘몰 박스가 떨어지지 않게 그의 팔꿈치를 밀어 올리고, 문태경의 등판을 자동문 틈 쪽으로 떠밀었다. 바깥에서 들어온 감염자의 손가락이 유리 조각에 걸려 미끄러졌고, 쇠막대가 짧게 울었다. 백이안은 손에 쥔 애크논 크림 튜브를 주머니에 밀어 넣은 채, 파티온 노스카나인 트러블 크림 진열대 아래 빈 공간을 향해 몸을 낮췄다. 문태경의 손에서 떠난 하얀 노스카나 튜브만 문턱 안쪽 바닥에 굴러 멈췄다.

23· 밤 11시 55분 직전

오쏘몰 박스의 무게

장소반쯤 열린 자동문 앞
시간밤 11시 55분 직전
사건윤다솜이 문태경에게 류하민을 먼저 틈 밖으로 보내라고 손짓한다. 문태경은 류하민의 겨드랑이를 받쳐 일으키지만, 류하민은 가슴에 끌어안은 오쏘몰 바이탈 샘플 박스를 놓지 않아 몸이 유리문 턱에 걸린다. 다솜은 박스를 빼앗으려 하고, 류하민은 피 묻은 손가락으로 박스 바닥을 움켜쥔 채 버틴다. 쇠막대가 레일에서 튕길 듯 울리고, 백이안은 낮은 자세로 뒤에서 류하민의 발목을 밀어 올린다.
영향류하민의 박스는 단순한 짐이 아니라 아직 숨겨진 무언가가 남아 있을 수 있는 물건으로 다시 부각된다. 다솜은 류하민을 살리려면 박스를 버려야 할지, 모두를 살리려면 박스를 지켜야 할지 판단하지 못한다. 문태경은 자기 혼자 빠져나갈 수 있는 틈 앞에서 류하민의 무게를 포기하지 않아, 다솜이 그를 통과시킬 이유를 만든다. 백이안은 도망칠 준비가 된 사람이 아니라 낮은 곳에서 다른 사람의 몸을 밀어 올리는 사람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윤다솜은 류하민의 가슴에 붙은 오쏘몰 바이탈 샘플 박스를 두 손으로 잡아당겼다. 반쯤 열린 자동문 틈에서는 붉은 네온에 물든 손가락들이 유리 모서리를 더듬었고, 레일에 박힌 쇠막대가 짧게 깡 울렸다. 문태경은 무전기 줄 자국이 남은 손목으로 류하민의 겨드랑이를 끌어올리며 이를 악물었다. “박스 놓으세요, 매니저님.” 다솜이 말하자 류하민은 대답 대신 피 묻은 손가락을 박스 바닥에 더 깊게 걸었다.

문태경이 먼저 빠져나갈 수 있는 틈이 잠깐 열렸다. 그는 어깨를 낮추면 나갈 수 있었지만, 몸을 틀어 류하민의 무릎을 자기 허벅지 위에 올렸다. 류하민의 구두 뒤축이 깨진 박카스 디카페 액체에 미끄러졌고, 박스 모서리가 문턱에 걸려 종이가 찢어졌다. 그 틈으로 안쪽 판지 한 겹이 벌어졌지만, 다솜은 끝까지 뜯지 못했다. 백이안이 계산대 아래에서 기어나와 애크논 크림이 든 주머니를 한 손으로 누른 채 류하민의 발목을 밀었다. “낮게요. 더 낮게.”

류하민의 몸이 문틈을 반쯤 통과하자 감염자 하나의 손이 박스 끈을 낚아챘다. 다솜은 박스 포장 끈을 손톱으로 끊어 내고, 문태경은 류하민을 자기 쪽으로 세게 당겼다. 오쏘몰 박스는 류하민의 품에 남았지만 포장 한쪽이 길게 찢겨 흰 속지가 드러났다. 문태경은 틈 밖으로 나가지 않고 다시 안쪽으로 한 발을 디뎌 류하민의 허리를 받쳤고, 백이안은 바닥에 엎드린 채 유리문 아래로 밀려드는 손들을 보고 숨을 삼켰다.

24· 밤 11시 55분 직후

낮은 곳으로 돌아간 얼굴

장소반쯤 열린 자동문 앞과 파티온 노스카나인 트러블 크림 진열대 아래
시간밤 11시 55분 직후
사건백이안은 자동문 틈 앞에서 유리에 비친 자기 턱의 붉은 자국을 보고 멈춘다. 그는 주머니 속 애크논 크림 튜브를 한 번 움켜쥔 뒤, 빠져나가는 대신 파티온 노스카나인 트러블 크림 진열대 아래로 다시 기어든다. 백이안은 발목으로 진열대 바퀴를 걸어 틀어막고, 감염자들의 손과 시야를 낮은 위치에서 막는다. 윤다솜은 그가 도망칠 차례를 스스로 뒤집는 것을 보고, 문태경과 류하민을 틈으로 더 세게 밀어 넣는다.
영향백이안은 더 이상 자기 얼굴만 숨기는 아이가 아니라, 그 낮은 자세로 다른 사람들의 시간을 벌어 주는 사람이 된다. 문태경은 류하민을 끌고 나갈 수 있는 몇 초를 얻고, 다솜은 마지막 탈출이 누군가의 깨끗한 희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몸을 억지로 밀고 받치는 일임을 눈앞에서 본다. 자동문 틈은 여전히 좁고, 쇠막대는 흔들리며, 백이안은 다음 순간 감염자의 손이 닿을 수 있는 위치에 남는다.

백이안이 자동문 틈 앞에서 몸을 돌려 유리문에 비친 자기 얼굴을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붉은 네온이 그의 턱의 트러블을 더 진하게 칠했고, 흰 형광등은 애크논 크림 튜브가 들어간 주머니의 불룩한 모양까지 드러냈다. 윤다솜은 문태경의 등을 밀며 “나가요, 지금”이라고 낮게 말했지만, 백이안은 한 발을 문턱 밖으로 내딛지 못했다. 바깥 감염자의 손가락들이 레일 홈을 더듬고, 쇠막대가 짧게 튀는 소리를 냈다.

류하민의 오쏘몰 바이탈 샘플 박스가 문태경의 가슴과 유리 사이에 끼어 찌그러졌다. 문태경은 이를 악물고 류하민의 겨드랑이를 다시 추켜올렸고, 다솜은 박스 모서리를 눌러 둘의 어깨를 낮췄다. 그때 백이안이 주머니 속 애크논 크림을 깊이 밀어 넣고, 파티온 노스카나인 트러블 크림 진열대 아래로 엎드려 기어들어갔다. “저 밑으로 가면 안 돼!” 다솜이 손을 뻗었지만, 백이안은 이미 발을 뻗어 진열대 바퀴 하나를 걸어 잠그듯 틀어막았다.

진열대가 삐걱거리며 감염자들의 시야 앞을 비스듬히 가렸다. 연분홍 파티온 박스 몇 개가 쏟아져 그의 어깨와 등에 부딪혔고, 밟힌 샘플 파우치의 흰 크림이 바닥에 길게 밀렸다. 문태경은 그 틈에 류하민을 끌고 낮은 문틈으로 몸을 접었고, 다솜은 두 사람의 등을 한꺼번에 밀었다. 백이안은 진열대 아래에서 유리 쪽을 등지고 웅크린 채, 한 손으로 바닥에 굴러온 하얀 노스카나 튜브를 밀어 감염자의 손끝 앞에 걸리게 했다.

25· 밤 11시 55분 직후

찢어진 라벨

찢어진 라벨
장소반쯤 열린 자동문 앞과 파티온 노스카나인 트러블 크림 진열대 아래
시간밤 11시 55분 직후
사건감염자 하나가 파티온 진열대 아래로 기어든 백이안의 후드 끈을 붙잡고 끌어당긴다. 문태경은 류하민을 잠시 바닥에 기대 놓고 자동문 틈 안쪽으로 몸을 던져 백이안의 목덜미 라벨과 후드 끈을 한 번에 찢어 끊는다. 백이안은 손바닥에 터진 애크논 크림과 먼지를 묻힌 채 바닥을 굴러 틈 밖으로 빠져나오고, 문태경은 다시 류하민에게 돌아가 그의 겨드랑이를 붙든다.
영향백이안은 낮은 곳에서 시간을 벌어 주던 위치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오지만, 그가 만든 몇 초 덕분에 류하민과 문태경이 다시 움직일 틈이 생긴다. 문태경은 혼자 도망칠 수 있는 기회를 버리고 류하민과 백이안 사이를 오가며 필요한 사람으로 자리 바뀐다. 다솜은 이제 탈출이 한 사람의 고귀한 희생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거칠게 밀고 찢고 끌어내는 방식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눈앞에서 본다.

문태경은 류하민을 유리문 안쪽 바닥에 내려놓자마자 파티온 노스카나인 트러블 크림 진열대 아래로 몸을 던졌다. 감염자의 젖은 손이 백이안의 후드 끈을 말아쥐고 있었고, 백이안은 바퀴에 걸어 둔 발을 빼지 못한 채 턱을 바닥에 박았다. 붉은 네온이 유리문 틈으로 잘려 들어와 그의 목덜미 라벨을 작게 비췄고, 레일에 박힌 쇠막대는 또 한 번 날카롭게 울었다. 다솜은 문턱 옆에서 류하민의 오쏘몰 바이탈 박스를 붙잡고 몸을 숙였지만, 문태경의 등이 먼저 시야를 막았다.

“고개 숙여!” 문태경이 외쳤다. 그는 손톱이 깨진 손으로 백이안의 목 뒤 라벨과 후드 끈을 한꺼번에 움켜쥐고 비틀었다. 천이 찢어지는 소리가 모터음 사이로 짧게 튀었고, 감염자의 손에는 회색 끈과 흰 라벨 조각만 남았다. 백이안은 반쯤 터진 애크논 크림 튜브를 손바닥에 깔고 미끄러져 나왔고, 흰 크림이 먼지와 섞여 손금 사이에 뭉쳤다. 다솜은 그의 팔꿈치를 잡아 문턱 안쪽으로 끌어당긴 뒤, 바로 류하민 쪽으로 몸을 돌렸다.

문태경은 백이안이 빠져나온 자리에 남은 파티온 배너를 발로 차 넣어 감염자의 손을 한 번 더 막고, 곧장 류하민에게 돌아갔다. 류하민은 바닥에 한쪽 뺨을 대고도 오쏘몰 박스를 놓지 않았고, 문태경은 그의 겨드랑이에 다시 어깨를 밀어 넣었다. 백이안은 숨을 토하며 주머니를 더듬다가 애크논 크림이 찌그러진 것을 보고 손을 멈췄다. 다솜의 발밑에서 찢어진 라벨 조각이 박카스 디카페 액체에 붙어 납작하게 젖었다.

챕터 06

26· 자정 직전, 자동문 모터음이 끊기지 않는 순간

오쏘몰 박스의 바닥

오쏘몰 박스의 바닥
장소반쯤 열린 자동문 앞
시간자정 직전, 자동문 모터음이 끊기지 않는 순간
사건윤다솜은 서봉춘이 쇠막대를 붙들고 버티는 사이, 류하민이 끝까지 놓지 않았던 오쏘몰 바이탈 샘플 박스의 찢어진 바닥을 손으로 뜯는다. 고명례는 남편의 팔을 잡아당기며 다솜에게 먼저 나가라고 소리치고, 문태경은 류하민을 벽 쪽으로 끌어 세워 감염자들의 손이 박스에 닿지 못하게 몸으로 막는다. 박스 바닥 안쪽에서 테이프에 붙은 비상구 열쇠와 직원용 뒷문 카드가 떨어져 나온다.
영향류하민이 숨긴 오쏘몰 박스는 보조배터리만이 아니라 하역장으로 이어지는 실제 출입권까지 품고 있었음이 드러난다. 다솜은 더 이상 자동문 틈만 바라보며 사람들을 밀어낼 수 없고, 하역장 철문까지 모두를 끌고 가야 한다. 서봉춘은 자신이 문을 버티는 동안 다솜이 열쇠와 카드를 챙기게 만들며, 다음 장면의 탈출과 그의 희생 시도를 동시에 밀어붙인다.

윤다솜은 류하민의 오쏘몰 바이탈 샘플 박스를 무릎으로 눌러 고정하고 찢어진 바닥을 양손으로 잡아 뜯었다. 반쯤 열린 자동문에서는 쇠막대가 레일 안에서 떨렸고, 서봉춘은 피 묻은 손등으로 막대 끝을 누르며 어깨를 유리문에 박고 있었다. 고명례가 그의 허리춤을 붙잡고 “봉춘 씨, 손 놔라, 제발!” 하고 끌어당겼지만, 서봉춘은 고개도 돌리지 못한 채 이로 검가드 컵 가장자리를 물고 버텼다.

문태경은 류하민을 벽에 기대 세우고, 감염자의 손이 문틈으로 더 들어오자 발로 파티온 진열대 조각을 걷어차 막았다. 다솜의 손톱 밑으로 종이 섬유가 끼고, 박스 바닥 안쪽에서 투명 테이프가 길게 뜯겨 나왔다. 그 안에 납작한 직원용 뒷문 카드와 작은 비상구 열쇠가 붙어 있었다. 금속 열쇠가 바닥에 떨어지며 깨진 박카스 디카페 유리 조각 사이에서 짧게 튀었다.

“그거 들고 하역장으로 가요.” 서봉춘이 쇠막대를 더 깊이 밀어 넣으며 말했다. 다솜은 열쇠와 카드를 한 손에 쓸어 쥐고, 다른 손으로 오쏘몰 박스의 빈 바닥을 감염자의 손가락 쪽으로 던졌다. 종이 박스가 문틈에 걸리자 감염자의 손이 그것을 움켜쥐었고, 다솜은 그 짧은 틈에 서봉춘의 피 묻은 허리띠를 향해 몸을 돌렸다.

27· 밤 11시 56분

레일에 흐른 단 냄새

레일에 흐른 단 냄새
장소반쯤 열린 자동문 앞
시간밤 11시 56분
사건윤다솜은 류하민의 오쏘몰 바이탈 박스 바닥에서 떨어진 직원용 뒷문 카드와 비상구 열쇠를 쥔 채 서봉춘에게 달려든다. 서봉춘은 레일에 박힌 쇠막대를 붙들고 자신을 남기려 하지만, 다솜은 마지막 박카스 디카페 병을 자동문 레일에 던져 깨뜨린다. 끈적한 액체와 유리 조각이 레일 홈으로 흘러 들어가 모터가 순간적으로 덜컥 멈추고, 다솜은 그 짧은 틈에 서봉춘의 허리띠를 잡아당긴다.
영향서봉춘의 희생으로 닫히려던 문은 박카스 디카페 병이 깨지며 몇 초 동안 멈춘다. 다솜은 그 시간을 이용해 서봉춘을 자동문 틈에서 끌어내고, 고명례와 문태경이 다음 장면에서 그를 붙잡고 하역장 쪽으로 밀 수 있는 위치를 만든다. 이제 탈출은 유리문 앞을 벗어나 하역장 철문으로 옮겨 가며, 다솜의 손에 쥔 카드가 마지막 출입권이 된다.

윤다솜은 마지막 박카스 디카페 병을 자동문 레일에 내리꽂았다. 갈색 유리병이 문턱 아래에서 터지고, 끈적한 액체가 유리 조각과 함께 레일 홈을 따라 번졌다. 반쯤 열린 자동문은 쇠막대 하나에 걸려 떨었고, 서봉춘은 피 묻은 손등으로 그 막대를 끝까지 눌렀다. 붉은 네온에 물든 감염자의 손가락들이 틈새를 더듬으며 안쪽으로 밀려왔다.

“문 닫히면 뛰어라.” 서봉춘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다솜은 대답하지 않고 류하민의 오쏘몰 바이탈 박스에서 떨어진 직원용 뒷문 카드를 앞치마 주머니에 쑤셔 넣은 뒤, 서봉춘의 허리띠를 움켜쥐었다. 모터가 다시 길게 울려는 순간 박카스 액체가 레일 안에서 끈적하게 엉기며 문이 덜컥 멈췄다. 단 냄새가 젖은 먼지와 섞여 올라왔다. 다솜은 양발을 깨진 아크릴 위에 박고, 온몸으로 서봉춘을 뒤로 잡아당겼다.

쇠막대가 빠지며 유리문이 한 뼘 더 벌어졌고, 감염자의 팔들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서봉춘의 몸이 다솜 쪽으로 넘어오자 고명례가 달려들어 그의 팔을 붙잡았고, 문태경은 류하민을 벽에 기대 세우며 남은 진열대를 발로 밀어 문틈에 걸었다. 다솜의 손바닥에는 뒷문 카드의 모서리가 깊게 눌려 있었다. 레일 위에서는 깨진 박카스 병뚜껑 하나가 갈색 액체에 붙어 돌지 못하고 멈춰 있었다.

28· 감염 첫날 밤, 자정 직전

손을 놓지 않는 사람들

손을 놓지 않는 사람들
장소반쯤 열린 자동문에서 지하상가 하역장 계단참으로 이어지는 좁은 통로
시간감염 첫날 밤, 자정 직전
사건고명례가 검가드 샘플컵을 주머니에 밀어 넣고 서봉춘의 피 묻은 손을 양손으로 붙잡는다. 서봉춘은 미끄러운 박카스 디카페 액체 위에서 무릎이 꺾이지만, 고명례가 손을 놓지 않아 자동문 틈에서 완전히 빠져나온다. 문태경은 류하민을 벽에 기대 세운 뒤 파티온 진열대 조각을 발로 걷어차 감염자들의 팔 앞에 밀어 넣고, 다솜은 뒷문 카드와 비상구 열쇠를 쥔 채 모두를 하역장 계단 쪽으로 몰아간다.
영향서봉춘은 더 이상 혼자 남아 문을 버티는 희생자가 아니라, 고명례와 함께 끌려 나와야 하는 생존자가 된다. 문태경은 류하민을 잠시 벽에 세워 두고도 다시 방어선으로 뛰어들며, 의심받던 사람에서 시간을 벌어 주는 사람으로 완전히 이동한다. 다솜의 탈출 목표는 자동문을 빠져나가는 것에서 하역장 철문을 열어 모두를 아래 4호선 통로로 보내는 것으로 바뀐다.

고명례가 검가드 샘플컵을 바람막이 주머니에 쑤셔 넣고 서봉춘의 피 묻은 손을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서봉춘은 깨진 박카스 디카페 병에서 흐른 끈적한 액체를 밟고 한쪽 무릎을 꺾었고, 자동문 레일에서는 쇠막대가 빠진 자리로 감염자들의 손가락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이번엔 내가 안 놓는다.” 고명례가 이를 악물자 서봉춘은 손등을 빼려다 멈췄고, 윤다솜은 그의 허리띠를 잡아 뒤로 당겼다.

문태경은 류하민을 콘크리트 벽에 기대 세우고, 굴러온 파티온 노스카나인 트러블 크림 진열대 조각을 발등으로 걸어 올렸다. 그는 그것을 자동문 틈으로 걷어차 감염자들의 팔 앞에 밀어 넣었고, 연분홍 박스들이 터지며 유리 조각과 섞여 낮은 둑처럼 쌓였다. 류하민은 미끄러지며 내려앉았지만 오쏘몰 바이탈 박스의 찢어진 껍데기를 아직 팔꿈치로 누르고 있었다. 문태경은 돌아서서 그의 겨드랑이를 다시 받쳤다. “벽 짚어요. 넘어지면 다 같이 막힙니다.”

다솜은 뒷문 카드와 비상구 열쇠를 손바닥 안에 눌러 쥐고 사람들을 하역장 계단참 쪽으로 밀었다. 젖은 배송 송장들이 계단 모서리에 달라붙어 발끝마다 들러붙었고, 주황 비상등 아래에서 서봉춘의 피가 고명례의 손가락 사이로 번졌다. 자동문 뒤에서는 진열대 조각이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다솜은 뒤돌아보지 않고 고명례의 어깨를 밀고, 문태경에게 류하민의 반대쪽 팔을 넘겨받았다. 네 사람의 발이 한꺼번에 닳은 논슬립 고무줄 위로 내려섰다.

29· 감염 첫날 밤, 자정 직전

젖은 철문과 짧은 삑음

젖은 철문과 짧은 삑음
장소지하상가 하역장 계단참의 젖은 철문 앞
시간감염 첫날 밤, 자정 직전
사건윤다솜은 서봉춘과 고명례, 문태경을 하역장 계단참까지 몰아넣고 직원용 뒷문 카드를 카드 리더에 댄다. 문태경은 류하민을 벽에 기대 세운 뒤 뒤따라오는 감염자들을 막으려고 찢어진 진열대 조각을 통로에 밀어 넣는다. 고명례는 검가드 샘플컵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피 묻은 서봉춘의 손을 놓지 않는다. 카드 리더가 짧게 삑 울리며 젖은 철문 잠금이 풀리고, 그 전자음에 멀리 있던 감염자들의 몸이 계단 쪽으로 돌아선다.
영향탈출의 중심이 반쯤 열린 자동문에서 하역장 철문으로 완전히 옮겨진다. 다솜이 가진 직원용 카드는 모두를 살릴 수 있는 마지막 출입권이지만, 동시에 감염자들을 부르는 소리의 원인이 된다. 문이 열리면서 생존자들은 4호선 통로로 내려갈 수 있는 길을 얻지만, 그 길은 다시 닫아야만 안전해진다. 다음 순간 다솜이 카드를 부러뜨릴 이유가 선명해진다.

윤다솜은 서봉춘의 허리띠를 한 손으로 밀고 다른 손으로 직원용 뒷문 카드를 카드 리더에 내리찍었다. 지하상가 하역장 계단참의 논슬립 고무줄은 빗물과 흙으로 번들거렸고, 주황 비상등은 젖은 철문 위에서 끊어질 듯 깜박였다. 고명례는 서봉춘의 피 묻은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쥔 채 뒤로 끌었고, 검가드 샘플컵은 그녀의 바람막이 주머니 속에서 찌그러졌다. 문태경은 류하민을 벽에 기대 세우고, 찢어진 파티온 진열대 조각을 좁은 통로에 발로 밀어 넣었다.

카드 리더가 짧게 삑 울렸다. 그 소리는 작았지만 계단 아래와 뒤쪽 통로로 동시에 튀었고, 멀리 반쯤 열린 자동문 쪽에서 감염자들의 젖은 발소리가 방향을 바꾸었다. “열렸어요, 들어가요.” 다솜이 철문 손잡이를 잡아당기자 문이 끈끈하게 들러붙은 고무 패킹을 떼며 열렸다. 서봉춘이 먼저 밀려 들어가려다 고명례를 앞으로 세웠고, 고명례는 이번에는 남편의 손을 놓지 않은 채 같이 문턱을 넘었다.

문태경은 류하민의 팔을 자기 어깨에 다시 걸고 철문 안으로 몸을 접어 넣었다. 다솜은 마지막으로 계단참 바닥에 달라붙은 찢어진 배송 송장들을 밟고 돌아섰다. 카드 리더의 작은 불빛이 한 번 더 깜박였고, 뒤쪽 통로 끝에서 붉은 네온을 묻힌 손들이 난간을 잡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다솜의 손안에서 뒷문 카드가 젖은 플라스틱처럼 미끄러졌다.

30· 밤 11시 56분

부러진 카드

부러진 카드
장소지하상가 하역장 계단참
시간밤 11시 56분
사건윤다솜은 젖은 철문이 열리자마자 카드 리더에서 직원용 뒷문 카드를 뽑아 두 손으로 꺾는다. 고명례는 서봉춘의 피 묻은 손을 놓지 않고 계단 안쪽으로 끌어당기고, 문태경은 류하민의 어깨를 받친 채 뒤에서 철문을 밀어 닫는다. 카드가 두 동강 나면서 다시 열릴 수 있는 출입권이 사라지고, 다솜은 난간 위에 흠집 난 박카스 디카페 병뚜껑 하나를 올려놓는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찢어진 송장과 샘플컵, 병뚜껑의 순서를 뒤에 남기고 4호선 통로 아래로 내려간다.
영향다솜은 마지막으로 매장의 질서였던 출입 카드를 스스로 끊어 버리며, 더는 자동문과 리더기와 번호표에 생존을 맡기지 않겠다고 행동으로 결정한다. 문태경은 류하민을 버리지 않고 함께 내려가며 의심받던 위치에서 살아남은 무리의 일부가 된다. 고명례와 서봉춘은 서로를 밀어내지 않고 같은 속도로 계단을 내려간다. 하역장 철문이 닫히면서 올리브영 명동점의 밝은 형광등과 상품 진열의 세계는 뒤에 남고, 어둡고 불확실한 4호선 통로가 다음 생존의 무대가 된다.

윤다솜은 젖은 철문이 벌어진 순간 카드 리더에서 직원용 뒷문 카드를 뽑아 손바닥 사이에 넣고 꺾었다. 플라스틱이 짧게 갈라지는 소리가 주황 비상등 아래서 났고, 뒤쪽 통로 끝에서는 붉은 네온을 묻힌 감염자들의 손이 난간을 긁으며 올라왔다. “다시는 안 열려요.” 다솜이 부러진 카드를 계단참 바닥에 던지자, 문태경이 류하민의 겨드랑이를 받친 채 어깨로 철문을 밀었다. 철문은 찢어진 배송 송장 몇 장을 문틈에 씹어 넣으며 닫혔다.

고명례는 바람막이 주머니 속 찌그러진 검가드 샘플컵을 한 번 눌러 넣고, 서봉춘의 피 묻은 손을 더 세게 잡았다. 서봉춘은 손을 빼지 않았다. 그는 한쪽 발로 미끄러운 논슬립 고무줄을 더듬어 계단을 내려섰고, 고명례는 그의 팔을 자기 어깨 위로 올렸다. 문태경은 류하민을 벽 쪽으로 기대게 하며 뒤따랐고, 류하민의 삐뚤어진 명찰이 비상등에 한 번 번쩍였다. 다솜은 마지막으로 난간 위에 흠집 난 박카스 디카페 병뚜껑 하나를 올려놓았다.

철문 너머에서 감염자들이 부딪히는 둔한 소리가 한 번 울렸지만, 카드 리더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다솜은 무전기를 바닥에 내려놓고, 부러진 카드 반쪽을 발끝으로 계단 모서리 아래 밀어 넣었다. 아래 4호선 통로에서는 비상등이 띄엄띄엄 켜졌다 꺼졌고, 젖은 계단마다 찢어진 송장의 바코드가 발바닥에 달라붙었다 떨어졌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말없이 내려갔다. 난간 위 병뚜껑만 주황빛을 받아 작게 번쩍였다.

'(동아제약)번호표 뽑았으면 좀비도 줄 서요'스토리 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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