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북소리가 울릴 때 변기태는 이미 무대 계단에 한 발을 올려둔 채, 다른 한 발로 톱밥 바닥을 긁고 있다. 흰 분장 밑으로 땀이 흘러 목까지 번지고, 거울 미로 출구 쪽에서는 자기 얼굴을 한 누군가가 빨간 풍선을 쥔 아이를 데리고 걸어 나온다. 국봉철은 뒤에서 기태의 어깨를 밀며 웃으라고, 오늘 밤만 넘기면 막차 품삯에 서울 바깥 자리까지 봐주겠다고 속삭인다. 그러나 기태는 방금 전 매표소에서 훔쳐 본 8월 14일 입장권 묶음과, 오인숙이 벽판 뒤에 연필금으로 새겨 둔 아이들 키 표시를 떠올린다. 표시들은 하나같이 회전목마 말 7번 앞에서 끊겨 있었다. 기태는 무대로 뛰어들어 단장의 목소리를 흉내 내 첫 인사를 던지지만, 박수 소리 사이로 그 아이가 말 7번 앞에서 멈춰 서는 것을 본다.
기태는 공연을 이어가는 척하며 금 간 토끼 상자를 열고 닫고, 피 묻은 비둘기 케이지를 들어 올리며 관객의 시선을 붙든다. 그 틈에 그는 국봉철의 걸음걸이와 손짓을 그대로 베껴 무대 뒤로 빠져나간다. 단장이 아직 무대 옆에 서 있는 줄 아는 관객들은 속고, 진짜 국봉철은 자기 목소리를 도둑맞은 듯 이를 문다. 기태가 회전목마 쪽으로 달려가자 오인숙이 매표소 창을 박차고 나와 그를 붙잡는다. 그녀는 남편 병원 영수증이 든 앞치마 주머니를 움켜쥔 채, 오늘도 사라지면 다들 자기 표 찢는 손만 볼 거라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숨겨 둔 표 묶음을 기태 손에 억지로 쥐여 준다. 그 표들 뒤에는 아이들 이름이 아니라 신장과 신발 색이 적혀 있다. 이름보다 몸의 흔적이 더 오래 남는다는 듯이.
말 7번 앞에는 아까 그 아이가 서 있고, 아이 손목에는 회수되지 않은 표 반쪽이 땀에 젖어 붙어 있다. 기태가 다가가자 거울 미로 안쪽 전구가 한 번 꺼졌다 켜지고, 아이는 누가 부르지도 않았는데 뒤를 돌아 “여기예요” 하고 대답한다. 그 목소리는 아이 것이지만 억양은 기태가 늘 무대에서 쓰던 능청스러운 톤과 닮아 있다. 기태가 아이를 끌어안아 물러서려는 순간, 미로 안에서 국해란이 나온다. 그녀는 기태와 같은 반쯤 웃는 입매를 하고 있고, 손목에 감긴 풍선 줄이 살을 파고들 만큼 조여 있다. 해란은 아이의 어깨를 가볍게 감싸며, 바깥은 이미 자기 자리를 다 차지했다고 말한다. 국봉철이 뒤늦게 달려와 해란을 보는 순간 다리가 풀려 주저앉지만, 딸을 끌어안지는 못한다. 해란은 아버지 쪽으로 한 걸음도 가지 않고, 대신 기태의 서 있는 각도와 턱 드는 버릇을 그대로 따라 한다.
국봉철은 관객이 알아차리기 전에 해란과 아이를 미로 안으로 밀어 넣고 입구 천막을 닫아 버리려 한다. 기태가 그의 팔을 붙잡자 둘은 합판 벽에 부딪히며 엉겨 붙는다. 국봉철은 기태 귀에 대고, 두 해 전 해란이 사라진 밤에도 자기가 공원을 멈추지 못했다고 털어놓는다. 그날 해란은 무대 뒤에서 기태 흉내를 내며 관객을 놀리다가 아이 하나를 따라 미로로 들어갔고, 국봉철은 실종 소문이 퍼지면 단속과 빚이 한꺼번에 덮친다는 걸 알아 공연을 계속 밀어붙였다. 그 뒤로 그는 해란 대신 기태를 더 두껍게 분장시켜 무대에 세웠다. 딸의 빈자리를 메우듯, 사라진 사실까지 덮이길 바라면서. 고백은 용서가 아니라 시간 벌기다. 그는 말끝과 동시에 기태의 멱살을 잡아 무대 쪽으로 끌고 가려 한다. 기태가 버티는 사이 아이가 해란 손에 이끌려 미로 안으로 한 걸음 들어간다.
오인숙이 매표소 종철문을 떼어 들고 달려와 둘 사이를 후려친다. 얇은 철판이 국봉철의 어깨를 치고, 아이가 놀라 주저앉는다. 오인숙은 아이를 품으로 끌어당기지만, 해란이 풍선 줄을 그녀의 손목에 감아 잡아당기며 같이 미로 안으로 끌고 간다. 기태도 즉시 그 뒤를 쫓아 들어간다. 국봉철은 바깥에서 입구를 붙잡고 망설이다가, 딸을 다시 놓칠까 봐 결국 안으로 몸을 밀어 넣는다. 네 사람과 아이가 한꺼번에 미로 안에 갇히자 통로는 갑자기 길어지고, 출구 표시는 서로 반대 방향을 가리킨다.
안쪽에서 해란은 아이를 앞세우지 않는다. 오히려 아이를 거울 앞에 세워 두고, 기태에게 자기 대신 남으라고 한다. 바깥에서는 네가 내 웃음을 쓰고 살았으니 이번엔 네 차례라는 것이다. 기태는 처음엔 부정하지만, 해란이 그의 오래된 습관들을 하나씩 따라 하자 말문이 막힌다. 그는 국봉철의 목소리, 취객 손님, 잃어버린 아이 엄마, 심지어 해란이 사라지기 전 무대 뒤에서 웃던 소리까지 흉내 내며 살았다. 미로는 그런 사람을 제일 먼저 붙잡는다. 해란은 이미 그 규칙을 몸으로 배웠고, 기태가 미로 안에서 몇 번이나 남의 목소리로 대답했는지 세고 있었다. 실제로 기태는 통로를 헤매며 세 번 넘게 국봉철 흉내로 “이쪽이 출구다”라고 외쳤고, 그때마다 벽 속 어딘가에서 자기 발소리가 반 박자 늦게 따라왔다.
국봉철은 해란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지만, 해란은 그 손을 잡는 대신 아버지의 시계줄을 낚아챈다. 단장실 거울 앞에서 늘 만지던 그 은색 줄이다. 해란은 그것을 거울 모서리에 걸고 세게 당겨 유리를 깨뜨린다. 깨진 틈 사이로 바깥 회전목마 불빛이 아니라, 단장실의 오래된 거울이 비친다. 그 거울은 공원 어디서든 미로와 이어져 있었고, 국봉철이 치우지 못한 손자국이 길이 되어 해란을 붙잡고 있었다는 것이 드러난다. 그는 딸을 잃은 뒤 거울을 버리지 못한 것이 아니라, 버리면 해란이 완전히 사라질까 봐 못 버린 것이다. 동시에 그 거울을 남겨 둔 탓에 미로의 입구도 계속 열려 있었다. 국봉철이 울면서 깨진 틈으로 손을 넣자 손등이 찢어지고 피가 유리 위에 번진다. 해란은 그 피를 보고 처음으로 표정을 잃는다.
그사이 아이는 겁에 질려 아무 목소리로나 대답하려 하고, 오인숙은 아이의 입을 손으로 막고 자기 품에 얼굴을 묻힌다. 아이가 이름 대신 남의 말투를 따라 내뱉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녀는 아이를 안은 채 벽에 등을 대고, 연필금으로 외워 둔 신장 표시대로 아이의 머리를 낮춘다. 사라진 아이들마다 통로의 손잡이 높이가 달랐다는 걸 기억해 낸 것이다. 몸을 낮춘 아이만 겨우 지나갈 수 있는 틈이 실제 출구 쪽으로 이어진다. 오인숙은 그 틈으로 아이를 밀어 넣지만, 자신은 어깨가 걸려 빠지지 못한다. 기태가 돌아와 그녀를 빼내려 하자 해란이 그의 발목을 붙잡는다. 그녀는 바깥으로 나가려면 안쪽에 하나가 남아야 한다는 규칙을 다시 말하지 않는다. 대신 기태의 얼굴을 하고, 기태의 목소리로 “나가면 넌 또 남의 얼굴로 살 거잖아”라고 말한다. 그 한마디에 기태는 처음으로 흉내가 아니라 자기 목소리로 욕을 내뱉고, 해란의 손을 뿌리친다.
바깥에서는 공연 음악이 계속 돌아가고 전구는 더 빨리 깜박인다. 발전기실에서 서복순은 칼날 스위치 손잡이에 천을 감은 채 떨림을 세고 있다. 평소보다 진동이 짧고 거칠다. 누군가 미로 안에서 경계를 흔들고 있다는 뜻이다. 그녀는 전세금이 든 봉투를 작업복 안주머니에 넣고 버티지만, 미로 벽 너머에서 기태가 자기 이름을 부르는 소리와 아이 울음이 한꺼번에 들리자 더는 숫자만 셀 수 없어진다. 복순이 스위치로 달려가려는 순간 국봉철이 피투성이 손으로 미로 밖 틈을 비집고 나와 그녀 앞을 막는다. 그는 지금 내리면 해란이 경계에 박혀 버린다고, 딸을 또 잃는다고 외친다. 복순은 그를 밀치려 하고, 국봉철은 칼날 손잡이를 붙잡는다. 둘은 발전기 앞에서 몸으로 버틴다. 기름 냄새와 뜨거운 금속 냄새 속에서 복순은 자기 아들 전세금을 떠올리다가도, 미로 안에서 들리는 아이 기침 소리에 이를 악문다. 결국 그녀는 국봉철의 다리를 걷어차 무릎을 꺾고, 그의 손등을 신발 뒤축으로 밟아 손잡이에서 떼어 낸다. 그 대가로 국봉철이 휘두른 시계줄에 복순의 뺨이 찢어진다.
같은 순간 미로 안에서는 기태가 오인숙을 뒤에서 밀어 틈 밖으로 빼내고, 해란이 다시 아이 쪽으로 몸을 날린다. 국봉철이 복순을 붙잡고 버티는 동안 기태는 깨진 거울 틈에 자기 흰 분장 묻은 손바닥을 찍어 누른다. 단장실 거울에 남아 있던 손자국 위에 자신의 자국을 겹쳐, 미로가 헷갈리게 만들려는 것이다. 해란은 그 손을 떼어내려 달려들고, 두 사람은 유리 조각 위에서 넘어지며 서로의 얼굴에 같은 상처를 낸다. 그때 복순이 스위치를 내린다.
공원 전체가 단숨에 꺼진다. 북소리도 멎고 회전목마도 덜컥 멈춘다. 어둠 속에서 미로의 통로는 잠깐 돌처럼 굳는다. 오인숙은 아이를 끌어안은 채 출구 쪽 바닥으로 굴러 나오고, 국봉철은 발전기실 문턱에 무릎 꿇은 자세로 멈춘다. 기태와 해란은 깨진 거울 앞에서 서로의 손목을 붙잡은 채 고정된다. 누가 안쪽이고 누가 바깥인지 분간되지 않는 한순간, 기태는 해란이 쥔 풍선 줄을 자기 손목에 감고, 해란의 손을 거울 안쪽으로 밀어 넣는다. 그러나 해란도 마지막 힘으로 기태의 조끼를 잡아당긴다. 두 사람의 몸이 동시에 경계를 넘나들다가, 국봉철이 어둠 속에서 딸 이름을 부르며 기어와 둘 사이에 팔을 넣는다. 그의 팔이 거울 틈에 끼고, 그 무게 덕분에 해란 쪽 경계가 안으로 기운다. 다시 불이 들어왔을 때, 바깥 바닥에는 기태와 오인숙, 아이, 피 흘리는 국봉철, 숨 헐떡이는 복순이 있다. 거울 안쪽에는 해란 혼자 서 있다. 그러나 그녀 얼굴은 더 이상 기태를 닮지 않고, 처음 보는 자기 얼굴로 돌아가 있다.
국봉철은 거울에 매달려 딸을 꺼내려 하지만, 해란은 안쪽에서 한 번만 고개를 젓는다. 그녀는 풍선 줄을 풀어 바닥에 놓고, 뒤돌아 미로의 어둠 속으로 걸어간다. 출구는 닫힌다. 국봉철은 그 자리에서 울부짖지만, 이번에는 공연 음악이 덮어 주지 않는다. 전구가 꺼진 공원에는 그의 소리만 남는다.
밤이 새기 전, 오인숙은 아이를 버스 종점 쪽으로 직접 데리고 나간다. 기태는 매표소 벽판을 뜯어 연필금으로 새겨진 키 표시들을 통째로 빼낸다. 국봉철은 도망치지 않는다. 그는 단장실 거울을 자기 손으로 들어 공터 바닥에 내던져 산산조각 내고, 경찰이 오기 전까지 회수되지 않은 표 묶음을 품에 안고 무대 앞 의자에 앉아 있다. 복순은 발전기 기름 밸브를 잠그고, 다시는 이 불이 켜지지 않게 천막 줄을 끊는다. 기태는 마지막으로 무대 위에 올라 관객 없는 객석을 향해 선다. 흰 분장은 땀과 피에 지워져 반쪽만 남아 있다. 그는 누구의 목소리도 흉내 내지 않고 자기 목소리로, 오늘 여기서 아이들이 사라졌고 단장이 알고도 덮었다고 공터 바깥 사람들에게 외친다. 버스 종점에서, 공장 담벼락에서, 철제 울타리 밖에서 몇 사람이 멈춰 돌아본다. 박수는 없다. 대신 새벽빛 속에서 공원이 장사판이 아니라 범죄 현장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기태는 막차 품삯도, 떠날 자리도 잃지만, 처음으로 자기 얼굴로 울타리 밖으로 걸어 나간다. 그의 발바닥에서는 여전히 톱밥 냄새가 나고, 뒤편 공터에서는 깨진 거울 조각들이 해 뜨기 전 마지막 불빛을 짧게 받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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