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거리
학교 축제 전날 저녁, 손연서는 체육관 한가운데 세워진 설탕 유리 성의 장미 전구를 하나씩 닦으며 인간 생활 기록부 마지막 칸에 찍힐 도장을 기다린다. 그녀의 목표는 단순하다. 자정까지 아무도 물지 않는 것. 더 정확히는, 송머루를 물고 싶다는 몸의 명령을 끝까지 거절하는 것. 송머루는 무대팀 앞치마에 톱밥을 묻힌 채 성벽 리본을 다듬다가 목공용 칼에 오른손 검지를 베고, 붉은 피 한 방울이 분홍 리본 끝에 맺힌다. 체육관 공기가 딸기 사탕을 녹인 듯 달아지고, 손연서는 입술을 다문 채 은제 손수건으로 그 리본을 감아 쥔다. 손바닥이 은에 데인 듯 하얗게 질리지만, 그녀는 피를 보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린다. 송머루는 겁먹은 얼굴로 웃으며 “괜찮아, 내가 감을게” 하고 붕대를 꺼낸다. 그 다정함 때문에 손연서는 한 걸음 물러선다.
그때 윤치우가 축제 와인 부스에서 걸어 나온다. 그는 잔도 없이 허공을 기울여 향을 맡는 시늉을 하고, 송머루의 피를 “백 년 동안 잠긴 첫 디저트 와인”이라고 말한다. 학생들은 농담인 줄 알고 웃지만, 관객석 뒤편에 앉은 몇몇 뱀파이어 학부모들의 눈빛이 동시에 식는다. 윤치우는 피 묻은 리본을 손연서의 손에서 빼앗으려 손을 뻗고, 손연서는 은제 손수건을 더 세게 움켜쥔다. 손바닥 안쪽이 타들어 가도 놓지 않는다. 그 모습을 본 도현제가 안전요원 완장을 고쳐 매고 체육관 바닥에 소금 원을 그린다. 그는 손연서에게 원 안으로 들어가라고 명령하고, 송머루에게는 원 밖에서 움직이지 말라고 한다. 보호처럼 보이는 격리다. 손연서는 원 안에 갇힌 채 송머루를 바라보고, 송머루는 자기 때문에 그녀가 갇혔다는 사실을 깨닫고 붕대 끝을 손바닥 안으로 말아 넣는다.
밤 9시 종이 울리기 전, 나비령은 미술반 작업복 주머니에서 작은 황동 열쇠를 꺼내 손연서에게 건넨다. 열쇠는 설탕 유리 성 뒤편의 비상문을 여는 장치다. 나비령은 장미 조명이 피면 성벽 안쪽에 사람 하나가 빠져나갈 수 있는 좁은 통로가 생긴다고 설명한다. 그녀는 송머루의 피 묻은 리본을 장미 전구의 꽃잎 속에 접어 넣으면 조명이 그 향을 따라 길을 밝힐 거라고 말한다. 말끝에는 “축제 안내상 비밀 통로는 관계자만 이용 가능합니다” 같은 우스꽝스러운 멘트를 붙이지만, 손가락은 떨린다. 손연서는 그 열쇠를 받지 않으려 한다. 도망치면 인간 졸업 심사는 끝난다. 그러나 송머루가 “네가 사람이 되고 싶어 한 시간이 나보다 길잖아”라고 말하며 열쇠를 그녀 쪽으로 밀자, 손연서는 결국 열쇠를 교복 리본 안쪽에 숨긴다.
9시 종이 울리고 장미 조명이 하나씩 열린다. 유리 꽃잎 안쪽 필라멘트가 붉게 달아오르자 체육관은 동화책 속 무도회장처럼 변한다. 동시에 설탕 유리 성 아래에서 낮은 냉각음이 올라온다. 나비령은 스위치 박스에 귀를 대고 얼굴이 굳는다. 자신이 만든 꽃줄기 회로가 비상문만이 아니라 지하 숙성 관 문에도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아차린 것이다. 백사월은 후원 재단 이사다운 부드러운 미소로 체육관 뒤편 계단에서 나타난다. 흰 장갑에는 설탕 가루가 묻어 있고, 손에는 은시계가 들려 있다. 그녀는 학생들에게 장미 사탕을 나눠 주며 송머루 앞에서 멈춘다. 사탕 봉지의 리본은 붉은색이다. 백사월은 송머루의 붕대를 보지 않는 척하면서도 그의 손목을 아주 가볍게 잡고, “축제 후원 재단은 귀한 재능을 놓치지 않아요”라고 말한다. 손연서가 소금 원 밖으로 발을 내딛으려 하자 소금 알갱이가 구두코에 밀려 흩어진다. 도현제가 그녀 앞을 몸으로 막는다. 그는 규칙을 지키려는 얼굴로 서 있지만, 손은 마이크 선을 세게 감아쥐고 있다.
윤치우는 백사월과 맺은 후원 계약 때문에 겉으로는 그녀의 편에 선다. 그는 손연서가 보는 앞에서 송머루의 피 묻은 리본 한쪽을 장미 전구에 끼워 넣고, 조명 꽃잎을 손끝으로 닫는다. 그러자 유리 성의 계단 아래 숨은 문이 미끄러지듯 열리고, 차가운 지하 공기가 체육관으로 올라온다. 송머루는 뒤로 물러서다 소금 원 가장자리의 알갱이에 미끄러져 넘어지고, 도현제는 반사적으로 무릎을 꿇어 그의 운동화 끈을 묶어 준다. 그 짧은 틈에 백사월의 직원들이 축제 장식 상자를 옮기는 척하며 송머루의 팔을 붙잡는다. 손연서는 원 안에서 이를 악물고 버틴다. 그녀가 먼저 다가갈 수 없다는 규칙이 목줄처럼 조여 온다. 송머루는 붙잡힌 채로도 손연서에게 손을 내밀지 않는다. 손을 내밀면 원의 보호가 약해진다는 것을 방금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대신 붕대 감긴 손을 등 뒤로 숨기고, 입술만 움직여 “오지 마”라고 말한다.
그 말이 손연서를 더 흔든다. 그녀는 인간으로 졸업하고 싶었다. 하지만 송머루가 자신을 위해 두려움을 삼키는 모습을 보자, 졸업장보다 그의 체온이 먼저 떠오른다. 손연서는 은제 손수건을 입술에 물고 소금 원 안쪽에 무릎을 꿇는다. 손바닥으로 바닥을 문질러 흩어진 소금을 다시 모으고, 자신이 갇힌 원을 더 선명하게 만든다. 도현제는 그 행동을 보고 처음으로 명령서를 접는다. 그는 스피커 뒤에 숨겨 둔 교황청 보고서를 꺼내 찢지 않는다. 대신 그 종이를 소금 주머니 아래 깔아 바닥에 고정하고, 늑대인간의 힘으로 체육관 문을 닫아 뱀파이어 손님들이 더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다. 그 대가로 그는 교황청의 휴전 규정을 어기게 된다. 문밖에서 누군가 은손잡이를 두드리지만, 도현제는 등을 문에 붙이고 버틴다.
백사월은 기다렸다는 듯 은시계를 귀에 댄다. 초침이 고르게 움직이자 그녀는 지하 계단 쪽으로 송머루를 끌고 간다. 손연서는 원 밖으로 나갈 수 없고, 송머루는 그녀를 부를 수 없다. 그때 나비령이 사다리를 타고 장미 조명 위로 올라간다. 그녀는 겁에 질려 종소리마다 어깨를 움츠리면서도, 손가락 없는 장갑으로 뜨거운 전구를 잡아 돌린다. 장미 꽃잎 하나가 깨지고 설탕 유리 가루가 눈처럼 떨어진다. 나비령은 피 묻은 리본을 다른 꽃잎으로 옮겨 꽂아 통로의 방향을 바꾸려 하지만, 회로가 스파크를 튀기며 그녀의 손목을 태운다. 그녀는 비명을 삼키고 스위치를 붙든다. 장미 조명의 빛이 두 갈래로 갈라진다. 하나는 체육관 뒤 비상문으로, 하나는 지하 숙성실로 이어진다. 손연서는 같은 장밋빛 아래서 어느 길이 살 길인지 알아내야 한다.
윤치우가 그 순간 손연서에게 다가온다. 그는 뻔뻔한 미소를 지으며 “네가 물면 끝나. 그 애는 상품이 아니게 돼”라고 말한다. 하지만 손연서가 그를 노려보자, 윤치우는 소매의 은단추를 비틀다가 발끝으로 은제 손수건을 그녀 쪽으로 밀어 준다. 그는 백사월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 낮게 덧붙인다. “피 묻은 리본이 꽂힌 꽃이 아니라, 피 냄새를 가장 싫어하는 꽃을 따라가.” 손연서는 이해하지 못하다가 나비령의 장치가 사람의 욕망을 따라 길을 여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숨기려는 손의 떨림까지 읽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나비령이 매번 송머루의 붉은 얼룩을 보고 꽃잎 접는 순서를 세 번 확인했던 이유다. 비상문 쪽 장미 전구 하나만 유독 차갑게 은빛을 튕겨 내고 있다. 손연서는 그쪽이 탈출구임을 알아본다.
그러나 백사월도 알아차린다. 그녀는 송머루의 팔을 놓고 손연서에게 직접 다가온다. 소금 원 앞에 멈춘 백사월은 장갑 낀 손으로 바닥의 소금 선을 쓸어낸다. 뱀파이어가 먼저 들어갈 수는 없지만, 선이 흐려지면 보호는 약해진다. 손연서는 무릎으로 소금을 막고, 백사월은 미끄러운 설탕 가루가 묻은 구두로 원의 가장자리를 밟아 뭉갠다. 두 사람은 체육관 바닥에서 아주 가까이 마주 선다. 백사월은 부드럽게 말한다. “네가 그 아이를 물면 나는 네 이야기를 팔 거야. 네가 물지 않으면 그 아이의 피를 팔 거고.” 손연서는 대답 대신 은제 손수건으로 자기 손을 감고, 흐려진 소금 선을 손바닥으로 다시 눌러 그린다. 은이 살갗을 태우지만 그녀는 손을 떼지 않는다.
마지막 왈츠가 시작된다. 도현제가 일부러 음악을 길게 틀어 둔 탓에 자정까지 남은 시간은 몇 분뿐이다. 송머루는 백사월의 직원들에게 끌려 지하 계단 첫 칸에 발을 디딘다. 차가운 김이 그의 발목을 감싼다. 손연서는 더 이상 원 안에서 버틸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송머루가 지하 숙성 관에 누우면 자정 전에 백사월의 계약권이 먼저 닫힌다. 그녀는 송머루에게 손을 내밀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자신이 가진 황동 열쇠를 원 밖으로 던진다. 열쇠는 송머루의 발치가 아니라 윤치우의 구두 앞에 떨어진다. 모두가 손연서가 송머루에게 매달릴 거라 예상한 순간, 그녀는 윤치우를 선택하게 만든다. 윤치우는 백사월과의 계약을 지키면 순혈 사교계의 후계자로 남고, 열쇠를 주우면 자신의 집안이 숨겨 온 거래를 배신한다.
윤치우는 한 박자 늦게 웃는다. 그리고 열쇠를 줍는다. 그는 지하 계단을 내려가려는 백사월의 팔을 붙잡고, “상품 보호는 후원자의 의무라면서요”라고 말한다. 백사월이 그의 손목을 비틀자 은단추가 떨어져 계단에 굴러간다. 윤치우는 고통에 얼굴을 찡그리지만 놓지 않는다. 그 사이 도현제가 문에서 몸을 떼고 달려와 직원 하나를 밀쳐 낸다. 늑대인간의 힘에 장식 상자가 무너지고 설탕 유리 조각이 바닥에 흩어진다. 나비령은 사다리 위에서 비상문 쪽 장미 전구를 맨손으로 뽑아내고, 뜨거운 전구를 스위치 박스에 내리꽂아 회로를 끊는다. 체육관 절반이 어둠에 잠기고, 지하 숙성 관들의 문이 닫히기 시작한다.
송머루는 그 틈에 계단 난간을 붙잡고 버티지만, 백사월은 장갑 낀 손으로 그의 붕대 끝을 잡아당긴다. 상처가 다시 벌어지고 피 냄새가 체육관을 가득 채운다. 손연서의 눈동자가 어둡게 번진다. 그녀는 원 밖으로 나간다. 규칙을 깨는 발소리가 소금 알갱이 위에서 작게 부서진다. 도현제가 그녀를 막으려다 멈춘다. 손연서는 송머루에게 달려가 그의 목덜미를 붙잡는다. 송머루는 도망치지 않는다. 대신 딸기 사탕 하나를 그녀 손에 쥐여 준다. “네가 나를 먹는 게 아니라, 네가 나를 고르는 거면 괜찮아.” 손연서는 그의 목에 입술을 가까이 대지만, 물지 않는다. 그녀는 송머루의 상처 난 손가락을 은제 손수건으로 감싸 자기 입에서 떼어 놓고, 그의 목덜미 위에 자신의 손바닥을 세게 누른다. 은에 데인 손에서 피가 아니라 탄 냄새가 난다. 그녀는 뱀파이어의 표식 대신 자신의 화상 자국을 남긴다. 규칙에는 없는 방식이다. 피를 마신 표식은 아니지만, 모든 뱀파이어가 맡을 수 있는 은의 냄새가 송머루의 향 위에 덮인다. 더 이상 미개봉 상품이라고 부를 수 없을 만큼, 그의 향은 손연서가 감수한 고통으로 더럽혀진다.
백사월은 처음으로 미소를 잃는다. 그녀는 그것이 계약상 표식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송머루를 다시 끌어가려 한다. 그러자 윤치우가 자신의 손목을 깨물어 피를 한 방울 떨어뜨리고, 그 피를 송머루가 아닌 백사월의 흰 장갑 위에 묻힌다. 순혈 후계자의 피가 거래상의 장갑을 더럽힌 순간, 체육관에 숨어 있던 뱀파이어 손님들이 술렁인다. 백사월이 숨겨 온 숙성 관 거래가 더 이상 은밀한 감식의 문제가 아니라 순혈 가문의 공개적인 추문이 된다. 도현제는 찢지 않았던 교황청 보고서를 바닥에 던지는 대신, 백사월의 손목에 은실을 감아 직접 계단 난간에 묶는다. 종이보다 몸이 먼저다. 백사월은 벗어나려 하지만, 나비령이 설탕 가루를 닦아 둔 난간은 오히려 은실을 단단히 물고 놓지 않는다.
자정 종이 울린다. 교황청의 임시 보호권도, 뱀파이어 후원 재단의 계약권도 완전한 승리를 얻지 못한다. 손연서는 송머루의 피를 마시지 않았지만, 소금 원을 스스로 나갔고 은으로 그의 향을 덮었다. 인간 졸업 도장은 찍히지 않는다. 대신 도현제는 손연서와 송머루를 보호 명단 맨 아래에 손으로 적고, 그 종이를 자신의 조끼 안쪽에 넣는다. 공식 문서가 아니라 그가 몸으로 책임져야 할 약속이다. 윤치우는 백사월의 계약서를 찢는 대신, 체육관 한가운데 떨어진 자신의 은단추를 주워 손연서에게 건넨다. “네가 사람인 척하는 건 재미없었어. 그런데 오늘은 좀 볼 만했어.” 말은 가볍지만 손끝은 떨린다.
축제 당일 아침, 설탕 유리 성은 절반쯤 무너진 채 남아 있다. 학생들은 밤사이 무대 사고가 있었다고 수군대고, 나비령은 붕대 감은 손으로 장미 조명 몇 개를 다시 달며 이번에는 지하로 이어지는 꽃줄기를 모두 잘라 낸다. 백사월은 교황청과 뱀파이어 사교계 양쪽의 감시 아래 성라온학원을 떠나지만, 그녀가 나눠 준 장미 사탕 봉지 몇 개는 아직 관객석 아래에 남아 있다. 시장은 사라지지 않았다. 문 하나가 닫혔을 뿐이다.
손연서는 인간 졸업장을 받지 못한 채 교실 책상에 앉는다. 송머루는 마지막 왈츠 신청서를 다시 접어 그녀 앞에 놓는다. 이번에는 손가락에 새 붕대를 감았고, 주머니에는 딸기 사탕 대신 은박 포장지를 벗긴 평범한 캐러멜이 들어 있다. 손연서는 신청서를 오래 바라보다가 컵 가장자리에 입술을 대지 않고 웃는다. 송곳니가 아주 조금 보인다. 송머루는 놀라지 않는다. 체육관 창밖으로 늦가을 은행잎이 젖은 금박처럼 붙어 있고, 꺼진 장미 전구 하나가 햇빛을 받아 희미하게 반짝인다. 손연서는 사람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처음으로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괴물인 자신을 숨기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