筋書き
역병이 할퀴고 간 자리에는 폐허만이 남았다. 스물셋의 젊은 무당 진환무는 잿더미 속에서 홀로 살아남아 망령처럼 떠돌았다. 사랑하는 가족, 친구, 마을 사람들 모두 잔혹한 죽음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오직 그만이, 알 수 없는 이유로 목숨을 부지한 채, 텅 빈 세상에 남겨졌다. 가슴 깊이 사무치는 한(恨)은 기도하던 신을 향한 원망으로 뒤틀렸다. "어찌하여... 어찌하여 저만 남겨두신 겁니까..." 메아리 없는 절규만이 바람에 실려 흩어질 뿐, 답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궁궐에서 한 관리가 찾아왔다. 역병으로 황폐해진 나라를 구원할 방법을 찾고 있다는 국왕 신현군의 부름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유교 경전에 매몰되어 자란 현군은 역병마저 하늘의 뜻이라 여기며, 자신에게 신의 계시가 내려졌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는 진환무에게 역병의 저주에서 백성을 구원할 방법을 찾으라 명했다. 거절할 수 없는 운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진환무는 무너진 마을을 뒤로 하고, 불안한 미래를 향해 발걸음을 내딛었다.
궁궐로 향하는 여행길은 고독과 불안으로 가득했다. 황량한 들판과 폐허가 된 마을들이 그의 앞에 줄지어 나타났다. 역병의 상흔은 깊고도 참혹했다. 마치 세상 전체가 죽음의 그림자에 뒤덮인 듯했다. 그 여정 동안 진환무는 기이한 현상들과 마주하게 된다. 밤마다 그의 꿈속에 나타나 알 수 없는 속삭임을 내뱉는 존재, 숲 속에서 마주친 기괴한 형상의 그림자, 그리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의문의 목소리까지... 이 모든 것들이 그를 미지의 공포로 몰아넣었다. 그럴수록 진환무는 자신이 마주하는 현상들이 단순한 병이나 저주가 아닌,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거대한 존재의 힘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끼기 시작한다. 그것은 바로 이 세상 너머도 작고 나약한 존재인 인간을 향한, 거대한 우주의 차가운 시선이었다.
한편, 궁궐에 도착한 진환무는 광기에 사로잡힌 국왕 신현군의 모습에 경악한다. 그는 자신이 신의 선택을 받은 메시아라고 확신하며,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고대 신에게 거대한 제물을 바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제물은 다름 아닌 산 사람이었다. 신현군의 광기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궁궐은 공포와 광기로 물들어갔다. 그는 미쳐가는 와중에도 진환무에게 고대 신에게 바칠 제단을 만들 것을 명령한다. 그 제단은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곤 상상할 수 없는 크기와 기괴한 형상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이성이 마모되는 듯한 공포를 자아냈다.
진환무는 점점 광기에 물드는 신현군을 보며, 자신이 궁궐로 오기 위해 지나쳐 온 폐허들이 단순한 질병의 결과가 아님을 깨닫는다. 그것은 바로 고대 신에게 제물을 바치기 위해 인간 스스로가 만들어낸 지옥의 풍경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찾아 헤맸던 고대 문서는 사실 고대 신을 숭배하는 제사 의식의 방법을 기록한 것이었음을 알게 된다. 진환무는 자신이 거대한 존재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고 있었음을 깨닫고 절망에 빠진다.
결국 신현군은 완성된 제단에 스스로 올라가 제물이 되기를 자처하고, 진환무는 그런 신현군을 말리지 못한 채 제단 아래 무릎 꿇는다. 그 순간, 하늘이 갈라지고 거대한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은 인간의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형언할 수 없는 존재였고,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진환무의 정신은 한없이 작아졌다. 거대한 눈동자는 잠시 진환무를 응시하더니,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하늘에서 사라진다. 아무런 계시도, 구원도 없었다. 세상은 여전히 죽음의 그림자에 잠겨 있었고, 진환무는 홀로 남겨진 채 이해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삶의 의미를 잃는다. 폐허 속에서 시작된 그의 여정은 결국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 채, 거대한 공허만을 남긴 채 끝나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