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아는 평범한 직장인이다. 저임금의 계약직 직원이며 비혼이라는 이유로 직장 상사에게 경멸을 받고 있다. 젊은 동료들은 한지아를 동정하지만 상사의 폭언에는 암묵적으로 동조하면서 마찬가지로 부조리에 맞서지 못하고 있는 당사자인 지아에겐 은연히 멸시받는다. 낡은 맨션의 옆집 이웃 박수나는 마주칠때마다 지아를 불편하게 만든다. 그녀는 지아 또래의 여성이면서도 출근하는 모습을 보인 적이 한번도 없었는데도 생계를 이어가는 것 같았다. 수나는 종종 지아의 수수한 옷차림과 짧은 머리를 언급하며 은연히 지아의 재정상태를 조롱하는 것 같다. 지아는 사람들이 자신을 이렇게 대하는게 지아 탓인지 세상 탓인지 따지는 것도 지쳐버렸다.
어느 주말 지아는 늦은 아침에 일어났지만 방안이 너무 어둡다는 것을 깨닫는다. 방밖 창문을 열자 세상은 너무 어두워 바로 코앞에 누가 쌔까만 벽으로 막은 것 같았다. 밖에는 소리도 기척도 느끼지 않는다. 고립된 방 안에서 극도의 두려움을 느낀 지아는 방밖으로 빠져나가기 위해 문을 연다. 문을 열자 보여야할 거실이 아닌 한번도 본 적 없는 긴 복도가 보였고 그 옆에는 수많은 문들이 사이사이 있었다.
미쳐버릴 것 같은 고요함에 지아는 결국 복도로 걸음을 옮겼다. 지아의 방안은 몇 번을 뒤돌아 봐도 그대로 있었다. 이 미쳐버릴 것 같은 상황에 남은 유일한 위안이었다.
그 중 한 문을 열자 순간적으로 느껴지는 온기와 실감나는 사물의 기척을 알 수 있었다. 지아가 그 방으로 들어오자 그녀는 입고 있었던 옷이 전혀 다른 옷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그 방안에는 한 사람이 더 있었다. 바로 평소 그녀가 비혼이라는 이유로 늘 지아를 경멸하던 직장 상사, 한윤건이었다. 윤건은 지아에게 들어오자마자 먹을 밥이 보이지 않는다며 타박한다.
영문도 모르는 지아에게 왜 밥차리지 않고 가만히 있나고 윽박지르는 윤건. 지아는 윤건의 아내가 된 것이었다. 기가 막힌 상황에 우리들은 서로 싫어하는 사이가 아니었냐고 애초에 서로의 나이차이가 너무 나지않나고 말하지만 윤건은 그것들이 무슨 상관이었나며 지아에게 다가오고 두려웠던 지아는 자신이 들어왔던 문으로 다시 도망친다.
방밖을 빠져나가자 다시 이어지는 복도. 지아는 좀 더 멀리가 문 하나를 열게된다. 새로운 방은 전의 방과는 다르게 싸늘한 냉기가 감돈다. 회색빛의 방 가운데의 침대가 섬짓하게 다가왔다. 이번에도 방에 들어오자 지아의 옷이 바뀌었다. 누더기가 연상되는 허름한 옷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한윤건이 있었다.
지아는 윤건에게 여기서도 내가 당신의 아내냐고 물었다. 윤건은 지아에게 너같은 노예가 어떻게 누군가와 결혼해서 아내의 지위를 얻을 수 있냐고 넌 내가 산 노예가 아니나고 반문한다. 지아는 당신은 나를 머리도 나쁘고 일처리도 제대로 못한다면서 날 타박하지 않았냐며 그런 날 왜 샀냐고 물었지만 그자는 너같은 노예를 사는데 머리가 나쁘고 말고가 애초부터 무슨 상관이었냐며 지아를 값주고 산 이유는 오직 하나라며 지아에게 다가온다. 필사의 저항끝에 다시 문밖으로 도망친 지아는 긴 복도에 홀로 앉아 흐느낀다
지아는 슬슬 이 문들의 정체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지아는 다른 문을 열었다. 그곳에는 지아가 아는 다른 한명의 얼굴이 있었다. 지아의 옆집 이웃이었다. 그리고 역시 윤건도 있었다. 이번에는 아버지가 되어있었다. 그들이 정해준 남자와의 결혼을 지아가 거부하던 참이었다. 지아는 실소했다.
아버지의 역할을 하고있는 한윤건은 지아에게 가장 익숙한 한윤건이었다. 그리고 이웃인 박수나는 역시 윤건같은 남자에게만 빌붙여야만 살 수 있는 여자였다. 그리고 깨달았다. 아버지 역할을 하고 있는 직장상사가 가장 익숙한 모습인 이유를. 지아의, 한지아의 진짜 정체를. 이번 방에서 바뀐 한지아의 옷은 어린아이이다.
한지아의 어린시절. 아니다. 사실은 한지아라는 어린아이가 다른 방안에서 계약직 여직원 한지아의 옷을 입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느 방이 지아의 진짜 세계인가 어느 옷이 원래 한지아의 옷인가?
이 방에 있을것인지 아니면 도망쳐서 다른 방에 갈것인지 이 미로의 정체는 무엇인지 알려지지 않은체 이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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