筋書き
“서야 씨, 잠시만.”
웬일인지 부장 새끼가 윤서아를 부른다. 재수 없는 새끼, 속으로 중얼거리며 윤서아는 회의실로 따라 들어간다.
“서야 씨, 혹시 개인회생 신청했어?”
뭐야, 이 병신 새끼. 이제는 스토킹까지 해? 별안간 화가 솟구쳤지만, 윤서아는 평정심을 유지하며 대답한다.
“부장님, 그런 민감한 개인의 사생활에 관한 질문을 하시는 거, 선을 넘으신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아니, 그게 아니라... 이거.”
부장은 별 당황한 기색도 없이 파일 하나를 내민다.
“우리 회사 사규야. 거기 제17조 한번...”
제17조 (당연 해고 사유)
회사는 근로자가 다음의 각 사유에 해당하는 경우 즉시 해고를 할 수 있고, 근로자는 이에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아니한다.
...
4. 개인회생을 신청하거나 파산 선고를 받는 등 상대방의 신용을 신뢰할 수 없는 사유가 발생한 경우
...
이게 뭐야?!
“그래서, 서아 씨한테는 이번 주까지 시간을 줄 거고. 인수인계나 그런 건 신경 쓰지 말라고…”
“이제, 죽어야겠다.”
부장에게서 해고 통보를 받고, 무작정 회사를 나와 걷던 중에 윤서아는 생각했다. 6년을 연애해서 겨우 결혼 약속을 받아낸 남자가 바람이 나서 파혼을 선언하고, 그 새끼랑 살기 위해 마련한 신혼집이 경매로 넘어갔을 때 진작에 죽었어야 했다. 유찰을 거듭한 끝에 윤서아가 구매한 가격의 반도 안 되는 가격에 낙찰되어 버린 아파트는 윤서아에게 6억 원의 빚을 남겨 주었고, 자기의 명의가 아니라며 단 한 푼의 빚도 나눠 가지려 하지 않는 남자를 보며 윤서아는 이따위 병신이랑 결혼 결심을 한 자신에게 환멸을 느꼈다. 그래도 꾸역꾸역 살아보겠다고 개인회생을 신청하고, 회사 근처의 고시원으로 이사해서 아침, 점심, 저녁 모두를 회사에서 해결하며 삶의 의지를 붙잡고 있었는데, 다시 세상은 윤서아에게 잔인한 방식으로 이별 통보를 날린 것이다.
죽을 때 죽더라도 윤서아는 도대체 자신의 인생이 왜 이렇게 엉망이 되었는지는 알고 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가장 큰 원인은 그 병신같은 새끼랑 결혼해야겠다는 결심을 한 것. 외모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성격도 별로였던 그 병신은 잘나가는 변호사였다. 잘나가는 변호사, 오직 그 하나만 보고 결혼 결심을 한 것이 첫 번째 패착이었다.
그럼 윤서아는 왜 그렇게 사회적 지위와 성공에 집착했는가? 자신의 엄마에게 인정받고 싶었기 때문이다. 감정이 없는 나무 인형같았던 엄마. 언젠가 엄마는 윤서아에게 이런 고백을 한 적이 있었다.
“서아야. 엄마는 서아를 절대로 사랑할 수 없어. 왜냐면 서아는 엄마가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엄마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거든.”
윤서아는 결론을 내렸다. 자신의 인생이 이렇게 망가진 이유는 엄마가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했기 때문이라고. 엄마가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했고, 그래서 자신이 엄마가 사랑하는 남자와 엄마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였으면 자신의 인생은 이렇게 망가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회사 옥상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서 윤서아는 생각했다. 만약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래서 엄마가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게 만들 수만 있으면, 나는 죽지 않아도 될 텐데.
윤서아는 회사 옥상의 난간에 올라섰다. 서울 시내 한복판, 화려한 이 도시의 중심에서 추락사하는 인생이라니. 어떠한 실패도 없이 성공하기만 했던 인생이었는데… 단 한 번의 낙오로 죽어야 한다는 게 윤서아는 너무나도 억울했다.
까악! 갑자기 우는 까마귀 소리에 윤서아는 휘청했다. 그리고 그대로 건물 아래로 추락하는데…
벌떡! 윤서아는 일어나면서 몸을 살폈다. 다친 곳 하나 없이 멀쩡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정신을 차려보니 윤서아는 자신의 엄마, 장보연이 27세였던 과거에 와 있었다.
자신의 신분을 속이고 장보연과 장보연이 사랑했던 남자, 이재국에게 접근한 윤서아. 그리고 생각보다 그들의 사랑이 간단하지 않음을 깨닫는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 꿈을 좇느냐,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희생하느냐 사이의 고뇌. 장보연과 이재국은 그 어려운 선택의 기로에서 오해하고 포기했다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서로를 믿었다가 다시 울고를 반복하고 있었다.
이 철학적 물음에 대한 답은 무엇인가? 가난한 집안을 위해 돈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장보연, 자신의 꿈을 포기할 수 없는 이재국. 이들의 사랑을 이루기 위한 단 하나의 해답은 무엇인가?
그 해답을 향한 최종 선택. 결심을 하고, 다음날 장보연과 이재국을 만날 약속을 하고 잠에 드는 윤서아의 앞에 갑자기 알 수 없는 사람들이 들이닥친다. 납치를 당해서 어디론가 끌려가는 윤서아. 그리고 자신을 위해 마련된 무대.
사실 이 모든 것은 연출된 상황. 국민 중 무작위로 선정된 한 사람, 그 사람의 인생을 시궁창으로 몰아넣고 매 순간 그 사람의 선택을 맞추는 실시간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이었던 것.
예를 들어 결혼 상대로 외모도 마음에 들지 않고 성격도 별로인데 잘나가는 변호사를 선택할 것인가, 직업은 변변찮지만 외모도 마음에 들고 대화도 잘 통하는 사람을 선택할 것인가.
약혼자가 무리해서 아파트를 구입하자고 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약혼자가 바람을 피워서 파혼을 선언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루아침에 감당하기 힘든 빚이 생기면 어떻게 할 것인가.
등등.
물론 진짜로 과거로 돌아간 것도 아님. 옥상에서 미끄러진 윤서아를 미리 대기하고 있던 스태프들이 구조했고, 기절한 윤서아를 미리 마련한 세트로 데리고 가서 과거로 돌아간 것처럼 오해하도록 만든 것.
즉, 모든 것이 연출이고 자신 외 다른 사람은 연기자였던 것. 대한민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그 프로그램의 이름은 바로 ‘윤서아 쇼’.
무대에서 윤서아는 마지막 선택을 강요받는다. 장보연이 사랑을 선택하도록 할 것인가 아니면 현실을 선택하도록 할 것인가! 윤서아의 선택은?
선택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고. 수개월 뒤.
다른 사람이 주인공인 ‘윤서아 쇼’ 시즌 2에 패널로 참여한 윤서아의 모습이 나오면서 이야기는 끝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