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주은은 집들이에 오기 전 천문관에서 쓰던 해설 카드 뒷면에 인사말을 세 줄 적는다. 막상 옥상 탁자 끝에 앉자 옆자리 박태수는 인사보다 먼저 그녀의 흔들리는 의자를 살핀다. 주은이 새로 병의 물방울을 닦아 그의 앞에 놓는 동안, 태수는 접은 냅킨을 의자 다리 밑에 받친다. “별보다 의자를 먼저 보시네요.” 외워온 말 대신 튀어나온 농담에 태수가 웃는다. 주은은 주머니 속 카드를 더 깊이 밀어 넣는다. 그러나 친구들은 얼음통을 찾고 사진을 찍겠다며 둘 사이에 끼어든다. 주은은 귤껍질 두 조각을 병뚜껑 위에 세워 태수에게 보낸다. 바람에 귀 하나가 눕자 태수가 바로 세우고, 이번에는 손을 거두지 않은 채 주은을 본다.
밤 열 시, 음악이 꺼지고 집주인 친구가 승강기 문을 잡는다. 태수가 공구함을 들자 주은은 접으려던 빈 의자를 다시 펼친다. “같이 내려갈래요, 여기 조금 더 있을래요?” 친구들이 휴대전화를 들이밀지만 주은은 렌즈를 가린다. “잠깐, 아직 대답 못 들었어.” 태수는 공구함을 바닥에 놓고 앉는다. 승강기 문이 닫힌 뒤, 그는 물잔을 자기 앞으로 당기며 말한다. “더 있을게요. 고칠 게 있어서 말고요.” 인간으로 살아가는 두 구미호에게도 상대의 마음을 움직이는 술법은 없다. 주은은 준비했던 말을 버리고, 다음 토요일 자기 해설을 들으러 오겠느냐고 묻는다. 태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덧붙인다. “이번에는 공구함 없이요.”
둘은 함께 탁자를 닦고 의자를 접는다. 태수는 귤껍질 귀를 버리지 않고 깨끗한 냅킨에 싸서 가져간다. 다음 토요일, 천문관 입구에서 그가 꺼낸 것은 공구함이 아니라 납작해진 귤껍질이다. 주은은 웃다가 손으로 입을 가린다. 그런데 뒤이어 집주인 친구와 친구들이 나타난다. 첫 데이트라는 놀림이 부담스러웠던 태수가 집들이 때 무심코 함께 오라고 한 것이다. 주은은 그를 위해 비워둔 맨 앞자리 대신 일행 전체를 객석으로 안내한다. 해설이 시작되자 태수는 처음 듣는 목소리처럼 그녀를 올려다본다. 주은은 별자리 이름을 정확하게 짚으면서도 그가 앉은 쪽만 자꾸 건너뛴다.
상영이 끝나자 집주인 친구가 저녁을 먹으러 가자며 앞장선다. 태수는 따라 나서려다 출구에 선 주은에게 돌아온다. 주은은 다음 회차 안내판을 세우며 “다 같이 오는 줄은 몰랐어요”라고 말한다. 태수는 안내판의 헐거운 받침을 붙잡았다가 손을 놓는다. “둘이 보자고 하신 건지, 제가 잘못 알아들은 건지 겁나서요.” 주은은 닫으려던 객석 문을 잡고 그에게 부탁한다. “그럼 지금은 제대로 물어봐 주세요.” 태수가 저녁을 함께 먹자고 하자, 주은은 다음 해설까지 사십 분 남았다며 가까운 국숫집으로 그를 데려간다. 친구들에게 합류하지 않은 두 사람은 나란히 앉는 대신 작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앉는다. 주은은 국수를 식히며 처음으로 태수의 쉬는 날을 묻는다.
그 짧은 식사 뒤로 둘은 서로의 일터를 찾는다. 주은은 중고 가구점에서 팔리지 않은 의자에 앉아 해설 카드를 고치고, 태수는 천문관 마지막 회차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녀와 버스 정류장까지 걷는다. 태수는 주은이 오면 매번 가장 편한 의자를 내주지만, 정작 자기 것은 앉아보지도 않는다. 주은이 둘이 산책하자고 하면 배달할 가구를 먼저 보여주고, 가게 문을 닫기로 한 시간에도 손님의 작은 수리를 거절하지 못한다. 어느 날 주은은 식어버린 빵 봉투를 작업대에 놓고 먼저 일어난다. 태수가 서둘러 앞치마를 벗자 그녀는 멈춰 선다. “다 끝날 때까지 기다릴 수는 있어요. 그런데 오늘 나랑 만나기로 한 것도 할 일에 넣어주면 좋겠어요.” 태수는 붙잡으려고 뻗었던 손을 내리고, 미뤄둔 수리 의뢰표 옆에 다음 토요일 휴무 팻말을 건다.
그날 저녁, 태수는 집들이에서 빌려 썼던 의자들을 돌려주러 옥상에 간다. 집주인 친구는 주은도 온다며 의자 두 개만 남겨달라고 하지만, 태수는 먼저 고개를 젓는다. 친구가 마련해 준 자리 뒤에 숨고 싶지 않다. 그는 주은에게 직접 옥상에서 만나자고 청하고, 친구들에게는 이번에는 둘만 있겠다고 말한다. 약속 시간보다 일찍 도착한 주은은 출입구에서 의자 두 개를 한꺼번에 들고 나오는 태수를 만난다. 그녀가 하나를 잡자 태수는 늘 하던 대로 괜찮다며 힘을 주다가, 손잡이를 그녀 쪽으로 돌려준다. 둘은 각자 의자 하나씩을 들고 첫날 앉았던 탁자 끝으로 간다.
주은이 의자를 펼치자 다리 하나가 바닥에서 조금 뜬다. 태수의 손이 셔츠 주머니로 올라간다. 그러나 오늘 그 안에는 목수 연필도 도구도 없다. 주은은 의자를 들어 평평한 자리로 옮기고, 태수의 의자를 자기 쪽으로 당긴다. “이러면 되네요.” 태수는 빈손을 무릎에 얹고 앉는다. 잠시 뒤 친구들이 아래층에서 저녁을 먹고 가라고 부르자 그가 난간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주은은 붙잡지 않는다. 태수는 직접 아래를 향해 대답한다. “우리는 조금 있다 갈게.” 돌아앉은 그는 주은이 내민 손을 잡는다. “오늘은 기다리게 안 하려고 일찍 왔어요.”
탁자에는 집주인 친구가 두고 간 새로 한 병과 물잔 두 개가 놓여 있다. 주은이 새 귤을 까서 귀를 만들려 하자, 태수가 첫날의 병뚜껑을 꺼낸다. 말라서 구부러진 귀 한쪽에는 작은 종이 받침이 붙어 있다. 주은은 그것을 만져보다가 웃는다. “이건 결국 고쳤네요.” 태수도 웃으며 병뚜껑을 두 사람 사이에 놓는다. “버리기는 싫어서요.” 열 시가 되어 아래층 음악이 잦아들자 주은은 다음에는 자기 쉬는 날을 통째로 비워두겠다고 말한다. 태수는 어디에 갈지부터 묻지 않고, 잡은 손을 조금 고쳐 쥔다. 돌아갈 때 두 사람은 의자를 하나씩 접어 출입구에 세운다. 병뚜껑은 이번에 주은의 주머니로 들어간다. 태수가 계단 문을 열고 기다리자 주은은 그의 빈손을 다시 잡는다.
Comments
Comments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