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11시 32분, 김주협은 폐점 안내 음악이 끝난 매장에서 마지막 고객용 우산꽂이를 정리한다. 그는 오늘도 정규직 전환 심사를 앞둔 백서린에게 “이 시간 이후엔 촬영보다 체크리스트가 먼저”라고 말하지만, 서린은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지 않는다. LG OLED evo TV 전시 벽의 검은 화면 위로 비에 젖은 유리문이 비치고, 아직 오지 않은 검은 우비 손님 네 명이 한 줄로 서 있다. 김주협은 화면 반사를 고장으로 넘기려 전원 리모컨을 들지만, 화면 속 우비 손님 하나가 실제 매장 안쪽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그 시각 매장 밖에는 아무도 없다.
서린은 떨리는 손으로 영상을 찍는다. 그녀는 제품 시연 멘트를 외울 때처럼 낮고 또렷하게 “현재 시각 11시 40분 전, 화면에 외부 미확인 인원 반사”라고 기록한다. 주협은 그 말을 끊으려다가 LG 퓨리케어 공기청정기 진열 구역에서 붉은 먼지 수치가 갑자기 치솟는 것을 본다. 기계는 깨끗한 매장 공기를 빨아들이며 쉭쉭 울고, 숫자는 사람이 지나간 발자국처럼 TV 벽에서 냉장고 라인 쪽으로 이동한다. 주협은 서린의 손목을 잡아 촬영 각도를 내리게 하지만, 서린은 뿌리치고 붉은 수치가 가리키는 통로로 먼저 걷는다. 그녀가 한 걸음 옮길 때마다 OLED 화면 속 우비 손님들도 한 박자 앞서 같은 방향으로 움직인다.
LG 디오스 냉장고 라인 앞에서 냉장고 하나가 스스로 얕게 열린다. 흰 냉기가 발목을 감싸고, 선반 위에는 얼어붙은 종이학과 오래된 호출벨이 놓여 있다. 주협은 손등으로 냉장고 문을 밀어 닫으려다가 종이학 안쪽에 번진 잉크를 본다. ‘11:58 하역 차선 비우기.’ 그는 누가 장난을 친다고 생각해 호출벨을 집어 들지만, 벨은 배터리도 없이 젖은 쇳소리를 낸다. 그 소리를 듣고 상담 테이블 위 LG 로고 조명이 혼자 밝아진다. 테이블 아래에는 손톱으로 긁은 짧은 선들이 창고 문 쪽으로 몰려 있다.
그때 남기철이 뒷문으로 들어온다. 그는 비닐 우산을 접지도 못한 채 “그건 열면 안 된다”고 말한다. 은퇴한 시설관리 담당자인 그가 밤마다 창고 열쇠 위치를 확인하러 온다는 것을 주협은 알고 있었지만, 오늘처럼 얼굴이 하얗게 질린 건 처음 본다. 주협은 냉장고에서 꺼낸 종이학을 내밀고, 기철은 그것을 보자마자 손가락 끝으로 젖은 열쇠고리를 움켜쥔다. 종이학은 그가 오해주에게 가르쳐준 접기 방식 그대로다. 기철은 창고가 단순한 자재실이라고 우기며 주협 앞을 몸으로 막지만, 서린이 테이블 밑으로 기어들어가 긁힌 자국 끝을 휴대폰 불빛으로 비춘다. 자국은 창고 문턱 아래, 안쪽에서 바깥으로 필사적으로 뻗어 있다.
11시 47분, 강무겸의 배송 트럭이 한강변 하역 차선으로 접근한다. 폭우 때문에 후방 카메라는 물방울로 번지고, 배송 스캐너는 지연 경고를 반복한다. 지난달 파손된 LG 디오스 냉장고 책임을 두고 주협과 다퉜던 무겸은 매장으로 전화를 걸어 “오늘은 밀리면 안 된다”고 소리친다. 주협은 유리문 앞에 아무도 없다고 답하려다가 OLED 화면 속 반사를 본다. 검은 우비 손님들이 이제 실제 자동문 앞에 서 있고, 그 뒤로 트럭 헤드라이트가 커지고 있다. 화면 속에서는 충돌이 이미 시작된 듯 유리문 전체가 하얗게 번쩍인다.
주협은 전원을 내리려 차단기 키를 꺼낸다. 전원을 끄면 자동문 오작동과 화면 반사는 사라지고, 매장은 겉으로는 안전해 보일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공기청정기의 붉은 수치도, 로고 조명의 길잡이도, 해주가 빌린 호출벨 소리도 끊긴다. 서린은 그의 앞을 막고 “화면이 먼저 보여준 거면 아직 바꿀 수 있어요”라고 말한다. 주협은 그녀의 휴대폰을 빼앗으려 손을 뻗지만, 서린은 뒤로 물러서지 않고 고객용 안내 카드를 바닥에 떨어뜨린다. 카드들이 젖은 발자국처럼 창고 쪽으로 흩어진다. 주협은 그제야 자신이 지키려는 것이 매장 평판인지, 문 앞 사람들의 몸인지 분명히 본다.
11시 51분, 실제 검은 우비 손님들이 자동문 밖에 나타난다. 한강 산책로에서 폭우를 피해 온 가족 둘과 젊은 커플이다. 자동문은 아직 잠긴 상태인데도 센서가 그들을 감지하며 파란 불을 깜박인다. 주협은 문을 열어 들여보낼지 망설인다. 문을 열면 그들은 따뜻한 매장 안으로 들어오지만, 트럭이 밀려오면 유리문 앞에 갇힌다. 문을 닫아두면 그들은 비를 맞으며 하역 차선에 서 있게 된다. 그는 결국 자동문을 수동으로 열고, 손님들을 향해 “안쪽으로 바로 들어오세요. TV 쪽 말고 창고 쪽입니다”라고 외친다.
손님들이 들어오자 매장은 더 좁아진다. 아이의 운동화에서 흙물이 떨어지고, 젊은 남자는 “왜 창고로 가냐”며 계산대 쪽으로 몸을 돌린다. 서린은 외워둔 제품 설명 대신 같은 말을 반복한다. “창고로 들어가셔야 합니다. 지금 유리문 앞은 위험합니다.” 그녀는 임시 직원 배지를 움켜쥔 채 사람들의 어깨를 직접 돌리고, 겁먹은 아이에게 LG 퓨리케어 공기청정기 옆의 붉은 숫자를 보여주며 “저 숫자가 낮아지는 쪽으로 가자”고 말한다. 아이가 울음을 멈추고 서린의 손을 잡는다.
남기철은 창고 문 앞에서 다시 버틴다. 그는 그 문을 열면 오래전 사고 기록과 해주의 이름이 드러난다고 말하지 않고, “안쪽은 좁고 위험하다”는 말만 되풀이한다. 주협은 기철의 허리춤에서 열쇠고리를 낚아채려 하고, 기철은 젖은 손으로 주협의 조끼를 붙잡는다. 두 사람은 상담 테이블 옆에서 밀치고 넘어지며, 테이블 아래 긁힌 자국 위로 물이 튄다. 그 순간 호출벨이 바닥에서 울린다. 벨소리는 한 번이 아니라, 예전에 누군가 안에서 계속 눌렀던 것처럼 짧고 급하게 이어진다. LG 로고 조명 아래, 젖은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긴 오해주의 형체가 잠깐 드러난다. 그녀는 제품도 사람도 건드리지 못한 채, 긁힌 손끝으로 바닥을 세 번 두드린다. 그 박자에 맞춰 공기청정기 붉은 수치가 창고 문 앞에서 낮아진다.
기철은 무너진다. 그는 열쇠를 주협 손에 쥐여주며, 오래전 리뉴얼 공사 밤에 해주가 창고 안에 갇혔고 자신이 다음 날 아침까지 그 사실을 몰랐다고 털어놓는다. 그러나 고백은 충분하지 않다. 창고 문은 습기로 틀어져 열리지 않고, 바깥에서는 무겸의 트럭 경적이 유리벽을 때린다. 무겸은 브레이크를 밟고 있지만 젖은 하역 차선에서 트럭이 조금씩 미끄러진다. 그는 운전석에서 뛰어내려 바퀴 뒤에 고임목을 끼우려다 미끄러지고, 헤드라이트가 매장 안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씩 하얗게 지운다.
주협은 차단기 키를 서린에게 던지고 창고 문 손잡이를 양손으로 잡아당긴다. 서린은 전원을 내리지 않는다. 대신 차단기함 앞에 서서 손님들이 어둠에 놀라 도망치지 못하게 막는다. 기철은 주협 옆에 붙어 녹슨 경첩 틈에 작은 드라이버를 밀어 넣고, 자신의 손바닥이 찢어져도 멈추지 않는다. 손님 중 젊은 남자가 뒤늦게 합류해 문틀을 어깨로 민다. 오해주의 형체는 점점 흐려지지만, LG 로고 조명은 마지막까지 창고 문 아래 틈을 밝힌다.
11시 58분, 창고 문이 열린다. 안쪽은 낡은 판촉물과 접힌 매트리스, 오래된 상담 테이블 부품으로 가득하지만, 맨 안쪽 벽에는 누군가 손톱으로 긁은 선들이 출구 방향을 향해 겹겹이 남아 있다. 주협은 먼저 아이를 안아 들여보내고, 서린은 손님들을 하나씩 밀어 넣는다. 기철은 입구에 남아 무너질 듯 쌓인 박스를 몸으로 받친다. 주협은 그를 끌어내려 하지만 기철은 “이번엔 내가 문을 잡겠다”고 말하고 버틴다. 해주의 종이학은 주협의 젖은 손바닥에서 녹아 풀리고, 그 안에 감춰져 있던 작은 나사 하나가 떨어진다. 기철이 예전에 빠뜨렸던 창고 안쪽 손잡이 고정 나사다. 그는 그것을 보고 더 이상 눈을 피하지 않는다.
자정 정각, 자동문이 스스로 활짝 열린다. 무겸의 트럭은 마지막으로 미끄러져 유리문 앞까지 밀려오고, 주협은 창고 입구에서 몸을 돌려 아직 통로에 남은 서린을 잡아당긴다. 서린은 차단기 키를 손에 쥔 채 넘어지고, 주협은 그녀를 끌어안고 창고 안으로 굴러 들어간다. 기철이 문을 닫으려는 순간, 무겸이 바깥에서 몸을 던져 자동문 옆 비상 스토퍼를 내리친다. 트럭 범퍼가 유리문을 밀고 들어와 큰 균열을 만들지만, 완전히 깨지기 직전 멈춘다. 유리 파편 몇 조각이 상담 테이블 위로 떨어지고, 꺼지지 않던 LG 로고 조명만 희게 떨린다.
정적 속에서 창고 안 사람들은 서로의 숨소리를 듣는다. 서린의 휴대폰은 바닥에 떨어져 렌즈가 깨졌지만, 녹화는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결정적인 것은 영상이 아니다. 주협은 창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무겸을 끌어안듯 붙잡아 매장 안으로 데려온다. 무겸은 빗물과 식은땀에 젖어 “나는 사람을 못 봤다. 유리에만 보였다”고 중얼거린다. 주협은 그 말을 끊지 않는다. 그는 손님들 앞에서, 서린 앞에서, 기철 앞에서 사고 기록을 숨기지 않겠다고 말한다. 기철은 오래된 창고 안쪽 벽에 손을 대고 해주의 이름을 처음으로 소리 내어 부른다.
새벽이 오기 전, 매장은 임시 휴점 안내문을 붙인다. 깨진 유리문 앞에는 안전 라인이 둘러지고, LG OLED evo TV 전시 벽은 꺼져 있지만 검은 화면에는 더 이상 우비 행렬이 비치지 않는다. LG 퓨리케어 공기청정기의 수치는 천천히 정상으로 돌아오고, LG 디오스 냉장고 안에는 빈 선반만 남는다. 서린은 정규직 심사용으로 찍은 영상을 본사에 보내기보다 구조 경위서에 첨부한다. 주협은 그 결정이 매장 평가에 어떤 비용을 남길지 알면서도 서명란에 자기 이름을 먼저 적는다. 무겸은 배차 탈락을 각오하고 하역 차선 배치 변경을 증언하고, 기철은 매주 화요일마다 조이던 나사 대신 창고 안쪽 손잡이를 새로 단다.
며칠 뒤 리뉴얼된 매장에는 새 안내 표식이 생긴다. 유리문 앞 하역 차선은 손님 대기선과 분리되고, 창고는 비상 대피 공간으로 바뀐다. 상담 테이블 아래 긁힌 자국은 지우지 않고 투명 보호판으로 덮는다. 낮의 손님들은 그것을 오래된 매장의 흔적으로만 지나치지만, 주협과 서린은 밤마다 폐점 전 그 앞을 확인한다. 어느 비 오는 밤, LG 로고 조명이 평소보다 한 번 길게 깜박이고, 호출벨 없는 테이블 위에 접히다 만 종이학 그림자가 잠깐 생긴다. 주협은 전원을 내리지 않는다. 그는 매장 전체를 둘러보고, 유리와 화면과 사람의 발이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는지 끝까지 확인한 뒤 문을 잠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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