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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ytalk 오리지널 · 장면 15 · 챕터 5

내 몫까지 들지 마

valuable Green treefish 87크리에이터 페이지 →

산속 기숙 고등학교에 입학한 소녀는 이불 꾸러미를 떨어뜨린 계단에서, 유치원 때마다 자기 신발을 거꾸로 신겨 주던 남자아이와 다시 만난다. 이제는 누구에게나 깍듯한 기숙사 층장이 된 그는 소녀에게만 말을 놓고, 소녀는 그가 건네는 짐수레를 밀어내다가 바퀴를 배수로에 빠뜨린다. 둘은 망가진 수레를 변상하는 대신 한 달간 밤 아홉 시의 공동 세탁실 마감을 맡는데, 그가 소녀의 젖은 운동화 안에 신문지를 채워 두는 동안 소녀는 그에게 줄 축제 무도회 초대장을 세 번이나 접었다 편다. 마지막 당번 날, 다른 학생이 세탁실 문 앞에서 그에게 꽃을 내밀고, 소녀의 주머니 속 초대장은 젖은 손에 눌려 찢어지기 시작한다.

  • 등장인물 4
  • 장소 5
  • 장면 15
  • 줄거리 2,809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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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 Characters

등장인물들

윤소민

여성

산속 기숙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공동 세탁실 마감을 맡게 된 신입생

프로필

윤소민은 박건우에게 도움받는 어린아이가 아니라 함께 무도회에 갈 상대로 불리고 싶어, 사고 보고서에 박건우가 먼저 적은 책임 문장 아래 자기 잘못을 덧붙이고 초대장을 준비한다. 윤소민이 매일 먼저 세탁실 문을 열면서 박건우의 밤 아홉 시도 층장 업무 대신 둘이 건조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되지만, 윤소민은 당번이 끝난 뒤에도 만나자는 말만은 꺼내지 못한다. 마지막 날 최다인이 꽃을 들고 나타나자 윤소민은 젖어 찢어지는 초대장을 숨겨 지금까지의 다정함을 남겨 둘지, 꺼내 건네고 박건우의 대답을 들을지 선택해야 한다.

16세 윤소민은 막힌 배수망을 먼저 꺼내고도 박건우가 고맙다고 하면 “네 차례였거든”이라며 점검표를 손끝으로 두드린다. 윤소민은 밤 아홉 시가 되기 전에 내려와 세제를 계량하지만, 복도에서 박건우의 발소리가 들리면 펼쳐 둔 초대장을 세 번 접었다 펴고 숙제 밑에 밀어 넣는다. 박건우가 운동화에 채워 둔 신문지를 발견한 윤소민은 “내가 해도 되는데”라고 말한 뒤, 남은 신문지로 박건우의 젖은 신발까지 채워 놓는다.

배경

유치원 소풍 사진 속 윤소민은 박건우가 좌우를 바꾸어 신겨 준 신발을 신고 서 있고, 입학 짐을 싸던 날에도 가족은 그 사진을 꺼내 “이번에는 신발 잘 신고 다녀”라고 웃었다. 16세가 되어 기숙학교 계단에서 박건우를 다시 만난 윤소민은 “이제 혼자 할 수 있어”라며 내밀어진 짐수레를 밀어냈다가 바퀴를 배수로에 빠뜨렸다. 정미경 앞에서 윤소민은 변상금 때문에 집에 전화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고 한 달 마감 당번을 받아들였으며, 이후 최다인이 초대장 여분을 건네자 두 장 중 모서리가 덜 구겨진 것을 골라 교복 안주머니에 넣었다.

묘사

윤소민은 턱 아래에서 뭉툭하게 끊긴 검은 단발에 귀 뒤로 넘기지 못한 옆머리를 달고, 짙은 갈색 눈으로 상대를 똑바로 보다가도 대답을 기다릴 때면 입술을 꾹 다무는 열여섯 살 신입생이다. 흰 셔츠 위에 회색 니트 조끼를 입고 남색 교복 치마 아래 흰 운동화를 단단히 매며, 일을 시작할 때마다 셔츠 소매를 왼쪽만 한 번 더 접어 올린다. 누가 손을 내밀면 턱부터 조금 들지만, 몸은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조끼 밑에 넣어 둔 종이 모서리를 엄지로 가만히 누른다.

박건우

남성

신입생 남학생 층의 점호를 돕다가 수레 파손의 공동 책임까지 맡은 학생

프로필

박건우는 윤소민과 세탁실을 닫는 삼십 분 동안만큼은 부탁을 해결하는 대신, 건조기 앞에 나란히 앉아 오늘 못한 일도 말하고 싶다. 그러나 박건우가 수레 사고 보고서 첫 줄에 자신의 실수부터 적으면서 윤소민은 함께 수습할 친구가 아니라 또 보호받는 아이가 된 듯 보고서를 되돌려 준다. 정미경에게 추가 당번을 청하면 둘이 만날 시간을 늘릴 수 있지만, 박건우는 윤소민이 자신 때문에 벌까지 늘었다고 받아들일까 봐 빈 신청 칸에 펜끝만 대고 있다.

박건우는 선배든 동급생이든 부탁하면 “네, 제가 할게요”부터 말하고, 윤소민 앞에서는 “너도 좀 해”라며 걸레를 건넸다가 무거운 물통은 먼저 들어 버린다. 윤소민이 젖은 운동화 속 신문지를 발견하고 입을 다물면, 박건우는 “발끝까지는 네가 채워”라며 남은 신문을 내밀지만 이미 넣은 종이를 빼지는 못한다. 박건우는 최다인의 축제 준비 부탁에도 존댓말로 답하면서, 윤소민이 세탁실 문을 열 때만 점검표를 뒤집어 놓고 옆 의자에서 자기 가방을 치운다.

배경

유치원 사진 속 박건우는 윤소민 앞에 쪼그려 앉아 신발을 신겨 주고 있고, 사진 뒷면에는 교사가 적은 ‘좌우를 반대로 신김’이라는 메모가 남아 있다. 입학 직후 박건우는 호실 배정표 앞에서 길을 묻는 학생들을 몇 번 안내한 뒤 정미경에게 층장 열쇠를 받았고, 같은 열여섯 살인 윤소민과 재회한 계단에서도 인사보다 짐수레 손잡이를 먼저 내밀었다. 사고 뒤 박건우는 보고서에 ‘손잡이를 놓았습니다’를 먼저 적어 제출했고, 윤소민이 변상금을 집에 요청하지 않게 해 달라고 말하자 옆에 서서 한 달 당번표에 함께 이름을 썼다.

묘사

박건우는 아직 볼에 둥근 살이 남은 열여섯 살 소년으로, 곧은 검은 머리를 귀 위로 단정히 자르고 흰 셔츠 위에 보풀이 조금 인 남색 교복 조끼를 입는다. 가느다란 어깨를 반듯하게 펴고 상대의 말을 듣다가도, 대답하기 직전에는 짙은 갈색 눈을 옆으로 돌리고 다문 입 한쪽만 느슨하게 푼다. 회색 교복 바지 허리에는 푸른 면끈으로 묶은 층장 열쇠가 달려 있으며, 손을 내밀려다 멈출 때마다 엄지로 그 끈의 해진 끝을 문지른다.

최다인

여성

축제 무도회 신청대를 운영하며 정작 자기 동반자 칸은 비워 둔 기숙사생

프로필

최다인은 축제 준비 때 빠진 사람 몫까지 함께 처리해 준 박건우에게, 이번에는 접수대가 아니라 무도회장 안에서 만나자고 청하려 한다. 한 학년 아래 학생에게 꽃을 주었다는 말이 생활관에 퍼져도 직접 답을 듣기로 한 최다인은 마지막 세탁실 당번 시간에 찾아가고, 윤소민의 젖은 주머니 밖으로 삐져나온 초대장 귀퉁이를 보고도 꽃을 등 뒤로 돌리지 않는다. 최다인이 문 앞에서 박건우를 부르자, 윤소민에게는 초대장을 감춘 채 당번을 끝낼 시간이 남지 않는다.

최다인은 열일곱 살 선배답게 신입생들에게 초대장 접는 법을 보여 주지만, 자기 몫의 종이에 접힌 자국이 생기면 책 밑에 눌러 놓고 몇 번이고 꺼내 본다. 최다인은 준비회의에서 빈 당번 칸을 먼저 채우다가도 “선배니까 양보해 주세요”라는 농담에는 펜 뚜껑을 닫고 “그건 내 차례인데”라고 답한다. 세탁실 문 앞에서도 최다인은 윤소민의 주머니를 손가락으로 가리키지 않고, 꽃 포장지가 손바닥에 구겨지는 동안 박건우의 대답을 기다린다.

배경

축제 준비가 늦어진 저녁, 최다인은 결석한 위원의 이름표까지 잘라 놓았고, 박건우는 부탁도 받기 전에 바닥에 흩어진 끈을 주워 이름표마다 꿰었다. 그 뒤 최다인은 박건우에게 일을 더 맡기는 대신 쉬는 시간에 함께 갈 수 있는 무도회 순서를 표시해 두었다. 초대장 배부대에 윤소민이 세 번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가자 최다인은 여분 두 장을 봉투에 넣어 건넸고, 초대할 사람을 묻는 대신 종이가 젖으면 잉크가 번진다는 말만 덧붙였다.

묘사

최다인은 턱 아래에서 반듯하게 끊기는 검은 단발과 도톰한 눈썹을 지닌 열일곱 살 학생으로, 크림색 셔츠 위에 짙은 초록색 니트 조끼를 입고 숯빛 주름치마의 허리선을 단정히 여민다. 왼쪽 가슴의 얕은 주머니에는 늘 작은 은색 집게가 꽂혀 있어, 신청서를 나누다가도 한 손으로 꺼내 남은 종이를 묶는다. 상대의 말을 기다릴 때는 턱을 조금 당기지만 시선을 피하지 않으며, 꽃을 쥔 손도 몸 앞으로 둔 채 엄지로 포장지 가장자리만 꾹 누른다.

정미경

여성

산길의 마지막 버스가 끊긴 뒤에도 생활관에 남아 시설 고장과 학생 민원을 처리하는 사감

프로필

정미경은 윤소민에게 수레 변상금을 집에 청구하지 않는 대신 박건우와 한 달간 세탁실을 마감하게 하고, 청소 직원이 출근하기 전에 두 사람이 파손 수습까지 끝냈는지 확인한다. 축제 날에도 아홉 시 마감을 못 박은 정미경은 세탁실 앞에 꽃을 든 최다인이 나타나자 열쇠 고리를 움켜쥔다. 직접 문을 잠그면 학생들의 대화를 끊어야 하고, 열쇠를 맡기면 학생들 앞에서 예외는 없다고 한 말을 거둬야 한다.

49세 여성 사감 정미경은 학생이 “다 했어요”라고 말하면 바닥 대신 걸레를 먼저 만져 보고, 젖은 걸레를 내민 학생에게는 다시 닦으라는 말보다 손부터 씻으라는 말을 건넨다. 윤소민과 박건우가 숙제를 펼쳐 놓고 건조기 종료를 기다리는 밤이면 정미경은 말없이 배수구의 보풀을 걷어 내고도 점검표에는 두 사람의 이름을 남긴다. 박건우가 윤소민 몫까지 대답할 때마다 정미경은 볼펜 뚜껑을 닫고 윤소민 쪽으로 점검표를 돌린다.

배경

정미경은 사감으로 부임한 첫해, 축제 다음 날 청소 직원이 세탁실에서 꺼낸 동전과 머리핀을 책상 위에 늘어놓자 학생들에게 내렸던 ‘사용 주의’ 안내문을 거두고 배수구 청소를 마감 항목에 넣었다. 올해 49세가 된 정미경은 수레 사고 뒤 윤소민이 “집에는 돈 얘기 안 하시면 안 돼요?” 라고 묻자 보호자 연락란을 비워 두고, 달력에 한 달치 당번 칸을 그었다. 축제 준비 회의에서 마감을 늦춰 달라는 요청까지 거절한 정미경은 공지문 아래에 직접 아홉 시를 적어 붙였다.

묘사

정미경은 관자놀이에 흰머리가 섞인 짧은 단발과 눈가의 잔주름이 또렷한 마흔아홉 살 여성으로, 회색 면 셔츠 위에 짙은 남색 작업 조끼를 입고 무릎이 조금 늘어난 검정 바지에 낮은 고무창 신발을 신는다. 걸음을 멈추면 어깨는 반듯이 세우되 고개를 살짝 숙여 학생의 말을 끝까지 듣고, 다문 입술 아래로 대답을 잠시 붙잡아 둔다. 오른손에는 낡은 주황색 고리가 달린 열쇠 꾸러미를 쥐고 있는데, 손을 내밀다가도 엄지로 고리의 닳은 자리를 한 번 더 문지른다.


줄거리 · Synopsis

줄거리

윤소민은 솔재학원에 입학한 첫날, 산길에서 굴러온 이불 꾸러미를 좁은 계단에서 놓친다. 짐수레를 밀고 내려오던 박건우가 받으려다 바퀴를 배수로에 빠뜨리고, 둘은 수레를 들어 올리려다 손바닥에 흙을 묻힌 채 한참을 씨름한다. 유치원 때 소민의 신발을 매번 거꾸로 신겨 주던 건우는 이제 신입생 층장이다. 그는 누구에게나 깍듯하게 말하면서 소민에게만 “너, 손 다쳤어?”라고 묻는다. 소민은 도움받는 아이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사고 보고서에 건우가 먼저 적은 자기 책임 문장 아래 자신의 잘못을 덧붙인다. 정미경 사감은 집에 변상금을 청구하지 않는 대신 두 사람에게 한 달간 밤 아홉 시 세탁실 마감을 맡긴다.

첫 당번 날, 건우는 무거운 물통을 먼저 들고 소민에게 걸레를 건넨다. 소민은 물통 손잡이를 빼앗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고, 둘은 바닥에 쏟은 물을 두 번 닦는다. 정미경은 젖은 걸레를 만져 보고 다시 닦게 한 뒤 점검표를 소민 쪽으로 돌린다. 그날 이후 소민은 아홉 시 전에 세탁실 문을 열어 세제를 계량하고, 건우는 점호를 마치자마자 내려온다. 건조기가 멈출 때까지 둘은 숙제를 나란히 펼쳐 놓지만, 건우가 소민의 막힌 배수망을 먼저 꺼내 주면 소민은 점검표를 손끝으로 두드리며 “네 차례였거든”이라고 한다. 다음 날에는 소민이 건우의 젖은 신발에 신문지를 채운다. 건우는 말없이 남은 신문지를 밀어 주고, 소민은 그 신문지를 그의 운동화 발끝까지 눌러 넣는다.

축제 무도회 준비가 시작되자 최다인은 접수대에서 신청서를 나누며 건우에게 빠진 당번을 대신 맡아 달라고 한다. 건우는 평소처럼 “네, 제가 할게요”라고 답하고, 다인은 그가 또 자기 몫을 미루지 못했다는 듯 펜 뚜껑을 닫는다. 소민은 다인이 건우와 함께 일하는 모습을 보고 초대장을 세 번 접었다 펴지만, 건우에게 건네지 못한 채 숙제 밑에 숨긴다. 생활관에서는 층장이 신입생의 일을 대신한다는 말이 돌고, 건우는 그 말을 듣고도 다음 날 소민의 빨래 바구니를 들어 준다. 소민은 바구니를 잡아당겨 자기 쪽으로 가져가고, 젖은 옷이 바닥에 떨어진다. 둘은 말없이 주워 담지만 그날 세탁실에서는 건조기 소리만 듣는다.

며칠 뒤, 비가 밤새 내려 계단 배수로가 솔잎과 흙으로 막힌다. 아침 점호 전에 물이 생활관 지하 출입문까지 흘러들고, 학생들이 세탁실에 맡긴 축제 의상과 침구가 바닥에 놓여 있다. 정미경은 청소 직원이 오기 전까지 물길을 터야 한다며 점검표를 들고 내려온다. 건우는 층장 열쇠를 꺼내 시설 창고를 열려고 하지만 자물쇠가 걸려 돌아가지 않는다. 소민은 배수로 덮개를 맨손으로 들어 올리려다 손가락을 끼우고, 건우가 덮개를 받치는 동안 정미경은 긴 손잡이를 가져온다. 셋이 힘을 모아 덮개를 젖히자 물이 쏟아져 나가고, 소민은 젖은 의상 꾸러미를 높은 탁자 위로 옮긴다. 그 과정에서 건우는 층장 업무를 핑계로 소민을 뒤로 밀어 놓고, 소민은 그의 손목을 잡아 자기 옆에 세운다. “같이 들자.” 건우는 대답 대신 의상 꾸러미의 반대쪽을 든다.

그날 저녁, 정미경은 비가 더 올 수 있다며 세탁실 마감을 앞당기고, 축제 준비 당번표에 건우의 이름을 추가한다. 건우는 소민에게 말하지 않고 신청 칸에 자기 이름을 적는다. 소민은 그 종이를 발견해 펜을 빼앗고 자기 이름도 나란히 적는다. 건우가 “네가 또 내 일까지 할 필요 없어”라고 하자 소민은 “네가 먼저 적으면 내가 늘 뒤에 붙는 것 같아”라고 말한다. 건우는 종이를 낚아채지 않고, 대신 두 사람의 이름 사이에 그어진 선을 손가락으로 지운다. 다음 날 그는 최다인의 부탁을 거절하고, 다인은 축제 접수대 일을 다른 학생에게 나눈다. 하지만 건우가 자신을 피한다고 여긴 다인은 무도회 초대장을 직접 준비해 마지막 당번 날 세탁실로 찾아가기로 한다.

축제 전날, 소민은 초대장을 주머니에 넣고 세탁실로 내려간다. 건우는 평소처럼 의자 하나를 비워 두지만, 그날은 최다인의 부탁으로 가져온 꽃 포장지가 점검표 옆에 놓여 있다. 건우가 꽃을 다인에게 돌려주려는지, 축제 장식으로 쓰려는지 소민은 묻지 못한다. 정미경은 아홉 시가 되면 문을 잠그겠다고 알리고, 두 사람에게 마지막 바닥 점검을 맡긴다. 소민은 주머니 속 종이를 쥔 채 걸레를 빨고, 건우는 소민의 젖은 운동화에 신문지를 더 채우려다 그녀가 이미 해 둔 것을 본다. 그는 신문지를 접어 탁자에 놓는다. “오늘 끝나도, 내일은 같이 갈 수 있잖아.” 소민은 대답 대신 초대장 모서리를 손가락으로 문지른다.

마지막 당번 날, 최다인은 꽃을 들고 세탁실 문 앞에 선다. 정미경은 열쇠를 쥔 채 문을 닫으려다 멈추고, 다인은 꽃을 등 뒤로 숨기지 않는다. 소민의 주머니에서 젖은 초대장 귀퉁이가 삐져나와 찢어지기 시작한다. 건우가 다인을 향해 몸을 돌리자 소민은 초대장을 꺼내 탁자 위에 펼친다. 물에 번진 글씨를 손바닥으로 누르고 “무도회, 나랑 갈래?”라고 묻는다. 다인은 꽃을 내리지 않은 채 기다리고, 건우는 먼저 소민의 초대장을 집어 들지 않는다. 그는 다인에게 축제 준비를 도와준 건 고맙지만 함께 가고 싶다는 뜻은 아니었다고 말한다. 다인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꽃을 접수대 장식 바구니에 놓는다. 건우는 소민에게 “가자”라고 답한다.

정미경은 아홉 시가 지난 뒤에도 문을 잠그지 않는다. 대신 점검표에 두 사람의 마감 완료 시간을 적고, 열쇠를 자기 주머니에 넣는다. 소민과 건우는 젖은 초대장을 책 사이에 끼워 말린 뒤 생활관 복도로 올라간다. 다음 날 무도회장 입구에서 건우가 소민의 신발 끈을 내려다보지만, 손을 뻗지 않는다. 소민은 자기 신발을 고쳐 묶고 그의 소매를 잡아 사람들 사이로 끌고 들어간다. 세탁실 당번은 끝났지만, 둘은 더는 그 시간이 있어야만 만날 수 있는 사이가 아니다.


세계관 · World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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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정

해발 900미터, 산길 끝에 자리한 사립 기숙 고등학교 ‘솔재학원’. 오래된 본관과 생활관 사이에는 비탈을 깎아 만든 좁은 계단이 이어지고, 계단 아래 배수로는 비가 오면 솔잎과 흙으로 금세 막힌다. 생활관 지하 공동 세탁실은 건조기 두 대와 긴 접이식 탁자, 벽에 붙은 당번표가 전부다. 밤 아홉 시면 마지막 버스가 산 아래로 내려가고, 세탁실 창문에는 산안개가 들러붙는다. 세제 냄새와 젖은 양말 냄새가 섞인 그 방은 학생들에게 빨래를 하는 곳이자, 하루의 끝을 함께 견디는 작은 공용 공간이다.

시대

현재의 한국, 가을 학기 초부터 교내 축제 날까지 이어지는 한 달. 해가 짧아져 저녁 자율학습이 끝나기도 전에 복도가 어두워지고, 비에 젖은 운동화는 다음 날 아침까지 마르지 않는다. 학교는 매년 가을 무도회를 열지만, 산길의 버스 운행과 생활관 통금 때문에 학생들이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시간은 제한되어 있다.

규칙

- 생활관 공동 시설은 밤 아홉 시에 닫으며, 그 뒤에는 사감이나 시설 담당자만 열쇠로 출입할 수 있다. 세탁실 마감 당번인 소민과 건우에게 남는 시간은 매일 삼십 분뿐이라, 말하지 못한 마음도 함께 건조기 종료음에 쫓긴다.

- 시설물 파손은 학생이 먼저 사고 보고서에 책임자를 적고, 수리비 대신 지정된 공동 당번으로 갚을 수 있다. 건우가 먼저 자기 이름을 쓴 뒤 소민이 자기 잘못을 덧붙이면서, 둘은 벌을 나누는 동시에 누가 누구를 보호하는지 다투게 된다.

- 생활관 층장은 모든 학생에게 존댓말을 쓰고 업무 기록을 남겨야 하지만, 사적인 대화는 금지되지 않는다. 건우가 소민에게만 말을 놓는 사소한 예외는 둘의 어린 시절을 드러내면서도, 다른 학생들 앞에서는 쉽게 오해를 부른다.

- 축제 무도회 동반 신청은 종이 초대장을 직접 건네고 상대가 답해야 성립한다. 소민은 초대장을 접었다 펴며 망설일 수 있지만, 마지막 당번 날이 지나면 건우를 세탁실에서 기다릴 이유도 사라진다.

기술과 철학

학교는 오래된 건물과 현대식 생활 규정을 함께 굴린다. 학생들은 휴대전화를 가지고 있지만, 저녁 자율학습 중에는 생활관 복도 충전함에 맡겨야 하며 급한 연락은 사감실 유선전화로 해야 한다. 시설 점검과 당번 배정은 종이 장부로 기록되어 책임이 눈에 보이고, 잘못을 적은 이름은 지우개로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학교는 공동생활을 ‘서로의 몫을 먼저 살피는 훈련’이라 가르치지만, 그 말은 학생들이 일을 대신 떠맡거나 자기 마음을 뒤로 미루는 핑계로도 쓰인다. 정미경은 기록을 남기되 학생의 사정을 듣고, 소민과 건우는 도움을 주는 일과 상대의 몫을 빼앗지 않는 일 사이에서 매번 선택해야 한다.

시각적 묘사

학교 건물은 짙은 회색 석재 기단 위에 세워져 있고, 생활관의 낡은 회색 난간에는 학생들이 말린 수건이 줄지어 걸린다. 계단의 노란 보안등은 비에 젖은 돌을 번들거리게 비추고, 배수로에는 붉은 솔잎이 가늘게 엉킨다. 세탁실 형광등은 희고 평평한 빛을 내지만, 건조기 둥근 창 안에서는 젖은 옷이 주황빛으로 돌며 잠깐씩 얼굴을 비춘다. 초대장은 물기를 먹으면 모서리부터 어두워지고, 꽃 포장지는 손에 눌릴수록 구겨진 자국을 남긴다. 산안개가 창문을 덮는 밤이면 세탁실 안의 두 사람과 문밖의 기다리는 사람만 선명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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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 & 음향

장소 · Locations

장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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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재학원 세탁실

비좁은 지하 세탁실에는 건조기 두 대가 나란히 놓여 있고, 둥근 창 안에서 옷들이 주황빛으로 돌며 평평한 형광등 아래 젖은 소매를 번쩍인다. 회전음이 접이식 탁자의 거친 상판을 낮게 울리고, 종료음이 나면 탁자 위 젖은 면직물의 주름까지 잠시 또렷해진다. 벽의 당번표 아래에는 서로 다른 필체로 적힌 두 이름이 나란히 남아 있고, 탁자 한쪽에는 물기를 먹은 종이 초대장이 책 사이에 끼워져 있다. 아홉 시를 알리는 건조기 종료음 뒤, 세탁실에는 두 사람이 처음으로 당번표 없이 마주 선 짧은 침묵과 조심스러운 입맞춤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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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과 생활관 사이 계단

본관과 생활관 사이의 좁은 계단은 비탈을 따라 급히 꺾이며 내려가고, 젖은 돌마다 노란 보안등이 길게 번져 있다. 빗물은 계단 아래 배수로를 가늘게 흐르지만, 붉은 솔잎과 흙이 엉킨 곳마다 물소리가 막혔다 다시 터진다. 발을 헛디디면 이불 꾸러미와 짐수레가 함께 미끄러질 만큼 좁은 디딤판에는 바퀴 자국이 어둡게 남아 있고, 난간 끝에 맺힌 빗방울이 지나가는 발소리에 맞춰 돌 위로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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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재학원 축제 접수대

솔재학원 축제 접수대는 크림색 조명 아래 초록 리본과 잎 장식이 둘러진 긴 탁자로 붐비고, 학생들의 손이 신청서를 밀고 당길 때마다 마른 종이가 바스락거린다. 탁자 한쪽에는 꽃 포장지가 접힌 자국을 반짝이며 쌓여 있고, 이름을 묻고 답하는 말소리 사이로 다인이 건우에게 내밀 초대장을 몇 번이고 고쳐 놓는다. 벽의 초록 장식 아래 놓인 꽃 바구니는 빈 동반자 칸이 적힌 종이들에 둘러싸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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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관 복도 충전함

생활관 복도 충전함의 매끈한 금속 칸들이 낮고 긴 벽을 따라 회백색으로 이어지고, 희미한 벽등이 닳은 바닥재 위에 가느다란 빛을 놓는다. 휴대전화 충전기를 꽂을 때마다 짧은 금속성 소리가 복도에 튀고, 자율학습을 마친 학생들의 발소리는 하나씩 멀어진다. 칸마다 남은 작은 불빛 아래, 건우가 소민의 젖은 빨래 바구니를 들어 주려던 손을 거두는 순간에도 충전선 하나가 팽팽하게 둘 사이를 가로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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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도회장 입구

무도회장 입구의 넓은 나무 바닥은 부드러운 금빛을 받아 따뜻하게 빛나고, 기둥 사이로 밝은 천 장식이 느슨한 물결처럼 걸려 있다. 안쪽에서는 피아노 선율이 또렷하게 흘러나오고 잔잔한 웃음이 겹쳐지며, 문턱에 선 두 학생의 발치까지 번진다. 소민이 제 신발 끈을 고쳐 묶는 동안 건우는 손을 내밀지 않고 기다리고, 매끈한 바닥 위로 그녀가 먼저 그의 소매를 잡아당긴다.


장면 · Scenes

장면별 이야기

챕터 01

장면 01· 가을 학기 입학 첫날, 비에 젖은 늦은 오후

기울어진 짐수레

기울어진 짐수레
장소솔재학원 본관과 생활관 사이의 좁은 계단
시간가을 학기 입학 첫날, 비에 젖은 늦은 오후
사건윤소민이 미끄러지는 이불 꾸러미를 붙잡으려다 계단 아래로 놓친다. 짐수레를 밀고 내려오던 박건우가 꾸러미를 받으려 몸을 틀지만, 수레 한쪽 바퀴가 붉은 솔잎으로 막힌 배수로에 빠져 짐칸이 비스듬히 기운다. 윤소민과 박건우는 각자 수레 손잡이를 움켜쥐고 함께 들어 올리려 하지만, 바퀴가 돌 틈에 걸려 꿈쩍하지 않는다.
영향두 사람의 손바닥과 교복 소매에 흙탕물이 튄다. 박건우는 윤소민 쪽으로 손을 뻗어 꾸러미를 치우려 하고, 윤소민은 도움을 받아들이지 않은 채 반대편 손잡이를 더 세게 끌어당긴다. 수레는 배수로에 비스듬히 걸린 채 멈추고, 두 사람의 젖은 손만 손잡이 양쪽에 남는다.

윤소민이 미끄러진 이불 꾸러미를 붙잡으려 손을 뻗는 순간, 젖은 보퉁이가 좁은 계단을 털썩 미끄러져 내려간다. 박건우가 짐수레 손잡이를 놓고 몸을 돌려 꾸러미를 받으려 하지만, 수레 바퀴 하나가 붉은 솔잎과 흙으로 막힌 배수로에 빠진다. 짐칸이 옆으로 기울며 묶인 침구가 난간에 부딪친다.

“손잡이 잡아!” 박건우가 소리치며 수레 한쪽을 들어 올린다. 윤소민은 반대편 손잡이를 움켜쥐고 힘껏 당긴다. 바퀴가 돌 틈에 걸려 움직이지 않자, 두 사람의 손에서 튄 흙탕물이 셔츠 소매와 치맛자락에 얼룩을 남긴다. 박건우가 윤소민의 손을 떼어 내고 꾸러미를 치우려 하지만, 윤소민은 손잡이를 놓지 않고 수레를 자기 쪽으로 더 끌어당긴다.

둘의 힘에 수레가 잠깐 들렸다가 다시 배수로에 턱 걸린다. 윤소민의 젖은 손바닥이 손잡이 위에서 미끄러지고, 박건우의 손은 그 옆에서 굳게 버틴다. 기울어진 짐칸 아래로 빗물이 흐르고, 두 사람은 손에 흙을 묻힌 채 각자 손잡이 한쪽을 붙들고 있다.

장면 02· 입학 첫날 저녁, 수레 사고 직후

보고서의 두 번째 이름

보고서의 두 번째 이름
장소본관과 생활관 사이 계단, 사감실
시간입학 첫날 저녁, 수레 사고 직후
사건계단 아래에서 정미경이 사고 보고서를 내밀자, 박건우는 젖은 손으로 자기 이름과 책임부터 적는다. 윤소민은 그의 펜을 막고 그 아래에 이불 꾸러미를 놓친 자신의 잘못을 덧붙인다. 정미경은 두 사람에게 변상금을 청구하는 대신 한 달 동안 매일 밤 아홉 시 세탁실 마감을 맡긴다.
영향박건우 혼자 책임을 지려던 보고서에 윤소민의 이름이 나란히 적힌다. 두 사람은 수리비 대신 공동 당번을 감당하게 되지만, 서로의 몫을 대신하려는 버릇은 첫 책임 다툼으로 남는다.

윤소민이 박건우의 펜을 붙잡아 보고서 위에서 멈춰 세운다. 계단 아래 노란 보안등이 젖은 종이와 두 사람의 흙 묻은 소매를 비추고, 정미경은 보고서 한쪽을 손바닥으로 눌러 둔다.

“제 잘못도 있어요.” 윤소민은 박건우가 적은 책임 문장 바로 밑에 자기 이름을 쓴다. 박건우가 펜을 도로 가져가려 하자 윤소민은 종이 모서리를 더 세게 누르고, 정미경은 두 사람 사이에서 펜을 받아 뚜껑을 닫는다.

정미경은 변상금 칸을 비워 둔 채 당번표를 꺼낸다. 그녀는 두 이름 옆에 한 달간의 세탁실 마감과 밤 아홉 시를 적고, 보고서를 접어 자기 장부 아래 끼운다. 젖은 계단 위에 남은 수레 바퀴 자국처럼, 당번표에는 두 이름이 나란히 번지지 않고 박혀 있다.

장면 03· 입학 첫날 저녁, 첫 세탁실 마감 당번 시간

물통을 빼앗다

물통을 빼앗다
장소솔재학원 생활관 지하 공동 세탁실
시간입학 첫날 저녁, 첫 세탁실 마감 당번 시간
사건박건우가 무거운 물통을 먼저 들어 바닥에 쏟긴 물을 닦으려 한다. 그는 윤소민에게 걸레를 건네지만, 윤소민은 걸레를 받지 않고 물통 손잡이를 움켜쥐어 자기 쪽으로 끌어당긴다. 물이 다시 바닥에 출렁이자 정미경은 걸레를 탁자에 내려놓고 두 사람에게 같은 구역을 다시 닦으라고 지시한다. 박건우와 윤소민은 서로의 손에서 물통과 걸레를 밀어내면서도 아홉 시 전에 바닥을 마친다.
영향두 사람은 첫 당번부터 서로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젖은 바닥을 두 번 닦는다. 정미경은 점검표에 마감 완료를 적되, 바닥 한쪽에 남은 물기를 발견하고 그 구역을 다시 맡긴다. 한 달간 함께 마감해야 한다는 사실이 두 사람 사이에 남고, 물통은 둘 사이 바닥에 놓인 채 누구도 먼저 들지 않는다.

박건우가 물통을 들어 올리자 윤소민은 걸레 대신 손잡이를 움켜쥐고 자기 쪽으로 끌어당긴다. 지하 세탁실의 평평한 형광등 아래 물통이 비스듬히 기울고, 물이 접이식 탁자 다리까지 번진다. 박건우는 손잡이를 놓지 않은 채 “걸레 받아”라고 말하지만, 윤소민은 팔꿈치로 그의 손을 밀어낸다.

정미경이 걸레를 탁자 위에 내려놓고 젖은 바닥을 손가락으로 짚는다. “다시 닦아.” 박건우가 물통을 내려놓자 윤소민은 걸레를 집어 들고, 그는 반대쪽 끝을 잡으려다 그녀의 손에 막힌다. 건조기 종료음이 울리는 동안 두 사람은 한쪽씩 걸레를 붙들고 바닥을 밀지만, 서로 당기는 바람에 물자국이 다시 길게 번진다.

정미경은 점검표에 마감 시간을 적고, 아직 남은 물기를 발견해 걸레를 두 사람 사이에 밀어 놓는다. 윤소민과 박건우는 말없이 각자 걸레 끝을 잡는다. 물통은 바닥 한가운데 남고, 세탁실 문이 닫힐 때까지 둘의 손은 걸레 양끝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챕터 02

장면 04· 가을 학기 초, 자율학습이 끝난 저녁

충전선 사이의 손

충전선 사이의 손
장소솔재학원 생활관 복도 충전함에서 세탁실로 이어지는 복도
시간가을 학기 초, 자율학습이 끝난 저녁
사건윤소민은 젖은 빨래 바구니를 한 손으로 끌며 충전함 앞을 지나간다. 박건우가 바구니 손잡이를 들어 주려 손을 뻗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충전함에서 늘어진 충전선이 팽팽하게 걸려 있다. 소민은 교복 안쪽에 숨긴 접힌 초대장을 꺼내려다 손을 멈추고, 건우의 손이 바구니에 닿기 전에 손잡이를 자기 쪽으로 당긴다. 건우는 충전선을 피해 한 걸음 물러서고, 소민은 바구니를 끌고 세탁실로 향한다.
영향소민은 건우의 도움을 밀어내면서도 초대장을 건네지 못한다. 충전선은 두 사람의 손이 닿을 길을 막고, 건우는 물러선 채 그녀를 따라간다. 둘은 세탁실로 함께 가지만, 소민의 주머니 속 초대장은 접힌 그대로 남는다.

윤소민이 젖은 빨래 바구니를 충전함 앞에서 끌어당기자, 박건우의 손이 손잡이 바로 위에서 멈춘다. 회백색 금속 칸 사이로 늘어진 충전선 하나가 두 사람의 팔 앞을 팽팽히 가로막고, 자율학습을 마친 뒤 멀어지던 발소리가 복도 끝에서 끊긴다. 소민의 셔츠 안쪽 주머니에서 접힌 종이 모서리가 손등에 걸린다.

“내가 들게.” 박건우가 선을 넘지 않으려 손목을 비틀어 바구니 손잡이에 닿으려 하자, 소민은 바구니를 자기 쪽으로 거칠게 잡아당긴다. 젖은 옷이 바구니 벽에 쏠리고, 손잡이가 충전선에 스쳐 짧은 금속음이 난다. 소민은 초대장을 꺼내려 주머니에 넣었던 손을 빼 바구니 밑을 받친다.

박건우는 충전선을 손끝으로 들어 올려 길을 내지만 소민은 그 틈으로 먼저 지나간다. 그는 손을 내린 채 그녀 뒤를 따라 지하 세탁실 계단을 내려간다. 소민의 주머니 속 초대장은 접힌 자국을 그대로 품고, 두 사람 사이에는 비어 있는 바구니 손잡이가 흔들린다.

장면 05· 가을 학기 초, 며칠간 이어진 세탁실 마감 당번의 어느 밤 아홉 시 전

신문지 한 장의 몫

신문지 한 장의 몫
장소솔재학원 생활관 지하 공동 세탁실
시간가을 학기 초, 며칠간 이어진 세탁실 마감 당번의 어느 밤 아홉 시 전
사건건우가 소민의 빨래 바구니를 들어 탁자 위에 옮기고, 세탁기 배수망에 엉킨 보풀과 실밥을 먼저 걷어 낸다. 소민은 바구니 손잡이를 붙들고 “내가 할 수 있어”라고 맞서지만, 건우는 무거운 젖은 옷 묶음까지 들어 건조기 앞에 놓는다. 소민은 말없이 건우의 젖은 운동화에 신문지를 채워 넣고, 건우는 남은 신문지를 소민 쪽으로 밀어 둔다.
영향소민은 건우의 도움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도 그의 몫을 살핀다. 건우 역시 그녀를 대신해 모든 일을 끝내는 대신 남은 신문지를 건네고, 둘은 서로의 젖은 운동화를 말릴 종이를 나누어 가진다. 하지만 소민의 주머니 속 초대장은 여전히 접힌 채 남는다.

건우가 소민의 무거운 빨래 바구니를 들어 세탁실 탁자에 올리자, 바구니 밑에서 물이 한 줄 흘러 회색 바닥에 번진다. 형광등 아래 건조기 창이 주황빛으로 돌고, 젖은 교복 소매가 유리에 부딪칠 때마다 둥근 그림자가 스친다. 소민은 손잡이를 놓지 않고 바구니를 자기 쪽으로 끌어내린다. “내가 할 수 있어.” 건우는 대꾸하지 않고 배수망을 빼, 실밥과 검은 보풀을 한 움큼 걷어 낸다.

소민은 젖은 옷 묶음을 건우의 손에서 받아 건조기 앞에 내려놓는다. 건우가 다시 손을 뻗자 소민은 자기 운동화를 벗어 탁자 아래에 밀어 넣고, 그의 젖은 운동화에 접은 신문지를 발끝까지 채운다. 건우는 남은 신문지를 집어 소민 앞에 밀어 둔다. 소민은 초대장이 든 주머니에 손을 대지 않은 채 종이를 받아 자기 운동화 한 짝을 채운다. 탁자 아래, 두 켤레의 신발 사이에 신문지 한 장이 납작하게 남는다.

장면 06· 가을 축제 준비가 시작된 뒤, 자율학습을 마친 저녁

바닥에 떨어진 빨래

바닥에 떨어진 빨래
장소솔재학원 축제 접수대에서 생활관 복도 충전함까지
시간가을 축제 준비가 시작된 뒤, 자율학습을 마친 저녁
사건축제 접수대에서 최다인은 빠진 당번 칸을 가리키며 박건우에게 대신 맡아 달라고 부탁한다. 박건우는 잠시 손에 든 신청서를 내려다보다가 “네, 제가 할게요”라고 답하고 빈칸에 자기 이름을 적는다. 생활관 복도 충전함 앞에서 윤소민은 숙제 밑에 접어 둔 초대장을 밀어 넣는다. 박건우가 젖은 빨래 바구니를 들어 주려 손을 뻗자, 윤소민은 손잡이를 거칠게 잡아당긴다. 바구니가 기울며 젖은 옷들이 바닥으로 쏟아지고, 두 사람은 말없이 하나씩 주워 담는다.
영향윤소민은 박건우가 최다인의 부탁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고 초대장을 건네려던 마음을 숨긴다. 박건우의 손은 바구니에서 물러나고, 윤소민은 그의 도움을 거부하는 대신 옷을 바닥에 떨어뜨린다. 둘은 같은 빨래를 주워 담지만 서로의 얼굴을 보지 않는다. 초대장은 숙제 밑에 접힌 채 남고, 한 달간의 당번이 끝나면 둘을 잇던 밤의 시간이 사라질 수 있다는 불안이 커진다.

최다인이 축제 접수대의 당번표를 박건우 앞으로 밀자, 박건우는 빈칸에 자기 이름을 적는다. 크림색 조명 아래 신청서가 바스락거리고, 최다인은 펜을 놓으며 “그럼 이 칸 부탁해”라고 말한다. 박건우는 “네, 제가 할게요”라고 답하고 종이를 다인 쪽으로 돌려준다.

그날 저녁, 자율학습을 마친 윤소민은 생활관 복도 충전함 앞에서 숙제 밑으로 접힌 초대장을 밀어 넣는다. 박건우가 젖은 빨래 바구니 손잡이를 잡으려 하자 윤소민은 먼저 손을 걸어 세게 당긴다. 바구니가 충전함 모서리에 부딪쳐 기울고, 젖은 셔츠와 양말이 닳은 바닥재 위로 쏟아진다.

박건우는 바닥에 떨어진 셔츠를 집어 들고, 윤소민은 양말 한 짝을 주워 바구니에 넣는다. 두 사람은 끝내 서로를 바라보지 않은 채 남은 옷을 주워 담는다. 숙제 밑에 숨은 초대장의 접힌 모서리만 복도 불빛 아래 삐져나와 있다.

챕터 03

장면 07· 가을 학기 중, 밤새 폭우가 내린 이른 아침. 점호 전.

물이 문턱을 넘다

물이 문턱을 넘다
장소솔재학원 생활관 지하 공동 세탁실에서 본관과 생활관 사이의 좁은 계단 아래 배수로까지
시간가을 학기 중, 밤새 폭우가 내린 이른 아침. 점호 전.
사건세탁실 문턱을 넘은 물이 바닥의 축제 의상 꾸러미 밑으로 번지자, 윤소민은 꾸러미를 접이식 탁자 위로 끌어 올린다. 박건우와 정미경이 지하 출입문을 밀어 열고 계단 쪽으로 나가자, 윤소민도 젖은 소매를 걷고 그 뒤를 따른다. 계단 아래 배수로는 붉은 솔잎과 흙으로 막혀 있고, 물은 돌계단 첫 칸까지 차오른다. 정미경은 물길을 확인하러 온 세 사람을 계단 난간 쪽으로 붙여 세우고, 건우는 층장 열쇠를 꺼내 시설 창고 쪽으로 향한다.
영향세탁실 안에 남은 의상 꾸러미는 탁자 위로 옮겨져 물에 잠기는 것을 면하지만, 계단 아래 배수로가 막힌 원인은 아직 제거되지 않는다. 건우가 열쇠로 시설 창고를 열려는 동안 소민은 배수로 덮개 앞에 다가선다. 정미경은 물이 더 차오르기 전에 작업 도구를 가져오라고 지시하고, 소민은 건우와 함께 물길을 직접 열기로 나선다.

윤소민이 축제 의상 꾸러미를 세탁실 탁자 위로 끌어 올리는 순간, 물이 문턱을 넘어 그녀의 운동화 둘레로 퍼진다. 건조기 아래로 흘러든 물이 바닥의 보풀을 밀어 벽 쪽으로 몰고, 접힌 천 꾸러미 한쪽이 물에 젖어 어두워진다. 박건우가 문을 밀어 열고 계단으로 나서자 정미경은 점검표를 접어 주머니에 넣고 두 사람을 따라간다.

계단 아래 배수로는 붉은 솔잎과 흙으로 막혀, 빗물이 돌계단 첫 칸을 덮고 있다. 정미경이 손바닥을 들어 세 사람을 난간 쪽에 붙여 세우는 동안 건우는 허리의 열쇠를 뽑아 시설 창고로 향한다. 소민은 탁자 위에 남은 의상 꾸러미를 돌아보고, 계단을 내려가 덮개 앞에 쪼그려 앉는다. 건우가 열쇠를 자물쇠에 꽂는 사이, 정미경은 물이 더 차기 전에 긴 손잡이를 가져오라고 말한다.

소민은 배수로 덮개 틈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으려다 정미경의 “맨손 대지 마”라는 말에 손을 멈춘다. 건우가 창고 자물쇠를 돌리지만 열쇠는 안에서 걸린 듯 돌아가지 않는다. 세 사람은 덮개 양쪽에 자리를 잡고, 정미경은 창고 문을 다시 당기며 긴 손잡이를 찾으러 방향을 튼다. 생활관 지하 출입문 앞에는 물이 얇은 막을 이루고, 세탁실 탁자 위의 젖은 의상 꾸러미가 형광등 아래 놓여 있다.

장면 08· 밤새 이어진 폭우가 생활관 지하 출입문까지 밀려든 새벽, 축제 의상 꾸러미가 세탁실 탁자 위에 놓인 직후

돌아가지 않는 열쇠

돌아가지 않는 열쇠
장소솔재학원 본관과 생활관 사이의 좁은 계단 아래 배수로, 시설 창고 앞
시간밤새 이어진 폭우가 생활관 지하 출입문까지 밀려든 새벽, 축제 의상 꾸러미가 세탁실 탁자 위에 놓인 직후
사건박건우는 층장 열쇠를 창고 자물쇠에 꽂아 힘껏 돌리지만, 열쇠는 반 바퀴도 돌지 않고 걸린다. 윤소민은 정미경의 경고를 듣고도 배수로 덮개 틈에 손가락을 넣어 들어 올리려다 손가락을 끼운다. 정미경은 창고 문을 포기하고 긴 손잡이를 가져와 덮개 틈에 끼우고, 셋은 각자 자리를 잡아 함께 힘을 준다. 덮개가 들리며 엉킨 솔잎과 흙이 쓸려 나가고, 막혔던 물이 계단 아래로 빠져나간다.
영향창고는 열리지 않지만, 셋은 창고 도구 없이 배수로를 열어 생활관 지하로 밀려들던 물을 빼낸다. 소민의 손가락은 눌려 붉게 자국이 남고, 건우는 그녀를 물러서게 하려다 손목을 붙잡힌다. 정미경이 덮개를 받치는 동안 소민은 건우를 자기 옆에 세우고, 두 사람은 세탁실의 축제 의상 꾸러미를 옮길 준비를 함께한다.

박건우가 시설 창고 자물쇠에 층장 열쇠를 비틀어 넣자, 젖은 계단 위에서 금속이 짧게 긁히며 열쇠가 멈춘다. 정미경은 창고 문을 당겨 보지만 꿈쩍하지 않고, 윤소민은 배수로 덮개 틈에 맨손을 밀어 넣어 젖은 돌 가장자리를 들어 올린다. 덮개가 손가락을 물듯 끼우자 소민의 팔이 움찔하고, 건우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당긴다.

“손 빼!” 건우가 소민을 뒤로 끌어내려 하지만, 정미경은 긴 손잡이를 가져와 덮개 틈에 밀어 넣고 두 사람에게 양쪽을 잡으라고 한다. 소민은 손을 빼내고도 물러서지 않은 채 손잡이 한쪽을 움켜쥔다. 셋이 함께 누르자 덮개가 돌 틈에서 들리고, 붉은 솔잎과 흙덩이가 빗물에 밀려 배수로 안쪽으로 쏟아진다.

막힌 물이 한꺼번에 빠져나가 계단 첫 칸의 얕은 물막이 갈라진다. 건우가 소민을 다시 뒤로 보내려 손목을 당기자, 소민은 그의 손목을 놓지 않고 자기 옆에 세운다. 세탁실 탁자 위에는 아직 젖은 축제 의상 꾸러미가 남아 있고, 두 사람은 정미경이 덮개를 받치는 동안 꾸러미 양쪽을 잡으러 함께 돌아선다.

장면 09· 밤새 내린 비가 배수로를 막은 아침, 물길이 열린 직후

같은 쪽을 들다

같은 쪽을 들다
장소솔재학원 본관과 생활관 사이의 좁은 계단에서 지하 세탁실로
시간밤새 내린 비가 배수로를 막은 아침, 물길이 열린 직후
사건물이 빠지는 틈에 윤소민은 세탁실로 돌아와 바닥에 놓인 축제 의상 꾸러미를 움켜쥐고 높은 탁자 쪽으로 옮긴다. 젖은 천이 손에서 미끄러지자 박건우가 그녀의 어깨를 잡아 뒤로 물리려 한다. 윤소민은 그의 손목을 붙잡아 자기 옆에 세우고, 꾸러미의 반대쪽 끝을 내민다. 정미경은 배수로 덮개를 긴 손잡이로 받친 채 두 사람에게 서두르라고 재촉한다.
영향박건우는 윤소민을 혼자 물러나게 하는 대신 꾸러미의 반대편을 함께 든다. 셋은 축제 의상을 물이 닿지 않는 탁자 위에 옮겨 놓고, 정미경은 덮개를 놓치지 않은 채 물길이 계속 흐르는지 확인한다. 소민과 건우는 서로의 손을 떼지 않은 채 같은 무게를 나눠 든다.

윤소민이 젖은 축제 의상 꾸러미를 끌어안고 계단을 내려와 세탁실 탁자 쪽으로 옮긴다. 물이 빠진 뒤에도 바닥에는 얕은 물이 남아, 그녀의 운동화가 젖은 천 끝에 미끄러진다. 박건우가 어깨를 잡아 그녀를 뒤로 당기자 꾸러미 한쪽이 탁자 다리에 걸리고, 천 사이로 물이 뚝뚝 떨어진다.

“뒤로 가. 내가 들게.” 박건우가 다시 윤소민을 밀려는 순간, 윤소민은 그의 손목을 붙잡아 자기 옆에 세운다. “같이 들어.” 정미경은 계단 쪽에서 긴 손잡이로 배수로 덮개를 받치며 둘에게 탁자를 비우라고 재촉한다.

박건우는 손목을 빼지 않고 꾸러미 반대쪽을 잡는다. 둘은 젖은 천이 바닥에 끌리지 않도록 동시에 들어 올려 탁자 한가운데 내려놓고, 물방울이 탁자 가장자리에서 바닥으로 떨어진다. 윤소민의 손은 박건우의 손목에서 꾸러미 끝으로 옮겨가고, 두 사람은 나란히 젖은 천을 붙들고 선다.

챕터 04

장면 10· 폭우가 그친 뒤, 축제 준비 당번표를 채우는 저녁

먼저 적힌 이름

먼저 적힌 이름
장소솔재학원 생활관 지하 공동 세탁실
시간폭우가 그친 뒤, 축제 준비 당번표를 채우는 저녁
사건정미경이 축제 준비 당번표를 세탁실 탁자에 펼치고 빈칸을 채우라고 한다. 건우는 소민에게 묻지 않은 채 펜을 들어 자기 이름부터 적는다. 소민은 잉크가 마르기 전에 그의 손에서 펜을 가져가 바로 옆 칸에 자기 이름을 쓴다.
영향건우가 소민의 몫까지 맡으려는 행동이 다시 드러난다. 소민은 그의 이름 뒤에 따라붙는 대신, 자기 이름을 나란히 적어 당번을 함께 맡겠다는 뜻을 보인다. 두 사람의 이름 사이에 남은 가느다란 선은 다음 장면의 말다툼을 앞두고 탁자 위에 그대로 놓인다.

정미경이 접이식 탁자 위로 당번표를 펼치고 빈칸을 펜 끝으로 두드린다. 폭우 뒤 세탁실 바닥에는 아직 물자국이 남아 있고, 건조기 안의 축제 의상이 주황빛으로 돌아간다. “마감 전에 빈칸 채워요.” 정미경이 점검표를 옆에 놓자 건우는 소민을 보지 않고 펜을 집어 자기 이름부터 적는다.

소민은 잉크가 번들거리는 동안 건우의 손목을 붙들지 않고 펜을 낚아챈다. 건우가 “내가 하면 돼”라고 말하지만, 소민은 대답 대신 그의 이름 바로 옆 칸에 자기 이름을 적는다. 정미경은 둘의 손 사이에서 당번표를 빼내지 않고, 모서리를 눌러 종이가 움직이지 않게 한다.

건우의 이름과 소민의 이름 사이에는 얇은 세로선이 남는다. 소민은 펜을 탁자에 내려놓고, 건우는 그 선을 내려다본다. 건조기 종료음이 울릴 때도 젖은 잉크는 아직 마르지 않았다.

장면 11· 폭우가 그친 뒤, 저녁 자율학습이 끝나고 밤 아홉 시 마감이 다가오는 시간

선을 지우는 손

선을 지우는 손
장소솔재학원 생활관 지하 공동 세탁실
시간폭우가 그친 뒤, 저녁 자율학습이 끝나고 밤 아홉 시 마감이 다가오는 시간
사건윤소민은 건우의 이름 옆에 자기 이름을 적은 뒤, 두 이름 사이의 세로선을 손가락으로 짚는다. 늘 건우의 이름 뒤에 따라붙는 기분이었다고 말하지만, 건우는 소민이 자신을 돕느라 당번까지 더 맡으려는 거라고 받아친다. 소민은 그 말에 막혀 펜을 들어 선을 직접 지운다.
영향건우는 소민의 이름을 지우지 않고, 둘 사이의 선만 지운다. 그러나 소민이 먼저 자기 마음을 말하지 않으면 건우가 또 그녀 대신 결정할 수 있다는 문제가 남는다. 다음 날 건우는 축제 접수대에서 다인의 당번 부탁을 거절하고, 다인은 그 거절을 자신을 피하는 뜻으로 오해해 마지막 당번 날 직접 답을 묻기로 한다.

윤소민은 당번표를 탁자 위에 눌러 두고, 건우의 이름 옆에 자기 이름을 또박또박 적는다. 폭우가 그친 뒤에도 바닥 타일 틈에는 물기가 남아 있고, 건조기 둥근 창 안에서 축제 의상이 주황빛으로 돌며 종이 위의 젖은 잉크를 번들거리게 한다. 소민은 두 이름 사이의 가느다란 선을 펜 끝으로 가리킨다. “맨날 네 이름 뒤에 붙는 것 같아.” 건우는 당번표를 자기 쪽으로 당기며 소민이 자기 일을 더 맡으려는 거냐고 묻는다.

“그런 뜻이 아니야.” 소민은 말을 잇지만, 건우가 “그럼 왜 또 네 이름을 적었어?”라고 되묻자 입을 다문다. 정미경은 탁자 모서리를 손바닥으로 눌러 종이가 밀리지 않게 하고, 점검표에 마감 시각을 적는다. 건조기 종료음이 울리자 소민은 펜을 다시 쥐고 이름을 지우지 않은 채 두 이름 사이의 선만 여러 번 문지른다.

잉크가 손가락 옆에 묻고 선은 끊겨 흐려진다. 건우는 소민의 손에서 펜을 빼앗지 않는다. 정미경이 점검표를 접어 가져가는 동안, 당번표에는 두 이름이 나란히 남고 그 사이의 선만 지워져 있다.

장면 12· 다음 날 오후, 축제 준비 당번표를 채우는 시간

접어 둔 초대장

접어 둔 초대장
장소솔재학원 축제 접수대
시간다음 날 오후, 축제 준비 당번표를 채우는 시간
사건최다인이 접수대에 놓인 당번표를 박건우 쪽으로 밀며 빠진 당번을 맡아 달라고 부탁한다. 박건우는 펜을 내려놓고 이번에는 대신 맡을 수 없다고 거절한다. 최다인은 접어 둔 초대장을 손에 꼭 쥐고 그가 자신을 피한다고 여기며, 마지막 세탁실 당번 날 직접 찾아가 대답을 묻기로 한다.
영향최다인은 건우의 거절을 당번을 나누려는 뜻이 아니라 자신을 피하는 태도로 받아들인다. 그녀는 접수대에서 초대장을 꺼내지 않고, 마지막 당번 날 세탁실에서 직접 건우를 초대하기로 결심한다.

다음 날 오후, 최다인은 축제 접수대의 당번표를 박건우 앞으로 밀고 빠진 칸을 손가락으로 짚는다. 초록 리본 아래 신청서가 바스락거리고, 크림색 조명이 접힌 꽃 포장지의 자국을 비춘다. “이번 당번도 부탁해도 될까?” 다인이 묻자 박건우는 펜을 탁자 위에 내려놓는다.

“미안해. 이번엔 못 맡아.” 박건우가 당번표를 다인 쪽으로 돌려준다. 최다인의 손은 종이를 받는 대신 치맛주머니 속 초대장을 움켜쥐고, 접힌 모서리가 손바닥에 눌린다. 건우는 빈 칸을 다른 학생에게 나눠 맡기자고 말하지만, 다인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그가 시선을 피한 걸음에 입을 다문다.

다인은 접수대 아래에서 초대장을 꺼내지 않는다. 대신 종이를 손에 쥔 채 접수대 뒤편을 돌아 나와, 마지막 세탁실 당번 날 직접 건우를 찾아가기로 한다. 접힌 초대장의 모서리가 그녀의 주먹 밖으로 하얗게 삐져나온다.

챕터 05

장면 13· 가을 축제 무도회 날, 밤 아홉 시 마감 직전

번지는 글씨

번지는 글씨
장소솔재학원 생활관 지하 공동 세탁실
시간가을 축제 무도회 날, 밤 아홉 시 마감 직전
사건윤소민은 마지막 세탁실 당번 중 책 사이에서 초대장을 꺼내 탁자 위에 펼친다. 물을 먹은 종이가 손끝에서 더 찢어지고, 번진 글씨 위로 그녀의 젖은 엄지가 눌린다. 건조기 종료음이 울리자 정미경이 점검표를 집어 들고 마감을 재촉하는 순간, 최다인이 꽃다발을 든 채 문 앞에 나타난다.
영향소민은 초대장을 감추지 못한 채 건우와 다인이 마주 선 자리에 자기 마음을 드러내야 한다. 건우의 대답을 듣기 전까지 세탁실의 마감도, 다인이 내민 꽃도 그대로 멈춰 선다.

윤소민이 책 사이에서 초대장을 빼내 탁자 위에 펼치자, 젖은 종이 모서리가 손끝에서 길게 찢어진다. 평평한 형광등 아래 번진 글씨가 건조기 둥근 창의 주황빛에 비치고, 박건우는 접이식 탁자 건너편에서 소민의 손을 바라본다. 소민은 찢어진 자리를 손바닥으로 누르지만 종이는 더 갈라진다.

아홉 시를 알리는 건조기 종료음이 세탁실을 가르자 정미경이 점검표를 들고 다가와 마감 항목을 짚는다. 그때 최다인이 꽃다발을 안은 채 문턱에 선다. 포장지가 문틀에 스치며 구겨지고, 다인의 시선이 탁자 위 초대장에 닿는다.

소민은 종이를 접어 숨기지 않는다. 건우는 다인과 소민 사이에 놓인 꽃과 찢어진 초대장을 번갈아 바라보고, 정미경은 열쇠를 손에 쥔 채 대답을 기다린다. 건조기 안에서 마지막 옷감이 둥근 창을 한 바퀴 돌고, 초대장의 글씨 위로 소민의 손가락이 단단히 눌려 있다.

장면 14· 가을 축제 날, 밤 아홉 시 직후

누구의 대답인가

누구의 대답인가
장소솔재학원 생활관 지하 공동 세탁실
시간가을 축제 날, 밤 아홉 시 직후
사건최다인이 꽃을 박건우에게 내민다. 윤소민은 젖어 찢어지는 초대장을 탁자 위에 펼쳐 놓고 박건우에게 무도회에 함께 갈지 묻는다. 박건우는 먼저 윤소민에게 답하지 않고, 축제 일을 도운 것이 최다인과 무도회에 가고 싶다는 뜻은 아니었다고 분명히 말한다. 최다인은 꽃을 거두어 접수대 장식 바구니에 놓고, 박건우는 윤소민의 초대를 받아들인다.
영향최다인은 박건우의 뜻을 직접 듣고 자신의 기대를 접는다. 윤소민은 숨기려던 마음을 두 사람 앞에 내놓고, 박건우의 대답을 기다리는 자리에 선다. 두 사람의 무도회 동행이 정해지지만, 마지막 마감과 다음 날의 문턱은 아직 남아 있다.

최다인이 꽃다발을 박건우 쪽으로 내밀자, 윤소민은 젖은 초대장을 탁자 위에 더 넓게 펼친다. 세탁실의 평평한 형광등 아래 종이 가장자리가 다시 갈라지고, 건조기 둥근 창에는 마지막 옷감이 주황빛으로 돈다. 최다인의 꽃 포장지가 탁자 모서리에 닿아 구겨진다. 윤소민은 찢어진 초대장을 손바닥으로 누른 채 박건우를 바라본다. “건우야, 나랑 무도회 갈래?”

박건우는 초대장에 손을 뻗지 않고 최다인을 향해 몸을 돌린다. “축제 일을 도운 건 고마워서였어. 너랑 무도회에 가고 싶다는 뜻은 아니었어.” 최다인의 손가락이 꽃 포장지를 한 번 더 구긴 뒤 풀리고, 그녀는 꽃을 받아 접수대 장식 바구니에 내려놓는다. 정미경은 점검표를 탁자 끝에 놓고도 열쇠를 돌리지 않은 채 그들의 자리를 비켜 선다.

박건우는 그제야 윤소민 쪽으로 돌아서서 “가자”라고 답한다. 윤소민의 손바닥 아래 찢어진 초대장은 벌어진 틈을 그대로 드러낸다. 박건우는 종이를 집어 들지 않고, 윤소민은 손을 떼어 그의 대답이 놓인 자리에 종이를 남긴다.

장면 15· 마지막 세탁실 당번을 마친 다음 날 저녁

문턱을 넘는 손

문턱을 넘는 손
장소솔재학원 무도회장 입구
시간마지막 세탁실 당번을 마친 다음 날 저녁
사건무도회장 입구에서 윤소민은 신발 끈을 스스로 고쳐 묶고, 기다리는 박건우의 소매를 먼저 잡아당긴다. 건우는 손을 내밀지 않은 채 그녀의 걸음에 맞춰 문턱을 넘는다.
영향소민은 건우가 이끌어 주기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그를 무도회장 안으로 데려간다. 두 사람의 뒤로 문이 닫히고, 한 달간 둘을 이어 주던 세탁실 당번표와 밤 아홉 시의 마감은 더는 만남의 이유가 되지 않는다.

윤소민이 금빛 조명이 번지는 무도회장 입구에서 한쪽 무릎을 굽혀 풀린 신발 끈을 묶는다. 밝은 천 장식 아래 박건우는 손을 내밀지 않고 기다리고, 열린 문 너머로 피아노 선율과 웃음소리가 흘러나온다. 소민은 매듭을 한 번 당겨 단단히 조인 뒤 일어선다.

건우가 그녀의 속도를 재촉하지 않자 소민은 그의 소매를 움켜잡아 안쪽으로 끌어당긴다. 건우의 팔이 잠깐 따라오고, 두 사람의 신발이 나란히 문턱을 넘는다. 소민이 놓지 않은 손 아래에서 건우의 소매가 구겨지고, 피아노 선율이 복도까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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