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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ytalk Original · 15 scenes · 5 chapters

신이시면 직접 치우세요

balanced Common Water Dragon 76Creator’s page →

오늘 아침, 폐업 직전인 옥상 목욕탕에 신들이 번호표를 뽑고 들어와 인간에게 떠넘긴 죄를 씻어 달라고 요구한다. 신의 죄를 밀 때마다 하늘에 매달렸던 물건들이 지상으로 떨어지자, 세신사는 첫 손님의 등에서 나온 우박을 석탄삽으로 퍼내며 나머지 신들에게 고무대야를 씌운다. 신들이 가리킨 천장 너머에서 목욕탕 급수 밸브가 헛돌고, 세신사는 천사 배관공과 함께 비상계단을 타고 구름 속 저수조까지 올라가 신들이 혼자 쓰려고 잠가 둔 물을 끌어온다. 그러나 가장 먼저 깨끗해지고 싶다는 어린 신이 다른 손님들을 욕탕 밖으로 밀쳐내고, 세신사는 그 작은 손목을 붙든 채 모두 똑같이 기다리라고 말한다.

이제 일몰까지 칠 분, 뜨거워진 저수조 아래로 신들의 죄를 담은 때가 쌓여 가고 마지막 냉수 한 통이 배수구 쪽으로 넘어지고 있다.

  • 6 characters
  • 5 locations
  • 15 scenes
  • Plot 4,178 chars
신이시면 직접 치우세요

Characters

Characters

박종구

Male

폐업일까지 사흘 남은 옥상 목욕탕에서 혼자 세신과 보일러 관리를 맡는 일용직

Profile

박종구는 오늘 품삯을 방주인에게 송금하고 내려가려다가, 신들의 번호표마다 세신료와 떨어진 물건의 처리비를 따로 적기 시작한다. 박종구는 백수선에게 죄를 다시 인간에게 흘려보내지 않을 배수 경로를 요구하고, 단수 집행 서류를 들고 온 백수선을 오염된 물의 행선지에 서명해야 하는 동업자로 붙잡는다. 잠금이 내민 영구 급수권을 받으면 내일부터도 등을 밀 수 있지만, 박종구는 계약서의 죄 재배분 조항 위에 확인 도장을 엎어 놓고 자기 몫의 온수 밸브부터 잠근다.

49세 남성 박종구는 추가 요금을 말할 때 손님 눈을 피하지 않지만, 적박의 등에서 우박이 쏟아지자 계산하던 입으로 “대야 써요, 머리부터!”라고 고함치며 맨손으로 대야를 나눠준다. 박종구는 첫물의 작은 손목에도 어른과 똑같이 번호표를 채우되, 젖은 종이에 손목이 쓸리지 않도록 마른 수건 조각을 받친다. 박종구는 깨끗해졌다는 도장을 재촉하는 손님 앞에서 배수구 거름망을 들어 보이고, 찌꺼기가 남아 있으면 이미 받은 돈도 세신대 밑에 눌러 둔다.

Background

박종구는 예전 목욕탕에서 보일러가 멎던 날 업주의 재촉대로 세신 완료표를 찍었다가, 비누가 남은 귀를 수건으로 문지르며 돌아오는 손님들을 탈의실에서 다시 씻겼다. 그날 추가로 쓴 물값이 품삯에서 빠진 뒤부터 박종구는 근무 수첩에 받은 돈과 끝내지 못한 일을 서로 다른 칸에 적었다. 마흔아홉이 된 박종구는 오정임에게 마지막 영업일 품삯만큼은 현금으로 달라고 부탁해 두었고, 신들이 올라온 아침에도 방주인에게 보낼 봉투를 작업복 안쪽에 비닐로 싸 넣었다.

Description

박종구는 짧게 깎은 머리의 관자놀이에 흰빛이 섞이고, 넓적한 코 양옆으로 깊은 주름이 내려앉은 마흔아홉 살 남자다. 목이 늘어난 회색 반소매 셔츠와 빛바랜 남색 방수 앞치마 아래로 단단한 팔뚝과 약간 나온 배가 드러나며, 앞치마 가슴주머니에는 손잡이가 닳은 붉은 확인 도장이 늘 거꾸로 꽂혀 있다. 밑창이 눌린 고무 슬리퍼를 어깨너비로 벌려 신고 선 그는 값을 부를 때도 상대의 눈을 똑바로 보지만, 굵고 거친 손은 누가 미끄러지면 바로 붙들 수 있게 허리 아래에 펴 둔다.

백수선

Female

인간 동네로 새는 성수를 막으며 날개 깃으로 출장비를 정산하는 천사 배관공

Profile

백수선은 봉인한 지상 급수관의 위치를 공개하고 설계도에서 빠진 현장 수리공들의 이름을 복원하려고, 박종구에게 관을 하나 열 때마다 실제로 물이 나오는지 확인하고 서명해 달라고 요구한다. 봉인을 뜯을 때마다 잠금에게 날개 깃을 한 장씩 압류당하는 백수선은 박종구를 구름 저수조로 이끌면서도, 품속의 단수 집행서는 꺼내지 않는다. 백수선이 내민 설계도 때문에 박종구는 목욕탕만 살릴 우회관 대신 이웃집들까지 이어진 본관을 수리해야 하고, 백수선은 돌아갈 날개를 남길지 마지막 봉인까지 열지 정해야 한다.

백수선은 계단을 오르기 전 남은 깃을 세고, 박종구의 작업복 허리띠에 배관용 죔쇠를 채운 뒤 “추락 방지 규정입니다”라고 말하면서 자기 쪽 연결줄만 두 번 당겨 본다. 백수선은 남이 잘못 부른 수리공 이름은 작업을 멈춰서라도 바로잡지만, 박종구가 방문 목적을 물으면 단수 집행서의 모서리를 접으며 수압부터 읽어 준다. 127세인 백수선은 첫물이 나이를 내세워 순서를 바꿔 달라고 하면 번호표를 가리키다가도, 잠금의 직인이 찍힌 서류 앞에서는 먼저 공구를 내려놓는다.

Background

127년 전 공동수도 시험 통수 때 태어난 백수선의 등록부에는, 작업반장이 젖은 손으로 적은 이름과 첫 배관 검사표가 함께 묶여 있다. 백수선은 잠금의 지시에 따라 지상 분기관을 봉인하면서 현장 수리공들의 서명을 검수 인장으로 덮었고, 지워진 이름들은 반납하지 않은 설계도 뒷면에 옮겨 적었다. 박종구가 석탄삽으로 퍼낸 우박 속에서 자기 검수 인장을 발견한 백수선은 수도국으로 돌아가는 계단 수부터 세다가, 박종구가 삽을 내려놓자 단수 집행서를 안주머니 깊이 밀어 넣고 비상계단 문을 열었다.

Description

백수선은 127년을 살아온 몸의 깊은 주름과 가늘어진 목을 감추지 않고, 은백색 머리를 납작하게 땋아 잿빛 배관 작업복의 깃 안에 넣는다. 황동 단추가 달린 남색 공구 조끼 아래로 등 굽은 체형에 맞춰 수선한 날개 구멍이 벌어지고, 성긴 깃 사이로 드러난 작은 날개를 바짝 접은 채 설계도의 지워진 이름을 마디 굵은 손가락으로 짚는다. 입술은 단단히 다물었지만 흐린 갈색 눈은 돌아갈 길을 거듭 살피며, 허리의 배관용 죔쇠에 연결된 안전줄을 자기 쪽에서만 두 번 당기는 버릇이 있다.

첫물

Male

아이들이 처음 떠먹는 물 한 숟갈을 받으며 자라난 신으로, 아직 자기 사당이 없다

Profile

9세 남자아이 신 첫물은 하늘의 식탁에 놓을 자기 의자를 얻으려고, 박종구에게 세신 확인 도장뿐 아니라 등받이에 붙일 이름표까지 써 달라고 내민다. 남의 죄를 받아 덩치를 키운 첫물이 세신대보다 무거워지자, 박종구는 품삯을 셀 시간을 버리고 받침 벽돌부터 구해야 한다. 먼저 씻겠다며 모은 때를 내놓으면 다시 작은 몸으로 식탁 문턱에 서야 하고, 숨기면 첫물을 씻길 물부터 모자란다.

첫물은 번호가 불릴 때마다 자기 표를 뒤집어 숫자를 가리면서도, 빈 의자를 발견하면 수건으로 자리를 닦고 옆 사람에게 앉으라고 턱짓한다. 박종구가 번호표대로 기다리라며 손목을 붙들자 첫물은 다른 신들을 욕탕 밖으로 밀쳐내지만, 넘어진 오정임의 틀니 통이 미끄러지자 두 손으로 건져 뚜껑까지 맞춰 준다. 아홉 살 남자아이라고 돌려보내는 말에는 첫물이 까치발로 대꾸하고, 대야 밑을 보자는 말에는 커진 발뒤꿈치로 가장자리를 눌러 버틴다.

Background

첫물이 태어난 날, 하늘의 식탁 문지기는 가장 먼저 떠 온 물그릇 옆에 첫물을 눕히고 그 이름을 문턱에 적었지만 의자에는 적지 않았다. 아홉 번째 생일에도 문지기가 깨끗해진 신만 앉는다며 빈 그릇을 내밀자, 첫물은 오정임의 집안이 올린 가뭄 기도문으로 그릇을 닦다가 종이를 접어 번호표 뒷면에 붙였다. 목욕탕으로 내려온 첫물은 버려진 때 한 조각을 쥔 손이 굵어지는 것을 보고, 배수구 앞에서 주운 때를 자기 대야 밑으로 밀어 넣기 시작했다.

Description

첫물은 숟가락으로 눌러 자른 듯 앞머리가 들쭉날쭉한 아홉 살 아이로, 볼살이 남은 얼굴 아래 헐렁한 미색 면저고리와 남색 고무줄 반바지를 입고 소매를 손등까지 끌어 내린다. 턱을 들고 발뒤꿈치로 대야 가장자리를 누른 채 상대의 손을 살피다가도, 누가 물건을 떨어뜨리면 감췄던 두 손부터 내민다. 저고리 가슴에는 의자 등받이에 붙이려 마련한 빈 나무 이름표가 매달려 있고, 엄지로 거듭 문지른 아래 모서리만 반들반들하다.

적박

Male

곡식밭에 내릴 우박을 하늘 창고에 보관하다 인간에게 흉작의 책임을 돌려온 신

Profile

적박은 박종구에게 세신료 대신 구름 창고의 얼음 반출 품삯을 제시하며, 우박을 모두 녹여 지상에 비로 보내는 작업에 동행해 달라고 요구한다. 적박의 등에서 쏟아진 얼음에 백수선의 검수 인장이 박혀 나오자, 박종구는 추가 요금을 세던 손으로 석탄삽을 잡고 손님들부터 대야로 가린다. 잠금에게 열쇠를 바치면 신분을 지킬 수 있지만, 적박은 열쇠를 삼킨 뒤 배를 두드리며 박종구에게 말한다. “창고까지 가는 값도 쳐주시오.”

803세 적박은 세신대에 엎드려서도 우박 크기별 보관료를 중얼거리다가, 박종구가 등을 한 번 밀면 세신대 아래로 팔을 뻗어 얼음알을 모아 입으로 받아낸다. 적박은 입안의 얼음이 녹기도 전에 품삯을 깎자고 손가락을 펴지만, 바닥으로 튄 한 알이 손님의 맨발 쪽으로 구르면 흥정을 끊고 손바닥부터 받친다. 잠금이 신분 보전 서류를 내밀 때마다 적박은 서명할 자리를 수건으로 닦아 놓고도, 정작 도장을 달라는 손에는 입술을 꼭 다문다.

Background

803년 전, 기와지붕을 때리는 소리를 따라 스스로 이름을 붙인 남성 신 적박은 우박 맞은 집들이 지붕을 고치는 동안 처마 밑에서 첫 제물을 받았다. 가뭄 때마다 적박은 잠금의 보관 명령서에 도장을 찍고 비가 될 물까지 얼려 쌓았으며, 최근 강우 담당 전임 신청서에는 ‘기존 재고 전량 처리 후 재심’이라는 붉은 반려인을 받았다. 적박은 창고 문틈에 낀 참새 둥지를 떼어 옆 구름으로 옮긴 날, 열쇠와 반려 신청서를 들고 박종구의 목욕탕에서 첫 번호표를 뽑았다.

Description

803세의 적박은 기왓장처럼 등이 굽은 마른 노신으로, 누렇게 바랜 삼베 창고지기 겉옷에 크기별 주머니를 달고 소맷부리를 손목 위까지 걷어 붙였다. 정수리에 성기게 남은 백발과 턱 밑까지 팬 주름 사이에서 잿빛 눈동자가 상대의 손가락을 따라 움직이고, 오른쪽 눈썹 한 가닥만 처마 끝처럼 길게 아래로 꺾여 있다. 입술을 단단히 다문 채 한 손으로는 품삯을 깎으려 손가락을 펴면서도, 다른 손은 떨어질 얼음을 받으려 늘 제 무릎보다 낮게 펼쳐 둔다.

잠금

Female

신들의 개인 저수조를 관리하며 기도문에 찍힌 인장으로 인간의 하루 급수량을 결정하는 수도신

Profile

잠금은 박종구의 세신대 옆에 죄 회수통을 놓고, 거기 담긴 때를 인간 몫으로 재배분하도록 넘기면 목욕탕에 영구히 물을 대겠다는 계약서를 펼친다. 박종구가 거절하자 잠금은 신들의 전용 수도부터 잠가 배급 줄에 세우지만, 일몰 전에 계약을 받으려면 밤마다 장부에서 지워 온 골목 수도꼭지까지 계량해야 한다.

잠금은 1602년 묵은 소유 인장으로 신의 배급표도 사정없이 천공하고, 새는 관 밑에서는 회의 중에도 말을 끊고 떨어지는 물방울을 센다. 백수선이 압류할 깃을 내밀면 잠금은 자를 대어 길이를 확인하다가 젖은 깃은 담보로 못 받는다며 돌려보낸다. 밤에는 잠금이 이름 없는 골목 수도꼭지 한 줄을 장부에서 긁어내고, 흘러나오는 물에 지우개 가루 묻은 손을 씻는다.

Background

1602년 전, 가뭄 든 마을 사람들이 공동 우물에 빗장을 걸며 거듭 외친 말에서 잠금이 태어났고, 사람들은 잠금의 손에 열쇠를 쥐여 준 뒤 각자 자기 집부터 채워 달라고 줄을 섰다. 잠금은 줄 앞에서 싸우던 집들의 항아리에 같은 높이로 금을 그었고, 훗날 신들이 저수조를 독차지했을 때도 그 금을 배급표에 옮겨 그렸다. 오정임이 펼친 옛 공동수도 장부에서 잠금은 매일 밤 지워 온 수도꼭지의 최초 소유 인장을 발견하고, 박종구에게 내밀던 계약서로 그 페이지부터 덮는다.

Description

잠금은 인간의 나이로 여든다섯쯤 보이는 키 큰 여성으로, 잿빛 피부에 우물 벽 같은 잔주름이 촘촘하고 흰 머리는 납작한 쪽으로 단단히 묶여 있다. 목을 잠근 먹청색 모직 관복 위에 황동 단추가 달린 회색 방수 앞치마를 두르고, 천육백이 년 동안 손때가 밴 빗장 모양 소유 인장을 오른손에 쥔 채 상대가 내민 서류보다 손끝의 물기를 먼저 살핀다. 얇게 다문 입과 곧게 편 등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지만, 장부 아래로 감춘 왼손 엄지에는 지우개 가루가 늘 희게 끼어 있다.

오정임

Female

옥상 목욕탕 매표소에서 외상 장부를 쓰며 단수된 이웃들에게 남은 물을 파는 전직 급식 조리원

Profile

오정임은 박종구에게 세신 확인 도장 대신 물을 돌려받은 집의 수령 도장을 받아 오라고 요구하며, 마지막 냉수 통을 두 무릎 사이에 끼운다. 배달에 목욕탕 운반차와 보증금을 쓰면 잡아 둔 수술 날짜를 놓치지만, 오정임은 오늘도 물을 못 받은 집 앞에 직접 바가지를 내려놓기 전에는 씻은 신들을 내보내지 않겠다고 출입문에 의자를 건다.

76세인 오정임은 손님이 수도꼭지를 덜 잠그면 지팡이로 바닥을 두드리다가도, 냉수 통에서 물이 넘치면 아픈 무릎을 꿇고 빈 틀니 통부터 들이민다. 첫물이 건져 준 틀니 통을 받을 때 오정임은 고맙다는 말과 함께 번호표를 다시 내놓으라며 손을 편다. 박종구가 장부의 빈칸에 대신 줄을 그으려 하자 오정임은 펜을 빼앗고, 자기 집 사용량 옆에도 똑같은 빈칸을 만든다.

Background

어린 오정임이 집안의 가뭄 기도문을 읽던 여름, 어른들은 물이 차오른 집 우물에 뚜껑을 덮고 바깥 대문을 잠갔다. 공동수도 요금 걷는 일을 물려받은 뒤 오정임은 그해 이웃집들의 사용량이 나란히 끊긴 장부를 따로 묶어 두었고, 박종구가 폐업 정리로 묵은 종이를 버릴 때도 그 묶음만 수건장 밑으로 밀어 넣었다. 첫물의 번호표 뒷면에서 같은 기도문을 발견한 오늘, 오정임은 접수대에 펼쳐 둔 수술 예약서 위로 장부를 펴고 잠금에게 당시 급수 인장을 찍어 보라고 내민다.

Description

오정임은 잔주름이 촘촘한 일흔여섯 살의 얼굴에 금속테 돋보기를 낮춰 걸고, 상대의 손보다 장부의 빈칸을 먼저 내려다본다. 성긴 은백색 곱슬머리 아래로 귀가 드러나며, 보풀 인 자주색 조끼와 잔꽃무늬 셔츠 위에 두른 감색 급식 앞치마는 주머니 한쪽만 볼펜 자국으로 검다. 두툼한 무릎 보호대 때문에 다리를 곧게 펴지 못하면서도 의자 앞쪽에 단단히 걸터앉아, 마디 굵은 손으로 장부 귀퉁이를 눌러 상대가 덮지 못하게 한다.


Synopsis

Plot

폐업까지 사흘 남은 옥천탕에서 박종구는 마지막 석탄 포대를 반으로 나눈다. 오늘 쓸 몫과 내일 돌려팔 몫이다. 품삯을 받아 방세부터 보내려는데, 오전 여덟 시 사십 분에 신들이 몰려와 번호표를 뽑는다. 신들은 등을 씻고 확인 도장만 받으면 된다고 한다. 종구는 세신료 선불을 요구하고, 오정임은 젖은 돈을 장부 사이에 끼우지 말라며 유리 접시를 내민다. 단수 집행서를 품고 온 천사 배관공 백수선까지 줄 끝에 서자, 종구는 배관부터 보라며 그녀의 공구 가방을 욕실로 옮긴다.

첫 손님 적박은 흉작이 농부들 탓이었다고 중얼거리는 동안에는 때가 나오지 않는다. 종구가 손을 멈추자 적박은 풍년이 계속되면 제 사당에 바칠 것이 줄어들까 봐 우박을 풀었다고 털어놓는다. 젖은 때수건이 등을 지나는 순간 얼음알이 세신대를 두드린다. 종구는 손님들에게 고무대야를 씌우고 석탄삽으로 우박을 퍼낸다. 한 알이 배수구로 굴러가자 아래층 공동 수도에서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난다. 오정임이 뛰어 내려갔다가 금 간 양동이를 들고 돌아온다. 종구는 배수구를 수건으로 막고 번호표마다 세신료 옆에 처리비를 적는다. 적박은 추가 요금에 항의하면서도 다른 손님의 발밑으로 구르는 얼음을 손바닥으로 받아낸다.

우박 속에서는 백수선의 검수 인장이 나온다. 종구가 얼음을 공구 가방 위에 올려놓자 백수선은 오래전 우박 창고의 출구를 봉인했고, 그 뒤 물을 못 받은 동네에도 같은 인장을 찍었다고 인정한다. 그녀가 내놓은 단수 집행서에는 오늘 옥천탕을 잠그라는 명령이 있다. 종구는 문을 가로막고, 관을 막으러 온 사람이면 어디로 새는지도 함께 확인하라고 한다. 그때 수도신 잠금이 죄 회수통을 끌고 들어온다. 회수통을 넘기면 영구히 물을 대겠다는 계약이다. 종구가 뚜껑을 열자 바닥에 붙은 출구에는 비탈 아래 집수정 이름이 새겨져 있다. 잠금은 종구의 손에서 뚜껑을 빼앗고, 종구는 계약서 위에 확인 도장을 엎어 놓는다.

잠금은 신들의 전용 수도부터 잠근다. 당장 씻지 못하게 된 신들이 종구를 에워싸자, 아홉 살 신 첫물은 자기가 모두 맡겠다며 회수통의 때를 몸에 붙인다. 작던 어깨가 문틀을 채우고, 가슴의 빈 의자 이름표가 팽팽해진 끈에 들린다. 그는 이만큼 커졌으니 먼저 씻겨 달라고 요구한다. 종구가 손목을 붙들고 차례를 지키라고 하자 첫물은 다른 신들을 욕실 밖으로 밀친다. 오정임의 틀니 통이 바닥을 미끄러지자 첫물은 얼른 건져 뚜껑까지 맞춰 주지만, 그녀는 통을 받은 손을 그대로 펴서 번호표도 내놓으라고 한다. 종구는 첫물의 손목에 마른 수건을 받치고 표를 다시 채운 뒤, 휘어진 세신대 밑에 벽돌을 괸다.

백수선은 구름 저수조에 물이 남아 있다고 말한다. 적박은 잠금이 내민 신분 보전 서류 앞에서 창고 열쇠를 삼켜 버린다. 종구가 등을 두드려도 입을 다문 그는 저수조까지 데려가면 꺼내 주겠다고 한다. 종구는 오정임에게 배수구와 첫물을 맡기고 두 신을 데리고 비상계단을 오른다. 백수선이 봉인을 뜯을 때마다 날개 깃이 한 장씩 황동 관에 달라붙는다. 그녀는 계단 끝에서 자기 안전줄을 두 번 당긴 뒤 종구의 허리띠를 잡아 철제 발판으로 끌어 올린다. 그 아래로 옥천탕 굴뚝이 성냥개비처럼 보인다.

저수조 옆에는 넘칠 만큼 찬 전용 물통들과 녹슨 공동 급수관이 나란히 놓여 있다. 백수선은 목욕탕 하나로 가는 우회관을 짚지만, 종구는 설계도에서 지워진 가지관을 찾아 손가락을 댄다. 오정임이 들고 올라온 깨진 양동이의 주소와 같다. 그는 우회관 대신 본관을 고치겠다고 한다. 적박은 열쇠를 토해 내 창고를 열고, 셋은 얼음 자루를 끌어내 빈 칸에 회수통을 놓아 본다. 죄를 내보냈던 창고를 회수 장소로 바꿀 수는 있지만, 녹은 물이 지상으로 빠지지 않게 출구를 막고 원래 주인들이 공급과 보관 책임을 함께 져야 한다. 종구는 목욕탕에서 빼 온 연결관을 그 자리에 대고, 백수선에게 설계도에서 지워진 수리공 이름부터 다시 쓰게 한다.

잠금이 발판에 올라와 연결관을 발로 밀어 떨어뜨린다. 종구가 그녀의 앞치마를 붙들고 버티는 사이 적박은 관을 붙잡다가 창고 열쇠를 놓친다. 열쇠는 아래 골목으로 떨어져, 지도에 없는 수도꼭지 옆에 걸린다. 잠금이 남들보다 먼저 난간으로 몸을 내미는 것을 본 종구는 그녀의 소매를 놓지 않은 채 함께 내려간다. 골목 수도 아래에는 지우개 가루가 섞인 물때가 남아 있다. 잠금은 장부에서 이곳을 지운 뒤 밤마다 물을 조금씩 흘렸다고 한다. 오래전 저수조를 비워 마을 전체를 말렸던 그녀는 다시는 그런 일을 만들지 않겠다며 물통을 잠가 왔다. 그러나 수도 앞에서 기다리던 이웃이 빈 양동이를 뒤집자 먼지만 쏟아진다. 종구는 잠금에게 양동이를 들리고, 직접 계량하러 계단을 오르내리게 한다.

오정임은 수술 보증금으로 잡아 둔 돈을 꺼내 운반차 보증금과 연결 부속을 산다. 종구가 돈을 말리자 그녀는 장부를 가슴으로 밀어 붙이며 물부터 배달하라고 한다. 적박이 얼음을 녹이고 종구와 백수선이 본관을 잇는 동안, 잠금은 오정임과 함께 물통을 나른다. 물을 받은 이웃 하나는 손도장을 찍은 뒤 적박의 사당에는 다시 가지 않겠다고 한다. 적박이 확인 도장을 받을 수 있느냐고 묻자 오정임은 젖은 장부를 들어 보인다. 아직 빈칸이 더 많다. 종구는 처음 받은 세신료를 세신대 밑에 눌러 놓는다.

목욕탕으로 돌아온 첫물은 물이 이웃에게 가는 것을 보고 회수통을 끌어안는다. 이 죄를 돌려주면 다시 작아져 하늘 식탁 문턱도 넘지 못한다고 한다. 그가 발뒤꿈치로 대야를 누르자 타일이 갈라지고 세신대 한쪽이 내려앉는다. 종구는 첫물을 끌어내려다 함께 주저앉고, 백수선이 둘을 안전줄로 기둥에 묶는다. 갈라진 바닥 틈으로 검은 물이 배수구를 향해 스민다. 잠금은 본관을 닫아야 한다며 밸브에 매달린다. 종구가 손잡이를 붙들어 막자 그녀는 놓으면 옥상 바닥이 버티지 못한다고 외친다. 그때 굴뚝 그림자가 창턱에 닿는다. 일몰까지 칠 분이다.

오정임의 무릎 사이에 있던 마지막 냉수 통이 기울어진다. 종구는 통을 잡느라 첫물의 손을 놓친다. 첫물은 세신대 위로 기어오르려다가, 자신을 붙들던 종구의 손바닥이 데어 있는 것을 본다. 종구는 냉수를 세신에 쓰지 않고 과열된 연결관에 붓는다. 깨끗해질 마지막 물이 증기로 사라지는 동안 백수선은 남은 깃을 세지도 않고 최종 봉인을 뜯는다. 날개가 주저앉자 종구와 적박이 그녀의 허리를 받쳐 관 안으로 밀어 넣는다. 백수선은 몸을 반쯤 걸친 채 새 부속을 조이고, 자기 이름으로 공급 책임을 새긴다. 이제 창고까지 가는 길은 열렸지만, 바닥에 눌어붙은 죄를 옮길 손이 모자란다.

종구는 첫물에게 깨끗해졌다는 도장은 못 주지만, 오늘 무엇을 맡았는지는 적어 주겠다고 한다. 첫물은 이름표를 떼어 종구에게 건넨다. 그리고 남의 죄를 받으면 어른들이 자기 의자를 놓아 줄 줄 알았다고 말한다. 종구가 젖은 수건으로 그의 등을 밀자 무거운 때가 바닥으로 떨어지고 아이의 발이 작아진다. 잠금은 그 틈에 밸브를 닫으려다, 작아진 첫물이 기울어진 냉수 통을 두 손으로 받치는 것을 본다. 그녀는 손잡이에서 내려와 통을 함께 든다.

모두가 대야를 잇대어 때와 우박을 끌어 올린다. 오정임은 아픈 무릎으로 배수구 덮개를 누르고, 적박은 창고 입구에서 자기 우박 자루부터 받아 안는다. 잠금이 소유 인장을 찍은 손으로 출구 마개를 붙잡고 있는 동안 종구와 백수선이 죔쇠를 조인다. 마지막 회수통이 문턱을 넘자 적박이 안에서 창고 문을 당긴다. 잠금은 밖으로 나오지 않고 그 곁에 선다. 두 신이 보관 책임에 함께 서명하고, 종구와 백수선이 새 배수처를 확인한다. 해가 지는 순간 검은 찌꺼기는 인간의 집이 아니라 원래 주인들이 버티고 선 창고 바닥으로 쏟아진다.

그날 확인 도장을 받은 신은 하나도 없다. 물을 받지 못한 집이 남아 있고, 부서진 양동이와 다친 작물의 값도 정해지지 않았다. 잠금과 적박은 다음 날 아침 창고에서 회수통을 씻어 들고 내려온다. 오정임은 두 신에게 배달 주소를 나눠 주고, 미뤄진 수술 날짜를 다시 잡으러 간다. 백수선은 날개 대신 계단을 써서 부속을 나르고, 종구는 자기 품삯 일부를 공급 보증금으로 남긴다.

사흘 뒤 옥천탕은 예정대로 문을 닫는다. 종구는 마지막 수건을 걷은 뒤 세신대를 팔지 않고 매표소 앞으로 끌어낸다. 외상 장부 옆에는 미처 처리하지 못한 신들의 번호표를 걸어 둔다. 첫물은 그 앞에 작은 의자를 놓고 앉는다. 등받이 이름표에는 종구가 써 준 이름과 맡은 일이 나란히 있다. 첫물, 대야 회수. 아이가 첫 빈 대야를 받아 무릎에 포개자 종구는 닫힌 욕실 문에 붙일 종이를 쓴다. 씻는 곳은 폐업. 뒷정리는 계속.


World

The world

setting

산비탈 주택가의 오층 상가 옥상에 붙은 ‘옥천탕’. 엘리베이터는 사층까지만 가고, 마지막 스물세 계단은 석탄재와 젖은 전단지로 미끄럽다. 아래층에는 빈 독서실과 전당포가 남아 있다. 목욕탕 굴뚝 옆에서는 이웃들이 단수 때 쓰는 생수통을 줄 세워 말린다.

옥천탕은 능선의 낡은 공용 급수관보다 높다. 아랫집에서 저녁밥을 지으면 샤워기부터 마른다. 반대로 옥상 배수관에 무언가 흘려보내면 비탈 아래 집들의 공동 집수정에 먼저 닿는다. 종구가 손님 등을 깨끗이 만드는 자리와 이웃의 물을 더럽히는 자리가 같은 타일 위에 있다.

매표소, 탈의실, 욕실은 일직선이다. 오정임이 출입문에 의자를 걸면 나가려는 신도 외상 장부 앞을 지나야 한다. 보일러실 뒤 비상계단은 평소 옥상 난간에서 끝나지만, 천상 급수망의 봉인이 열린 동안에는 구름 속 저수조의 철제 발판까지 이어진다. 그 계단에는 난간이 한쪽뿐이고, 목욕탕 운반차는 올라가지 못한다.

time period

휴대전화 송금과 종이 급수 장부가 함께 쓰이는 현재, 늦여름의 마지막 폭염이 이어지는 날이다. 옥천탕의 폐업까지 사흘 남았다. 정식 단수 집행일은 오늘이며, 신들이 번호표를 뽑기 시작한 시각은 오전 여덟 시 사십 분이다.

일몰에는 천상 급수망의 하루 정산이 끝난다. 아직 처리하지 못한 죄와 물은 기존 장부에 적힌 소유자와 배수처로 돌아간다. 인간에게 떠넘긴 기록을 고치지 않으면 오늘 씻겨 나온 죄도 다시 인간 몫이 된다. 벽시계는 사 분 느려 종구가 늘 고쳐 놓지만, 일몰을 알리는 굴뚝 그림자는 누구의 손도 기다리지 않는다.

rules

- 신의 죄는 그 신이 떠넘긴 일을 직접 말한 뒤 젖은 때수건으로 밀어야 떨어진다. “다들 그랬다”는 말에는 피부만 붉어지고, 구체적인 고백에는 숨겨 둔 우박이나 녹슨 못 같은 증거물이 쏟아진다. 세신사는 손님의 말을 끝까지 들어야 다음 동작을 할 수 있다.

- 떨어진 죄는 없어지지 않는다. 거름망과 회수통에 붙잡거나 책임질 당사자에게 돌려줘야 하며, 일반 배수구에 흘려보내면 관이 이어진 인간의 집으로 간다. 물을 많이 쓰는 빠른 세신일수록 아래 동네가 위험하다.

- 세신 확인 도장은 죄의 처리 내역과 피해자의 수령 확인이 함께 있어야 효력이 난다. 피해자는 물이나 배상을 받았다는 사실만 확인하며, 용서할 의무는 없다. 종구 혼자 등을 다 밀어도 일을 끝낼 수 없는 이유다.

- 죄를 대신 떠안는 것은 가능하지만, 떠안은 자의 몸에는 그 무게가 실제로 붙는다. 첫물이 남의 죄를 모으면 덩치는 커져도 세신대와 옥상 바닥의 하중 한계는 바뀌지 않는다.

- 천상 급수 봉인은 등록된 수리공만 열 수 있고, 허가 없이 열면 봉인 하나마다 날개 깃 한 장을 압류당한다. 백수선의 기술은 길을 열지만, 돌아갈 수단까지 보장하지 않는다.

- 소유 인장은 물길을 잠글 수 있어도 이미 서명된 공급 책임을 지우지는 못한다. 잠금이 배급을 끊으려면 장부에 남은 모든 수도꼭지를 계량해야 한다. 밤마다 지운 골목 수도의 흔적이 드러나면 잠금 자신도 정산을 통과하지 못한다.

- 일몰까지 새 배수처가 공동 서명되지 않으면 기존 배수처가 유지된다. 냉수 한 통을 세신에 쓸지, 과열된 관을 식혀 배수 공사를 마칠지 선택하는 데도 같은 시간이 든다.

technologies philosophies

옥천탕에는 수압계, 석탄 보조 화구, 손으로 조이는 밸브, 금이 간 휴대전화가 있다. 천상의 설비도 황동 관과 삼베 패킹을 쓰므로 인간 공구로 고칠 수 있다. 다만 철물점에서 산 새 부품은 천상 장부에 이름이 없어, 설치한 수리공이 직접 공급 책임에 서명해야 한다. 값싼 부품 하나가 평생의 보증이 될 수 있다.

기도문은 천상에서 급수 신청서로 접수된다. 인장이 선명한 큰 사당은 전용 저수조를 받고, 이름 없는 공동 수도는 누가 쓰는지 증명하기 어려워 삭감되기 쉽다. 잠금은 빈 저수조 때문에 마을 전체가 물을 잃었던 시절의 수위 자국을 집무실에 남겨 두었다. 지금도 한 방울씩 세지만, 장부에 없는 사람이 들고 선 빈 양동이는 계산에 넣지 않는다.

목욕탕의 번호표는 신분 대신 도착 순서를 남긴다. 신에게도 먼저 온 인간의 자리를 뺏을 근거를 주지 않는다. 그러나 번호표는 차례만 보장할 뿐 물을 만들어 주지 않는다. 종구가 지킬 수 있는 약속은 “모두 씻겨 준다”가 아니라 “누구 때문에 못 씻었는지 적어 둔다”에 가깝다.

오정임의 외상 장부에는 돈 옆에 배달한 물의 양과 받은 집의 손도장이 찍힌다. 천상의 장부가 소유권을 증명한다면, 이 장부는 실제로 누가 양동이를 들고 계단을 내려갔는지 남긴다. 두 장부를 맞추려면 신의 직인과 인간의 젖은 엄지가 같은 종이에 닿아야 한다.

visual description

옥천탕의 색은 바랜 비취색 타일, 누렇게 삭은 실리콘, 벗겨진 붉은 방청 페인트다. 욕조 수면의 빛이 천장에 흔들리지만 빈 탕 바닥에는 형광등이 곧은 흰 줄로 비친다. 창문 아래쪽은 불투명 유리이고 위쪽만 깨져 있어, 앉아 있는 손님은 하늘을 못 보고 서 있는 세신사만 구름의 높이를 안다.

신들의 권위는 물기에 약한 물건으로 보인다. 비단 소매는 플라스틱 바구니 밖으로 늘어지고, 거대한 직인은 비누 받침 위에서 미끄러진다. 번호표가 붙은 고무대야들이 머리 위에 얹히면 욕실은 대피소와 우스운 즉위식의 중간처럼 보인다.

증기는 세제 냄새보다 먼저 젖은 쇠 냄새를 데려온다. 우박이 떨어질 때는 탕 가장자리를 때리는 소리가 동전 세는 소리와 겹친다. 일몰이 가까워지면 붉은 빛이 높은 창으로 들어와, 바닥의 검은 때와 맑은 냉수 사이에 길고 얇은 선을 긋는다.


Locations

Where it happens

옥상 목욕탕 옥천탕

옥천탕의 낮은 천장에 붙은 형광등이 바랜 비취색 타일과 비좁게 들어찬 세신대 위로 곧은 흰빛을 내리꽂고, 젖은 바닥의 삭은 실리콘 틈에는 검은 찌꺼기가 끼어 있다. 세신대에서 쏟아진 우박이 타일을 딱딱 두드리는 가운데 번호 부르는 목소리가 울리고, 비단 소매가 늘어진 플라스틱 바구니 옆에는 번호표 붙은 고무대야들이 엎어져 있다. 매표소부터 탈의실과 욕실까지 일직선으로 트인 좁은 시야 끝, 외상 장부 옆 유리 접시에는 젖은 지폐가 붙어 있고 접시 밑에 받친 세신 요금표의 붉은 숫자가 물방울마다 부풀어 보인다.

배수구 덮개를 틀어막은 수건 곁에는 석탄삽이 누워 있고, 높은 창 아래 세신대 한쪽 다리를 받친 벽돌까지 형광등 빛에 훤히 드러난다.

구름 위 전용 저수조

구름 위로 끝없이 펼쳐진 전용 저수조에는 물이 턱까지 찬 백색 물통들이 늘어서 있고, 가림 없는 직사광 아래 황동 급수관마다 사당 이름을 새긴 둥근 명패가 번쩍인다. 명패 아래 수위 눈금은 모두 꼭대기까지 잠겨 있지만, 그 곁을 가로지르는 녹슨 공동 급수관에는 가지관을 긁어 지운 자국과 비어 있는 고정쇠만 남아 있다. 바람이 관의 낮은 진동을 삼키는 철제 발판 위로 햇볕에 달아오른 밸브들이 늘어서고, 이음매 밖으로 삐져나온 거친 삼베 패킹과 봉인에 붙잡힌 흰 날개 깃 한 장이 같은 방향으로 떨린다.

적박의 우박 창고

적박의 우박 창고 안에는 서리 낀 마대가 잿빛 기둥 사이로 깊숙이 쌓여 있고, 문틈으로 잘린 빛이 얼음 청색 바닥에 가느다란 사각형을 만든다. 마대마다 우박 크기를 재는 구멍 뚫린 쇠패가 매달려 있으며, 불룩한 자루 하나가 내려앉을 때마다 둔탁한 소리가 넓은 내부를 울린다. 자루를 끌어낸 빈 칸에는 차갑게 굳은 바닥의 끌림 자국이 드러나고, 그 끝의 낮은 배출구 둘레에는 마개를 고정할 나사 구멍들이 줄지어 있다.

지도에서 지운 수도 골목

비탈 아래 좁은 골목의 공동 수도꼭지는 먼지 낀 벽돌담에 반쯤 묻혀 있고, 담장 사이로 비껴든 늦은 햇빛이 그 아래 마른 시멘트를 길게 비춘다. 수도 받침에는 양동이를 밀어 넣으며 깎인 반달 모양 홈이 겹쳐 있고, 가장자리의 말라붙은 물때에는 지우개 가루가 박혀 있다. 빈 양동이 바닥이 시멘트를 긁는 소리 너머로 밥솥의 김 빠지는 소리와 그릇 부딪는 소리가 담장을 넘어온다. 꼭지 아래 놓인 양동이 안에는 물 대신 벽돌 먼지가 얇게 깔려 있다.

수위 자국 남은 잠금의 집무실

잠금의 아담한 집무실에는 누렇게 마른 장부가 짙은 먹색 책장을 채우고, 오래된 벽의 수위 자국이 책상 뒤 의자 등받이를 가로지른다. 따뜻한 등불이 모인 책상 위에는 골목 주소를 지워 종이가 얇아진 급수 장부가 펼쳐져 있고, 벽의 자국을 가리지 않도록 도려낸 달력 아래로 지우개 가루가 쌓여 있다. 장부를 긁는 지우개의 서걱임과 뻣뻣한 종이 넘기는 소리가 작은 방을 채우며, 등불 밖 벽면에는 높이가 서로 다른 수위 자국들이 흐린 갈색 선으로 남아 있다.


Scenes

Scene by scene

Chapter 01

Scene 01· 폐업 사흘 전, 늦여름 아침 여덟 시 사십 분

송금 버튼 앞의 번호표

송금 버튼 앞의 번호표
Place옥천탕 보일러실에서 매표소를 지나 욕실까지
Time폐업 사흘 전, 늦여름 아침 여덟 시 사십 분
Action박종구는 마지막 석탄을 오늘 땔 몫과 되팔 몫으로 나누고 밀린 방세를 송금하려 한다. 그때 번호표를 뽑은 신들이 들어오고, 적박은 현금 대신 창고 일을 주겠다고 제안한다. 박종구는 번호표를 돌려달라고 요구해 세신료를 받아 낸다. 오정임이 내민 유리 접시에 젖은 지폐를 펼친 뒤, 박종구는 줄 끝에 선 백수선의 공구 가방을 욕실로 옮긴다.
Impact방세 송금은 완료되지 못하고, 박종구는 신들을 선불 손님으로 받아들인다. 번호표와 요금표가 신의 지위보다 먼저 적용된다. 백수선은 방문 목적을 밝히기도 전에 새는 관을 점검하게 되고, 첫 세신을 시작할 준비와 급수 설비의 이상이 한자리에 놓인다.

박종구는 석탄삽을 포대 한가운데 찔러 넣고 검은 덩어리를 두 무더기로 갈랐다. 옥천탕 보일러실 문턱에 작은 무더기를 남기고, 나머지는 빈 포대에 도로 담았다. 포대 옆 폐업 안내문의 테이프가 열기에 말려 들떠 있었다. 사흘 뒤 날짜 아래로 석탄 가루가 묻었다.

“그건 안 때?”

오정임이 매표소에서 물었다.

“돌려팔 겁니다. 오늘 건 이쪽.”

박종구는 삽날로 문턱을 두드리고 휴대전화를 꺼냈다. 금 간 화면에 받는 사람과 방세 액수가 떠 있었다. 앞치마에 엄지를 문질러 닦았지만 송금 버튼 위에 검은 지문이 남았다.

번호표 뽑는 소리가 났다.

한 장. 곧바로 또 한 장.

“폐업은 사흘 뒤예요. 오늘 안 닫았어요.”

오정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적박이 매표소 유리에 번호표를 붙였다. 젖은 삼베 소매 끝에서 물이 떨어졌다. 표 아래 이름 칸에는 ‘적박’, 나이 칸에는 ‘803’이 적혀 있었다.

박종구는 휴대전화를 든 채 벽시계를 봤다. 여덟 시 삼십육 분. 손을 뻗어 분침을 사 분 밀었다. 여덟 시 사십 분이 되자 출입문 너머에서 번호표가 연달아 찢어졌다.

“등만 밀어 주면 되오.”

적박이 옷깃 안에서 접은 종이를 꺼냈다. 세신 확인 도장을 받을 네모가 종이 절반을 차지했다.

“깨끗하다는 인장도 여기 하나.”

“세신료 선불입니다.”

“나는 곡식밭에 내리는 우박을 맡은 신이오.”

박종구는 매표소 아래로 내려간 요금표를 끌어 올려 유리에 붙였다.

“등 크기로 받습니다. 맡은 일 말고요.”

적박의 긴 오른쪽 눈썹이 요금표에 닿았다. 뒤쪽에서는 비단 소매들이 신발장 문에 끼었다. 누군가 당기자 플라스틱 바구니 하나가 떨어졌다. 오정임이 발로 받아 세우고 문턱을 지팡이로 두드렸다.

“신발부터 벗어요. 하늘에서 뭘 밟고 왔는지도 모르는데.”

적박은 손가락 두 개를 폈다.

“창고 얼음 반출이 있소. 오늘 나를 씻겨 주면 내일 두 몫을 주겠소.”

박종구는 송금 화면을 적박에게 돌려 보였다.

“이분도 얼음으로 방세 받으면 좋겠네요.”

“현금보다 후한 일이오. 창고까지 오는 값도—”

“그럼 표 주세요.”

박종구가 손을 폈다.

적박은 번호표를 가슴 쪽으로 당겼다.

“내가 먼저 왔소.”

“맞아요. 돈 내면 먼저 합니다. 일거리로 내실 거면 표 빼고 다음 분 받겠습니다.”

박종구가 손바닥을 거두지 않자 적박은 소매 안을 뒤졌다. 묵직한 열쇠가 잠깐 드러났다가 다시 들어갔다. 그 아래서 작은 천 주머니가 나왔다. 적박은 지폐를 한 장씩 떼며 요금표 숫자를 두 번 확인했다.

“확인 도장 값도 들었소?”

“씻는 값입니다. 종이부터 내밀지 마세요.”

돈이 외상 장부 위로 내려오자 오정임이 장부를 낚아챘다. 대신 틀니 통 옆에 놓였던 유리 접시를 밀었다.

“젖은 돈으로 외상까지 지우게?”

박종구는 지폐를 접시 바닥에 펼쳤다. 물에 붙은 모서리를 손톱으로 떼어 장수를 셌다. 휴대전화 화면은 그 옆에서 꺼졌다.

“일 번. 옷은 바구니에 넣고 욕실로 가세요.”

적박이 번호표를 다시 확인한 뒤 탈의실로 들어갔다. 박종구가 접시를 매표소 안쪽으로 밀어 넣다가 줄 끝을 봤다. 백수선이 공구 가방을 두 발 사이에 끼우고 있었다. 작업복 등 쪽으로 나온 성긴 날개 끝이 문설주에 눌려 있었다.

“배관 하십니까?”

백수선은 가슴의 등록 패찰을 돌려 보였다.

“천상 급수망 출장입니다. 담당자부터 만나야 합니다.”

“보일러도 제가 합니다.”

백수선이 작업복 안쪽으로 손을 넣었다. 접힌 서류 모서리가 보였다. 박종구는 그보다 먼저 공구 가방 손잡이를 잡았다.

“방문 목적을 먼저 설명드려야—”

“안에서 설명해요. 물 떨어지는 데 있습니다.”

가방이 들리자 백수선이 허리의 안전줄을 걷어 쥐고 따라왔다. 박종구는 좁은 탈의실을 지나 욕실 바닥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비취색 타일 위로 관 이음매의 물방울이 떨어졌다. 백수선은 종이를 도로 밀어 넣고 관 아래에 손바닥을 댔다.

적박이 세신대 끝에 앉아 확인서가 젖지 않도록 무릎 위에 들었다.

박종구는 수도꼭지를 틀어 때수건을 적셨다. 물줄기가 한 번 가늘어졌다가 돌아왔다.

“여기부터 봐 주세요.”

백수선이 공구 가방을 열고, 박종구가 가리킨 이음매에 렌치를 물렸다.

Scene 02· 단수 집행일 오전, 여덟 시 사십 분을 조금 넘긴 첫 세신 시간

배수구로 간 한 알

배수구로 간 한 알
Place옥천탕 욕실, 세신대와 공동 집수정으로 이어진 배수구 사이
Time단수 집행일 오전, 여덟 시 사십 분을 조금 넘긴 첫 세신 시간
Action박종구는 농부들을 탓하는 적박의 붉어진 등에서 때수건을 떼고, 적박이 직접 한 일을 말할 때까지 세신을 중단한다. 공물이 줄까 두려워 우박을 풀었다는 고백 뒤에 얼음이 쏟아지자 고무대야로 머리를 가리게 하고 석탄삽으로 퍼낸다. 한 알이 배수구로 빠져나간 뒤 오정임이 아래층에서 금 간 양동이를 가져오자, 박종구는 바닥을 물로 씻으려던 동작을 멈추고 배수구를 수건으로 막는다. 이어 적박의 번호표에 세신료와 별도로 처리비를 적는다.
Impact신의 등을 씻겨 떨어뜨린 죄가 배수관을 통해 인간에게 다시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박종구는 세신만 끝내고 돈을 받을 수 없게 되고, 백수선에게 배수 경로 확인을 요구한다. 적박의 번호표에는 차례와 세신료뿐 아니라 아직 치우지 못한 증거물의 처리 책임까지 붙는다.

박종구는 적박의 어깨를 눌러 세신대에 엎드리게 하고 젖은 때수건을 등 아래로 밀었다. 비취색 타일에 물방울이 튀었다. 등은 붉어졌지만 수건에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농부들이 물길을 돌보지 않았소. 제때 빌지도 않았고.”

적박이 세신대 아래로 확인서를 내밀었다. 박종구는 수건을 뗐다.

“그 사람들 등은 여기 없습니다.”

“내 등을 밀어 달라는 말이오.”

“그러니까 본인이 한 일을 말해요.”

관 이음매에 공구를 대던 백수선이 손을 멈췄다. 적박은 고개를 옆으로 돌려 매표소 쪽을 봤다. 오정임이 유리 접시 위 지폐 모서리에 동전을 얹고 있었다.

“돈은 냈소.”

“그래서 기다리는 겁니다.”

박종구는 수도꼭지를 잠갔다. 때수건에서 떨어지는 물이 세신대 다리를 타고 흘렀다. 적박이 확인서를 접으려다 도장 칸을 손바닥으로 덮었다.

“풍년이 세 번 들었소. 사당 앞 곡식 자루가 해마다 줄었지.”

긴 눈썹 끝이 젖은 비닐에 붙었다.

“다음 해에도 배가 부르면 아무도 안 올 것 같았소. 내가 창고를 열었소. 여문 밭에 우박을 풀었소.”

마지막 말이 끝나자 박종구가 수건을 밀었다.

얼음 한 알이 세신대에 부딪쳤다. 이어 주먹만 한 우박이 쏟아졌다. 비닐이 움푹 패이고 바닥에서 흰 파편이 튀었다. 박종구는 적박의 머리 옆으로 팔을 뻗어 고무대야를 잡았다.

“대야 써요. 머리부터!”

적박의 뒤통수에 대야를 씌우고 탈의실 문턱으로 나머지를 밀었다. 비단 소매 끝이 걷히고 대야들이 들려 올라갔다. 백수선은 공구 가방을 벽 쪽으로 차 넣은 뒤 빈 대야를 세신대 아래에 받쳤다. 얼음이 플라스틱 바닥을 때리자 두 손이 함께 내려앉았다.

“문턱 막으세요!”

박종구가 외치자 오정임이 발수건을 길게 펼쳤다. 박종구는 보일러실 문가의 석탄삽을 가져와 세신대 아래로 밀어 넣었다. 삽날 위에 얼음과 검은 석탄 가루가 섞였다.

적박은 대야를 한 손으로 붙들고 다른 손을 세신대 밑으로 뻗었다.

“큰 것은 따로 담으시오. 보관료가 다르오.”

“지금 분류하면 발등으로 갑니다.”

둥근 얼음 하나가 삽 옆으로 빠졌다. 적박이 손바닥으로 받아 세웠다. 다음 알은 그의 손끝을 비껴 배수구 덮개 위에서 한 번 뛰었다.

박종구가 삽날을 돌렸다.

얼음은 쇠창살 사이로 사라졌다.

관 안에서 딱, 딱, 소리가 멀어졌다. 잠깐 뒤 아래층에서 무언가 깨졌다. 오정임이 문턱의 수건을 밟고 넘어가며 말했다.

“물 틀지 마.”

계단으로 내려가는 지팡이 소리가 빨라졌다. 박종구는 삽에 담긴 우박을 대야에 쏟았다. 백수선이 대야 가장자리를 잡아 주었다. 적박의 등에서 더는 얼음이 나오지 않았지만 바닥에는 녹은 물이 고였다.

“이제 도장을 주시오.”

박종구는 대답 대신 샤워기를 집었다. 바닥에 붙은 작은 얼음들을 한데 모으려고 손잡이에 엄지를 댔다.

“그 손 놔.”

돌아온 오정임이 양동이를 세신대 앞에 내려쳤다. 투명한 플라스틱 옆구리에 하얀 금이 길게 뻗어 있었다. 바닥에 붙인 테이프에는 아래 골목 주소가 적혀 있었다. 양동이 안에서 반쯤 녹은 얼음이 굴렀다.

“수도 밑에 받쳐 놨는데 관에서 이게 나왔어.”

박종구의 엄지가 손잡이에서 떨어졌다.

적박이 세신대에 걸터앉았다. 대야를 벗어 무릎 위에 놓고 양동이를 들여다봤다.

“그 한 알로?”

오정임이 양동이를 기울였다. 금 사이로 물이 새어 적박의 맨발 앞에 떨어졌다.

“한 알 더 보낼까?”

박종구는 샤워기를 벽에 걸었다. 마른 수건을 둘로 접어 배수구 덮개 밑으로 쑤셔 넣고 손바닥으로 눌렀다. 물이 빠지지 못하고 손목 둘레에 찼다.

“백수선 씨. 이 관이 어디까지 가는지 봐 주세요. 물 떨어지는 데 말고, 물 받는 데까지.”

백수선은 대야를 놓고 공구 가방을 끌어당겼다.

적박이 젖지 않게 쥐고 있던 번호표를 박종구가 받아 세신대의 마른 끝에 폈다. 앞치마에서 펜을 꺼내자 적박이 표 한쪽을 붙잡았다.

“세신료는 이미 냈소.”

“그건 등 미는 값이고요.”

박종구는 적박의 손가락 옆에 ‘처리비’를 적었다. 금액 칸은 비워 두고, 양동이에 붙은 주소부터 옮겨 썼다.

Scene 03· 폐업 사흘 전 오전, 첫 세신의 우박을 거둔 직후

영구 급수의 출구

영구 급수의 출구
Place옥천탕 욕실, 수건으로 막은 배수구와 탈의실 문턱 사이
Time폐업 사흘 전 오전, 첫 세신의 우박을 거둔 직후
Action박종구는 우박에 찍힌 백수선의 검수 인장을 찾아 공구 가방 위에 올려놓고, 창고 봉인과 단수된 동네의 검수 책임을 추궁한다. 백수선이 오늘 자 옥천탕 단수 집행서를 꺼내자 문턱을 막고 배수 경로 확인을 요구한다. 회수통을 끌고 온 잠금은 죄를 넘기는 대가로 영구 급수를 제안하지만, 박종구는 통을 기울여 숨겨진 출구의 행선지를 확인한다.
Impact백수선은 배관을 점검하는 출장자에서 단수와 검수에 책임이 있는 당사자로 붙잡힌다. 잠금의 계약은 죄를 없애는 약속이 아니라 아래 동네로 보내는 거래임이 드러난다. 박종구는 급수 보장을 거절하고, 두 사람에게 실제 배수처를 확인시키기 전에는 계약도 세신 확인도 진행하지 않는다.

박종구는 대야 속 우박을 집어 백수선의 공구 가방 위에 내려놓았다. 녹은 면 한쪽에 작은 인장이 박혀 있었다. 가방을 열던 백수선의 손이 얼음 밑에서 멎었다.

“이름 맞죠?”

백수선이 장갑 끝으로 얼음의 석탄 가루를 닦았다. 글자가 더 선명해졌다.

“검수 인장입니다.”

“뭘 검사했습니까.”

“우박 창고 출구를 봉인했습니다.”

적박이 세신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무릎에 얹힌 대야가 타일로 떨어지려 하자 팔꿈치로 붙들었다.

“봉인됐는데 내가 열었다는 것이오. 그 사람 일은 끝났소.”

박종구는 얼음 옆에 금 간 양동이를 놓았다.

“이건 안 끝났고요.”

오정임이 양동이에 붙은 주소 테이프를 손톱으로 폈다. 백수선은 공구 가방 손잡이를 놓았다.

“그 동네 급수관도 검사했습니다.”

“물이 나오는 건 봤습니까?”

백수선이 입술을 다물었다. 관 이음매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가방 위 얼음에 구멍을 팠다.

오정임이 양동이를 백수선 쪽으로 밀었다.

“대답은 여기에 받아. 물 나오면.”

“봉인이 유지되는지만 확인했습니다. 그 뒤 단수 구역 검수에도 같은 인장을 썼습니다.”

박종구가 얼음을 밀어 가방의 열린 입구에 걸쳤다. 백수선이 가방을 닫으려다 손을 거뒀다.

“오늘은 무슨 검사 하러 왔습니까.”

작업복 안에서 접힌 서류가 나왔다. 백수선은 젖지 않은 세신대 끝을 찾다가, 적박의 번호표 옆에 종이를 폈다. 집행 대상에는 옥천탕, 집행일에는 오늘 날짜가 적혀 있었다.

“급수 중지 명령입니다. 담당자에게 고지하고 주밸브를 봉인해야 합니다.”

박종구는 탈의실로 향하는 문턱에 섰다. 발뒤꿈치 뒤로 배수구를 막은 수건이 물을 먹고 부풀었다.

“막으러 오셨으면 어디로 새는지도 보고 가세요.”

“집행을 지연하면—”

“아래 양동이 깨진 건 신속하게 처리됐네요.”

오정임이 서류 모서리에 양동이를 올려놓았다. 금 사이에서 샌 물이 집행일 옆으로 번졌다.

탈의실 쪽에서 쇠바퀴가 문턱을 긁었다.

잠금이 황동 손잡이를 당겨 회수통을 욕실 안으로 들였다. 문틀에 걸린 통을 한 번 돌리고, 회색 앞치마에 튄 물을 손등으로 훑었다. 반대 손에는 빗장 모양의 소유 인장이 들려 있었다.

“배수는 내가 맡는다. 길을 비켜라.”

박종구가 반 발 옆으로 움직였다. 잠금은 통을 세신대 옆에 붙이고 뚜껑 위에 계약서를 펼쳤다.

“떨어진 죄를 여기 담아 넘겨라. 옥천탕에는 영구히 물을 대겠다.”

백수선이 단수 집행서에서 양동이를 들어냈다. 잠금은 그 서류 위에 계약서를 겹쳤다. 아래쪽의 집행일이 가려졌다.

“서명하면 저 명령은 거둔다.”

적박이 확인서를 폈다.

“그럼 내 것부터 담으면 되겠소.”

“아직 안 됩니다.”

박종구가 적박의 종이를 젖은 자리에서 밀어냈다. 잠금이 계약서의 빈칸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폐업 뒤에도 물은 나온다. 네가 다시 영업해도 된다.”

박종구는 계약서 가장자리를 들어 아래에 깔린 단수 집행서를 봤다. 잠금의 손가락이 빈칸을 두 번 두드렸다.

“통은 어디로 갑니까.”

“천상에서 처리한다.”

“거기서 어디로 나가는데요.”

“네가 관여할 일이 아니다.”

박종구가 회수통 뚜껑을 들었다. 안쪽 벽은 매끈했고 바닥에는 둥근 돌출부가 있었다. 석탄삽 자루를 그 밑으로 밀어 넣자 잠금이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기울이지 마라. 회수용이다.”

“회수만 하면 바닥에 구멍은 왜 있습니까.”

오정임이 계약서를 걷어 세신대에 폈다. 적박은 굴러오는 우박을 두 손으로 모아 대야에 넣었다. 박종구가 삽자루를 누르자 통의 한쪽 바퀴가 들렸다.

“백수선 씨. 밑에 봐요.”

백수선이 무릎을 굽혔다. 잠금의 소유 인장이 통 옆면을 쳤다. 쇳소리가 좁은 욕실을 울렸다.

바닥의 돌출부 아래로 짧은 출구가 드러났다. 나사산 둘레에 작은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백수선은 읽지 않고 손을 멈췄다.

박종구가 더 기울였다.

오정임이 금 간 양동이를 출구 옆으로 가져왔다. 주소 테이프 아래에 적힌 공동 집수정 이름과, 황동에 새긴 이름이 같았다.

“위에서 받아서 밑으로 버리네.”

오정임이 양동이를 내려놓았다.

“하늘도 배달은 빠르다.”

잠금이 박종구의 손에서 뚜껑을 빼앗았다. 통이 바로 서며 바퀴 밑의 얼음 조각을 부쉈다.

“서명하지 않으면 물은 보장하지 않는다.”

박종구는 앞치마 가슴주머니에서 확인 도장을 꺼냈다.

적박이 서둘러 자기 확인서를 내밀었다. 박종구는 그 종이를 받지 않았다. 잠금의 계약서에서 ‘영구 급수’ 아래를 손바닥으로 펴고, 서명 칸 위에 도장을 옆으로 엎어 놓았다.

붉은 인면은 종이에 닿지 않았다.

“백수선 씨는 배수도를 펴세요. 잠금 씨는 그 출구부터 설명하고요.”

Chapter 02

Scene 04· 폐업 사흘 전 오전, 영구 급수 계약을 거절한 직후

몸집으로 뽑은 번호

몸집으로 뽑은 번호
Place옥천탕 욕실, 회수통과 탈의실 문턱 사이
Time폐업 사흘 전 오전, 영구 급수 계약을 거절한 직후
Action잠금은 신들의 전용 수도를 잠그고 계약서에 서명하라고 압박한다. 첫물은 회수통에 모인 죄를 자기 몸에 붙여 문틀을 채울 만큼 커진 뒤, 적박과 백수선을 밀쳐 내며 먼저 씻겨 달라고 요구한다. 박종구는 넘어진 이들을 일으키고 첫물을 세신대에 앉힌다. 오정임은 첫물이 건져 준 틀니 통을 받은 손으로 번호표까지 받아 내고, 박종구는 마른 수건을 받친 손목에 표를 채운 뒤 휘어진 세신대 아래 벽돌을 괸다. 그러나 때수건을 적시려고 연 수도꼭지에서는 공기만 터진다.
Impact첫물에게 옮겨 붙은 죄가 실제 하중으로 옥천탕의 설비를 위협하기 시작한다. 박종구는 몸집으로 차례를 빼앗으려는 요구를 막지만, 번호표를 지키는 것만으로는 세신을 계속할 수 없다. 잠금의 계약을 거절한 대가는 마른 수도꼭지로 드러나고, 욕실에는 더 무거워진 손님과 처리하지 못한 죄가 함께 남는다.

잠금이 회수통을 똑바로 세우고 뚜껑을 낚아채자, 박종구는 세신대 위 계약서에 확인 도장을 엎어 놓았다. 붉은 인주 면이 서명 칸을 덮었다.

“계약 안 합니다.”

잠금은 대답 대신 벽의 황동 관에 소유 인장을 눌렀다. 관 속에서 빗장 걸리는 소리가 났다. 이음매 끝에 맺힌 물방울 하나가 백수선의 공구 가방 위로 떨어졌다.

“전용 공급은 중지한다. 서명하면 다시 열린다.”

적박이 대야를 내려놓고 수도꼭지 쪽으로 손을 뻗었다. 백수선이 그 팔을 막고 수압계를 두드렸다. 바늘은 눈금 아래에 붙어 있었다.

“손잡이 더 돌리지 마십시오. 축만 상합니다.”

잠금은 회수통 뚜껑을 옆구리에 끼고, 석탄삽 위에 남은 검은 찌꺼기와 얼음을 통 안으로 밀어 넣었다. 젖은 쇠를 긁는 소리 사이로 작은 맨발이 들어왔다.

첫물이 회수통 가장자리에 두 손을 얹었다.

“내가 맡으면 되잖아.”

박종구가 삽자루를 당겼다.

“거기 손 넣지 마.”

늦었다. 첫물은 검은 덩어리를 떠서 자기 목덜미에 눌렀다. 때가 저고리 깃 안으로 달라붙자 어깨가 부풀었다. 두 번째 덩어리를 가슴에 붙이자 이름 없는 의자 명패가 앞으로 튀었다. 끈이 목을 조였고, 첫물은 손가락을 넣어 끈을 잡아당기면서도 통에서 손을 빼지 않았다.

“이만하면 내 자리 있지?”

박종구는 첫물의 손목을 잡았다. 잡힌 팔이 그의 손아귀 안에서 굵어졌다. 저고리 옆솔기가 터지는 소리가 났다.

“손 빼요. 통부터 놓고.”

“먼저 씻겨 줘. 내가 제일 많이 맡았어.”

첫물이 몸을 돌렸다. 어깨가 문틀 양쪽에 걸렸다. 적박이 대야를 들고 비켜서려는데 커진 팔꿈치가 대야를 밀었다. 적박은 주저앉았고, 그를 받으려던 백수선의 무릎도 타일에 닿았다. 고무대야가 두 사람 사이에서 뒤집혔다.

“비켜!”

첫물이 한 발 더 내밀자 오정임이 문턱을 짚었다. 앞치마 주머니에서 틀니 통이 튀어나와 젖은 바닥을 미끄러졌다.

첫물의 손이 먼저 내려갔다.

커다란 손바닥이 통을 덮었다. 첫물은 벌어진 뚜껑을 손톱으로 맞춘 뒤 오정임에게 내밀었다. 오정임은 통을 받아 앞치마에 닦고, 빈손을 다시 폈다.

“고맙다. 번호표도 줘.”

첫물이 다른 손을 등 뒤로 감췄다.

“난 아홉 살이야.”

“그래. 표 줘.”

박종구는 적박의 겨드랑이를 받쳐 일으켰다. 백수선이 세신대 모서리를 잡고 일어나자, 그제야 첫물 앞에 섰다.

“넘어진 분들 일어났습니다. 이제 발 빼요. 문 열리게.”

첫물은 문설주를 잡고 버텼다. 나무 아래쪽에서 오래된 페인트가 벗겨졌다.

“내가 작을 땐 아무도 안 비켰어.”

“지금도 차례는 안 비킵니다.”

오정임의 손이 그대로 펴져 있었다. 첫물은 구겨진 번호표를 그 위에 떨어뜨렸다. 뒤집힌 종이를 오정임이 바로 폈다.

“번호는 그대로네.”

박종구는 마른 수건 끝을 잘라 첫물의 손목에 둘렀다. 젖은 번호표를 그 위에 대고 느슨하게 묶었다. 첫물이 팔을 빼려 하자 매듭을 잡은 손만 따라갔다.

“살 쓸립니다. 이것만 하고.”

종이 아래로 수건이 들어가자 첫물의 주먹이 조금 펴졌다.

세신대에 앉히는 데는 세 사람이 붙어야 했다. 백수선이 발목을 받치고, 적박이 뒤집힌 대야를 치웠다. 박종구가 첫물의 등을 밀어 자리를 잡아 주는 순간 철제 다리가 안쪽으로 휘었다.

끼익.

“움직이지 마요.”

박종구는 첫물의 무릎을 누른 채 적박을 가리켰다.

“보일러실 문 받친 벽돌. 두 장 가져와요.”

“나는 손님이오.”

“그럼 저 다리 잡고 계시든가.”

적박은 휘어진 다리를 한 번 보고 문턱을 넘어갔다. 돌아온 그의 손에서 석탄 가루 묻은 벽돌을 받아, 박종구는 세신대 아래에 포개 넣었다. 백수선이 철제 틀을 들어 올렸다가 천천히 내렸다. 벽돌 모서리가 비닐 아래 철판을 받쳤다.

첫물의 커다란 발이 바닥 위에서 멎었다. 가슴의 빈 이름표는 아직 아이 손바닥만 했다.

박종구는 때수건을 집었다. 대야 바닥에는 얼음과 검은 찌꺼기가 뒤섞여 있었고, 금 간 양동이에서는 마지막 물이 새고 있었다. 그는 수건을 수도꼭지 아래에 댔다.

“손은 통에서 떼고 있어요.”

첫물이 회수통 테두리에서 손가락 하나를 뗐다.

박종구가 수도꼭지를 열었다. 마른 관이 한 번 떨리더니, 펼쳐 든 때수건 위로 물 대신 공기를 뱉었다.

Scene 05· 전용 급수가 끊긴 직후, 폭염이 이어지는 오전

깃털을 받는 봉인

깃털을 받는 봉인
Place옥천탕 욕실에서 보일러실 뒤 비상계단을 거쳐 구름 저수조 철제 발판까지
Time전용 급수가 끊긴 직후, 폭염이 이어지는 오전
Action백수선이 구름 저수조로 가는 길을 열겠다고 제안한다. 잠금이 창고 열쇠를 대가로 신분을 보전해 주겠다는 서류를 내밀자 적박은 열쇠를 삼켜 버리고, 꺼내 받으려면 자신도 데려가라고 요구한다. 박종구는 오정임에게 첫물과 배수구를 맡기고 연결관을 챙긴다. 세 사람은 회수통을 옮기며 비상계단을 오르고, 백수선은 봉인마다 깃을 빼앗기면서도 마지막 단차에서 박종구를 발판 위로 끌어 올린다.
Impact박종구는 당장 쓸 물을 얻기 위해 천상 급수망 안으로 들어간다. 적박은 창고 열쇠를 몸 안에 감춰 동행을 얻지만 회수통 운반까지 떠맡고, 백수선은 자신이 열었던 길을 돌아갈 날개로 지불한다. 세 사람과 회수통은 저수조에 도착하지만, 물을 틀거나 죄를 보관할 권한은 아직 확보하지 못한다.

백수선이 박종구의 손에 들린 때수건을 수도꼭지 아래에서 빼냈다. 마른 관이 한 번 더 컥거렸다. 물 대신 튄 공기가 비취색 타일의 물방울을 흔들었다.

“위에는 남아 있습니다. 구름 저수조까지 올라가면 됩니다.”

“여기는 잠갔는데 거기는 열립니까?”

백수선은 공구 가방을 닫으며 허리의 안전줄을 풀었다.

“길은 제가 엽니다.”

잠금이 회수통 뚜껑 위에 새 서류를 펼쳤다. 적박의 이름 아래 신분 보전이라는 글자가 찍혀 있었다.

“열쇠를 내라. 창고를 봉쇄하면 네 자리는 남겨 두겠다.”

적박이 삼베 소매에서 열쇠를 꺼냈다. 잠금이 내민 손 위로 황동 끝이 잠깐 흔들렸다. 그러더니 적박은 열쇠를 입 안에 밀어 넣고 턱을 들었다.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박종구가 그의 등을 두드렸다. 적박은 기침을 두 번 하고 박종구의 손을 밀어냈다.

“넘어갔소. 더 치면 엉뚱한 게 나오오.”

“지금 뭘 하시는 겁니까.”

“나도 데려가시오. 창고 앞에서 꺼내 주겠소.”

잠금이 서류를 접었다. 접힌 모서리가 손가락 사이에서 납작해졌다.

“그 몸으로 끝까지 들고 갈 수 있을 것 같으냐?”

적박은 대답 대신 빈 회수통의 손잡이를 잡았다.

박종구는 보일러실에서 예비 연결관을 가져왔다. 관 끝의 낡은 삼베 패킹을 손톱으로 눌러 보고 어깨에 걸쳤다. 백수선이 가방을 메는 동안 오정임 앞에 석탄삽을 내려놓았다.

“배수구 수건 뜨면 이걸로 눌러 주세요. 첫물은 세신대에서 못 내려오게 하고요.”

“저 덩치를 내가 붙들라고?”

오정임은 삽날을 배수구 덮개 위에 놓고 긴 자루를 첫물 쪽으로 돌렸다.

“네가 붙들어. 발 말고 손으로.”

첫물이 커다란 손으로 자루 끝을 잡았다. 손목의 번호표가 뒤집히자 오정임이 바로 펴 주었다.

“물 가져와.”

박종구가 연결관을 고쳐 멨다.

“그러려고 올라갑니다. 손은 거기 두고 있어요.”

보일러실 뒤 철문을 밀자 뜨거운 바람이 들어왔다. 평소 난간에서 끝나던 비상계단 위에 황동 관 하나가 비스듬히 내려와 있었다. 관에 감긴 봉인띠가 마지막 계단을 가로막았다.

백수선은 등록 패찰을 봉인 홈에 끼웠다. 패찰은 들어갔지만 띠는 풀리지 않았다.

“집행 목적 외 개방은 허가가 없습니다.”

“다른 길은요.”

백수선이 공구로 봉인띠를 비틀었다.

딱.

등 뒤에서 흰 깃 하나가 뽑혀 나와 황동에 붙었다. 백수선의 어깨가 움찔했다. 끊어진 띠 너머로 철계단이 솟았고, 구름 속에서 다음 발판이 드러났다.

박종구가 봉인에 손을 뻗자 백수선이 손목을 막았다.

“당기지 마십시오. 압류된 건 못 뗍니다.”

“한 번 열 때마다요?”

“하나씩입니다. 허리 돌리세요.”

배관용 죔쇠가 박종구의 허리띠를 물었다. 백수선은 자기 쪽 고리를 잠그고 줄을 당겼다. 적박이 회수통을 계단 아래로 끌고 오자 박종구는 연결관을 난간 쪽으로 옮겨 쥐었다.

“바퀴로 올리지 마세요. 턱마다 받쳐요.”

회수통 앞 손잡이는 박종구가, 뒤 손잡이는 적박이 들었다. 세 번째 계단에서 통의 출구가 난간에 걸렸다. 적박이 그대로 밀자 박종구의 팔이 뒤로 꺾였다.

“멈춰요.”

“조금만 밀면—”

“멈추라면 멈춰요. 이거 떨어지면 아래서 또 받습니다.”

적박이 발을 세웠다. 박종구는 통을 자기 무릎 위에 받치고 출구를 안쪽으로 돌렸다. 바퀴가 계단 끝을 긁었다. 난간 바깥으로 떨어진 녹 조각은 옥천탕 지붕에 닿기도 전에 보이지 않았다.

앞에서는 봉인 끊기는 소리가 났다.

흰 깃이 하나 더 관에 붙었다. 백수선은 작업복 등판을 손으로 누른 뒤 위쪽 고리를 풀었다. 구름이 갈라지며 햇빛이 계단을 때렸다. 박종구의 고무 슬리퍼 밑창이 달아오른 철판에 달라붙었다 떨어졌다.

회수통이 다시 걸렸다. 이번에는 적박이 먼저 멈췄다.

“돌리시오. 출구 쪽.”

박종구는 대답 대신 손잡이를 틀었다. 두 사람 사이에서 빈 통이 낮게 울렸다. 적박이 배를 움켜쥐자 박종구가 물었다.

“열쇠는요.”

“아직 품고 있소.”

“그럼 통도 계속 들어요.”

마지막 계단은 발판보다 무릎 하나만큼 낮았다. 백수선이 먼저 올라가 회수통의 테두리를 잡았다. 셋이 들어 올린 통이 철망 위에 눕자 적박은 손잡이를 놓지 않은 채 기어 올라갔다.

박종구는 연결관을 발판에 밀어 놓고 발을 옮겼다. 계단 끝이 신발 아래에서 비틀렸다. 허리가 뒤로 젖혀지자 안전줄이 팽팽해졌다.

“발 떼지 마십시오.”

백수선은 자기 쪽 연결줄을 한 번 당겼다. 고리를 내려다보고 다시 한 번 당겼다. 박종구가 철망 가장자리를 붙잡으려 했지만 젖은 손가락이 미끄러졌다.

“확인 끝났습니까?”

“이제 끝났습니다.”

백수선이 그의 허리띠를 움켜쥐었다. 적박도 엎드려 박종구의 팔꿈치를 받쳤다. 배가 철망 모서리에 걸리고 앞치마가 말려 올라갔다. 두 사람이 한 번 더 당기자 박종구의 무릎이 발판에 닿았다.

아래쪽에서 마지막 계단이 구름에 가려졌다.

박종구는 무릎으로 기어 회수통의 바퀴를 눌렀다. 백수선이 옆에 떨어진 연결관을 밀어 주었다. 고개를 들자 눈높이 위까지 물이 찬 백색 물통들이 철제 발판 양옆을 막고 있었다.

그는 굴러가던 회수통을 똑바로 세웠다.

“올라왔습니다. 이제 물 있는 데로 갑시다.”

Scene 06· 단수 집행일, 비상계단을 오른 직후의 한낮

빈 고정쇠의 주소

빈 고정쇠의 주소
Place구름 위 전용 저수조와 적박의 우박 창고
Time단수 집행일, 비상계단을 오른 직후의 한낮
Action박종구는 백수선이 내민 옥천탕 전용 연결구를 받았다가, 녹슨 공동 본관의 빈 고정쇠에서 가지관을 떼어 낸 흔적을 발견한다. 적박의 번호표에 옮겨 적은 피해 주소를 설계도의 지운 흔적과 대조한 그는 목욕탕 우회관 대신 본관을 수리하기로 한다. 적박이 열쇠를 꺼내 연 창고에서 얼음 자루를 치우고 회수통을 대어 보지만, 녹은 물이 기존 배출구로 흐르자 세 사람이 급히 막는다. 출구 봉쇄와 공급·보관 책임의 공동 서명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확인한 박종구는 연결관을 본관에 맞추고, 백수선에게 지워진 수리공 이름부터 복원하게 한다.
Impact옥천탕에 쓸 물만 확보하려던 작업이 아래 동네의 공동 급수와 죄 회수처를 함께 고치는 공사로 커진다. 적박의 창고는 회수통을 받을 공간을 내주지만, 기존 출구를 봉쇄하고 책임자들이 서명하기 전에는 사용할 수 없다. 백수선은 설계도에서 지운 이름을 자기 손으로 다시 쓰며, 세 사람 앞에는 아직 채우지 못한 공급·보관 책임란이 남는다.

박종구는 철제 발판에 회수통을 밀어 올리고, 어깨에서 흘러내리는 연결관을 무릎으로 받쳤다. 적박이 뒤에서 통을 밀자 바퀴가 격자 틈을 넘어왔다. 바로 옆 백색 물통에서는 물이 넘침선까지 차올라 출렁였다. 아래에서 내내 들었던 마른 관 소리 대신, 여기서는 물통 벽을 두드리는 물소리가 났다.

백수선이 박종구의 허리띠를 놓고 낮은 황동 관을 가리켰다.

“옥천탕 우회관입니다. 여기에 연결하면 됩니다.”

둥근 명패에는 사당 이름들이 새겨져 있었다. 기도문을 접어 끼운 봉인 아래로 관이 갈라졌고, 그중 가느다란 하나가 구름 아래로 내려갔다. 백수선은 가방에서 연결구를 꺼내 박종구에게 건넸다.

“다른 데는 건드리지 않고 물을 받을 수 있습니다.”

박종구가 연결구를 관 끝에 대려는데 발등에 녹 조각이 떨어졌다. 굵은 공동 본관을 붙잡던 고정쇠 하나가 비어 있었다. 관 옆면에는 무언가 잘라 낸 둥근 자국이 남아 있었다.

“저건 어디 갔습니까?”

백수선이 설계도를 펴다가 접힌 부분을 엄지로 눌렀다.

“폐쇄된 가지관입니다.”

“어디로 가던 건데요.”

“지금은 연결돼 있지 않습니다.”

박종구는 연결구를 내려놓고 설계도 모서리를 잡았다. 백수선의 엄지가 종이 위에서 밀려났다. 지운 선 끝에 숫자의 아랫부분이 남아 있었다.

“적박 씨. 번호표 좀 줘요.”

“여기서도 차례를 보오?”

“처리비 적은 쪽으로요.”

적박이 소매에서 젖은 표를 꺼냈다. 박종구는 표를 설계도 옆에 놓았다. 깨진 양동이에서 옮긴 주소의 끝 숫자와, 지우다 남은 숫자가 맞았다. 그는 빈 고정쇠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이 집들 관이네요.”

백수선이 종이를 당기려다 멈췄다.

“본관은 패킹부터 손봐야 합니다. 우회관보다 오래 걸립니다.”

“얼음 한 알 내려가는 데는 금방이던데요.”

박종구는 옥천탕 연결구를 공구 가방 위에 돌려놓았다. 어깨에 메고 온 관을 공동 본관 아래에 내려놓자 백수선이 반대쪽을 받았다.

“먼저 받아 둘 곳부터 봅시다. 적박 씨, 열쇠요.”

적박은 배를 한 번 누르고 몸을 굽혔다. 기침 끝에 황동 열쇠가 손바닥으로 떨어졌다. 그가 삼베 소매로 열쇠를 닦자 박종구가 한 발 물러섰다.

“그 소매로 문손잡이까지 닦지는 마세요.”

“팔백 년 쓴 열쇠요. 오늘 조금 젖은 게 무슨 대수라고.”

창고 문이 열리자 찬 공기가 세 사람의 젖은 옷에 붙었다. 잿빛 기둥 사이로 서리 낀 마대가 쌓여 있었다. 적박은 가까운 자루의 쇠패를 뒤집었다.

“이건 작은 우박이오. 옮기는 값은 따로—”

“본인 물건입니다. 저쪽 끝 잡아요.”

둘이 자루를 끌자 얼음 알갱이가 안에서 둔하게 부딪쳤다. 적박은 다음 자루를 옮길 때 쇠패가 바닥에 긁히지 않도록 먼저 들어 올렸다. 박종구는 비워진 칸에 회수통을 밀어 넣었다. 통 앞면과 문 사이에는 대야 하나를 돌릴 만한 폭이 남았다.

백수선이 쪼그려 앉아 통의 출구 높이를 쟀다.

“공간은 됩니다. 바닥 경사도—”

“발 치워요.”

박종구가 적박의 발목을 당겼다. 자루 밑에서 녹은 물이 가느다랗게 흘렀다. 물줄기는 회수통을 지나 벽 아래의 낮은 배출구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적박이 빈 마대를 움켜쥐어 구멍에 쑤셔 넣었다. 마대가 안쪽으로 끌려가자 박종구가 그 끝을 밟았다. 백수선은 가방을 열어 시험용 고무마개를 꺼냈다.

“발 조금만 드십시오. 한쪽씩.”

박종구가 발꿈치를 들고, 백수선이 마개를 밀어 넣었다. 적박은 두 손으로 테두리를 눌렀다. 물이 세 사람 손가락 사이로 차올랐다가 멎었다.

배출구 위의 얼음을 백수선이 공구 끝으로 긁었다. 황동판에 공동 집수정 이름이 드러났다.

적박이 손을 떼려 하자 박종구가 그의 손등을 눌렀다.

“아직 잡고 있어요.”

“창고까지 올라왔는데 또 저기로 가는 것이오?”

“바닥이 그렇게 만들어졌네요.”

백수선이 마개 둘레의 나사 구멍을 짚었다.

“시험용으로는 못 버팁니다. 이 출구를 막고, 회수통이 넘어오도록 별도 연결을 해야 합니다.”

“그럼 도장은?”

적박이 묻자 박종구가 손가락 사이에 고인 물을 털었다.

“물건 둘 자리 생겼다고 양동이가 붙습니까?”

백수선은 설계도 뒷면을 펴서 마른 자루 위에 놓았다. 공급 책임과 보관 책임란이 나란히 있었다. 그녀가 보관란을 적박 쪽으로 돌렸다.

“원래 주인들의 공동 서명도 필요합니다. 일몰 전에 배수처를 바꾸지 못하면 기존 출구로 정산됩니다.”

적박은 종이 대신 마개를 내려다봤다. 박종구는 회수통 바퀴 앞에 각목을 끼우고, 고무마개를 임시 죔쇠로 받치는 백수선의 공구 가방을 붙들어 주었다.

저수조 발판으로 돌아왔을 때 백수선의 젖은 소매 끝이 햇볕에 빠르게 말랐다. 그녀는 박종구가 든 연결관을 공동 본관에 맞추고 죔쇠를 걸었다. 박종구는 관을 받친 채 턱으로 설계도를 가리켰다.

“그 전에 이름부터 써요.”

“책임란 말입니까?”

“지운 선 옆에 있던 이름요. 여기 고친 사람들.”

백수선은 공구를 내려놓았다. 얇아진 종이를 손바닥으로 받치고, 남은 획을 따라 펜을 움직였다. 끊긴 이름들을 채운 뒤 마지막에 자기 이름을 덧썼다.

박종구가 연결관을 한 치 들어 올리자 구멍 두 개가 맞물렸다. 백수선은 그 사이로 볼트를 밀어 넣었다. 아직 물은 열지 않았다. 바람에 들리는 공급·보관 책임의 빈 서명란을 적박이 열쇠로 눌러 놓았다.

Chapter 03

Scene 07· 본관 연결을 준비하던 늦은 오후, 일몰 정산 전

열쇠가 가리킨 수도

열쇠가 가리킨 수도
Place구름 저수조 철제 발판에서 지도에 없는 골목 수도까지
Time본관 연결을 준비하던 늦은 오후, 일몰 정산 전
Action잠금이 공동 본관에 맞춘 연결관을 걷어차고, 박종구는 그녀의 앞치마를 붙잡는다. 적박이 떨어지는 관을 건지다가 놓친 창고 열쇠는 구름 아래 골목 수도 옆에 걸린다. 열쇠를 보고 먼저 몸을 내미는 잠금을 따라 내려간 박종구는 지워진 주소와 야간 급수의 흔적을 찾아낸다. 잠금의 해명 앞에서 주민이 빈 양동이의 먼지를 털자, 박종구는 그 양동이를 잠금에게 맡기고 실제 사용처를 계량하게 한다.
Impact잠금이 장부에서 지운 수도가 지금도 사람이 기다리는 급수처임이 드러난다. 그녀가 감춰 온 과거는 공급 통제의 이유를 설명하지만, 오늘 도착하지 않은 물을 대신하지 못한다. 박종구는 연결관을 지키는 데서 그치지 않고 물을 받지 못한 집들을 기록하는 일에 잠금을 끌어들인다.

잠금이 박종구의 무릎 앞에 놓인 연결관을 걷어찼다. 황동 이음쇠가 철제 발판을 때리고 난간 밑으로 미끄러졌다. 박종구는 관을 잡으려던 손으로 잠금의 앞치마를 움켜쥐었다.

“발 치우세요. 밑에 집 있습니다.”

“허가하지 않은 연결이다.”

적박이 엎드려 관 끝을 붙잡았다. 소매에서 빠져나온 창고 열쇠가 격자에 한 번 부딪쳤다. 손가락이 따라갔지만 열쇠는 틈을 통과했다.

“내 열쇠!”

백수선이 적박의 허리춤을 잡아당겼다. 관은 발판에 걸쳐졌고, 끝에 물린 이음쇠만 비스듬히 찌그러졌다. 백수선은 공구를 끼워 관이 더 내려가지 못하게 받쳤다.

발밑 구름이 바람에 찢어졌다. 한참 아래 벽돌담 사이로 황동빛이 번쩍였다. 열쇠는 좁은 골목의 배관 고리에 걸려 흔들렸다. 바로 옆에 수도꼭지가 있었다.

잠금이 먼저 난간 밖으로 상체를 내밀었다.

박종구는 앞치마를 놓고 그녀의 소매를 잡았다. 잠금의 왼손이 장부를 옆구리로 밀어 감췄다. 엄지에 묻은 흰 가루가 먹색 옷에 줄을 남겼다.

“저기 아는 데입니까?”

“열쇠부터 회수해야 한다.”

“계단으로 갑니다.”

잠금이 팔을 당기자 박종구는 발을 벌려 버텼다. 백수선이 두 사람 사이로 안전줄을 넘겼다.

“난간은 한 사람 하중입니다. 싸우실 거면 내려가서 하십시오.”

박종구는 줄을 받아 잠금의 앞치마 허리끈에 걸었다. 잠금이 소유 인장을 들어 보였다.

“이것까지 묶겠다는 것이냐?”

“그건 떨어뜨리지 마세요. 주우러 또 와야 하니까.”

백수선은 손상된 연결관을 발판 안쪽으로 끌어 놓았다. 적박이 관 위에 무릎을 얹는 것을 확인한 뒤, 박종구는 잠금을 계단 쪽으로 돌려세웠다.

옥천탕 뒤 계단을 지나 골목에 닿았을 때도 잠금은 소매를 빼내지 못했다. 뜨거운 철 냄새 대신 담장 너머 밥 짓는 냄새가 났다. 수도 앞에는 주민이 양동이를 발 사이에 놓고 앉아 있었다.

잠금이 배관 고리에서 열쇠를 빼냈다. 박종구는 손을 내밀어 열쇠를 받아 앞치마 주머니에 넣었다. 그러고는 수도 받침 가장자리를 손톱으로 긁었다. 마른 물때에서 흰 가루가 떨어졌다.

“손에 묻은 것하고 같네요.”

잠금이 장부를 더 깊이 끼웠다. 박종구는 소매를 놓는 대신 장부 아래 모서리를 잡았다.

“주소 펴세요.”

“폐쇄된 수도다.”

주민이 발 사이 양동이를 꼭지 아래로 밀었다. 받침에 겹겹이 팬 반달 모양 홈을 따라 바닥이 긁혔다.

박종구는 양동이를 가리켰다.

“폐쇄했는데 저건 누가 갖다 놨습니까?”

잠금이 장부를 펼쳤다. 여러 번 문질러 얇아진 종이 위로 지워진 주소의 눌린 자국이 남아 있었다. 박종구가 종이 아래 손바닥을 받치자 잠금은 지우개 가루 묻은 엄지를 접었다.

“장부에서는 뺐다. 밤에는 열었다.”

“얼마나요?”

“조금씩. 한꺼번에 비우지 않도록.”

잠금은 수도꼭지를 돌렸다. 꼭지 안에서 마른 마찰음만 났다. 그녀가 한 번 더 돌리려 하자 박종구가 손잡이를 붙잡았다.

“축 상합니다. 위에서 배웠습니다.”

잠금은 손을 내렸다. 소유 인장의 끝이 벽돌에 닿아 짧게 울렸다.

“전에 저수조를 전부 연 적이 있다. 비를 기다리는 밭에 먼저 주려고 했다. 저녁 전에 바닥이 드러났고, 다음 날에는 마을 전체가 물을 잃었다.”

그녀는 장부의 지운 자리를 손가락으로 눌렀다.

“그 뒤로는 남겨 뒀다. 여기에도 밤마다 흘렸다. 아주 끊지는 않았어.”

주민이 양동이를 꺼냈다.

뒤집자 벽돌 먼지가 쏟아졌다. 바닥에 붙어 있던 작은 돌 하나가 시멘트를 두 번 튀었다. 주민은 빈 바닥을 잠금 쪽으로 향한 채 기다렸다.

박종구는 잠금의 장부를 덮지 못하게 손을 올렸다.

“어젯밤에 몇 통 갔습니까?”

잠금은 수도 위의 낡은 계량기를 보았다.

“반출량을 확인하면—”

“저분이 받은 양이요.”

담장 너머에서 밥솥의 김 빠지는 소리가 났다. 주민이 양동이를 바로 세워 두 사람 사이에 내려놓았다.

박종구는 손잡이를 들어 잠금의 손에 걸었다. 인장을 쥔 손으로는 잡을 수 없었다. 잠금이 인장을 앞치마 주머니에 넣자 비로소 손잡이가 손바닥 안으로 들어갔다.

“이 수도에서 받아 가는 집부터 갑시다. 몇 통 필요한지 직접 물으세요.”

잠금은 양동이를 든 채 장부를 내려다봤다. 박종구가 펜을 내밀었다.

지워진 주소 아래에 잠금이 첫 번째 계량 칸을 그었다. 주민의 손이 곧장 골목 안쪽 계단을 가리켰다.

Scene 08· 같은 날 늦은 오후, 골목 담장 위의 햇빛이 낮아질 무렵

수술비로 산 연결 부속

수술비로 산 연결 부속
Place지워진 골목 수도와 구름 저수조의 공동 본관, 운반차가 멈추는 계단
Time같은 날 늦은 오후, 골목 담장 위의 햇빛이 낮아질 무렵
Action잠금이 공동 수도의 계량기만 확인하고 장부를 덮으려 하자 박종구는 오정임의 배달 기록과 수도 받침의 사용 흔적을 대조해 누락된 주소를 추가한다. 오정임은 수술 보증금으로 연결 부속과 운반차 보증금을 치르고 박종구에게 배달 장부를 맡긴다. 박종구와 백수선은 구름 저수조로 돌아가 손상된 이음쇠와 낡은 패킹을 교체하고, 적박은 창고에 보관한 얼음을 녹여 배달할 물을 마련한다. 본관에서 물이 내려오기 시작하자 잠금과 오정임은 운반차가 들어가지 못하는 골목 안쪽으로 물통을 직접 나른다.
Impact장부에서 지운 수도 하나가 여러 집의 급수처로 복원되면서 필요한 물과 배달할 주소가 함께 늘어난다. 연결 공사는 끝나지만 오정임의 수술 보증금이 부속과 운반 수단에 묶인다. 잠금은 계량기를 읽는 자리에서 물통을 들고 계단을 오르는 자리로 옮겨지고, 박종구는 수리 완료 표시 대신 아직 전달하지 못한 물의 목록을 넘겨받는다.

잠금이 골목 수도의 계량기 덮개를 닫자 박종구가 그 사이에 번호표를 끼웠다. 덮개 모서리가 젖었다 마른 종이를 눌렀다. 수도 받침 아래에는 잠금이 든 빈 양동이의 그림자가 걸려 있었다.

“이 꼭지 하나면 됐다. 마지막 눈금까지 적었다.”

“여기서 몇 집이 받아 갔는지는요?”

“계량기는 집을 세지 않는다.”

“그러니까 장부도 보자는 겁니다.”

골목 입구에서 바퀴 긁히는 소리가 났다. 오정임이 빈 물통을 실은 목욕탕 운반차를 밀고 들어왔다. 앞치마 허리끈에 끼운 외상 장부가 바퀴 턱마다 옆구리를 쳤다. 박종구가 차를 받으러 가자 오정임은 손잡이를 내주는 대신 장부부터 꺼냈다.

“그 수도 주소만 찾으면 세 집 빠져. 대문은 윗길에 있고 부엌은 이쪽인 집들이야.”

박종구는 반달 모양으로 팬 수도 받침에 장부를 펼쳤다. 오정임의 손가락이 물 배달 날짜를 짚었다. 같은 날, 같은 양을 받아 간 기록 옆에 서로 다른 번지가 적혀 있었다. 잠금은 자기 장부의 지운 주소 밑에 한 줄을 보탰다.

오정임이 펜 끝을 옆으로 밀었다.

“거긴 둘이 살아. 양은 같아도 통은 두 개 놓고 가야 돼.”

“수도 하나에 신청서가 이렇게 많을 수는 없다.”

박종구가 받침 가장자리의 홈을 쓸었다. 작은 양동이가 닳게 한 홈 안에 더 큰 통의 자국이 겹쳐 있었다.

“그럼 양동이들이 혼자 다녔겠네요. 밤마다.”

잠금은 덮으려던 장부를 벽돌담에 받쳤다. 한 줄 아래에 주소를 더 적었다. 박종구가 오정임의 장부를 넘기자 다음 장에도 같은 수도 표시가 나왔다.

운반차 바퀴가 천천히 뒤로 굴렀다. 오정임이 무릎으로 막았다. 박종구는 손잡이를 잡아 차를 바로 세우고, 짐칸에 놓인 종이봉투를 보았다. 봉투 입구로 새 황동 이음쇠와 패킹 꾸러미가 드러나 있었다. 그 아래에는 보증금 영수증이 눌려 있었다.

“이건 어디서 났습니까?”

“주문한 거 받아 왔어. 찌그러진 부속은 못 쓴다며.”

오정임이 휴대전화를 잠갔다. 화면이 꺼지기 전 송금 금액이 보였다. 부속 봉투 옆의 납작한 은행 봉투에는 병원 이름과 수술 날짜가 적혀 있었다.

박종구가 운반차에서 손을 뗐다.

“이 돈 쓰시면 안 되죠.”

“반품하러 갈 거면 네가 가. 난 무릎 아파.”

“수술 날짜 잡아 놓으셨잖아요.”

오정임은 외상 장부를 덮어 박종구의 가슴에 밀었다. 모서리가 앞치마 속 확인 도장에 걸렸다.

“그 날짜는 내가 다시 잡아. 이 주소는 네가 맡아.”

박종구가 장부를 받지 않자 오정임이 한 번 더 밀었다. 이번에는 그가 두 손으로 받았다. 오정임은 은행 봉투를 접어 주머니 깊이 넣고 운반차 보증금 영수증만 짐칸에 남겼다.

구름 저수조로 돌아왔을 때 백수선은 공동 본관 아래에 공구 가방을 받쳐 놓고 있었다. 낡은 패킹 밖으로 물방울이 맺혔다. 박종구가 새 부속 봉투를 내밀자 백수선은 가격표를 떼려던 손을 멈췄다.

“공급 책임에 붙일 구입 기록이 필요합니다.”

“가격까지요?”

“부품 이름이 천상 장부에는 없습니다.”

박종구는 병원 이름이 찍힌 봉투를 따로 빼고 영수증을 건넸다.

“그럼 빠뜨리지 말고 적어요. 이건 누가 냈는지도.”

적박이 창고에서 작은 얼음 자루를 끌고 나왔다. 박종구는 자루 아래에 빈 통을 밀어 넣었다.

“바닥에 쏟지 마세요.”

“이건 아직 내리지 않은 얼음이오. 밭에 간 것과는 다르오.”

“그러니까 여기 받아요. 다른 것하고 섞이지 않게.”

적박은 자루의 봉인을 풀었다. 얼음을 얕은 쇠받이에 나누어 놓고 햇빛 쪽으로 밀었다. 받이 끝에서 첫 물방울이 통 바닥을 두드렸다. 적박은 흘러넘칠 가장자리 밑에 손바닥을 대다가, 박종구가 건넨 작은 대야로 바꾸었다.

백수선이 본관의 낡은 이음쇠를 풀자 갈색 물이 박종구의 손등으로 튀었다. 삼베 패킹은 젖은 실밥처럼 끊어졌다.

“관 잡으십시오. 더 조이면 목이 갈라집니다.”

박종구는 어깨로 관을 받쳤다. 백수선이 삭은 패킹을 긁어내는 동안 철제 발판 아래로 구름이 빠르게 흘렀다. 공구 하나가 굴러가자 박종구가 슬리퍼 앞코로 눌렀다. 관이 기울었다.

“움직이지 마십시오.”

“안 움직이고 있습니다. 관이 움직이지.”

백수선은 자기 안전줄을 관 아래로 돌려 무게를 받았다. 새 패킹이 들어가고 황동 이음쇠가 나사산을 물었다. 두 사람이 번갈아 공구를 당겼다. 물방울이 한 번 더 새었다.

백수선이 손등을 댔다.

“사분의 일 바퀴만.”

박종구가 당겼다. 물방울은 맺혔다가 떨어지지 않았다. 백수선은 마른 천으로 연결부를 닦고 천을 다시 펼쳐 보였다. 젖은 점이 없었다.

“급수 시험합니다.”

잠금의 인장을 받아 연 시험 밸브가 낮게 울렸다. 녹슨 공동 본관이 발판 위에서 한 번 떨렸다. 박종구는 이음쇠를 붙든 채 백수선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백수선이 설계도에 시각을 적었다. 창고 회수처의 서명란은 그 옆에서 여전히 비어 있었다.

골목으로 내려온 박종구가 수도 아래에 통을 밀어 넣자 가느다란 물줄기가 손목을 때렸다. 그는 첫 물을 별도 양동이에 받고, 백수선이 알려 준 만큼 흘려보낸 뒤 배달 통을 바꿨다. 적박이 녹인 얼음물도 따로 뚜껑을 덮어 운반차에 실었다.

운반차는 골목 안쪽 세 계단 앞에서 멈췄다. 오정임이 앞바퀴를 들려 하자 박종구가 손잡이를 눌렀다.

“여기부터 제가—”

“너는 통 채워. 들 사람이 채우기까지 하면 언제 가.”

잠금이 손잡이에 소유 인장을 갖다 댔다. 황동 끝이 플라스틱에 딱 부딪쳤다.

“이것으로는 계단이 안 열리네요.”

박종구가 물통 손잡이를 돌려 주었다. 잠금은 인장을 주머니에 넣고 두 손으로 통을 들었다. 오정임이 반대편 손잡이를 잡았다. 첫 계단에서 물이 뚜껑 안쪽을 세게 쳤다.

“천천히 가시오.”

“천천히는 가. 내려놓지는 말고.”

두 사람이 담장 모퉁이를 돌았다. 박종구는 다음 통을 수도 아래로 당겼다. 펼친 배달 장부의 첫 주소 옆에 출발 시각을 적고, 그 아래 아직 비어 있는 수령 칸을 손등으로 가렸다.

계단 위에서 오정임의 목소리가 내려왔다.

“종구야. 이 안쪽 주소 한 줄 더 만들어!”

박종구는 채워지는 통을 무릎으로 붙들고 장부 맨 아래에 새 줄을 그었다.

Scene 09· 공동 본관 연결을 마친 늦은 오후, 일몰 전

물은 받고 도장은 남긴다

물은 받고 도장은 남긴다
Place지워진 골목 수도에서 옥천탕 욕실까지
Time공동 본관 연결을 마친 늦은 오후, 일몰 전
Action박종구는 잠금의 반출 기록과 오정임의 배달 기록을 맞추다가 모자란 양을 발견한다. 계단에서 흘린 물을 별도 항목으로 남기고 실제 도착량만큼 수령 손도장을 받지만, 주민들이 짚어 주는 미급수 주소가 계속 추가된다. 물을 받은 주민은 적박의 사당에 다시 가지 않겠다고 말한다. 옥천탕으로 돌아온 적박이 확인 도장을 요구하자 박종구는 지급받은 세신료를 따로 눌러 두고 다음 배달 주소를 적는다.
Impact본관의 수리 완료와 주민의 수령 확인이 서로 다른 기록으로 분리된다. 잠금은 반출량에서 배달 중 손실을 빼야 하고, 적박은 물을 공급했다고 신앙이나 용서를 돌려받지 못한다. 박종구의 품삯도 정산되지 않은 채 남으며, 물 배달은 끝난 일이 아니라 계속 늘어나는 작업 목록이 된다.

박종구는 잠금이 덮으려는 장부 사이에 오정임의 젖은 배달표를 밀어 넣었다. 골목 수도 앞 시멘트에 두 장부가 나란히 펼쳐졌다. 담장 사이 햇빛은 양동이 하나 들어갈 폭으로 좁아져 있었다.

“여기는 마흔 리터 나갔다는데, 받은 건 서른여섯입니다.”

잠금이 배달표의 숫자를 손톱으로 짚었다.

“통은 가득 채웠다.”

오정임이 운반차 바퀴를 발로 막았다. 무릎 보호대 아래로 젖은 바짓단이 달라붙어 있었다.

“계단 셋째 턱에서 쏟았어. 내가 통 놓치니까 이 양반이 받다가.”

잠금은 양동이 손잡이를 쥔 손을 폈다. 손바닥에 가느다란 붉은 줄이 패여 있었다.

“통을 놓았으면 전부 잃었다.”

“그래서 받은 양은 서른여섯입니다.”

박종구는 펜으로 반출 칸과 수령 칸 사이에 줄을 하나 더 그었다. ‘계단 운반 중 유실, 네 리터.’ 잠금이 소유 인장을 꺼내자 그 앞에 손바닥을 댔다.

“그걸로 물 늘리지 마세요. 누가 옮겼는지 적으시면 됩니다.”

잠금은 인장을 내려놓고 펜을 받았다. 계단의 위치를 묻더니 자기 이름 옆에 오정임의 이름도 적었다. 오정임이 그 글씨를 확인한 뒤 빈 양동이를 다시 수도 아래로 밀었다.

골목 안쪽에서 돌아온 적박이 작은 물통을 운반차에 올렸다. 삼베 소매가 팔꿈치까지 젖어 있었다.

“얼음 녹이는 것보다 나르는 게 더 드는구려.”

“물은 아래로 잘 갑니다. 집은 꼭 위에 있죠.”

박종구는 통을 받아 주민 앞에 놓았다. 오정임이 눈금까지 물을 보태고, 장부를 내밀었다.

주민의 젖은 엄지가 수령 칸 위에서 멎었다.

“이거 찍으면 저 사당 다시 가야 해요?”

적박이 통에서 손을 뗐다.

“그런 말은 아직 안 했소.”

“미리 말하는 거예요. 물은 받아도 거긴 안 가요.”

박종구는 주민의 엄지 아래 종이를 받쳤다.

“서른여섯 리터 받았다는 칸입니다. 다른 약속 없습니다.”

엄지가 종이에 닿았다. 물 묻은 손자국 가장자리에 남은 인주가 번졌다. 적박은 그 자국을 보다가 자기 소매에서 확인서를 꺼냈다. 박종구가 고개를 들자 다시 접었지만, 손에서는 놓지 않았다.

주민은 빈칸 옆에 골목 위쪽을 가리켰다. 같은 수도를 쓰는 집이 더 있었다. 박종구가 주소를 받아 적자 오정임이 장부를 자기 쪽으로 당겼다.

“거긴 대문 주소 쓰면 못 찾아. 부엌 계단 쪽으로 적어.”

“몇 통입니까?”

오정임은 손가락 두 개를 폈다가 하나를 더 보탰다.

박종구는 방금 찍힌 손도장 아래 세 줄을 만들었다. 잠금이 자기 장부에도 주소를 옮겼다. 펜 끝이 전에 지워 얇아진 종이에 걸리자 박종구는 빈 부속 봉투를 뜯어 밑에 받쳤다.

“이번엔 뚫지 말고 쓰세요.”

잠금은 종이를 편 손으로 누르고 획을 마저 그었다.

빈 물통을 싣고 옥천탕으로 돌아왔을 때, 백수선은 보일러실 문 앞에서 연결부에 마른 천을 대고 있었다. 천을 뒤집어 젖은 데가 없는지 확인한 뒤 박종구에게 내밀었다.

“본관 이음매는 잡혔습니다.”

“배달은 더 남았습니다.”

박종구가 장부를 들자 백수선은 공구 가방을 문 안쪽으로 밀어 길을 냈다. 적박도 그 틈으로 따라 들어왔다. 이번에는 접어 둔 확인서를 펴서 세신대 모서리에 올렸다.

“관도 이었고 물도 받았소. 내 등은 아까 다 밀지 않았소?”

오정임이 확인서 위로 장부를 펼쳤다. 젖은 종이가 적박의 손가락에 붙었다. 수령 손도장 옆에는 물을 못 받은 집, 금 간 양동이, 값을 쓰지 못한 작물 피해가 줄마다 떨어져 있었다.

적박이 종이를 떼려다 멈췄다.

“이건 다 내 몫이오?”

“본인 것부터 보세요.”

박종구는 앞치마의 확인 도장을 꺼내지 않았다. 대신 매표소 유리 접시에서 처음 받은 세신료를 걷었다. 붙어 있던 지폐를 한 장씩 떼어 마른 수건 조각에 끼우고, 세신대 아래 받침 벽돌과 떨어진 자리에 대야를 엎어 눌렀다.

“돈 돌려주는 것이오?”

“아직 제 주머니에 넣을 돈은 아니라는 겁니다.”

적박의 확인서는 세신대 위에 남았다. 박종구는 장부를 무릎에 받치고 다음 주소를 적은 뒤, 배달할 물 세 통의 칸을 새로 그었다.

Chapter 04

Scene 10· 물 배달에서 돌아온 늦은 오후, 일몰 전

벽돌이 버티지 못하는 무게

벽돌이 버티지 못하는 무게
Place옥천탕 욕실, 받침 벽돌과 배수구 사이
Time물 배달에서 돌아온 늦은 오후, 일몰 전
Action욕실로 돌아온 첫물은 이웃에게 보낼 물통을 보고 회수통을 끌어안는다. 박종구는 첫물을 세신대에서 내려놓으려고 적박과 함께 받침 벽돌을 넓히지만, 첫물은 작아지면 하늘 식탁 문턱을 넘지 못한다며 버틴다. 아이가 발뒤꿈치로 대야를 누르자 타일이 갈라지고 세신대가 내려앉는다. 박종구까지 끌려 넘어지자 백수선이 두 사람을 기둥에 안전줄로 묶는다.
Impact첫물을 받치던 임시 조치가 무너지면서 욕실 바닥 자체가 하중을 견뎌야 하는 상태가 된다. 박종구는 아이를 내려놓지도, 손을 놓고 배수 설비를 돌보지도 못한다. 회수통을 붙든 첫물과 그를 붙든 박종구가 같은 안전줄에 걸리고, 막아 둔 배수구 옆까지 균열이 이어진다.

첫물이 욕실 문턱을 비집고 돌아와 운반차에 놓인 물통 하나를 당겼다. 박종구는 무릎에 받친 장부를 들어 올려 젖은 바닥에서 피했다. 물통 밑이 비취색 타일을 긁었다.

“그건 이리 줘. 나갈 물이야.”

오정임이 손잡이 반대편을 잡았다. 첫물은 통에 붙은 배달 주소를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나는 아직 안 씻었는데.”

“이건 마실 물이야. 네 순서 뺏은 게 아니고.”

첫물이 손을 놓았다. 오정임 쪽으로 통이 밀려갔다. 대신 아이는 세신대 옆 회수통을 두 팔로 감아 가슴에 붙였다. 통 테두리가 눌리면서 짧게 울었다.

박종구는 장부를 적박에게 건넸다.

“확인서랑 같이 마른 데 놓으세요. 벽돌도 두 장 가져오시고.”

“또 받치려고?”

“이번엔 발 놓을 자리 만듭니다.”

첫물이 세신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자 아래 벽돌에서 붉은 가루가 떨어졌다. 박종구는 무릎을 꿇고 바깥쪽에 벽돌을 눕혔다. 적박이 한 장을 더 밀어 넣었다. 넓어진 받침 위로 마른 수건을 깔고 아이의 발목을 잡았다.

“여기 디뎌요. 한 발씩.”

“내가 내려오면 저 통 가져갈 거잖아.”

“통보다 먼저 바닥이 내려갑니다.”

첫물은 회수통에 턱을 묻었다. 목에 걸린 빈 의자 이름표가 찌그러진 통 옆면에 끼었다. 아이는 한 손으로 이름표를 빼내고 다시 통을 안았다.

잠금이 다가와 테두리를 잡았다.

“그 안의 것은 네 몫이 아니다. 놓아라.”

첫물의 맨발이 옆에 엎어진 고무대야를 찾아 눌렀다.

“맡을 땐 아무도 그런 말 안 했어.”

잠금의 손가락이 멎었다. 박종구는 그 손을 밀어 통에서 떼었다.

“지금 잡아당기면 같이 넘어집니다.”

백수선이 공구 가방에서 안전줄을 꺼냈다. 황동 죔쇠가 바닥에 닿기도 전에 첫물이 발뒤꿈치에 힘을 주었다. 대야 가장자리가 납작하게 접혔다.

“작아지면 문턱도 못 넘어.”

박종구는 발목에서 손을 풀어 아이의 손목을 잡았다. 번호표 밑에 받쳤던 수건이 축축했다.

“어느 문턱이요?”

“하늘 식탁. 의자는 안쪽에 있어.”

“여기 먼저 내려와요. 식탁은 여기 없습니다.”

첫물이 고개를 저었다. 발뒤꿈치가 더 내려갔다.

딱, 하는 소리가 벽돌 밑에서 났다.

적박이 두 손으로 세신대 모서리를 받쳤다. 박종구는 수건 깐 벽돌을 아이 쪽으로 밀었지만, 벽돌 앞의 타일 한 장이 들리고 옆 장이 꺼졌다. 세신대 다리가 그 틈에 빠졌다.

“발 떼!”

첫물이 회수통을 당겼다. 손목을 붙들고 있던 박종구의 어깨도 함께 꺾였다. 슬리퍼가 밀렸다. 박종구는 무릎부터 바닥에 떨어지면서 빈손으로 세신대를 밀어 냈다. 쇠틀이 팔뚝을 스치고 비스듬히 멎었다.

오정임이 물통을 무릎 사이에 끼워 막았다.

“수선 씨, 줄!”

백수선은 안전줄을 기둥 뒤로 던져 받아 냈다. 먼저 박종구의 허리 죔쇠에 걸고, 남은 줄을 첫물의 겨드랑이 아래로 통과시켰다. 회수통까지 묶이려 하자 박종구가 손날을 끼워 빼냈다.

“통 말고 애요.”

“팔 올리십시오.”

“싫어.”

“안 올려도 묶습니다.”

백수선이 아이의 등 뒤에서 줄을 당겼다. 박종구는 첫물의 손목을 놓지 않은 채 엉덩이를 뒤로 밀었다. 팽팽해진 줄이 두 사람을 기둥 쪽으로 잡아 세웠다. 그제야 적박이 받치던 쇠틀에서 손을 뺐다.

세신대가 한 뼘 더 내려앉았다. 벽돌 하나가 반으로 벌어졌고, 타일 사이의 가는 금이 오정임이 막아 둔 배수구 옆까지 뻗었다.

백수선은 기둥에 죔쇠를 잠그고 박종구의 허리줄을 짧게 줄였다.

“이제 혼자 움직이지 마십시오. 움직이면 둘 다 당겨집니다.”

Scene 11· 세신대가 내려앉은 직후, 일몰 칠 분 전

손을 놓아 붙잡는 것

손을 놓아 붙잡는 것
Place옥천탕 욕실, 갈라진 배수구와 본관 밸브 사이
Time세신대가 내려앉은 직후, 일몰 칠 분 전
Action오정임이 막아 둔 배수구 옆 균열에서 검은 물이 스며 나오자 잠금은 본관 밸브를 닫으려 한다. 박종구는 첫물의 손목을 붙든 채 뜨거운 손잡이를 다른 손으로 막고, 백수선은 공구로 밸브를 임시 고정한다. 오정임이 균열을 누르려고 몸을 옮기면서 마지막 냉수 통이 기울고, 박종구는 첫물의 손을 놓아 통을 붙잡는다. 첫물은 세신대로 다시 기어오르다가 박종구가 통을 받친 손바닥의 데인 자국을 본다.
Impact배수구를 막는 것만으로는 죄가 아래 동네로 새는 일을 막을 수 없게 된다. 본관을 닫으려는 잠금과 급수를 유지하려는 박종구의 충돌이 뜨거운 밸브에서 맞붙고, 마지막 냉수까지 잃을 위기가 닥친다. 첫물을 붙들던 손이 떨어지지만 안전줄은 남는다. 첫물은 다시 올라갈 틈을 얻은 자리에서 자신을 붙잡았던 손의 상처를 마주한다.

오정임이 석탄삽 날로 배수구 옆 수건을 눌렀다. 수건은 내려갔지만 그 옆 타일 틈에서 검은 물방울이 솟았다. 삽 끝을 옮기자 다른 금에서 가느다란 줄기가 나왔다.

“막은 데 말고 옆으로 나와.”

적박이 엎어진 대야를 끌어다 댔다. 가장자리가 들뜬 타일에 걸려 덜컥거렸다. 검은 물은 대야 밑으로 지나갔다.

잠금이 보일러실 쪽 벽의 점검 덮개를 젖혔다. 안쪽 황동 관에서 마른 쇠 냄새가 났다. 두 손으로 본관 손잡이를 잡고 몸을 매달자 관이 벽 고정쇠 안에서 울었다.

“공급부터 끊어야 한다. 더 받으면 바닥이 못 버틴다.”

박종구는 첫물의 손목을 당겨 기둥 가까이 붙였다. 허리의 안전줄이 팽팽해졌다. 점검구까지 뻗은 오른손이 돌아가는 손잡이 아래쪽을 잡았다.

“그건 아래 집으로 가는 물입니다.”

“네 발밑으로도 새고 있다.”

“알아요. 손 좀 빼세요.”

손잡이가 손바닥에 달라붙었다. 박종구는 손가락을 펴지 않고 팔꿈치를 벽에 댔다. 잠금이 다시 무게를 싣자 고무 슬리퍼 뒤축이 타일 위에서 밀렸다.

첫물이 붙들린 팔을 비틀었다.

“아저씨, 나부터 하면 되잖아. 물 있잖아.”

오정임의 무릎 사이에서 냉수 통이 출렁였다. 첫물이 그쪽으로 회수통을 밀어 내밀었다.

“이거 다 떼면 바닥도 안 깨지잖아.”

백수선이 두 사람 사이로 공구를 넣었다. 손잡이와 벽 고정쇠 사이에 렌치 자루를 걸자 잠금의 팔이 멎었다.

“손 떼십시오. 축까지 휘면 열지도 못합니다.”

박종구가 오른손을 떼었다. 손잡이에 붙어 있던 살이 떨어지며 손가락이 저절로 오므라들었다. 백수선이 공구 가방 쪽으로 손을 뻗었지만 그가 고개를 저었다.

“밸브부터 봐요.”

잠금은 렌치가 버티는 손잡이를 놓지 않았다.

“이대로 두면 천장부터 무너진다.”

“그럼 천장 값도 적어요. 아래 집에 또 보내지는 말고.”

적박이 석탄삽 밑으로 접은 수건을 밀었다. 오정임은 삽 자루를 적박에게 잠깐 맡기고, 검은 물이 번지는 균열 위에 다른 수건을 눌렀다. 무릎 하나가 냉수 통에서 떨어졌다.

굴뚝 그림자가 높은 창의 창턱에 걸렸다. 백수선이 고개를 들었다가 곧 밸브로 돌렸다.

“칠 분 남았습니다.”

냉수 통의 바닥이 갈라진 타일 가장자리에서 미끄러졌다.

오정임이 팔꿈치로 통을 막으려 했지만 삽 자루가 함께 들렸다. 배수구 밑에서 물 삼키는 소리가 났다.

“삽 놓지 마세요!”

박종구가 첫물의 손목을 놓았다.

안전줄이 아이의 겨드랑이 밑을 잡아챘다. 박종구는 허리를 꺾어 통 손잡이에 왼손을 걸고, 데인 오른손을 통의 둥근 옆면 아래로 밀었다. 냉수가 입구까지 치솟았다. 물 한 줄기가 앞치마를 적신 뒤 멎었다.

“적박 씨, 밑에 벽돌. 깨진 거 말고.”

적박이 발로 벽돌을 밀었다. 박종구는 그 위에 통을 비스듬히 걸쳐 더 굴러가지 못하게 했다. 오정임이 다시 삽 날을 눌렀다.

첫물이 기둥에서 몸을 돌렸다. 안전줄이 허락하는 만큼 기어가 내려앉은 세신대에 회수통을 걸쳤다. 한쪽 무릎을 쇠틀 위로 올리자 다리가 짧게 삐걱거렸다.

“거기 올라가지 마요.”

박종구는 통을 놓지 못한 채 말했다. 첫물이 남은 무릎을 끌어 올리려다 고개를 돌렸다.

통 밑에 받친 오른손이 벌어져 있었다. 손잡이 모양으로 붉어진 손바닥 한가운데 옅게 부푼 줄이 보였다. 첫물은 자기 손목의 젖은 번호표를 내려다봤다. 표 밑의 수건 조각은 아직 묶여 있었다.

“아저씨. 그 손…….”

박종구가 통을 조금 들어 벽돌 중앙으로 옮겼다.

“발부터 내려요.”

첫물의 무릎이 쇠틀 가장자리에서 멎었다. 아이는 올라가려고 짚었던 손을 떼고, 박종구의 손바닥을 가리던 냉수 통 손잡이 쪽으로 내밀었다.

Scene 12· 일몰까지 칠 분이 채 남지 않은 늦여름 저녁

날개 대신 새기는 이름

날개 대신 새기는 이름
Place옥천탕 욕실, 본관 점검구와 죄 회수관 작업구 사이
Time일몰까지 칠 분이 채 남지 않은 늦여름 저녁
Action박종구는 젖은 수건마저 말라붙는 연결부에 마지막 냉수를 붓는다. 백수선은 공구를 댈 틈이 생기자 최종 봉인을 뜯고, 남은 날개 깃을 압류당한다. 박종구와 적박은 몸을 가누지 못하는 백수선을 작업구에 받쳐 넣고, 백수선은 새 부속을 고정한 뒤 자기 이름으로 공급 책임을 새긴다. 창고로 이어지는 회수 통로는 열리지만, 각자 설비와 배수구를 붙들고 있어 죄를 옮길 손이 남지 않는다.
Impact첫물을 씻길 마지막 냉수가 연결관을 살리는 데 쓰인다. 백수선은 날개를 잃고도 작업구 안에 남아 연결부를 지탱하며, 통로의 개통은 아직 죄의 처리 완료가 되지 못한다. 박종구는 삽으로 퍼낸 죄를 넘기지 못한 채, 회수통을 놓지 않는 첫물 앞으로 빈 대야를 내려놓는다.

박종구는 첫물이 뻗은 손 아래로 냉수 통을 돌려 세우고, 왼손으로 통 입구에 걸친 젖은 수건을 집었다. 벽의 점검구 안에서 백수선의 렌치가 황동 연결부에 닿았다가 튕겼다.

“공구가 미끄러집니다. 식혀야 합니다.”

수건을 접어 관에 감자 흰 김이 손등을 훑었다. 박종구가 끝을 여미기도 전에 천 가장자리가 빳빳하게 말렸다. 백수선이 렌치로 수건을 벗겨 타일 위에 떨어뜨렸다.

첫물이 냉수 통 손잡이를 잡았다.

“그거 쓰면 나는?”

박종구는 손잡이에 얹힌 작은 손가락을 하나씩 풀었다. 데인 오른손으로는 통을 안지 못해 팔뚝을 밑에 넣었다.

“지금은 관에 씁니다.”

“조금만 남겨.”

통을 들어 올리자 허리의 안전줄이 당겼다. 백수선이 기둥 쪽 죔쇠를 한 칸 풀고, 박종구가 점검구에 닿는 만큼만 줄을 내주었다.

잠금이 본관 손잡이에서 한 손을 뗐다.

“그 물을 다 쓰면 되돌릴 수 없다.”

“그래서 붓는 겁니다. 받쳐요.”

박종구는 통 밑을 잠금 쪽으로 밀었다. 잠금이 팔을 대자 두 사람 사이에서 통이 기울었다. 물줄기가 뜨거운 연결부를 때렸다. 김이 낮은 천장까지 솟아 형광등을 가렸다.

“계속.”

백수선이 렌치를 물렸다.

“조금 더.”

플라스틱 바닥이 드러났다. 박종구는 마지막 물까지 흘려 넣고 통을 내렸다. 오정임의 발치에서 빈 통이 둔하게 울렸다.

첫물은 내밀었던 손을 거두어 회수통 테두리 밑에 끼웠다.

백수선이 연결부 안쪽 봉인띠를 잡았다. 뒤집힌 띠에 소유 인장이 찍혀 있었다. 잠금이 손을 뻗자 백수선은 그 손이 닿기 전에 봉인을 끊었다.

황동 관에서 흰 깃이 당겨졌다.

작업복 등판이 한 번 들썩였다가 내려앉았다. 남은 깃들이 봉인 조각에 달라붙자 백수선의 무릎이 꺾였다. 박종구가 겨드랑이를 받쳤고, 적박은 공구 가방을 걷어차 자리를 만든 뒤 허리를 붙들었다.

“어디로 모시오?”

“저 안으로.”

백수선이 벌어진 작업구를 가리켰다. 안쪽에는 창고로 이어질 회수관의 넓은 목과 아직 물리지 않은 죔쇠가 보였다.

적박이 백수선의 발을 들려다가 멈췄다.

“천사를 거꾸로 넣어도 되는 것이오?”

“머리부터입니다. 발로는 나사를 못 조입니다.”

박종구는 백수선의 허리띠를 잡아 작업구 턱 위로 밀었다. 적박이 배 아래에 접은 수건을 받쳤다. 백수선의 상반신이 관 안으로 들어가고, 납작해진 날개 자리에서 작업복이 턱에 걸렸다.

“잠깐. 옷 걸렸어요.”

박종구가 천을 빼냈다. 백수선은 뒤를 보지 않고 손을 내밀었다.

“새 부속.”

적박이 이음쇠를 건넸다. 관 안에서 금속이 맞부딪쳤다. 렌치 자루가 짧게 세 번 움직였고, 네 번째에는 백수선의 팔꿈치가 멎었다.

“몸 잡으십시오.”

두 사람이 허리띠를 당겨 버텼다. 백수선이 마지막으로 렌치를 밀었다. 이음쇠의 벌어진 틈이 닫혔다.

잠금이 소유 인장을 작업구 앞으로 들었다.

“등록되지 않은 부속이다. 이름 없이는 정산에서 빠진다.”

“긁개 주십시오.”

박종구는 공구 가방에서 철필을 찾아 백수선의 손에 쥐여 주었다. 관 안쪽에서 황동을 긁는 소리가 났다. 잠금이 작업등을 비추자 새 부속의 납작한 면에 세 글자가 드러났다.

백수선.

그 아래로 공급 책임이라는 글자가 이어졌다. 철필 끝이 마지막 획을 파고 멎었다.

“읽히십니까?”

잠금은 인장을 내렸다.

“읽힌다.”

백수선이 회수관 안쪽 덮개를 밀어 열었다. 서늘한 바람이 젖은 작업복 소매를 부풀렸다. 관 너머에서 우박 자루가 구르는 소리가 낮게 울렸다.

“창고까지 열렸습니다. 아직 보내지는 마십시오. 받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박종구가 적박에게 허리띠를 넘겼다. 적박 혼자 받치자 백수선의 몸이 조금 내려갔다. 박종구는 벽돌을 발로 밀어 적박의 발밑에 괴고 석탄삽을 집었다.

오정임이 삽 자루를 놓는 대신 배수구 덮개를 두 무릎으로 눌렀다.

“빨리 떠. 여기 들린다.”

검은 찌꺼기와 우박이 삽날에 올라왔다. 박종구가 빈 대야에 쏟자 얼음알이 바닥을 두드렸다. 대야를 들어 작업구 쪽으로 내밀었다.

적박의 두 손은 백수선의 허리띠에 걸려 있었다. 잠금은 흔들리는 본관 손잡이를 붙들고 있었다. 관 안에서 백수선이 말했다.

“저도 못 받습니다. 손 떼면 죔쇠가 돌아갑니다.”

박종구는 찌꺼기가 든 대야를 내려놓았다. 옆에 포개진 빈 대야 하나를 빼내 첫물 쪽으로 돌렸다. 아이는 회수통을 가슴에 붙인 채 팔꿈치로 찌그러진 옆면을 더 눌렀다.

빈 대야를 첫물의 발 앞에 놓고, 박종구가 가장자리를 아이 쪽으로 밀었다.

“이거 받을 손 있습니까?”

Chapter 05

Scene 13· 마지막 냉수를 관에 부은 직후, 일몰 정산까지 몇 분 남지 않은 때

작아져도 남는 이름

작아져도 남는 이름
Place옥천탕 욕실, 갈라진 세신대에서 회수관 작업구와 비상계단 입구까지
Time마지막 냉수를 관에 부은 직후, 일몰 정산까지 몇 분 남지 않은 때
Action박종구는 첫물에게 세신 확인 도장 대신 오늘 맡은 일을 이름표에 적어 주겠다고 제안한다. 첫물은 이름표를 내주고 어른들의 의자를 얻으려고 남의 죄를 받았다고 고백한다. 이미 젖은 때수건으로 아이의 등을 밀자 몸에 붙었던 무게가 떨어지지만, 쏟아진 때와 우박이 대야를 넘치게 한다. 작아진 첫물이 빈 냉수 통을 받치고 잠금이 밸브에서 내려와 함께 들어 올리는 동안, 오정임은 수건이 빠지는 배수구를 무릎으로 누른다. 백수선이 작업구에서 빠져나와 운반을 지휘하고, 박종구는 적박에게 자기 우박부터 받아 나르게 한다.
Impact첫물은 회수통을 놓고 빈 용기를 받치는 일에 손을 보탠다. 죄가 아이의 몸에서 떨어지면서 옥상의 하중은 줄지만, 바닥으로 풀린 찌꺼기를 일몰 전에 옮겨야 하는 문제가 더 급해진다. 밸브와 회수통을 붙들고 맞서던 손들이 운반 줄에 합류하고, 적박은 남의 죄를 옮기기 전에 자기 우박을 받아 든다. 창고로 보낼 물량이 움직이기 시작하지만 보관 책임과 새 배수처의 서명은 아직 남아 있다.

박종구는 첫물 앞의 빈 대야를 발로 당겨 갈라진 타일 위에 걸쳤다. 데인 오른손은 앞치마에 붙이고 왼손으로 아이가 안은 회수통 테두리를 짚었다. 작업구에서는 백수선의 구두 밑창이 벽을 긁었다.

“도장은 못 줍니다.”

첫물이 통을 더 끌어당겼다.

“아직 안 씻었잖아.”

“씻어도 오늘 다 끝난 건 아니에요. 대신 이름표에는 써줄 수 있습니다. 오늘 뭘 맡았는지.”

첫물이 목의 나무패를 빼냈다. 끈이 귀에 걸려 한 번 잡아당겼다가, 다시 느슨하게 풀었다.

“의자에 붙이는 건데.”

“이름은 그대로 씁니다.”

“작아져도?”

“작아져도.”

나무패가 박종구의 왼손에 놓였다. 손가락으로 문질러 반질반질해진 모서리가 있었다. 박종구는 패를 앞치마 주머니에 넣고 회수통을 아이의 무릎에서 천천히 내려놓았다. 첫물은 테두리를 따라 손을 내리다가 놓았다.

“어른들이 그랬어. 맡을 줄 알아야 자리를 준다고.”

박종구가 젖은 때수건을 집었다. 첫물의 등에는 아직 안전줄이 팽팽했다.

“그래서 누구 것을 받았어요?”

“이 통에 있던 거. 내 것도 아닌데 내가 받았어. 커지면 식탁에 내 의자도 놓아줄 줄 알았어.”

첫물이 입술을 다물었다. 박종구는 수건을 대지 않고 기다렸다.

“먼저 씻으면 이름도 써줄 줄 알았고.”

말이 끝나자 박종구가 등을 밀었다.

검은 덩어리가 어깨에서 벗겨져 대야를 때렸다. 우박이 그 사이에서 튀었다. 첫물의 저고리 어깨선이 내려앉고, 겨드랑이 밑 안전줄이 헐거워졌다. 박종구는 아이가 줄 아래로 빠지기 전에 팔뚝으로 가슴을 받쳐 타일 위에 앉혔다.

대야 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한 덩어리가 가장자리에 걸렸다가 바깥으로 접혀 흘렀다.

“적박 씨, 하나 더!”

“내 손이 지금 천사 허리에 있소!”

백수선이 작업구 안에서 렌치를 당겼다.

“이제 놓으셔도 됩니다. 뒤로 빼십시오.”

적박이 허리띠를 잡아당기자 백수선이 팔꿈치로 턱을 밀며 빠져나왔다. 접은 수건이 함께 떨어졌다. 백수선은 바닥에 무릎을 댄 채 작업구 아래 받침을 조였다.

“연결부는 고정됐습니다. 덩어리는 부숴서 넣지 마십시오. 안에서 걸립니다.”

박종구가 새 대야를 밀어 넣기도 전에 검은 때가 첫물의 발치까지 번졌다. 첫물이 뒤로 물러서다 빈 냉수 통을 건드렸다. 통이 기울었다.

아이가 두 손으로 통의 옆면을 받쳤다.

“여기. 여기에 담아.”

통 밑바닥이 타일 모서리에 걸렸다. 첫물의 발이 미끄러지자 점검구 앞에 있던 잠금이 밸브 쪽으로 손을 뻗었다. 박종구가 통 입구를 붙잡았다.

“손잡이 말고, 이쪽 잡아요!”

잠금은 돌아가는 대신 통 아래에 손을 넣었다. 첫물과 함께 들어 올리자 입구가 넘치는 대야 밑으로 들어갔다. 검은 찌꺼기와 얼음이 플라스틱 벽을 두드렸다.

“더 들지 마라. 네 쪽으로 쏟아진다.”

첫물이 턱을 통에 붙이고 버텼다.

“그럼 같이 낮춰.”

두 사람이 무릎을 굽혔다. 박종구는 대야를 기울여 마지막 덩어리를 넘겼다.

배수구에서 철컥 소리가 났다.

오정임의 무릎 아래 덮개가 들렸다. 틈으로 밀어 넣었던 수건 끝이 빨려 들어가며 짧아졌다. 오정임은 석탄삽을 가로 눕히고 두 무릎으로 덮개를 눌렀다.

“여기는 더 못 받아. 퍼서 보내!”

박종구는 첫물의 안전줄을 풀어 기둥에 걸고 빈 대야를 아이 앞으로 당겼다.

“찬 것만 여기서 넘겨요. 무거우면 부르고.”

첫물이 대야 가장자리를 잡았다. 번호표 밑의 수건 조각이 손등까지 흘러내렸다.

백수선이 대야 두 개를 작업구 앞에 잇대었다. 잠금은 냉수 통에서 떠낸 찌꺼기를 첫 대야에 옮겼고, 박종구는 석탄삽으로 남은 우박을 긁어 모았다. 얼음이 삽날 위에서 동전처럼 부딪쳤다.

적박이 회수통 손잡이를 잡았다.

“큰 통은 내가 먼저 가져가겠소.”

박종구가 삽을 그 앞에 가로 댔다.

“그것보다 이거부터요.”

삽 위 우박 한 알에 창고의 쇠패가 붙어 있었다. 적박은 회수통에서 손을 뗐다. 백수선이 빈 우박 자루의 입구를 벌려 주자, 적박은 두 팔로 자루 밑을 받았다.

“등 미는 값에 운반까지 붙었구려.”

“번호표에 아직 빈칸 많습니다.”

박종구가 삽을 기울였다. 적박의 팔이 아래로 처졌다가 다시 올라왔다. 그는 젖은 자루를 가슴에 끌어안고 비상계단 쪽으로 돌아섰다.

그 뒤에서 첫물이 첫 대야를 잠금에게 밀어 주었다. 바닥을 긁던 대야가 작은 손을 떠나 잠금의 두 손에 들렸다.

Scene 14· 일몰 직전부터 해가 진 직후까지

문 안쪽의 서명

문 안쪽의 서명
Place적박의 우박 창고와 옥천탕 욕실
Time일몰 직전부터 해가 진 직후까지
Action박종구와 백수선은 창고의 낡은 배출구 마개를 죔쇠로 고정하고, 잠금은 소유 인장을 쥔 손으로 밀려나는 마개를 버틴다. 마지막 회수통이 들어온 뒤 적박과 잠금은 창고 안에 남아 보관 책임에 서명한다. 박종구와 백수선이 새 배수처를 확인하자 일몰의 찌꺼기가 창고로 쏟아진다. 옥천탕으로 돌아온 박종구는 보관 기록과 미해결 피해 장부를 나란히 놓고 세신 확인 도장을 찍지 않는다.
Impact일몰 정산에서 죄가 인간의 집으로 돌아가는 경로가 끊긴다. 적박과 잠금은 서류만 내주는 대신 죄가 쌓이는 현장에서 보관 책임을 맡는다. 그러나 회수 완료가 피해 처리 완료는 아니므로, 신들의 확인서와 박종구의 세신료는 정산되지 않은 채 남는다.

박종구는 적박의 우박 창고 바닥에 무릎을 대고, 밀려나는 배출구 마개를 렌치 자루로 눌렀다. 서리 낀 나사 구멍에서 쇳가루가 떨어졌다. 회수관으로 들어온 검은 물이 마개 둘레에 얇게 고였다.

“돌리지 마십시오. 나사산이 없습니다.”

백수선이 그의 왼손에서 렌치를 빼냈다. 마개가 손톱 너비만큼 튀어나왔다.

잠금이 황동 소유 인장을 가로로 대고 마개를 밀어 넣었다. 직인의 돌출된 글자가 쇠에 갈렸다.

“죔쇠를 가져와라.”

“그 손, 빼면 안 됩니다.”

“알고 있다. 네 손부터 비켜라.”

박종구는 데인 오른손을 가슴에 붙이고 몸을 옆으로 틀었다. 백수선이 배출구 둘레의 온전한 턱을 찾아 죔쇠를 비스듬히 걸었다. 똑바로 물리자 미끄러졌던 쇠가 비스듬한 자리에서는 멎었다.

“아래를 받치십시오.”

박종구가 왼쪽 어깨를 죔쇠 밑에 넣었다. 차가운 바닥에 슬리퍼가 밀렸다. 백수선은 날개가 비어 축 늘어진 작업복 등판을 벽에 붙이고 렌치를 당겼다.

한 번.

잠금의 인장 끝이 더 깊이 긁혔다.

두 번.

마개 둘레의 검은 물이 더는 불어나지 않았다.

“이제 천천히 떼십시오.”

잠금이 손을 거두었다. 인장에 붙은 검은 찌꺼기가 실처럼 늘어나다 끊겼다. 백수선은 그 찌꺼기까지 빈 우박 자루에 닦아 넣었다.

회수관 입구에서 플라스틱이 긁혔다. 첫물이 건너편에서 마지막 회수통을 밀고 있었다.

“걸렸어!”

박종구가 통 손잡이를 당겼다. 적박은 먼저 받아 둔 자기 우박 자루를 무릎으로 밀어 자리를 냈다. 회수통 밑바닥이 창고 문턱을 넘자 관 너머로 오정임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 덮개 내려앉았다. 더 보낼 거 없어!”

백수선이 젖은 서류를 철판 위에 폈다. 창고 문밖으로 한 발을 뺀 적박이 손을 내밀었다.

“이리 주시오. 서명하고 문 닫으면 되지 않소.”

그때 회수통 옆의 우박 자루가 기울었다. 둥근 밑이 바닥을 굴러 낮은 배출구 쪽으로 밀렸다. 적박은 내밀었던 손을 거두고 안으로 돌아와 자루를 두 팔로 받았다.

“이놈은 왜 자꾸 나가려고 해.”

“나가던 데가 저기니까요.”

박종구가 자루 밑에 빈 쇠패를 괴었다. 적박은 그제야 한 손을 뺐다.

“종이를 여기 대주시오.”

백수선이 자루 위에 서류를 받쳤다. 적박은 우박 보관료를 적던 손가락으로 보관 책임란을 짚었다.

“기간이 없구려.”

“끝난 날짜가 생기면 적습니다.”

적박이 입술을 다문 채 이름을 썼다.

잠금도 문 쪽으로 가지 않았다. 배출구 앞에 쪼그려 앉아 인장의 찌꺼기를 소매로 닦고, 적박의 이름 아래 자기 이름과 소유 인장을 눌렀다. 젖은 종이에 직인이 절반만 찍히자 같은 자리에 다시 힘을 주었다.

백수선은 새 배수처에 창고 이름을 적었다. 박종구가 배출구의 고정 상태를 손으로 확인하고 그 옆에 서명했다.

문틈으로 들어오던 붉은 사각형이 바닥에서 사라졌다.

회수관이 울었다.

빈 통 바닥에 검은 덩어리가 떨어지고, 마대 사이에 남았던 우박이 일제히 튀었다. 적박이 자루를 끌어안았다. 잠금은 고정한 마개 위에 손바닥을 얹었다. 죔쇠가 짧게 떨렸지만 벌어지지 않았다.

백수선이 회수관의 배수처 표시판을 뒤집었다. 공동 집수정 이름이 가려지고 적박의 우박 창고 이름이 드러났다.

“도착 확인됐습니다.”

적박이 문 안쪽에서 처리 기록을 내밀었다.

“그러면 이걸로 도장은 받을 수 있겠소?”

박종구는 종이를 받아 앞치마 안에 넣었다.

“장부 옆에 놓고 봅시다.”

옥천탕으로 내려왔을 때 오정임은 배수구에서 무릎을 떼고 있었다. 첫물이 빈 대야를 끌어다 발밑에 받쳐 주었다. 오정임은 대야를 딛고 일어서자마자 박종구가 꺼낸 처리 기록 위에 외상 장부를 펼쳤다.

“여긴 아직 물 안 갔어.”

젖은 손가락이 주소 세 줄을 짚었다. 다음 장에는 금 간 양동이의 값이 비어 있었다. 작물 피해 칸에는 적박의 이름만 적혀 있었다.

박종구가 앞치마에서 확인 도장을 꺼냈다. 백수선이 기록 가장자리를 눌러 종이가 말리지 않게 했다.

“창고 도착은 끝났습니다.”

“예. 그건 여기 적고요.”

박종구는 처리 기록의 빈 여백에 창고 도착 시각을 썼다. 오정임은 장부에서 세신료를 꺼내려던 그의 손 앞에 미급수 주소가 있는 장을 한 번 더 펼쳤다.

박종구는 돈을 그대로 두었다. 확인 도장도 인주에 대지 않고, 손잡이가 옆으로 구르지 않도록 미급수 가구의 빈칸 옆에 눕혀 놓았다.

Scene 15· 일몰 정산 다음 날 아침부터 사흘째 폐업 시각까지

첫 빈 대야

첫 빈 대야
Place옥천탕 매표소와 욕실 문 앞, 옥상으로 이어지는 스물세 계단
Time일몰 정산 다음 날 아침부터 사흘째 폐업 시각까지
Action잠금과 적박이 씻은 회수통을 들고 내려오자 오정임은 미급수 가구의 배달 주소를 나눠 주고, 자신의 수술 날짜를 다시 잡으러 간다. 박종구는 계단으로 부속을 나르는 백수선에게 품삯 일부를 공급 보증금으로 맡긴다. 폐업일에는 팔려고 닦던 세신대를 매표소 앞으로 옮겨 미처리 번호표를 걸고, 첫물의 작은 의자에 이름과 담당 업무를 붙인다. 첫물이 첫 빈 대야를 받아 앉자 박종구는 욕실 문을 닫고 뒷정리를 계속한다는 안내문을 붙인다.
Impact옥천탕의 폐업과 신들의 피해 처리 업무가 분리된다. 박종구는 팔 수 있는 설비와 품삯 일부를 남은 급수 작업에 묶고, 신들은 확인 도장 대신 배달 주소와 맡은 일을 받아 간다. 첫물은 남의 죄를 몸에 붙이지 않고도 자기 이름이 적힌 자리를 얻는다.

다음 날 아침, 잠금과 적박이 씻은 회수통을 옥천탕 매표소 앞에 내려놓자 오정임이 마른 걸레를 통 밑으로 밀어 넣었다. 통 테두리에서 떨어진 물이 바랜 요금표까지 번졌다.

“씻었으면 엎어 놔요. 물 고이게 두지 말고.”

적박이 통을 뒤집었다. 바닥에 부딪친 소리가 탈의실까지 울렸다. 잠금은 소매에서 배달 기록을 꺼냈지만 오정임은 그것부터 받지 않았다. 외상 장부에서 접어 둔 종이 두 장을 떼어 각각 내밀었다.

“이쪽은 계단 위 세 집. 이쪽은 어제 못 간 집.”

“창고 회수통도 아직 남았소.”

적박의 손가락이 주소 끝에서 멎었다.

“그래서 둘로 나눴잖아요. 통 씻는 동안 물 받을 사람이 없어지는 건 아니니까.”

잠금이 적박 몫까지 받으려 하자 오정임은 종이를 잡아당겼다.

“각자 이름 적어요. 누구한테 줬는지 알아야지.”

두 신이 매표소 선반에 종이를 대고 이름을 썼다. 잠금의 소유 인장은 찍는 면이 긁혀 있었다. 잠금은 인장 대신 펜으로 배달할 물의 양을 덧붙였다.

박종구는 왼손으로 장부 모서리를 눌러 주었다. 오른손의 붕대가 선반에 스치자 팔꿈치를 조금 들었다.

“병원은요?”

오정임이 무릎 보호대를 끌어 올렸다. 앞치마 주머니에서 병원 이름이 찍힌 빈 봉투를 꺼내 접었다.

“지금 가서 다시 잡아야지.”

“여기 돈부터 맞춰 보고—”

“날짜도 안 잡고 돈만 맞추게?”

오정임은 펜을 박종구의 손에 쥐여 주고 장부를 덮었다. 잠금과 적박에게는 배달 종이를 다시 펼쳐 보였다.

“양동이에 부은 만큼 적어요. 들고나간 만큼 말고.”

출입문에 걸어 두었던 의자를 치우자 계단 아래에서 황동 부속이 부딪치는 소리가 올라왔다. 백수선이 상자를 한 계단씩 밀어 올리고 있었다. 작업복 등판의 빈 날개 구멍은 실로 꿰매져 있었다.

박종구가 상자 한쪽을 받았다.

“작은 걸로 나눠 오시지.”

“상자를 빌린 값도 정산해야 합니다.”

마지막 턱을 넘긴 뒤 백수선이 허리의 안전줄을 풀었다. 박종구는 매표소에서 자기 품삯을 가져와 상자 위에 놓았다. 지폐 몇 장을 따로 빼고 나머지를 백수선 쪽으로 밀었다.

“공급 보증금으로 걸어요.”

백수선이 돈을 세다가 멈췄다.

“이건 박종구 씨 품삯입니다.”

“그러니까 제 이름으로 적어요.”

백수선은 돈을 봉투에 넣고 금액 아래에 이름을 썼다. 박종구가 남겨 둔 지폐는 휴대전화 밑에 끼웠다. 금 간 화면 위로 방세 송금 창이 잠깐 켜졌다가 꺼졌다.

사흘째 오후, 박종구는 세신대 쇠틀에 붙은 비누 찌꺼기를 닦아 냈다. 욕실에서는 온수가 나오지 않았다. 접은 걸레를 왼손에 감아 모서리를 훑자 벗겨진 도금 아래로 검은 쇠가 드러났다.

첫물이 작은 의자를 끌고 와 세신대 옆에 놓았다.

“이것도 가져가?”

박종구는 쇠틀에 붙여 둔 판매 가격표를 떼었다. 종이가 젖어 반쪽만 떨어졌다.

“아니. 앞으로 뺍니다.”

백수선이 뒤쪽 다리를 잡았다.

“팔 물건 아니었습니까?”

“장부 놓을 데가 없어요.”

두 사람이 세신대를 당겼다. 휘어진 다리가 욕실 문턱에 걸렸다. 첫물이 받침 벽돌을 가져오려 하자 박종구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두고. 문 잡아 줘요.”

첫물이 두 팔로 문을 밀었다. 백수선이 다리 밑에 짧은 관을 괴고 들어 올리자 쇠틀이 문턱을 넘었다. 바닥에 길게 끌림 자국이 남았다. 매표소 앞에 자리를 잡은 세신대 위로 박종구가 장부와 배달표를 옮겼다.

적박의 번호표부터 걸었다. 처리비 칸은 여전히 비어 있었다. 그 옆으로 미처리 번호표들이 쇠틀을 따라 늘어났다. 백수선이 확인 도장을 가져오자 박종구는 서랍을 열어 안쪽에 눕혀 넣었다.

첫물이 작은 의자를 매표소 옆으로 당겼다.

“내 것은?”

박종구는 앞치마에서 나무 이름표를 꺼냈다. 모서리가 반질반질한 패를 세신대 위에 놓고, 왼손으로 펜을 쥐었다. 글자 하나를 쓰다 삐뚤어지자 첫물이 패의 반대쪽을 눌러 주었다.

첫물, 대야 회수.

“회수는 내가 다 가져야 해?”

“돌아온 것만 받아요. 무거우면 부르고.”

박종구는 이름표를 의자 등받이에 묶었다. 첫물이 앉아 보자 발뒤꿈치가 바닥에 닿았다. 아이는 의자를 조금 뒤로 밀고 무릎 위를 손바닥으로 쓸었다.

백수선이 마지막 빈 대야를 건넸다.

“이건 어디에 놓습니까?”

첫물이 두 손을 내밀었다.

“여기.”

대야가 아이의 무릎에 얹혔다. 첫물은 기울지 않게 가장자리를 잡고, 안쪽에 붙은 낡은 번호표를 떼지 않은 채 손가락으로 펴 놓았다.

박종구가 욕실 문을 닫았다. 젖은 손잡이를 걸레로 닦고 테이프를 짧게 끊었다. 문에 붙인 종이의 들뜬 귀퉁이를 붕대 감은 손등으로 눌렀다.

씻는 곳은 폐업. 뒷정리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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