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정음은 새벽 6시, 분장차 거울 앞에서 눈을 뜬다. 왕비 가체는 이미 머리에 얹혀 있고, 입술에는 아직 바르지도 않은 홍색 립스틱이 반쯤 번져 있다. 창밖에서는 비닐 천막이 젖은 북처럼 펄럭이고, 누군가 “딸기우유 누구 거야!” 하고 소리친다. 그녀는 손목 안쪽에 숨겨둔 싸구려 스톱워치를 확인한다. 6시 00분 03초. 이번이 스물일곱 번째다. 매번 새벽 4시 44분, 정전 앞 진흙탕에 떨어진 딸기우유 팩을 밟는 순간 발바닥에서 끈적한 단맛이 터지고, 다음 순간 그녀는 이 분장차로 되돌아온다. 기억은 남고, 피로도 남고, 남들이 보기엔 미친 사람처럼 보이는 말들만 늘어난다.
오늘 황정음의 외부 목표는 단순하다. 해가 지기 전 폭우 속에서 무너질 3미터짜리 가짜 성문을 직접 받쳐 루프를 끝내야 한다. 하지만 속으로는 더 지저분한 욕심이 있다. 그녀는 이 현장에서 “예능에서 웃기던 배우가 사극까지 망치러 왔다”는 눈빛을 뒤집고 싶다. 한 번만 제대로 버티면, 자신이 아직 장면의 중심을 감당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첫 루프들에서 그녀는 혼자 뛰었다. 도윤이 비단끈에 묶인 채 용상째 내리막을 굴러 내려와도 고개를 돌리지 않으려 했고, 반미자가 김밥 쟁반을 제사상처럼 들고 카메라 앞을 가로질러도 밀쳐내려 했다. 그럴 때마다 누군가 넘어지고, 말이 놀라고, 성문은 더 일찍 기울었다. 그녀가 성문 앞에 도착해도 손끝 하나 걸기 전에 딸기우유 팩이 발밑에서 찌그러졌다.
계봉탁은 그 모든 실패를 기억하지 못한다. 그는 비에 젖은 패딩 조끼를 털며 “오늘 안에 왕비 즉위 장면 끝냅니다!”라고 외치지만, 낡은 확성기에서는 “꼬끼오오오!”만 터져 나온다. 스태프들은 웃고, 엑스트라들은 박수를 치고, 봉탁은 얼굴이 벌게져 확성기를 겨드랑이에 끼고 직접 입으로 큐를 준다. 정음은 처음엔 그 닭 울음을 저주처럼 여긴다. 그러나 루프가 쌓일수록 소리 사이의 간격이 줄어드는 순간마다 조명 받침대가 미끄러지고, 용상 바퀴가 풀리고, 성문 뒤 합판이 젖어 휘는 것을 본다. 봉탁의 망가진 확성기는 현장의 우스운 장난감이 아니라, 무너짐이 가까워질수록 더 급하게 우는 유일한 시계다.
정음은 다음 루프부터 사람들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분장차에서 뛰쳐나온 그녀는 노도윤을 찾아 소품 창고로 간다. 도윤은 왕관을 품에 안고 젖은 안전핀 통을 뒤지며 “제가 다 처리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그의 손은 떨리고, 바지 옆선에는 기름 자국이 번져 있다. 정음은 그가 숨긴 용상 바퀴의 헐거운 축을 발로 눌러 보여준다. 도윤은 얼굴이 하얘진다. 정규직 전환 평가일이라 안전핀 하나 아끼려 했다는 말을 끝내기 전에, 비단끈이 그의 허리에 감기고 용상이 뒤에서 쿵 하고 밀려온다. 정음은 치맛자락을 걷어차고 몸을 던져 도윤의 헬멧을 씌운 뒤, 함께 진흙 위를 미끄러진다. 둘은 밥차 옆 고무통에 처박히고, 김치 국물이 왕비 한복에 튄다. 성문 앞에는 늦는다. 다시 딸기우유 팩이 찌그러진다.
다음엔 반미자를 붙잡는다. 미자는 엑스트라 대기 천막에서 김밥 쟁반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있다. 은박지 아래 김밥은 비에 눅눅해졌고, 단무지 노란색이 왕비 즉위식 제물처럼 번쩍인다. 정음은 미자가 매번 카메라 중앙으로 걸어 들어오는 시간을 맞히고, 김밥 속 단무지가 열세 조각이라고 말한다. 미자는 처음엔 귀신 보듯 뒷걸음질치지만, 정음이 “선생님 얼굴 나오게 해드릴 테니까, 대신 저 성문 아래 물 고이는 거 봐주세요”라고 하자 눈빛이 달라진다. 미자는 노인회 단톡방보다 빠른 손짓으로 궁녀 엑스트라들을 세 줄로 재배치하고, 김밥 쟁반을 방패처럼 들고 밥차 카트의 길을 막는다. 카트는 멈추지만, 봉탁이 “카메라 돌아!”를 외치는 순간 확성기에서 닭 울음이 세 번 연달아 터지고, 엑스트라들이 웃다가 대열이 무너진다. 미자는 처음으로 카메라 렌즈가 아니라 성문 밑 진흙에서 올라오는 물방울을 본다.
마복례는 가장 늦게 설득된다. 그녀의 은퇴 경주마 번개떡은 왕관을 물고 말 천막을 박차고 나가 매번 성문 반대편으로 사람들을 끌고 간다. 정음은 복례를 몰아붙이며 “말이 예능감을 배운 게 아니라 겁먹은 거죠”라고 말한다. 복례는 젖은 계약서를 주먹에 구기고, 말 일 끊기면 번개떡 사료값도 못 낸다고 낮게 대꾸한다. 그때 번개떡이 코를 벌름거리며 성문 쪽 흙냄새를 맡고, 왕관을 문 채 미끄러운 내리막으로 달린다. 복례는 처음으로 거짓말을 멈춘다. 그녀는 정음에게 왕관 모양 호루라기를 던지고, “쟤가 도망치는 쪽 반대가 아니라, 쟤가 피하려는 데를 봐요”라고 말한다. 다음 루프에서 복례는 일부러 왕관을 번개떡에게 물린다. 말은 사람들을 웃기며 달아나는 척하지만, 실은 젖은 성문 주변에서 엑스트라들을 멀리 끌어낸다. 웃음소리 속에서 위험 구역이 비기 시작한다.
그러나 봉탁은 끝까지 버틴다. 그는 성문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듣고도 “한 번만 더”를 외친다. 마지막 투자 심사단이 오후에 온다는 말, 황정음 이름 석 자 없으면 드라마가 접힌다는 말, 자기 손목시계까지 담보 잡혔다는 말을 비처럼 쏟아낸다. 정음은 루프 이야기를 꺼내지만, 봉탁은 그녀의 팔을 잡고 정전 중앙으로 끌고 간다. “배우가 현장 겁주면 끝이야. 오늘은 찍어야 돼.” 그 순간 확성기에서 닭 울음이 짧게, 짧게, 거의 심장박동처럼 터진다. 정음은 그의 손을 뿌리치지 않는다. 대신 자기 손목의 스톱워치를 그의 손바닥에 눌러 쥐여준다. “감독님, 지금부터 닭이 세 번 울면 저 문이 기웁니다. 아니면 제가 미친 걸로 하고 NG값 제가 물게요.”
봉탁은 비웃으려다 멈춘다. 첫 번째 닭 울음에 조명 받침대가 성문 쪽으로 한 뼘 미끄러진다. 두 번째 닭 울음에 가짜 단청 가장자리가 물에 불어 벌어진다. 세 번째 닭 울음에 성문 뒤 고정핀이 툭 빠져 진흙탕에 꽂힌다. 봉탁은 얼굴에서 피가 빠진 채 확성기를 내려놓는다. 하지만 바로 그때 도윤이 고정핀을 주우려 뛰어들고, 풀린 용상이 뒤에서 그를 덮친다. 정음은 성문으로 가야 한다. 이번엔 시간이 맞는다. 도윤을 외면하면 그녀는 처음으로 성문 앞에 제때 닿을 수 있다.
정음은 이를 악물고 돌아선다. 왕비 치맛자락이 진흙물을 갈라 도윤 쪽으로 튄다. 그녀는 도윤의 비단끈을 잡아채고, 미자는 김밥 쟁반을 던져 용상 바퀴 밑에 끼운다. 쟁반은 찌그러지고 김밥은 진흙에 흩어진다. 복례는 번개떡의 고삐를 놓아 왕관을 미끼로 성문 반대편 엑스트라들을 더 멀리 빼낸다. 봉탁은 처음으로 “컷”이 아니라 자기 몸으로 카메라 레일 앞을 막는다. 촬영은 망한다. 투자 심사단이 우산을 접지도 못한 채 그 광경을 본다. 봉탁은 입을 열어 변명하려 하지만 확성기에서 또 닭 울음이 터지고, 그는 그냥 확성기를 진흙에 던진다.
해가 기울 무렵, 폭우가 세트를 때린다. 정전 앞 마당은 발목까지 빠지는 진흙탕이 되고, 케이블 선을 따라 물이 작은 개울처럼 흐른다. 성문은 젖은 합판 냄새를 풍기며 앞으로 숙인다. 이번에는 모두가 그 아래에 있다. 정음은 도윤에게 헬멧을 다시 씌우고, 미자에게 엑스트라들을 뒤로 빼라고 손짓한다. 복례는 번개떡을 성문 옆 기둥에 세워 말이 놀라지 않도록 눈을 가린다. 봉탁은 떨리는 손으로 빠진 고정핀을 들고 뛰어오지만, 진흙에 발이 빠져 넘어진다. 정음은 그를 일으키는 대신 그의 손목을 잡아 핀을 자기 쪽으로 끌어온다. “감독님은 이제 그만 찍고, 잡아요.”
성문이 내려앉는다. 정음은 두 손으로 젖은 목재를 받친다. 왕비 소매가 찢어지고, 형광 안전조끼가 어깨에서 벗겨진다. 무게가 팔을 타고 등으로 떨어진다. 그녀 혼자서는 버틸 수 없다. 도윤이 용상에서 뜯어낸 비단끈을 성문 다리에 감고, 미자가 엑스트라들을 불러 줄줄이 끈을 잡아당긴다. 복례는 번개떡의 안장끈을 풀어 기둥에 묶고, 봉탁은 진흙 속에 무릎을 박은 채 고정핀을 망치 대신 확성기로 두드린다. 확성기는 맞을 때마다 “꼬끼—꼬끼—” 하고 찢어진 닭 울음을 낸다. 우스운 소리인데 아무도 웃지 않는다. 정음은 이를 악물고 성문을 밀어 올린다. 팔이 풀리려는 순간, 물웅덩이에 떠 있던 찌그러진 딸기우유 팩이 그녀의 운동화 앞까지 밀려온다. 4시 44분마다 그녀를 되돌리던 그 팩이다. 이번에는 밟지 않는다. 미자가 김밥 젓가락으로 그것을 툭 쳐서 옆 도랑으로 흘려보낸다.
고정핀이 박히고, 성문은 비스듬하지만 멈춘다. 정음은 진흙탕에 주저앉는다. 해는 세트장 처마 뒤로 완전히 내려가고, 아무 일도 되감기지 않는다. 6시 분장차의 백열등도, 립스틱도, 첫 닭 울음도 돌아오지 않는다. 봉탁은 젖은 확성기를 들고 한참 서 있다가, 투자 심사단 쪽이 아니라 스태프들 쪽으로 고개를 숙인다. “오늘 촬영 접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확성기를 통하지 않아 작지만, 처음으로 닭 울음이 섞이지 않는다.
다음 날 아침, 청운궁 세트는 여전히 싸구려 궁궐이고, 비에 젖은 단청은 더 들떠 있다. 드라마는 일정이 밀리고, 봉탁은 투자자에게 깨지고, 도윤의 정규직 평가는 보류된다. 미자의 김밥 쟁반은 찌그러져 더는 제사상처럼 보이지 않고, 복례는 번개떡의 출연 계약서에 안전 조건을 손글씨로 덧붙인다. 정음은 분장차 거울 앞에 앉아 왕비 가체 대신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말린다. 누군가 딸기우유를 내밀자 그녀는 잠깐 굳었다가, 빨대를 꽂아 한 모금 마신다. 달고 미지근하다. 밖에서 봉탁이 맨목소리로 “리허설만 갑시다!”라고 외친다. 정음은 흰 운동화 끈을 단단히 묶고, 왕비 치맛자락을 걷어 올린 채 다시 진흙탕으로 걸어 나간다. 이번에는 장면을 살리러 가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무사히 서 있을 자리를 먼저 보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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