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11시 47분, 윤다솜은 올리브영 명동점 계산대 앞에서 박카스 디카페 병뚜껑 여섯 개를 손바닥에 굴린다. 유리문 밖에서는 형광 조끼를 입은 감염자들이 행사 매대 박스를 밀고 있고, 문틈에 끼워 둔 파티온 노스카나인 트러블 크림 배너가 젖은 종이처럼 휘어진다. 다솜은 손톱으로 병뚜껑마다 흠집을 내 번호를 만들고, 오쏘몰 바이탈 선물세트 포장 끈을 뜯어 사람들 손목에 묶는다. 먼저 뛸 사람은 박카스 디카페를 마시고, 다음 사람은 오쏘몰 바이탈 한 포를 씹는다. 물자가 아니라 순서다. 순서가 있어야 사람들이 서로를 밀치지 않는다.
그러나 백이안이 계산대 아래로 기어들며 그 질서를 깨뜨린다. 그는 먼지와 깨진 아크릴 조각 사이에서 애크논 크림을 움켜쥐고, 턱에 오른 붉은 자국을 손등으로 가린 채 울먹인다. “저 감염 아니에요. 내일 평가라서요.” 누군가 욕을 하며 그를 끌어내려 하자, 백이안은 파티온 진열대 밑으로 어깨를 밀어 넣어 버틴다. 그가 붙잡은 진열대가 밀리지 않으면서 자동문 앞 방어선은 잠깐 버티지만, 동시에 통로가 막혀 첫 번째 탈출자가 나갈 길도 좁아진다. 다솜은 그를 야단치려다가, 감염자 하나가 유리에 이마를 박는 소리에 바코드 스캐너를 켠다. 삑. 한 번. 바깥의 감염자들 고개가 동시에 돌아간다. 다솜은 손가락을 얼어붙은 듯 멈추고, 스캐너를 계산대 아래로 던진다.
문태경은 그때 뒷문 쪽 복도에서 류하민을 끌고 나타난다. 류하민의 흰 셔츠 소매는 먼지와 피로 뭉개져 있고, 손에는 오쏘몰 바이탈 샘플 박스가 들려 있다. 문태경은 다른 손에 노스카나 튜브를 쥔 채 “매니저님이 아직 숨 쉽니다”라고 말하지만, 턱을 어깨에 붙이고 목덜미를 끝까지 보이지 않는다. 다솜은 그 상처를 보려 하고, 문태경은 배송 송장 뭉치를 가슴에 눌러 숨긴다. 그는 뒷문 비밀번호가 적힌 송장을 봤다고 말한다. 자기를 묶지 않으면 하역장까지 안내하겠다고 한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창고 안 손님들이 그를 밀어붙인다. 문태경은 반듯하게 접던 송장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류하민의 몸을 방패처럼 끌어안는다. 다솜은 무전기 줄로 그의 손목을 선반 기둥에 묶는다. 그 순간 유리문 쪽 진열대가 한 뼘 밀린다.
고명례는 남편 서봉춘의 입가를 물티슈로 닦는다. 서봉춘은 검가드 샘플컵에 남은 민트색 액체를 입에 머금고 헹군 뒤, 붉게 탁해진 침을 바닥에 뱉는다. 사람들의 눈이 그의 입으로 몰린다. 고명례는 컵을 들어 보이며 “잇몸이라 안 캅니까”라고 말하지만, 목소리는 낮게 떨린다. 다솜이 두 번째 박카스 병뚜껑을 다른 손님에게 주는 순간, 고명례는 몸을 돌려 남편의 병뚜껑과 바꿔 놓는다. 백이안은 그 장면을 본다. 고명례는 그에게 오쏘몰 바이탈 한 포를 쥐여 주며 “턱에 바를 거 찾았으면 입도 닫아 주소”라고 속삭인다. 은박 포장이 그의 손 안에서 구겨진다. 백이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휴대폰 전면 카메라에 비친 자기 얼굴 뒤로 다솜이 병뚜껑을 다시 세는 모습이 들어온다.
류하민은 의식을 잃었다가 깨어나며 바닥의 먼지를 손가락으로 긁는다. 다솜은 그가 비밀번호를 쓰는 줄 알고 몸을 낮추지만, 류하민은 삐뚤어진 파티온 행사 배너를 가리킨다. 다솜이 배너를 접어 창고 문틈에 밀어 넣자, 류하민은 그제야 오쏘몰 바이탈 샘플 박스를 내민다. 박스 바닥에는 얇은 보조배터리가 테이프로 붙어 있다. 자동문을 살리면 문이 열리고, 동시에 모터음이 감염자를 부른다. 류하민은 입술 안쪽을 씹어 피를 삼키며 고개를 젓는다. 그는 살리라는 뜻인지, 쓰지 말라는 뜻인지 끝까지 말하지 못한다. 다솜은 박스를 받아 들고 처음으로 손님들에게 등을 돌린다. 그녀는 창고 선반 아래 숨겨 둔 폐기 예정 간식 상자를 발로 더 깊이 밀어 넣는다. 백이안이 그것을 본다.
밤 11시 54분, 냉장고 컴프레서가 규칙적으로 웅 하고 울린다. 바깥 감염자들이 유리문에서 냉장고 쪽으로 몸을 돌린다. 다솜은 냉장고 플러그를 뽑으려 달려가고, 문태경은 묶인 손목을 비틀어 피가 배도록 줄을 느슨하게 만든다. 그는 발끝으로 굴러온 박카스 디카페 병을 세워 놓고, 자신이 아직도 물건을 정리하고 있다는 사실에 얼굴을 찡그린다. 다솜이 플러그를 잡는 순간, 고명례가 남편을 먼저 내보내 달라고 다솜의 앞을 막는다. 백이안은 고명례가 바꾼 병뚜껑을 꺼내 보인다. 창고 안 공기가 얼어붙는다. 서봉춘은 아내의 손에서 병뚜껑을 빼앗아 바닥에 던지고, 자기 번호를 맨 뒤로 옮기라고 다솜에게 말한다. 고명례가 그의 팔을 붙잡자, 그는 손등을 빼지만 곧 무릎을 꿇어 그녀의 풀린 운동화 끈을 두 번 묶는다. “당신은 넘어지면 안 된다.”
그때 자동문 배터리가 죽은 줄 알았던 전원에 잔광이 돌아온다. 류하민의 보조배터리가 바닥에서 미끄러져 단자에 닿은 것이다. 문이 양옆으로 몇 센티미터 열린다. 모터음이 길게 울리고, 감염자들이 한꺼번에 매장 안으로 밀려든다. 서봉춘은 진열대 밑 쇠받침의 휘어진 각도를 보고 쇠막대를 꽂는다. 그는 버스 차고지에서 하던 손놀림으로 자동문 레일을 비틀어 문이 반쯤 열린 채 걸리게 만든다. 틈은 한 사람씩 겨우 빠져나갈 만큼 남는다. 대신 서봉춘의 손등이 레일에 눌려 찢어진다. 피가 흐르자 사람들은 뒤로 물러서고, 고명례는 검가드 샘플컵을 들고 그의 앞에 선다. 컵 안의 마지막 액체가 흔들린다.
다솜은 이제 순서를 다시 짜지 않는다. 그녀는 병뚜껑을 모두 계산대 위에 쏟아 버리고, 사람들을 몸으로 밀어 줄 세운다. 첫 번째는 아이를 안은 손님, 두 번째는 고명례, 세 번째는 류하민을 부축한 문태경이다. 문태경은 묶인 줄을 끊어낸 뒤 도망칠 수 있었지만, 류하민의 겨드랑이에 어깨를 넣고 일으킨다. 누군가 그의 목덜미를 잡아채 상처를 보려 하자, 문태경은 웃으려다 실패하고 노스카나 튜브를 그 손에 밀어 넣는다. “나중에 흉터 남으면 바르세요. 지금은 밀어요.” 상처는 물린 자국처럼 보이지도,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다솜은 그를 놓아 준다. 신뢰가 아니라 시간이 없어서다.
백이안은 탈출 틈 앞에서 멈춘다. 바깥 네온빛에 젖은 유리문에 자기 얼굴이 비치고, 턱의 붉은 자국이 더 도드라져 보인다. 그는 애크논 크림을 주머니에 넣고, 파티온 진열대 아래로 다시 기어든다. 다솜이 그의 이름을 부르자, 백이안은 울면서도 진열대 바퀴를 발로 걸어 감염자들의 시야를 막는다. 그가 낮은 곳에서 몸을 밀어 넣은 덕분에 서봉춘이 비튼 문틈이 몇 초 더 버틴다. 감염자 하나가 그의 후드 끈을 붙잡지만, 문태경이 류하민을 내려놓고 달려와 백이안의 목덜미 라벨을 찢어 끊는다. 백이안은 바닥을 구르며 빠져나오고, 손에 쥔 애크논 크림은 찌그러져 내용물이 손바닥에 묻는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다솜과 서봉춘이다. 고명례는 통로 밖에서 남편을 부르며 다시 들어오려 하고, 다솜은 그녀를 밀어낸다. 서봉춘은 쇠막대를 놓으면 문이 열린다는 걸 안다. 그는 다솜에게 자기 대신 류하민의 오쏘몰 박스 안쪽을 보라고 말한다. 다솜이 박스 바닥을 찢자, 비상구 열쇠 하나와 직원용 뒷문 카드가 떨어진다. 류하민은 비밀번호를 숨긴 것이 아니었다. 그는 본사 행사 지시 때문에 막아 둔 하역장 문을 열 열쇠를 샘플 박스에 숨겨 두고도, 매출과 책임이 두려워 마지막까지 꺼내지 못한 것이다. 다솜은 열쇠를 쥐고 서봉춘을 끌어당기려 하지만, 서봉춘은 쇠막대를 더 깊이 박는다. 그의 손이 떨리고, 입가에서 다시 피가 번진다. “문 닫히면 뛰어라.”
다솜은 그를 버리지 않는다. 그녀는 카운터로 달려가 남은 박카스 디카페 병 하나를 바닥에 던져 깨뜨린다. 유리가 튀고 단 냄새가 퍼진다. 감염자들은 소리가 아니라 자동문 모터음에 몰려 있지만, 바닥에 흐른 병이 레일에 스며들며 문이 덜컥 멈춘다. 다솜은 그 짧은 멈춤 사이 서봉춘의 허리띠를 붙잡고 온몸으로 잡아당긴다. 쇠막대가 빠지며 문이 크게 열리고, 감염자들의 팔이 쏟아진다. 백이안이 통로 쪽에서 파티온 배너를 다시 밀어 넣고, 문태경이 류하민의 몸을 기대 세운 채 진열대를 걷어찬다. 고명례는 남편의 피 묻은 손을 잡고, 이번에는 그가 빼지 못하게 손가락을 얽는다. 모두가 한 덩어리처럼 하역장 문으로 밀려간다.
하역장 입구에서 다솜은 류하민의 카드로 문을 연다. 전자음이 짧게 울리고, 멀리 있던 감염자 몇이 방향을 튼다. 다솜은 문이 열리는 순간 카드를 뽑아 부러뜨린다. 다시는 이 문이 쉽게 열리지 않게 하려는 행동이다. 류하민은 그것을 보고 힘없이 웃다가, 삐뚤어진 명찰을 바로 세운다. 문태경은 송장 뭉치를 찢어 젖은 바닥에 뿌린다. 이제 그 숫자들은 누구를 먼저 살릴 힘이 없다. 백이안은 휴대폰을 꺼내려다 멈추고, 화면 대신 자기 손에 묻은 애크논 크림과 먼지를 바지에 문지른다. 고명례는 검가드 샘플컵을 버리지 못하고 주머니에 넣는다. 서봉춘은 피 맛을 삼키며 아무렇지 않은 척 걷지만, 고명례가 그의 팔을 어깨에 올리자 이번에는 거절하지 않는다.
지하상가로 내려가는 계단 앞, 다솜은 마지막으로 매장 안을 돌아본다. 형광등은 아직 켜져 있고, 냉장고는 꺼져 있으며, 파티온 코너에는 발자국과 손자국이 어지럽게 남았다. 그녀가 세운 질서는 무너졌지만, 그 무너진 틈으로 사람들이 빠져나왔다. 다솜은 손에 남은 병뚜껑 하나를 계단 난간 위에 올려놓는다. 누가 몇 번째였는지 더는 중요하지 않다. 아래 4호선 통로에서는 비상등이 깜박이고, 멀리서 또 다른 자동문 모터음이 들린다. 사람들은 그 소리를 듣고 동시에 숨을 죽인다. 다솜은 무전기를 버리고, 두 손으로 하역장 철문을 닫는다. 문이 잠기는 소리는 작지만 분명하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어둠 속으로 내려간다. 각자 몸에 제품 하나씩, 거짓말 하나씩, 빚 하나씩을 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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