筋書き
2045년의 서울은 죽음조차 철저하게 상업화된 도시다. 웰다잉 시스템은 시민의 평생 데이터를 분석해 ‘최적화된 임종’을 설계하며, 슬픔과 애도의 감정마저 알고리즘의 명령에 따라 정제된다. 정가영은 한때 심리상담사로서 수많은 이들의 내면을 들여다보았으나, 남편의 임종 자리에서는 철저히 방관자였다. 웰다잉 시스템에 의해 남편의 마지막 순간은 차분하고 무감정하게 연출됐고, 남편의 죽음에 대한 기록은 ‘불필요한 감정’이란 이유로 삭제되었다. 가영은 자신의 감정 로그까지 삭제될 운명에 처하자, 그제야 자신의 감정과 기억이 남의 손에 의해 정의되는 현실에 참을 수 없는 위화감을 느낀다. 그녀의 평소 습관처럼 매일 써내려가던 일기장조차, 시스템의 감정 검열에 의해 점차 공허한 문장들로 채워진다.
남편과의 단절감, 자신에게조차 낯선 상실감은 그녀의 내면을 조금씩 갉아먹는다. 가영은 어느 순간, 자신의 기억이 불완전하게 비어 있다는 사실을 감지한다. 심리상담사로서의 예리함과 집요함을 발동해, 웰다잉 시스템에 남겨진 잔여 데이터와 자신의 오래된 일기, 그리고 집 구석에 남아있던 남편의 음성 파일들을 교차 분석한다. 그녀는 삭제된 기억의 흔적을 추적하며, 시스템의 보안망을 뚫기 위해 과거 내담자 중 해킹 기술에 능했던 이와 접촉한다. 이 과정에서 가영은 오랜 세월 눌러왔던 자신의 슬픔, 분노, 그리고 타인에 대한 미안함이 복받쳐오르는 것을 경험한다.
한편, 웰다잉 시스템의 총괄 이사 마석도는 가영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시스템 전체의 안정을 위해 그녀를 ‘위험 인물’로 분류한다. 표면적으로는 사회적 평온과 효율을 내세우지만, 석도 역시 과거 가족의 죽음을 통제하지 못했던 죄책감과 상실감에 시달리고 있다. 그가 시스템의 완벽함에 집착하는 이유는, 바로 자신의 무력함을 부정하고픈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석도는 가영의 데이터를 추적하며, 그녀가 복원한 감정 로그가 대중에 공개될 경우, 그간 쌓아온 시스템의 신뢰가 무너질 수 있음을 예감한다.
기억 데이터 보안국 국장 장첸은 이 둘 사이에서 기묘한 균형을 유지한다. 그는 시스템의 안정과 질서를 수호하는 입장이지만, 동시에 과거 데이터 유출 사고로 인해 ‘통제할 수 없는 인간성’에 대한 깊은 회의와 두려움을 품고 있다. 장첸은 가영의 해킹 시도를 막으려 하면서도, 어느새 자신의 내면에 숨겨온 아날로그적 감수성과 인간적 연민에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는 가영이 복원한 감정 로그의 일부를 몰래 확인하고, 그 속에서 자신의 잊혀진 감정—과거 동료의 죽음, 미처 표출하지 못한 슬픔—과 마주한다.
가영은 마침내 자신의 기억과 남편의 임종 장면, 그 안에 담긴 날것의 슬픔과 애도, 미처 정리되지 못한 고통의 기록을 복원해낸다. 그녀는 이를 익명으로 대중 네트워크에 공개하며, 웰다잉 시스템이 감정의 다양성과 인간의 고유성을 어떻게 말살해왔는지 폭로한다. 시민들은 ‘완벽하게 정돈된 죽음’이란 허상에 분노하고, ‘죽음조차 내 것이 아니라면 인간으로서 의미가 남아있는가?’라는 집단적 혼란에 휩싸인다. 거리 곳곳에서는 감정 로그 복원과 웰다잉 시스템 폐지를 요구하는 시위가 불붙는다. 이 과정에서 가영은 자신이 본래 두려워하던 ‘혼돈’ 속에서 오히려 진짜 인간다움을 발견하며, 더는 자신의 슬픔을 숨기지 않는다.
결국 마석도는 시스템 붕괴를 막기 위해 강경 대응을 선택한다. 그는 가영의 데이터 삭제 명령을 내리면서도, 밤마다 혼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며 자신의 결정에 대한 깊은 회한을 토로한다. 장첸은 마지막 순간, 자신의 신념과 조직의 명령 사이에서 침묵을 깨고, 가영의 데이터 일부를 비밀리에 외부로 유출한다. 가영의 용기와 장첸의 내적 배반이 촉매가 되어, 웰다잉 시스템은 결정적 균열을 맞이한다.
이후 서울은 급격한 혼란과 변화의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시민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감정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투쟁하고, 웰다잉 시스템은 부분적으로 해체된다. 가영은 남편의 마지막 기억을 되찾았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의 상처도 온전히 마주해야 했다. 마석도는 권력의 정점에서 쓸쓸히 퇴진하고, 장첸은 데이터의 경계 너머에서 인간성의 회복을 모색한다. 이야기는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상실과 새로운 가능성, 그리고 ‘기억과 감정은 누구의 것인가’라는 근본적 질문을 남긴 채 열린 결말로 마무리된다. 이 모든 과정은, 통제와 혼돈, 기술과 인간성의 경계에서 갈등하는 미래 서울의 초상을 그리며, 장르적 패러디와 반전이 교차하는 진한 SF적 여운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