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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ytalk Original · 15 scenes · 5 chapters

네가 누군지는 옆에서 확인할게

삼성디스플레이의 기술 종족들이 거대한 날개 안쪽에 도시를 짓고 사는 세계에서, 폴더블족 날개 수선공은 백 년 만의 탈피를 앞두고 도시 전체를 접어 새 껍질로 옮기는 작업을 맡는다. 어느 각도에서도 색이 흐트러지지 않는 QD-OLED족 항해사가 작업대에 찾아와 함께 달아나자고 손을 내미는데, 그 손바닥에는 수선공이 오래전 실종된 연인에게 꿰매주었던 은실 세 땀이 박혀 있다. 수선공은 그를 믿는 대신 안전줄로 자신의 허리에 묶고, 고휘도 OLED족이 비추는 날개 주름 속에서 수선을 시작하며 고주사율족 운반꾼들은 떨어지는 집들을 낚아채고 LTPO족은 비어 있는 구역부터 잠재워 이주에 쓸 힘을 모은다.

그러나 낡은 날개에 붙은 알집이 발견되자 수선공은 이미 꿰맨 이음매를 다시 뜯고, 항해사는 도망갈 배를 알집 아래 밀어 넣어 받침대로 쓴다. 첫 번째 탈피 종이 울리고, 두 사람과 알집을 사이에 둔 채 도시의 양쪽 날개가 삼 분 뒤 맞물리기 시작한다.

  • 5 characters
  • 6 locations
  • 15 scenes
  • Plot 3,424 ch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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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racters

Characters

여밈

Female

관절막을 거듭 접어 좁은 주름에 들어가며 도시의 이주용 이음매를 책임지는 폴더블족 수선공

Profile

여밈은 맞물리는 날개 사이에서 알집을 빼내 도시와 함께 옮기려고, 완성한 이음매를 뜯고 자신의 관절막을 임시 경첩으로 건다. 다시는 몸을 접지 못할 수 있는 작업에 나서며 여밈은 채온을 자기 허리의 안전줄에 묶고, 탈출 항로 대신 알집이 통과할 틈을 끝까지 재달라고 요구한다. 여밈이 채온에게 내건 조건은 옛 연인의 기억을 증명하는 일이 아니라, 줄을 풀고 싶어지는 순간 먼저 말하는 일이다.

여밈은 남의 안전줄을 손가락 두 마디만큼 여유 있게 매면서도, 채온과 연결한 매듭은 숨을 내쉴 때마다 당겨 확인한다. 은실 세 땀이 드러나면 여밈의 시선은 채온의 얼굴을 비켜 손끝에 머물고, 익숙한 바늘 잡는 동작이 나올 때마다 여밈은 내밀던 손을 공구 쪽으로 돌린다. 고요가 남은 시간을 부르면 여밈은 “들었어요”라고 또박또박 답하면서도, 알집을 누르는 실밥 하나를 더 끊는다.

Background

접힌 자리가 벌어지지 않기를 바라던 수선공 부모는 딸에게 여밈이라는 이름을 붙였고, 어린 여밈이 처음 뜯어낸 연습 솔기 옆에는 다시 꿰맬 실부터 놓아주었다. 채온이 실종되기 전 손바닥에 은실 세 땀을 놓았던 여밈은, 이후 작업대 맞은편 의자를 치우지 않은 채 혼자 두 사람 몫의 안전줄을 점검해왔다. 서른넷의 여밈은 첫 도시 이주를 맡으며 자기 집을 타래에게 접힘 시험용으로 내주었지만, 집에서 꺼낸 두 번째 찻잔은 포장하지 않고 작업대에 남겼다.

Description

여밈은 검은 머리를 턱선에서 짧게 자른 서른넷의 폴더블족으로, 마른 팔꿈치와 손목 안쪽에 반투명한 관절막이 촘촘한 부채 주름을 이룬다. 좁은 틈에 걸리지 않도록 여밈끈을 안으로 감춘 먹색 작업 조끼와 잿빛 바지에는 무릎 모양대로 눌린 덧댐이 남아 있고, 허리의 납작한 공구집에는 굽은 바늘과 실뜯개가 따로 꽂혀 있다. 입술을 다문 채 상대의 얼굴보다 손끝을 살피며 몸을 낮추는 그녀는, 자기 허리에서 뻗어 나간 두 번째 안전줄의 매듭을 엄지로 누르고 숨을 내쉴 때마다 당겨 본다.

채온

Male

어느 방향에서도 같은 색으로 빛나는 피부를 항로 표지로 삼아 탈피 해역을 건너온 QD-OLED족 항해사

Profile

채온은 여밈에게 옛 애칭을 가르쳐달라는 대신, 오늘 작업에서 자신이 잡아야 할 줄을 알려달라고 청한다. 여밈과 떠나려고 마련한 배를 알집 아래 밀어 넣으면서, 채온은 유일한 탈출 수단을 버리고 여밈이 다시 뜯은 이음매를 함께 떠받친다. 채온의 손을 확인하느라 바늘을 멈추던 여밈은 이제 그 손에 알집의 무게를 나누어 맡겨야 한다.

38세인 채온은 여밈이 손바닥을 살피면 손가락을 끝까지 펴주지만, 익숙한 애칭을 기억하느냐는 물음에는 입술을 달싹이다 “그 말은 돌아오지 않았어”라고 답한다. 채온은 여밈의 매듭을 한 번 보고 똑같이 묶으면서도, 여밈이 예전에도 그랬다고 말하면 완성한 매듭을 내려놓고 다음 지시를 기다린다. 타래가 집과 알집 중 먼저 받을 것을 정하라고 다그치자, 채온은 알집 아래 놓인 배의 키를 꺾어 받침을 보강하고 타래에게 빈 두 손을 펼쳐 보인다.

Background

조난 전, 채온은 항해를 마칠 때마다 여밈의 작업대에 젖은 장갑을 걸었고, 여밈은 채온의 찢어진 손바닥에 은실 세 땀을 꿰매주었다. 조난 뒤 거듭 허물을 바꾼 채온은 구조소에서 내민 옛 초상 앞에 고개를 저었으며, 이름과 나이를 묻는 서류에는 은실 박힌 손만 올려놓았다. 채온은 항해 장부에서 자신의 이름과 38세라는 나이를 확인하고, 손바닥의 바느질을 알아본 수선공들의 안내를 받아 여밈의 작업대까지 돌아왔다.

Description

채온은 눈가에 잔주름이 잡힌 서른여덟 살의 항해사로, 짧게 친 먹빛 곱슬머리 아래 회청색 피부가 고개를 돌려도 같은 청록빛을 낮게 낸다. 소금기에 뻣뻣해진 남색 범포 재킷과 무릎을 덧댄 잿빛 작업바지를 입고 허리에는 안전줄 고리를 비워 두었으며, 넓은 어깨를 조금 낮춘 채 상대의 지시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발은 버티기 좋게 벌려 놓는다. 오른손을 내밀 때는 손바닥에 박힌 은실 세 땀이 온전히 보이도록 손가락을 끝까지 펴고, 상대의 얼굴을 살피는 회녹색 눈과 달리 입술은 말을 고르듯 다물려 있다.

등지

Female

강한 외광에도 묻히지 않는 빛으로 수선 부위를 드러내는 고휘도 OLED족 작업등지기

Profile

등지는 여밈에게 이음매를 봉하기 전 주름 안쪽을 한 번씩 더 벌려 달라고 요구하며, 떠난 수가 아니라 남은 위치를 작업등 받침에 새긴다. 알집 속 움직임을 비춘 등지는 고요의 소등 명령에도 빛을 거두지 않아 여밈이 완성한 봉합선을 다시 뜯게 하고, 자기 발광막이 흐려질 때까지 자리를 지킨 대가로 새 도시 점등식의 점등자 명단에서 빠진다.

등지는 “눈부시니 뒤로 서”라며 주민들을 등 뒤로 밀어 넣지만, 여밈이 채온의 손바닥을 들여다볼 때는 질문 대신 빛의 각도만 낮춘다. 등지는 확인하지 않은 소등표에는 펜을 눕혀 놓고 버티면서도, 뒤에서 누가 “잘 안 보여요”라고 하면 자기 눈앞이 하얗게 번질 만큼 출력을 높인다. 등지는 고요에게 남은 전력을 숫자로 되물은 뒤에도 알집 안쪽의 작은 그림자가 다시 움직일 때까지 소등 손잡이에서 손을 뗀다.

Background

등지가 태어난 해, 주름 조명 일을 하던 부모는 아이를 자기 등 뒤 그늘에 눕혀 놓고 일하며 등지라는 이름을 붙였다. 등지는 견습 시절 여밈의 어머니에게서 덮개 한쪽이 찌그러진 작업등을 맡았고, 57세가 된 지금도 새 조명 대신 그 등을 닦아 허리에 건다. 이주 전날 등지는 점등식 연습대에 올라갔다가, 주름 안쪽이 통째로 비었다고 표시된 확인표를 보고 내려와 여밈의 작업대에 등을 걸었다.

Description

등지는 눈가와 입가에 잔주름이 깊어진 쉰일곱 살 여성으로, 짧게 자른 잿빛 머리 아래 관자놀이에서 목덜미까지 얇은 유백색 발광막이 이어져 있다. 빛을 막는 먹색 작업조끼와 팔꿈치를 덧댄 황토색 셔츠를 입고, 덮개 한쪽이 찌그러진 오래된 견습 작업등을 늘 같은 쪽 허리에 걸어 손바닥으로 감싼다. 단단히 다문 입과 달리 시선은 작은 움직임에도 멈추며, 사람들을 등 뒤에 세운 채 한쪽 어깨를 낮춰 필요한 자리로만 빛을 보낸다.

타래

Male

짧은 간격으로 움직임을 읽고 발판을 바꾸며 떨어지는 주택을 받아내는 고주사율족 운반반 막내

Profile

타래는 주민 수만 채우면 끝나는 이주 장부에 집마다 도착 확인란을 만들려고, 여밈에게 시험 낙하 뒤 자기 집의 상태까지 서명해 달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여밈의 집에서 튀어나온 낡은 찻잔을 받느라 타래가 순서를 어긴 몇 초 동안 운반줄들이 교차하고, 뒤따르는 집들이 알집을 받친 채온의 배 위로 기울어진다. 타래는 비어 있는 인수망 하나를 붙들고 여밈과 채온에게 집과 알집 중 먼저 받을 것을 직접 지정하게 한다. 어느 쪽을 골라도 타래는 나머지를 받을 줄부터 잘라야 한다.

22세 남성 타래는 고참 운반꾼의 설명이 끝나기도 전에 낙하 궤적을 손가락으로 짚지만, 인수 도장을 찍을 때는 집주인에게 문이 열리는지까지 되묻는다. 타래는 비뚤어진 운반줄을 보면 남의 매듭도 풀어 다시 꼬면서, 여밈의 찻잔을 건져 올린 뒤에는 엉킨 줄보다 찻잔 손잡이부터 소매로 감싼다. 동료가 다음 집을 받으라고 외치면 타래는 찻잔을 내려놓고 빈 인수망을 펼치되, 여밈과 채온이 대답하기 전에는 발사 고리를 당기지 않는다.

Background

운반줄을 꼬던 가족은 풀린 가닥도 다시 모아 쓰라며 아기에게 타래라는 이름을 붙였고, 타래는 폐줄을 감는 일부터 배웠다. 이주 준비 중 타래는 가족의 작업집이 주민 수 옆에 작은 점 하나로만 표시된 것을 보고, 장부 여백에 지붕 모양과 도착 칸을 그려 넣었다. 이번이 첫 탈피인 22세의 타래는 여밈이 자기 집을 시험용으로 내놓자 다른 운반꾼들 앞에서 온전히 돌려주겠다고 큰소리쳤고, 여밈이 찻잔을 찬장 안에 천으로 고정하는 동안에도 출발을 재촉했다.

Description

타래는 짧게 친 검은 곱슬머리와 아직 앳된 턱선을 지닌 스물두 살의 고주사율족 청년으로, 잿빛 피부의 가느다란 황록색 분절무늬가 눈가에서 관자놀이까지 이어진다. 마른 어깨에 걸친 벽돌색 마직 작업 조끼는 운반줄이 스치는 자리마다 덧대어져 있고, 가슴에는 주민 수 옆으로 작은 지붕과 빈 도착 칸을 그려 넣은 장부가 펼쳐진 채 매달려 있다. 넓은 앞코의 작업화를 엇갈려 딛고 한 손으로 인수망을 벌린 그는 다른 손 검지를 발사 고리 바로 바깥에 곧게 세운 채, 입술을 다물고 상대의 대답을 기다린다.

고요

Female

움직임이 없는 구역의 갱신 박동을 낮춰 탈피에 쓸 힘을 비축하는 LTPO족 휴면 관리 책임자

Profile

고요는 주민의 퇴거 응답을 받은 구역만 잠재워 이주 전력을 확보하려 하지만, 등지가 알집을 비추는 동안 비축량이 가동선 아래로 내려간다. 고요는 여밈에게 수선을 멈추고 남은 작업 시간을 확정하지 않으면 접힘 장치의 가동을 승인하지 않겠다고 통보해, 여밈이 바늘을 든 채 배분판 앞으로 오게 한다. 끝내 고요가 영구 소등 목록 맨 위에 적는 것은 자신의 거처와 백 년간 모은 음성 기록이며, 그 저장막에서 회수한 전력은 다시 기록을 재생하는 데 쓸 수 없다.

106세 여성 고요는 응답 없는 호출구 앞에서 공급 간격을 길게 늘리되 끊지는 않고, 대답이 돌아오면 배분판의 빈칸에 직접 확인점을 찍는다. 고요는 등지의 조명 사용량에는 붉은 초과선을 긋고도, 알집 쪽에서 잡음이 들리면 계산을 멈추고 청음관을 그쪽으로 돌린다. 여밈이 “그럼 무엇부터 버려요?”라고 묻자 고요는 승인패를 쥔 손을 펴지 않은 채 자기 거처의 회로 번호부터 읽는다.

Background

고요가 태어난 날, 야간 공급관을 돌보던 부모는 아기 침상 위 변압막의 떨림을 낮추며 고요라는 이름을 붙였다. 첫 탈피 당시 여섯 살이던 고요는 비어 있다고 보고된 구역의 불이 꺼진 뒤 가느다란 노랫소리를 들었고, 어른의 소매를 잡았지만 맞물린 날개는 다시 벌어지지 않았다. 이후 백 년 동안 주민들의 퇴거 응답을 모아온 고요는 이번 이주를 앞두고 106세 여성 배분관으로 승인부에 서명하면서, 무응답 칸을 공실로 넘기던 도장을 반납했다.

Description

고요는 백여 년 동안 깊어진 입가 주름과 움푹한 뺨, 성긴 백발을 납작하게 틀어 올린 작은 머리 아래로 먹색 절연포 관복을 입으며, 닳은 소맷단은 배분판에 걸리지 않도록 좁게 여며 둔다. 잿빛 피부의 관자놀이 아래로 비치는 가느다란 청록 맥로는 긴 간격으로 희미하게 밝아지고, 굽은 등과 달리 턱은 곧게 든 채 상대의 대답이 끝날 때까지 흐린 호박색 눈을 떼지 않는다. 왼쪽 귀에 꼭 맞춘 달팽이껍질 모양의 청음관을 소리 쪽으로 돌릴 때도, 마디가 굵어진 오른손은 가슴 앞의 낡은 승인패를 단단히 감싼다.


Synopsis

Plot

여밈은 마지막 이주일에도 자기 집 문턱을 수선하지 않는다. 실종된 연인이 돌아오면 알아볼 수 있도록 남겨 둔 흠집이다. 대신 남의 집을 접을 봉합대를 마저 꿰매고, 끝마다 은실 세 땀을 남긴다. 고요가 오래된 작업표를 펴서 두 땀은 생략해도 된다고 재촉하자, 여밈은 다음에 뜯을 사람이 잡아야 한다며 실을 자른다. 여밈은 도시를 빠짐없이 옮기고 싶지만, 정작 자신의 집만은 떠날 채비를 하지 못했다.

그 작업대에 채온이 찾아와 함께 달아나자고 손을 내민다. 손바닥에는 여밈이 오래전 연인에게 꿰매 주었던 은실 세 땀이 박혀 있다. 여밈이 손을 붙들고 옛 애칭을 묻자 채온은 “그 말은 돌아오지 않았어”라고 답한다. 그는 여밈의 매듭을 한 번 보고 그대로 묶으면서도, 둘이 살던 집이 어느 것인지는 짚지 못한다. 여밈은 배로 내려가려는 그를 안전줄로 자기 허리에 묶는다. 누구인지 대답할 수 없다면 우선 옆에서 일하라는 뜻이다.

등지가 강한 저녁빛을 밀어내며 봉합선을 비추다가 조명턱 아래의 작은 움직임을 발견한다. 이미 완성한 이음매 뒤에 알집이 붙어 있다. 여밈은 뜯개를 집고, 채온은 도망가려고 준비한 배를 알집 아래 밀어 넣는다. 배가 받침이 되면서 수로가 막힌다. 첫 탈피 종이 울린다. 삼 분 뒤에는 도시의 준비와 무관하게 양쪽 날개가 맞물린다.

여밈은 채온에게 알집과 날개 사이의 폭을 재게 하고, 자신의 팔꿈치 관절막을 봉합대에 걸어 하중을 나눈다. 등지는 안쪽 그림자를 하나씩 확인하며 빛을 좁힌다. 고요는 빈 구역의 박동을 낮추지만, 답 없는 호출구에는 공급을 남겨 둔다. 그동안 타래가 시험 낙하로 여밈의 집을 받는다. 문이 열리는지 확인하려고 집을 기울인 순간 낡은 찻잔이 굴러 나오고, 타래는 반사적으로 그것을 낚아챈다. 그 몇 초 사이 뒤따르던 운반줄이 교차한다. 두 채의 빈집이 채온의 배 쪽으로 쏠린다.

타래는 남은 인수망 하나를 펼치고 무엇을 받을지 지정하라고 외친다. 여밈은 자기 집을 가리키려다가 알집 안에서 껍질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는다. 그는 알집을 받으라고 명령한다. 타래가 주택 운반줄을 자르자 빈집들이 수로로 떨어지고, 그중 여밈의 집 처마가 배의 난간을 부순다. 채온은 무너지는 배를 버리는 대신 키를 꺾어 날개맥 사이에 끼운다. 배가 비틀리며 알집을 조금 더 들어 올린다. 타래는 찻잔을 여밈의 공구띠에 밀어 넣지만, 여밈은 그것을 꺼내 작업판 위에 내려놓는다. 이제 붙잡아야 할 것은 다른 곳에 있다.

알집을 감싼 오래된 봉합선은 예상보다 깊이 이어져 있다. 마지막 부분을 뜯으려면 조명을 더 안쪽으로 넣어야 한다. 등지가 출력을 높이자 운반 장치가 멎고, 고요가 직접 여밈의 손목을 붙든다. 남은 작업 시간을 확정하기 전에는 이주 장치를 승인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여밈은 고요를 배분판까지 끌고 가 자신의 팔에 걸린 봉합대를 보여 준다. 여기서 손을 떼면 무엇이 떨어지는지 보라고 한다. 고요는 팽팽한 막을 만져 본 뒤 여밈의 손목을 놓는다. 그리고 자기 거처의 회로 번호부터 읽는다.

고요의 거처에서 내려온 저장막 상자를 타래와 채온이 함께 받친다. 상자 안에는 이전 탈피 때 서로의 이름을 부르던 목소리들이 들어 있다. 고요는 회수 단자를 뽑기 전 한 번 재생하려다, 등지의 무릎이 조명턱에서 꺾이는 것을 본다. 그는 재생 손잡이를 놓고 저장막을 해체한다. 상자가 식는 동안 장치에 힘이 돌아온다. 고요는 아무 말 없이 빈 상자를 발로 밀어 작업 길을 낸다.

날개가 맞물리기 시작하자 저녁빛이 수선대 아래에서 사라진다. 고요는 이주 장치를 가동하고, 타래는 알집을 실은 인수망을 새 껍질 쪽으로 당긴다. 그러나 알집 뒤편에 남은 봉합대가 팽팽해지며 여밈의 팔을 안쪽으로 잡아당긴다. 채온이 그를 끌어내려 하자 둘의 안전줄이 날개맥에 눌린다. 여밈은 채온의 칼을 보고 줄을 자르려는지 묻는다. 채온은 칼을 내려놓고 처음으로 말한다. “지금 풀고 싶어. 네 팔이 더 당겨져.”

여밈은 괜찮다는 말 대신 줄을 어느 방향으로 옮길지 알려 준다. 채온은 몸을 낮춰 같은 색으로 빛나는 어깨를 주름 입구에 걸친다. 그 빛을 표지 삼아 등지가 조명을 돌리고, 여밈은 자신이 앞서 남긴 은실 두 땀을 찾아 손가락에 건다. 굳게 닫으려고 꿰맨 자리를 다시 뜯을 손잡이다. 그가 실을 당기는 동안 채온은 여밈의 허리를 받치고, 타래는 인수망을 당기다 말고 두 발로 작업판을 밀어 버틴다. 고요도 승인패를 내려놓고 타래의 등 뒤에서 운반줄을 잡는다.

봉합대가 풀리자 알집은 빠져나오지만 하중이 여밈의 관절막에 몰린다. 여밈의 왼팔이 펴진 채 굳는다. 채온은 그 팔을 억지로 접지 않고 자기 몸을 돌려 여밈부터 틈 밖으로 밀어 낸다. 등지는 흐려지는 발광막 대신 견습 때 쓰던 낡은 작업등을 틈에 들이민다. 타래가 빛이 닿은 인수망 고리를 낚아채고, 고요와 함께 마지막 길이를 끌어당긴다. 알집과 두 사람이 새 껍질 위로 미끄러진 직후 세땀 수선대가 뒤집힌다. 채온의 배와 여밈의 집은 낡은 날개 안으로 접혀 사라진다.

새 도시에서 여밈은 좁은 주름에 들어가 보려다가 문틀에 왼팔이 걸린다. 채온이 도우려 손을 내밀자 그는 밀어내고, 혼자 몸을 비틀다 바늘통을 쏟는다. 다음 날 채온은 바늘을 주워 오는 대신 작업판 한쪽을 낮춰 온다. 여밈이 들어갈 수 없는 곳은 채온이 벌리고, 여밈은 바깥에서 실을 건다. 첫 수선은 두 번이나 풀어야 하지만 세 번째에는 닫힌다. 여밈은 채온이 완성한 매듭을 풀어 검사하지 않고 다음 실을 건넨다.

타래는 부서진 집들의 주인들과 함께 남은 밑판을 나르고, 도착 확인란 옆에 수리 날짜를 적기 시작한다. 여밈에게도 자기 집을 잃게 한 일을 사과하지만, 찻잔을 구한 것으로 대신하려 하지는 않는다. 여밈은 그에게 새 작업대의 문이 제대로 열리는지 확인해 달라고 부탁한다. 등지는 알집이 놓일 자리를 비추려다 흐려진 빛 때문에 다른 등지기를 부른다. 새 도시 점등식 명단에는 그의 이름이 빠져 있다. 여밈은 그를 행사장으로 데려가는 대신 알집 곁에 의자를 놓고, 함께 새끼들이 껍질을 미는 것을 지켜본다.

고요는 이전 탈피의 목소리를 틀어 달라는 요청을 받고 빈 상자를 내놓는다. 타래가 새 기록을 남기자고 하자 그는 먼저 작업자들을 한자리에 앉힌다. 누가 누구를 잡았는지 서로 말하게 하고, 빠진 이름이 나오면 기록을 멈춰 다시 부른다. 여밈은 자기 차례에 채온을 옛 연인의 이름으로 소개하지 않는다. 자신을 끌어낸 항해사라고 말하고, 채온은 그 옆에 앉은 채 손바닥을 무릎 위에 편다.

봄비가 새 껍질을 처음 두드리는 날, 채온은 수리한 작은 운반정을 여밈의 작업장 앞에 댄다. 이번에는 함께 떠나자고 하지 않고 저녁에 수로를 한 바퀴 돌겠느냐고 묻는다. 여밈은 공구띠를 벗어 놓고 배에 오른다. 채온이 안전줄의 여유를 묻자 두 손가락만큼이라고 답한다. 은실이 있는 손을 확인하느라 멈추지 않고, 그 손을 짚어 자리에 앉는다. 배가 돌아오는 동안 등지는 작업장 불을 낮춰 두고, 두 사람이 나란히 내릴 때까지 문을 닫지 않는다.


World

The world

representative image

setting

도시의 중앙 접힘골에 놓인 ‘세땀 수선대’. 거대한 날개 안쪽에 매달린 집들이 이곳을 중심으로 마주 접혀 새 껍질로 옮겨진다. 수선대는 독립된 건물이 아니라 두 날개의 두꺼운 날개맥 사이에 걸친 작업판이다. 바닥 틈으로는 탈피 해역의 잿빛 물결이 보이고, 머리 위에는 철거하지 못한 집들의 밑판과 빗물통이 흔들린다.

여밈의 작업대에서 왼쪽으로 여섯 걸음 떨어진 곳에 고요의 전력 배분판이 있다. 반대편에는 타래의 인수망 발사 고리가 줄지어 박혀 있다. 등지가 서는 좁은 조명턱 아래, 오래된 봉합선에 가려져 있던 알집이 붙어 있다. 채온의 작은 배 한 척이 들어갈 수 있는 수로는 그 바로 밑을 지난다. 배를 받침으로 세우면 수로가 막혀,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도시와 함께 옮겨가는 것 외에는 빠져나갈 길이 없다.

수선대에서는 누구도 멀찍이 물러나 남의 결정을 구경할 수 없다. 한 사람이 몸을 돌리면 다른 사람의 안전줄이 팽팽해지고, 낮춘 목소리도 작업판을 타고 옆 사람의 발바닥까지 울린다.

time period

백 년 주기의 탈피를 맞은 마지막 이주일, 해역의 비바람이 잠시 잦아든 저녁이다. 이번 탈피를 직접 겪은 주민은 드물며, 대부분은 이전 세대가 남긴 작업표와 접는 순서에 의지한다. 고요의 음성 기록에는 당시 작업자들이 서로의 이름을 부르던 소리까지 남아 있다.

이야기의 현재는 첫 번째 탈피 종이 울리는 순간이다. 삼 분 뒤 양쪽 날개가 맞물리기 시작한다. 종은 주민을 위해 설치한 경보지만, 날개 자체의 탈피를 멈추는 장치는 아니다. 도시가 준비되지 않아도 저녁빛은 접힘골 바닥에서부터 차례로 사라진다.

rules

- 첫 종이 울린 뒤 삼 분이 지나면 날개는 저절로 맞물리기 시작한다. 고요가 승인할 수 있는 것은 도시의 이주용 접힘 장치뿐이므로, 승인을 늦추면 주민과 집이 낡은 날개에 남는다.

- 이주 중 하중을 받는 이음매를 뜯으려면 먼저 다른 받침을 걸어야 한다. 알집을 꺼내려는 여밈은 채온의 배와 자신의 관절막으로 빈자리를 지탱해야 하며, 버틴 무게에 따라 관절막은 접히는 기능을 영구히 잃을 수 있다.

- 조명과 운반 장치와 이주용 접힘 장치는 같은 전력을 나눠 쓴다. 등지가 알집을 계속 비추는 동안 고요는 다른 구역의 공급을 줄여야 하며, 저장막을 해체해 회수한 전력으로는 그 안의 기록을 되살릴 수 없다.

- 주름 안으로 들어가는 작업자는 바깥 작업자와 안전줄로 연결되어야 한다. 줄은 상대를 끌어낼 수 있지만 한쪽이 추락하면 다른 쪽도 끌려가므로, 여밈이 채온에게 묶은 매듭은 감시 수단인 동시에 자신의 목숨을 맡기는 선택이다.

technologies philosophies

종족의 능력은 도구와 결합해야 도시 규모의 일을 할 수 있다. 폴더블족은 몸을 거듭 접어 좁은 주름에 들어가지만, 집을 접는 데에는 하중을 나누는 봉합대가 필요하다. 고주사율족은 빠르게 변하는 낙하 궤적을 읽어도 인수망의 무게 한도를 넘길 수 없다. QD-OLED족의 일정한 색은 비스듬한 수로와 굽은 주름에서도 항로 표지가 되지만, 가려진 벽 너머까지 빛나지는 않는다. 서로 다른 능력을 같은 작업대에 모아야만 이주가 성립한다.

도시는 오래전부터 ‘응답을 받은 집부터 잠재운다’는 관행을 지켰다. LTPO족은 사람이 떠난 구역의 갱신 박동을 낮춰 힘을 아끼되, 답이 없는 호출구는 느린 간격으로 계속 두드린다. 덕분에 뒤늦게 발견되는 주민이 있지만, 확인을 기다리는 시간은 언제나 수선공과 운반꾼의 작업 시간에서 빠진다. 탈피가 임박하면 이 관행을 낭비라고 부르는 목소리가 커진다.

공식 이주 장부에는 주민의 도착 여부만 기록한다. 타래가 덧그린 집 모양과 문 열림 확인란은 승인받지 않은 칸이다. 등지는 작업등 받침에 아직 남아 있는 위치를 새긴다. 두 사람의 기록은 완료 보고를 늦추지만, 접힌 뒤에는 찾을 수 없는 것들을 지금 보게 만든다.

수선공들은 하중이 걸린 봉합선 끝에 은실 세 땀을 남긴다. 첫 땀은 실의 풀림을 막고, 나머지 두 땀은 다음 작업자가 끝을 찾아 뜯을 손잡이가 된다. 오래된 작업표에는 마지막 두 땀을 생략해도 된다고 적혀 있다. 여밈은 바쁠 때도 세 땀을 남겼고, 채온의 손에도 그 버릇이 남아 있다. 그것은 그가 누구인지 확정해 주지 않는다. 다만 여밈이 한 번 더 들여다보게 한다.

visual description

날개 안쪽은 젖은 진주색이고, 오래 접힌 골마다 연갈색 선이 깊게 배어 있다. 집들은 얇은 지붕과 납작하게 눕는 굴뚝을 지녔으며, 서로 부딪히지 않도록 처마 끝에 헝겊 완충대를 달았다. 바람이 불면 수백 개의 완충대가 빨래처럼 펄럭이다가, 운반줄이 당겨지는 순간 한꺼번에 가라앉는다.

수선대에는 검게 닳은 바늘 홈과 잘린 은실 끝이 박혀 있다. 따뜻한 막에서 젖은 천 냄새가 올라오고, 수로에서는 소금과 배의 방수 수지 냄새가 밀려든다. 날개맥을 따라 흐르는 낮은 진동 사이로 타래의 발사 고리가 짧고 마른 소리를 낸다.

기울어진 저녁 햇빛 속에서도 등지의 빛은 봉합 구멍 하나하나에 또렷한 그림자를 만든다. 채온의 청록빛 피부는 정면에서 보든 날개 밑에서 올려다보든 같은 색이다. 그러나 그의 손바닥에 박힌 은실 세 땀은 손을 기울일 때만 번쩍인다. 여밈은 그 짧은 반짝임을 보려고 고개를 움직이고, 등지는 말없이 작업등을 조금 낮춘다.

Keytalk Prompts Used

시각 & 음향

Locations

Where it happens

location 1 image

접힘골의 세땀 수선대

수선대의 비좁은 작업판은 젖은 진주색 두 날개맥 사이에 걸려 있고, 강한 백색광이 오래된 봉합 구멍마다 검고 또렷한 그림자를 도려낸다. 검게 닳은 바늘 홈에는 잘린 은실 끝이 박혀 있으며, 판 가장자리의 세 구멍에 남은 실고리들이 날개맥의 진동에 맞춰 차례로 곧추섰다 눕는다. 왼쪽 여섯 걸음 거리의 전력 배분판과 맞은편 발사 고리 사이로 안전줄이 낮게 교차하고, 고리에서 터지는 마른 소리가 따뜻한 막을 타고 발바닥까지 전해진다. 머리 위에는 매달린 집들의 밑판이 기울어 있고, 좁은 조명턱 아래로 드러난 알집과 작업판 틈 너머의 아득한 잿빛 해역 사이에는 작은 배 한 척이 들어갈 폭만 남아 있다.

location 2 image

흠집 문턱의 집

몸 하나 돌릴 폭의 방 안에 처마 아래로 가늘게 누운 저녁빛이 들어와, 손때로 연갈색이 짙어진 문턱의 흠집을 비춘다. 문턱 둘레의 헝겊은 촘촘히 기워져 있지만 흠집 위만 비워져 있어, 길게 뜯긴 홈 속에 빛 한 줄이 끊기지 않고 고인다. 매달린 집이 기울 때마다 낮은 선반의 낡은 찻잔이 달그락거리고, 창을 반쯤 가린 보풀 선 완충대가 펄럭이며 방 안의 빛을 가늘게 접었다 편다.

location 3 image

고요의 목소리 보관방

먹색 상자들이 거처 안쪽 방을 어깨 하나 겨우 지날 폭으로 채우고, 마른 저장막 틈에서 새어 나온 가느다란 청록빛이 맞은편 상자의 닳은 모서리마다 끊어진 선을 긋는다. 상자 앞면에는 손가락으로 더듬어 찾은 자국이 재생 손잡이 둘레에만 초승달처럼 남아 있고, 딸깍 소리 뒤로 오래된 목소리들이 서로의 이름을 부른다. 한 목소리가 대답하기 전 길게 비는 동안에도 저장막의 빛은 가늘게 켜져 있으며, 가장 아래 상자의 회수 단자는 덮개 없이 드러나 있다.

location 4 image

새 껍질의 알집 자리

우윳빛 새 껍질이 완만하게 오목해진 열린 가장자리에 알집이 놓여 있고, 매끈한 바닥을 따라 번진 옅은 금빛이 곁에 놓인 두 의자의 발끝까지 닿는다. 낮춘 작업등의 둥근 빛 아래, 팽팽한 알집 표면에 작은 돌기가 솟았다 가라앉을 때마다 안쪽에서 가느다란 두드림이 불규칙하게 이어진다. 알집 밑에서 의자 사이까지 뻗은 얕은 홈 하나가 그 빛을 가늘게 모아, 껍질 속 움직임에 따라 의자 아래의 금빛 선까지 조금씩 떨린다.

location 5 image

봄비 내리는 귀환 수로

도시 아래 길게 트인 잿빛 수면에 청록빛 반사가 번지고, 하늘을 가리지 않는 수로의 굽이마다 빗방울에 잘린 저녁빛이 잘게 떠밀린다. 수로 한가운데 솟은 낮은 계류 말뚝에는 물이 빠질 때 남은 소금 테가 비스듬히 둘러져 있어, 운반정이 지날 때마다 테의 아래쪽부터 젖어 사라진다. 서늘한 물안개가 수지를 먹인 뱃전에 내려앉고, 선체를 핥는 물소리 위로 새 껍질을 두드리는 봄비가 넓고 고르게 퍼진다. 돌아오는 굽이에서는 낮춰 둔 작업장 불빛이 물 위에 길게 걸리고, 운반정의 나란한 두 자리 사이로 느슨한 안전줄이 처져 있다.

Location 6

Where is this location in the real world?

영국 브리스틀 플로팅 하버의 언더폴 야드 앞 수로

•Address

Underfall Yard, Cumberland Road, Bristol BS1 6XG, 영국

•Reason for recommendation

트인 하늘 아래 이어지는 항만 수로와 수변 작업장이 잿빛 수면, 낮은 배, 저녁 작업등이라는 장면의 핵심 요소에 부합합니다. 해 질 무렵 청록색 보조광과 작업장 조명을 활용하면 물 위로 길게 번지는 반사를 구현하기 좋습니다.

•Preparation for shooting


Scenes

Scene by scene

Chapter 01

Scene 01· 마지막 이주일 저녁, 첫 탈피 종이 울리기 전

비워 둔 흠집

비워 둔 흠집
Place흠집 문턱의 집에서 접힘골의 세땀 수선대로
Time마지막 이주일 저녁, 첫 탈피 종이 울리기 전
Action여밈은 기울어진 집의 문턱 둘레를 기우되, 실종된 연인이 알아볼 흠집 위에는 헝겊을 덮지 않는다. 세땀 수선대로 내려온 여밈에게 고요는 마지막 두 땀을 생략하라는 작업표를 내민다. 여밈은 작업표를 옆으로 밀고, 등지가 비추는 봉합대 끝에 다음 작업자가 뜯을 손잡이까지 남긴다.
Impact여밈의 집은 문턱에 흠집을 남긴 채 이주를 기다리고, 도시의 봉합대에는 작업표에서 생략을 허용한 실고리 두 개가 더해진다. 고요는 봉합이 끝날 때까지 완료 칸을 비워 두어야 한다. 등지는 여밈을 재촉하는 대신 마지막 바늘이 빠져나올 자리에 빛을 모은다.

여밈은 기울어진 집의 문턱에 무릎을 걸고, 벌어진 헝겊 가장자리를 바늘로 끌어당겼다. 낮은 선반의 낡은 찻잔이 달그락거리는 동안 처마 밑 저녁빛이 손때 짙은 흠집 안으로 길게 들어왔다. 흠집을 가로질러 헝겊을 당기던 여밈은 손을 멈추고, 천을 도로 접어 홈 양옆에만 꿰맸다. 여밈은 열린 문을 돌아보며 “돌아오면 여긴 알아봐야지” 하고 말한 뒤, 공구띠를 조여 매고 세땀 수선대로 내려갔다.

고요는 여밈이 펼친 봉합대 위에 오래된 작업표를 눌러 놓고 마지막 두 땀을 생략해도 된다는 줄을 짚었다. “그 두 땀까지 기다려야 하나?” 여밈은 바늘 끝에서 작업표를 밀어내며 “다음 사람이 뜯을 때 잡아야 해요”라고 답했다.

등지는 두 사람 사이로 뻗었던 빛을 낮춰 여밈의 바늘 아래 모았고, 봉합 구멍마다 선명한 검은 그림자가 생겼다. 여밈이 첫 땀을 조이고 뒤의 두 고리에 손가락 끝을 넣어 여유를 남기는 동안, 머리 위 집들의 헝겊 완충대가 진주색 날개를 따라 한꺼번에 누웠다. 고요가 완료 칸 위에 펜을 든 채 기다리자 여밈은 은실을 잘랐고, 봉합대 끝에 남은 세 땀 중 두 고리가 판 밖으로 작게 솟았다.

Scene 02· 마지막 이주일 저녁, 봉합 직후이자 첫 탈피 종이 울리기 전

손은 알고 있는 매듭

손은 알고 있는 매듭
Place접힘골의 세땀 수선대, 작업판과 수로 사이
Time마지막 이주일 저녁, 봉합 직후이자 첫 탈피 종이 울리기 전
Action채온이 은실 세 땀이 박힌 손을 내밀어 함께 떠나자고 청한다. 여밈은 그 손을 붙들고 옛 애칭과 머리 위의 집을 묻지만, 채온은 매듭만 재현할 뿐 대답하지 못한다. 채온이 배로 돌아서자 여밈은 자신의 안전줄을 그의 허리에 묶고, 풀고 싶어지면 먼저 말하라고 요구한다.
Impact여밈은 채온을 떠나보내지도, 돌아온 연인으로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채온은 배로 내려가는 대신 여밈과 같은 작업판에 묶인다. 등지는 두 사람의 손을 비추며 곁을 지키고, 고요는 이주 작업을 계속하라고 재촉한다.

채온이 세땀 수선대의 낮은 안전줄을 넘어와, 은실 세 땀이 박힌 오른손을 여밈의 공구 위로 내밀었다. “배를 대 뒀어, 함께 가자”라는 말에 여밈이 손목을 붙들자, 등지는 조명턱에서 빛을 낮춰 펼쳐진 손바닥에 모았다. 여밈은 손을 좌우로 기울였고, 뒤편의 젖은 진주색 날개가 저녁빛을 받아 장밋빛으로 번지는 동안 은실은 기울 때마다 짧게 번쩍였다.

여밈이 그 손을 놓지 않은 채 “나를 뭐라고 불렀어?” 하고 묻자, 채온은 입술을 달싹이다 “그 말은 돌아오지 않았어”라고 답했다. 고요가 작업표로 두 사람 사이에 늘어진 줄을 들어 올리며 통로를 비우라고 하자, 여밈은 손목을 놓고 자기 허리의 매듭을 풀어 다시 조였다. 채온은 옆에 놓인 짧은 줄을 집어 같은 순서로 고리를 넘기고 끝을 감았지만, 여밈이 머리 위 완충대 너머의 집을 가리키자 매듭 든 손을 내렸다. “저기서 살았어”라는 말에도 채온은 이웃한 두 집을 번갈아 올려다봤고, 등지는 작업등 가장자리를 손으로 가려 여밈의 얼굴에서 빛을 거뒀다.

채온이 수로의 작은 배 쪽으로 돌아서자 여밈은 자기 안전줄의 남은 끝을 그의 허리에 둘러 당겼다. 채온의 한 발이 판 가장자리에서 되돌아왔고, 여밈은 그의 빈 안전고리에 줄을 통과시켜 매듭을 잠갔다. “풀고 싶어지면 먼저 말해요.” 채온이 배 쪽으로 뻗었던 손을 거두자, 여밈은 두 사람 사이의 줄을 한 번 더 당겨 확인했다.

Scene 03· 마지막 이주일 저녁, 첫 탈피 종이 울리기 직전부터 직후까지

배가 막은 출구

배가 막은 출구
Place접힘골의 세땀 수선대, 조명턱 아래 좁은 수로
Time마지막 이주일 저녁, 첫 탈피 종이 울리기 직전부터 직후까지
Action등지가 마지막 확인을 위해 봉합선 안쪽을 벌려 비추고, 가려져 있던 알집의 움직임을 드러낸다. 여밈은 뜯개를 들지만 하중을 받는 이음매 앞에서 멈춘다. 채온은 잡아야 할 줄을 물은 뒤 배를 당겨 알집 아래 받치고, 고요가 수로의 폐쇄를 경고하는 동안 여밈은 배의 받침줄을 고정한다.
Impact완료를 앞둔 봉합은 알집을 꺼내기 위해 다시 뜯어야 할 작업이 된다. 채온의 배가 유일한 수로를 막으면서 두 사람은 따로 떠날 길을 잃는다. 첫 탈피 종이 울리고, 고요는 날개가 맞물리기까지 삼 분이 남았음을 고지한다.

등지가 조명턱에 무릎을 걸고 봉합선 안쪽을 벌리자, 여밈과 채온 사이로 낮아진 빛이 턱 아래 붙은 알집을 드러냈다. 젖은 진주색 주름 사이에서 알집 표면의 작은 돌기가 솟았다 가라앉았고, 등지는 벌린 틈을 놓지 않은 채 여밈 쪽으로 빈손을 뻗었다. 여밈은 공구띠에서 뜯개를 뽑아 들었지만, 팽팽한 이음매가 조명턱까지 끌어당기자 날 끝을 실에서 떼었다.

채온이 여밈의 옆에 몸을 낮추며 “내가 잡을 줄을 알려줘”라고 말하자 여밈은 작업판 아래 늘어진 배의 앞줄을 그의 손에 쥐여 주었다. 채온은 줄을 당겨 배의 머리를 좁은 수로로 돌렸고, 여밈은 두 사람의 안전줄이 판 모서리에 걸리지 않도록 옆으로 옮겼다. 고요가 배분판에서 돌아서 작업표로 수로를 가리켰다. “거길 받치면 배는 못 나가.” 채온은 여밈을 한 번 올려다본 뒤 다시 줄을 당겼고, 장밋빛 날개가 비치던 물길은 배의 검은 바닥 아래 가려졌다.

여밈은 배의 난간이 알집 아래 봉합대를 받치는 것을 보고 앞줄을 날개맥 고리에 감았으며, 등지는 그 손이 매듭을 잠글 때까지 빛을 곁에 붙들어 두었다. 첫 탈피 종과 함께 고요가 “맞물림까지 삼 분”이라고 외치자, 여밈은 고정한 줄에서 손을 떼고 뜯개 끝을 봉합선 아래 밀어 넣었다.

Chapter 02

Scene 04· 첫 탈피 종 직후, 날개가 맞물리기까지 삼 분이 채 남지 않은 저녁

팔꿈치로 버티는 틈

팔꿈치로 버티는 틈
Place접힘골의 세땀 수선대, 조명턱 아래와 맞은편 발사 고리
Time첫 탈피 종 직후, 날개가 맞물리기까지 삼 분이 채 남지 않은 저녁
Action여밈은 왼팔 관절막을 봉합대에 걸어 배와 하중을 나눈 뒤 이음매 일부를 뜯는다. 채온은 벌어진 틈에 측정줄을 대고 알집이 빠져나갈 폭을 잰다. 등지는 빈 구역의 공급이 줄어드는 배분판 표시를 확인하고 빛을 작업 틈에 좁혀 댄다. 타래는 여밈의 집 밑판에 운반줄을 걸고 시험 운반의 발사 고리를 잠근다.
Impact봉합선 일부가 열리지만 여밈의 왼팔이 받침에 묶여, 몸을 돌리는 동작까지 채온과 맞춰야 한다. 알집이 빠져나갈 틈을 더 벌려야 하는 가운데 같은 수로 위로 여밈의 집을 옮길 준비가 끝난다. 여밈은 자기 집을 돌아보는 대신 채온에게 폭을 계속 재도록 한다.

여밈은 왼팔을 깊이 접어 펼친 관절막을 봉합대 안으로 밀어 걸고, 오른손의 뜯개로 팽팽한 실 하나를 끊었다. 첫 종의 울림이 남은 세땀 수선대 아래에서 배가 기울자 채온은 앞줄을 짧게 당겨 고정했고, 벌어진 이음매 사이로 젖은 진주색 주름이 드러났다. 여밈이 두 번째 실을 끊는 순간 왼팔 안쪽의 반투명한 막이 팽팽하게 펴졌다.

채온은 측정줄 한쪽을 알집의 가장 넓은 부분에 대고 다른 끝을 주름 입구까지 당긴 뒤, 모자라는 길이를 두 손가락 사이에 남겼다. “이만큼 더 벌려야 해.” 여밈이 팔꿈치를 바깥으로 밀자 채온은 줄을 내려놓고 봉합대 가장자리를 받쳐 막이 한쪽으로 말리지 않게 했으며, 여밈은 그의 손이 자리를 잡은 뒤에야 뜯개를 다시 넣었다. 등지는 배분판에서 빈 구역의 공급 표시가 한 칸씩 낮아지는 것을 돌아보고, 넓게 퍼뜨렸던 빛을 두 사람의 손 사이로 좁혀 넣었다.

작업판 밖의 장밋빛 날개가 어두워지고, 좁은 백색광 안에서는 알집 표면의 작은 돌기와 여밈의 관절막을 지나는 가는 선들이 선명해졌다. 맞은편에서 타래가 여밈의 집 밑판 양쪽에 운반줄을 걸어 당기며 “시험 운반 걸었어요, 도착하면 문도 확인할게요”라고 외치자 여밈은 어깨를 돌리다가 팽팽해진 팔 앞에서 멈췄다. 여밈은 집 대신 채온이 다시 펼친 측정줄을 가리켰고, 타래는 가슴의 장부를 밀어 넣은 뒤 발사 고리에 잠금쇠를 끼워 검지를 그 바깥에 세웠다.

Scene 05· 첫 탈피 종이 울린 뒤, 삼 분의 이주 시간이 줄어드는 저녁

문턱에서 굴러 나온 것

문턱에서 굴러 나온 것
Place접힘골의 세땀 수선대, 인수망과 조명턱 아래 수로 사이
Time첫 탈피 종이 울린 뒤, 삼 분의 이주 시간이 줄어드는 저녁
Action타래는 인수망에 받은 여밈의 집 밑판을 기울여 문이 열리는지 확인한다. 문턱의 흠집을 넘어 낡은 찻잔이 굴러 나오자 타래는 다음 운반줄을 넘겨야 할 손으로 잔을 낚아챈다. 뒤따르던 두 빈집의 줄이 교차하면서 집들이 알집을 받친 배 쪽으로 쏠린다. 타래는 남은 인수망을 펼치고 여밈에게 무엇을 받을지 지정하라고 외친다.
Impact시험 운반은 알집의 받침까지 위협하는 충돌로 바뀐다. 여밈은 팔에 걸린 봉합대를 놓을 수 없는 채 자기 집과 알집을 같은 시야에 두게 된다. 타래의 손에는 찻잔이 남고, 마지막 인수망으로 무엇을 받을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는다.

타래가 세땀 수선대 맞은편 인수망의 조임줄을 당겨 여밈의 집을 받아 내고, 문 아래 걸린 망을 빼내려고 밑판 한쪽을 들어 올렸다. 여밈이 고개를 돌리자 채온은 봉합대 가장자리를 받쳐 왼팔의 관절막이 뒤틀리지 않게 했고, 기울어진 문짝 너머로 저녁빛이 고인 문턱의 흠집이 드러났다. 타래가 문을 밀어 여는 순간, 낮은 선반에서 미끄러진 낡은 찻잔이 흠집을 넘어 판 밖으로 굴렀다.

타래는 운반줄을 넘기려던 손을 뻗어 찻잔 손잡이를 낚아챘다. 뒤따르던 빈집 하나가 멈춘 줄을 타고 옆으로 돌았고, 그 처마에 걸린 두 번째 빈집의 줄이 첫 줄을 가로질러 팽팽해졌다. 등지는 조명턱에 발을 버티고 빈손으로 가까운 줄을 밀어냈지만, 두 집의 밑판은 장밋빛 날개를 가리며 알집 아래 배 쪽으로 기울었다. 여밈이 오른손을 뻗자 채온은 그 손 앞에 측정줄을 내려놓고 배의 앞줄을 붙들었다.

타래는 찻잔을 조끼 앞섶에 끼운 뒤 남은 발사 고리에서 인수망 하나를 펼쳤다. “집이에요, 알집이에요? 뭘 받을지 지정해 줘요!” 여밈의 집 문짝이 벌어진 채 두 빈집 쪽으로 끌려가고, 아래에서는 채온이 당긴 앞줄을 따라 배의 난간이 알집 밑으로 바짝 올라붙었다. 타래는 발사 고리 바깥에 검지를 세운 채 여밈을 향해 빈 망의 입구를 벌렸다.

Scene 06· 첫 탈피 종 이후, 날개가 맞물리기 전의 저녁

잔을 놓을 자리

잔을 놓을 자리
Place접힘골의 세땀 수선대, 알집 아래 수로
Time첫 탈피 종 이후, 날개가 맞물리기 전의 저녁
Action여밈은 자기 집을 향해 들던 손을 돌려 알집을 받으라고 명령한다. 타래가 주택 운반줄을 자르자 떨어지는 여밈의 집 처마가 채온의 배 난간을 부순다. 채온은 배의 키를 날개맥 사이에 끼워 받침을 지키고, 여밈은 타래가 건넨 찻잔을 작업판에 내려놓은 뒤 뜯개를 다시 잡는다.
Impact남은 인수망은 알집을 받는 데 쓰이고, 여밈의 집은 운반줄을 잃는다. 배의 난간까지 부서져 알집의 하중이 여밈의 관절막과 비틀린 배에 쏠린다. 채온과 여밈은 안전줄을 유지한 채 더 불안정해진 받침 위에서 봉합을 이어가야 한다.

여밈은 벌어진 집 문짝을 향해 오른손을 들다가, 알집 안에서 짧게 두 번 두드리는 소리가 나자 손끝을 아래로 꺾었다. “알집 받아요.” 타래는 빈 인수망을 조명턱 아래로 쏘아 보낸 뒤 교차한 주택 운반줄에 칼을 대고, 등지는 망의 입구에 걸리는 줄을 두 손으로 밀어냈다.

끊어진 줄이 진주색 날개를 후려치고 두 빈집이 수로 바깥으로 기우는 순간, 함께 끌려 내려간 여밈의 집 처마가 배 난간을 꺾어 부쉈다. 기운 문짝 너머로 흠집 난 문턱이 드러났다가 작업판 아래로 내려갔고, 벌어진 난간 사이로 알집을 받치던 봉합대가 밀려났다. 채온은 앞줄을 날개맥 고리에 한 번 더 감고 배 안으로 몸을 낮췄으며, 두 사람 사이의 안전줄이 당겨지자 여밈은 오른발을 판 끝에 걸어 버텼다. 채온이 키를 옆으로 꺾어 두 날개맥 사이에 밀어 넣자 배의 밑판이 비스듬히 들리며 알집을 떠받쳤고, 등지는 그 틈에 빛을 붙인 채 여밈의 팔꿈치 아래로 봉합대를 밀어 올렸다.

타래는 망의 조임줄을 잠근 뒤 낮은 안전줄 밑으로 팔을 뻗어 여밈의 공구띠에 찻잔 손잡이를 끼웠다. 여밈은 뜯개가 걸리는 찻잔을 꺼내 검게 닳은 작업판의 바늘 홈 옆에 내려놓고, 배 안에서 고개를 든 채온을 향해 빈손을 펴 보였다. 채온이 키를 누른 채 턱을 내리자 여밈은 다시 뜯개를 쥐었고, 찻잔 옆으로 드리운 왼팔 관절막의 그림자가 조금 더 길고 팽팽해졌다.

Chapter 03

Scene 07· 첫 탈피 종이 울린 뒤, 날개가 맞물리기 전

손목을 붙들어도 멎지 않는 무게

손목을 붙들어도 멎지 않는 무게
Place접힘골의 세땀 수선대, 전력 배분판 앞
Time첫 탈피 종이 울린 뒤, 날개가 맞물리기 전
Action등지가 깊은 봉합선 안으로 빛을 밀어 넣자 전력을 나눠 쓰던 운반 고리가 멎는다. 고요는 여밈의 오른손목을 붙들고 작업 종료 시간을 요구한다. 여밈은 봉합대가 허락하는 만큼 배분판 쪽으로 옮겨 왼팔의 관절막을 내밀고, 고요에게 그 하중을 직접 짚게 한다. 고요는 붙잡았던 손을 놓고 자기 거처의 회로 번호를 읽는다.
Impact고요가 여밈의 작업을 멈춰도 알집의 무게는 사라지지 않는다. 작업 시간의 확답 대신 다른 전력원을 내놓아야 하는 상황이 드러난다. 고요는 자신의 거처를 회수 대상으로 지목하지만, 저장막을 가져오거나 해체하는 일은 아직 시작하지 않는다.

등지가 조명턱에 무릎을 붙이고 깊어진 봉합선 안으로 빛을 밀어 넣자, 세땀 수선대 맞은편에서 타래가 당기던 운반 고리가 반 바퀴를 남겨 멎었다. 타래는 뒤로 쏠리는 인수망 줄을 발사 고리에 감아 잠갔고, 고요는 배분판의 공급 손잡이에서 손을 떼 여밈의 뜯개 든 오른손목을 붙들었다. 젖은 진주색 주름 안에 검은 봉합 구멍들이 드러나고, 그 아래 잿빛 물결에는 가늘어진 장밋빛 하늘이 비쳤다.

“얼마나 더 걸리나, 시간을 정하지 않으면 이주 장치는 승인 못 해.” 고요가 손목을 잡은 채 말하자 여밈은 뜯개 끝을 자기 몸 쪽으로 돌려 세우고, 허리에 연결된 안전줄을 먼저 내려다보았다. 여밈은 봉합대의 여유만큼 발을 옮겨 배분판 앞쪽으로 왼팔을 내밀었다. “손을 멈추면 이 무게도 멎어요?” 등지가 몸을 기울여 빛을 따라 보내자, 알집 쪽으로 당겨진 관절막의 가는 주름들이 고요의 손 아래에서 납작하게 펴졌다.

고요는 여밈의 손목을 놓고 왼팔 안쪽 막에 손가락 두 개를 댔지만, 막이 아래로 끌려가자 곧 손바닥 전체로 받쳤다. 여밈이 오른손으로 뜯개를 다시 고쳐 쥐는 동안 고요는 받쳤던 손을 천천히 빼고, 타래를 향해 자기 거처의 회로 번호를 한 자리씩 읽었다.

Scene 08· 첫 탈피 종 이후, 운반 고리가 멎어 있는 저녁

초승달처럼 닳은 손잡이

초승달처럼 닳은 손잡이
Place세땀 수선대의 배분판과 고요의 목소리 보관방
Time첫 탈피 종 이후, 운반 고리가 멎어 있는 저녁
Action고요는 타래에게 저장막 상자를 가져오게 하고, 자신의 거처를 영구 소등 목록 첫 줄에 적는다. 타래는 목소리 보관방에서 드러난 회수 단자가 받침에 부딪히지 않도록 상자를 돌려 싣는다. 다른 호출구의 공급까지 줄이자는 물음에 고요는 응답이 없는 회로들을 회수 대상에서 제외한다.
Impact고요의 거처와 저장막이 도시의 전력을 보충할 대상으로 지정된다. 응답 없는 구역에는 느린 공급이 유지되어 회수할 전력이 제한된다. 저장막 상자는 보관방에서 운반 받침으로 옮겨지지만, 아직 재생되거나 해체되지는 않는다.

고요는 배분판의 영구 소등 목록을 펼쳐 자기 거처의 회로 번호를 첫 줄에 눌러 쓰고, 타래에게 운반 받침을 밀어 보냈다. 타래가 받침을 끌고 거처 쪽 통로로 들어가자, 고요는 열린 보관방 문을 향해 “아래 상자, 단자가 받침 밖으로 나오게 실어”라고 덧붙였다. 문 안쪽에는 먹색 상자들이 어깨 하나 지날 틈만 남기고 쌓여 있었고, 저장막의 가느다란 청록빛이 닳은 모서리를 따라 끊어져 이어졌다.

타래는 아래 상자를 당겨 무릎으로 받친 뒤, 초승달처럼 닳은 재생 손잡이를 피해 운반띠를 둘렀다. “다른 빈 구역도 끊으면 안 돼요?”라는 물음에 고요는 배분판의 응답 없는 호출구들을 손가락으로 짚고, 그쪽으로 뻗은 회수용 연결쇠를 도로 밀어 넣었다. “빈 곳인지 아직 몰라.” 고요는 그 회로들의 공급 간격만 길게 벌려 놓았고, 배분판 곁으로 돌아온 여밈이 허리의 안전줄을 당겨 확인하는 동안에도 손을 거두지 않았다.

조명턱에서는 등지가 몸을 더 낮춰 여밈의 뜯개 끝을 따라 빛을 붙였고, 기울어진 진주색 날개 아래로 장밋빛 해역이 가느다랗게 남았다. 타래가 상자를 옆으로 돌려 받침에 눕히자 덮개 없는 회수 단자가 바깥으로 드러났으며, 운반띠 바로 위에는 손때 묻은 재생 손잡이가 남았다. 고요는 자기 거처의 번호 옆에 회수 확인점을 찍고, 응답 없는 호출구들의 느린 공급 손잡이 앞에 승인패를 가로놓았다.

Scene 09· 첫 탈피 종 이후, 날개가 맞물리기 직전의 저녁

듣지 않은 마지막 목소리

듣지 않은 마지막 목소리
Place접힘골의 세땀 수선대, 전력 배분판 곁
Time첫 탈피 종 이후, 날개가 맞물리기 직전의 저녁
Action타래가 안전줄 아래로 저장막 상자를 밀어 내려놓는다. 고요는 마지막 재생을 위해 손잡이에 손을 얹지만, 등지의 무릎이 꺾이자 손을 옮겨 회수 단자를 뽑는다. 타래에게 상자를 붙들게 하고 저장막을 해체해 배분판에 연결한 뒤, 빈 상자를 발로 밀어 통로를 비운다.
Impact백 년간 보관한 목소리는 재생되지 못한 채 사라진다. 회수한 전력으로 운반 고리에 진동이 돌아오고, 이주 장치를 가동할 동력이 확보된다. 알집은 아직 봉합선 안에 걸려 있지만, 타래는 다시 운반줄을 잡을 수 있게 된다.

타래가 낮게 교차한 안전줄을 어깨로 들어 올리며 저장막 상자를 배분판 곁에 내려놓자, 고요는 운반띠를 벗기고 초승달처럼 닳은 재생 손잡이를 감쌌다. 상자에서 새는 청록빛이 고요의 손가락 사이를 가르고, 작업판 틈으로 보이는 잿빛 해역에는 장밋빛 하늘이 좁게 남아 있었다. 여밈은 뜯개를 멈춘 채 고요의 손을 보다가 허리의 안전줄이 당겨지자 발을 옮겨 여유를 내주었고, 고요의 엄지는 손잡이를 누르지 못한 채 가장자리를 따라 미끄러졌다.

조명턱에서 등지의 무릎이 꺾여 몸이 내려앉자, 봉합 구멍을 비추던 백색광이 여밈의 팔을 가로질렀다. 여밈이 오른손으로 등지의 소매를 붙잡는 순간 고요는 재생 손잡이를 놓고 회수 단자를 뽑았다. “상자 잡아.” 타래가 양손으로 모서리를 누르자 고요는 덮개를 젖히고, 겹겹의 저장막을 고정한 띠를 끊어 회수 접점에 밀어 넣었다.

가느다란 청록빛이 막의 끝에서부터 꺼지고, 고요가 배분판의 연결쇠를 잠그자 멎어 있던 운반 고리가 짧게 떨렸다. 등지는 여밈의 소매를 놓아 주고 조명턱에 팔꿈치를 괴어 빛을 봉합선 안으로 돌렸으며, 타래는 식은 상자에서 손을 떼고 인수망 줄을 다시 잡았다. 고요는 열린 덮개를 닫지 않은 채 빈 상자를 발로 밀어냈고, 상자 위로 늘어졌던 안전줄이 비워진 통로에 내려앉았다.

Chapter 04

Scene 10· 첫 탈피 종으로부터 삼 분 뒤, 날개가 맞물리기 시작하는 저녁

움직이자 갇히는 것

움직이자 갇히는 것
Place접힘골의 세땀 수선대, 조명턱 아래 주름 입구
Time첫 탈피 종으로부터 삼 분 뒤, 날개가 맞물리기 시작하는 저녁
Action타래가 되살아난 운반 고리를 당겨 알집을 실은 인수망을 이동시킨다. 이주 장치가 움직이면서 아직 풀리지 않은 봉합대가 여밈의 왼팔을 주름 안으로 끌어당긴다. 채온이 여밈의 허리를 붙잡고 물러서지만, 두 사람의 안전줄이 좁아지는 날개맥 사이에 눌린다. 여밈은 채온이 꺼낸 칼을 보고 줄을 자를 것인지 묻는다.
Impact장치의 재가동이 탈출로를 여는 동시에 여밈을 붙잡은 봉합대를 팽팽하게 만든다. 채온이 힘으로 끌어내려는 시도는 실패하고, 두 사람은 같은 안전줄에 묶인 채 주름 입구에 갇힌다. 여밈의 질문으로 칼의 용도를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 두 사람 사이에 놓인다.

타래가 운반 고리를 끝까지 젖히자 세땀 수선대 아래의 인수망이 알집을 감싼 채 새 껍질 쪽으로 움직였고, 여밈의 왼팔에 걸린 봉합대가 주름 안으로 홱 당겨졌다. 작업판 틈에 남아 있던 장밋빛 해역이 맞물리는 진주색 날개에 가려지고, 멀리 열린 새 껍질의 금빛 가장자리만 가늘게 드러났다. 여밈은 오른손으로 바늘 홈을 움켜쥐었지만 손끝이 미끄러지면서 어깨까지 조명턱 아래로 끌려갔다.

채온이 여밈의 허리를 감싸 뒤로 당기자 두 사람 사이의 안전줄이 바닥에서 들려 올라갔다. 등지는 조명턱에 팔꿈치를 댄 채 빛을 여밈의 팔에서 채온의 발치로 돌렸고, 청록빛 발목 뒤에서 줄이 두 날개맥 사이에 납작하게 물리는 자리가 드러났다. 타래가 운반줄을 발사 고리에 한 바퀴 감아 제동을 걸었지만, 날개는 계속 좁혀져 채온의 뒤꿈치를 밀어냈다. 채온은 당기던 동작을 멈추고 여밈의 허리를 한 손으로 받친 채 다른 손으로 허리칼을 뽑았다.

여밈은 고개를 돌려 칼과 채온의 손바닥을 번갈아 보았다. “줄을 자를 거야?” 등지가 빛을 조금 낮추자 칼날 아래 눌린 줄의 올들이 드러났고, 채온은 칼을 쥔 손을 줄에 닿기 직전에서 멈췄다.

Scene 11· 날개가 맞물리기 시작한 직후, 안전줄이 날개맥 사이에 눌린 순간

풀고 싶다는 말

풀고 싶다는 말
Place접힘골의 세땀 수선대, 조명턱 아래 주름 입구
Time날개가 맞물리기 시작한 직후, 안전줄이 날개맥 사이에 눌린 순간
Action채온은 칼을 내려놓고 안전줄을 풀고 싶다고 말한다. 여밈은 매듭을 푸는 대신 눌린 줄을 옮길 방향을 알려 준다. 채온이 어깨로 주름 입구를 벌리고 등지가 그 어깨를 따라 빛을 돌리자, 타래는 두 발로 기울어진 작업판을 버틴다. 여밈은 드러난 은실 두 땀에 손가락을 걸어 봉합대를 뜯는다.
Impact채온은 줄에 손대기 전에 여밈에게 말하고, 여밈은 두 사람이 연결된 채 움직일 길을 지시한다. 봉합대가 뜯어지면서 알집을 붙잡던 마지막 봉합선이 열린다. 인수망이 알집을 당기기 시작하고, 남은 하중은 여밈의 왼팔 관절막으로 옮겨간다.

채온은 허리칼을 세땀 수선대의 깊은 바늘 홈에 눕히고, 여밈의 허리를 받친 손을 그대로 둔 채 말했다. “지금 풀고 싶어, 네 팔이 더 당겨져.” 여밈은 채온의 손바닥 대신 발목 뒤에 눌린 줄을 가리켰다. “매듭 말고 줄을 옮겨, 뒤꿈치 바깥으로 빼서 내 허리 아래로.”

채온이 무릎을 낮춰 줄을 옆으로 밀어 내고 청록빛 어깨를 주름 입구에 걸치자, 등지는 조명턱에 팔꿈치를 고정하고 그 어깨 위로 빛을 돌렸다. 비스듬히 누운 어깨는 같은 청록색을 지켰고, 그 너머 젖은 진주색 막에 가려져 있던 은실 끝 두 개가 백색광 속에 드러났다. 작업판 한쪽이 들리자 타래는 운반줄을 발사 고리에 감은 채 두 발을 판 가장자리에 대고 다리를 뻗어 눌렀다.

여밈은 오른손 검지와 중지를 은실 고리 하나씩에 넣고, 채온이 허리를 조금 들어 주는 틈에 손을 바깥으로 당겼다. 실이 봉합 구멍을 차례로 빠져나오며 알집 뒤편의 봉합대가 벌어졌고, 열린 틈 너머로 새 껍질의 가느다란 금빛 가장자리가 나타났다. 타래의 운반줄이 곧게 펴지면서 알집이 인수망 안으로 기울었고, 여밈의 왼팔 안쪽에 남아 있던 마지막 주름이 팽팽하게 펴졌다.

Scene 12· 날개가 맞물리기 시작한 직후, 마지막 인수망이 넘어가는 순간

접히지 않는 팔을 먼저

접히지 않는 팔을 먼저
Place세땀 수선대의 주름 입구에서 새 껍질의 오목한 가장자리까지
Time날개가 맞물리기 시작한 직후, 마지막 인수망이 넘어가는 순간
Action알집의 하중을 받은 여밈의 왼팔이 펴진 채 굳는다. 채온은 팔을 구부려 빼내려 하지 않고 자기 몸을 돌려, 여밈의 왼손부터 틈 밖으로 밀어 낸다. 등지는 흐려진 발광막 대신 낡은 작업등을 내밀고, 타래는 그 빛 아래 드러난 마지막 인수망 고리를 끌어당긴다. 네 사람과 알집이 새 껍질에 넘어오자 뒤쪽의 수선대가 뒤집힌다.
Impact여밈과 알집은 낡은 날개에서 벗어나지만, 여밈의 왼팔은 접히지 않는다. 여밈의 집과 채온의 배는 수선대와 함께 닫히는 날개 속으로 사라진다. 채온은 새 껍질에 도착한 뒤에도 여밈의 굳은 팔을 받쳐 든 채 놓지 않는다.

채온은 알집의 무게에 왼팔이 곧게 굳은 여밈을 허리째 받쳐 돌리고, 좁아지는 주름 밖으로 여밈의 손끝부터 밀어 냈다. 여밈이 팔꿈치를 당겼지만 투명한 관절막에는 주름 하나 돌아오지 않았고, 채온은 팔이 날개맥에 부딪히기 전에 자기 어깨를 그 사이에 넣었다. “팔은 그대로 둬.” 채온은 옆으로 누운 채 여밈의 허리를 밀었고, 두 사람의 안전줄이 젖은 진주색 모서리를 넘어갔다.

등지는 흐려진 발광막을 낮추고 허리에서 견습 때 쓰던 작업등을 뽑아, 찌그러진 갓을 틈 안으로 들이밀었다. 둥근 빛이 인수망 끝을 훑자 타래가 마지막 고리를 낚아채 새 껍질 쪽으로 끌어당겼고, 알집을 실은 망이 금빛 가장자리를 넘어 미끄러졌다. 여밈은 오른손으로 등지의 소매를 움켜쥐었으며, 타래는 등지의 허리띠까지 잡아당겨 네 사람을 우윳빛 오목한 바닥 위로 끌어냈다.

여밈이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세땀 수선대가 뒤집혀, 바늘 홈에 남은 칼과 잘린 은실들이 닫히는 날개 쪽으로 쏟아졌다. 그 아래 걸려 있던 여밈의 집이 밑판을 드러내며 돌아가고, 부서진 처마에 눌린 채온의 배도 함께 기울어 낡은 날개 속으로 사라졌다. 진주색 틈이 닫힌 뒤에도 채온은 여밈의 왼팔 아래 두 손을 받치고 있었고, 여밈은 등지의 소매를 놓아 그중 한 손목을 붙들었다.

Chapter 05

Scene 13· 이주 뒤 첫 수선을 시작한 날부터 다음 날 낮까지

팔 대신 작업판을 바꾸다

팔 대신 작업판을 바꾸다
Place새 도시의 작업장 문턱과 바깥 작업대
Time이주 뒤 첫 수선을 시작한 날부터 다음 날 낮까지
Action여밈은 문틀에 걸린 왼팔을 빼려다 채온의 도움을 밀어내고 바늘통을 쏟는다. 다음 날 채온이 한쪽을 낮춘 작업판을 가져오자, 여밈은 판을 문밖에 걸치게 하고 작업 위치를 직접 정한다. 채온이 주름을 벌리고 여밈이 바깥에서 실을 거는 방식으로 두 번 실패한 봉합을 다시 닫는다.
Impact왼팔을 접어 안으로 들어가던 수선 방식이 두 사람이 안팎에서 나누어 맡는 작업으로 바뀐다. 여밈은 채온이 만든 매듭을 풀어 검사하지 않고 다음 실을 건넨다. 채온은 도움을 거절당한 자리에서 물러나는 대신, 여밈이 작업을 지시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한다.

이주 뒤 첫 수선 날, 여밈은 새 작업장의 문틀에 걸린 왼팔을 빼려 몸을 틀다가 채온이 내민 손을 밀쳤고, 오른팔에 끼운 바늘통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우윳빛 바닥을 따라 구르는 바늘들이 열린 문밖의 금빛 홈에 하나씩 걸렸지만, 여밈이 다시 어깨를 돌려도 곧게 펴진 팔꿈치는 문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채온은 팔에 손을 대지 않고 문짝부터 끝까지 젖힌 뒤, 여밈이 문밖으로 빠져나오는 동안 발끝으로 바늘이 수로 쪽에 굴러가지 못하게 막았다.

다음 날 채온이 한쪽 다리를 짧게 고친 작업판을 가져오자, 여밈은 판을 들고 문 안으로 향하는 채온의 소매를 잡아 문턱 바깥을 가리켰다. “나는 여기서 실을 걸게. 안쪽 주름을 벌려 줘.” 채온이 판을 문턱에 걸쳐 낮은 쪽을 여밈에게 돌리자, 펴진 왼팔 아래로 봉합대가 지나갔고 새 껍질을 비쳐 온 금빛이 투명한 관절막의 팽팽한 가장자리를 드러냈다.

첫 봉합은 채온이 주름을 놓는 순간 오므라들어 여밈이 뜯었고, 두 번째는 낮은 판 끝에 실이 걸려 바늘을 거꾸로 빼야 했다. 세 번째에 여밈은 채온의 손등을 손가락으로 두 번 두드려 벌릴 폭을 정한 뒤, 채온이 그 틈을 붙드는 동안 바깥에서 마지막 구멍까지 실을 통과시켰다. 채온이 끝에 남긴 세 땀을 판 위에 펼치자 여밈의 오른손이 매듭 쪽으로 갔다가 멈췄고, 채온은 재촉하지 않은 채 벌린 주름을 그대로 받쳤다. 여밈은 뜯개 대신 새 실타래를 집어 채온의 손에 올려놓고, 다음 봉합대를 낮은 작업판 위로 끌어왔다.

Scene 14· 첫 공동 수선을 마친 뒤 며칠째, 점등식 전날 저녁

두 의자까지 닿는 빛

두 의자까지 닿는 빛
Place새 작업장 문턱과 새 껍질의 알집 자리
Time첫 공동 수선을 마친 뒤 며칠째, 점등식 전날 저녁
Action타래는 복구한 밑판을 내려놓고 장부에 수리 날짜를 적은 뒤 여밈에게 집을 잃게 한 일을 사과한다. 여밈은 용서한다는 말 대신 새 작업장의 문이 끝까지 열리는지 확인해 달라고 부탁한다. 이후 알집 자리에서 등지가 다른 등지기를 부르는 모습을 본 여밈은 점등식 명단에 등지의 이름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의자 두 개를 가져와 등지와 함께 앉는다.
Impact타래의 사과는 끝맺는 말 대신 계속 맡아야 할 복구 작업으로 이어진다. 여밈은 등지에게 더 밝게 비추라고 요구하거나 행사장으로 데려가는 대신, 작업등을 고정하고 곁에 앉을 자리를 만든다. 두 사람은 알집을 돌보는 일을 남겨 둔 채 함께 쉰다.

복구를 이어 가던 타래가 새 작업장 문턱 옆에 밑판을 내려놓고, 무릎에 펼친 장부의 집 그림 아래 수리 날짜를 적었다. “찻잔을 받느라 순서를 놓쳤어요. 집을 잃게 해서 죄송해요.” 여밈은 장부에 내밀어진 펜을 받지 않고 문짝을 가리켰다. “저 문부터 확인해 줘요. 끝까지 열어도 다시 닫히지 않게.”

그날 저녁, 새 껍질의 알집 자리에서 등지는 흐린 발광막을 알집 쪽으로 기울이다 말고 호출구를 당겨 다른 등지기를 불렀다. 여밈이 가져온 점등식 명단을 펴자 등지는 종이 끝을 눌러 바닥에 놓고, 빈손으로 작업등의 갓을 더 낮추었다. 여밈은 이름들이 끝나는 줄 아래를 짚었지만 등지는 “그건 거기 두고, 받침 좀 잡아 줘”라며 기울어진 등을 내밀었다.

여밈은 오른손으로 받침을 홈에 끼워 고정한 뒤 의자 두 개를 하나씩 끌어왔고, 등지는 두 번째 의자 다리가 알집 아래의 얕은 홈을 누르지 않도록 발끝으로 밀어 주었다. 여밈이 앉아 곧은 왼팔을 무릎 옆으로 내려놓자 등지도 갓을 붙들던 손을 떼고 곁에 앉았으며, 낮춘 둥근 빛이 우윳빛 바닥을 따라 두 사람의 신발까지 번졌다. 팽팽한 알집에 작은 돌기가 솟았다 가라앉자 등지가 몸을 숙였고 여밈도 나란히 고개를 낮췄다. 의자 사이의 홈에 모인 금빛 선이 떨리는 동안, 등지가 의자 밖으로 내놓았던 발을 빛 안으로 당겼다.

Scene 15· 며칠 뒤의 공동 기록 시간과 첫 봄비가 내리는 저녁

돌아올 때까지 열린 문

돌아올 때까지 열린 문
Place새 껍질의 알집 자리에서 봄비 내리는 귀환 수로와 새 작업장까지
Time며칠 뒤의 공동 기록 시간과 첫 봄비가 내리는 저녁
Action고요는 알집 곁에 빈 저장막 상자를 내려놓고, 타래가 제안한 새 기록을 시작한다. 여밈은 채온을 자신을 끌어낸 항해사로 소개하고, 빠진 등지의 이름을 보탠다. 첫 봄비가 내리는 저녁, 채온이 수리한 운반정으로 수로를 돌자고 청하자 여밈은 공구띠를 벗고 그의 손을 짚어 오른다. 두 사람은 안전줄에 두 손가락만큼 여유를 두고, 등지가 문을 열어 둔 작업장으로 돌아온다.
Impact사라진 목소리 대신 살아 있는 작업자들이 서로의 이름과 행동을 기록한다. 여밈은 채온에게 과거의 증명을 요구하지 않고, 지금 내민 손에 몸을 맡긴다. 한때 서로를 붙잡아 두던 안전줄은 두 사람이 나란히 움직일 여유를 갖는다.

며칠 뒤, 고요는 새 껍질의 알집 곁에 빈 저장막 상자를 내려놓고 그 뚜껑 위로 새 기록지를 펼쳤다. 고요가 타래의 제안대로 서로를 붙잡았던 사람을 말해 달라며 펜을 들자, 여밈은 무릎 위에 손바닥을 편 채온을 가리키며 “나를 끌어낸 항해사, 채온이에요”라고 말했다. 고요가 다음 줄로 넘어가려 하자 여밈은 종이 끝을 눌렀고, 등지는 낮춘 작업등 받침에서 손을 떼었다. 여밈이 “등지도 적어 주세요, 마지막 고리를 비췄어요”라고 보태는 동안, 알집에 솟은 작은 돌기 아래로 금빛 선이 떨렸고 고요는 펜을 앞줄로 돌렸다.

첫 봄비가 내리는 저녁, 채온은 수리한 작은 운반정을 작업장 앞에 붙이고 여밈에게 수로를 한 바퀴 돌겠느냐고 물었다. 여밈은 공구띠를 낮춘 작업판에 벗어 놓고, 채온이 펼친 손바닥을 돌려 살피는 대신 그 손을 짚어 뱃전에 발을 옮겼다. 채온이 곧게 펴진 왼팔 옆으로 자리를 비워 주며 안전줄의 여유를 묻자, 여밈은 오른손 두 손가락을 줄과 허리 사이에 넣어 보였다.

운반정이 굽이를 돌자 계류 말뚝의 비스듬한 소금 테가 아래부터 젖어 사라졌고, 빗방울에 끊긴 청록빛 반사가 두 사람의 나란한 자리 아래로 흘렀다. 돌아오는 굽이에서 여밈이 작업장 쪽으로 손을 들자, 문턱에 앉아 있던 등지는 작업등의 갓을 낮춰 물 위로 길게 뻗던 빛을 발판에 모았다. 채온이 배를 붙들고 여밈이 먼저 내린 뒤 계류줄을 받아 드는 동안에도, 등지는 문짝에 댄 발을 거두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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