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거리
윤태겸은 화요일 밤 10시 37분, 냉동창고 바닥에 흰 소금을 한 줌씩 뿌린다. 소금은 피가 스며든 배수구 근처에서 젖은 눈처럼 뭉친다. 그는 오늘 도착할 상자를 열지 않겠다고 결심했지만, 계산대 위에는 이미 빈 냄비 여섯 개가 놓여 있다. 냄비 손잡이에는 아이들 장갑에서 묻은 흙과 노인 손등의 약 냄새가 남아 있다. 윤태겸은 칼을 갈아 형광등에 비춰 보고, 소금통 밑에서 지난주 이빨 세 개를 꺼낸다. 그중 하나는 서이령이 필름 봉투에 그려 준 실종자 아버지의 어금니와 같은 모양이다. 윤태겸은 이빨을 다시 묻지 못하고 손바닥에 쥔 채 냉동창고 안쪽 벽에 귀를 댄다. 벽 너머에서 발톱이 콘크리트를 긁는다. 이어서 목소리가 난다. “윤. 태. 겸.” 이번에는 받침까지 정확하다.
그 순간 정육점 셔터가 밖에서 두 번 두드려진다. 고복례가 장부와 예비 열쇠를 들고 서 있다. 그녀 뒤에는 배급표에 이름이 적힌 주민들이 말없이 줄을 섰고, 마을회관 난로 기름통을 실은 손수레가 눈밭에 멈춰 있다. 고복례는 윤태겸이 손에 쥔 이빨을 보고도 놀라지 않는다. 대신 장부 귀퉁이를 접고, “오늘 안 열면 저 기름도 안 푼다”고 말한다. 윤태겸은 처음으로 계산대 위에 칼을 내려놓지 않고 그녀 앞을 막아선다. 고복례는 그를 밀치지 않는다. 더 나쁘게, 빈 냄비 하나를 들어 냉동창고 문 앞에 놓는다. 냄비 바닥이 콘크리트에 닿는 소리가 상자 봉인끈 끊어지는 소리처럼 울린다.
10시 40분, 마을 입구의 녹슨 차단기가 내려간다. 문해주의 냉동탑차가 눈발을 가르며 들어오지만, 오늘은 평소보다 적재함이 세게 흔들린다. 문해주는 차 머리를 출구 쪽으로 돌려 세우려다가 차단기 불빛을 보고 욕을 삼킨다. 그녀는 시동을 끄지 않은 채 운송장 원본을 품에서 꺼내 윤태겸에게 달려온다. 종이는 아직 젖은 잉크 냄새가 나고, 발신인 칸에는 죽은 윤만식의 서명이 찍혀 있다. 그러나 문해주는 상자를 내리기 전에 적재함 문을 붙잡고 버틴다. 온도계 바늘이 영하가 아니라 36.5도에 멈춰 있기 때문이다. 안에서 누군가 문해주의 숨소리로 짧게 웃는다.
서이령은 늦게 도착한다. 군 보건소에서 훔치다시피 가져온 낡은 치과용 필름 봉투를 외투 안에 숨기고, 정육점 뒷문으로 들어오다 고복례와 마주친다. 고복례는 그녀의 팔을 붙잡아 장갑 낀 손끝에 묻은 기름때 냄새를 맡는다. 서이령은 물러서지 않고 장부를 낚아채려 하지만, 고복례가 열쇠 꾸러미로 그녀의 손목을 내리쳐 필름 봉투가 바닥에 떨어진다. 봉투 안에는 지난주 이빨 사진과 함께 오래전 실종된 서이령의 아버지 치과 기록 사본이 들어 있다. 윤태겸은 그것을 보고 상자를 열지 않겠다는 결심이 흔들린다. 상자를 열면 증거는 더럽혀지지만, 열어야만 다음 이빨이 나온다. 열지 않으면 마을의 난로가 꺼지고, 벽 너머 목소리는 더 가까워진다.
문해주가 적재함을 열자 봉인된 육류 상자가 나타난다. 붉은 끈 매듭은 윤태겸이 어릴 때 윤만식에게 배운 방식과 똑같다. 윤태겸은 매듭을 보자마자 손이 먼저 움직인다. 풀기 쉬운 쪽이 아니라 끊으면 다시 묶을 수 없는 쪽을 찾아낸다. 그때 상자 뚜껑 안쪽 성에가 스스로 긁히며 화살표를 만든다. 화살표는 상자를 가리키지 않고 냉동창고 안쪽 벽의 못 자국 하나를 가리킨다. 윤태겸은 윤만식이 남긴 신호임을 알아차린다. 윤만식은 상자를 열라는 것이 아니라, 상자 속 순서를 벽의 못 자국과 맞추라는 뜻을 남기고 있었다.
그들은 상자를 냉동창고 가운데로 옮긴다. 고복례는 주민들을 밖에 세워 두고 문을 닫으려 하지만, 윤태겸이 그녀의 팔을 잡아 안으로 끌어들인다. “오늘은 같이 봐야 합니다.” 고복례는 처음으로 열쇠 꾸러미를 떨어뜨린다. 안쪽 벽 너머에서 발톱 소리가 멎는다. 윤태겸은 봉인을 뜯지 않고 끈의 매듭만 손가락으로 더듬어 순서를 읽는다. 서이령은 소금통을 가져와 바닥에 엎고, 문해주는 적재함에서 삽 대신 타이어 렌치를 들고 온다. 네 사람은 벽의 못 자국과 상자 매듭, 소금 속 이빨의 개수를 맞춰 본다. 그때 고복례가 장부를 품에 숨기려 하자 서이령이 몸으로 막는다. 둘은 냉동창고 바닥에서 미끄러지며 엉킨다. 장부가 펼쳐지고, 붉은 점이 찍힌 이름들 사이에 40년 전부터 이어진 같은 표시가 드러난다. 서이령 아버지의 이름도 있다.
고복례는 결국 말한다. 40년 전 폭설 속에서 백암리는 굶었다. 윤만식은 폐광 갱도와 이어진 도살장 안쪽 공간에서 처음으로 그 존재를 들었고, 마을은 죽은 가축과 실종된 사람의 경계를 흐리며 겨울을 넘겼다. 윤만식은 마지막에 벽을 막고 자신도 함께 갇혔다고 기록되었지만, 실제로는 안쪽것이 그의 손글씨와 매듭을 배워 상자를 보내기 시작했다. 고복례는 소녀였던 자신이 그 첫 장부를 들고 집집마다 고기를 나눴다고 고백한다. 그녀는 죄를 숨기려 한 것이 아니라, 죄가 끊기면 사람들이 바로 죽는다고 믿어 왔다. 윤태겸은 그 말을 듣고도 칼을 들지 않는다. 대신 고복례의 장부를 난로 불에 던지려는 문해주의 손목을 붙잡는다. 장부가 사라지면 배급의 권력은 무너지지만, 이름도 함께 사라진다.
자정이 가까워지자 규칙이 몸을 드러낸다. 냉동기 소리가 꺼지고, 냉동창고 벽의 성에가 안쪽에서 밀려나온다. 봉인을 뜯지 않은 상자는 스스로 부풀어 오르고, 끈 사이로 사람 체온 같은 김이 샌다. 밖에서는 주민들이 문을 두드린다. 고복례는 그 소리를 듣고 다시 장부를 주워 들려 하지만, 윤태겸이 이번에는 그녀의 열쇠 꾸러미를 발로 차 배수구 쪽으로 밀어 넣는다. 고복례는 무릎을 꿇고 열쇠를 잡으려다 벽 밑 틈에서 밀려 나온 이빨 하나를 본다. 젖니다. 장부의 붉은 점 옆에 적힌 아이 이름과 맞는 위치다. 고복례의 손이 멈춘다.
안쪽것은 벽 너머에서 윤태겸의 목소리로 말한다. “열어.” 윤태겸은 대답하지 않는다. 그는 상자를 열지 않고, 칼등으로 뚜껑의 성에를 긁어 윤만식의 화살표가 가리킨 못 자국을 따라간다. 못 자국들은 단순한 흠집이 아니라 상자를 열어 온 순서였다. 어느 집에 고기가 갔고, 어느 이름이 사라졌고, 어느 이빨이 소금 속에 묻혔는지 벽 자체가 장부였다. 윤만식은 죽은 뒤에도 맞춤법 틀린 쪽지와 매듭으로 손자에게 벽을 읽히려 한 것이다. 서이령은 자기 아버지의 어금니가 들어 있던 소금 한 줌을 벽 밑 틈에 밀어 넣는다. 안쪽것이 처음으로 윤태겸이 아니라 서이령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부른다. 서이령은 입술을 깨물고 대답하지 않는다.
고복례는 밖의 주민들에게 문을 열어 주려 한다. 윤태겸이 막아서자 그녀는 그의 뺨을 때린다. “산 사람부터 먹여야 해.” 윤태겸은 피가 난 입술을 닦고, 고복례가 늘 난로 옆에 두던 빈 기름통을 들어 냉동창고 가운데에 붓는다. 기름 냄새가 푸른 형광등 아래 퍼진다. 문해주는 그가 벽을 태우려는 줄 알고 말리지만, 윤태겸은 불을 붙이지 않는다. 그는 기름으로 바닥에 선을 그어 주민들이 들어와도 상자에 손대지 못하게 만들고, 칼을 거꾸로 쥔 채 문 앞에 선다. 상자를 열지 않는 대신, 벽의 기록을 모두 앞에서 읽겠다는 선택이다. 굶주림을 해결하는 봉인이 아니라, 굶주림을 만든 이름들을 꺼내는 봉인이다.
자정 직전, 안쪽 벽이 안에서 밀린다. 콘크리트가 갈라지고 길고 창백한 손가락들이 틈으로 나온다. 안쪽것은 괴물처럼 뛰쳐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냉동창고 바닥에 엎드려 흘러나온 소금을 핥고, 상자 쪽이 아니라 윤태겸의 입을 바라본다. 대답을 원한다. 윤태겸은 자기 이름을 들으려던 욕망을 삼키고, 대신 상자 뚜껑을 칼끝으로 들어 올려 안의 이빨만 소금 위에 쏟아 낸다. 고기는 그대로 둔다. 규칙은 상자를 자정 전에 냉동창고 안에서 열라고 했지, 먹이라고 하지 않았다. 안쪽것이 벽을 긁으며 분노하자 문해주가 타이어 렌치로 갈라진 콘크리트를 내려친다. 벽 일부가 무너지고, 그 뒤에서 갱도 같은 검은 공간과 오래된 고깃갈고리, 윤만식의 낡은 앞치마 조각이 드러난다.
그때 윤만식의 손글씨가 상자 뚜껑 안쪽 성에에 마지막으로 떠오른다. 삐뚤빼뚤한 글씨는 ‘냉똥’처럼 틀렸지만 뜻은 분명하다. “이빨 먼저. 이름 다음. 고기 마지막.” 윤태겸은 그 순서를 뒤집는다. 그는 소금 위의 이빨을 하나씩 집어 서이령에게 건네고, 서이령은 장부를 찢지 않고 각 이름 옆에 이빨을 눌러 붙인다. 문해주는 주민들이 밀고 들어오지 못하게 냉동창고 문을 등으로 막는다. 고복례는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다가, 자기 열쇠 꾸러미를 주워 윤태겸에게 던진다. 그리고 밖을 향해 문을 열고, 주민들에게 처음으로 말한다. “오늘 고기는 없다. 이름부터 받는다.”
주민들은 분노한다. 어떤 이는 냄비를 던지고, 어떤 이는 고복례의 멱살을 잡는다. 하지만 냉동창고 안쪽에서 자기 가족의 이름이 하나씩 불리기 시작하자 손들이 느리게 풀린다. 안쪽것은 사람 목소리를 훔쳐 이름을 부르지만, 서이령이 이빨을 소금과 장부에 고정할 때마다 발음이 흐려진다. 그것은 더 이상 윤태겸의 이름을 완벽하게 말하지 못한다. “태…겨…” 벽 너머에서 흰 입김이 터지고, 상자 속 고기는 검게 마른다. 마을회관 난로 기름 배급도, 식육 배급도 다음 날 끊긴다. 규칙은 깨지지 않는다. 대가는 온다.
결말의 겨울은 더 춥다. 백암리 굴뚝 몇 개는 꺼지고, 주민들은 윤태겸의 정육점 앞에서 욕을 하고 돌아선다. 고복례는 이장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는다. 대신 장부를 숨기지 않고 마을회관 벽에 걸어 두며, 붉은 점 옆에 소금 묻은 이름표를 하나씩 단다. 그녀는 밥을 퍼 주던 손으로 이제 빈 그릇을 돌려보내야 하고, 그때마다 열쇠 꾸러미를 세 번 훑는 버릇이 사라진다. 서이령은 아버지의 이빨을 확인하지만 장례를 치르지 못한다. 아직 안쪽에 남은 이름들이 있기 때문이다. 문해주는 매주 화요일에도 마을에 온다. 상자를 싣고 오는 대신, 빈 적재함에 소금 포대와 난로 심지를 싣고 온다. 차단기는 여전히 10시 40분이면 내려가지만, 이제 그녀는 후진등부터 켜지 않는다.
윤태겸은 냉동창고 안쪽 벽을 완전히 허물지 않는다. 무너진 틈 앞에 소금 자루를 쌓고, 윤만식의 앞치마 조각을 갈고리에 걸어 둔다. 매주 화요일 밤 11시가 되면 상자는 오지 않지만, 벽 너머에서는 아직 발톱 소리가 난다. 안쪽것은 가끔 그의 이름을 틀리게 부른다. 윤태겸은 대답하지 않고, 칼을 갈아 쇳가루 냄새로 코를 속인다. 그러나 이제 그는 칼날만 보지 않는다. 형광등 아래에서 소금에 묻은 이빨을 꺼내 이름 옆에 놓고, 문밖에 선 사람들에게 말한다. “먹을 건 없습니다. 그래도 봐야 합니다.” 그 말이 끝나면 냉동창고 안쪽에서 아주 오래된 유행가의 박자가 한 번 어긋난다. 윤만식인지, 안쪽것인지, 혹은 백암리가 처음으로 굶주림보다 기억을 먼저 씹는 소리인지는 아무도 확신하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