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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ytalk 오리지널 · 장면 17 · 챕터 5

죽은 사람 목소리로 먹고삶

cute Komon Snake 48premium크리에이터 페이지 →

1927년 경성, 장례식장에서 죽은 이들의 마지막 말투를 흉내 내는 열두 살 소년은 빚쟁이들에게 쫓기는 어머니 대신 부유한 상인의 관 앞에 선다. 관뚜껑을 두드린 그의 목소리가 상인의 억양으로 “내 오른손을 묻지 마라”라고 말하자, 상인의 딸은 피 묻은 은수저를 꺼내 들고 무덤을 파헤친다. 관 속에는 잘린 손 대신 갓 태어난 아기가 누워 있고, 장례 행렬에 섞여 있던 일본인 형사들이 삽을 든 채 묘지 문을 잠근다. 소년은 아기를 안고 달아날지, 어머니의 빚문서를 태우는 대가로 형사들에게 아이를 넘길지 지금 골라야 한다.

  • 등장인물 5
  • 장소 5
  • 장면 17
  • 줄거리 2,844자
죽은 사람 목소리로 먹고삶 cover image

인물 · Characters

등장인물들

복만수

남성

상여꾼들 틈에서 망자의 말투를 팔아 어머니의 외상값을 메우는 소년

프로필

복만수는 갓난아기를 품에 숨긴 채 묘지 문을 넘어 복순덕에게 돌아가려 한다. 가와무라 도시오가 내민 빚문서를 태울 기회는 아이를 넘기는 대가라서, 복만수는 어머니의 손도장보다 아기의 숨소리를 먼저 고르는 길을 찾는다. 윤설란은 윤태욱의 목소리를 낸 복만수를 아기의 유일한 증인으로 붙들지만, 복만수는 자신이 들은 “오른손”의 말이 죽은 이의 경고가 아니라 제 입이 지어낸 거짓일 수 있음을 감춘다.

복만수는 어른이 우는 자리에서 먼저 그 사람의 구두 끝을 보고, 울음이 멎으면 그 구두 주인의 말끝을 낮게 따라 한다. 겁이 나면 아기 포대의 매듭을 세 번 만지는데, 누가 거짓말을 한다고 느끼면 그 손을 멈추고 상대의 입술만 오래 본다. 윤설란이 은수저를 내밀어도 받지 않다가, 아기가 칭얼대면 제 젖은 소매를 물려 조용하게 만든다.

배경

복만수는 복순덕이 빨래를 삶으러 간 집의 상갓집마다 따라다니며, 곡소리 사이로 들은 마지막 부탁을 흉내 내 돈 몇 푼을 벌었다. 처음 윤태욱의 장례에 선 것은 어머니의 장례 대금 외상을 하루만 미뤄 달라는 부탁 때문이었고, 관뚜껑 너머에서 들린 듯한 낮은 기침이 그의 목소리를 먼저 바꾸었다. 이제 윤설란이 그 기침을 증언으로 삼으려 하면서, 복만수는 도망칠 아이가 아니라 죽은 상인의 비밀을 움직이는 입이 된다.

묘사

복만수는 비에 젖어 짙어진 헐렁한 무명 저고리와 짧은 바지를 입고, 제 몸보다 큰 갓난아기 포대를 왼팔 안쪽에 깊이 감춘 열두 살 소년이다. 묘지 철문 쪽으로 반쯤 몸을 틀면서도 검은 눈은 맞은편 어른의 입술에서 떨어지지 않으며, 겁이 날 때마다 오른손 엄지로 포대 매듭을 정확히 세 번 더듬는다. 젖은 소매 끝을 아기 입가에 물린 채 다문 입술은 울음을 참는 아이의 것이지만, 턱을 조금 내린 자세에는 죽은 이의 낮은 말끝을 빌릴 준비가 서려 있다.

윤설란

여성

죽은 아버지의 포목상 장부와 장례 비용을 혼자 정리하는 상인의 딸

프로필

윤설란은 피 묻은 은수저와 아버지의 장갑 속 인장으로 관 속 아기의 출생을 밝혀, 윤태욱의 재산이 가와무라 도시오의 손을 거쳐 일본 경찰에 넘어가는 것을 막으려 한다. 복만수가 들려준 아버지의 목소리를 믿고 무덤을 열어 시신을 훼손한 딸이 된 대가로, 그녀는 도망칠 돈 대신 은수저를 만수에게 쥐여 주고 아기와 함께 묘지 문을 넘으라고 밀어낸다. 만수가 아기를 살려 내보내면 설란은 유산과 자신의 결백을 잃을 수 있다.

윤설란은 사람들 앞에서는 은수저의 핏자국을 손수건으로 문지르다, 누가 다가오면 그것을 치맛자락 안쪽에 감춘다. 삽날이 관뚜껑에 닿을 때마다 눈을 감지만, “그만두라”는 가와무라 도시오의 말에는 손을 더 깊이 뻗어 흙을 퍼낸다. 만수가 아기를 품은 팔을 바꾸어 안으면 설란은 말없이 그의 신발끈을 묶어 주고, 은수저를 그의 주머니에 넣는다.

배경

윤설란은 열여섯 살부터 아버지 윤태욱의 포목상 뒤방에서 항구 운송표와 외상 장부를 베껴 썼고, 장부 끝마다 찍히는 오른손 인장을 누구보다 먼저 익혔다. 태욱은 딸에게 창고 열쇠만 맡기고 거래의 속내는 감췄으며, 죽기 전날에는 피가 밴 은수저를 식탁 서랍에 넣어 두었다. 장례날 관에서 아기가 나오자, 설란은 아버지가 남긴 재산보다 먼저 그 아이의 이름을 장부에 올리려 한다.

묘사

윤설란은 검은 무명 치마저고리 위에 장례를 치르느라 구겨진 짙은 남색 두루마기를 걸쳤고, 소매 끝에는 포목상 장부를 넘기던 먹물 자국이 남아 있다. 그녀는 한 손으로 피 묻은 은수저를 치맛자락 안쪽에 감춘 채, 다른 손으로 삽자루를 움켜쥐고 관을 내려다본다. 왼쪽 엄지손톱 밑에 굳은 붉은 얼룩이 남아 있어, 아무리 손수건으로 문질러도 지워지지 않는 결심처럼 보인다.

복순덕

여성

남의 집 빨래를 받아 밤새 삶아도 장례 대금 외상을 갚지 못한 만수의 어머니

프로필

복순덕은 묘지 담장 밖 수레바퀴 소리가 멎을 때까지 포목 꾸러미를 품고 숨어, 복만수가 갓난아기와 함께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가와무라 도시오가 빚문서에 손도장만 찍으면 아들의 목숨은 건지게 해 주겠다고 내밀자, 복순덕은 윤설란이 맡긴 꾸러미에서 나온 윤태욱의 오른손 장갑과 인장을 화로에 넣으려 한다. 장갑을 태우면 복만수에게 돌아갈 길을 만들 수 있지만, 윤설란이 아기를 지킬 마지막 증거도 함께 사라진다.

복순덕은 남의 옷단을 꿰맬 때는 바늘땀을 한 치도 어기지 않지만, 빚쟁이가 가까워지면 손가락 끝의 피를 치마폭에 문질러 지문부터 지운다. 복만수가 장례식장에 나갈 때마다 그녀는 아이의 목소리를 흉내 내며 빈 방에서 대답을 연습했고, 그 버릇은 아들이 없는 밤이면 더 또렷해진다. 장갑을 화로 위에 올려둔 채에도 불씨를 붙이지 못하고, 담장 너머에서 들리는 아이 울음마다 몸을 일으킨다.

배경

복순덕은 남편이 항구 짐꾼 일터에서 돌아오지 않은 뒤, 상복감 외상을 받아 재봉으로 갚겠다는 약조에 손도장을 찍었다. 윤태욱의 포목상에서 흰 무명을 받아 장례집들을 돌던 중, 윤설란이 아무 말 없이 건넨 꾸러미를 맡아 두었다. 그날 밤 꾸러미 속 장갑 안감에서 단단한 인장을 만진 뒤부터, 복순덕은 빚문서보다 먼저 그 물건을 숨길 곳을 찾았다.

묘사

복순덕은 묘지 담장 밑 젖은 흙에 등을 붙인 채, 해진 회색 저고리 위로 흰 무명 포목 꾸러미를 아이처럼 끌어안고 있다. 밤새 빨래를 삶은 손등은 붉게 터져 있고, 오른손 엄지 끝의 피를 검은 치마폭에 문질러 지우는 버릇 때문에 그 자리에만 짙은 얼룩이 겹겹이 남았다. 화로 위에 올린 검은 가죽 장갑을 바라보는 얼굴은 울음을 참는 대신 이를 악문 표정이며, 담장 너머의 작은 울음소리마다 한쪽 무릎을 먼저 세우고 일어날 준비를 한다.

가와무라 도시오

남성

장례 행렬에 조문객으로 섞여 윤태욱의 밀수 장부를 찾으러 온 경성부 경찰서 형사

프로필

가와무라 도시오는 관에서 나온 아기를 일본 영사관으로 데려가 윤태욱의 항구 거래를 비밀리에 덮고 경부 승진장을 받으려 한다. 복만수에게는 복순덕의 빚문서를 화로에 넣어 주겠다고 제안하지만, 아이를 넘겨받는 순간 만수가 어머니에게 돌아갈 길도 윤설란이 아버지의 장부를 지킬 길도 막힌다. 피 묻은 은수저가 죽은 아내의 찬장에서 사라진 물건임을 알아본 그는, 그 기억을 미끼 삼아 윤설란에게 삽을 내려놓으라고 명령한다.

가와무라 도시오는 묘지 철문 자물쇠를 잠글 때마다 열쇠를 세 번 돌린 뒤, 장갑 낀 엄지로 녹슨 고리를 문질러 소리를 확인한다. 아기가 울면 먼저 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울음의 간격을 재다가도, 은수저의 흠집을 발견하면 손등으로 눈가를 훔치고 곧바로 목소리를 낮춘다. 복만수가 윤태욱의 말투를 흉내 낼 때에는 소년의 입보다 관 뚜껑을 오래 바라보며, 빚문서를 접어 순덕의 손 닿는 곳에 일부러 내려놓는다.

배경

가와무라 도시오는 아내가 병으로 누워 있던 겨울, 약값을 마련하려고 압수품 목록에서 은수저 하나를 빼돌렸고, 아내는 그 수저를 잃어버린 채 세상을 떠났다. 그 뒤 윤태욱이 항구에서 사람과 물건을 바꾼다는 소문을 쫓아 경성으로 왔으나, 상인의 장부보다 먼저 아내의 수저가 윤설란의 손에서 피에 젖어 있는 것을 보았다. 영사관은 그에게 문을 잠그고 아기만 넘기면 과거의 장부를 묻어 주겠다고 약속했다.

묘사

가와무라 도시오는 비에 젖은 검은 울 코트 위로 경부의 낡은 가죽 권총집을 단정히 여민 마흔한 살 일본인 형사다. 그는 철문 앞에서 한쪽 장갑 낀 엄지로 녹슨 자물쇠 고리를 문지른 채, 피 묻은 은수저를 든 손을 보자마자 눈가의 습기를 손등으로 지우고 낮고 마른 목소리로 삽을 내려놓으라 명령한다. 왼손에는 빚문서를 접어 쥐고, 오른손에는 열쇠 꾸러미를 늘어뜨린 자세가 마치 묘지 전체를 잠글 권리가 자신에게 있다는 듯 굳어 있다.

윤태욱

남성

포목상 간판 뒤에서 항구의 사람과 물건을 바꾸며 재산을 불린 죽은 상인

프로필

윤태욱은 복만수의 목소리를 빌려 “오른손을 묻지 마라”는 말을 되풀이하며, 장갑 속 인장을 찾아 갓난아기의 신분을 지우려 한다. 그 인장을 꺼내는 순간 윤설란은 아버지가 아기를 숨긴 공범으로 드러나 살인 혐의와 가산 압류를 함께 떠안는다. 윤태욱이 남긴 말의 방향을 믿을수록 복만수는 아기를 넘기는 대신 빚문서를 태울 수 있는 길에서 멀어진다.

생전의 윤태욱은 손님 앞에서 비단 끝을 손톱으로 세 번 문지른 뒤에야 값을 불렀고, 장부를 덮을 때마다 오른손 장갑의 단추를 꼭 채웠다. 누군가 곤란한 부탁을 하면 찻잔을 먼저 채워 주고는, 상대가 빈 잔을 비우기 전에 이미 빠져나갈 길을 마련해 두었다. 이제 그는 복만수의 입에서만 살아나며, 아기를 살리려 남긴 경고가 딸의 목을 조이는 소리가 될 때마다 같은 말끝을 더 낮게 끌어내린다.

배경

윤태욱은 도시오가 찾던 밀수 장부의 빈 칸마다 포목 꾸러미의 행선지와 사람 이름을 암호처럼 적어 두었다. 갓난아기를 도시오의 손에서 빼내기 위해 자기 장례 관을 운반 수레로 삼았고, 인장만 장갑 속에 숨긴 채 죽음을 맞았다. 장례 전날 윤설란에게 장갑을 태우라고 시켰으나, 순덕의 포목 꾸러미로 장갑이 넘어가면서 그의 마지막 계획은 복만수의 목소리와 선택에 매달리게 되었다.

묘사

윤태욱은 관 속에 누웠어도 항구의 거래를 쥐고 있는 듯한, 마른 어깨가 반듯한 쉰넷의 상인이다. 검은 비단 두루마기 안에는 값비싼 회색 조끼와 은빛 시계줄이 보이고, 창백한 오른손에는 단추를 끝까지 잠근 검은 가죽장갑이 끼워져 있다. 움푹 꺼진 눈가와 다문 입술은 마지막까지 값을 흥정하던 표정이며, 장갑 손등에 남은 희미한 붉은 인장 자국이 그를 잊지 못하게 한다.


줄거리 · Synopsis

줄거리

윤태욱의 관이 비에 젖은 무덤 가장자리로 내려갈 때, 복만수는 상여꾼들 틈에서 죽은 상인의 낮고 마른 말끝을 흉내 낸다. “내 오른손을 묻지 마라.” 조문객들이 숨을 삼키는 사이, 윤설란은 피 묻은 은수저를 꺼내 관뚜껑의 못을 긁고 삽으로 흙을 걷어 낸다. 가와무라 도시오는 철문을 잠근 뒤 열쇠를 세 번 돌려 확인하고, 관을 여는 자는 모두 시신 훼손죄로 묶겠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관 속에는 윤태욱의 시신도, 잘린 손도 없다. 검은 비단 속에서 갓난아기가 울고, 만수는 반사적으로 아이를 포대째 끌어안는다.

가와무라는 아이의 울음 간격을 회중시계로 재며, 아이를 영사관에 넘기면 복순덕의 빚문서를 화로에 태워 주겠다고 말한다. 그는 만수의 젖은 소매를 문 아이에게 손을 뻗고, 만수는 그 손을 피해 관 아래로 기어든다. 설란은 삽자루로 가와무라의 팔을 막고 만수에게 은수저를 쥐여 준다. 수저 손잡이의 움푹 팬 흠집은 가와무라가 죽은 아내의 찬장에서 보았던 것과 같다. 가와무라는 잠시 손등으로 눈가를 닦지만, 곧 설란의 목덜미를 붙들어 관 쪽으로 밀친다. 그는 윤태욱이 항구 거래 장부와 아이의 출생을 한데 묶어 숨겼으며, 그 흔적을 가진 사람은 모두 사라져야 한다고 낮게 말한다.

만수는 묘지의 비탈을 달아나려다 철문 앞에서 막힌다. 담장을 넘으면 도망자로 기록되고, 아기를 안은 채 넘다가 떨어지면 아이도 다친다. 그는 포대 매듭을 세 번 만지다가, 관 앞에서 자신이 한 말을 떠올린다. “오른손을 묻지 마라”는 윤태욱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만수가 장례 전 창고에서 본 윤태욱의 장갑과, 설란이 관을 열도록 만들고 싶었던 자기 공포가 섞여 나온 말이었다. 그는 그 거짓을 설란에게 말하지 못한 채, 아기를 품고 장례식장 창고 쪽으로 달린다. 가와무라는 형사 둘에게 설란을 붙잡게 하고 만수를 뒤쫓는다.

장례식장 뒤편의 젖은 한지창 아래에서 복순덕은 화로 앞에 웅크려 있다. 그녀의 무릎 위에는 윤태욱의 오른손 장갑과 빚문서가 놓여 있다. 가와무라가 미리 던져 둔 문서는 비에 젖어도 붉은 손도장 자리는 선명하다. 순덕은 장갑 안쪽에서 딱딱한 인장을 찾아내고도 불 속에 넣지 못한다. 만수가 아기를 안고 창고로 뛰어들자, 순덕은 아이의 얼굴보다 아들 팔에 난 긁힌 상처를 먼저 본다. 뒤이어 들어온 설란은 장갑을 빼앗으려 하고, 가와무라는 순덕의 손목을 붙들어 화로 위로 끌고 간다. 손도장을 찍든지, 아이와 인장을 내놓든지 하라는 것이다.

그때 만수는 관 앞에서 뱉은 거짓을 모두 말한다. 윤태욱이 말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지어낸 말이었다고, 설란이 그 말 때문에 아버지의 관을 팠다고 말한다. 설란은 잠시 만수의 뺨을 때리려다 손을 내린다. 대신 은수저의 핏자국을 화로 불빛에 비춘다. 피는 윤태욱의 것이 아니라, 출산 뒤 피를 흘리던 복순덕이 창고 바닥에서 아이를 받아 낼 때 묻은 것이다. 윤태욱은 순덕에게 아이를 낳게 한 뒤, 항구 거래의 약점이 될 사생아를 관에 숨겼다. 그리고 자신의 오른손 장갑 속 인장으로 아이의 출생을 지워 줄 거래를 준비했다. 순덕은 윤태욱이 아이를 살려 준 것이 아니라, 필요할 때 꺼내 쓸 물건처럼 숨겼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가와무라는 인장을 낚아채려 들고, 순덕은 그의 장갑 낀 손등을 화로 가장자리에 눌러 버틴다. 만수는 아이를 설란에게 넘긴 뒤 가와무라의 외투 안쪽에서 빚문서를 잡아당긴다. 가와무라는 만수의 멱살을 쥐고 종이를 되찾으려 하지만, 설란이 삽자루로 그의 무릎 뒤를 쳐 넘어뜨린다. 넘어지는 순간 가와무라의 열쇠 꾸러미가 젖은 마룻바닥으로 굴러간다. 만수는 빚문서만 화로에 던지지 않는다. 문서를 쥔 가와무라의 손을 붙잡아 불 가까이 끌고 가고, 순덕은 자기 손도장을 찍을 손가락을 칼날 같은 은수저 끝으로 찢는다. 피가 묻은 손가락으로 그녀는 빚문서 위에 자기 이름 대신 윤태욱의 장갑 속 인장을 힘껏 찍는다. 종이는 불길에 말려 올라가고, 가와무라는 그것을 빼내려다 손바닥을 데인다.

설란은 인장을 들고 묘지 쪽으로 되돌아간다. 만수와 순덕도 아기를 안고 뒤따른다. 철문 앞에서 가와무라는 데인 손을 감싼 채 그들을 막아서지만, 설란은 열린 관 앞에 서서 조문객과 형사들 앞에 인장을 관뚜껑에 찍는다. 윤태욱의 밀수 장부가 숨겨진 비단 꾸러미와 같은 문양이 검은 옻칠 위에 번진다. 그녀는 아버지가 아이를 숨기고, 자신에게도 장부를 맡겼다고 말한다. 자기 역시 아버지의 일을 알고 침묵했으니 연행되겠다고 먼저 손목을 내민다. 가와무라는 설란을 끌고 갈 수는 있지만, 관을 비우고 아이를 빼돌리려 한 자신의 손도 함께 드러난다는 것을 안다. 그는 철문 열쇠를 쥔 손을 떨며 뒤로 물러난다.

만수는 가와무라가 물러난 틈에 열쇠 꾸러미를 집어 든다. 세 번 돌려야 열리는 자물쇠 앞에서 그는 아기 포대의 매듭을 한 번만 만진다. 순덕은 아들의 곁에 서서 손을 내밀지만, 만수는 열쇠를 그녀에게 주지 않는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열쇠가 헛돌고, 세 번째에야 철문이 비명을 내며 열린다. 설란은 문 안쪽에 남아 형사들에게 두 손을 내준다. 그녀는 은수저를 만수의 주머니에 다시 넣고, 아이에게는 이름을 붙이지 말라고 말한다. 이름이 장부에 오르는 순간 또 누군가의 소유가 될 테니, 먼저 살아서 자기 목소리를 내게 하라는 뜻이다.

새벽 전 골목으로 나온 만수는 아기를 순덕의 품에 잠깐 올려 둔다. 순덕은 아이를 내려놓지 않고, 만수는 처음으로 어머니의 젖은 손을 잡는다. 뒤에서 묘지 철문이 다시 잠기는 소리가 세 번 울린다. 만수는 더 이상 죽은 사람의 말투를 팔지 않겠다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아기가 울자 자기 소매를 내밀지 않고, 비에 젖은 골목 끝을 향해 어머니와 함께 걷는다. 주머니 속 은수저는 차갑고, 그들의 뒤에서는 설란이 남긴 관 하나와 태우지 못한 죄들이 날이 밝을 때까지 젖어 간다.


세계관 · World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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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정

1927년 늦가을의 경성 북쪽 공동묘지와 그 아래 장례식장, 담장 밖의 빨래터 골목이 하나의 좁은 압력권을 이룬다. 공동묘지는 비탈진 소나무 숲 사이에 검은 비석들이 빽빽하고, 빗물이 판 무덤 가장자리에는 황토가 죽처럼 고여 있다. 녹슨 철문 하나가 안과 밖을 가르며, 문 밖에는 인력거 바퀴 자국과 빨랫물 냄새가 남은 골목이 이어진다.

장례식장은 포목상 윤태욱의 창고를 급히 비워 차린 곳이다. 젖은 삼베 상복, 향 연기, 비단 꾸러미, 관을 닦은 기름 냄새가 섞여 있다. 조문객은 상인의 거래처 사람, 빚을 받으러 온 이들, 구경꾼, 그리고 검은 외투 속 권총을 감춘 일본인 형사들이다. 누구도 묘지에 갇힌 사실을 큰소리로 말하지 못한다. 철문이 잠기는 소리 하나면 장례는 수사가 되고, 애도는 증거 인멸의 시간이 된다.

시대

1927년 조선총독부 치하의 경성, 첫서리가 내리기 직전의 비 내리는 밤이다. 전차와 전등, 경찰 제도가 도시의 표면을 바꾸었지만, 골목의 사람들은 여전히 쌀값과 외상 장부, 지주의 도장에 목이 매여 산다. 항구를 오가는 밀수품과 포목상 장부가 식민 권력의 손으로 흘러들어 가는 시기이며, 한 집안의 장례가 행정 기록과 재산 압류로 곧바로 이어질 수 있다.

이 밤은 윤태욱의 매장 전에 끝나야 한다. 날이 밝으면 묘지 관리인이 오고, 관을 다시 열었다는 흔적은 시신 훼손죄와 불법 출생 은폐 사건으로 바뀐다. 빗물은 발자국을 지우지만, 핏자국과 장부의 먹물은 더 깊이 번진다.

규칙

- 망자의 말투를 흉내 내는 일은 장례판에서 돈이 되는 재주로 묵인되지만, 죽은 이의 유언으로 법적 효력을 얻지는 못한다. 복만수는 사람들의 공포를 움직일 수 있어도 윤태욱의 말 한마디로 아기를 지키거나 재산을 물려줄 수 없다.

- 공동묘지 철문은 경찰이 봉쇄하면 열쇠 세 번 없이는 열 수 없고, 담장을 넘는 사람은 도망자로 기록된다. 만수와 아기는 출구를 찾는 순간부터 증인이 아니라 추적 대상이 된다.

- 식민지 경찰의 빚문서는 법보다 빨리 사람을 묶는다. 복순덕이 손도장을 찍거나 문서가 남아 있으면 만수는 언제든 강제 노역과 연행의 협박을 받을 수 있으며, 가와무라는 그 종이 한 장으로 아이의 인도를 거래한다.

- 윤태욱의 오른손 장갑 안 인장은 거래 장부와 출생을 이어 주는 물증이지만, 그것을 드러내면 윤설란 역시 아버지의 범죄를 숨긴 공범으로 의심받는다. 증거를 살리는 선택은 아기를 살릴 가능성과 설란의 파멸을 함께 키운다.

기술과 철학

경성에는 전차, 전신, 회중시계, 경찰 신분증, 인쇄된 채무 문서가 들어와 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에게 기술은 편의보다 기록의 형태로 닿는다. 전신은 경찰의 지원 요청을 빠르게 하고, 인쇄 문서는 빚을 오래 남기며, 회중시계는 형사가 아기의 울음 간격까지 통제하려 드는 도구가 된다. 반대로 사람들은 장부의 빈 칸, 젖은 종이, 화로의 불씨 같은 허술한 틈에서만 살아남을 길을 찾는다.

장례는 죽은 이를 보내는 의식이면서 살아 있는 이들의 신분을 가르는 자리다. 부유한 집의 상복과 가난한 집의 상복은 같은 흰 천이어도 다르게 취급된다. 윤태욱 같은 상인은 포목과 항구 거래를 통해 조선인과 일본 권력 사이를 오가며 돈을 만들었고, 그가 남긴 재산은 가족의 안전망이 아니라 경찰과 채권자가 노리는 문이 된다. 이 세계에서 혈연은 보호가 아니라 소유권의 주장으로 쓰이며, 아기의 출생을 증명하는 일은 곧 누가 그 아이의 미래를 빼앗을 수 있는지 정하는 일이 된다.

시각적 묘사

비에 젖은 먹빛, 삼베의 탁한 흰색, 무덤 흙의 누런 갈색이 화면을 지배한다. 장례 lantern의 주황빛은 젖은 관 표면에서만 잠깐 따뜻하고, 나머지 공간은 새벽 전의 푸른 회색으로 가라앉는다. 검은 기와지붕 아래에는 한지 창문이 숨처럼 떨리고, 비탈의 소나무들은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삽날 같은 그림자를 땅에 찍는다.

철문에는 붉은 녹물이 빗물과 함께 흘러내리고, 자물쇠의 금속성 울림은 멀리 전차 종소리와 섞인다. 윤태욱의 검은 옻칠 관, 설란의 검은 상복, 가와무라의 각진 외투 사이에서 피 묻은 은수저만 차갑게 빛난다. 아기의 포대는 이 세계에서 가장 작은 물건이지만, 누구의 팔에 있느냐에 따라 화면의 중심이 바뀐다.


장소 · Locations

장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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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 공동묘지 열린 무덤

비탈진 묘지의 열린 무덤은 누런 황토 진흙이 가장자리마다 죽처럼 고여, 검은 옻칠 관의 옆면을 반쯤 삼키고 있다. 비에 번진 등불빛이 관뚜껑의 긁힌 못자국과 흙 위의 삽날 자국을 푸른 회색으로 훑고, 소나무 그림자는 젖은 비석 사이에 길게 떨어진다. 삽날이 진흙을 밀 때마다 낮고 질척한 마찰음이 나며, 관 아래로 흘러든 빗물은 검은 비단 조각을 조금씩 밖으로 밀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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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슨 철문 앞

붉은 녹물이 빗줄기를 따라 철창의 세로살을 타고 내려와, 문턱의 하얀 자갈 위에 가느다란 얼룩을 만든다. 손바닥만 한 자물쇠는 차가운 빛을 머금고 매달려 있으며, 열쇠가 돌아갈 때마다 속 빈 철문 전체가 세 번 낮고 길게 울린다. 빗물에 미끄러운 좁은 출구 양쪽에는 철창 끝이 안쪽으로 휘어 있어, 사람 하나가 몸을 비틀어도 옷자락과 피부를 긁고 지나가게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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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태욱의 포목 창고 장례식장

낮은 서까래 아래 비단 꾸러미가 벽을 따라 천장 가까이 쌓여 있고, 그 사이에 검은 옻칠 관이 기름 먹인 널빤지 위에 놓여 있다. 주황 등불은 마른 비단의 결만 번들거리게 비추며, 향이 타들어 가는 가는 소리와 조문객들이 삼키는 숨이 삼베 상복 사이에 눌려 맴돈다. 관 옆 계산대에는 포목 값을 적던 먹물 장부가 펼쳐져 있고, 그 위로 관을 닦은 기름 자국이 손바닥 모양으로 번져 있어 누가 무엇을 감추려 했는지 오래 붙들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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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로 곁 한지창 뒤편

한지창 뒤편의 낮은 구석에는 화로가 붉은 금빛을 흔들며 타고, 재 위에 올린 젖은 빚문서 가장자리가 검게 말려 올라간다. 창호지에는 빗물이 스민 얼룩 대신 불빛이 얇게 번져, 바깥의 그림자를 흐린 사람 얼굴처럼 눌러 붙인다. 화로 둘레의 따뜻한 재와 축축한 종이 사이에는 손바닥만 한 나무판이 놓여 있고, 그 위에서는 장갑 속 인장과 은수저가 불씨가 꺼질 때마다 잠깐씩 번뜩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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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래터 골목 끝

골목 끝의 낮은 돌바닥에는 밤새 헹군 빨랫감이 처마 밑 줄에 길게 늘어져, 옅은 남색 새벽빛 속에서 비누 거품처럼 희게 흔들린다. 물통에서 넘친 물이 돌 틈을 따라 가늘게 흘러가고, 면직물 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일정하지 않은 박자로 고인 물을 두드린다. 멀어지는 전차 종소리 뒤로 젖은 이불보와 속옷 사이의 좁은 길이 열려 있어, 품에 든 작은 것을 가리기에는 좋지만 발자국을 숨기기에는 너무 밝다.


장면 · Scenes

장면별 이야기

챕터 01

씬 01· 1927년 늦가을, 비 내리는 밤

젖은 관 앞의 낮은 목소리

젖은 관 앞의 낮은 목소리
장소경성 북쪽 공동묘지의 열린 무덤
시간1927년 늦가을, 비 내리는 밤
사건복만수는 무덤으로 내려가는 검은 옻칠 관의 옆면을 붙잡고, 윤태욱의 낮고 마른 말끝을 흉내 내어 “내 오른손을 묻지 마라”라고 말한다. 윤설란은 그 말을 듣자 삽을 진흙에 박아 관이 더 내려가지 못하게 막고, 피 묻은 은수저를 꺼낸다. 가와무라 도시오는 설란의 팔을 붙들어 관을 건드리면 시신 훼손죄로 묶겠다고 경고한다.
영향만수가 뱉은 말은 장례를 멈추게 하고, 설란에게 관을 열 명분을 준다. 그러나 만수는 자신이 정말 윤태욱의 말을 들은 것인지, 장갑과 관을 보고 제 입으로 지어낸 것인지 감추게 된다. 가와무라는 관보다 만수의 입을 오래 바라보며, 이 일이 단순한 장례가 아니라 기록해야 할 사건이 되었음을 드러낸다.

복만수가 진흙에 반쯤 잠긴 검은 옻칠 관의 옆면을 두 손으로 붙잡고, 무덤 아래로 내려가는 줄을 멈춰 세웠다. 빗물이 관뚜껑의 긁힌 못자국을 타고 흘렀고, 누런 황토는 그의 찢어진 신발 위로 죽처럼 밀려왔다. 만수는 관 속을 향해 고개를 숙인 채 윤태욱의 말끝처럼 목소리를 낮췄다. “내 오른손을 묻지 마라.”

윤설란이 삽날을 관 아래 진흙에 깊이 박아 넣었다. 관이 한 치 비틀리며 멎자, 그녀는 치맛자락 안에서 피 묻은 은수저를 꺼내 들었다. 가와무라 도시오가 곧장 설란의 팔목을 움켜쥐었다. “관을 열면 네가 먼저 죄인이 된다.” 설란은 잡힌 손을 빼지 않고 수저 끝으로 관뚜껑의 첫 못을 긁었다.

만수는 가와무라의 검은 장갑이 설란의 손목을 조이는 동안, 관 옆 틈에서 빗물에 밀려 나온 검은 비단 끝을 보았다. 그의 엄지가 저고리 자락 안의 빈 주머니를 세 번 눌렀다. 은수저가 못 위에서 짧고 맑게 울리자, 만수는 입을 다문 채 관뚜껑을 내려다보았다.

씬 02· 1927년 늦가을, 비가 내리는 밤

은수저가 뽑아 낸 첫 못

은수저가 뽑아 낸 첫 못
장소경성 북쪽 공동묘지의 열린 무덤
시간1927년 늦가을, 비가 내리는 밤
사건윤설란은 가와무라 도시오에게 붙잡힌 팔목을 비틀어 빼며 피 묻은 은수저를 첫 못 아래에 깊이 밀어 넣는다. 복만수는 관 옆의 검은 비단 끝을 밟히지 않게 손으로 감싸고, 관뚜껑이 들리는 쪽을 막으려 드는 가와무라의 외투를 붙든다. 설란이 수저 손잡이를 비틀자 못 하나가 젖은 옻칠 위로 튀어나온다.
영향관을 열겠다는 설란의 행동은 말이 아니라 되돌릴 수 없는 흔적으로 남는다. 가와무라는 설란을 시신 훼손죄로 묶기 위해 묘지 철문 쪽으로 물러나지만, 만수는 관 아래에서 밀려 나오는 검은 비단이 단순한 수의가 아님을 보게 된다. 첫 못이 빠진 틈으로 관 안의 숨은 것이 바깥 공기와 맞닿는다.

윤설란이 은수저 끝을 관뚜껑의 첫 못 밑에 박아 넣고, 진흙에 무릎을 꿇은 채 손잡이를 힘껏 젖혔다. 빗물에 번진 등불빛이 수저의 핏자국과 검은 옻칠을 한 번에 번들거리게 했고, 못은 짧은 쇳소리를 내며 반 마디쯤 올라왔다. 가와무라 도시오가 설란의 어깨를 뒤로 잡아당겼다. “그 손 멈춰라.”

복만수는 관 옆 틈에서 나온 검은 비단 끝을 손바닥으로 눌렀다. 비단 아래쪽이 빗물에 젖어 관 밑으로 다시 빨려 들어가려 하자, 그는 진흙을 헤치고 손가락을 더 깊이 넣었다. 가와무라가 만수의 팔을 내려다보는 사이 설란은 은수저를 다시 비틀었다. 첫 못이 뽑혀 나와 황토 위를 두 번 구르고, 관뚜껑 한쪽이 손가락 하나 들어갈 만큼 들렸다.

가와무라는 설란을 놓고 철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가, 관 아래에서 검은 비단이 한 뼘 더 밀려 나오는 것을 보고 멎었다. 만수의 젖은 손등 위로 비단 끝이 달라붙었다. 들린 관뚜껑 틈에서는 빗물과 함께 아주 가는 숨소리 같은 공기가 새어 나왔다.

씬 03· 1927년 늦가을, 비가 퍼붓는 밤

세 번 돌아간 묘지 열쇠

세 번 돌아간 묘지 열쇠
장소경성 북쪽 공동묘지의 열린 무덤과 녹슨 철문
시간1927년 늦가을, 비가 퍼붓는 밤
사건가와무라 도시오는 관뚜껑 틈에서 새어 나온 가는 숨결을 듣고도 설란과 만수를 남겨 둔 채 철문으로 달려간다. 그는 열쇠 꾸러미에서 굵은 열쇠를 골라 자물쇠에 꽂고 세 번 돌려 묘지의 출구를 봉쇄한다. 윤설란은 두 번째 못에 은수저를 걸고, 복만수는 검은 비단을 놓지 않은 채 관 쪽을 지킨다.
영향철문이 잠기면서 관을 연 사람들은 장례의 증인이 아니라 묘지 안에 갇힌 용의자가 된다. 가와무라는 관 안의 숨은 것을 확인하기 전에 도망길부터 끊어, 설란과 만수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을 무덤 하나로 좁힌다. 관뚜껑 아래의 숨결은 더 분명해지고, 검은 비단은 빗물에 밀려 만수의 손목까지 나온다.

가와무라 도시오가 녹슨 철문을 밀어 닫고 굵은 열쇠를 자물쇠에 꽂았다. 열린 무덤의 검은 옻칠 관에서는 들린 뚜껑 틈으로 빗물이 흘렀고, 윤설란은 진흙에 무릎을 박은 채 은수저를 두 번째 못 밑으로 밀어 넣었다. 복만수는 관 아래에서 빠져나온 검은 비단을 한 손으로 움켜쥔 채 가와무라의 등을 보았다.

열쇠가 한 번 돌아갈 때마다 철문이 낮게 울렸다. 두 번째 소리에 설란이 고개를 들자, 가와무라는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이제 누구도 나가지 못한다.” 세 번째에 자물쇠가 딱 소리를 내며 잠겼고, 그는 장갑 낀 엄지로 녹슨 고리를 문질러 확인했다. 설란은 수저 손잡이를 비틀어 못을 더 끌어올렸고, 만수는 비단 끝이 제 손가락을 감아 오는 것을 느끼자 손을 빼지 못했다.

가와무라가 열쇠 꾸러미를 외투 안주머니에 넣고 무덤 쪽으로 돌아섰다. 관뚜껑 틈이 조금 더 벌어지며, 그 안에서 짧고 젖은 숨이 한 번 새어 나왔다. 만수의 진흙 묻은 손목 위로 검은 비단이 빗물과 함께 한 뼘 더 흘러내렸다.

씬 04· 1927년 늦가을, 비가 내리는 밤

검은 비단 끝의 작은 손

검은 비단 끝의 작은 손
장소경성 북쪽 공동묘지의 열린 무덤
시간1927년 늦가을, 비가 내리는 밤
사건복만수는 관 아래로 흘러나온 검은 비단을 잡아당기고, 비단 끝에서 갓난아기의 작은 손이 드러난다. 윤설란은 두 번째 못을 뽑아 관뚜껑 틈을 넓히며 만수에게 손을 놓지 말라고 한다. 가와무라 도시오는 관을 닫으려 달려들지만, 설란이 삽자루로 그의 팔을 막는다.
영향관 속의 숨결이 시신의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아기의 것임이 처음으로 눈앞에 드러난다. 가와무라는 관을 여는 죄를 묻겠다는 태도에서, 안에 든 존재를 빼앗아 통제하려는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만수는 검은 비단을 놓지 못한 채 관 안의 작은 손과 맞닿는다.

복만수가 검은 비단을 힘껏 잡아당기자, 열린 무덤의 누런 진흙 위로 손가락 다섯 개가 먼저 미끄러져 나왔다. 손은 밤비에 젖어 붉고 작았으며, 관뚜껑 틈에서 한 번 오므라들었다 펴졌다. 만수는 비단을 놓치지 못하고 몸을 더 낮췄다. “사람 손이야.” 그의 목소리가 빗소리에 눌려 갈라졌다.

윤설란은 은수저를 두 번째 못 밑에 깊이 밀어 넣고 팔꿈치까지 떨며 젖혔다. 못이 빠져 진흙에 박히자 관뚜껑이 한 뼘 들렸고, 가와무라 도시오가 앞으로 뛰어들어 뚜껑을 내리누르려 했다. 설란이 삽자루를 그의 팔꿈치에 걸어 밀었다. “닫지 마시오.” 가와무라의 검은 장갑이 관 가장자리를 긁으며 미끄러졌다.

비단 아래의 작은 손이 만수의 진흙 묻은 엄지를 꽉 쥐었다. 만수는 그 힘에 끌리듯 관 안을 향해 손목을 밀어 넣었고, 검은 비단 속에서 짧고 젖은 숨이 다시 새어 나왔다. 등불빛 아래, 그 손등의 가느다란 핏줄만이 관 밖에서 떨렸다.

씬 05· 1927년 늦가을, 비 내리는 밤

회중시계와 갓난아이의 울음

회중시계와 갓난아이의 울음
장소경성 북쪽 공동묘지의 열린 무덤
시간1927년 늦가을, 비 내리는 밤
사건복만수는 관뚜껑을 더 밀어 올려 검은 비단에 싸인 갓난아기를 끌어낸다. 윤설란은 삽자루로 가와무라 도시오를 막아 만수가 아이를 품을 틈을 만든다. 가와무라는 관을 닫으려던 손을 거두고 회중시계를 꺼내 아기의 울음 사이를 잰다.
영향관 속에 윤태욱의 시신이나 오른손이 없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만수는 아기를 품은 순간부터 관을 연 증인이 아니라 아이를 빼앗길 수 있는 보호자가 된다. 가와무라는 아기를 살펴보는 대신 거래할 물건처럼 울음의 간격을 기록하기 시작한다.

복만수가 들린 관뚜껑을 두 팔로 밀어 올리자, 검은 비단이 젖은 황토 위로 쏟아지고 그 속에서 갓난아기가 몸을 뒤틀며 울음을 터뜨렸다. 비에 번진 등불빛이 아이의 붉은 뺨과 만수의 진흙 묻은 손등을 번갈아 훑었다. 만수는 비단을 잡아당기던 손을 놓고, 관 가장자리에 걸린 아이의 등을 급히 받쳤다.

윤설란이 삽자루를 가와무라 도시오의 가슴 앞에 비스듬히 밀어 넣었다. 가와무라가 장갑 낀 손으로 삽날을 밀쳐 내며 관 쪽으로 몸을 숙이자, 설란이 낮게 말했다. “손대지 마시오.” 만수는 그 틈에 아이를 제 젖은 저고리 안으로 끌어안았고, 아이의 작은 손가락이 찢어진 소매를 움켜쥐었다.

가와무라는 관 안의 비어 있는 검은 자리를 잠시 내려다보다가 외투 안에서 은빛 회중시계를 꺼냈다. 뚜껑이 딸깍 열리고 초침이 빗소리 사이로 가늘게 움직였다. 아이가 한 번 울음을 멈췄다가 다시 울자, 가와무라는 시계줄을 팽팽히 쥔 채 입술을 다물었다. 만수는 아이의 머리를 제 턱 밑으로 감추고, 열린 관과 형사의 시계 사이에서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챕터 02

씬 06· 1927년 늦가을, 비 내리는 밤

세 번 울린 철문

세 번 울린 철문
장소경성 북쪽 공동묘지의 녹슨 철문 앞
시간1927년 늦가을, 비 내리는 밤
사건복만수는 갓난아기를 품에 감춘 채 철문으로 달려가지만, 가와무라 도시오가 앞질러 자물쇠를 다시 세 번 돌린다. 가와무라는 빚문서를 꺼내 복순덕의 붉은 손도장을 보이며 아기를 넘기면 문서를 태워 주겠다고 거래를 건다. 윤설란은 열린 무덤 곁에서 삽을 끌고 다가와 가와무라와 만수 사이에 몸을 넣는다.
영향만수는 철문이 탈출구가 아니라 가와무라가 빚과 기록으로 만든 덫이라는 사실을 눈앞에서 확인한다. 가와무라는 아기의 생명과 순덕의 빚을 한 장의 종이 위에 올려놓고 만수에게 선택을 강요한다. 설란은 만수가 달아날 짧은 틈을 만들기 위해 형사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릴 준비를 한다.

가와무라 도시오가 복만수의 앞에서 자물쇠에 열쇠를 꽂고 세 번째로 비틀자, 녹슨 철문이 빗속에서 낮고 길게 울었다. 붉은 녹물이 철창을 타고 흰 자갈 위로 흘렀고, 만수는 포대 속 아기를 더 깊이 가슴에 눌렀다. 아이가 젖은 소매를 찾으며 입을 벌리자 만수의 엄지가 포대 매듭을 세 번 더듬었다.

가와무라는 열쇠 꾸러미를 외투 안으로 넣고, 접힌 빚문서를 만수의 눈앞에서 펼쳤다. 비에 번진 종이 한가운데 복순덕의 붉은 손도장이 선명했다. “아이를 내놓아라. 이 종이는 화로에 넣지.” 그가 문서 끝으로 아기의 포대를 가리키자, 만수는 철창 끝을 붙잡고 몸을 옆으로 밀어 넣으려 했다. 안쪽으로 휜 쇠끝이 그의 저고리 소매를 찢고 팔뚝에 가는 상처를 남겼다.

윤설란이 진흙을 밟아 미끄러지며도 삽자루를 들어 가와무라의 팔 앞을 막았다. “종이 한 장으로 아이를 사겠다는 말은 하지 마세요.” 가와무라는 설란을 향해 고개만 돌렸고, 만수는 그 짧은 틈에 철문 너머가 아니라 열린 무덤 뒤편의 어두운 장례식장 지붕을 바라보았다. 찢어진 소매 아래로 빗물과 피가 함께 떨어지는 동안, 그의 품에서 아기가 다시 울었다.

씬 07· 1927년 늦가을, 비가 쏟아지는 밤

은수저의 흠집

은수저의 흠집
장소경성 북쪽 공동묘지의 녹슨 철문 앞
시간1927년 늦가을, 비가 쏟아지는 밤
사건윤설란은 가와무라 도시오가 빚문서를 든 손을 뻗는 순간, 삽자루로 그의 팔을 철창 쪽으로 밀어 붙인다. 가와무라의 장갑이 벗겨지며 은수저 손잡이의 움푹 팬 흠집을 드러내고, 그는 죽은 아내의 찬장에서 사라진 수저를 알아본다. 설란은 그 짧은 멈춤을 이용해 은수저를 복만수의 찢어진 저고리 주머니에 밀어 넣는다.
영향가와무라는 아기를 받는 거래보다 은수저를 되찾는 일에 잠시 흔들리고, 만수는 아기와 함께 아기의 출생을 잇는 물건까지 품게 된다. 설란은 가와무라의 개인적인 기억을 약점으로 확인하지만, 그를 완전히 막지는 못한다. 철문은 여전히 잠겨 있고, 만수는 더 위험한 다른 출구를 찾아야 한다.

윤설란이 삽자루 끝으로 가와무라 도시오의 팔을 철창에 내리찍듯 밀어 붙이자, 빗물 젖은 외투 소매가 붉은 녹물 위로 쓸렸다. 가와무라의 손에서 빚문서가 반쯤 접히고, 검은 장갑의 오른엄지가 벗겨지며 은수저 손잡이의 흠집을 향해 멎었다. 철문 아래 흰 자갈에는 만수의 팔에서 떨어진 가는 피가 빗물에 풀어졌다.

가와무라는 설란의 손에 든 수저를 보고 낮게 말했다. “그건 내 아내 물건입니다.” 설란은 대답 대신 수저를 그의 손 닿는 쪽으로 한 번 내밀었다가, 곧바로 몸을 틀어 복만수의 찢어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차가운 은이 만수의 젖은 옆구리를 쳤고, 그는 아기를 한 팔로 더 끌어안은 채 주머니 입구를 손등으로 눌렀다.

가와무라가 설란의 손목을 잡으려 들자 설란은 삽자루를 다시 세워 둘 사이를 갈랐다. 만수의 주머니 속 수저 손잡이만 빗속에서 짧게 번뜩였고, 그 움푹 팬 흠집에는 가와무라의 시선이 끝까지 붙어 있었다.

씬 08· 1927년 늦가을, 비가 퍼붓는 밤

문이 아닌 창고로

문이 아닌 창고로
장소경성 북쪽 공동묘지 녹슨 철문 앞에서 장례식장 창고 뒤편까지
시간1927년 늦가을, 비가 퍼붓는 밤
사건복만수는 아기를 안은 채 철창 사이를 비집고 나가려다 안쪽으로 휜 쇠끝에 포대가 걸리자, 담장을 넘는 길을 포기한다. 그는 열린 무덤 쪽으로 몸을 돌려 장례식장 창고를 향해 달린다. 윤설란은 삽자루로 가와무라 도시오를 막아 세우며 만수에게 시간을 벌어 준다. 가와무라는 설란의 팔목을 붙들어 진흙에 무릎 꿇리고, 그 틈에 만수를 직접 뒤쫓는다.
영향만수는 철문을 탈출구로 여기는 대신, 화로 곁에 있을 복순덕과 빚문서, 그리고 아기의 출생을 잇는 물증을 찾아야 한다는 쪽으로 목적을 바꾼다. 설란은 가와무라를 묶어 두려다 붙잡혀, 만수가 달아날 수 있는 시간을 자신의 몸으로 산다. 가와무라의 추격은 묘지의 봉쇄에서 장례식장 창고의 대치로 옮겨 간다.

복만수는 포대가 철창 끝에 걸리자 젖은 천을 세게 잡아당기고, 갓난아기를 가슴으로 감싼 채 녹슨 철문에서 몸을 돌렸다. 찢어진 저고리 소매가 휘어진 쇠끝에 남았고, 팔뚝의 가는 피가 흰 자갈과 붉은 녹물 사이로 떨어졌다. 철문 너머의 골목은 바로 앞에 있었지만, 포대가 한 번 더 당겨지자 아기의 목이 꺾일 듯 흔들렸다.

가와무라 도시오가 빚문서를 든 손으로 만수의 등을 가리켰다. “문을 넘으면 네 어머니도 함께 기록된다.” 윤설란은 삽자루를 그의 무릎 뒤에 밀어 넣고, 만수의 찢어진 주머니를 한 번 가리켰다. 은수저가 그 안에서 차갑게 부딪혔다. “창고로 가요. 장갑이 거기 있어요.” 가와무라가 설란의 팔목을 움켜쥐어 끌어내리자, 설란의 검은 치맛자락이 진흙에 반쯤 잠겼다.

만수는 대답하지 않고 열린 무덤 쪽 비탈을 향해 달렸다. 검은 옻칠 관 옆으로 흘러나온 비단 조각이 진흙에 붙어 있었고, 그는 그것을 밟아 넘으며 장례식장 지붕 아래의 어두운 창고문으로 파고들었다. 뒤에서 가와무라가 설란을 철창 쪽으로 밀어 붙인 뒤, 빗물 튀는 구두로 만수의 발자국을 밟아 왔다.

챕터 03

씬 09· 비가 퍼붓는 밤, 만수가 창고로 뛰어든 직후

화로 곁의 장갑

화로 곁의 장갑
장소윤태욱의 포목 창고 장례식장, 한지창 뒤 화로 곁
시간비가 퍼붓는 밤, 만수가 창고로 뛰어든 직후
사건복순덕은 화로 위에 올린 윤태욱의 오른손 장갑을 뒤집어 안쪽의 인장을 찾아낸다. 창고로 뛰어든 복만수는 긁힌 팔로 아기를 감싼 채 순덕에게 매달리고, 순덕은 장갑과 아기를 함께 숨기려다 화로의 불씨를 끄지 못한다. 윤설란은 뒤따라 들어와 만수의 주머니에 든 은수저를 확인하고, 가와무라 도시오의 발소리가 문턱까지 닿는다.
영향순덕의 손에 든 인장은 아기의 출생과 윤태욱의 거래를 잇는 물증이 된다. 그러나 장갑을 태우지 못한 순덕은 자신이 아이를 낳아 숨긴 흔적까지 지우지 못하게 된다. 만수는 어머니가 빚문서보다 먼저 자기 팔의 상처를 붙드는 모습을 보며, 아기를 가와무라에게 넘기지 않을 이유를 눈앞에서 확인한다.

복순덕이 화로 위의 검은 장갑을 맨손으로 뒤집자, 젖은 가죽 안감에서 작은 인장이 나무판 위로 굴러 불빛을 받아 번뜩였다. 한지창에는 빗물이 눌어붙어 있었고, 화로 재 위의 빚문서 가장자리는 검게 말려 올라갔다. 순덕은 인장을 움켜쥔 채 장갑을 불 속으로 밀어 넣으려다가, 창고문이 세차게 열리는 소리에 손을 멈췄다.

복만수가 찢어진 소매를 펄럭이며 안으로 넘어졌다. 그의 팔뚝에서는 가는 피가 떨어졌고, 검은 포대 속 갓난아기는 젖은 숨을 몰아쉬며 몸을 뒤척였다. 순덕은 아기의 얼굴을 보기 전에 만수의 팔을 붙들어 피 묻은 소매를 걷었다. “누가 이랬니.” 만수는 대답 대신 품속 아기를 더 끌어안았고, 젖은 주머니에서 은수저가 나무판을 쳐 맑은 소리를 냈다.

윤설란이 뒤에서 문을 밀어 닫으며 수저를 집어 들자, 바깥 복도에 가와무라 도시오의 구두가 멎었다. 순덕은 인장을 장갑 속에 다시 밀어 넣고, 장갑과 빚문서를 한꺼번에 화로 가장자리로 끌어당겼다. 불길이 그녀의 손등 바로 아래에서 짧게 솟았다.

씬 10· 비 내리는 밤, 묘지 봉쇄 직후

거짓말의 값

거짓말의 값
장소윤태욱의 포목 창고 장례식장, 한지창 뒤 화로 곁
시간비 내리는 밤, 묘지 봉쇄 직후
사건가와무라 도시오가 창고문을 밀어 열고 젖은 빚문서를 화로 앞 나무판에 펼친다. 그는 복순덕의 손목을 붙들어 붉은 손도장 자리에 눌러 대려 하고, 복만수는 아기를 안은 채 자신이 관 앞에서 낸 윤태욱의 목소리가 거짓이었다고 고백한다. 윤설란은 만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피 묻은 은수저를 들어 보이며, 그 피가 윤태욱의 것이 아니라 출산하던 복순덕의 피라고 밝힌다.
영향순덕이 숨기려 했던 출산의 흔적이 설란과 가와무라 앞에 드러난다. 만수의 거짓말은 설란이 관을 연 명분을 무너뜨리지만, 은수저의 피와 장갑 속 인장은 아기가 윤태욱의 거래물이었다는 더 직접적인 흔적으로 남는다. 가와무라는 순덕의 빚과 아기의 출생을 한꺼번에 쥔 채 손도장을 강요할 수 있게 된다.

가와무라 도시오가 창고문을 발로 닫고 복순덕의 손목을 화로 쪽으로 끌어당기자, 낮은 불빛 위에서 젖은 빚문서가 나무판에 철썩 펼쳐졌다. 종이 한가운데의 붉은 손도장은 비에 번지지 않은 채 화로 재처럼 검게 말린 가장자리와 붙어 있었다. 복순덕은 장갑 속 인장을 쥔 손을 치맛자락 뒤로 감췄고, 복만수는 아기의 포대를 끌어안은 채 찢어진 팔을 몸통에 붙였다. 가와무라는 순덕의 손가락을 문서 위로 내리눌렀다. “여기 한 번만 더 찍으면 된다.”

복만수가 화로 앞에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그 말, 윤태욱 아저씨가 한 거 아니에요.” 그의 젖은 주머니에서 은수저가 나무판을 치며 맑게 울렸다. “내가 했어요. 관을 열게 하려고.” 윤설란의 손이 허공에서 멎었다가, 곧 수저를 집어 불빛 쪽으로 들어 올렸다. 수저의 마른 핏자국을 손톱으로 긁어 보인 그녀가 순덕을 똑바로 향했다. “이 피는 아버지 피가 아니에요. 그날 창고 바닥에서 아이를 낳을 때, 복순덕 씨 손에서 묻은 피예요.”

복순덕은 가와무라의 손아귀에서 손목을 빼려다 화로 가장자리에 손등을 스쳤고, 장갑 안의 인장이 손바닥에서 단단히 눌렸다. 가와무라는 설란의 수저와 순덕의 감춘 손을 번갈아 보더니, 빚문서 위 빈칸을 손가락으로 두 번 두드렸다. 화로 불빛이 문서의 붉은 손도장과 순덕의 떨리는 손끝 사이에서 짧게 솟았다.

씬 11· 비 내리는 밤, 매장 직전

불길 속의 도장

불길 속의 도장
장소윤태욱의 포목 창고 장례식장, 한지창 뒤 화로 곁
시간비 내리는 밤, 매장 직전
사건복순덕은 가와무라 도시오가 인장을 빼앗으려 손을 뻗는 순간 그의 손등을 화로 가장자리에 눌러 붙든다. 그녀는 윤설란이 든 피 묻은 은수저를 낚아채 자기 손가락을 찢고, 피가 떨어지는 손으로 장갑 속 인장을 빚문서 위에 찍는다. 복만수는 아기를 설란에게 넘긴 뒤 화로로 몸을 던져 문서를 붙든 가와무라의 팔을 잡아당긴다. 가와무라가 불붙은 종이를 건지려다 손을 데고 넘어지며, 외투 안의 열쇠 꾸러미가 젖은 마룻바닥으로 굴러간다.
영향빚문서는 순덕의 새 손도장을 받지 못한 채 윤태욱의 인장과 피를 품고 불길에 말려 올라간다. 가와무라가 빚과 출생 기록을 한 장의 종이로 통제하려던 거래는 망가지고, 그의 손에는 화상만 남는다. 열쇠 꾸러미가 만수의 발치까지 굴러오면서, 대치는 화로 곁에서 묘지 철문으로 옮겨 갈 틈을 만든다.

복순덕이 가와무라 도시오의 장갑 낀 손등을 화로 가장자리에 내리누르자, 붉은 불길이 그의 외투 소매를 핥으며 확 솟았다. 가와무라는 이를 악물고 인장이 든 그녀의 주먹을 비틀었지만, 순덕은 손목이 꺾이는 쪽으로 몸을 밀어 붙였다. 한지창의 빗물 얼룩 너머로 불빛이 흔들리고, 나무판 위 은수저가 윤설란의 손에서 미끄러졌다.

순덕은 수저를 집어 들자마자 끝으로 제 검지를 길게 그었다. 피가 빚문서의 붉은 손도장 옆에 떨어지자, 복만수가 아기를 윤설란의 팔로 밀어 넘기고 가와무라의 팔꿈치를 붙잡았다. “찍지 마!” 가와무라가 손을 빼려 했으나, 순덕은 피 묻은 손가락으로 장갑 속 인장을 문서 한가운데에 박았다. 둥근 문양이 젖은 종이에 번지는 동안 그녀가 문서 끝을 화로 속으로 밀어 넣었다.

불붙은 종이가 말려 올라가자 가와무라는 데인 손으로 그것을 움켜쥐려 몸을 숙였다. 만수가 그의 외투를 잡아당기는 바람에 가와무라는 젖은 마룻바닥에 무릎을 부딪혔고, 열쇠 꾸러미가 안주머니에서 빠져나왔다. 쇠열쇠들은 불빛을 튕기며 굴러가 복만수의 찢어진 신발 앞에서 멎었다.

챕터 04

씬 12· 비가 그치지 않는 밤, 빚문서가 불길에 말려 올라간 직후

젖은 마룻바닥의 열쇠

젖은 마룻바닥의 열쇠
장소윤태욱의 포목 창고 장례식장, 한지창 뒤 화로 곁
시간비가 그치지 않는 밤, 빚문서가 불길에 말려 올라간 직후
사건가와무라 도시오가 불붙은 빚문서를 건지려다 젖은 마룻바닥에 무릎을 꿇고, 외투 안주머니에서 열쇠 꾸러미를 떨어뜨린다. 복만수는 찢어진 신발 앞에 멎은 열쇠를 움켜쥐고, 윤설란은 품에 든 아기를 복순덕에게 돌려준다. 가와무라가 데인 손으로 인장을 빼앗으려 몸을 숙이자, 설란은 나무판을 걷어차 그의 손을 막고 순덕과 만수를 창고문 쪽으로 밀어낸다. 순덕은 인장을 쥔 채 먼저 나가지 못하지만, 설란의 재촉에 아기를 끌어안고 묘지 쪽 빗속으로 뛰어든다.
영향열쇠는 가와무라가 묘지를 통제하던 권한에서 만수의 손으로 넘어간다. 설란은 인장과 아기를 한곳에 두지 않기 위해 순덕과 만수를 먼저 열린 무덤으로 보낸다. 가와무라는 빚문서를 잃은 대신 인장을 되찾으려 하고, 설란은 그를 창고에 잠시 묶어 둘 몸이 된다.

윤설란이 젖은 마룻바닥을 미끄러져 가는 열쇠 꾸러미 위로 발을 내리찍자, 쇠열쇠들이 화로의 붉은 빛을 튕기며 복만수의 찢어진 신발 앞에서 멎었다. 가와무라 도시오는 데인 손을 외투 속에 감춘 채 타는 문서 조각을 향해 몸을 낮췄고, 복순덕은 아기를 받아 안으면서도 다른 손의 인장을 놓지 못했다. 설란은 만수의 팔을 잡아당겨 열쇠를 쥐게 했다. “철문으로 가.” 만수의 손가락이 열쇠 고리를 감싸자, 아기는 순덕의 젖은 저고리 안에서 짧게 울었다.

가와무라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은 불길보다 먼저 순덕의 주먹을 향했다. “그 인장을 내놓아라.” 그가 손을 뻗는 순간 설란은 발끝으로 나무판을 걷어차 화로 재와 은수저를 그의 무릎 앞으로 흩뜨렸다. 가와무라는 화상을 입은 손바닥을 바닥에 짚으며 이를 악물었고, 설란은 창고문을 열어 비 내리는 묘지 쪽을 가리켰다.

복순덕이 아기를 품고 문턱을 넘자 만수도 뒤따랐다. 설란은 마지막으로 인장을 든 순덕의 손가락을 접어 쥐게 한 뒤, 문을 반쯤 닫아 가와무라와 마주 섰다. 젖은 마룻바닥에는 검게 그을린 종이와 화로 재 사이로, 만수가 남긴 작은 발자국 두 줄이 창고 밖 어둠까지 이어졌다.

씬 13· 비가 잦아들기 전, 새벽 직전

빈 관으로 돌아가는 길

빈 관으로 돌아가는 길
장소경성 북쪽 공동묘지의 열린 무덤
시간비가 잦아들기 전, 새벽 직전
사건윤설란은 창고에서 나온 복순덕과 복만수를 열린 무덤 쪽으로 앞세우고, 자신은 인장을 빼앗으려 쫓아온 가와무라 도시오를 관 앞으로 끌고 간다. 그녀는 관뚜껑을 비스듬히 젖혀 관 안의 빈 바닥과 젖은 검은 비단을 드러낸다. 가와무라는 설란의 팔을 붙들고 인장을 내놓으라 명령하지만, 설란은 순덕이 쥔 주먹을 관 위로 들어 올려 모두가 보게 한다.
영향빈 관은 윤태욱의 매장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가와무라의 기록을 무너뜨린다. 설란은 아기와 인장을 숨긴 채 도망치는 대신, 관의 공백을 공개된 물증으로 바꾸기로 선택한다. 가와무라는 빚문서를 잃은 뒤에도 연행과 기록으로 사람들을 묶으려 하지만, 자신의 아기 탈취 시도까지 빈 관과 함께 드러날 위험을 맞는다.

윤설란이 열린 무덤의 검은 옻칠 관뚜껑을 두 손으로 밀어젖히자, 빗물 고인 황토가 관 옆면을 따라 죽처럼 흘러내렸다. 복순덕은 아기를 저고리 안에 숨긴 채 비탈 아래에 섰고, 복만수는 찢어진 신발 속 발로 진흙을 밟으며 열쇠 꾸러미를 움켜쥐었다. 관 안에는 사람 하나 누웠어야 할 자리만 길게 패여 있었고, 검은 비단 조각이 빗물에 젖어 바닥에 들러붙어 있었다.

가와무라 도시오가 설란의 팔꿈치를 낚아채며 그녀를 관에서 떼어 놓으려 했다. “인장을 내놓아라. 네가 관을 연 죄는 지금부터 기록된다.” 설란은 끌려가면서도 순덕의 손목을 잡아당겨, 장갑에서 꺼낸 인장이 든 주먹을 관뚜껑 위로 올렸다. “기록하려면 이것부터 보세요. 관에는 아버지가 없었습니다.”

가와무라의 데인 손이 외투 안에서 잠깐 굳었다. 복만수는 그 틈에 열쇠 고리를 품속으로 더 깊이 밀어 넣고, 순덕은 아기의 입을 손바닥으로 가리지 않은 채 몸을 돌렸다. 비가 관 속 빈 자리에 떨어져 얕은 물웅덩이를 만들고, 그 위로 인장의 금속 가장자리가 차갑게 흔들렸다.

씬 14· 1927년 늦가을, 비가 그치지 않는 새벽 전

불에 찍힌 문양

불에 찍힌 문양
장소경성 북쪽 공동묘지의 열린 무덤
시간1927년 늦가을, 비가 그치지 않는 새벽 전
사건윤설란은 복순덕의 손에서 인장을 빼앗아 검은 옻칠 관뚜껑 위에 힘껏 찍는다. 가와무라 도시오는 데인 손을 감춘 채 그녀를 막으려 하지만, 설란은 윤태욱의 장부와 아기의 은폐를 알고 있었다고 조문객들 앞에서 밝힌다. 복만수는 열쇠 꾸러미를 쥔 채 철문 쪽으로 물러나고, 순덕은 아기를 품은 몸으로 관과 만수 사이를 막는다.
영향관뚜껑에 남은 문양은 빈 관과 숨겨졌던 아기를 같은 자리의 물증으로 묶는다. 설란은 스스로 연행될 이유를 내놓아 가와무라가 기록을 독점하지 못하게 만든다. 가와무라는 자신의 아기 탈취 시도와 화상 입은 손이 드러날 위험 때문에 철문 앞에서 한 걸음 물러난다.

윤설란이 복순덕의 피와 화로 그을음이 묻은 인장을 낚아채 검은 옻칠 관뚜껑 한가운데에 내리찍었다. 젖은 관 표면이 둔탁하게 울리고, 둥근 문양의 가장자리에 검은 재와 붉은 얼룩이 번졌다. 열린 무덤의 황토는 빗물에 풀려 관 옆면을 타고 흘렀고, 복순덕은 아기를 저고리 안에 감춘 채 비탈 아래에서 몸을 돌렸다.

가와무라 도시오가 설란의 손목을 잡으려 손을 뻗었다가, 데인 손바닥을 움켜쥐고 멎었다. 설란은 그의 손을 피하지 않고 관뚜껑 위의 문양을 가리켰다. “아버지는 여기 없어요. 아이를 관에 숨긴 것도, 장부로 그 아이를 지우려 한 것도 내가 알고 있었습니다.” 복만수는 찢어진 신발 끝으로 진흙을 밀며 열쇠 꾸러미를 품속 깊이 감췄고, 가와무라의 시선은 소년의 주머니와 빈 관 사이를 오갔다.

설란은 두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연행하려면 나부터 데려가세요.” 가와무라는 철문 쪽으로 물러서며 외투 속 화상 난 손을 더 깊이 감췄다. 비가 관뚜껑의 인장 위를 흘러도 문양은 지워지지 않았고, 만수는 녹슨 철문 앞에서 열쇠 고리를 쥔 손을 들어 올렸다.

챕터 05

씬 15· 비가 잦아드는 새벽 직전

세 번째 열쇠

세 번째 열쇠
장소경성 북쪽 공동묘지의 녹슨 철문 앞
시간비가 잦아드는 새벽 직전
사건복만수는 철문 자물쇠 앞에서 열쇠 꾸러미를 꺼내 첫 번째와 두 번째 열쇠를 일부러 헛돌린다. 가와무라 도시오는 데인 손을 외투 속에 숨긴 채 문턱을 막고, 열쇠를 돌리면 만수와 복순덕을 아기 유괴와 도주로 기록하겠다고 위협한다. 윤설란은 가와무라의 팔을 붙들고, 복순덕은 아기를 품은 채 만수의 등 뒤를 지킨다. 만수는 세 번째 열쇠를 자물쇠에 꽂아 끝까지 돌린다.
영향가와무라가 독점하던 철문의 통제권이 만수의 손에서 무너진다. 설란과 순덕은 서로의 손을 놓지 않은 채, 만수가 만든 짧은 출구를 지켜 낸다. 철문이 열리면서 가와무라는 사람들을 묘지 안에 가둬 기록으로 처리하려던 계획을 즉시 실행할 수 없게 된다.

복만수가 열쇠 하나를 녹슨 자물쇠에 꽂아 억지로 돌리자, 철문 앞 하얀 자갈 위로 붉은 녹물이 빗물과 함께 번졌다. 열쇠는 반쯤 들어갔다가 헛돌았고, 만수는 아기 포대가 아니라 차가운 열쇠 고리만 세게 쥐었다. 복순덕은 저고리 안에 아기를 숨긴 채 만수의 어깨를 붙들었으며, 윤설란은 관뚜껑에 찍힌 인장이 보이는 쪽에서 가와무라 도시오의 팔을 놓지 않았다.

가와무라가 외투 속 데인 손을 감추며 문턱 앞으로 한 발 내디뎠다. “돌리는 순간, 네 이름부터 적겠다. 아이를 훔쳐 달아난 놈으로.” 윤설란이 그의 팔꿈치를 밀어 철창에 부딪치게 했다. “그럼 관도 적으세요. 비어 있던 관과 당신이 찾던 아이까지.” 가와무라의 시선이 잠깐 관 쪽으로 꺾인 사이, 만수는 두 번째 열쇠를 자물쇠에 넣었다가 바닥에 떨어뜨렸다.

만수는 마지막 열쇠의 톱니를 엄지손가락으로 훑고 자물쇠에 깊이 밀어 넣었다. 복순덕이 아기를 더 끌어안고, 윤설란은 가와무라의 외투깃을 잡아당긴 채 철문 안쪽에 버텼다. 세 번째 열쇠가 돌아가자 속 빈 철문이 낮고 길게 울었고, 자물쇠의 걸쇠가 젖은 금속에서 풀려 문틈 하나가 새벽빛만큼 벌어졌다.

씬 16· 비가 잦아드는 새벽 직전

문 안에 남는 사람

문 안에 남는 사람
장소경성 북쪽 공동묘지의 녹슨 철문 앞
시간비가 잦아드는 새벽 직전
사건복만수가 벌어진 철문을 밀어 열려는 순간, 가와무라 도시오가 문틈으로 데인 손을 뻗어 그의 팔을 붙잡는다. 윤설란은 가와무라의 시선을 묘지 안의 빈 관과 찍힌 인장으로 돌리기 위해, 피 묻은 은수저를 만수의 주머니에 밀어 넣고 스스로 철문 안쪽에 남겠다고 선언한다. 복순덕은 아기를 품은 채 문밖으로 나가라는 만수의 손짓을 받지만, 설란을 두고 갈 수 없어 문턱에서 멈춘다. 설란은 순덕의 팔을 떼어 내고 문을 안쪽에서 붙든다.
영향가와무라는 만수를 도주자와 아기 유괴범으로 기록하겠다고 위협하지만, 설란이 관과 인장의 증인으로 남자 그의 기록은 곧 자신의 아기 탈취 시도와 빈 관을 함께 적어야 하는 위험을 안게 된다. 만수는 설란이 남긴 은수저를 품고, 순덕과 아기를 문밖으로 내보낼 짧은 틈을 얻는다. 철문은 열린 출구가 되지만, 설란은 그 출구의 안쪽에 남는다.

윤설란이 벌어진 철문을 두 손으로 더 밀어젖히며 복만수의 찢어진 주머니에 피 묻은 은수저를 깊이 찔러 넣었다. 철창의 붉은 녹물이 하얀 자갈 위로 흘렀고, 문틈 너머에는 젖은 이불보 사이의 옅은 새벽빛이 가늘게 걸려 있었다. 가와무라 도시오가 데인 손을 외투에서 빼내 문살을 붙잡자, 붕대 대신 감긴 젖은 천 끝으로 검붉은 물이 배어 나왔다. “나가면 네 이름부터 적는다.” 그가 만수를 향해 말했다. “아이를 훔쳐 달아난 놈으로.”

복순덕이 저고리 안의 아기를 끌어안고 문턱에 멎었다. 만수가 어머니의 소매를 잡아당겼지만, 순덕의 손은 설란의 팔목을 놓지 못했다. 설란은 그 손가락을 하나씩 떼어 내고, 순덕의 손바닥을 만수 쪽으로 밀었다. “관은 비어 있었어요.” 설란이 가와무라를 보며 말했다. “인장은 저기 찍혀 있고, 나는 여기 남겠습니다.” 가와무라의 눈이 철문 밖의 소년에게서 관뚜껑의 검은 문양으로 꺾였다.

설란은 철문 안쪽 문살을 움켜쥔 채 몸으로 가와무라와 만수 사이를 막았다. 만수의 주머니 속 은수저 손잡이가 젖은 천을 눌러 차갑게 드러났고, 순덕의 품에서는 아기가 입술을 달싹였다. 철문은 비에 젖은 경첩을 길게 울리며, 문밖 쪽으로 한 뼘 더 열렸다.

씬 17· 비가 잦아드는 새벽 직전

이름 없는 새벽

이름 없는 새벽
장소녹슨 철문 밖 빨래터 골목 끝
시간비가 잦아드는 새벽 직전
사건복만수는 윤설란이 가와무라 도시오를 철문 안쪽에 붙드는 틈에 복순덕의 손을 잡아 문턱 밖으로 끌어낸다. 복순덕은 저고리 안의 갓난아기를 감싸 쥔 채 설란 쪽으로 몸을 돌리지만, 만수는 그녀의 손을 놓지 않는다. 가와무라는 만수를 도주자이자 아기 유괴범으로 기록하겠다고 외치며 문살을 잡아당긴다. 설란은 관뚜껑의 인장과 빈 관을 가리키며 그 기록을 쓰려면 자신의 이름부터 적으라고 맞선다.
영향만수와 순덕, 아기는 묘지의 봉쇄를 벗어나 밝아지는 빨래터 골목으로 들어선다. 설란은 철문 안에 남아 가와무라가 아이만 떼어 내 기록할 수 없게 만든다. 만수는 아기의 울음을 잠재우기 위해 늘 하던 대로 젖은 소매를 내밀지 않고, 순덕의 손을 잡은 채 앞으로 걷는다. 철문이 다시 잠기면서 묘지 안의 대치는 뒤에 남는다.

복만수가 복순덕의 젖은 손목을 잡아당겨 녹슨 철문 밖으로 끌어내자, 처마 밑에 널린 흰 빨랫감들이 옅은 남색 새벽빛 속에서 길게 흔들렸다. 순덕의 저고리 안에서 갓난아기가 몸을 뒤척였고, 만수의 찢어진 주머니에서는 피 묻은 은수저 손잡이가 차갑게 튀어나왔다. 순덕이 철문 안의 윤설란을 향해 발을 돌리려 하자 만수는 손가락을 더 세게 얽었다. “엄마, 걸어.” 그 말에 순덕은 아기를 끌어안은 팔을 고쳐 안고, 아들의 손을 따라 좁은 골목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가와무라 도시오가 철창을 붙든 채 외쳤다. “복만수, 네 이름을 적겠다. 아이를 훔쳐 달아난 놈으로.” 윤설란은 문 안쪽에서 그의 데인 손이 문살을 놓지 못하게 외투깃을 잡아당겼다. “그 종이에는 빈 관도 쓰세요.” 설란이 관뚜껑의 검은 인장을 가리켰다. “그리고 아이를 관에서 꺼내려 한 당신 손도요.” 가와무라의 붕대 감긴 손끝에서 검붉은 물이 자갈 위로 떨어졌다.

만수는 아기가 입을 벌려 울음을 터뜨리려는 순간에도 젖은 소매를 내밀지 않았다. 그는 순덕의 손을 잡은 채 젖은 이불보와 속옷 사이의 밝은 길로 들어갔다. 뒤에서 철문이 한 번, 두 번, 세 번 낮게 잠겼고, 순덕은 아기를 내려놓지 않은 채 만수와 나란히 걸었다.

'죽은 사람 목소리로 먹고삶'스토리 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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