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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ytalk 오리지널 · 장면 25 · 챕터 5

이번엔 너 안 두고 감

cute Komon Snake 48premium크리에이터 페이지

비 오는 현재의 서울에서 야간 견인기사로 일하는 젊은 여성은 새벽 3시 40분, 폐쇄된 어린이 놀이공원 회전목마 앞에 버려진 구급차를 끌어 달라는 호출을 받는다. 구급차 뒷문을 여는 순간 들것 위에 묶인 채 깨어난 것은 열여섯 살의 자기 자신이고, 손목에는 2009년 축제 입장권과 아직 마르지 않은 솜사탕 설탕이 붙어 있다. 그녀가 과거의 자신을 차 밖으로 꺼내는 동안, 놀이공원 철문 밖으로는 같은 얼굴을 한 노파가 우비를 입고 나타나 쇠망치를 들어 유리를 두드리기 시작하고, 회전목마 스피커에서는 끊긴 동요가 7분 간격으로 다시 켜진다.

시동이 죽은 견인차를 버리고 빗물 찬 범퍼카장으로 뛰어들지, 아니면 들것째 밀어 철문을 들이받아 하나만 데리고 나갈지 그녀는 지금 고를 수밖에 없다.

  • 등장인물 4
  • 장소 5
  • 장면 25
  • 줄거리 5,608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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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 Characters

등장인물들

서해윤

여성

2009년 여름축제 아르바이트 배지를 달고 회전목마 매표소 심부름을 하다 실종 직전의 밤을 통과 중인 학생

프로필

서해윤은 회전목마 뒤편에서 자기를 기다리던 언니 서해윤의 손을 다시 잡고 철문 밖 집으로 돌아가려 한다. 그런데 들것에서 몸을 일으킬수록, 비를 맞아 얼굴선이 무너진 현재의 서해윤이 자기가 기억하던 언니와 너무 다르다는 사실을 끝까지 견뎌야 하고, 강노을에게서 훔쳐 본 축제 방송실 열쇠의 위치를 말하는 순간 그 여자를 살릴지 더 깊은 곳으로 들이밀지 스스로 골라야 한다. 그녀가 입을 여는지 다무는지에 따라, 서해윤은 구급차와 회전목마 사이에서 도망칠 길을 얻거나 아예 같은 밤에 붙들린다.

빗방울이 천장이나 유리창을 두드리면 서해윤은 먼저 어깨를 접고 손목의 설탕 자국부터 문지른다; 손가락 끝이 끈적일수록 숨은 더 짧아진다. 낯선 어른에게는 대답을 삼키다가도, "언니"라는 말이 나오면 들것 끈에 쓸린 손으로 상대 소매를 덥석 잡고 놓지 않는다. 살려 달라고 우는 대신, 알고 있는 길 하나를 끝까지 쥐고 버티는 쪽이라서, 겁에 질린 얼굴로도 필요한 순간엔 거짓말보다 더 위험한 침묵을 택한다.

배경

2009년 축제 날, 서해윤은 비가 쏟아지기 전에 집에 가자고 보채다가도 회전목마 뒤편에서 기다리라는 말을 듣고 혼자 남았다. 그 사이 방송실 창문 아래에 쪼그려 앉아 있다가, 강노을이 급히 숨겨 둔 열쇠 위치와 끊긴 동요를 다시 틀어 올리는 손놀림을 훔쳐보았다. 구급차 들것에 묶인 채 깨어난 지금도 그녀의 운동화 밑창에는 그 밤 범퍼카장 물이 마르지 않은 듯 번들거리고, 그래서 서해윤이 내미는 손이 구원이든 함정이든 먼저 따라갈 수밖에 없다.

묘사

서해윤은 비에 젖은 구급차 들것 위에서 몸을 반쯤 일으킨 채, 축제 아르바이트 배지가 달린 연노란 줄무늬 우비 조끼와 눅눅하게 들러붙은 흰 티셔츠를 입고 있다. 검은 머리는 급히 묶었다 풀린 듯 목덜미에 젖어 감기고, 큰 눈은 울음을 터뜨리기보다 상대 얼굴과 출구 쪽을 번갈아 재며 숨을 아낀다; 들것 끈에 쓸려 붉게 벗겨진 손으로 남의 소매를 붙잡은 채, 손목에 눌어붙은 분홍 솜사탕 설탕 자국만 집요하게 문지르는 모습이 오래 남는다.

어린 얼굴에는 아직 학생의 둥근 선이 남아 있지만, 범퍼카장 물을 밟고 온 듯 번들거리는 운동화 밑창과 무릎에 튄 검은 빗물 자국이 그 밤을 이미 지나온 아이처럼 보이게 한다. 누군가 "언니"라고 부르면 금세 따라갈 듯 흔들리면서도, 입술은 끝내 열쇠의 위치를 말할지 말지 정하지 못한 채 얇게 다물려 있다.

서문자

여성

폐원 뒤에도 놀이공원 외곽 배수로를 혼자 돌며 새벽마다 고인 빗물을 퍼내는 전 관리인

프로필

서문자는 철문 안으로 들어오려는 두 해윤 중 하나의 머리를 쇠망치로 깨뜨려야만 이 비와 동요가 멈춘다고 믿고, 7분마다 다시 켜지는 노래에 맞춰 숨이 넘어가도록 철문과 유리를 두드린다. 그녀는 해윤을 철문 밖으로 끌어내 살리겠다는 말과, 들것 위의 해윤을 먼저 부수겠다는 손을 한몸으로 내밀며 자기 손가락 관절과 마지막 남은 기력을 갈아 넣는다. 한때 강노을의 어머니였던 서문자는 반복을 끝내려면 아들의 이름부터 버려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 해윤이 누구를 데리고 나가느냐에 따라 자기 피붙이의 흔적까지 직접 지울 각오를 한다.

동요가 끊겼다가 다시 켜지기 직전이면 서문자는 입술로 일곱까지 세고, 여덟이 되기 전에 쇠망치 자루를 손바닥 깊숙이 밀어 넣는다. 해윤이 비에 젖어 떨면 자기 우비를 철문 틈으로 밀어 넣다가도, 다음 순간 같은 틈으로 망치 머리를 들이밀어 들것 바퀴를 찍어 멈춘다. 누가 강노을의 이름을 입에 올리면 대답 대신 목 안의 가래를 삼키고, 젖은 손등으로 입을 문지른 뒤 더 세게 유리를 친다.

배경

서문자는 2009년 놀이공원 축제 야간 정리 인부로 일하던 아들 강노을을 마지막으로 본 뒤, 비가 오는 새벽마다 폐쇄된 철문으로 돌아왔다. 그날 구급차 안에서 흘러나오던 어린이 동요를 강노을이 직접 틀었다는 말을 붙잡고, 그녀는 관리동 전기함과 회전목마 스피커 선을 수없이 뒤져 보다가 "같은 얼굴 둘 중 하나가 남으면 비가 계속된다"는 자기만의 규칙에 매달리게 되었다. 그래서 서문자는 해윤이 나타나는 밤마다 구조자도 살인자도 아닌 얼굴로 철문 밖에 서서, 안으로 들어오려는 쪽과 밖으로 나오려는 쪽을 끝내 하나로 줄이려 든다.

묘사

서문자는 빗물에 오래 불은 회색 얼굴을 들고 철문 밖에 비스듬히 서 있다. 군청색 비닐 우비는 어깨와 소매 끝이 닳아 하얗게 뜨고, 안에는 배수로를 돌며 입던 누런 작업 조끼와 고무 앞치마 자국이 남은 검은 바지가 겹쳐 보여, 평생 젖은 바닥을 치우며 버틴 몸의 습관이 옷자락마다 밴다. 입술은 무언가를 세듯 가늘게 달싹이고, 퉁퉁 부은 손가락 사이로 쇠망치 자루를 손바닥 깊숙이 박아 쥔 채, 우비 한쪽을 내밀어 덮어 주려는 자세와 같은 팔로 다음 순간 유리를 깨려는 힘을 함께 품고 있는데, 오른손 검지 첫마디가 비뚤게 굳어 망치보다 먼저 눈에 박힌다.

강노을

남성

2009년 축제 당일 회전목마 스피커와 안내방송을 맡았다가 폐원 뒤 실종자로만 남은 전기 기사

프로필

강노을은 자신이 짜 놓은 7분짜리 방송 루프를 서해윤의 손으로 끊어, 범퍼카장 배전반 뒤에 묶인 철문 개방 회로를 열게 하려 한다. 하지만 그 길 끝에는 그가 서문자에게 끝내 숨긴 정전 사고의 진짜 순서와, 어린 서해윤을 안심시키려다 오히려 그 자리에 붙들어 둔 마지막 거짓말이 함께 드러난다. 서해윤이 그의 목소리를 믿고 따라갈수록 철문은 가까워지지만, 강노을은 믿을 만한 어른으로 남을 마지막 자리에서 스스로 밀려난다.

테이프 속 강노을의 목소리는 늘 먼저 숨을 한 번 고르고, 젖은 손으로 스위치를 만지지 말라는 말을 유난히 또박또박 반복한다. 정비일지 여백에는 볼펜 끝이 여러 번 멈춘 자국과 검게 덧칠된 시간표가 남아 있어, 사실을 적는 손과 지우는 손이 같은 사람이었음을 들킨다. 누군가 울음을 터뜨리는 순간에만 그의 안내는 부드러워지지만, 바로 다음 문장에서는 꼭 하나의 방향만 고르게 몰아붙인다.

배경

강노을은 2009년 축제 시즌을 앞두고 고장 잦은 방송 설비와 범퍼카장 배전반을 함께 떠맡았고, 예산을 아끼려는 운영 쪽 눈치를 보며 임시 배선을 몇 번이나 연장했다. 서문자 앞에서는 끝까지 "오늘만 버티면 된다"는 얼굴을 지켰지만, 새벽 점검 때 생긴 이상 전류와 끊긴 안내방송을 제 손으로 덮으려다 루프 재생 장치를 남겼다. 그날 이후 그의 몸은 사라졌고, 놀이공원에는 비 올 때마다 같은 동요와 같은 지시가 돌아오며 서해윤을 다시 그 배전반 쪽으로 불러들인다.

묘사

강노을은 비에 오래 젖었다가 마르기를 반복한 남자처럼 보인다. 값싼 회색 작업복 점퍼 위에 축제용 빨간 스태프 조끼를 대충 걸친 채, 한 손은 오래된 카세트테이프를 쥐고 다른 손은 배전반 스위치를 누르기 직전에서 멈춘 자세로 서 있는데, 어깨는 앞으로 조금 말렸지만 턱만은 끝까지 무너지지 않으려 든다. 왼쪽 손등에는 전기에 데인 희끗한 화상 자국이 번져 있고, 울음을 들은 직후처럼 잠깐 부드러워진 눈빛 아래로는 다음 문장에서 반드시 하나를 고르게 만들 사람의 굳은 입매가 남아 있다.

배소정

여성

견인업체 야간 관제실에서 기사들 위치를 보다가 사고 접수보다 미수금 정산표를 더 오래 들여다보는 팀장

프로필

배소정은 해윤을 무사히 귀환시키는 일보다 먼저, 회사 견인차 한 대와 기사 한 명이 아침 인계표에서 통째로 빠지지 않게 붙들어 두려 한다. 그래서 경찰 신고 버튼 앞에서 손을 떼고, 해윤과 주고받은 새벽 통화 파일의 저장 시간을 지워 버릴 준비를 하며, 그 비겁한 계산 때문에 해윤에게 남은 유일한 바깥 목소리이면서도 끝내 문을 열고 들어오지 않는 어른이 된다. 대신 배소정은 3시 40분에 찍힌 호출 번호가 자신이 17년 전 접수했던 폐원 민원철의 번호와 같다는 걸 알아보고, 해윤에게 한 번도 들려준 적 없는 이름 강노을을 현재 시각으로 끌어올린다.

배소정은 통화할 때마다 헤드셋 선을 검지에 세 번 감았다가 놓고, 상대가 울먹이면 목소리를 더 낮추는 대신 배차 화면의 차량 위치만 더 자주 새로고침한다. “지금 끊지 말고 주변부터 말해요”라고 차분히 받아 적으면서도, 다른 손으로는 녹음 보존 체크를 해제한 채 커서를 저장 아이콘 위에 오래 올려둔다. 누가 규정을 들먹이면 곧장 근무일지를 펼쳐 날짜와 분 단위까지 맞받아치지만, 강노을이라는 이름이 나오면 의자 등받이에서 등을 떼고 모니터 유리에 비친 자기 얼굴부터 확인한다.

배경

2009년 여름, 배소정은 같은 회사의 말단 접수원으로 폐쇄 직전 놀이공원 민원 전화를 며칠째 받았고, 새벽마다 같은 번호로 들어오던 장난 같은 신고 끝에 강노을이라는 보호자 이름을 민원철 구석에 한 번 적어 넣었다. 그 뒤 현장 출동 기사 한 명이 기록 없이 퇴사하고, 회사는 그 철을 분실 처리한 채 넘어갔는데, 배소정만 야간 서버 백업 폴더에서 지워지지 않은 통화 시간표를 따로 출력해 서랍 맨 아래 넣어 두었다. 승진 대신 새벽 당직을 붙잡고 남은 것도 그 서랍 때문이라, 해윤의 호출 화면에 3시 40분과 그 번호가 함께 뜨는 순간 배소정은 처음으로 회사 규정보다 오래된 일을 다시 받게 된다.

묘사

배소정은 형광등이 밤새 눌러앉은 관제실 한가운데서, 값싼 회색 니트 가디건 위에 회사 로고가 바랜 남색 조끼를 걸치고 모니터 불빛에만 얼굴을 내민다. 어깨는 곧게 세웠지만 의자 등받이에서 등을 반쯤 떼고 앉아 있어 언제든 규정과 비겁함 사이에서 몸을 먼저 빼려는 사람처럼 보이고, 울먹이는 목소리를 받아 적을 때도 시선은 상대가 아니라 차량 위치 점 위를 훑는다. 검지에 헤드셋 선을 세 번 감아 하얗게 눌린 자국이 남는 버릇이 이 사람을 끝내 기억하게 만든다.


줄거리 · Synopsis

줄거리

서해윤은 장맛비가 가장 굵게 쏟아지는 새벽 3시 40분, 은하동산 정문 앞에 멈춘다. 호출 내용은 폐쇄 구역 안에 버려진 구급차 견인 한 건뿐이지만, 정문 철문 너머로 보이는 회전목마가 이미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부터 이상하다. 전기는 끊긴 지 오래인데도 말 목들이 젖은 불빛을 받아 천천히 오르내리고, 스피커에서는 어린이 동요가 한 소절 나오다 끊긴다. 관제실의 배소정은 전화로 경찰보다 먼저 차량 상태를 확인하라고 재촉한다. 서해윤은 욕설을 삼키고 철문 옆 좁은 틈으로 몸을 밀어 넣는다. 빗물이 고인 바닥에서 운동화가 미끄러지고, 구급차 뒤편 반쯤 열린 문 안에 들것이 보인다. 그녀가 문을 완전히 젖히는 순간, 들것 위의 열여섯 살 서해윤이 숨을 들이켜며 눈을 뜬다.

소녀의 손목에는 2009년 축제 입장권이 고무줄처럼 들러붙어 있고, 아직 녹지 않은 분홍 설탕이 빗물에 젖어 피부에 번져 있다. 소녀는 처음에는 낯선 어른을 보듯 움츠리다가, 현재의 서해윤이 무심코 “괜찮아”라고 말하는 순간 그 얼굴을 오래 들여다본다. 그리고 언니라고 부른다. 그 한마디가 떨어지자 구급차의 실내등이 꺼지고, 회전목마 스피커가 다시 켜지며 정확히 7분이 시작된다. 엔진을 걸려던 견인차는 시동이 죽고, 정문 전자 잠금도 먹통이 된다. 철문 밖에서는 우비를 뒤집어쓴 서문자가 쇠망치로 유리를 두드리기 시작한다. 그녀는 살려 주겠다고 외치면서도, 동시에 들것을 먼저 부숴야 끝난다고 악을 쓴다. 해윤이 구급차에서 소녀를 끌어내리려 하자 들것 바퀴가 문턱에 걸리고, 철문 틈으로 들어온 망치 머리가 바퀴 축을 찍어 박아 버린다. 첫 7분 동안 해윤은 소녀 하나를 구급차 밖으로 꺼내는 데 성공하지만, 대신 자기 손바닥을 문짝에 찧어 손톱 하나가 들린다.

소녀 서해윤은 비를 맞자마자 손목의 설탕 자국부터 문지르며 숨을 짧게 몰아쉰다. 도망치자는 현재의 서해윤에게 바로 따라오지 않고, 회전목마 뒤편 서비스 통로 쪽을 계속 본다. 그곳에 “언니가 기다리기로 했다”고 믿기 때문이다. 현재의 서해윤은 그 말에 얼어붙는다. 2009년 그날, 자신은 실제로 누군가를 기다리게 해 두고 돌아오지 못했다는 기억 조각이 올라오기 때문이다. 그녀는 소녀를 억지로 끌고 정문으로 가려 하지만, 정문은 아까보다 멀어진 듯 보이고 길바닥 화살표는 물에 번져 범퍼카장 쪽만 가리킨다. 철문 밖 서문자는 우비를 틈으로 밀어 넣어 소녀의 어깨를 덮어 주다가, 다음 순간 망치로 철문 자물쇠를 내리쳐 안으로 들어오려 한다. 그녀의 모순된 손길은 해윤을 더 혼란스럽게 만들지만, 서문자의 입에서 처음으로 강노을의 이름이 튀어나오는 순간 소녀가 움찔한다. 소녀는 방송실 열쇠를 강노을이 동물 모양 휴지통 배 밑에 숨겨 두는 걸 훔쳐봤다고, 그러나 그 말을 하면 “언니가 더 안쪽으로 간다”고 중얼거린다.

배소정은 계속 통화로 길을 지시하지만, 실제로는 경찰 신고를 미루고 녹음 보존 체크를 해제한 채 시간을 번다. 그 비겁함은 곧바로 대가를 부른다. 해윤이 범퍼카장 입구로 들어설 때 소정은 17년 전 민원철에서 본 번호와 호출 번호가 같다는 걸 깨닫고, 강노을이 2009년 사고 직전 정전을 일부러 늦게 끊었다는 소문을 내뱉는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범퍼카장 천장 스피커에서 남자 목소리가 살아난다. 강노을의 낡은 안내방송이다. 그는 젖은 손으로 스위치를 만지지 말라고 또박또박 반복한 뒤, 방송실로 오면 철문을 열 수 있다고 유도한다. 현재의 서해윤은 그 목소리를 듣자 오래된 체육복 냄새와 젖은 전선 냄새를 함께 떠올린다. 그날 밤, 울던 자신에게 다정한 목소리로 “여기서 잠깐만 기다리면 언니가 온다”고 말한 어른이 바로 강노을이었다는 기억이 비로소 몸으로 돌아온다. 그는 소녀를 달래려 했지만, 그 거짓말로 아이를 사고 자리 근처에 붙들어 둔 것이다.

해윤은 소녀를 데리고 동물 휴지통까지 가서 진흙과 낙엽 속을 손으로 헤집는다. 손등이 깨진 유리 조각에 베이지만, 끝내 녹슨 열쇠 꾸러미를 찾아낸다. 그 순간 서문자가 철문을 넘어 안으로 들어온다. 늙은 몸이라도 우비 속 어깨로 문을 밀고, 망치 자루를 지팡이처럼 짚으며 물을 가른다. 그녀는 소녀를 자기 쪽으로 당기려 하고, 현재의 서해윤은 서문자를 밀쳐 넘어뜨린다. 세 사람은 범퍼카장 얕은 물 위에서 미끄러지며 엉킨다. 소녀는 그 틈에서 “방송실 말고 먼저 배전반”이라고 말할 기회가 있었지만, 입을 다문다. 그 침묵 때문에 해윤은 잘못된 문으로 먼저 달려가고, 방송실 문짝은 비를 먹어 부풀어 열리지 않는다. 7분이 또 돌아오고, 회전목마 동요가 다시 켜지자 물높이가 발목에서 종아리까지 찬다. 해윤은 소녀가 일부러 바로 말하지 않았다는 걸 알아차리지만, 소녀는 울지 않는다. 대신 들것 끈에 쓸린 손으로 해윤 소매를 붙잡고, 이제 말하면 언니가 자기 대신 남을까 봐 무서웠다고 털어놓는다.

서문자는 그 고백을 듣고 처음으로 망치를 내려놓는다. 그리고 2009년 사고의 자기 몫을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드러낸다. 그녀는 범퍼카장 가장자리 배수 덮개를 발로 걷어차 숨겨진 서비스 통로를 연다. 그 통로 끝이 배전반 뒤쪽으로 이어진다는 걸 아는 사람은 관리인이었던 그녀뿐이다. 하지만 그녀는 길을 열어 주는 대신 조건을 건다. 둘 중 하나만 데리고 밖으로 나가라고. 둘을 함께 끌면 길이 틀어져 다 죽는다고. 현재의 서해윤은 거절하고, 소녀 손목에 자기 견인 와이어의 안전끈을 묶어 절대 놓치지 않겠다고 한다. 그 고집 때문에 셋은 함께 서비스 통로로 들어가고, 천장 낮은 콘크리트 복도에서 다시 막힌다. 앞문은 배전반 쪽에서 잠겨 있고, 뒤에서는 물이 차오르며 서문자의 다리가 미끄러진다. 해윤이 그녀를 부축하지 않으면 노파는 그대로 물에 처박힌다. 해윤은 망설이다가 소녀를 벽 손잡이에 잠시 묶고 서문자를 끌어 올린다. 그 선택으로 소녀는 혼자 남겨진 공포에 질려 손목 설탕 자국을 미친 듯 문지르고, 결국 안전끈을 풀려다 손목 피부를 더 벗긴다.

배전반 앞에서 강노을이 처음으로 몸을 가진 채 나타난다. 그는 비에 젖은 2009년 작업복 차림 그대로, 배전반 문짝에 등을 기대고 서 있다. 환영이 아니라, 겹쳐진 시간 속에서 현재 인물들과 같은 공간을 차지하는 존재다. 그는 소녀에게는 부드럽게, 현재의 서해윤에게는 다급하게 말한다. 철문 개방 회로는 배전반 뒤에 있지만, 회전목마 방송 루프를 끊지 않으면 문이 열려도 다시 닫힌다고. 그러니 누군가 젖은 손으로 수동 스위치를 내려야 한다고. 서문자는 강노을을 보자마자 망치를 집어 들어 그의 머리를 치려 달려든다. 아들을 향한 분노와 끝내 스스로 못 끊은 연민이 한 동작으로 튀어나온다. 강노을은 피하지 않고, 대신 망치 자루를 붙잡은 채 현재의 서해윤에게 진실을 토해낸다. 정전의 첫 원인은 회전목마가 아니라 범퍼카장 배선 합선이었고, 그는 축제 중단 책임을 피하려고 방송을 먼저 살린 뒤 메인 차단을 늦췄다. 그 몇 분 사이, 길을 잃은 아이가 더 안쪽으로 남았다. 그 아이가 열여섯의 서해윤이었다. 그 순서를 말하는 순간 배전반 주변 공간이 또렷해지고, 문틈의 물방울 하나하나까지 멈춘 듯 보이지만, 동시에 철문 쪽에서 닫히는 금속음이 울린다. 진실이 길을 보여 주는 대신 모두를 더 깊게 묶은 것이다.

현재의 서해윤은 그제야 자신이 평생 품어 온 기억의 빈칸이 죄책감만이 아니었다는 걸 안다. 누군가 자신을 버린 것이 아니라, 여러 어른이 각자 책임을 미루는 사이 자기가 같은 밤에 남겨졌던 것이다. 그녀의 바깥 목표는 두 해윤 모두를 데리고 나가는 것이지만, 안쪽의 필요는 그 밤의 버려진 아이를 이번에는 끝까지 자기 손으로 놓지 않는 데 있다. 그래서 그녀는 강노을의 유도대로 소녀를 남기고 먼저 문을 열자는 제안을 거부한다. 대신 배전반 문을 발로 차 열고, 안에 쌓인 물을 맨손으로 퍼내며 서문자에게 망치로 상단 고정핀을 부수라고 외친다. 소녀는 울면서도 좁은 틈으로 기어와 해윤의 젖은 소매를 잡고, 강노을은 마지막으로 스위치 순서를 몸으로 막아 준다. 그는 감전될 걸 알면서도 맨손으로 노출선을 치워 해윤의 손이 바로 메인 레버에 닿게 만든다. 손등이 타는 냄새와 함께 그의 왼손 화상 자국이 새것처럼 벌어진다.

클라이맥스는 좁은 배전반실에서 네 사람이 서로의 몸을 밀치고 붙드는 싸움으로 벌어진다. 서문자는 망치로 회전목마 루프 차단기를 내리치려 하고, 강노을은 그 충격이 소녀 쪽으로 튈까 봐 자기 몸으로 가린다. 현재의 서해윤은 물속에 무릎을 꿇은 채 메인 레버를 당기려 하지만 손이 미끄러지고, 소녀 서해윤은 뒤에서 그녀 허리를 붙잡아 버틴다. 그 와중에 또 동요가 켜지려는 소리가 스피커에 오르자, 서문자가 갑자기 방향을 바꿔 아들의 어깨를 밀어낸다. 그리고 자기 몸으로 차단기를 눌러 버린다. 쇠망치 머리와 노파의 팔뚝이 함께 젖은 금속에 닿고, 불꽃이 터지며 회전목마의 불빛이 한 줄씩 꺼진다. 같은 순간 현재의 서해윤이 메인 레버를 끝까지 내리고, 소녀가 배전반 뒤 철문 개방 회로의 수동 손잡이를 잡아당긴다. 손잡이가 내려가며 정문 쪽에서 묵직한 철문 열리는 소리가 난다.

그러나 문이 열렸다고 끝나지 않는다. 이름으로 불린 존재는 혼자 나갈 수 없다는 규칙이 마지막으로 값을 요구한다. 정문까지 이어진 서비스 통로가 반쯤 무너지고, 물살이 뒤에서 밀어닥친다. 강노을은 더는 바깥으로 갈 수 없는 사람처럼 통로 입구에서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는 소녀에게 더 이상 기다리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대신 현재의 서해윤에게 아이를 데리고 먼저 가라고, 이번에는 순서를 바꾸라고 말한다. 서문자는 감전으로 한쪽 팔이 말을 듣지 않지만 끝까지 일어나, 뒤에서 무너지는 선반을 망치로 받쳐 길을 만든다. 현재의 서해윤은 소녀를 들것째 밀어 철문으로 돌진하지 않는다. 대신 소녀를 업고, 비틀거리는 서문자의 허리에 안전끈을 감아 함께 끌고 간다. 세 사람은 하나의 매듭처럼 묶인 채 정문 쪽으로 나아가고, 물이 목까지 차오르기 직전 철문 밖으로 넘어져 나온다.

철문 바깥 아스팔트에 몸이 굴러나오는 순간 비는 갑자기 잦아든다. 회전목마 동요는 더 이상 돌아오지 않는다. 그런데 밖에 나온 것은 셋이 아니라 둘이다. 현재의 서해윤 품에 안긴 소녀는 살아 있고, 서문자는 철문 바로 안쪽에 주저앉은 채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그녀의 손에는 망치 대신 찢어진 우비 자락이 쥐어져 있다. 강노을의 모습은 마지막 불꽃과 함께 배전반실에 남아 사라진다. 철문은 반쯤 열린 채 멈춘다. 배소정은 한참 뒤에야 현장에 도착하지만, 구급차도 견인차도 설명할 수 없는 상태를 보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그녀는 삭제하려던 통화 파일을 지우지 못한 채, 젖은 담배갑을 구겨 쥐고 경찰 대신 119를 부른다. 처음으로 기록을 없애지 않고 남기는 쪽을 택한 것이다.

해가 뜰 무렵, 소녀 서해윤은 구급차 담요를 뒤집어쓴 채 현재의 서해윤 옆에 앉아 있다. 둘은 같은 얼굴이지만, 더 이상 같은 방식으로 떨지 않는다. 소녀의 손목에 붙어 있던 2009년 입장권은 비에 풀어져 글자가 번졌고, 현재의 서해윤 손바닥에는 배전반 레버 자국이 붉게 남아 있다. 그녀는 소녀에게 집에 가자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네가 기억하는 집까지 같이 걸어가 보자고 한다. 누가 누구의 언니인지, 어느 쪽이 남은 밤인지 아직 완전히 정리되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한쪽을 설명 없이 남겨 두지 않겠다는 약속만은 몸으로 증명된 뒤다. 은하동산 안쪽에서는 더 이상 동요가 들리지 않고, 철문 안에 남은 빗물은 처음으로 단순한 고인 물처럼 보인다.


세계관 · World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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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서울 서남권, 한때 여름축제로 붐볐다가 2009년 장마철 사고 뒤 급히 폐원된 소형 어린이 놀이공원 ‘은하동산’이 세계의 중심이다. 이곳은 대로변에서 한 블록만 꺾이면 나오는 값싼 상가와 정비소, 견인차 차고지, 반지하 주택들 사이에 끼어 있다. 낮에는 그냥 버려진 사유지처럼 보이지만, 비가 많이 오는 새벽에는 철문 안쪽 지형이 살아난다. 배수로가 넘치면 범퍼카장은 얕은 저수지처럼 차오르고, 회전목마 바닥 아래 전선관과 방송선이 젖은 콘크리트 속에서 다시 숨을 쉰다.

놀이공원의 구조는 작고 단순한 대신 함정처럼 닫혀 있다. 정문 철문, 매표소, 회전목마, 범퍼카장, 방송실, 배전반, 동물 모양 휴지통, 천막 창고, 뒤편 서비스 통로가 거의 한눈에 들어오는 거리 안에 몰려 있다. 그래서 누군가를 잃기엔 너무 좁고, 한 번 놓치면 다시 찾기엔 이상할 만큼 복잡하다. 비가 오면 페인트 벗겨진 길바닥 화살표와 축제 안내 문구가 물에 번져, 길을 알려 주는 대신 자꾸 다른 방향을 가리킨다.

이 세계는 도시 바깥의 초자연적 공간이 아니라, 관리가 끊긴 도시 시설과 남은 사람들의 부채가 겹쳐 생긴 서울 안의 국지적 균열이다. 구급차, 견인차, 관제실, 정산표, 호출 번호 같은 아주 현실적인 것들이 이 균열의 문턱이 된다. 그래서 이곳의 공포는 낯선 괴물보다 익숙한 공공 설비의 소리로 온다. 끊겼다가 7분마다 다시 켜지는 동요, 물 먹은 스피커의 갈라진 잡음, 철문에 빗물이 튀는 금속성 냄새, 오래된 솜사탕 설탕이 젖은 손목에 다시 녹는 끈적임이 이 세계의 공기다.

시대

2026년 초여름 장마의 시작, 새벽 3시 40분부터 해가 뜨기 직전까지가 핵심 시간대다. 휴대전화와 관제 시스템, 차량 GPS가 당연한 현재이지만, 은하동산 내부에는 2009년 축제의 설비와 습관이 그대로 남아 있다. 카세트 테이프 안내방송, 수기 정비일지, 수동 철문 개방 회로, 방수 처리되지 않은 배전반이 아직도 현재의 사람들을 붙든다.

세계의 역사에서 중요한 분기점은 2009년 여름축제 마지막 주의 정전 사고다. 공식 기록에는 단순 폐원과 실종으로 정리됐지만, 실제로는 그날의 미완료 조치와 은폐된 순서가 비 오는 새벽마다 같은 시간대를 현재로 밀어 올린다. 지금 이 순간은 과거가 회상되는 시간이 아니라, 아직 끝나지 못한 밤이 다시 접속되는 시간이다.

규칙

비가 많이 오는 새벽, 은하동산 안에서 2009년 사고와 직접 연결된 사람이나 물건이 함께 있으면 같은 장소의 다른 시각이 겹친다. 그 결과 현재의 서해윤과 열여섯의 서해윤이 한 공간에 존재할 수 있지만, 둘을 동시에 안전하게 바깥으로 빼내려 할수록 길과 출구는 더 어긋난다.

회전목마 스피커의 동요가 7분마다 다시 켜지는 동안에는 철문과 방송실, 배전반이 사고 당일의 상태를 우선한다. 그래서 차량 시동이 꺼지거나 전자 잠금이 먹통이 되고, 살아남으려면 누군가는 젖은 설비를 손으로 만져 수동으로 끊어야 하며 그 대가로 화상, 감전, 혹은 감춰진 기록의 노출을 감수해야 한다.

은하동산에서 한 번 자기 이름으로 불린 존재는 비가 그칠 때까지 혼자 나갈 수 없다. 누군가를 데리고 나가거나, 대신 남겨 두거나, 이름을 지운 채 밀어내야만 문턱이 열린다. 이 규칙 때문에 구출은 곧 선택이 되고, 자비와 살의가 같은 동작 안에 들어간다.

사고의 진짜 순서를 입 밖에 내면 공간은 더 선명해지지만 사람은 더 깊이 묶인다. 숨겨진 열쇠 위치, 정전의 원인, 마지막 거짓말 같은 사실은 탈출의 실마리이면서 동시에 반복을 고정하는 못이어서, 인물들은 침묵하면 길을 잃고 말하면 누군가를 희생하게 된다.

기술과 철학

이 세계를 지배하는 기술은 최첨단이 아니라 시대가 어긋난 설비들의 공존이다. 바깥에는 GPS가 달린 견인차와 야간 관제 시스템이 있고, 안쪽에는 카세트 테이프 방송, 아날로그 스위치, 수기 정비일지, 수동 철문 회로가 남아 있다. 중요한 것은 새 기술이 낡은 기술을 대체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오히려 현재의 시스템은 과거 설비의 빈틈을 덮어 숨기기만 했고, 그 덮개가 비에 젖으면 가장 먼저 벗겨진다.

사회적 철학은 노골적인 생존 계산이다. 밤 노동의 세계에서는 한 사람의 공포보다 차량 한 대의 손실, 신고 한 건의 책임, 녹음 파일 하나의 보존 여부가 더 빨리 판단된다. 관제실은 도움의 중심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책임이 흘러가지 않게 막는 밸브에 가깝다. 그래서 바깥의 어른들은 구조를 말하면서도 기록 삭제, 미수금, 인계표를 먼저 계산하고, 그 비겁함이 초자연적 반복과 맞물려 더 큰 감금 장치가 된다.

동시에 이 세계에는 오래된 현장 신념도 남아 있다. 젖은 전선을 맨손으로 만지지 말 것, 방송이 다시 켜지기 전에 끊을 것, 철문은 안보다 밖에서 여는 편이 낫다는 식의 몸으로 익힌 규칙들이다. 문제는 이런 실용적 지혜가 도덕적 진실과 어긋난다는 점이다. 누군가를 살리는 가장 빠른 방법이 다른 누군가를 남겨 두는 일일 수 있고, 진실을 밝히는 일이 반복을 끝내는 대신 더 깊게 고정할 수도 있다. 이 세계에서 믿음은 종교가 아니라 순서에 대한 집착이다. 무엇이 먼저였는가를 바로잡으려는 욕망이 사람들을 다시 그 밤으로 끌고 간다.

시각적 묘사

이 세계의 색은 젖은 청록, 녹슨 적갈, 형광등의 병든 흰색, 구급차 내부의 탁한 민트색이다. 검은 새벽 위로 노란 나트륨등이 번지고, 빗물은 모든 표면을 한 겹의 막처럼 덮어 사물의 나이를 드러낸다. 회전목마의 원색 말들은 벗겨진 페인트 아래 회색 목재를 드러내고, 금박 장식은 물 먹은 껌처럼 축 늘어져 있다. 범퍼카장 바닥에는 얕은 물이 고여 천장 전선망과 깜빡이는 전구를 뒤집힌 채 비춘다.

카메라는 자주 좁은 프레임에 갇힌다. 구급차 뒷문 틈, 철문 살 사이, 우비 모자 아래, 들것 바퀴 옆, 배전반 문짝 사이로 세계가 잘려 보인다. 먼 곳보다 가까운 질감이 먼저 보인다. 밧줄에 쓸린 손목, 설탕이 녹아 번진 피부, 쇠망치 자루에 눌린 손가락 마디, 비를 먹어 부푼 방송실 문짝, 고인 물 위로 흔들리는 빨간 경광등 반사. 움직임은 크지 않지만, 반복되는 소리와 미세한 위치 변화가 공포를 키운다. 같은 동요의 같은 소절이 돌아올 때마다 조명 각도와 물높이가 아주 조금씩 달라져, 세계가 제자리에서 썩어 가는 느낌을 준다.


장소 · Locations

장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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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전목마 뒤 서비스 통로

천장에 겨우 닿을 듯 낮은 이 통로는 회전목마 기단 뒤를 따라 ㄱ자로 꺾이며 이어지고, 비를 먹은 콘크리트 벽에는 아이 키만 한 높이로 오래된 손때가 검게 번져 있다. 머리 위로 지나가는 배수관에서 물이 한꺼번에 밀릴 때마다 끊어진 전구 하나가 청록빛으로 떨고, 벽에 박힌 미끈한 스테인리스 손잡이들이 그 빛을 짧게 받아 젖은 손바닥처럼 번들거린다. 바닥은 얕게 고인 물과 벗겨진 미끄럼 방지 도료가 뒤섞여 발이 자꾸 옆으로 밀리고, 멀리서 한 소절만 남은 동요가 물소리에 씹혀 들어오면 통로 끝마다 같은 어둠이 한 칸씩 가까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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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 휴지통 광장

광장 한가운데에는 토끼, 곰, 코끼리 모양의 플라스틱 휴지통들이 허리까지 진흙에 박힌 채 둥글게 서 있고, 배 속 투입구 가장자리마다 빗물이 차올라 번진 빨강과 파랑 페인트가 눈물 자국처럼 턱 밑으로 흘러내린다. 위에서 떨어진 나트륨등 빛은 젖은 등껍질 같은 바닥에 얇게 퍼져, 휴지통 입 벌린 검은 구멍과 물웅덩이 속 뒤집힌 색면만 번갈아 번쩍이게 만든다.

빗물은 빈 음료컵과 젖은 전단 쪼가리를 밀며 낮은 바닥을 가로질러 튀고, 멀리서 들려오는 망치질은 한 번 늦게 도착할 때마다 이 플라스틱 짐승들의 속 빈 몸통 안에서 둔하게 울린다. 한쪽 코끼리 배 밑은 낙엽과 검은 흙이 유난히 두껍게 엉겨 붙어 있어, 누가 급히 손을 집어넣고 헤집으면 바로 손등이 더러워지고 유리 파편에 긁힐 만큼 바닥이 가까운 높이로 내려앉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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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성견인 새벽 사무실

천장까지 닿지 못하는 합판 칸막이 안에 모니터 네 대가 푸른빛을 번지게 켜져 있고, 병든 형광등 아래 플라스틱 책상 가장자리는 손때에 반질반질하다. 헤드셋 지직임이 한쪽 귀를 긁는 동안 다른 쪽에서는 키보드 탁탁 두드리는 소리가 쉬지 않고 이어지며, 벽에 핀으로 꽂힌 배차표와 미수금 출력물은 너무 말라 가장자리부터 하얗게 말려 올라가 있다. 종이컵 바닥이 남긴 식은 커피 얼룩이 정산표 숫자 몇 칸을 번지게 먹어 버렸고, 투명 비닐 서류봉투 안에는 오래전 민원철 복사본이 눌린 채 누렇게 떠 있어, 이 방에서는 사람 목소리보다 저장 버튼 위에 머무는 커서와 수정액 덧칠 자국이 더 오래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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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윤의 반지하 부엌방

누런 스탠드 하나가 싱크대 겸 책상 모서리를 비스듬히 핥고 지나가면, 방은 살구빛이 아니라 오래 끓였다 식은 국물 같은 색으로 가라앉는다. 접다 만 밥상은 침대 끝에 걸쳐 반쯤 접힌 채 서 있고, 그 아래 미지근하게 휜 플라스틱 서랍장 맨칸에는 2009년 입장권 한 장이 동전과 손톱깎이 사이에 눌려 있어, 누가 급히 밀어 넣고 다시는 끝까지 꺼내 보지 않은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냉장고 모터는 몇 초 쉬었다가 다시 낮게 울고, 그 진동에 문틀 옆 벽지 끝이 손톱처럼 말려 들썩인다. 윗집에서 둔탁한 발소리가 한 번 지나갈 때마다 창문 아래 얇은 곰팡이 자국이 떨리고, 견인용 안전끈으로 대충 묶어 둔 휴대전화 충전선이 전기포트 옆에서 천천히 흔들려, 이 방이 사람을 쉬게 하기보다 다음 호출 전까지 임시로 접어 두는 자리라는 걸 먼저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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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급차 뒷문 적재칸

구급차 뒷문 적재칸은 사람 하나 겨우 누울 폭으로 길게 뻗어 있고, 탁한 민트색 실내등이 천장 모서리마다 물먹은 플라스틱을 희게 뜨게 만든다. 빗방울이 지붕 철판을 촘촘히 두드릴 때마다 들것 아래 금속 레일이 미세하게 울고, 반쯤 걸린 뒷문 틈으로 들어온 붉은 경광 반사가 젖은 인조가죽 시트와 벽면 고정벨트 버클 위를 한 번씩 훑고 지나간다.

바닥은 들것 바퀴가 오래 긁고 간 홈 때문에 얕게 패여 있어 조금만 몸을 움직여도 덜컹 소리가 상자 안을 다 채우고, 그 소리가 멎으면 대신 천장 손잡이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산소통 거치대에 짧게 튄다. 한쪽 벽의 접이식 의자 모서리와 문 안쪽 손잡이에는 분홍 설탕이 손자국 모양으로 눌어붙어 있어, 응급약 냄새가 다 빠진 자리에서 그 끈적한 흔적만 유난히 새것처럼 빛난다.


장면 · Scenes

장면별 이야기

챕터 01

01· 2026년 초여름 장마 새벽 3시 40분

3시 40분 호출지

3시 40분 호출지
장소은하동산 정문 앞 구급차와 철문 사이
시간2026년 초여름 장마 새벽 3시 40분
사건서해윤은 병원비 액수를 볼펜으로 다시 눌러 적어 둔 호출지를 대시보드에 붙인 채, 폐쇄된 은하동산 정문 앞에 견인차를 세운다. 철문 너머에서 전기 끊긴 지 오래된 회전목마가 돌아가고 동요가 한 소절만 튀어나왔다 끊기자, 그녀는 배소정과 통화한 채 차량 상태부터 확인하라는 재촉을 듣는다. 그때 철문 바깥 어둠 속에서 서문자가 우비 차림으로 잠깐 모습을 드러냈다가 망치 자루를 철문에 한 번 부딪혀 금속음을 내고 물러난다. 서해윤은 기다리지 않고 견인용 장갑을 입에 물어 당겨 끼운 뒤, 철문 옆 사람 하나 겨우 통과할 틈으로 몸을 밀어 넣는다.
영향이 장면은 단순한 견인 호출을 구조 현장으로 뒤집는다. 배소정은 도움을 주는 척하면서도 경찰보다 차량 확인을 먼저 시키고, 서문자는 아직 이름도 설명도 없이 위협과 경고를 한몸으로 던져 긴장을 미리 박아 넣는다. 서해윤이 철문 안으로 직접 들어가는 선택을 함으로써, 바깥의 상식과 관제 규정보다 은하동산 안쪽의 순서가 이야기를 끌고 가기 시작한다. 다음 장면에서 그녀가 구급차 뒷문을 열고 들것 위의 소녀와 마주할 수 있는 물리적 진입이 여기서 만들어진다.

서해윤이 와이퍼를 한 번 세게 올린 뒤 견인차를 철문 바로 앞에 비스듬히 박아 세운다. 젖은 대시보드 위에는 병원비 액수가 두 번 덧적힌 호출지가 테이프로 붙어 있고, 정문 너머 회전목마 말들은 나트륨등에 젖은 채 천천히 목을 까딱인다. 스피커에서는 어린이 동요 한 소절이 갈라진 채 흘렀다가 뚝 끊기고, 서해윤은 운전석 문을 밀어 열며 휴대전화를 어깨와 귀 사이에 끼운다. 배소정의 목소리가 지직거리는 헤드셋 너머로 낮게 깔린다. “사진부터 찍어요. 경찰 부르면 견인비 날아가요.” 서해윤은 대답 대신 호출지를 떼어 접어 주머니에 쑤셔 넣고, 비에 젖은 철문 쪽으로 걸어간다.

은성견인 새벽 사무실에서는 배소정이 모니터 네 대 사이에 몸을 기울인 채 헤드셋 선을 검지에 감았다 푼다. 그녀는 저장 아이콘 위에 커서를 올려둔 손으로는 통화 시간을 재고, 다른 손으로는 배차표 구석을 접는다. 화면 속 GPS 점 하나가 은하동산 앞에서 멈춘 채 깜빡이자, 그녀는 입술을 핥고 다시 말한다. “안에 사람 없으면 바로 후크 걸 수 있어요. 차대번호부터.” 그 말이 끝나기 전에 철문 건너편 어둠에서 서문자가 우비 자락을 붙잡고 한 걸음 나온다. 그녀는 쇠망치 머리를 철문 살에 툭 부딪혀 젖은 금속음을 내고, 서해윤을 똑바로 본 채 입을 벌리지만 말 대신 가래 섞인 숨만 뱉는다.

서해윤은 철문 중앙 자물쇠를 잡아당겨 보고 꿈쩍하지 않자, 왼쪽 담벼락과 문짝 사이에 난 좁은 틈으로 몸을 돌린다. 배소정이 전화 너머에서 “거긴 사유지예요, 괜히 들어가지 말고 밖에서—” 하고 말을 바꾸는 순간, 서해윤은 견인용 장갑을 이로 잡아당겨 끝까지 끼우고 한쪽 어깨부터 틈에 밀어 넣는다. 젖은 작업복이 철에 긁히는 소리가 짧게 나고, 철문 안쪽에서 붉은 경광 반사가 한 번 번쩍인다. 서문자의 망치 자루가 다시 철문을 쳐서 쾅 하고 울릴 때, 서해윤의 몸은 이미 안쪽으로 반쯤 넘어가 있다.

02· 2026년 초여름 장마 새벽 3시 40분 직후

민트색 적재칸

민트색 적재칸
장소은하동산 구급차 뒷문 적재칸
시간2026년 초여름 장마 새벽 3시 40분 직후
사건서해윤은 반쯤 열린 구급차 뒷문을 더 젖히고 적재칸 안으로 올라가 들것 끝에 눌어붙은 분홍 설탕과 손목에 감긴 2009년 축제 입장권을 먼저 확인한다. 들것 위의 소녀가 갑자기 숨을 들이켜며 눈을 뜨자, 서해윤은 곧바로 차문 잠금 버튼과 손잡이를 번갈아 눌러 보며 뒤로 물러선다. 배소정은 전화 너머로 차량 상태와 키 유무부터 말하라고 재촉하고, 철문 밖의 서문자는 빗속에서 유리 너머를 향해 손바닥을 붙였다 떼며 안을 들여다본다. 소녀는 몸을 반쯤 일으킨 채 서해윤 소매 끝을 붙잡고, 서해윤은 그 손을 떼어내지 못한 채 적재칸 안에 더 깊이 갇힌다.
영향이 장면은 버려진 차량 점검이 사람 구조로 뒤집히는 첫 물리적 전환점이다. 서해윤은 들것 위의 존재가 단순한 피해자가 아니라 자기와 같은 얼굴, 같은 시절의 몸이라는 사실을 눈앞에서 확인하고도 도망 대신 문을 닫아 보려 한다. 그러나 배소정의 계산적인 지시와 서문자의 바깥 압박이 동시에 적재칸 안으로 밀려들어오면서, 서해윤은 혼자 판단할 시간을 잃는다. 소녀가 먼저 서해윤의 옷을 붙잡음으로써 다음 장면의 호명과 7분의 시작을 위한 신체적 연결이 만들어진다.

서해윤은 구급차 뒷문을 어깨로 밀어 더 열고 민트색 실내등 아래 적재칸으로 발을 올린다. 젖은 운동화 밑창이 바닥 홈에 걸려 짧게 덜컹거렸고, 들것 끝 프레임에는 분홍 설탕이 손자국처럼 눌어붙어 있었다. 그녀는 그 끈적한 자국 옆에서 빗물에 반쯤 불은 2009년 축제 입장권을 떼어 보려 손을 뻗다가 멈춘다. 입장권 끝이 가느다랗게 들린 바로 그때, 들것 위의 소녀가 가슴을 크게 들썩이며 숨을 들이켜고 눈을 떴기 때문이다.

서해윤은 바로 뒤로 물러나며 문 안쪽 잠금 버튼을 세게 눌렀다. 먹히지 않았다. 다시 손잡이를 잡아당기고, 앞칸을 향해 “소정 팀장, 여기 사람 있어요. 애가—” 하고 쏘아붙이지만, 배소정은 헤드셋 지직임 사이로 “사람 말고 차량 키부터요. 시동 걸리는지 먼저 봐요”라고 자른다. 빗물이 흐르는 유리 바깥에서 서문자의 얼굴이 우비 챙 밑으로 붙었다 떨어지고, 한 번은 젖은 손바닥이 유리창에 미끄러져 희끗한 자국을 남긴다. 들것 벨트에 쓸린 손을 든 소녀는 몸을 반쯤 일으켜 앉다가 휘청했고, 손목의 설탕 자국을 문지르려다 대신 서해윤 작업복 소매를 덥석 잡는다.

서해윤은 반사적으로 그 손을 떼어내려다 멈춘 채 다시 잠금 버튼을 연달아 눌렀다. 적재칸 천장 손잡이에서 떨어진 물방울 하나가 산소통 거치대에 튀었고, 소녀의 입장권 끝이 그녀 손목에 달라붙은 채 파르르 떨렸다. 전화선 너머 배소정의 목소리가 더 낮아지기 직전, 붉은 경광 반사가 두 사람의 같은 얼굴을 한 번 같이 훑고 지나갔다.

03· 새벽 3시 40분 직후, 첫 7분이 시작되는 순간

언니라고 부른 순간

언니라고 부른 순간
장소은하동산 구급차 뒷문 적재칸
시간새벽 3시 40분 직후, 첫 7분이 시작되는 순간
사건서해윤이 소녀의 손을 떼어 내려 몸을 뒤로 빼는 찰나, 소녀 서해윤은 들것 끈에 쓸린 손으로 그녀 작업 점퍼 소매를 더 세게 붙잡고 얼굴을 끝까지 올려다본다. 서해윤이 반사적으로 “괜찮아”라고 내뱉자, 소녀는 떨리는 입술로 한 번 숨을 삼킨 뒤 그녀를 “언니”라고 부른다. 그 한마디와 동시에 구급차 적재칸의 민트색 실내등이 꺼지고, 회전목마 스피커에서 끊겼던 동요가 다시 켜지며 바깥 세계의 순서가 바뀐다. 배소정은 전화 너머에서 차량 키 위치와 시동 여부부터 확인하라고 몰아붙이고, 철문 밖의 서문자는 비에 젖은 우비 소매를 철문 틈으로 밀어 넣으며 안에서 당장 나오라고 소리친다. 서해윤은 어둠 속에서 휴대전화를 더듬어 조명을 켜고 문 쪽으로 몸을 돌리지만, 이미 구조의 대상은 버려진 구급차가 아니라 자기 얼굴을 한 소녀로 완전히 바뀌어 버린다.
영향이 장면은 현재의 서해윤과 소녀 서해윤의 관계를 단순한 닮음이나 착시가 아니라 직접적인 호명으로 고정한다. “언니”라는 말은 서해윤의 기억을 흔드는 동시에, 은하동산의 규칙을 실제로 작동시켜 첫 7분의 카운트다운을 시작한다. 배소정의 관제 지시는 도움처럼 들리지만 구조보다 차량을 우선하는 계산을 드러내고, 서문자의 경고는 위협과 구원의 모양을 동시에 갖춘 채 본격적으로 프레임 안으로 들어온다. 그 결과 서해윤은 더 이상 상황을 확인하는 기사로 남지 못하고, 소녀를 데리고 적재칸 밖으로 빼내야 하는 사람으로 밀려난다.

소녀 서해윤이 서해윤의 젖은 소매를 끌어당기며 상반신을 들것 위로 반쯤 일으킨다. 탁한 민트색 실내등 아래서 소녀 손목의 분홍 설탕이 번들거리고, 2009년 입장권 끝이 피부에 젖어 붙은 채 떨린다. 서해윤은 본능처럼 손을 뿌리치려다 멈추고, 문 안쪽 손잡이에 눌어붙은 같은 색 설탕 자국과 소녀 손목을 한 번에 본다. “괜찮아.” 그 말이 떨어지자 소녀는 낯선 어른을 보듯 움츠리던 눈을 천천히 들어 서해윤 얼굴의 이마선과 입가를 오래 훑고, 마침내 입술을 연다. “언니.”

실내등이 탁 꺼지면서 적재칸이 한순간 검은 상자처럼 닫히고, 곧 바깥 회전목마 쪽에서 동요 한 소절이 물 먹은 스피커로 갈라져 들어온다. 배소정의 목소리가 휴대전화에서 먼저 튄다. “서해윤 씨, 사람 말고 차부터 봐요. 키 꽂혀 있어요? 시동 걸어 봐요, 지금.” 같은 순간 철문 밖에서 서문자가 쇠에 부딪히는 소리를 내며 외친다. “그 애 데리고 나오지 마! 아니, 아니... 먼저 나와!” 서해윤은 욕을 삼키며 휴대전화 플래시를 켜고 문 쪽으로 몸을 틀지만, 빛줄기 안에서 소녀가 더 빨리 그녀 손목을 붙잡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긴다.

흔들리는 흰 불빛이 들것 레일과 산소통 거치대를 훑는 사이, 적재칸 바닥이 아주 작게 덜컹하고 바깥에서 견인차 경광등 반사가 뒷문 틈으로 한 번 스친다. 서해윤은 무릎으로 들것 옆을 버티고 소녀 손가락을 하나씩 떼어 내기 시작한다. 전화기 너머 배소정이 무언가 더 말하지만, 동요가 다시 한 소절 올라오며 그 말을 잘라 먹는다. 소녀는 풀려나는 손으로도 끝까지 서해윤 점퍼 끝단을 쥔 채, 빗물 젖은 입술로 다시 한 번 같은 말을 한다. “언니, 늦으면 안 돼.”

04· 새벽 3시 40분 직후, 첫 7분이 흐르기 시작한 순간

철문 밖의 망치

철문 밖의 망치
장소은하동산 구급차 뒷문 적재칸
시간새벽 3시 40분 직후, 첫 7분이 흐르기 시작한 순간
사건서해윤은 꺼진 적재칸 안에서 소녀 서해윤의 허리 밑으로 팔을 넣고 들것째 문밖으로 밀어내려 하지만, 동시에 견인차 시동과 정문 전자 잠금이 죽어 버리며 퇴로가 끊긴다. 배소정은 통화 너머로 경찰 신고를 미루고 차대번호와 차량 상태부터 확인하라고 몰아붙여, 해윤의 손을 구조보다 업무 쪽으로 다시 잡아당긴다. 그 사이 철문 밖의 서문자는 우비 자락을 틈으로 밀어 넣어 소녀 쪽으로 내밀다가도 곧 쇠망치로 구급차 유리와 문턱 가까운 들것 바퀴를 내리쳐, 소녀가 적재칸 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하게 막는다. 서해윤은 바퀴가 박힌 채 덜컹거리는 들것을 억지로 비틀며, 서문자의 망치질과 배소정의 지시 사이에서 직접 소녀를 몸으로 빼내기로 방향을 바꾼다.
영향이 장면은 바깥의 도움처럼 보이던 두 어른이 각자 다른 이유로 서해윤의 탈출을 늦춘다는 사실을 물리적으로 드러낸다. 배소정은 기록과 책임을 피하려고 구조의 순서를 흐리고, 서문자는 살리겠다는 말과 붙들어 두겠다는 행동을 한 프레임 안에 겹쳐 놓는다. 그 결과 서해윤의 목표는 들것을 옮기는 일에서 소녀를 들것에서 떼어 자기 팔로 직접 꺼내는 일로 더 거칠고 개인적인 형태로 바뀐다. 다음 장면에서 손바닥을 다치면서도 결국 소녀를 빗속으로 끌어내는 결단의 바로 직전까지 이야기를 밀어 올린다.

서해윤이 꺼진 구급차 뒷문을 어깨로 더 밀어 벌리며 들것 손잡이를 잡아당기자, 민트색이 죽은 적재칸 안에서 바퀴가 바닥 홈에 걸려 짧고 날카로운 덜컹 소리를 냈다. 반쯤 열린 문틈으로 붉은 경광 반사가 젖은 버클 위를 훑고 지나가고, 소녀 서해윤은 들것 끈에 쓸린 손으로 해윤 소매를 붙든 채 몸을 반쯤 일으킨다. 서해윤은 휴대전화를 턱과 어깨 사이에 눌러 끼운 채 바깥을 향해 소리친다. “문부터 열어. 신고를 하든가.” 은성견인 새벽 사무실의 배소정은 지직거리는 통화 너머로 숨을 고른 뒤 더 낮은 목소리로 받는다. “차량 번호 불러요, 서해윤 씨. 사람 있으면 더 건드리면 안 돼요.”

그 말이 끝나기 전에 철문 밖에서 쇠망치가 구급차 옆유리를 한 번 쾅 치고, 바로 다음 타격이 문턱 가까이 나온 들것 바퀴 축을 찍어 박았다. 서문자의 우비 소매가 철문 틈으로 먼저 밀려 들어와 소녀 무릎을 덮쳤다가, 같은 틈에서 망치 머리가 다시 번쩍 들이밀렸다. “그 애 먼저 부수면 끝나.” 쉰 목소리가 빗속에서 갈라졌고, 곧이어 “밖으로 내놔, 빨리”가 거의 같은 입에서 튀어나왔다. 들것이 비뚤어지며 한쪽으로 꺾이자 서해윤은 욕설을 삼키고 무릎으로 프레임을 받친 채 잠금 버튼을 다시 눌러 보지만, 아무 불도 들어오지 않는다.

서해윤은 결국 들것 손잡이를 놓고 소녀의 겨드랑이 밑으로 팔을 집어넣어 몸을 직접 끌어올린다. 접이식 의자 모서리에 눌어붙은 분홍 설탕이 소녀 손목에 다시 번지고, 문턱에 걸린 바퀴는 박힌 채 떨기만 한다. 바깥에서는 서문자의 망치가 철문을 다시 울리고, 통화 속 배소정은 아무 말 없이 숨소리만 남긴다. 서해윤이 이를 악물고 소녀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자, 적재칸 바닥에서 들것이 한 뼘 비틀려 돌아간다.

05· 새벽 3시 40분대, 첫 7분이 흐르는 직후

들것에서 빗속으로

들것에서 빗속으로
장소은하동산 구급차 뒷문 적재칸
시간새벽 3시 40분대, 첫 7분이 흐르는 직후
사건서해윤은 문턱에 걸린 들것을 더는 밀지 않고, 벨트를 뜯어 소녀 서해윤의 몸을 자기 팔로 끌어안아 구급차 밖으로 직접 빼내기로 한다. 철문 밖의 서문자는 우비를 틈으로 밀어 넣다가도 곧 쇠망치 머리로 들것 바퀴 축을 다시 찍어 적재칸 안쪽을 붙들고, 배소정은 통화 너머에서 사람보다 차량 키와 시동부터 확인하라고 몰아붙인다. 서해윤은 소녀의 허리 아래 한 팔을 넣고 다른 손으로 문짝을 버티며 몸을 비틀어 빠져나오고, 그 과정에서 손바닥을 문 모서리에 세게 찧어 손톱 하나가 들린다. 그래도 그녀는 소녀를 놓지 않은 채 적재칸에서 빗속 바닥으로 함께 떨어지듯 빠져나온다.
영향이 장면에서 서해윤의 목표는 완전히 바뀐다. 그녀는 더 이상 버려진 구급차를 견인할 기사로 남지 않고, 자기와 같은 얼굴의 아이를 자기 몸으로 옮기는 사람으로 넘어간다. 서문자의 위협은 단순한 방해가 아니라 끝내 안에 붙들리게 만드는 규칙의 손으로 보이기 시작하고, 배소정의 관제는 구조가 아니라 책임 회피의 계산임이 더 선명해진다. 무엇보다 소녀가 밖으로 나오자마자 정문이 아니라 회전목마 뒤편을 보며 “언니가 기다리기로 했다”고 말함으로써, 탈출의 방향은 바깥이 아니라 2009년의 남겨진 자리 쪽으로 틀어진다.

서해윤은 들것 옆 버클을 잡아당겨 끊어 버리고 소녀 서해윤의 젖은 등을 팔 안으로 끌어넣은 채, 민트색이 죽은 구급차 적재칸 문턱에서 몸을 옆으로 비틀어 빠져나가려 든다. 바닥 홈에 걸린 들것은 끝까지 덜컹거리며 따라오지 않았고, 철문 밖 서문자가 밀어 넣은 우비 자락이 한순간 소녀 무릎을 덮었다가 바로 다음 순간 쇠망치 머리가 바퀴 축을 찍어 금속음을 튀긴다. 휴대전화 스피커에서는 배소정이 “차 키부터 봐요, 해윤 씨, 시동만—” 하고 끊어 말하지만, 서해윤은 대꾸하지 않고 소녀의 허벅지를 더 높이 받쳐 든다. 소녀는 들것 끈에 쓸린 손으로 서해윤 작업복 목덜미를 붙잡고, 설탕 묻은 손목을 제 가슴 쪽으로 말아 숨을 짧게 삼킨다.

서해윤이 문짝을 버티던 오른손이 미끄러지며 날 선 모서리에 그대로 박힌다. 손바닥이 접히는 소리 뒤에 손톱 하나가 들리자 그녀 손에서 휴대전화가 바닥으로 떨어져 적재칸 턱에 부딪히고, 배소정의 목소리가 젖은 플라스틱 위에서 작게 찢어진다. 서문자가 철문 사이로 “하나만 빼!” 하고 쉰 소리를 던지는 사이, 서해윤은 이를 악물고 한 번 더 몸을 젖혀 소녀를 먼저 밖으로 내민다. 둘의 무게가 한꺼번에 쏠리며 구급차 뒷문 아래로 미끄러졌고, 젖은 아스팔트와 흙탕물이 튀어 서해윤 무릎과 소녀 운동화 끈을 한꺼번에 적신다.

비 속으로 나온 뒤에도 소녀는 달아나지 않는다. 서해윤이 피 섞인 손바닥으로 아이 어깨를 밀어 정문 쪽을 가리키려는 순간, 소녀는 우비도 받지 않은 채 회전목마 뒤편 서비스 통로 쪽을 먼저 본다. 붉은 경광 반사가 꺼진 구급차 문 안쪽 설탕 자국과 소녀 손목의 번진 입장권을 번갈아 핥고 지나간다. 소녀가 서해윤 소매를 더 세게 붙잡으며 말한다. “언니가 기다리기로 했어.” 그 말 끝에 회전목마 쪽에서 끊겼던 동요 한 소절이 다시 젖어 올라온다.

챕터 02

06· 새벽 3시 47분 무렵, 첫 7분이 아직 끝나기 전

멀어지는 정문

멀어지는 정문
장소은하동산 정문에서 동물 휴지통 광장으로 이어지는 젖은 길바닥
시간새벽 3시 47분 무렵, 첫 7분이 아직 끝나기 전
사건현재의 서해윤은 빗속으로 끌어낸 소녀 서해윤의 손목을 움켜쥔 채 정문 철문을 향해 뛰어가지만, 물에 번진 화살표들이 발밑에서 범퍼카장 쪽만 가리키고 철문은 아까보다 더 멀어진 것처럼 뒤로 물러난다. 소녀는 몇 걸음마다 회전목마 뒤편을 돌아보며 버티고, 서문자는 철문 밖에서 우비를 틈으로 밀어 넣다가도 망치로 바닥과 쇠살을 두드려 둘의 걸음을 흩트린다. 배소정은 통화로 정문 쪽만 보라고 재촉하지만, 서해윤이 실제로 뛰어 부딪친 방향은 자꾸 동물 휴지통 광장 쪽으로 꺾인다. 결국 서해윤은 정문으로 직선으로 나가는 걸 포기하지 않은 채, 소녀를 놓치지 않으려고 거의 끌다시피 하며 번진 화살표가 모이는 쪽으로 몸을 틀게 된다.
영향이 장면은 은하동산의 출구가 단순히 잠긴 것이 아니라, 두 해윤을 함께 데리고 나가려는 순간 실제로 위치와 방향을 바꾼다는 사실을 몸으로 입증한다. 서문자는 여전히 위협적이지만, 그녀가 망치질과 경고로 알려 주는 정보 역시 무시할 수 없는 길 안내로 바뀌기 시작한다. 서해윤은 정문만 향하면 산다는 바깥의 상식을 붙들고 있지만, 소녀가 기억하는 2009년의 길과 현재의 길이 충돌하면서 탈출은 더 좁은 선택의 문제로 바뀐다. 다음 장면에서 서문자의 모순된 개입이 더 직접적인 협박이자 안내가 될 발판을 만든다.

서해윤이 소녀 서해윤의 끈적한 손목을 잡아채 정문 쪽으로 달려 나간다. 구급차 뒷문 적재칸의 민트빛이 등 뒤에서 꺼진 채 남아 있고, 젖은 길바닥에는 축제 안내 화살표의 빨강과 파랑이 번져 범퍼카장 쪽으로만 길게 흘러 있다. 소녀는 두 번이나 발을 버티며 뒤를 돌아봤고, 그때마다 흰 운동화 밑창이 진흙 위에서 미끄러져 얇은 자국을 남긴다. 서해윤은 아이 허리를 당겨 세우며 철문을 똑바로 본 채 간다. 그런데 몇 걸음 더 내디딘 뒤에도 철문은 가까워지지 않고, 오히려 토끼와 곰 모양 휴지통들이 있는 광장이 시야 한복판으로 밀려든다.

철문 밖의 서문자가 우비 자락을 좁은 틈으로 밀어 넣어 소녀 어깨를 덮치듯 걸쳐 준다. 바로 다음 순간 그녀는 쇠망치로 철문 살과 바닥을 번갈아 내리쳐, 물웅덩이 위로 튄 흙탕물이 서해윤 종아리에 묻는다. “하나만 데리고 가!” 서문자의 쉰 목소리가 빗속에서 갈라지고, 배소정은 전화 너머로 더 낮게 쏜다. “정문만 봐요, 딴 데로 빠지지 말고.” 서해윤은 욕설을 씹으며 정문 쪽으로 몸을 틀어 보지만, 소녀가 그 순간 회전목마 뒤편을 향해 팔을 뻗어 버려 둘의 중심이 함께 무너진다. 서해윤은 넘어진 채로도 손을 놓지 않고, 젖은 아스팔트 위를 미끄러져 코끼리 모양 휴지통 앞까지 끌려간다.

멈춰 선 자리에선 코끼리 배 밑 검은 흙이 유난히 두껍게 엉겨 있고, 물에 번진 화살표 끝들이 마치 거기로 모인 것처럼 발치에서 끊겨 있다. 소녀는 숨을 짧게 몰아쉬며 손목의 설탕 자국부터 문지르다가, 서해윤 소매를 다시 붙잡고 회전목마 뒤를 본다. 철문은 여전히 열리지 않은 채 조금 전보다 더 멀리, 빗줄기 너머에 작게 걸려 있다.

07· 새벽 3시 40분대, 첫 7분이 다시 흐르는 직후

우비와 망치

우비와 망치
장소은하동산 정문 앞에서 동물 휴지통 광장으로 꺾이는 젖은 길바닥
시간새벽 3시 40분대, 첫 7분이 다시 흐르는 직후
사건서문자는 철문 틈으로 우비를 밀어 넣어 소녀 서해윤의 어깨를 덮어 주고, 곧바로 같은 틈으로 쇠망치 머리를 들이밀어 젖은 바닥과 자물쇠를 내리친다. 현재의 서해윤은 소녀를 정문 쪽으로 끌고 가려다 그 모순된 손길에 멈춰 서고, 서문자가 “둘 다 끌면 길이 틀어진다”고 악을 쓰자 망치 자루를 붙잡아 막는다. 그 몸싸움 사이에 배소정의 통화가 다시 끼어들어 방향을 재촉하고, 소녀는 우비 안에서 떨면서도 회전목마 뒤편만 본다. 해윤이 서문자를 적으로 밀어내려 할수록, 노파가 아는 길과 규칙을 더는 무시할 수 없게 된다.
영향이 장면에서 서문자는 단순한 위협자가 아니라, 부수는 손과 덮어 주는 손을 함께 가진 안내자로 자리 잡는다. 현재의 서해윤은 정문으로 곧장 가는 선택이 더 이상 확실한 탈출이 아니라는 사실을 몸으로 받아들인다. 동시에 배소정의 바깥 안내는 도움이 아니라 시간을 끄는 압박으로 더 선명해지고, 소녀의 침묵은 단순한 공포가 아니라 어떤 순서를 숨기는 행동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이후 해윤이 동물 휴지통 광장 쪽으로 방향을 틀고, 강노을의 이름과 숨겨진 열쇠로 이어질 갈림길이 여기서 열린다.

서문자가 철문 틈으로 남색 우비를 쑤셔 넣어 소녀 서해윤의 젖은 어깨를 덮친다. 바로 다음 동작으로 그녀는 쇠망치 머리를 같은 틈에 비틀어 넣어 자물쇠 아래 바닥을 쾅 찍고, 나트륨등에 젖은 물이 두 해윤의 종아리로 얇게 튄다. 정문 앞 길바닥의 화살표는 비에 번져 범퍼카장 쪽으로만 퍼져 있었고, 토끼와 코끼리 휴지통이 있는 광장 쪽 어둠이 한 블록 옆 골목처럼 낮게 벌어져 있었다. 현재의 서해윤은 소녀 손목을 끌어 자기 뒤로 숨기며 철문 쪽으로 달려들고, 서문자의 망치 자루를 두 손으로 붙잡아 밀어낸다.

“하나만 데리고 가.” 서문자의 입에서 쉰 숨이 먼저 새고 말이 뒤따른다. 현재의 서해윤이 “입 다물고 문이나 열어” 하고 받자, 서문자는 자루를 놓지 않은 채 우비 끝을 더 안으로 밀어 소녀 목까지 덮는다. 휴대전화 스피커에서 배소정의 목소리가 끼어든다. “철문 말고 옆으로 빠져요, 거기 계속 서 있지 말고. 사진도 같이—” 서해윤은 전화기를 젖은 어깨로 눌러 올린 채 발로 망치 머리를 밀어내지만, 서문자가 이번에는 철문 살 사이로 손가락을 깊이 넣어 동물 휴지통 광장 쪽을 두 번 찍는다. “정문 붙들수록 멀어진다. 그 애는 안쪽 이름이야.”

소녀 서해윤은 우비 안에서 들것 끈에 쓸린 손으로 자기 설탕 묻은 손목을 문지르다가, 서문자가 가리킨 어둠 쪽을 보고 발을 멈춘다. 현재의 서해윤이 아이를 다시 정문 쪽으로 잡아당기는 순간, 망치 머리가 그녀 발등 앞 바닥을 한 번 더 내리쳐 길을 막고, 튄 검은 흙이 운동화 끈에 들러붙는다. 서문자는 철문에 이마를 거의 박은 채 숨을 몰아쉬면서도 우비 자락은 놓지 않는다. 젖은 플라스틱 짐승들이 서 있는 광장 쪽으로, 두 해윤의 몸이 결국 반걸음 밀린다.

08· 새벽 3시 40분대, 두 번째 7분이 다시 조여 오기 직전

이름이 돌아온 밤

이름이 돌아온 밤
장소동물 휴지통 광장으로 꺾이는 젖은 길바닥
시간새벽 3시 40분대, 두 번째 7분이 다시 조여 오기 직전
사건서해윤은 소녀 서해윤의 손목을 끌어 정문 쪽으로 밀다가, 배소정이 통화 너머에서 실수처럼 흘린 “강노을”이라는 이름에 그대로 멈춘다. 그 이름이 떨어지자 회전목마 쪽 스피커와 범퍼카장 천장 어딘가에서 갈라진 남자 안내방송이 다시 살아나고, 서해윤은 소녀를 거의 끌다시피 하며 동물 휴지통 광장 쪽으로 방향을 튼다. 서문자는 철문 틈에 몸을 걸친 채 우비를 더 밀어 넣다가도 망치로 바닥 화살표를 내리쳐 둘의 발을 멈추게 한다. 소녀는 그 목소리를 듣자 회전목마 뒤편이 아니라 코끼리 모양 휴지통 쪽으로 시선을 돌리고, 끝내 강노을이 열쇠를 거기 숨겼다고 털어놓는다.
영향이 장면은 강노을이 단순한 실종자가 아니라, 현재의 서해윤을 한때 붙들어 둔 목소리였음을 몸으로 되돌린다. 서해윤은 소녀가 왜 자꾸 같은 방향을 돌아봤는지 이해하지만, 동시에 그 기억이 길을 열기보다 더 깊은 자리로 끌고 간다는 것도 알게 된다. 소녀가 숨겨진 열쇠의 존재를 말하면서 탈출에는 구체적인 실마리가 생기지만, 어느 문부터 열어야 하는지는 끝내 밝히지 않아 불신과 의존이 함께 커진다. 서문자는 둘을 막는 사람에서, 부수면서도 다음 위치를 가리키는 위험한 안내자로 더 선명해진다.

배소정이 통화 너머에서 “그때 전기 보던 놈, 강노을… 아니, 됐고 지금 왼쪽 말고—” 하고 말을 잘못 내뱉는 순간, 서해윤은 소녀 손목을 잡아끌던 팔을 홱 멈춘다. 동물 휴지통 광장으로 꺾이는 젖은 길바닥 위에서 둘의 운동화가 동시에 미끄러지고, 물에 번진 화살표 끝은 정문이 아니라 검은 플라스틱 짐승들이 선 쪽으로 길게 늘어진다. 바로 다음 박자에 회전목마 쪽 스피커가 탁 하고 살아나더니, 남자 목소리가 잡음 사이로 또박또박 새어 나온다. “젖은 손으로 스위치를 만지지 마세요. 잠깐만 기다리면—” 서해윤은 그 문장 끝이 나오기 전에 고개를 들고 숨을 삼킨 채, 빗물에 젖은 전선 타는 냄새가 섞인 그 목소리를 따라 몸을 돌린다.

서문자가 철문 틈으로 우비 자락을 더 깊이 밀어 소녀 어깨를 덮쳐 주다가, 같은 손목의 반동으로 쇠망치를 들어 바닥 화살표 위를 쾅 내리친다. 깨진 페인트 물이 튀고, 소녀 서해윤은 어깨를 접은 채 코끼리 모양 휴지통 쪽을 본다. 서해윤이 아이 팔을 세게 붙잡아 자기 쪽으로 돌리며 묻는다. “누구였는지 알아?” 소녀는 손목의 설탕 자국을 한 번 문지르다 말고, 갈라진 방송 소리에 맞춰 입술을 떼어 낸다. “그 아저씨가… 코끼리 배 밑에 숨겼어.” 서문자의 망치 머리가 다시 젖은 바닥을 긁으며 움직이고, 그녀는 철문에 몸이 낀 채 쉰 목소리로 소리친다. “열쇠만 찾고 곧장 가지 마. 하나만 데리고 가.”

서해윤은 대꾸 대신 소녀를 앞세워 광장 쪽으로 밀어 넣고, 둥글게 선 토끼와 곰과 코끼리 휴지통들 사이로 발을 옮긴다. 나트륨등 아래 코끼리 배 밑의 검은 흙은 다른 자리보다 더 두껍게 젖어 내려앉아 있고, 소녀는 그 앞에서 무릎을 꺾었다가도 입을 다문 채 서해윤 소매만 붙든다. 통화기 너머 배소정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다가, 뒤늦게 “지금 어디로 가요, 서해윤 씨” 하고 낮게 부른다. 서해윤은 휴대전화를 쥔 피 묻은 손으로 진흙 위를 짚고 내려앉고, 코끼리의 벌어진 검은 투입구가 두 사람 머리 위로 빗물을 토해 낸다.

09· 새벽 3시 5분대, 두 번째 7분이 다시 조여 오는 직전

검은 입의 짐승들

검은 입의 짐승들
장소동물 휴지통 광장
시간새벽 3시 5분대, 두 번째 7분이 다시 조여 오는 직전
사건현재의 서해윤은 소녀 서해윤을 끌고 동물 휴지통 광장 한가운데로 들어가 코끼리 모양 휴지통 배 밑에 들러붙은 검은 흙과 낙엽을 맨손으로 헤집는다. 소녀는 강노을이 뭔가를 그 아래 숨기는 걸 봤다는 말 직전까지 갔다가 입을 다물고, 대신 손목의 설탕 자국을 문지르며 서해윤 소매를 붙든다. 철문 쪽의 서문자는 우비를 철문 틈에 걸친 채 안으로 몸을 더 밀어 넣으려다, 망치로 철문과 바닥을 번갈아 쳐 광장까지 늦은 울림을 보내며 둘을 재촉한다. 통화 너머 배소정의 목소리는 정문으로 돌아오라고 몰아붙이지만, 서해윤은 전화를 젖은 바닥에 떨어뜨린 채 손을 더 깊이 집어넣는다.
영향이 장면에서 탈출의 방향은 정문에서 코끼리 휴지통 아래로 완전히 꺾인다. 서해윤은 강노을의 이름에 반응하는 소녀의 몸을 직접 붙잡고 보면서, 그 이름이 단순한 과거의 인물이 아니라 지금 길을 틀어 쥔 열쇠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서문자는 여전히 위협적이지만, 망치질의 위치와 타이밍으로 둘을 막는 대신 한 지점을 가리키는 위험한 안내자로 더 선명해진다. 장면의 끝에서 소녀가 숨겨진 열쇠의 존재를 입 밖에 내는 순간, 살아날 실마리가 생기지만 동시에 무엇을 먼저 열어야 하는지는 더 깊이 가려져 다음 국면의 함정이 준비된다.

현재의 서해윤이 소녀 서해윤의 팔을 끌어당긴 채 동물 휴지통 광장 한복판에 무릎을 박는다. 토끼와 곰과 코끼리 모양의 플라스틱 몸통들이 허리까지 진흙에 잠겨 둥글게 서 있고, 나트륨등 밑에서 그 입 벌린 검은 구멍들이 젖은 바닥 웅덩이마다 뒤집혀 번뜩인다. 서해윤은 코끼리 배 밑에 엉겨 붙은 낙엽 더미에 다친 손을 바로 찔러 넣고, 젖은 흙을 한 움큼씩 걷어낸다. 옆에서 소녀는 어깨를 접은 채 손목의 분홍 설탕을 미친 듯 문지르다가, 회전목마 뒤편을 한 번 보고는 다시 서해윤 점퍼 소매를 움켜쥔다. 바닥에 떨어진 휴대전화 스피커에서 배소정이 “거기서 나오라고 했잖아요, 정문 쪽으로 돌려요” 하고 낮게 쏘지만, 서해윤은 고개도 들지 않는다.

철문 쪽에서 서문자가 우비 자락을 살 사이에 끼운 채 몸을 비틀어 더 들어오려다, 끝내 망치 머리로 철문 하단을 쾅 내리친다. 늦게 번져 온 금속 울림이 휴지통 속 빈 배를 차례로 때리고 돌아오자 소녀가 움찔하며 입을 연다. “그 아저씨가... 여기다 숨겼어.” 서해윤이 검은 흙 속에서 손을 빼지도 못한 채 고개를 들자, 소녀는 곧바로 말을 삼키고 입술을 깨문다. 서문자가 이번에는 망치 자루 끝으로 바닥을 찍으며 쉰 목소리를 던진다. “코끼리 밑이다. 빨리 꺼내, 둘 다 거기 서 있지 말고.” 그 말과 거의 겹쳐 서해윤 손등이 유리 파편에 긁히고, 흙탕물 위로 가느다란 피가 번진다.

서해윤은 이를 악물고 더 안쪽을 헤집어 녹슨 금속이 서로 부딪히는 짧은 소리를 끌어낸다. 소녀가 그 소리를 듣자마자 서해윤 팔목을 더 세게 붙잡으며, 비에 젖은 목으로 겨우 속삭인다. “강노을이 숨긴 열쇠야.” 다음 말은 나오지 않는다. 코끼리 배 밑 진흙에서 반쯤 드러난 열쇠 꾸러미가 검은 입 안쪽에서 물고기 뼈처럼 번들거리고, 철문 너머 서문자의 망치가 다시 한 번 같은 자리를 울린다.

10· 새벽 3시 50분 무렵, 두 번째 7분이 다시 닫히기 전

말한 것과 말하지 않은 것

말한 것과 말하지 않은 것
장소동물 휴지통 광장
시간새벽 3시 50분 무렵, 두 번째 7분이 다시 닫히기 전
사건현재의 서해윤은 코끼리 모양 휴지통 배 밑 진흙에 손을 끝까지 밀어 넣어 숨겨진 열쇠 꾸러미를 끄집어낸다. 손등이 유리 파편에 긁혀 피가 번지는 사이, 소녀 서해윤은 강노을이 그 열쇠를 숨기는 걸 봤다고 털어놓는다. 철문에 몸이 걸린 채 버티던 서문자는 망치 자루로 바닥을 쳐 둘을 재촉하면서도, 정작 코끼리 쪽을 가리키는 손을 거두지 못한다. 현재의 서해윤이 어느 문 열쇠냐고 다그치자 소녀는 입술을 떼다 말고 침묵하고, 열쇠만 젖은 손바닥 위에 올려 둔다.
영향이 장면으로 탈출은 막연한 도주가 아니라 실제 열쇠를 쥔 선택의 문제로 바뀐다. 강노을이 현재의 서해윤 기억 속 다정한 목소리의 주인이었다는 사실이 소녀의 입을 통해 굳어지고, 서문자의 모순된 행동도 둘을 막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순서를 경고하는 쪽으로 선명해진다. 그러나 소녀가 가장 중요한 정보인 “어느 문부터 먼저 열어야 하는가”를 숨기면서, 얻은 실마리는 곧바로 함정이 된다. 다음 장면에서 현재의 서해윤은 맞는 열쇠를 쥐고도 틀린 문으로 먼저 달려갈 위험 속으로 밀려 들어간다.

현재의 서해윤이 코끼리 모양 휴지통 배 밑에 팔을 어깨 가까이까지 밀어 넣고 검은 흙덩이를 거칠게 긁어낸다. 동물 휴지통 광장 바닥에는 나트륨등이 얇게 번져 있고, 코끼리 턱 밑으로 흘러내린 파란 페인트 자국 사이에서 젖은 낙엽이 그녀 손목에 달라붙는다. 소녀 서해윤은 우비 끝이 한쪽 어깨에만 걸린 채 쪼그려 앉아 손목의 설탕 자국을 문지르다가, 서해윤 소매가 더 깊이 들어가는 순간 갑자기 그 팔을 붙잡는다. “그 아저씨가 숨겼어.” 소녀의 말이 떨어지자 서해윤 손끝에 차갑고 각진 금속이 걸리고, 그녀는 이를 악물고 한 번에 잡아당긴다.

녹슨 열쇠 꾸러미가 진흙과 함께 튀어나오면서 손등이 바닥 유리 파편에 길게 그어진다. 서해윤이 피 섞인 빗물을 털어 내며 열쇠를 움켜쥐자, 철문 쪽의 서문자가 망치 자루 끝으로 젖은 바닥을 쾅 찍는다. “열쇠 찾았으면 곧장 가지 마.” 쉰 목소리가 플라스틱 짐승들 속 빈 몸통을 울리고, 바로 다음 박자에 그녀는 같은 손으로 다시 코끼리 쪽을 두 번 가리킨다. 현재의 서해윤은 무릎을 세운 채 소녀 얼굴을 돌려세운다. “어디 거야. 방송실이야, 철문이야?” 소녀는 입을 벌렸다가 닫고, 들것 끈에 쓸린 손으로 열쇠 하나를 가리키려다 손가락을 접어 버린다.

회전목마 쪽 스피커에서 갈라진 잡음이 다시 끓어오르자 서해윤은 열쇠 꾸러미를 움켜쥔 손으로 바닥을 짚고 일어선다. 소녀 서해윤은 끝내 문 이름을 말하지 않은 채, 진흙 묻은 열쇠들을 서해윤 손바닥 위로 더 밀어 올리고 소매를 놓지 않는다. 철문에 매달린 서문자의 우비 자락이 빗물에 무겁게 처진 채 한 번 흔들리고, 코끼리의 검은 투입구 안으로 망치질의 늦은 울림이 들어가 박힌다.

챕터 03

11· 새벽 3시 50분 무렵, 두 번째 7분이 돌아오기 직전

이름을 잘못 부른 관제실

이름을 잘못 부른 관제실
장소동물 휴지통 광장
시간새벽 3시 50분 무렵, 두 번째 7분이 돌아오기 직전
사건서해윤은 코끼리 모양 휴지통 쪽으로 소녀를 끌어당기던 손을 멈춘 채, 휴대전화를 젖은 귀와 어깨 사이에 더 세게 끼운다. 배소정이 통화 너머에서 강노을의 이름과 2009년 정전 소문을 잘못 흘리는 순간, 범퍼카장 쪽 천장 스피커에서 그의 낡은 안내방송이 되살아난다. 그 목소리에 소녀가 즉시 코끼리 배 밑을 향해 몸을 틀고, 서해윤은 아이를 놓치지 않으려 허리를 감아 광장 안으로 밀고 들어간다. 철문 쪽 서문자는 우비 자락을 틈으로 더 밀어 넣다가도 망치로 바닥 화살표를 내리쳐 정문이 아니라 안쪽으로 가는 길을 강제로 좁힌다.
영향배소정의 실수는 숨어 있던 이름을 현재 시각으로 끌어올려, 강노을을 단순한 과거의 실종자가 아니라 지금 길을 움직이는 목소리로 되살린다. 서해윤은 그 방송을 듣는 소녀의 반응으로 열쇠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확신을 얻고, 정문을 고집하던 몸의 방향을 처음으로 동물 휴지통 광장 안쪽으로 꺾는다. 동시에 서문자의 방해는 단순한 공격이 아니라 특정 지점을 가리키는 위험한 안내가 되고, 배소정의 목소리는 더 이상 바깥의 구조가 아니라 늦게 도착한 촉발 장치로 남는다. 이 장면으로 탈출은 막연한 도주가 아니라 코끼리 배 밑에 숨겨진 무언가를 먼저 손에 넣어야 하는 국면으로 넘어간다.

서해윤이 소녀의 젖은 팔을 자기 옆구리로 끌어당긴 채 동물 휴지통 광장으로 몸을 틀자, 허리까지 진흙에 박힌 코끼리와 곰과 토끼의 플라스틱 몸통이 나트륨등 아래 번들거리며 한꺼번에 프레임 안으로 밀려든다. 그녀는 미끄러지는 운동화로 물을 가르며 두 걸음 더 나아가고, 귀와 어깨 사이에 눌린 휴대전화에서 배소정이 숨을 한 번 놓친 뒤 말한다. “그때 전기 보던 사람, 강노을… 아니, 됐고 지금 왼쪽 말고—” 바로 그 뒤를 천장 스피커의 갈라진 남자 목소리가 잘라먹는다. “젖은 손으로 스위치를 만지지 마세요. 잠깐만 기다리면—” 소녀는 그 문장 중간에서 어깨를 접고 코끼리 배 밑 검은 흙 쪽으로 발을 박아 넣는다.

서해윤은 아이가 꺾어 든 방향을 따라가며 허리를 붙잡아 세우지만, 소녀는 손목의 설탕 자국을 한 번 문지른 뒤 검은 흙 아래를 턱으로 가리킨다. 철문 쪽에서는 서문자가 우비 자락을 틈으로 밀어 넣어 소녀 등 뒤에 걸치고, 바로 다음 동작으로 쇠망치를 바닥 화살표 위에 쾅 내려찍는다. 번진 빨강과 파랑이 흙탕물과 함께 튀어 서해윤 종아리에 붙는다. “그 이름 듣고도 정문 보냐.” 서문자의 쉰 소리가 비를 뚫고 들어오고, 배소정은 통화 너머에서 급히 말을 덧댄다. “지금 어디로 가요, 서해윤 씨. 거긴 아니에요.” 서해윤은 대답 대신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처박고 두 손으로 소녀를 더 안쪽으로 밀어 넣는다.

코끼리 배 밑은 낙엽과 검은 흙이 유난히 두껍게 엉겨 내려앉아 있었고, 소녀는 거기 앞에서 거의 무릎을 꺾은 채 멈춰 선다. 서해윤도 같이 낮아지자 코끼리의 벌어진 투입구에서 빗물이 한 줄기 떨어져 둘 사이를 가른다. 뒤에서는 서문자의 망치질이 한 박자 늦게 플라스틱 몸통 안을 울리고, 앞에서는 강노을의 또박또박한 방송이 잡음 속에서 같은 말을 반복한다. 서해윤은 피가 번진 손으로 진흙을 짚으며 코끼리 배 밑으로 몸을 들이민다.

12· 새벽 3시 40분대, 강노을의 방송이 되살아난 직후

코끼리 배 밑의 열쇠

코끼리 배 밑의 열쇠
장소동물 휴지통 광장
시간새벽 3시 40분대, 강노을의 방송이 되살아난 직후
사건서해윤은 코끼리 모양 휴지통 배 밑으로 손을 깊이 밀어 넣어 진흙과 낙엽 속에서 녹슨 열쇠 꾸러미를 끌어낸다. 그 과정에서 유리 파편에 손등이 긁혀 피가 물에 번지고, 소녀 서해윤은 그 열쇠가 강노을이 숨긴 것이라고 입 밖에 낸다. 바로 그때 철문을 넘어온 서문자가 광장 안으로 들어와 소녀를 자기 쪽으로 잡아당기고, 현재의 서해윤은 젖은 바닥 위에서 노파와 몸으로 부딪치며 아이를 놓치지 않으려 버틴다.
영향이 장면으로 탈출은 막연한 도주가 아니라 실제 열쇠를 손에 쥔 선택으로 바뀐다. 소녀가 강노을과 열쇠를 직접 연결해 말하면서, 방송 속 목소리와 2009년의 숨겨진 순서가 더 구체적인 형태를 얻는다. 동시에 서문자가 마침내 철문 밖이 아니라 안쪽 프레임 안으로 들어오면서, 그녀는 멀리서 소리치는 위협이 아니라 둘 중 하나를 빼앗아 갈 수 있는 현실적인 힘이 된다. 서해윤은 열쇠를 얻었지만, 누구를 믿고 어느 문으로 달릴지 더 급하고 더 위험한 선택 앞에 밀린다.

서해윤이 코끼리 모양 휴지통 배 밑의 검은 흙을 팔꿈치까지 파고들며 한 움큼째 끌어내자, 동물 휴지통 광장의 젖은 바닥에 낙엽과 진흙이 튀고 코끼리 턱 밑으로 번진 파란 페인트가 빗물 따라 흔들린다. 소녀 서해윤은 우비 끝을 목까지 끌어올린 채 옆에 쪼그려 앉아 서해윤 소매를 붙잡고, 철문 쪽에서는 서문자의 망치질이 한 박자 늦게 플라스틱 짐승들 속 빈 배를 울린다. 서해윤 손등이 갑자기 유리 파편에 긁히자 붉은 선 하나가 흙탕물 위로 번지고, 그 바로 아래에서 작은 쇳소리가 걸린다. 그녀가 이를 악물고 손목을 비틀어 잡아당기자 녹이 덕지덕지 붙은 열쇠 꾸러미가 진흙째 딸려 나온다.

소녀 서해윤이 그 금속 덩어리를 보자마자 숨을 짧게 들이켜고 말한다. “강노을이 숨긴 거야.” 휴대전화 스피커 너머의 배소정이 “뭘 찾았어요, 지금 당장 거기서—” 하고 다급하게 끼어드는 순간, 철문이 금속을 긁는 소리와 함께 크게 흔들리고 서문자가 우비를 질질 끌며 안으로 넘어온다. 그녀는 망치를 지팡이처럼 짚고 물을 가르며 곧장 소녀 팔을 낚아채고, 서해윤은 열쇠를 쥔 손을 가슴 쪽으로 끌어당긴 채 다른 팔로 아이 허리를 감아 뒤로 물러선다. “그 애 내놔. 하나만 빼야 문이 안 틀어진다.” 서문자의 젖은 손가락이 소녀 손목의 설탕 자국까지 미끄러져 올라오자, 소녀가 비명을 삼키며 현재의 서해윤 점퍼를 더 세게 움켜쥔다. 서해윤은 노파 어깨를 밀쳐 내지만 발이 미끄러져 셋의 무릎이 얕은 물 위에서 한꺼번에 꺾이고, 망치 머리가 옆으로 튀어 곰 모양 휴지통 몸통을 쾅 치며 돌아간다.

서해윤은 넘어진 자세 그대로 열쇠 꾸러미를 주먹 안에 감추고 소녀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겨 일으킨다. 서문자는 한쪽 무릎을 진흙에 박은 채 숨을 몰아쉬면서도 다시 손을 뻗지만, 이번에는 망치 대신 우비 자락이 먼저 소녀 쪽으로 끌려간다. 나트륨등 아래에서 녹슨 열쇠들이 서해윤의 피와 빗물에 젖어 손가락 사이로 무겁게 흔들리고, 코끼리의 검은 투입구는 방금 비워 낸 흙구덩이를 입 벌린 채 드러낸다.

13· 새벽 4시 직전, 두 번째 7분이 다시 켜지는 순간

부푼 문짝

부푼 문짝
장소은하동산 방송실 앞, 동물 휴지통 광장에서 이어지는 젖은 길
시간새벽 4시 직전, 두 번째 7분이 다시 켜지는 순간
사건서해윤은 녹슨 열쇠 꾸러미를 움켜쥔 채 소녀 서해윤을 끌고 강노을의 방송이 새어 나오는 방송실로 달려간다. 철문을 넘어 안으로 들어온 서문자가 얕은 물을 가르며 따라붙어 둘 중 하나만 데리고 가라고 소리치고, 해윤은 그녀를 어깨로 밀쳐 길을 연다. 해윤은 맞는 것처럼 보이는 열쇠를 방송실 문에 몇 번이나 바꿔 꽂지만, 비를 먹어 불어난 문짝은 자물쇠가 풀린 뒤에도 꿈쩍하지 않는다. 그 사이 회전목마 스피커의 동요가 다시 켜지고 물높이가 더 차오르며, 소녀는 끝내 배전반을 먼저 말하지 않은 채 해윤 소매만 붙든다.
영향이 장면은 열쇠를 손에 넣는 것만으로는 탈출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물리적으로 확인시킨다. 강노을의 목소리가 가리키는 문은 출구가 아니라 사람을 잘못된 순서로 몰아가는 미끼처럼 작동하고, 서해윤은 처음으로 소녀의 침묵 자체가 위험이라는 걸 몸으로 겪는다. 동시에 서문자는 방해자이면서도 틀린 문 앞에서 시간을 잃고 있는 둘을 목격하는 증인이 되어, 다음 장면의 고백과 개입을 준비한다. 장면 끝에서 문은 열리지 않고 물만 차오르기 때문에, 이야기는 문을 여는 문제에서 무엇을 먼저 열어야 하는지의 문제로 넘어간다.

서해윤이 소녀 서해윤의 손목을 잡아채고 녹슨 열쇠 꾸러미를 앞세운 채 방송실 문으로 몸을 들이받는다. 동물 휴지통 광장을 벗어난 젖은 길 끝, 회전목마 뒤편 벽에 붙은 문짝은 비를 먹어 가장자리가 검게 부풀어 있었고, 위에서 번진 나트륨등이 물 위에 눕듯 깔려 세 사람 종아리를 누렇게 잘랐다. 서문자는 뒤에서 우비 자락을 끌며 따라와 망치 자루로 바닥을 짚다가, 해윤이 문고리를 잡는 순간 소녀 팔을 자기 쪽으로 홱 당긴다. 서해윤은 열쇠를 입에 물고 몸을 틀어 서문자의 손등을 쳐내고, 가장 긴 열쇠를 자물쇠에 꽂아 억지로 돌린다. 안에서 분명 잠금 풀리는 금속음이 짧게 나는데도 문은 한 치도 안 벌어진다.

“열렸잖아, 밀어.” 배소정의 목소리가 젖은 휴대전화 스피커에서 떨리듯 새고, 서해윤은 어깨로 문을 한 번 더 세게 박는다. 문짝 아래 부푼 나무가 바닥에 갈리며 젖은 섬유 뜯기는 소리만 내고 버티고, 소녀 서해윤은 그 옆에서 설탕 묻은 손목을 문지르다 말고 해윤 소매를 붙잡는다. 서문자가 이번에는 망치 머리를 문틈에 비스듬히 밀어 넣어 지렛대처럼 비틀지만, 벌어진 것은 손가락 두 마디도 안 되는 틈뿐이고 그 사이로 오래된 카세트 데크의 붉은 점 하나만 깜빡인다. 곧 회전목마 쪽 스피커가 갈라진 숨을 한 번 토하더니 동요 첫 소절을 다시 올린다. 세 사람 발치의 물이 그 박자에 맞춰 종아리 쪽으로 차오르고, 서문자는 이를 드러낸 채 “내가 뭐랬어, 먼저가 따로 있어” 하고 쉰 목을 찢는다.

서해윤이 마지막 열쇠까지 바꿔 끼우다 손을 멈추자, 소녀 서해윤이 들것 끈에 쓸린 손으로 그녀 젖은 소매를 더 깊이 움켜쥔다. 아이는 입을 벌렸다가 바로 다물고, 열리지 않는 문 대신 회전목마 뒤 어둠 쪽을 한 번 본다. 문 아래로 밀려나온 검은 물이 해윤 운동화 끈을 덮고, 서문자의 망치 끝이 천천히 바닥을 찍으며 둘 사이 빈곳을 가리킨다.

14· 새벽 4시 무렵, 동요의 다음 7분이 막 돌아온 직후

말하지 않은 곳

말하지 않은 곳
장소은하동산 방송실 앞에서 회전목마 뒤 서비스 통로 입구까지
시간새벽 4시 무렵, 동요의 다음 7분이 막 돌아온 직후
사건서해윤은 비를 먹어 부풀어 오른 방송실 문짝을 열쇠꾸러미로 바꿔 끼워 가며 억지로 따려다, 끝내 문고리를 발로 차고 소녀 서해윤의 어깨를 돌려 세워 어디를 먼저 열어야 했는지 다그친다. 종아리까지 찬 물속에서 소녀는 끝까지 버티다가, 들것 끈에 쓸린 손으로 서해윤 소매를 붙잡고 배전반을 먼저 말하면 언니가 자기만 남겨 두고 그쪽으로 갈까 봐 무서웠다고 털어놓는다. 그 말을 들은 서문자는 둘을 향해 들고 있던 쇠망치를 천천히 내리고, 범퍼카장 가장자리 배수 덮개를 향해 걸어가 망치 자루와 장화 끝으로 덮개를 걷어차 숨겨진 서비스 통로 입구를 드러낸다.
영향이 장면에서 소녀의 침묵은 단순한 방해가 아니라 버려질 공포가 만든 선택으로 형태를 얻는다. 서해윤은 틀린 문 앞에서 시간을 잃은 분노를 소녀에게 돌리지 않고, 아이를 놓지 않은 채 길을 다시 고르는 쪽으로 움직인다. 서문자 역시 막기만 하던 사람에서, 조건부로나마 안쪽 길을 열어 주는 사람으로 위치가 바뀐다. 그 결과 이야기는 방송실을 여는 문제에서 배전반 뒤의 순서를 바로잡는 문제로 넘어간다.

서해윤이 방송실 문고리를 붙잡은 채 젖은 발바닥으로 문짝을 걷어차자, 비를 먹어 부푼 나무가 한 번 둔하게 울리고 문틀 사이로 갈색 물이 주르르 쏟아진다. 회전목마 뒤편 서비스 통로 벽의 끊어진 전구가 청록빛으로 떨고, 그 아래서 소녀 서해윤은 한쪽 어깨에 걸친 우비를 끌어안은 채 뒤로 물러서다가 미끄러져 손바닥을 바닥에 짚는다. 서문자는 몇 걸음 떨어진 물 위에 망치 머리를 담근 채 서 있고, 휴대전화 스피커에서는 배소정이 “거기서 안 열리면 다른 문부터—” 하다가 물소리에 씹혀 끊긴다. 서해윤은 대꾸도 안 하고 소녀를 팔목째 끌어 세운다. “어디였어. 먼저 가야 하는 데.” 열쇠꾸러미가 그녀 손안에서 짧게 부딪히고, 소녀는 설탕 묻은 손목을 한 번 문지르다 말고 고개를 숙인다.

동요의 다음 소절이 스피커에서 갈라져 나오자 서해윤이 소녀 소매를 놓고 이번엔 양어깨를 붙잡아 자기 쪽으로 돌린다. 소녀는 들것 끈에 벗겨진 손등으로 서해윤 점퍼 소매를 덥석 잡고 놓지 않은 채, 거의 숨을 삼키듯 말한다. “배전반… 먼저 말하면, 언니가 나 두고 갈까 봐.” 그 한마디 뒤에 서문자의 얼굴이 젖은 우비 모자 밑에서 움찔 굳고, 배소정은 전화 너머에서 이름을 부르려다 끝내 입을 다문다. 서해윤은 당장 화를 내듯 숨을 들이켰다가, 대신 소녀 손을 자기 손목 쪽으로 밀어 올려 더 단단히 붙잡게 한다. 그리고 몸을 돌려 방송실 문에서 물러난다.

서문자가 갑자기 쇠망치를 바닥에 눕혀 끌고 가더니 범퍼카장 가장자리의 쇠 배수 덮개 틈에 자루 끝을 박아 넣는다. 그녀가 장화 뒤꿈치로 한 번, 두 번 차자 덮개가 비틀리며 들리고, 아래에서 낮고 검은 통로 입구가 입을 벌린다. 청록빛 전구 떨림이 그 안쪽 스테인리스 손잡이들에 짧게 번쩍이고, 물은 새 길을 찾은 것처럼 덮개 아래로 먼저 빨려 들어간다. 서해윤은 소녀를 자기 옆구리로 끌어 붙인 채 그 구멍 앞으로 다가가고, 서문자는 젖은 숨을 몰아쉬며 망치 자루로 어둠 속을 한 번 가리킨다. “둘 다 들이밀 거면, 이번엔 늦지 마.”

15· 새벽 4시 무렵, 동요의 다음 7분이 막 돌아온 직후

배수 덮개 아래

배수 덮개 아래
장소범퍼카장 가장자리에서 열리는 회전목마 뒤 서비스 통로 입구
시간새벽 4시 무렵, 동요의 다음 7분이 막 돌아온 직후
사건서문자가 처음으로 쇠망치를 바닥에 내려놓고 범퍼카장 가장자리의 배수 덮개를 발뒤꿈치로 걷어차 숨겨진 통로 입구를 드러낸다. 현재의 서해윤은 방송실 문 앞에서 울음을 삼키는 소녀 서해윤의 손목에 견인용 안전끈을 묶어 자기 손에 감고, 둘을 떼어 놓지 않은 채 서문자가 연 구멍 앞으로 밀고 간다. 서문자는 둘 중 하나만 데리고 들어가라고 마지막으로 경고하지만, 서해윤은 대꾸 대신 소녀를 먼저 통로 아래로 밀어 넣고 자기도 몸을 낮춰 따라 들어간다. 결국 셋은 같은 좁은 입구로 한꺼번에 들어서며, 탈출의 방향을 정문이 아니라 배전반 뒤쪽으로 완전히 틀어 버린다.
영향소녀 서해윤이 배전반을 숨긴 이유가 버려질 공포였다는 사실이 행동으로 받아들여지면서, 현재의 서해윤은 아이를 다그치는 대신 묶어 두고 함께 가는 쪽을 선택한다. 서문자도 막기만 하던 자리에서 물리적으로 길을 여는 사람으로 바뀌지만, 동시에 하나를 포기하라는 규칙을 다시 못 박아 다음 장의 압박을 남긴다. 이 장면으로 방송실은 틀린 문으로 확정되고, 이야기는 어떤 문을 여느냐보다 어떤 순서를 바로잡느냐의 국면으로 넘어간다.

서문자가 범퍼카장 가장자리 배수 덮개를 발로 걷어차자 녹슨 철판이 물 위에서 뒤집히며 검은 입을 벌리고, 얕은 물이 그 아래로 한꺼번에 빨려 들어갔다. 방송실 문 앞에 등을 기대고 있던 소녀 서해윤이 움찔하자, 현재의 서해윤은 젖은 소매를 붙든 그 손을 놓지 않은 채 안전끈을 손목에 감아 매듭부터 당겨 조였다. 낮은 나트륨등 아래 서문자는 망치를 내려둔 손으로 통로 쪽을 가리키면서도, 다른 손은 아직 소녀 쪽으로 반쯤 뻗어 있었다. “둘 다 끌고 들어가면 길이 또 비튼다.” 쉰 목소리가 물 위를 짧게 긁었다. 서해윤은 고개도 들지 않고 소녀 매듭을 한 번 더 당긴 뒤, “이번엔 설명 없이 안 놔.” 하고 잘라 말했다.

소녀 서해윤은 들것 끈에 쓸린 손으로 매듭 닿는 자리를 만지다가, 끝내 현재의 서해윤 점퍼 옆구리를 붙잡고 먼저 무릎을 굽혔다. 서문자가 우비 자락을 걷어 올리고 배수구 가장자리에 붙어 앉아 통로 안쪽을 비켜 주자, 회전목마 뒤 서비스 통로의 낮은 천장과 청록빛으로 한 번 떨리는 끊어진 전구가 드러났다. 바로 그때 스피커에서 동요의 갈라진 첫 소절이 다시 올라왔고, 서문자는 얼굴을 구긴 채 망치 자루를 다시 쥐려다 멈췄다. “하나만 데리고 가라니까.” 그녀가 이를 갈며 내뱉자, 서해윤은 소녀 등을 손바닥으로 밀어 검은 입구 안으로 먼저 넣었다. 젖은 콘크리트 턱에 소녀 운동화가 한 번 미끄러졌지만, 안전끈이 팽팽해지며 두 사람 몸이 같이 아래로 꺾였다.

마지막으로 서문자가 배수 덮개 옆에 떨어진 망치를 집어 통로 입구에 걸쳐 두고, 절뚝이는 다리로 몸을 낮춰 뒤따라 들어왔다. 통로 안 스테인리스 손잡이들이 짧게 번들거리고, 셋의 어깨가 거의 맞닿은 채 ㄱ자로 꺾인 어둠 속으로 한 줄로 삼켜졌다.

챕터 04

16· 새벽 4시 직전, 동요가 다시 끊긴 직후의 몇 분

벽 손잡이에 묶인 손목

벽 손잡이에 묶인 손목
장소회전목마 뒤 서비스 통로 입구에서 안쪽 잠긴 앞문까지
시간새벽 4시 직전, 동요가 다시 끊긴 직후의 몇 분
사건현재의 서해윤은 물이 차오르는 서비스 통로 안에서 미끄러져 넘어지는 서문자를 끌어 올리기 위해, 소녀 서해윤의 손목을 벽의 스테인리스 손잡이에 견인용 안전끈으로 잠시 묶는다. 앞문은 배전반 쪽에서 잠겨 꿈쩍하지 않고, 뒤에서는 범퍼카장 쪽 물이 통로 안으로 더 세게 밀려든다. 소녀는 처음엔 붙잡힌 손을 빼려 버티고, 서문자는 둘 중 하나를 버리라고 쉰 목으로 몰아붙이지만, 서해윤은 노파의 젖은 우비 깃을 잡아 물 밖으로 끌어낸다. 그 사이 통로 안의 위치가 바뀌듯 앞문이 더 멀어 보이고, 셋의 몸은 한 번 더 미끄러져 벽과 바닥에 부딪힌다.
영향이 장면에서 현재의 서해윤은 소녀를 절대 놓지 않겠다는 결심과, 누군가를 구하려면 잠깐이라도 다른 누군가를 묶어 둬야 하는 현실 사이를 처음 몸으로 찢긴다. 소녀 서해윤에게는 “설명 없이 남겨짐”이 다시 실제 사건이 되고, 그 짧은 선택이 다음 장면의 상처와 불신을 만든다. 서문자는 위협자이면서도 실제로는 끌어 올려져야 하는 늙은 몸으로 드러나고, 현재의 서해윤은 그녀를 버리지 않는 쪽을 택함으로써 이후 배전반 앞까지 셋이 함께 가는 흐름을 이어 간다. 탈출의 문제는 이제 문을 찾는 일이 아니라, 누구를 어느 순서로 손에서 놓을 것인가의 문제로 더 날카롭게 바뀐다.

현재의 서해윤이 소녀 서해윤의 손목을 벽의 스테인리스 손잡이에 안전끈으로 감아 확 잡아당기자, 회전목마 뒤 서비스 통로의 낮은 천장 아래서 젖은 끈이 한 번 삐걱 울고 아이의 팔이 벽 쪽으로 꺾인다. ㄱ자로 꺾인 통로 바닥에는 얕은 물이 발목을 쓸고 있었고, 청록빛으로 떠는 끊어진 전구 하나가 손때 검게 번진 콘크리트 벽과 번들거리는 손잡이를 번갈아 핥았다. 서해윤은 “금방 온다, 풀지 마” 하고 내뱉자마자 몸을 돌려, 바로 앞에서 발을 헛디뎌 무릎까지 물에 처박힌 서문자의 우비 어깨를 움켜잡는다.

서문자는 망치 자루를 바닥에 찍어 버티려 하지만 자루 끝이 미끄러져 벽을 긁고, 쉰 목으로 “하나만 들고 가, 둘 다 잡으면 또 틀어진다” 하고 악을 쓴다. 서해윤은 대꾸하지 않고 노파의 겨드랑이 밑으로 팔을 밀어 넣어 위로 당기고, 뒤에서는 묶인 소녀가 젖은 운동화 바닥으로 벽을 밀며 안전끈 매듭을 비틀다 손목의 분홍 설탕 자국까지 문질러 번지게 만든다. 앞문에 닿으려던 서문자의 망치 머리가 한 번 문짝을 쾅 치지만, 배전반 쪽에서 잠긴 문은 떨기만 하고 열리지 않는다. 그 충격에 통로 끝 어둠이 한 칸 가까워진 것처럼 보이고, 범퍼카장 쪽에서 밀려든 물이 셋의 종아리를 한꺼번에 떠민다.

서해윤은 이를 물고 서문자를 간신히 세운 뒤 바로 뒤를 돌아보지만, 소녀 서해윤은 이미 손잡이에 묶인 팔을 비틀다 벽에 어깨를 붙인 채 숨을 짧게 끊어 마시고 있다. 젖은 안전끈은 손목 뼈 위로 파고들어 있었고, 아이가 잡아당길 때마다 스테인리스 손잡이가 청록빛 아래서 짧게 번쩍였다. 서문자의 망치가 다시 바닥을 짚는 동안, 서해윤은 미끄러지는 물을 가르며 아이 쪽으로 돌아선다.

17· 새벽 4시 무렵, 동요가 다시 끊긴 직후

풀려는 아이, 막히는 길

풀려는 아이, 막히는 길
장소회전목마 뒤 서비스 통로 안쪽 잠긴 앞문 앞
시간새벽 4시 무렵, 동요가 다시 끊긴 직후
사건소녀 서해윤은 벽 손잡이에 묶인 안전끈을 젖은 손가락으로 풀어 보려다 손목 피부만 더 벗기고, 현재의 서해윤은 서문자를 끌어 올린 뒤 돌아와 그 흔적을 바로 목격한다. 현재의 서해윤은 소녀를 먼저 풀어 주려 하지만, 앞문은 배전반 쪽에서 잠긴 채 밀어도 차도 꿈쩍하지 않는다. 서문자는 바닥에 한쪽 무릎을 댄 채 둘 중 하나를 버리라고 다시 몰아붙이고, 소녀는 벽에 등을 붙인 채 이번에는 현재의 서해윤 소매를 놓지 않는다. 현재의 서해윤은 안전끈을 손잡이에서 끊어 내듯 풀어 소녀 손목에 다시 감아 쥔 채, 셋을 함께 데리고 앞문을 부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꾼다.
영향이 장면으로 현재의 서해윤은 소녀를 잠깐 묶어 둔 선택이 아이에게는 또 한 번의 유기처럼 남았다는 사실을 눈앞의 상처로 확인한다. 탈출의 우선순위는 단순히 통로를 뚫는 일에서, 설명 없이 남겨 두지 않는 방식으로 길을 여는 일로 바뀐다. 서문자의 경고는 여전히 현실적이지만, 현재의 서해윤은 그 계산을 따르지 않겠다는 태도를 몸으로 분명히 한다. 다음 장면에서 셋이 배전반 앞까지 함께 밀고 들어갈 이유와 긴장이 여기서 단단해진다.

소녀 서해윤이 회전목마 뒤 서비스 통로의 스테인리스 손잡이에 묶인 안전끈 매듭을 손톱으로 뜯어 올리자, 청록빛으로 떨리는 끊어진 전구 아래 젖은 끈이 한 번 미끄러지고 손목의 분홍 설탕 자국 위로 껍질 벗겨진 살이 더 길게 벌어진다. 낮은 천장 밑에서 물은 발목을 치고 지나갔고, 소녀는 벽에 어깨를 붙인 채 이를 악물고 다시 끈을 비틀다가 끝내 손을 놓는다. 그때 현재의 서해윤이 미끄러지는 서문자의 팔을 끌어 올린 채 돌아서고, 소녀 손목에 남은 붉은 자국을 보자마자 허리를 낮춰 매듭 쪽으로 손을 집어넣는다. 서문자는 뒤에서 숨을 고르며 망치 자루로 바닥을 짚고, 젖은 목으로 뱉는다. “그래서 하나만 데리고 가랬다.”

현재의 서해윤은 대꾸하지 않고 안전끈을 손잡이에서 거칠게 풀어 소녀 손목을 먼저 감싸 쥔 뒤 자기 점퍼 소매 끝으로 벗겨진 부분을 눌러 덮는다. 소녀는 “나 두고 갔잖아” 하고 거의 새는 목소리로 말한 뒤, 곧바로 현재의 서해윤 소매를 붙잡는다. 그 말이 떨어지자 서해윤은 몸을 돌려 앞문을 어깨로 들이받는다. 비를 먹은 콘크리트 문틀이 둔하게 울릴 뿐 열리지 않자, 그녀는 한 발 뒤로 물러나 장화 끝으로 문 아래를 차고 다시 몸통째 박는다. 서문자가 옆에서 망치 머리를 문틈에 밀어 넣어 비틀어 보지만, 안쪽에서 걸린 잠금은 꿈쩍도 하지 않고 물만 문턱 아래서 되밀려 나온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작은 쪽을 빼.” 서문자가 말하자, 현재의 서해윤은 소녀 손을 더 세게 끌어 자기 옆에 붙인다.

현재의 서해윤은 손잡이에서 풀어 낸 안전끈 끝을 자기 손목에 한 바퀴 감고 남은 길이를 소녀 손목에 다시 묶는다. 그리고 서문자 쪽으로 끈의 남은 부분을 내밀어, 잡으라는 듯 망치 자루 위에 걸쳐 둔다. 셋의 손 사이에서 젖은 끈이 팽팽해진 채 떨리고, 잠긴 앞문 앞 바닥에는 소녀가 뜯다 만 매듭 조각과 벗겨진 설탕이 물에 녹아 붙어 있다.

18· 새벽 4시 무렵, 동요가 다시 켜지기 직전

배전반 앞의 남자

배전반 앞의 남자
장소회전목마 뒤 서비스 통로 끝, 범퍼카장 배전반 앞
시간새벽 4시 무렵, 동요가 다시 켜지기 직전
사건서해윤은 소녀 서해윤의 손목에 감긴 안전끈을 당긴 채 서비스 통로 끝의 잠긴 앞문으로 몸을 들이밀고, 서문자는 뒤에서 망치 자루로 문짝 가장자리를 찍어 벌리려 한다. 문이 반쯤 뜯기듯 열리는 순간, 배전반 앞 좁은 바닥에 비에 젖은 2009년 작업복 차림의 강노을이 이미 서 있는 것이 드러난다. 그는 문짝에 등을 댄 채 물러서지 않고, 철문 개방 회로는 배전반 뒤에 있지만 회전목마 방송 루프를 먼저 끊지 않으면 문이 열려도 다시 닫힌다고 또박또박 말한다. 서문자는 그 얼굴을 보자마자 망치를 치켜들고 달려들고, 강노을은 피하지 않은 채 자루를 붙잡아 그녀 팔을 멈춘다. 그 틈에 서해윤은 소녀를 자기 뒤로 밀어 감추지만, 강노을은 소녀 쪽을 보며 이번에도 “잠깐만 기다리면”이라고 입을 떼려 한다. 서해윤은 곧장 그의 말을 끊고, 누구를 남겨 두라는 말이면 안 듣겠다고 받아친다.
영향이 장면으로 강노을은 더 이상 방송 속 목소리가 아니라, 2009년의 잘못된 순서를 자기 몸으로 들고 온 현재의 장애물이 된다. 철문을 여는 방법이 단순한 열쇠 문제가 아니라 방송 루프와 배전반의 순서를 바로잡는 문제였다는 사실이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동시에 강노을이 소녀를 기다리게 하려는 말버릇을 다시 꺼내면서, 현재의 서해윤은 자신을 붙들어 둔 어른의 방식이 아직도 똑같다는 것을 눈앞에서 확인한다. 서문자의 폭력은 복수이면서도 반복을 끊으려는 몸부림으로 바뀌고, 서해윤은 둘 중 하나를 남기는 빠른 계산이 이미 한 번 아이를 버린 방식이었다는 점을 더 분명히 붙든다. 다음 장면에서 강노을의 고백이 터질 자리가 여기서 열리고, 배전반 앞 대치는 말이 아니라 순서를 두고 싸우는 정면충돌로 넘어간다.

서해윤이 안전끈을 한 팔에 감아 쥔 채 서비스 통로 끝 철문 같은 앞문을 발로 걷어차자, 낮은 천장 아래 청록빛으로 떨던 끊어진 전구가 한 번 크게 흔들리고 문짝 윗부분이 젖은 콘크리트에서 비명처럼 뜯겨 나왔다. 물은 발목을 넘어 문턱 안으로 먼저 밀려들었고, 스테인리스 손잡이를 짚은 소녀 서해윤이 미끄러지며 서해윤 등 뒤에 매달렸다. 서문자는 뒤에서 숨을 몰아쉬며 망치 자루를 문틈에 박아 넣고 온몸으로 젖혔다. 문이 손바닥만큼 더 벌어지자, 범퍼카장 배전반 앞 병든 흰 형광 아래에 강노을이 서 있는 모습이 그대로 드러났다. 비에 젖은 회색 작업복 소매가 손목에 들러붙어 있었고, 그는 문짝에 등을 기대고도 한 발도 물러서지 않았다.

강노을이 먼저 젖은 장갑 한 짝을 벗어 바닥에 떨어뜨리며 말했다. “뒤에 철문 회로 있어요. 그런데 루프부터 끊어야 해요. 안 그러면 또 닫혀.” 그의 목소리는 스피커에서 들리던 때와 똑같이 먼저 숨을 한 번 고르고 나서 나왔다. 서문자는 그 얼굴을 보자마자 망치를 치켜들고 물을 갈랐고, 강노을은 피하지 않은 채 자루를 붙잡아 두 사람 손이 배전반 문짝 앞에서 한데 엉겼다. 소녀 서해윤이 작게 숨을 삼키며 서해윤 점퍼를 더 세게 움켜쥐자, 강노을의 시선이 그 손으로 잠깐 내려갔다. “그 애는 거기 잠깐—” 서해윤이 바로 그의 말을 잘랐다. “그 말로 붙들어 둔 거잖아.”

서문자의 구부러진 손가락 마디가 망치 자루 위에서 하얗게 떠오르고, 강노을의 벗겨진 장갑 옆으로 배전반 아래 고인 물이 검게 흔들렸다. 회전목마 쪽에서 끊긴 동요의 숨 고르는 잡음이 다시 차오르자, 강노을은 자루를 놓지 않은 채 배전반 뒤를 턱으로 가리켰다. 서해윤은 소녀를 자기 옆구리 앞으로 끌어오고, 젖은 신발로 배전반 문을 한 번 세게 차며 앞으로 나섰다.

19· 새벽 4시 무렵, 동요의 다음 7분이 다시 돌기 직전

먼저였던 합선

먼저였던 합선
장소회전목마 뒤 서비스 통로 끝, 범퍼카장 배전반 앞
시간새벽 4시 무렵, 동요의 다음 7분이 다시 돌기 직전
사건서문자가 젖은 바닥을 박차고 강노을의 머리를 향해 쇠망치를 휘두르자, 강노을은 피하지 않고 자루를 두 손으로 붙잡아 망치 머리를 배전반 문짝에 비스듬히 처박는다. 현재의 서해윤은 소녀 서해윤의 손목에 감긴 안전끈을 놓지 않은 채 둘 사이로 끼어들지만, 강노을이 먼저 범퍼카장 배선 합선이 시작이었고 자신이 축제 중단 책임을 피하려고 방송부터 살린 뒤 메인 차단을 늦췄다고 내뱉으며 움직임을 멈춰 세운다. 그는 그 몇 분 사이 열여섯 살 서해윤이 더 안쪽에 남았고, “잠깐만 기다리면 언니가 온다”는 자기 말이 아이를 붙들어 둔 마지막 거짓말이었다고 고백한다. 말이 끝나자 철문 쪽에서 금속이 맞물려 닫히는 소리가 울리고, 더 선명해진 공간 안에서 배전반과 통로의 위치가 칼같이 굳는다.
영향이 장면으로 정전 사고의 순서가 처음으로 정확한 형태를 얻고, 강노을은 단순한 유도자나 실종자가 아니라 아이를 남겨 둔 당사자로 드러난다. 현재의 서해윤은 자신이 막연히 버려졌다고 느껴 온 기억을, 여러 어른의 계산 사이에 실제로 남겨진 사건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서문자의 폭력도 복수만이 아니라 그 순서를 부수려는 몸부림이었다는 사실이 선명해진다. 동시에 진실이 입 밖에 나온 대가로 철문 쪽 길이 더 깊게 잠기면서, 가장 빠른 탈출법은 다시 누군가를 남기는 계산으로 좁혀진다.

서문자가 우비 자락을 걷어차며 강노을에게 쇠망치를 내리치자, 회전목마 뒤 서비스 통로 끝 배전반 앞의 청록빛 떨림 속에서 강노을이 한 발도 물러서지 않고 망치 자루를 붙잡아 비틀었다. 망치 머리가 배전반 문짝 모서리에 쾅 걸리며 불꽃 아닌 젖은 금속음만 튀고, 현재의 서해윤은 소녀 서해윤의 손목을 끌어 자기 뒤로 밀어 넣은 채 둘 사이에 어깨를 들이민다. 낮은 천장 아래 물은 정강이를 때리듯 밀려왔고, 벽 손잡이에 스친 안전끈이 팽팽하게 울었다. 서문자가 자루를 다시 빼내려 이를 갈자 강노을이 젖은 작업복 소매를 타고 흐르는 물을 그대로 맞으며 말했다. “먼저 나간 건 방송이었어요. 범퍼카장이 먼저 합선됐는데, 내가 축제 안 멈추려고 메인 차단을 늦췄어.”

서해윤이 욕처럼 숨을 들이키는 사이 강노을은 시선을 그녀가 아니라 소녀 쪽에 두고 말을 이었다. “울어서… 거기 세워 뒀어요. 잠깐만 기다리면 언니가 온다고.” 그 말이 떨어지자 소녀 서해윤의 손이 해윤 점퍼 옆구리를 더 깊게 움켜쥐고, 서문자는 망치 자루를 놓지 않은 채 목 안의 가래를 삼키듯 짧게 헛숨을 뱉는다. “네가 붙들었지.” 노파가 자루를 확 당기며 내뱉자, 강노을은 끝내 손을 놓지 않고 고개만 한 번 끄덕인다. 배전반 옆 물웅덩이에 비친 회전목마 불빛이 또렷하게 멈춰 서고, 바로 뒤이어 철문 쪽에서 묵직한 금속 닫히는 소리가 통로를 타고 들어온다.

서해윤은 그 소리를 듣고도 뒤를 보지 않은 채 소녀 손목의 끈 매듭을 손등으로 더듬어 확인하고, 다른 손으로 배전반 문짝을 한 번 세게 밀어 본다. 꿈쩍도 하지 않는 철판 앞에서 강노을이 낮게, 그러나 또박또박 덧붙인다. “지금이라도 그 애를 뒤에 두면 문 여는 시간은 벌 수 있어.” 서문자의 망치 끝이 바닥을 찍고, 소녀의 설탕 번진 손목이 해윤 팔에 달라붙는다. 서해윤은 젖은 운동화 앞코로 배전반 아래 고인 물을 걷어차고 몸을 틀어 문짝 정면에 선다.

20· 새벽 4시 무렵, 동요가 다시 켜지기 직전의 7분 사이

남기지 않는 쪽

남기지 않는 쪽
장소회전목마 뒤 서비스 통로 끝, 범퍼카장 배전반 앞
시간새벽 4시 무렵, 동요가 다시 켜지기 직전의 7분 사이
사건현재의 서해윤은 소녀 서해윤의 손을 잡은 채 배전반 문짝을 발로 걷어차고, 젖은 철판을 억지로 벌려 안에 찬 물을 맨손으로 퍼내기 시작한다. 강노을은 철문을 열려면 소녀를 뒤에 두고 먼저 스위치 순서를 맞춰야 한다고 몰아붙이고, 서문자도 다른 이유로 하나만 데리고 가라고 소리친다. 그러나 현재의 서해윤은 둘의 말을 끊고 소녀 손목의 안전끈을 자기 팔에 다시 감아 묶은 뒤, 서문자에게는 망치로 상단 경첩을 부수라고 요구한다. 말로 끝나지 않고, 배전반을 여는 방식과 누구를 남길지의 순서가 이 자리에서 물리적으로 갈라진다.
영향현재의 서해윤은 자신이 한때 버려진 아이였다는 사실을 들은 직후, 살아남는 가장 빠른 계산을 처음으로 거부한다. 강노을의 고백은 더 이상 과거의 빈칸이 아니라 지금 그녀가 어떤 손을 놓지 않을지 정하는 기준이 되고, 서문자 역시 그 결심 앞에서 방해자이면서 협력자로 다시 자리를 바꾼다. 이 장면이 끝날 때 탈출의 문제는 누구를 먼저 뺄 것인가에서, 셋이 얽힌 채 젖은 설비를 강제로 열어젖히는 정면충돌로 넘어간다.

현재의 서해윤이 소녀 서해윤의 젖은 손을 자기 팔목에 안전끈으로 한 바퀴 감아 묶은 채, 회전목마 뒤 서비스 통로 끝 배전반 문짝을 장화 발등으로 세게 걷어찼다. 낮은 천장 아래 청록빛 전구가 떨고, 문짝은 한 번 안쪽으로 꺾였다가 되밀려 오며 고인 물을 종아리 높이로 튀겼다. 강노을은 비에 젖은 작업복 소매를 배전반 앞에 걸친 채 몸으로 길을 막고 섰다가, 해윤이 다시 발을 들자 한쪽으로 비켜서며 말했다. “지금이라도 작은 애를 뒤에 두면 문은 열려.” 바로 옆에서 서문자가 망치 자루를 움켜쥔 손으로 벽을 짚고, 쉰 숨 끝에 같은 말을 다른 얼굴로 뱉었다. “하나만 빼야 안 비튼다.”

현재의 서해윤은 대답 대신 배전반 문틈에 손가락을 찔러 넣어 철판을 벌리고, 들린 손톱 밑에서 번진 피를 물에 씻어 내듯 안쪽 고인 물을 퍼냈다. 소녀 서해윤이 뒤에서 그녀 젖은 점퍼를 붙잡고 미끄러지지 않게 버티자, 강노을이 한 발 다가와 손목을 잡으려다 멈춘다. “내가 늦춘 건 맞아. 그러니까 더 늦추지 마.” 그 말을 들은 현재의 서해윤이 고개를 들고 강노을 얼굴을 정면으로 본다. 그리고 소녀 손을 더 끌어당긴 채 서문자 쪽으로 턱을 젖혔다. “망치 줘요 말고, 경첩 쳐요.” 서문자는 잠깐 아들을 보고, 다음 순간 망치 머리를 들어 배전반 상단 모서리에 내리꽂는다. 젖은 금속이 찢기며 문짝 한쪽이 비틀려 내려앉고, 강노을의 어깨가 그 파편을 팔로 받아낸다.

현재의 서해윤은 벌어진 틈으로 몸을 밀어 넣듯 무릎을 꺾고, 한 손으로는 물을 퍼내고 다른 손으로는 안쪽 레버 덮개를 잡아당긴다. 소녀 서해윤의 손목 설탕 자국이 안전끈 매듭 아래서 희게 번져 있고, 그 손은 끝까지 해윤 소매를 놓지 않는다. 뒤에서는 서문자가 두 번째 망치질을 준비하며 비틀린 문짝을 장화로 밟아 고정하고, 강노을은 젖은 배선 쪽으로 팔을 뻗은 채 더 이상 “기다리라”는 말을 꺼내지 못한다. 철문 쪽에서 닫히는 금속음이 한 번 더 울리자, 현재의 서해윤은 물에 잠긴 배전반 안으로 팔을 더 깊이 집어넣는다.

챕터 05

21· 새벽 4시 무렵, 동요가 다시 켜지기 직전의 몇 초

젖은 레버 앞

젖은 레버 앞
장소범퍼카장 배전반실 앞, 회전목마 뒤 서비스 통로 끝
시간새벽 4시 무렵, 동요가 다시 켜지기 직전의 몇 초
사건현재의 서해윤은 배전반 문짝을 발로 걷어 열고 무릎까지 찬 물속으로 먼저 들어가 메인 레버를 맨손으로 붙잡는다. 소녀 서해윤은 안전끈에 묶인 채 해윤 허리 뒤에 매달려 미끄러지지 않으려 버티고, 강노을은 배전반 옆 노출선 앞을 몸으로 가로막으며 루프를 먼저 끊지 않으면 철문이 또 닫힌다고 다급하게 말한다. 서문자는 망치를 든 채 아들과 해윤 사이로 끼어들어 차단기 쪽으로 비틀거리며 나아가고, 네 사람의 팔과 끈과 망치 자루가 젖은 금속 앞에서 한 덩어리처럼 엉킨다. 메인 레버를 당기려는 해윤의 손이 물과 녹 때문에 미끄러지자, 소녀가 뒤에서 해윤 허리를 끌어안아 버티고 강노을이 손등으로 노출선을 밀어 치운다.
영향이 장면에서 탈출은 더 이상 말로 순서를 다투는 문제가 아니라, 누구의 몸을 어디에 먼저 들이밀 것인가의 문제로 바뀐다. 현재의 서해윤은 소녀를 뒤에 두지 않겠다는 결심을 실제 동작으로 밀어붙이며, 소녀 역시 끌려가는 아이가 아니라 해윤을 붙잡아 세우는 세 번째 손이 된다. 강노을은 길을 아는 어른이면서도 자기 몸을 위험에 던져야만 도움이 되는 자리로 밀려나고, 서문자는 끝내 차단기 앞까지 가며 다음 장면의 희생을 예고한다. 배전반실의 젖은 설비들이 한꺼번에 살아나면서, 이제 한 번만 잘못 미끄러져도 감전과 붕괴가 동시에 터질 상황이 완성된다.

현재의 서해윤이 배전반 문짝을 발로 끝까지 걷어차자, 범퍼카장 배전반실 앞 낮은 천장 아래 병든 흰 형광이 한 번 깜빡이고 녹슨 철판 안쪽으로 검은 물이 출렁 비어졌다. 그녀는 소녀 서해윤의 손목에 묶인 안전끈을 자기 팔꿈치에 감은 채 그대로 무릎까지 물속으로 들어가 젖은 메인 레버를 움켜쥐고, 소녀는 뒤에서 해윤 점퍼 허리를 붙들어 몸이 밀려나지 않게 박힌다. 강노을은 배전반 오른쪽 아래 드러난 노출선 쪽으로 급히 팔을 뻗어 해윤의 손등을 막으며 말했다. “그거 먼저 내리면 다시 붙어요. 루프부터.” 바로 뒤에서 서문자가 젖은 우비 소매를 끌며 망치 머리를 들어 올렸고, 쇠끝이 차단기 커버를 한 번 쳐서 얇은 플라스틱 조각이 물 위에 떠내려갔다.

해윤이 이를 악물고 레버를 아래로 꺾으려 하자 손바닥이 미끄러져 손등이 철판 모서리에 쓸렸고, 그 순간 소녀가 뒤에서 더 세게 매달리며 “놓지 마” 하고 숨 넘어가는 목소리로 내뱉는다. 강노을은 맨손으로 노출선을 옆으로 밀어 길을 비키다가 젖은 금속에 손목을 찍히고도 팔을 빼지 못한 채, 차단기 쪽으로 비틀거리며 가는 서문자를 보며 몸을 돌린다. 서문자는 아들의 어깨를 한 번 밀쳐 내고 망치 자루를 겨드랑이에 끼운 채 차단기 앞 손잡이를 더듬었지만, 굳은 손가락이 젖은 커버에서 자꾸 헛돌았다. 회전목마 쪽 스피커에서 끊긴 동요의 첫 숨 같은 잡음이 배전반실까지 스며들자, 네 사람 모두 같은 쪽을 보지 못한 채 동시에 더 깊이 몸을 들이민다.

해윤은 미끄러진 손을 다시 고쳐 쥐려고 손바닥을 허벅지에 한 번 문질러 물기를 닦고, 소녀는 그 틈에 몸을 낮춰 해윤 옆구리 밑으로 팔을 넣어 같이 레버 축을 감싼다. 강노을의 벗겨진 손등 위로 가느다란 불꽃이 한 줄 튀고, 서문자의 망치 머리가 차단기 아래 철판에 걸린 채 덜컹 올라간다. 팽팽해진 안전끈이 세 사람 사이에서 직선으로 당겨지며, 젖은 레버가 아주 조금 아래로 움직인다.

22· 새벽 4시 직전, 동요가 다시 켜지기 바로 전 7분의 끝

몸으로 누른 차단기

몸으로 누른 차단기
장소회전목마 뒤 서비스 통로 끝, 범퍼카장 배전반 앞
시간새벽 4시 직전, 동요가 다시 켜지기 바로 전 7분의 끝
사건서문자는 스피커에서 동요의 갈라진 첫 숨이 다시 올라오자 강노을을 옆으로 밀치고, 쇠망치 머리와 자기 팔뚝을 함께 젖은 차단기 쪽으로 들이민다. 강노을은 그녀를 붙잡아 떼어 내려 하지만 미끄러지고, 현재의 서해윤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배전반 안쪽으로 팔을 더 깊이 넣어 메인 레버 쪽을 찾는다. 소녀 서해윤은 해윤의 허리를 뒤에서 붙들고 배전반 옆 철판 틈으로 몸을 낮춰, 뒤편 수동 손잡이가 있는 자리까지 기어들 준비를 한다. 서문자의 몸이 차단기를 눌러 버리는 순간 불꽃이 튀고 회전목마 루프가 먼저 끊기며, 강노을과 현재의 서해윤에게 남은 순서가 단번에 강제로 정리된다.
영향이 장면으로 반복을 붙들고 있던 회전목마 방송 루프가 처음으로 사람 몸값을 치르고 끊긴다. 서문자는 끝까지 하나를 부숴야 한다고 외치던 자리에서, 결국 자기 몸을 먼저 망가뜨려 셋의 길을 여는 쪽으로 넘어간다. 강노을은 순서를 만든 사람에서 그 순서가 무너지는 현장을 두 손으로 막지 못한 사람으로 밀려나고, 현재의 서해윤은 더 이상 망설일 시간을 잃는다. 이제 탈출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희생된 한 몸 위에서 남은 두 동작을 끝까지 이어 가야 하는 문제가 된다.

서문자가 강노을의 젖은 어깨를 팔꿈치로 거칠게 밀어내고 차단기 앞으로 자기 몸을 던졌다. 회전목마 뒤 서비스 통로 끝 배전반 앞의 병든 흰 형광 아래서, 그녀 우비 소매가 팔꿈치까지 말려 올라가며 드러난 마른 팔뚝이 쇠망치 자루와 함께 젖은 금속에 눌렸다. 강노을이 “어머니, 안 돼” 하고 자루를 잡아당겼지만, 물 먹은 바닥에서 발이 한 번 꺾이며 손아귀만 미끄러졌다. 그 짧은 틈에 현재의 서해윤은 소녀 서해윤을 자기 옆구리에 붙인 채 무릎을 더 낮추고 배전반 안으로 팔을 집어넣었다.

갈라진 스피커에서 동요의 첫 소절이 올라오기도 전에 서문자가 이를 악물고 몸무게를 더 실었다. 쇠망치 머리와 노파의 팔이 차단기를 함께 눌러 박는 순간, 젖은 금속음이 터지고 푸른 불꽃이 서문자 우비 가장자리와 강노을의 손등을 스쳤다. 타는 냄새가 짧게 번지자 강노을은 반사적으로 노출선을 팔로 쓸어 치우며 서해윤 쪽 공간을 벌렸고, 현재의 서해윤은 미끄러지던 손끝으로 메인 레버 손잡이를 끝내 움켜쥐었다. 소녀 서해윤은 뒤에서 해윤 허리를 밀어 버티다가, “지금.” 하고 새는 목소리로 말한 뒤 배전반 옆 비틀린 철판 아래로 어깨를 구겨 넣었다.

회전목마 쪽 불빛이 한 줄씩 꺼지며 통로 벽의 손때 자국도 어둠 속으로 물러났다. 서문자의 몸은 아직 차단기 위에 기울어진 채 떨고 있었고, 그녀 손에서 반쯤 빠진 쇠망치 자루가 물 위를 툭툭 쳤다. 강노을이 그 몸을 받치려 손을 뻗는 동안, 현재의 서해윤 손목 힘줄이 불거지며 메인 레버가 아래로 반 칸 더 움직였다.

23· 새벽 4시 직전, 서문자가 차단기를 몸으로 눌러 루프를 끊은 직후

세 번째 손

세 번째 손
장소회전목마 뒤 서비스 통로 끝, 범퍼카장 배전반 앞
시간새벽 4시 직전, 서문자가 차단기를 몸으로 눌러 루프를 끊은 직후
사건강노을이 감전된 손으로 노출선을 옆으로 쳐내 배전반 앞의 길을 억지로 만든다. 그 틈에 현재의 서해윤은 젖은 메인 레버를 두 손으로 붙잡고 끝까지 내리려 버티고, 소녀 서해윤은 배전반 아래로 몸을 밀어 넣어 뒤쪽 수동 손잡이를 찾아 손을 뻗는다. 물과 금속이 한꺼번에 튀는 가운데 셋의 몸이 서로를 밀고 버티며 한 동작으로 이어지고, 마침내 정문 철문이 열리는 묵직한 금속음이 통로 끝까지 울린다.
영향이 장면에서 강노을은 더 이상 순서를 말하는 어른이 아니라, 자기 잘못이 만든 설비를 자기 몸으로 치워 주는 마지막 손이 된다. 현재의 서해윤은 누군가를 남기지 않겠다는 결심을 말이 아니라 메인 레버를 끝까지 내리는 동작으로 증명하고, 소녀 서해윤 역시 끌려가는 아이가 아니라 직접 출구를 여는 손으로 바뀐다. 철문이 실제로 열리면서 반복은 멈출 수 있는 상태가 되지만, 동시에 안쪽 설비와 통로가 더 빠르게 무너지기 시작해 다음 탈출의 시간이 급격히 줄어든다.

강노을이 배전반 오른쪽 아래에서 번쩍거리는 노출선을 맨손으로 걷어차듯 옆으로 밀어냈다. 회전목마 뒤 서비스 통로 끝의 병든 흰 형광 아래, 젖은 전선이 그의 손등에 들러붙으며 푸른 불꽃을 튀겼고 타는 냄새가 짧게 올라왔다. 현재의 서해윤은 그 빈틈을 놓치지 않고 무릎까지 찬 물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 메인 레버를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손바닥이 한 번 미끄러지자 소녀 서해윤이 뒤에서 해윤 허리를 끌어안듯 붙들고, 바로 다음 순간 몸을 낮춰 배전반 밑 틈으로 어깨부터 기어들어갔다.

“뒤에 손잡이 있어. 끝까지 당겨.” 강노을이 이를 문 채 내뱉자, 서문자는 한쪽 팔이 축 늘어진 채도 망치 자루로 비틀린 문짝을 받쳐 길이 다시 닫히지 않게 버텼다. 현재의 서해윤이 젖은 레버를 아래로 꺾으며 “손 놓지 마” 하고 소리치자, 배전반 뒤에서 소녀 서해윤의 쓸린 손이 철판을 더듬는 소리가 났다. 손잡이를 찾은 아이가 끈적한 손목으로 쇠를 움켜쥐는 순간, 강노을의 무릎이 물속으로 꺾였지만 그는 노출선을 끝내 놓지 않았다. 메인 레버가 턱 하고 마지막 걸림을 넘고, 거의 동시에 배전반 뒤에서 수동 손잡이가 내려가는 짧고 둔한 마찰음이 이어졌다.

그러자 정문 쪽 어둠 너머에서 오래 잠겨 있던 철문이 열릴 때 나는 묵직한 금속음이 통로를 타고 들어왔다. 배전반 위 형광등이 한 번 길게 깜빡이고, 물 위에 떨던 회전목마 불빛 반사가 싹 끊겼다. 현재의 서해윤이 젖은 팔로 소녀 서해윤의 발목을 잡아 다시 밖으로 끌어내는 동안, 강노을의 타버린 손끝에서는 아직도 가느다란 불꽃이 실처럼 붙어 있었다.

24· 새벽 4시 직전, 철문이 열린 직후

무너지는 ㄱ자 통로

무너지는 ㄱ자 통로
장소회전목마 뒤 서비스 통로에서 은하동산 정문 철문까지
시간새벽 4시 직전, 철문이 열린 직후
사건현재의 서해윤은 배전반 뒤에서 기어 나온 소녀 서해윤을 등에 업고, 감전으로 한쪽 팔이 처진 서문자의 허리에 안전끈을 감아 셋을 하나로 묶은 채 ㄱ자로 꺾인 서비스 통로로 뛰어든다. 철문이 열린 직후 통로 천장이 갈라지며 물과 콘크리트 조각이 한꺼번에 쏟아지고, 뒤에서는 강노을이 무너져 내리는 선반과 배선 더미를 몸으로 버티며 길이 닫히는 속도를 늦춘다. 서문자는 비틀거리면서도 망치로 낮게 내려앉은 배수관을 쳐 올려 해윤과 소녀가 통과할 틈을 만들고, 해윤은 미끄러지는 바닥에서 노파까지 끌고 가기 위해 몸을 옆으로 틀어 벽 손잡이들을 차례로 붙잡으며 전진한다. 통로가 마지막으로 크게 꺾일 때 물살이 서문자의 다리를 쓸어가자, 해윤은 소녀를 업은 채 뒤로 주저앉아 안전끈으로 노파를 다시 자기 쪽으로 당긴다.
영향이 장면에서 현재의 서해윤은 끝내 누구도 손에서 떼지 않는 방식을 실제 탈출 동작으로 완성한다. 소녀 서해윤은 더 이상 보호만 받는 존재가 아니라 해윤의 목을 붙들고 몸의 중심을 같이 잡는 쪽으로 변하고, 서문자 역시 하나를 포기하라던 사람에서 마지막까지 같이 끌려 나오는 사람으로 자리를 바꾼다. 대신 그 대가로 강노을은 통로 안쪽에 남아 셋의 뒷문 역할을 하게 되고, 바깥으로 나갈 수 없는 사람의 위치가 분명해진다. 열린 철문은 이제 출구이면서 동시에 누군가를 안쪽에 남겨야 겨우 지나갈 수 있는 폭으로 줄어든다.

현재의 서해윤이 배전반 뒤 철판 밑에서 소녀 서해윤을 끌어내 등에 둘러업고, 축 늘어진 서문자의 허리에 젖은 안전끈을 감아 매듭을 조이자 회전목마 뒤 서비스 통로의 낮은 천장이 바로 뒤에서 쩍 갈라졌다. 청록빛으로 떨던 끊어진 전구가 한 번 번쩍 꺼지고, 배수관에서 밀린 물이 콘크리트 가루와 함께 ㄱ자로 꺾인 복도 바닥을 덮쳤다. 강노을은 배전반실 문턱에 한 발을 박은 채 쓰러지는 선반을 어깨로 받아 세우며 “가요. 이번엔 그냥 가요.” 하고 소리쳤고, 그 목소리 끝이 갈라질 때 서문자가 돌아보지도 않고 망치 머리로 통로 중간에 처진 배수관을 올려쳤다. 젖은 금속이 들리며 사람 하나 겨우 지날 틈이 생기자, 해윤은 소녀의 허벅지를 더 높이 받쳐 올리고 서문자를 끈째 끌어당겨 그 밑으로 밀어 넣었다.

서문자의 장화가 벗겨진 미끄럼 방지 도료 위에서 옆으로 쓸리며 몸이 반쯤 꺾이자, 현재의 서해윤은 스테인리스 손잡이를 하나씩 붙잡고 옆걸음으로 버텼다. 소녀 서해윤은 업힌 채 해윤의 목을 더 세게 감고, 들것 끈에 쓸렸던 손으로 그녀 어깨를 밀어 중심을 잡았다. 뒤쪽에서 무언가 완전히 무너지는 소리가 나고 물살이 한 번 더 등을 때리자 서문자가 쉰 숨으로 “놔, 작은 것부터 나가” 하고 뱉었지만, 해윤은 대꾸 대신 안전끈을 손목에 두 번 감아 쥐고 몸을 뒤로 던지듯 당겼다. 노파의 허리가 물에서 들려 올라오고, 망치는 바닥을 긁으며 따라왔다. 마지막 꺾인 구간 끝에서 정문 쪽의 회색 새벽빛이 철문 살 사이로 비치기 시작하자, 셋의 그림자가 젖은 벽에 한 덩어리로 흔들렸다.

현재의 서해윤은 반쯤 열린 철문 턱에 먼저 소녀의 운동화 끝을 걸쳐 올리고, 뒤이어 자기 어깨로 문짝을 더 밀어 벌리며 서문자의 몸을 끈째 밖으로 잡아당긴다. 그 순간 안쪽에서 강노을이 받치고 있던 선반이 무너지며 통로 입구를 틀어막고, 서문자의 망치가 철문 문턱에 한 번 부딪혀 둔하게 울린다. 해윤의 무릎이 젖은 아스팔트에 박히고 소녀가 등에서 미끄러져 함께 넘어지는 동안, 안전끈 끝에 매인 서문자의 몸이 문 안쪽 턱에서 한 번 걸렸다가 천천히 밖을 향해 끌려 나온다.

25· 새벽 4시 직전, 비가 막 잦아드는 순간

반쯤 열린 바깥

반쯤 열린 바깥
장소은하동산 정문 철문 앞 아스팔트
시간새벽 4시 직전, 비가 막 잦아드는 순간
사건현재의 서해윤은 소녀 서해윤을 업은 채 무너지는 ㄱ자 서비스 통로를 끌고 나와, 감전으로 비틀거리는 서문자의 허리에 안전끈을 감은 그대로 반쯤 열린 정문 철문 밖으로 몸을 던진다. 세 사람은 젖은 아스팔트 위로 함께 넘어지지만, 서문자는 문턱 안쪽에서 더 이상 밀려 나오지 못하고 주저앉는다. 강노을은 안쪽 배전반실 쪽 마지막 어둠 속에 남아 무너지는 선반과 전선 사이에서 한 번 서해윤 쪽을 본 뒤, 가느다란 불꽃 뒤로 사라진다. 현재의 서해윤은 다시 안으로 들어가려 하지만, 소녀 서해윤이 젖은 팔로 그녀 목을 붙들고 늘어지며 놓지 않는다. 동요는 끝내 다시 켜지지 않고, 철문은 반쯤 열린 각도에서 멈춘다.
영향이 장면은 현재의 서해윤이 끝내 소녀를 남기지 않은 채 바깥으로 데리고 나오는 데 성공했음을 눈앞의 동작으로 완성한다. 동시에 서문자와 강노을은 반복을 끊는 대가처럼 안쪽에 남아 사라져, 구출이 전부를 되돌리는 일이 아니라 남겨질 몫을 바꾸는 일임을 굳힌다. 서문자가 하나만 데리고 가라던 규칙은 깨진 듯 보이지만, 그 대신 노파 자신이 문 안쪽에 남는 형태로 값이 치러진다. 비가 잦아들고 동요가 멈추면서 은하동산의 밤은 끝나지만, 반쯤 열린 철문은 구조의 증거이자 상실이 멈춘 자리로 남는다.

현재의 서해윤이 소녀 서해윤을 등에 업은 채 철문 사이로 몸을 던지자, 회전목마 뒤 서비스 통로에서 밀려온 검은 물이 함께 쏟아져 나와 정문 앞 젖은 아스팔트를 넓게 핥았다. 그녀 왼팔에 감긴 안전끈 끝에는 서문자의 허리가 아직 묶여 있었고, 세 사람의 몸이 한꺼번에 앞으로 고꾸라지며 쇠문이 덜컹 한 번 더 벌어졌다가 중간쯤에서 걸렸다. 소녀 서해윤은 해윤 목에 매달린 채 기침도 못 하고 숨만 짧게 삼켰고, 서해윤은 무릎으로 바닥을 긁으며 바로 뒤를 돌아 안전끈을 잡아당겼다. 문 안쪽 병든 흰 형광 밑에서 서문자가 찢어진 우비 자락을 한 손에 쥔 채 문턱에 비스듬히 걸려 있었고, 젖은 장화 끝만 바깥 물을 한번 건드렸다. “손 줘요.” 서해윤이 소리치며 끈을 더 감아당기자, 서문자는 망치 대신 빈손을 조금 들었다가 끝내 내리지 못했다.

그 뒤 어둠 쪽에서 강노을이 한 번 비틀거리며 나타나 서문자 어깨 뒤 선반을 받쳐 들었지만, 타버린 왼손 끝에서 튄 가느다란 불꽃이 젖은 철제 틀을 타고 다시 안쪽으로 흘렀다. 서문자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안전끈을 자기 허리에서 빼내 철문 기둥에 걸린 꺾인 볼트에 감아 버렸고, 그 동작으로 서해윤 쪽으로 오던 끈이 짧게 멈췄다. “이제 됐다. 데리고 가.” 노파의 목소리가 빗물 끊긴 금속처럼 갈라지자, 서해윤은 다시 문 안으로 기어들려 했지만 소녀 서해윤이 뒤에서 젖은 팔로 그녀 목을 꽉 감고 매달렸다. 강노을은 더는 기다리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반쯤 꺼진 형광 아래서 서해윤 쪽을 한번 보고, 무너져 내리는 선반과 전선 사이로 몸을 밀어 넣었다.

비가 거짓말처럼 약해지자 철문 안쪽의 회전목마는 완전히 멈춰 섰고, 끊겼다 이어지던 동요도 돌아오지 않았다. 현재의 서해윤은 아스팔트에 한쪽 손을 짚은 채 소녀를 끌어안고 앉아 있었고, 두 사람 사이에 늘어졌던 안전끈 끝만 문틈에서 젖어 반짝였다. 반쯤 열린 철문 안에는 서문자의 우비 한 조각이 볼트에 걸린 채 흔들렸고, 그 뒤로는 더 이상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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