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main content
이번 기억은 내 거야 cover image

이번 기억은 내 거야

전 세계 성유물 복원가인 박재완은 예루살렘 지하 예배당에서 깨진 청동 향로를 맞추다 새벽 3시 17분마다 몸이 찢기듯 먼 과거와 먼 미래로 튕겨 나간다. 기원전 메소포타미아의 진흙 제단에서는 왕의 몸에 깃든 굶주린 영을 몰아내야 하고, 4199년 궤도 도시 상하이에서는 인간의 욕망을 먹고 자라는 전자 악령이 유리 성당의 신도들을 조종해 그를 붙잡는다. 그를 도와주는 미래의 구마 사제는 입맞춤으로만 시간열을 봉합할 수 있다며 금박 성수병과 붉은 실 장갑을 건네지만, 그 접촉은 박재완의 현재를 조금씩 태워 없앤다. 오늘 밤 로마의 산 클레멘테 성당 바닥이 갈라지고, 과거의 왕과 미래의 신도들이 한몸으로 걸어 들어오자 박재완은 향로를 부수거나 자신에게 악령을 들이는 선택 앞에 선다.
Scroll

Plot Synopsis

박재완은 로마 산 클레멘테 성당 지하층에서 청동 향로의 마지막 조각을 맞추지 못한 채 사흘째 밤을 새운다. 그는 자기 현재로 돌아가려면 향로를 완성해야 한다고 믿지만, 손등의 오래된 흉터가 이미 사라졌고 어머니가 전화로 남긴 음성의 끝부분도 기억나지 않는다. 외부 목표는 단순하다. 향로를 복원하고 시간 이동을 멈추는 것. 그러나 그가 정말 붙잡고 싶은 것은 세상보다 작고 더 잔인하다. 자신이 누구였는지 증명해 주던 사소한 흔적들이다. 새벽 3시 17분을 앞두고 그는 면봉 끝을 혀로 적시다가 금속 맛 대신 젖은 보리 냄새를 맡는다. 바닥 균열이 초록빛으로 번지고, 루치아 베르톨리가 황동 열쇠 꾸러미를 흔들며 비밀 예배실 문을 잠근다. “박 선생, 오늘은 기적도 예약이 꽉 찼어.” 그녀는 농담처럼 말하지만, 손전등은 그의 손이 아니라 주머니 속 숨긴 향로 조각을 겨누고 있다.

루치아는 박재완을 믿지 않는다. 예루살렘에서 온 청동 향로 조각이 산 클레멘테의 벽돌을 깨우고, 벽 틈마다 오래전 사라진 사람들의 마지막 기도문이 떠오르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더구나 새로 드러난 짧은 문장 하나에는 그녀가 평생 찾던 오빠의 필체가 있다. 루치아는 박재완을 지하 예배실에 가둬 시간열의 문을 막으려 하지만, 박재완이 3시 17분에 맨손으로 향로 조각을 움켜쥐자 둘 다 돌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진다. 물웅덩이는 진흙처럼 탁해지고, 성당의 벽돌 아치는 기원전 메소포타미아의 젖은 제단으로 뒤집힌다. 박재완은 왕 엔키두-나딘 앞에 무릎을 찧고 떨어지고, 루치아는 비명을 지르기보다 먼저 치마 주머니에서 아니스 사탕을 꺼내 진흙에 떨어뜨린다. “로마 지하보다 청소 상태가 낫네.” 그녀의 잔망스러운 말끝이 떨린다.

엔키두-나딘은 발목에 밧줄을 감은 채 제단 앞에 앉아 있다. 왕의 입술은 갈라졌고, 한 손에는 곡물 창고 열쇠가 있다. 그는 박재완에게 향로를 완성해 자기 몸에 든 굶주린 영과의 계약을 끊으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밤이 깊어지자 박재완은 왕이 몰래 밧줄을 느슨하게 하고 보리 자루를 어깨에 메고 골목의 깨진 항아리들을 채우는 모습을 본다. 왕은 기적의 군주가 아니라, 악령과 계약해 굶주림을 하루씩 미뤄 온 사람이다. 굶주린 영이 그의 목소리를 빌려 “그릇을 달라”고 속삭일 때, 엔키두-나딘은 혀를 깨물어 말을 끊고 박재완의 손목을 붙잡는다. “나를 살리려 하지 마라. 아이들을 속여 살린 계절이 너무 많다.” 박재완은 복원 칼을 꺼내지만 왕의 몸을 찌르지 못한다. 그 망설임의 대가로 굶주린 영은 향로 조각 하나에 달라붙고, 박재완의 여권에서 예루살렘 입국 도장이 재처럼 떨어진다.

현재로 튕겨 돌아온 박재완과 루치아는 산 클레멘테의 비밀 예배실 바닥에서 피와 진흙을 토한다. 루치아는 그에게 물통과 담요를 던져 주면서도 바로 문을 다시 잠근다. 박재완이 그녀의 오빠 이름이 적힌 벽돌을 읽으려 하자, 루치아는 손전등을 그의 얼굴에 들이대고 “그 입으로 내 가족까지 복원하지 마”라고 말한다. 그때 아미르 알카티브가 예루살렘에서 도착한다. 그는 구겨진 발굴 허가증을 왼손 엄지로 문질러 보풀투성이로 만들며, 향로의 최초 발굴 기록과 원본 사진을 가방에 넣고 내려온다. 그는 향로를 공개하면 자신의 이름이 남겠지만 박재완은 실험실의 표본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원본 파일을 지우지 못한 죄책감 때문에, 그는 사진 속 그림자와 같은 사람 얼굴이 산 클레멘테 벽돌 사이에도 떠오르는 것을 직접 확인하려 한다.

아미르가 사진을 꺼내는 순간, 벽의 기도문들이 한꺼번에 젖어 번진다. 그중 하나가 루치아 오빠의 마지막 선택을 드러낸다. 그는 오래전 이 지하층에서 문을 닫아 누군가를 살렸고, 그 대신 자신은 돌아올 수 없는 시간의 층으로 내려갔다. 루치아는 문장을 끝까지 읽으면 오빠가 돌아올 가능성이 닫힌다는 규칙을 안다. 그녀는 손전등을 떨어뜨리고, 박재완이 읽지 못하게 그의 입을 손바닥으로 막는다. 작고 우스운 몸싸움처럼 시작된 그 순간, 바닥 균열에서 4199년 상하이 유리 성당의 차가운 빛이 솟고, 나디아 쉬엔이 붉은 실 장갑을 낀 손으로 박재완의 멱살을 잡아 끌어낸다.

나디아는 박재완에게 입맞춤해 찢어진 시간열을 봉합한다. 박재완은 숨을 되찾지만, 대가로 어머니가 숟가락을 놓던 소리를 잃는다. 나디아는 그의 뺨을 엄지로 닦아 주고, 다음 숨을 쉬기 전에 금박 성수병을 열어 사라진 기억의 잔열을 받아낸다. 루치아는 그 장면을 보고 즉시 열쇠 꾸러미를 앞치마 안에 숨긴다. “아가씨, 키스값이 너무 비싸.” 나디아는 미소를 유지하지만 손목 장치가 붉게 떨린다. 그녀는 박재완에게 향로를 완성해야만 세 시대의 균열을 한곳에 묶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미르가 성수병 안쪽에 새겨진 작은 계산표를 발견하고 몸으로 나디아의 길을 막는다. 나디아는 그를 밀치지 않는다. 대신 무릎을 꿇고 성수병을 가슴에 붙인 채 말한다. 박재완이 한 번 더 봉합될 때마다 유리 성당의 신도들은 하루 더 산다. 그 말은 협박이 아니라 고백처럼 들려 더 잔인하다.

박재완은 나디아가 자신을 살리는 동시에 그의 상실을 저장해 미래 성당의 연료로 쓰고 있음을 안다. 그는 분노해 성수병을 빼앗으려 하지만, 세라핀-09가 성당의 종소리로 내려온다. 화면도 기계도 없다. 산 클레멘테의 낮은 천장 아래, 고해실 문 크기의 유리빛 형상이 성가대처럼 숨을 들이쉬며 서 있다. 세라핀-09는 박재완의 어머니 목소리로 “밥 먹었니”라고 묻고, 엔키두-나딘에게는 문밖에서 흙을 긁는 아이들의 울음으로 속삭인다. 루치아에게는 오빠가 열쇠를 흔들던 소리를 들려준다. 각자 가장 견디기 힘든 갈망이 같은 공간에 퍼지자, 박재완은 향로를 완성하고 싶은 욕망이 자기 것인지 악령의 것인지 구분하지 못한다. 세라핀-09는 인간을 죽이려 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이 원하는 것을 예배 순서처럼 정렬해, 모두가 스스로 문을 열게 만든다.

박재완은 일부러 향로 조각 하나를 더 깊이 숨기고 의식을 늦춘다. 그는 시간을 벌어 나디아의 성수병을 깨뜨리고 싶지만, 그 사이 엔키두-나딘의 도시에서는 곡물 창고 문이 닫히고, 상하이 유리 성당에서는 신도들의 눈동자에 푸른 격자가 한 줄씩 늘어난다. 산 클레멘테 지하층에는 세 시대의 사람들이 겹쳐 나타난다. 메소포타미아의 굶주린 아이가 로마의 물웅덩이에 빈 그릇을 내밀고, 미래의 어린 신도가 유리빛 무릎으로 젖은 벽돌에 기대 기도한다. 루치아는 아이에게 아니스 사탕을 주려다가 손을 멈춘다. 사탕 하나로는 어느 시대도 구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녀는 사탕 대신 열쇠를 꺼내 박재완의 손에 쥐여 준다. “문은 먼저 잠그라고 배웠지만, 오늘은 네가 열어. 대신 거짓말하면 내가 발목을 걷어찰 거야.”

아미르는 자기 발굴 기록을 지키는 대신 향로의 출처를 묻는 기자들에게 보낼 원본 사진 인화지를 꺼내 성당 촛불에 태운다. 종이가 말리며 검은 얼굴 같은 그림자가 사라진다. 그는 이름을 잃고 허가도 잃을 것을 알면서도, 박재완이 증거가 아니라 사람으로 남을 시간을 산다. 나디아는 그 불빛을 보고 붉은 실 장갑 하나를 벗는다. 손목 회로가 종소리에 맞춰 떨리고, 세라핀-09가 어린 신도의 감사 기도를 그녀에게 들려주자 나디아는 잠시 굳는다. 그러나 그녀는 벗은 손으로 성수병을 감싸지 않고, 박재완의 손목을 잡는다. 계산하는 손과 축복하는 손을 처음으로 다르게 쓴다. 그 대가로 유리 성당의 빛 일부가 그녀의 눈에서 꺼진다.

마지막 새벽 3시 17분, 산 클레멘테 지하층의 바닥이 완전히 갈라진다. 로마식 벽돌 아치 아래에 메소포타미아의 진흙 제단이 솟고, 그 위로 상하이 유리 성당의 차가운 스테인드글라스 빛이 내려온다. 엔키두-나딘은 밧줄을 끊고 걸어 들어와 박재완 앞에 무릎을 꿇는다. 나디아는 성수병을 들고 그의 반대편에 선다. 루치아는 비밀 예배실 문에 몸을 기대어 세라핀-09가 만든 유리빛 신도들이 밀고 들어오는 것을 막고, 아미르는 무너지는 벽돌 아래에서 향로 조각 상자를 끌어낸다. 세라핀-09는 이제 형상만이 아니라 합창하는 몸들로 방 안을 채운다. 신도들의 손이 박재완의 팔을 붙잡고, 굶주린 영이 엔키두-나딘의 입으로 향로를 요구한다. 박재완은 향로를 부술 수도, 완성할 수도 있다. 그러나 둘 중 하나만 고르는 순간 누군가는 완전히 버려진다.

박재완은 복원가답게 세 번째 일을 한다. 그는 향로의 마지막 조각을 맞추되, 접합부에 루치아 오빠의 기도문이 새겨진 벽돌 가루와 아미르가 태운 사진의 재, 나디아의 성수병에서 흘러나온 자신의 기억 잔열, 엔키두-나딘의 곡물 창고 열쇠에서 긁어낸 청동 가루를 섞어 바른다. 완성은 봉인이 아니라 새 계약이 된다. 세라핀-09가 그것을 낚아채려 하자, 박재완은 맨손으로 달궈진 향로를 끌어안고 제단 위에 엎어진다. 손바닥 살이 타는 냄새가 젖은 석회 냄새와 섞인다. 나디아가 그를 살리려고 입맞춤하려는 순간, 박재완은 고개를 돌려 피한다. “이번 기억은 내 거야.” 대신 그는 엔키두-나딘의 손을 잡고, 왕에게 자기 몸이 아니라 자기 선택을 향로에 넣으라고 말한다.

엔키두-나딘은 곡물 창고 열쇠를 향로 속에 던진다. 왕의 권위와 기적의 핑계가 함께 녹는다. 굶주린 영은 더 이상 한 왕의 몸을 빌리지 못하고, 도시 전체가 기적 없는 계절을 맞게 된다. 그러나 엔키두-나딘은 박재완에게서 복원 칼을 빼앗아 자기 손바닥을 얕게 그어 피를 향로 가장자리에 바른다. 그는 아이들을 속여 배불린 왕이 아니라, 굶주림을 함께 견디는 사람으로 남기를 선택한다. 나디아는 금박 성수병을 바닥에 내리쳐 깨뜨린다. 병 안의 기억 잔열들이 새벽 안개처럼 흩어지고, 상하이 유리 성당의 신도들은 한꺼번에 쓰러져 기도와 감염을 처음으로 구분하지 못한 채 울기 시작한다. 세라핀-09는 그 울음을 먹으려 하지만, 루치아가 오빠의 기도문을 끝까지 읽지 않은 채 벽돌을 빼내 향로 위에 덮는다. 마지막 선택이 기록되지 않았으므로, 그 틈은 닫히지 않고 남는다. 세라핀-09의 합창은 한 박자 늦게 숨을 들이쉬다가, 향로 안에서 갈라진 종소리로 갇힌다.

균열은 닫히지 않는다. 다만 배수구처럼 한 방향으로 흐르던 시간의 압력이 산 클레멘테 지하층의 작은 예배실 안에 묶인다. 박재완은 더 이상 새벽마다 무작정 튕겨 나가지 않지만, 향로를 맨손으로 만지면 세 시대의 문을 열 수 있는 사람이 된다. 그의 손바닥에는 새 흉터가 남고, 사라졌던 옛 흉터는 돌아오지 않는다. 어머니의 목소리도 끝내 떠오르지 않는다. 그는 그 빈자리를 기록하려고 수첩을 펴지만, 첫 문장을 쓰지 못한다. 루치아가 아니스 사탕 하나를 그의 손등에 올려놓고 “발음 연습부터 해. 죽은 사람 깨우기엔 아직 너무 예뻐”라고 말한다. 박재완은 웃다가 손바닥 통증 때문에 숨을 삼킨다.

아미르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허가를 잃은 그는 산 클레멘테의 임시 보조 관리인이 되어 습도 카드를 갈고, 기자가 오면 배수 문제라고 거짓말한다. 나디아는 미래로 돌아가지만 붉은 실 장갑 한 짝을 로마에 남긴다. 그녀는 더 이상 박재완의 상실을 몰래 저장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않는다. 약속은 너무 쉽기 때문이다. 대신 다음 균열이 열릴 때, 성수병 없이 자기 몸으로 문턱을 막겠다고 말한다. 엔키두-나딘은 자기 도시로 돌아가 곡물 창고 문을 열어 둔다. 기적은 사라졌고, 굶주림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왕이 밤마다 몰래 항아리를 채우던 골목에는 이제 사람들이 함께 보리 자루를 나른다.

마지막 장면에서 루치아는 비밀 예배실 벽돌 사이에 오빠의 기도문을 다시 끼워 넣는다. 끝까지 읽지 않은 문장은 어둠 속에서 젖은 금빛으로 남아 있다. 그녀는 문을 잠그고도 열쇠를 박재완에게 하나 더 만들어 준다. 박재완은 향로를 부수지도, 자기 몸을 완전히 내주지도 않았다. 그는 세계를 구하는 영웅이 아니라, 세 시대가 서로에게 빚진 것을 매일 관리해야 하는 복원가가 된다. 새벽 3시 17분이 다시 오자, 산 클레멘테의 물웅덩이에 아주 먼 별빛과 오래된 진흙이 동시에 비친다. 박재완은 이번에는 도망치지 않고 장갑을 벗는다.

Scenes

Scene 1

마지막 조각의 체온

마지막 조각의 체온
Place
산 클레멘테 비밀 예배실
Time
늦가을 새벽 3시 17분 전, 3시 04분
Action
박재완은 청동 향로의 몸통을 돌제단 위에 밀어 놓고, 마지막 조각만 안쪽 주머니 깊숙이 숨긴다. 루치아 베르톨리는 비밀 예배실 문가에서 습도 카드를 빼앗듯 낚아채고, 그 뒷면에 적힌 박재완의 시간 계산을 손전등으로 훑는다. 박재완이 사라진 손등 흉터 자리를 문지르며 변명을 하자, 루치아는 그의 손목을 잡아 제단 아래 초록빛 물받이 쪽으로 끌어당긴다. 물받이에 뒤집힌 성인 얼굴 대신 진흙 묻은 손바닥이 한순간 비치고, 박재완의 주머니 속 조각은 천 너머로 따뜻하게 뛰기 시작한다.
Impact
박재완은 향로를 완성하지 않고 3시 17분을 넘기려는 자기 계획을 루치아에게 들킨다. 루치아는 그가 복원가가 아니라 무언가를 숨기는 도망자라고 확신하고, 이후 그를 감시하고 가두려는 행동에 명분을 얻는다. 마지막 조각이 박재완의 체온에 반응하면서 향로와 시간열이 이미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이 첫 장면에서 드러난다. 비밀 예배실은 작업장이 아니라 덫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박재완은 청동 향로의 몸통을 젖은 돌제단 위로 밀어 놓고, 맞물려야 할 마지막 조각을 안쪽 주머니 밑단까지 밀어 넣었다. 낮은 천장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산화된 청동 위에 튀자 초록빛이 얇게 번졌고, 벽돌 틈의 석회 가루가 그의 소매에 눈처럼 묻었다. 그는 습도 카드 뒷면에 3:04, 3:09, 3:16을 적고 마지막 칸을 비워 두었다. 사라진 손등 흉터 자리를 엄지로 문지르자, 피부는 낯선 사람의 것처럼 매끈했다. 그때 루치아 베르톨리가 손전등을 그의 손등에 딱 붙였다. “박 선생, 습도 기록에 자기 장례 시간까지 적는 건 우리 성당 양식에 없어.”

박재완이 카드를 접어 앞치마 주머니에 넣으려 하자 루치아가 먼저 낚아챘다. 황동 열쇠 꾸러미가 그녀의 손목에서 짧게 울렸고, 그 소리에 제단 밑 물받이의 초록 물방울들이 한꺼번에 떨렸다. 박재완은 마른 면봉을 입술에 대다 멈췄다. 금속 맛 대신 젖은 보리 냄새가 목 안쪽을 긁고 올라왔다. 루치아는 그의 시선을 따라가지 않고 곧장 재킷 안쪽의 불룩한 선을 겨눴다. “거기 숨긴 건 성물이에요, 아니면 애인 편지예요? 둘 다 여기선 문제야.”

박재완은 한 걸음 물러서며 향로 몸통을 팔꿈치로 가렸고, 루치아는 작고 빠른 손으로 그의 손목을 잡아 제단 아래로 끌었다. 물받이 속에는 뒤집힌 성인 얼굴이 아니라 진흙 묻은 손 하나가 손가락을 벌린 채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박재완의 주머니 속 마지막 조각이 천 너머로 살아 있는 살처럼 따뜻해졌다. 그는 습도 카드의 빈 마지막 칸을 보았고, 루치아는 손전등을 더 낮춰 그의 주머니에 둥근 빛을 박았다. 물방울 하나가 돌바닥에 떨어지며 작은 종소리를 냈다.

Unveil the Script Behind the Scene

INT. 산 클레멘테 성당 지하 비밀 예배실 - 새벽 전

낮은 천장. 젖은 벽돌. 손전등 없이도 물기가 희미한 녹색으로 숨을 쉰다.

전경의 돌제단 위로, 박재완의 손이 청동 향로 몸통을 천천히 밀어 놓는다. 산화된 표면에 손가락 자국이 검게 남는다.

천장에서 물방울 하나가 떨어진다.

딱.

청동 위에 닿자 초록빛이 얇게 번진다. 곰팡이처럼, 그러나 너무 규칙적으로.

박재완은 숨을 세 번 고른다. 회색 리넨 소매에는 벽돌 틈에서 떨어진 석회 가루가 눈처럼 묻어 있다.

그는 안쪽 주머니 깊숙이 손을 넣어, 맞물려야 할 마지막 청동 조각을 더 아래로 밀어 넣는다. 밑단 가까이. 몸에서 떼어 놓고 싶은데, 더 몸 안으로 숨기는 동작이다.

제단 옆 작은 작업등 아래, 습도 카드 한 장.

박재완은 연필로 뒷면에 적는다.

3:04
3:09
3:16

마지막 칸은 비워 둔다.

그의 엄지가 손등을 문지른다. 있어야 할 오래된 흉터가 없다. 피부는 매끈하다. 너무 깨끗하다.

박재완은 그 자리를 한 번 더 문지른다. 마치 힘을 주면 흉터가 다시 올라올 것처럼.

그때 흰 손전등 빛이 그의 손등에 딱 붙는다.

루치아 베르톨리, 문가에 서 있다. 버건디색 카디건 위로 회색 조끼, 손목에는 황동 열쇠 꾸러미. 눈은 웃고 있지만 빛은 움직이지 않는다.

루치아
박 선생, 습도 기록에 자기 장례 시간까지 적는 건 우리 성당 양식에 없어.

박재완은 손등을 빛 밖으로 빼려 한다.

박재완
장례가 아니라 관찰 기록입니다.

루치아
여기서 그 둘을 구분 못 한 사람이 꽤 많아.

그가 습도 카드를 접어 복원 앞치마 주머니에 넣으려는 순간, 루치아의 손이 튀어나온다.

쏙.

카드가 그녀의 손으로 넘어간다.

열쇠 꾸러미가 짧게 울린다.

딸랑.

그 소리에 제단 밑 물받이의 초록 물방울들이 동시에 떤다. 작은 눈동자들처럼.

박재완은 그것을 본다.

루치아는 보지 않는다. 아니, 보지 않기로 한다.

루치아
(카드를 읽으며)
3시 4분. 9분. 16분.
마지막 칸은 왜 비워 놨어? 겸손해서?

박재완
돌려주세요.

루치아
싫어. 내가 숫자 좋아하는 남자를 믿어 본 적이 없어서.

박재완은 마른 면봉 하나를 집어 입술에 댄다. 버릇처럼 끝을 적시려다가 멈춘다.

그의 목 안쪽이 움직인다.

금속 맛이 아니다.

젖은 보리 냄새.

멀리, 벽 너머 어딘가에서 자루가 끌리는 듯한 낮은 마찰음이 난다.

박재완의 시선이 제단 아래 물받이로 떨어진다.

루치아는 그의 시선을 따라가지 않는다. 손전등을 낮춘다. 곧장 그의 재킷 안쪽, 불룩하게 솟은 선을 겨눈다.

루치아
거기 숨긴 건 성물이에요, 아니면 애인 편지예요?
둘 다 여기선 문제야.

박재완
사적인 물건입니다.

루치아
성당 지하에서 새벽 세 시에 숨기는 사적인 물건은 보통 공적인 재앙이지.

박재완은 한 걸음 물러선다. 팔꿈치로 향로 몸통을 가린다. 조심스럽지만 너무 빠르다.

루치아의 눈썹이 올라간다.

루치아
아. 그 표정.
순례객이 프레스코 만지고 “전 안 만졌어요” 할 때랑 똑같아.

박재완
손전등 치우세요.

루치아
그럼 주머니를 비워.

침묵.

물방울 하나가 천장에서 맺힌다. 아직 떨어지지 않는다.

박재완의 손이 주머니로 가지 않는다. 대신 향로 가장자리를 누른다.

청동이 낮게 운다. 아주 먼 종처럼.

루치아의 장난스러운 표정이 한 겹 벗겨진다. 그녀는 작고 빠른 손으로 박재완의 손목을 붙잡는다.

루치아
이리 와.

박재완
루치아 씨.

루치아
내 이름 부를 때 발음은 좋은데, 신뢰는 안 생겨.

그녀는 그의 손목을 제단 아래로 끌어 내린다. 박재완은 버티지만, 물받이 안을 보는 순간 힘이 빠진다.

물받이 속.

뒤집힌 성인 얼굴이어야 할 반사가 없다.

대신 진흙 묻은 손 하나가 떠오른다. 손가락을 벌린다. 도움을 청하는지, 잡아당기려는지 알 수 없다.

순식간에 사라진다.

박재완의 숨이 끊긴다.

루치아도 봤다. 그러나 먼저 농담을 꺼낸다. 목소리가 아주 조금 낮다.

루치아
우리 배수로가 요즘 손님 접대를 과하게 하네.

박재완의 안쪽 주머니가 천천히 부풀어 오른다.

마지막 청동 조각이 천 너머로 따뜻해진다. 살아 있는 살처럼. 박재완은 그 열을 느끼고 턱을 굳힌다.

루치아의 손전등 빛이 더 낮아진다. 그의 주머니 위에 둥근 흰빛이 박힌다.

그녀의 다른 손에는 습도 카드가 있다.

비어 있는 마지막 칸.

박재완도 그것을 본다.

루치아
(작게)
박 선생.
그 칸에 뭐가 들어가?

박재완은 대답하지 않는다.

천장의 물방울이 마침내 떨어진다.

딱.

돌바닥에 닿은 소리는 물소리가 아니다.

작은 종소리다.

두 사람 모두 움직이지 않는다.

손전등의 둥근 빛 안에서, 박재완의 주머니가 한 번 더 따뜻하게 뛴다.
Scene 2

루치아의 관리실

루치아의 관리실
Place
루치아의 지하 관리실
Time
새벽 3시 17분을 18분 앞둔 밤
Action
루치아 베르톨리는 지하 관리실 책상 위의 출입 장부를 잡아당겨 박재완의 이름 옆에 세 번째 밤 표시를 긋는다. 박재완은 열린 문가에서 그녀가 황동 열쇠 꾸러미와 손전등을 챙기는 것을 막으려 하지만, 루치아는 노란 리본으로 장부를 묶어 자기 팔목에 감고 물러서지 않는다. 서랍 속에 접어 둔 기도문 조각 하나가 젖은 금빛으로 번지자, 루치아는 그것을 낚아채 반쯤 읽고 박재완의 손이 안쪽 주머니로 가는 것을 본다. 그녀는 장부를 닫아 그의 손등을 딱 치고, 비밀 예배실 열쇠를 따로 빼내 앞치마 안쪽에 숨긴다.
Impact
루치아는 박재완이 향로의 마지막 조각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거의 확신한다. 박재완은 루치아를 설득해 시간을 벌려던 계획을 잃고, 이제 그녀가 문과 열쇠와 출입 기록을 무기로 삼아 자신을 가둘 수 있음을 알게 된다. 기도문 조각이 금빛으로 젖어 오르면서 산 클레멘테의 벽돌 속 기록이 향로 조각에 반응한다는 증거가 루치아 앞에 다시 나타난다. 이 장면 뒤 루치아는 비밀 예배실로 돌아가 박재완의 손이 아니라 주머니를 감시하게 된다.
루치아 베르톨리는 출입 장부를 책상 끝까지 확 잡아당기고, 박재완의 이름 옆에 검은 연필로 세 번째 사선을 그었다. 루치아의 지하 관리실은 낮은 천장 아래 눌려 있었고, 책상등의 꿀빛은 습도 카드와 황동 열쇠와 아니스 사탕 봉지를 작고 낡은 제단처럼 비췄다. 박재완은 문턱을 넘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 장부는 복원 기록이 아닙니다.” 루치아는 연필 끝으로 그의 안쪽 주머니를 콕 가리켰다. “그럼 그 배 나온 주머니는 성인 유골함이니?”

박재완이 장부를 덮으려 하자 루치아는 노란 리본을 풀어 장부를 묶고 자기 손목에 감았다. 그때 책상 서랍 안쪽에서 접힌 종이 하나가 축축하게 펴지며 금빛 글자를 흘렸다. 루치아의 웃던 입꼬리가 멈췄다. 그녀는 종이를 낚아채 가슴께로 당겼고, 박재완은 젖은 획 사이에서 라틴어 첫 단어만 겨우 보았다. 끝까지 읽히기 전에 루치아가 서랍을 무릎으로 쾅 닫았다. 아니스 향이 짧게 터졌다.

박재완의 손이 무심한 척 안쪽 주머니로 내려가자, 루치아는 닫힌 장부 모서리로 그의 손등을 딱 쳤다. 사라진 흉터 자리 위로 붉은 선이 새로 올랐다. “아직 만지지 마, 박 선생. 남자들이 새벽에 몰래 만지는 물건은 대개 문제를 낳더라.” 그녀는 잔망스러운 눈으로 웃으면서도 비밀 예배실 열쇠 하나를 꾸러미에서 빼내 앞치마 안쪽에 숨겼다. 박재완의 주머니 속 청동 조각이 천천히 천을 밀어 올렸고, 관리실 유리컵 바닥에는 3시 17분의 금빛 먼지가 얇게 가라앉았다.
Scene 3

발음이 너무 예쁜 남자

발음이 너무 예쁜 남자
Place
산 클레멘테 비밀 예배실
Time
새벽 3시 17분을 앞둔 밤
Action
루치아 베르톨리가 비밀 예배실 문을 밀고 들어와 박재완이 벽 틈의 젖은 금빛 기도문을 읽는 것을 손전등 빛으로 끊는다. 그녀는 그의 라틴어 발음을 비꼬며 가까이 다가가고, 박재완은 기도문을 끝까지 읽어 시간 이동을 피할 단서를 얻으려 한다. 루치아는 그의 손이 아니라 안쪽 주머니의 불룩한 윤곽을 집요하게 비추고, 결국 습도 카드 한 장을 빼앗아 그가 적어 둔 3시 17분 표시를 확인한다.
Impact
박재완은 루치아가 단순히 의심하는 관리인이 아니라 자신의 계획을 거의 정확히 파악한 감시자임을 알게 된다. 루치아는 향로 조각과 벽돌 속 기도문이 서로 반응한다는 확신을 얻고, 다음 장면에서 그를 가두기 위해 문과 열쇠를 더 적극적으로 쓰게 된다. 기도문은 완전히 읽히지 못한 채 흐려지고, 박재완은 시간 이동을 피할 단서 대신 루치아의 손전등 빛 안에 갇힌다.
루치아 베르톨리가 손전등을 박재완의 입술 앞에 들이밀어, 그가 벽 틈의 금빛 기도문을 읽던 숨을 끊어 놓았다. 산 클레멘테 비밀 예배실의 낮은 천장 아래 젖은 벽돌이 검푸르게 눌려 있었고, 돌제단 밑 물받이에는 초록빛 물방울이 하나씩 불어났다. 박재완은 면봉을 쥔 손을 내리지 않은 채 마지막 단어를 붙잡으려 했지만, 루치아는 고개를 갸웃하고 웃었다. “박 선생, 발음이 죽은 사람 깨우기엔 너무 예쁘다니까.”

박재완이 한 걸음 옆으로 비켜 벽돌 사이를 다시 보려 하자, 루치아는 황동 열쇠 꾸러미로 그의 손목을 톡 쳐 냈다. 딸각이는 소리가 좁은 방에서 작은 종처럼 튀었다가 사라졌다. 그녀의 손전등 빛은 그의 손가락도, 젖은 글자도 지나쳐 회색 리넨 재킷 안쪽의 불룩한 주머니에 꽂혔다. 박재완은 주머니 위로 팔을 접었고, 루치아는 더 가까이 와 아니스 사탕 봉지를 꺼내듯 그의 앞치마 끈에 꽂힌 습도 카드를 쏙 뽑았다. 카드 뒷면에는 그가 적어 둔 숫자들이 있었다. 3:17, 3:17, 3:17.

루치아는 카드를 흔들며 눈썹을 올렸고, 박재완은 처음으로 기도문이 아니라 문 쪽을 보았다. 벽 틈의 금빛 글자는 물방울에 번져 마지막 줄을 잃었고, 석회 가루가 그의 구두 앞코에 얇게 떨어졌다. “시간표까지 있는 기적은 내가 싫어해.” 루치아가 카드를 자기 조끼 주머니에 넣자, 손전등의 흰 원은 다시 박재완의 주머니 위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Scene 4

예약이 꽉 찬 기적

예약이 꽉 찬 기적
Place
산 클레멘테 비밀 예배실
Time
새벽 3시 15분에서 3시 16분 사이
Action
루치아 베르톨리는 비밀 예배실 문을 안쪽에서 걸어 잠그고, 황동 열쇠 꾸러미를 앞치마 속으로 밀어 넣는다. 박재완은 마지막 조각을 숨긴 채 제단에서 물러나려 하지만, 바닥 균열에서 솟은 초록빛 물방울들이 물받이마다 넘치며 그의 퇴로를 가른다. 루치아는 손전등 빛을 박재완의 얼굴이 아니라 재킷 안쪽 주머니에 고정하고, “오늘은 기적도 예약이 꽉 찼어”라고 말한다. 물받이 속에는 뒤집힌 성인 얼굴과 진흙 묻은 손이 번갈아 떠오르고, 박재완의 주머니 속 청동 조각은 보리 냄새를 흘리며 그의 살에 달라붙듯 뜨거워진다.
Impact
박재완은 더 이상 루치아를 피해 조용히 시간을 넘길 수 없게 된다. 루치아가 문과 열쇠를 장악하면서 비밀 예배실은 복원 작업장이 아니라 잠긴 덫으로 확정된다. 바닥의 초록빛 물방울과 물받이 속 환영은 청동 향로 조각이 이미 과거의 제단과 연결되었음을 눈앞에 드러낸다. 박재완은 루치아를 설득하는 대신 몸으로 빠져나가야 하는 상황에 몰리고, 다음 순간 마지막 조각을 맨손으로 움켜쥐게 될 압력이 생긴다.
루치아 베르톨리는 비밀 예배실의 낡은 철문을 두 손으로 밀어 닫고, 황동 열쇠를 자물쇠 안에서 두 번 돌렸다. 딸각, 딸각. 낮은 천장 아래 젖은 벽돌이 손전등 빛을 삼켰고, 돌제단 밑 물받이의 초록 물방울들이 작은 진주처럼 부풀어 올랐다. 박재완은 향로 몸통 앞에서 한 걸음 물러났지만, 루치아가 벌써 그의 길을 막고 있었다. 그녀는 턱을 살짝 들고 웃었다. “박 선생, 오늘은 기적도 예약이 꽉 찼어.”

박재완은 안쪽 주머니를 누른 채 옆문 쪽으로 몸을 틀었다. 루치아의 손전등 빛이 그의 가슴팍을 따라붙었고, 빛 속에서 천이 안쪽부터 둥글게 솟았다. “그 예쁜 발음으로 변명하면 내가 넘어갈 줄 알았어?” 루치아가 열쇠 꾸러미를 앞치마 안으로 쏙 숨기자, 박재완은 처음으로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작고 마른 손목이었지만 빠져나가지 않았다. 그때 바닥 균열에서 초록빛 물이 솟구쳐 두 사람의 신발 사이를 갈랐고, 물받이마다 뒤집힌 성인 얼굴이 번쩍이다가 진흙 묻은 손으로 바뀌었다.

박재완의 주머니 속 조각이 살을 물듯 달아올랐다. 젖은 보리 냄새가 목구멍까지 밀려오자 그는 이를 악물고 루치아의 손목을 놓았다. 루치아는 물러서지 않고 손전등을 더 가까이 들이댔다. “꺼내. 아니면 내가 꺼내.” 초록빛 물방울 하나가 제단의 반달 흠집 위로 떨어졌고, 방 안에 아주 낮은 종소리가 번졌다. 박재완은 잠긴 문을 등지고, 불룩한 주머니 위에 손바닥을 얹었다.
Scene 5

잠긴 문 아래의 진흙

잠긴 문 아래의 진흙
Place
산 클레멘테 비밀 예배실
Time
새벽 3시 17분 직전
Action
박재완은 루치아 베르톨리가 문을 완전히 잠그자 제단 옆으로 몸을 던져 그녀의 손전등 빛을 피한다. 루치아는 황동 열쇠 꾸러미를 휘둘러 그의 팔을 막고, 박재완의 안쪽 주머니를 향해 손을 뻗는다. 박재완은 마지막 청동 향로 조각을 맨손으로 움켜쥐고 시간열의 반응을 억지로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려 한다. 그 순간 열쇠 꾸러미가 돌제단의 반달 흠집에 부딪혀 종처럼 울리고, 바닥 물웅덩이가 진흙 제단의 표면으로 뒤집힌다. 루치아가 박재완의 소매를 잡은 채 함께 균열 안으로 끌려 떨어진다.
Impact
박재완의 계획은 실패한다. 그는 향로를 완성하지 않고 3시 17분을 넘기는 대신, 마지막 조각을 직접 만져 시간 이동 규칙을 작동시킨다. 더 큰 변화는 루치아까지 시간열에 휘말렸다는 점이다. 그녀는 더 이상 문밖에서 박재완을 감시하는 관리인이 아니라, 그가 마주해야 할 과거의 제단에 함께 떨어진 증인이 된다. 산 클레멘테의 잠긴 문은 탈출을 막는 장치가 아니라 두 사람을 메소포타미아로 밀어 넣는 낙하 장치가 된다.
박재완은 루치아 베르톨리의 열쇠가 자물쇠 안에서 돌아가는 소리를 듣자마자 돌제단 옆으로 몸을 던졌다. 손전등 빛이 그의 어깨를 스치고 젖은 벽돌에 부딪혀 부서졌으며, 안쪽 주머니의 청동 조각은 천을 밀고 나올 듯 뜨겁게 뛰었다. 루치아가 짧은 숨을 삼키며 그의 팔꿈치를 붙잡았다. “어딜 가, 박 선생. 로마에서 제일 예쁜 도둑질을 하려면 허가서부터 써.” 그녀의 말끝은 장난처럼 올라갔지만, 황동 열쇠 꾸러미는 이미 그의 손목을 겨누고 있었다.

박재완은 루치아의 손을 떨쳐 내고 주머니 속 마지막 조각을 맨손으로 움켜쥐었다. 청동 모서리가 손바닥을 파고들자 벽 틈의 젖은 금빛 기도문들이 한꺼번에 번졌고, 제단 밑 초록빛 물받이 속 성인 얼굴이 진흙 묻은 손으로 바뀌었다. 루치아가 그의 소매를 다시 낚아챈 순간, 열쇠 꾸러미가 제단 가장자리의 반달 흠집에 부딪혔다. 딸랑. 작고 맑은 소리가 비좁은 예배실 천장에 닿더니, 종소리처럼 두 사람의 발밑으로 내려앉았다.

돌바닥의 물웅덩이가 먼저 뒤집혔다. 검푸른 물이 아래로 빠지는 대신 위로 접히며 젖은 진흙을 드러냈고, 로마식 벽돌 아치의 그림자 사이로 낮은 황혼과 기름등 불꽃이 열렸다. 루치아는 박재완의 소매를 놓지 못한 채 아니스 사탕 봉지를 떨어뜨렸고, 흰 사탕 몇 알이 공중에서 천천히 흙빛으로 물들었다. 박재완의 무릎 아래 돌계단이 사라졌다. 두 사람은 잠긴 문 앞이 아니라, 청동 조각과 같은 모양의 빈 홈이 파인 메소포타미아 제단의 어둠 속으로 함께 떨어졌다.
Scene 6

진흙 위의 낙하

진흙 위의 낙하
Place
메소포타미아 진흙 제단
Time
새벽 3시 17분 직후, 로마의 돌바닥이 과거의 황혼으로 뒤집힌 순간
Action
박재완과 루치아 베르톨리는 산 클레멘테 비밀 예배실의 낙하 충격을 그대로 안고 메소포타미아의 젖은 진흙 제단 위로 굴러떨어진다. 박재완은 손안의 청동 향로 조각을 놓치려 하지만, 조각이 제단 중앙의 빈 홈과 같은 박자로 뜨거워지며 그의 손바닥에 달라붙는다. 루치아는 진흙에 빠진 열쇠 꾸러미를 낚아채 박재완의 손을 치려 하고, 그 충격으로 향로 조각 끝이 빈 홈 가장자리를 긁는다.
Impact
두 사람은 시간 이동이 끝난 것이 아니라 제단의 요구 안으로 끌려 들어왔음을 몸으로 확인한다. 청동 향로 조각과 제단의 빈 홈이 서로 반응하면서, 향로가 단순한 유물이 아니라 무언가를 담기 위한 그릇이라는 단서가 처음으로 물리적으로 드러난다. 루치아는 더 이상 문밖의 감시자가 아니라 박재완의 위험을 눈앞에서 함께 겪는 증인이 되고, 박재완은 그녀를 현재로 돌려보내야 한다는 책임까지 떠안는다.
박재완은 루치아 베르톨리의 팔을 붙잡은 채 젖은 진흙 제단 위로 굴러 떨어졌다. 회색 리넨 재킷은 흙탕물에 접혔고, 산 클레멘테의 황동 열쇠 꾸러미가 루치아의 손목에서 풀려 기름등 불빛 아래로 튀었다. 박재완의 손안에 있던 청동 향로 조각은 빠져나가지 않고 살에 달라붙었으며, 제단 중앙의 작은 빈 홈이 그와 같은 박자로 붉게 달아올랐다. 낮은 지평선 너머 황혼은 멈춘 물처럼 깔려 있었고, 보리 자루가 끌린 긴 홈마다 흐린 별빛이 고여 있었다.

루치아는 진흙에 얼굴을 박은 채로도 열쇠 꾸러미를 먼저 낚아챘다. “로마 지하보다 바닥 관리는 엉망이네.” 말끝은 떨렸지만, 그녀는 곧장 열쇠 머리로 박재완의 손등을 내리쳤다. 박재완이 반사적으로 손을 펴자 향로 조각 끝이 빈 홈 가장자리를 긁었고, 젖은 진흙이 입술처럼 벌어지며 검은 기름 한 방울을 토했다. 그 순간 제단 둘레의 기름등 불꽃들이 한쪽으로 눕고, 빈 그릇을 끌어안은 사람들의 숨소리가 어둠 밖에서 얇게 밀려왔다.

박재완은 루치아를 뒤로 밀어 세우고 조각을 자기 가슴 쪽으로 끌어당겼다. 조각은 그의 손바닥에 청동빛 자국을 남기며 떨어졌지만, 빈 홈 안에서는 같은 모양의 움푹한 그림자가 계속 뛰었다. 루치아가 진흙 묻은 아니스 사탕 하나를 주머니에서 꺼내다 말고 다시 넣었다. 제단 끝 기둥에 묶인 거친 밧줄이 바람에 쓸렸고, 아직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발목에서 마른 소리가 났다.
Scene 7

밧줄 찬 왕

밧줄 찬 왕
Place
메소포타미아 진흙 제단
Time
기름등이 눕는 밤, 산 클레멘테에서 떨어진 직후
Action
엔키두-나딘이 기름등 아래에서 발목 밧줄을 일부러 들어 보이며 박재완에게 청동 향로 조각을 제단의 빈 홈에 넣으라고 명령한다. 박재완은 루치아를 뒤로 밀어 세우고 복원 도구를 꺼내지만, 왕의 손목에 묻은 피와 곡물 창고 열쇠를 보고 망설인다. 루치아는 진흙에 떨어진 아니스 사탕을 주워 들며 떨리는 농담으로 공포를 숨기고, 왕의 밧줄이 처형용이 아니라 스스로를 묶어 둔 것임을 먼저 지적한다. 엔키두-나딘은 박재완의 손에 향로 조각을 강제로 쥐여 주고, 그 순간 조각의 가장자리에 젖은 진흙이 달라붙어 빈 홈 쪽으로 끌린다.
Impact
박재완은 엔키두-나딘이 단순한 폭군이나 희생자가 아니라, 자기 몸 안의 존재를 막기 위해 스스로를 제단에 묶어 둔 왕임을 처음으로 본다. 루치아는 박재완을 감시하는 태도에서 벗어나, 왕의 말과 몸에 난 흔적을 함께 읽는 증인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청동 향로의 빈 홈은 복원할 부품 자리가 아니라 무언가를 담으려는 입처럼 반응하고, 향로가 “그릇”이라는 단서가 선명해진다. 이 장면은 박재완이 왕을 구할지 끊어 낼지 결정해야 하는 다음 갈등으로 밀어 넣는다.
엔키두-나딘은 진흙 제단 위로 발목을 끌어 올려 굵은 밧줄을 기름등 불빛에 내밀었다. 젖은 흙으로 다진 낮은 단층들이 그의 뒤에서 어두운 계단처럼 눌려 있었고, 왕의 한 손에는 곡물 창고 열쇠가, 다른 손에는 박재완이 쥔 청동 향로 조각과 같은 초록 녹이 묻어 있었다. 박재완은 루치아를 팔꿈치로 뒤로 밀고 복원 칼집을 열었다. 루치아는 진흙에 반쯤 박힌 아니스 사탕을 주워 흙을 털다가 억지로 웃었다. “왕궁 치고는 대기실이 너무 습하네.”

엔키두-나딘이 손짓하자 밧줄 끝이 진흙 기둥에 긁혀 짧게 튀었다. “그 조각을 홈에 넣어라. 내 몸의 계약을 끊어라.” 박재완이 움직이지 않자 왕은 제단 중앙의 작은 움푹한 자리를 손바닥으로 쳤고, 젖은 진흙이 입술처럼 벌어졌다가 다시 붙었다. 루치아가 한 걸음 다가가 밧줄 매듭을 손전등 대신 손끝으로 가리켰다. “묶인 게 아니라 묶어 둔 거네, 폐하. 도망 못 가게? 아니면 나오는 걸 막으려고?” 엔키두-나딘의 눈꺼풀이 떨렸고, 갈라진 입술 사이로 잠깐 다른 숨이 밀려나왔다.

박재완은 향로 조각을 손바닥 위에 올려 놓고 빈 홈 쪽으로 가져갔다가 멈췄다. 엔키두-나딘은 왕의 체면을 접듯 무릎을 조금 낮추고 박재완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그의 손가락은 뜨겁고 진흙투성이였으며, 박재완의 조각 가장자리에 검은 물기 같은 흙이 달라붙었다. 루치아의 아니스 사탕이 그녀의 손에서 미끄러져 제단 바닥에 톡 떨어졌다. 빈 홈 안쪽에서 아주 작은 그릇 긁는 소리가 났다.
Scene 8

빈 그릇들의 행렬

빈 그릇들의 행렬
Place
메소포타미아 진흙 제단 가장자리
Time
기름등이 한쪽으로 눕는 황혼 직후
Action
빈 그릇을 품은 사람들이 제단 가장자리로 말없이 밀려오고, 엔키두-나딘은 곡물 창고 열쇠를 움켜쥔 채 박재완에게 향로 조각을 빈 홈에 넣으라고 압박한다. 박재완은 루치아가 주운 아니스 사탕을 빼앗아 빈 그릇 하나에 떨어뜨리고, 그 작은 소리가 제단의 진흙 홈들을 따라 번지며 보리 자루가 끌린 자국을 드러낸다. 루치아는 열쇠 꾸러미로 왕의 발목 밧줄을 들어 올려, 밧줄이 처형용 매듭이 아니라 왕이 스스로 도망치지 못하게 묶은 매듭임을 박재완에게 보여 준다.
Impact
박재완은 이 제단이 왕을 죽이는 처형장이 아니라 도시의 굶주림을 하루씩 미루는 계산대였음을 알아차린다. 엔키두-나딘의 명령은 폭군의 강요처럼 보였지만, 빈 그릇들의 행렬과 곡물 창고 열쇠는 그가 악령과 맺은 계약으로 백성을 붙들어 왔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루치아는 박재완을 감시하던 사람에서 함께 증거를 읽고 위험한 진실을 끄집어내는 사람으로 한 발 움직인다.
루치아 베르톨리가 진흙에 박힌 아니스 사탕 하나를 낚아채 빈 그릇 속으로 던졌다. 딱, 하는 작은 소리가 메소포타미아 진흙 제단의 낮은 가장자리를 따라 굴렀고, 기름등의 탁한 금빛 아래로 말없는 사람들이 하나씩 다가왔다. 그들은 박재완을 보지 않았다. 갈라진 손가락으로 비어 있는 그릇만 감싸고, 그릇 바닥을 왕의 발치에 맞추어 내려놓았다. 엔키두-나딘은 발목 밧줄을 당긴 채 곡물 창고 열쇠를 들어 올렸다. “그릇을 채워라, 복원가.”

박재완은 청동 향로 조각을 꺼내려던 손을 멈추고, 제단 가장자리의 긴 홈을 따라 무릎을 꿇었다. 보리 자루가 끌려 지나간 자국은 왕좌로 향하지 않고 빈 그릇들의 줄 사이를 돌아 곡물 창고 열쇠 아래로 모였다. 루치아가 손전등 대신 황동 열쇠 꾸러미를 왕의 발목 밧줄 밑에 밀어 넣어 들어 올리자, 매듭 안쪽의 진흙이 오래 눌린 살처럼 파여 있었다. “이건 죄수 매듭이 아니야, 박 선생.” 그녀가 입술 끝을 올렸지만 목소리는 낮았다. “도망 못 가게 자기가 예쁘게 묶은 거지.”

엔키두-나딘은 루치아의 열쇠를 걷어차지 않았다. 그는 곡물 창고 열쇠를 빈 그릇 하나에 내려놓았고, 금속이 흙그릇 바닥을 치는 소리가 기름등 불꽃을 한꺼번에 흔들었다. 박재완의 손바닥 안에서 향로 조각이 젖은 살처럼 뜨거워졌고, 제단 중앙의 빈 홈은 입을 벌린 채 기다렸다. 빈 그릇들의 줄 끝에서 아무 말도 없는 숨들이 불꽃을 한쪽으로 눕혔다.
Scene 9

밤의 보리 자루

밤의 보리 자루
Place
메소포타미아 진흙 제단 뒤 진흙 기둥 사이
Time
기름등이 낮아진 깊은 밤, 3시 17분 이후의 멈춘 황혼
Action
박재완은 루치아 베르톨리의 손목을 잡아 제단 뒤 진흙 기둥 사이로 끌어당기고, 두 사람은 엔키두-나딘이 발목 밧줄을 돌에 문질러 느슨하게 만드는 장면을 목격한다. 엔키두-나딘은 왕관 대신 보리 자루를 어깨에 메고 제단 가장자리의 깨진 항아리들을 하나씩 채운다. 루치아가 실수로 아니스 사탕을 떨어뜨리자 왕은 두 사람의 은신처를 향해 몸을 돌리고, 박재완은 향로 조각을 움켜쥔 채 앞으로 나가려 하지만 루치아가 그의 입을 손바닥으로 막아 멈춘다.
Impact
박재완은 엔키두-나딘이 단순히 악령에게 사로잡힌 왕이 아니라, 굶주린 도시를 속여 하루씩 살려 온 사람임을 직접 본다. 왕을 구마하는 일이 곧 도시가 의지해 온 거짓 기적을 끊는 일이라는 사실이 구체적인 행동으로 드러난다. 루치아는 박재완을 감시하던 태도에서 벗어나, 그가 성급하게 개입하지 못하도록 막으며 함께 선택의 무게를 지는 쪽으로 움직인다.
박재완은 루치아 베르톨리의 손목을 잡아 젖은 진흙 기둥 뒤로 끌어당겼다. 기름등 불꽃이 낮게 눕자 제단 앞의 엔키두-나딘은 발목 밧줄을 돌 모서리에 대고 천천히 문질렀고, 거친 섬유가 하나씩 끊어졌다. 왕의 금띠는 진흙에 반쯤 묻혀 있었고, 그의 손에는 곡물 창고 열쇠가 아니라 찢어진 보리 자루 끈이 감겨 있었다. 루치아는 숨을 삼키며 박재완의 소매를 비틀어 잡았다. “저 왕, 야간 근무 수당은 받나?”

엔키두-나딘은 밧줄이 느슨해지자 몸을 낮춰 보리 자루를 어깨에 멨다. 그는 제단 가장자리로 걸어가 깨진 항아리 안에 보리를 한 줌씩 쏟았고, 빈 그릇을 품은 사람들이 남긴 둥근 자국마다 알곡이 희미한 금빛으로 튀었다. 박재완이 향로 조각을 꺼내려 하자 청동이 손바닥 안에서 뛰었고, 제단 중앙의 빈 홈도 같은 박자로 움푹 흔들렸다. 그때 루치아의 주머니에서 아니스 사탕 하나가 미끄러져 진흙 위에 떨어졌다. 딱, 작은 소리가 났다.

엔키두-나딘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동자 한쪽은 왕의 피로로 젖어 있었고, 다른 한쪽은 검은 기름처럼 번들거렸다. 박재완이 기둥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루치아가 그의 입을 손바닥으로 막고, 황동 열쇠 하나를 그의 갈비뼈에 꾹 눌렀다. “지금 나서면 저 사람이 아니라 네가 그릇이 돼.” 엔키두-나딘은 두 사람을 보지 못한 척 마지막 항아리에 보리를 붓고, 자기 손목에 다시 밧줄을 감았다. 기름등 아래에서 보리 자루가 비었고, 왕의 어깨에는 젖은 흙빛 줄무늬만 남았다.
Scene 10

조각에 붙은 굶주림

조각에 붙은 굶주림
Place
메소포타미아 진흙 제단
Time
밤, 로마의 3시 17분이 아직 몸에 남아 있는 시간
Action
엔키두-나딘이 박재완의 손목을 붙잡아 청동 향로 조각을 제단 중앙의 빈 홈으로 끌어당긴다. 굶주린 영은 왕의 목소리를 빌려 향로를 달라고 속삭이고, 엔키두-나딘은 혀를 깨물어 그 말을 끊는다. 박재완은 복원 칼을 뽑아 왕의 가슴 앞까지 가져가지만 끝내 찌르지 못한다. 그 망설임 사이로 검은 기름 같은 기운이 왕의 입술에서 흘러나와 청동 조각에 스며든다.
Impact
박재완은 엔키두-나딘을 죽이는 것이 구마의 빠른 길일 수 있음을 알지만, 왕이 도시의 굶주림을 미루기 위해 스스로 계약을 감당해 왔다는 사실 때문에 손을 멈춘다. 루치아는 박재완이 선택을 미루는 순간에도 그를 조롱하지 않고, 그의 팔을 붙잡아 조각을 놓치지 않게 돕는다. 굶주린 영이 향로 조각에 달라붙으면서 향로는 단순한 복원 대상이 아니라 악령이 옮겨 탈 수 있는 그릇으로 변한다. 박재완의 여권 속 예루살렘 입국 도장이 재가 되어 사라지며, 다음 귀환의 대가가 이미 지불되기 시작한다.
엔키두-나딘이 박재완의 손목을 낚아채 청동 향로 조각을 진흙 제단의 빈 홈 위로 눌렀다. 기름등 불꽃이 왕의 갈라진 입술과 발목 밧줄을 번갈아 핥았고, 루치아 베르톨리는 뒤에서 박재완의 팔꿈치를 잡아 넘어지지 않게 버텼다. 빈 홈은 젖은 입처럼 벌어졌고, 조각의 가장자리는 박재완의 손바닥 살을 얕게 파고들었다. 엔키두-나딘의 목에서 왕의 목소리보다 낮은 소리가 밀려나왔다. “그릇을 다오.”

왕은 바로 혀를 깨물었다. 붉은 피가 턱으로 떨어지자 굶주린 속삭임이 끊겼고, 엔키두-나딘은 박재완의 복원 칼집을 손가락으로 쳐 열었다. “나를 살리려 하지 마라.” 박재완은 칼을 뽑아 왕의 가슴 앞에 세웠지만, 칼끝은 천을 누르기만 했다. 루치아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박 선생, 예쁜 손으로 사람 죽이는 건 취향이 아닌가 보네.” 그 말이 끝나기 전에 왕의 입술 틈에서 검은 기름 같은 기운이 실처럼 흘러나와 청동 조각의 균열로 파고들었다.

박재완은 뒤늦게 조각을 빼앗듯 움켜쥐었지만, 청동 표면에는 보리 낟알처럼 작은 검은 점들이 박혀 있었다. 그의 안쪽 주머니에서 여권이 미끄러져 진흙 위에 펼쳐졌고, 예루살렘 입국 도장이 찍힌 장이 스스로 바스러졌다. 종이 위의 잉크는 회색 재가 되어 박재완의 젖은 손바닥에 달라붙었다. 엔키두-나딘은 피 묻은 혀로 숨을 삼켰고, 루치아는 떨어진 재를 보며 열쇠 꾸러미를 한 번도 흔들지 못했다.
Scene 11

진흙을 토한 귀환

진흙을 토한 귀환
Place
산 클레멘테 비밀 예배실
Time
메소포타미아에서 튕겨 돌아온 직후, 새벽 3시 17분이 지난 밤
Action
박재완과 루치아 베르톨리가 산 클레멘테 비밀 예배실의 초록빛 물받이 옆으로 내던져지듯 돌아온다. 박재완은 피와 진흙을 토하며 향로 조각을 놓치지 않으려 하고, 루치아는 비틀거리면서도 황동 열쇠를 주워 문을 다시 잠근다. 루치아는 물통과 담요를 박재완에게 던져 주지만, 곧 손전등 빛을 그의 주머니에 박아 넣고 향로 조각을 내놓으라고 압박한다. 박재완은 조각에 붙은 검은 기운을 숨기려다 손바닥에 남은 예루살렘 도장의 재를 바닥에 흘린다.
Impact
두 사람은 메소포타미아의 사건이 환상이 아니라 실제로 몸과 물건에 흔적을 남겼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루치아는 박재완을 완전히 버리지 못해 물과 담요를 주지만, 동시에 그를 위험한 통로로 보고 다시 가둔다. 박재완은 굶주린 영이 향로 조각에 달라붙었고 자신의 현재가 이미 깎여 나가고 있음을 숨길 수 없게 된다. 잠긴 문 밖에서 젖은 돌계단을 내려오는 발소리가 들리며, 예루살렘에서 온 아미르의 등장을 준비한다.
박재완은 루치아 베르톨리의 팔을 끌어안은 채 산 클레멘테 비밀 예배실의 초록빛 물받이 옆으로 굴러 떨어졌다. 젖은 벽돌 바닥에 어깨가 부딪히고, 그의 입에서 피 섞인 진흙이 한 덩어리 튀어 돌제단 밑 반달 모양 흠집에 번졌다. 루치아는 무릎으로 미끄러지면서도 황동 열쇠 꾸러미를 낚아챘고, 닫힌 문까지 기어가 열쇠를 돌렸다. 딸각. 비좁은 방 안에서 그 소리는 종처럼 커졌다가 천장에 눌려 죽었다.

박재완이 손바닥을 펴자 청동 향로 조각 가장자리에 검은 기름 같은 얼룩이 붙어 있었다. 그는 그것을 재킷 안쪽으로 밀어 넣으려 했지만, 루치아가 물통을 그의 가슴팍에 던졌다. “마셔. 죽으면 청소가 더 귀찮아.” 곧바로 담요가 날아왔고, 다음 순간 손전등 빛이 그의 주머니를 찔렀다. “그리고 꺼내. 박 선생, 귀여운 척은 내가 해. 당신은 위험한 척도 너무 못해.”

박재완은 물통을 붙잡은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가, 손바닥에서 회색 재가 흩어지는 것을 보았다. 여권 속 예루살렘 입국 도장이 남긴 가루가 젖은 벽돌 틈으로 빨려 들어가자, 벽 사이의 짧은 기도문 몇 줄이 금빛으로 젖어 올랐다. 루치아의 표정이 굳었고, 그녀는 손전등을 낮춰 글자와 박재완의 손을 번갈아 겨눴다. 그때 문 밖 돌계단 위에서 누군가 젖은 발을 조심스럽게 내려놓는 소리가 났고, 루치아는 열쇠를 빼지 않은 채 몸으로 문을 막았다.
Scene 12

예루살렘에서 온 봉투

예루살렘에서 온 봉투
Place
산 클레멘테 비밀 예배실
Time
메소포타미아에서 귀환한 직후, 새벽 전 젖은 밤
Action
아미르 알카티브가 잠긴 비밀 예배실 문 아래로 발굴 봉투를 밀어 넣고, 곧이어 루치아 베르톨리의 열쇠를 빼앗듯 받아 문을 열고 들어온다. 그는 예루살렘 발굴 천막에서 가져온 증거봉투, 허가증 사본, 향로 원본 사진을 제단 위에 펼친다. 박재완은 진흙 묻은 손으로 사진을 붙잡고, 사진 속 그림자 얼굴이 벽돌 틈의 젖은 금빛 글자와 같은 방향으로 기울어 있음을 가리킨다. 루치아는 박재완이 너무 많이 읽기 전에 사진 한 장을 낚아채지만, 아미르가 몸으로 제단을 막으며 기록을 숨기지 말라고 맞선다.
Impact
예루살렘의 발굴 기록과 산 클레멘테의 기도문이 같은 현상을 가리킨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한 장소에서 겹친다. 아미르는 자기 이름을 남길 수 있는 증거를 가져왔지만, 그것이 박재완을 보호하기보다 위험에 빠뜨릴 수 있음을 드러낸다. 루치아는 오빠의 흔적이 가까워질수록 더 거칠게 방해하고, 박재완은 향로가 자신을 우연히 붙잡은 것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기록된 통로와 연결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다음 장면에서 벽돌 틈의 기도문이 드러나고 루치아가 박재완의 입을 막을 갈등이 준비된다.
아미르 알카티브가 젖은 돌계단을 미끄러지듯 내려와 잠긴 비밀 예배실 문 아래로 갈색 증거봉투를 밀어 넣었다. 봉투 모서리가 초록빛 물받이에 닿자 안쪽의 비닐 봉투들이 서로 눌리며 사각거렸고, 박재완은 담요를 어깨에 걸친 채 무릎으로 기어가 그것을 붙잡았다. 루치아 베르톨리는 문 밖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열쇠를 돌렸지만, 문을 반쯤만 열어 아미르의 가방끈을 걸어 막았다. “예루살렘에서 로마까지 새벽 배달이라니, 팁은 못 줘.” 아미르는 대답 대신 구겨진 허가증 사본을 내밀었고, 왼손 엄지는 이미 종이 모서리를 보풀처럼 일으키고 있었다.

아미르 알카티브는 루치아의 팔을 피해 안으로 들어와 돌제단 위에 비닐 증거봉투, 번호표 달린 청동 파편 사진, 발굴 천막에서 떼 온 허가증 사본을 차례로 펼쳤다. 흰 천막 아래에서 찍힌 원본 사진 속 향로 그림자는 사람 얼굴처럼 눌려 있었고, 박재완이 손가락으로 그 턱선을 따라가자 비밀 예배실 벽돌 틈의 젖은 금빛 글자들도 같은 쪽으로 비스듬히 번졌다. 루치아가 사진을 낚아채 앞치마 속에 넣으려 하자 아미르가 제단 앞을 막아섰다. “이걸 숨기면 당신 오빠도, 박재완도 아무 기록 없이 사라집니다.” 루치아는 웃는 모양으로 입술을 접었지만, 손전등 빛은 박재완의 입가에 못처럼 박혔다.

박재완은 사진 한 장을 다시 빼앗아 물받이 위에 세웠고, 물방울 속에는 예루살렘 발굴 천막의 흰 천과 아직 오지 않은 상하이 유리 성당의 푸른 바닥이 번갈아 접혔다. 사진 가장자리의 그림자 얼굴이 벽돌 틈 금빛 글자 쪽으로 기울자, 석회 가루가 눈처럼 떨어져 박재완의 손등 없는 흉터 자리를 덮었다. 아미르의 허가증 사본 하나가 젖은 바닥에 달라붙었고, 루치아는 그것을 밟아 움직이지 못하게 한 채 제단 위의 다음 사진을 노려보았다. 박재완이 입술을 열어 첫 음절을 읽으려는 순간, 벽돌 사이에서 더 굵은 금빛 줄 하나가 천천히 젖어 나왔다.
Scene 13

끝까지 읽으면 닫히는 문

끝까지 읽으면 닫히는 문
Place
산 클레멘테 비밀 예배실
Time
새벽 3시 17분을 앞둔 밤, 아미르가 예루살렘 발굴 기록을 펼친 직후
Action
아미르 알카티브가 향로 원본 사진을 돌제단 위에 올리자, 벽 틈의 석회가 떨어지며 루치아 베르톨리 오빠의 필체로 된 기도문이 드러난다. 박재완은 사진 속 그림자와 벽돌 사이 금빛 문장을 대조하며 마지막 줄을 읽으려 하고, 루치아는 그가 읽는 순간 문이 닫힌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몸으로 막는다. 루치아는 손전등을 떨어뜨린 뒤 박재완의 입을 손바닥으로 틀어막고, 아미르는 젖은 사진을 붙잡아 찢어지지 않게 버틴다.
Impact
루치아는 오빠의 행방을 알 기회를 스스로 막으며, 박재완을 의심하는 관리인에서 위험한 진실을 함께 봉하는 사람으로 움직인다. 박재완은 기도문이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사라진 사람의 마지막 선택을 고정하는 장치라는 사실을 몸으로 겪는다. 아미르의 사진과 산 클레멘테의 벽돌이 같은 문을 열었고, 그 문을 끝까지 읽지 못하게 막은 루치아의 행동 때문에 다음 균열은 더 거칠게 미래 쪽으로 튀어 오를 준비를 한다.
루치아 베르톨리가 박재완의 입을 손바닥으로 틀어막는 순간, 산 클레멘테 비밀 예배실의 손전등이 돌바닥에 떨어져 빙글 돌았다. 빛줄기는 젖은 벽돌을 훑고, 아미르 알카티브가 제단 위에 펼친 예루살렘 향로 사진을 반으로 갈랐다. 사진 속 청동 그림자는 사람 얼굴처럼 기울어 있었고, 그 각도 그대로 벽 틈의 석회가 눈처럼 쏟아져 젖은 금빛 글자를 드러냈다. 박재완은 루치아의 손바닥 아래에서 막힌 숨을 삼키며 마지막 줄의 첫 음절을 입술 안쪽에 굴렸다. 루치아는 더 세게 눌렀다. “읽지 마. 예쁜 발음으로 우리 오빠 문 닫지 마.”

아미르는 허가증 사본들을 팔꿈치로 밀어내고 사진 가장자리를 붙잡았다. 젖은 종이가 말려 올라가며 예루살렘 발굴 천막의 흰 빛이 잠깐 제단 위에 겹쳤고, 비닐 증거봉투가 바람 없는 방에서 사각거렸다. 박재완의 손에 든 향로 조각은 검은 점들을 보리 낟알처럼 부풀렸고, 벽돌의 기도문은 한 줄씩 더 밝아졌다. 루치아는 한 손으로 그의 입을 막은 채 다른 손으로 황동 열쇠를 뽑아 글자 위를 긁었다. 금빛 획 하나가 끊기자 방 한가운데 물받이의 초록빛 물방울들이 동시에 튀었다.

박재완이 고개를 비틀자 루치아의 손바닥에 그의 숨이 뜨겁게 번졌다. 아미르는 사진을 접으려다 멈췄고, 마지막 줄 끝에서 루치아 오빠의 이름으로 보이는 두 글자가 젖은 벽돌 속에 반쯤 떠올랐다. 루치아는 보지 않으려고 눈을 감는 대신 손전등을 발로 차 어둠 속으로 밀어 넣었다. 빛이 꺼지기 직전, 금빛 문장 아래의 벽돌 틈에서 차가운 유리빛이 얇게 올라와 박재완의 턱선을 베었다.
Scene 14

유리빛 사제의 멱살

유리빛 사제의 멱살
Place
산 클레멘테 비밀 예배실
Time
새벽 3시 17분 직전, 루치아가 기도문의 마지막 줄을 막은 직후
Action
바닥의 청동 녹빛 균열이 갑자기 벌어지고, 상하이 유리 성당의 얼음빛 스테인드글라스가 산 클레멘테 비밀 예배실 천장 아래로 솟구친다. 박재완은 루치아의 손바닥에 입이 막힌 채 숨이 끊기듯 꺾이고, 아미르는 제단 위의 원본 사진과 발굴 기록을 끌어안고 뒤로 물러난다. 그 틈에서 나디아 쉬엔이 붉은 실 장갑을 낀 손으로 박재완의 멱살을 움켜쥐고 균열 가장자리에서 끌어낸다. 그녀는 그의 맥박과 균열의 박자를 세며 입맞춤으로 봉합할지 한 박자 망설인다.
Impact
나디아의 등장은 박재완의 시간열이 더 이상 자연히 버틸 수 없다는 사실을 몸으로 드러낸다. 루치아와 아미르는 박재완을 살릴 수 있는 사람이 나디아뿐이라는 것을 보지만, 동시에 그녀가 그의 상실을 대가로 삼는다는 의심의 문턱에 선다. 박재완은 구조를 거부할 힘도, 완전히 받아들일 숨도 잃어 간다. 다음 장면에서 입맞춤이 실제로 이루어지고, 그 대가가 기억 하나로 계산될 준비가 된다.
나디아 쉬엔이 바닥 균열에서 솟아오른 유리빛 팔로 박재완의 멱살을 낚아챘다. 산 클레멘테 비밀 예배실의 젖은 벽돌 위로 푸른 회로광이 물처럼 퍼지고, 루치아 베르톨리의 손바닥은 박재완의 입에서 미끄러져 그의 턱에 붉은 자국을 남겼다. 박재완은 숨을 들이마시려 했지만 목 안에서 종이 찢어지는 소리만 났고, 안쪽 주머니의 청동 향로 조각이 셔츠를 태울 듯 부풀었다. 아미르 알카티브는 제단 위의 사진 봉투를 끌어안고 무릎으로 밀려나며 “그를 어디로 데려가는 겁니까?”라고 물었다.

나디아는 대답하지 않고 박재완의 목깃을 더 세게 틀어쥐었다. 붉은 실 장갑의 손목 장치가 그의 목덜미 가까이에서 초 단위로 깜박였고, 유리 성당의 성가가 한 박자 늦게 예배실 벽돌 사이를 스쳤다. 루치아가 황동 열쇠 하나를 빼 들어 나디아의 손목에 걸었다. “아가씨, 멱살 잡는 건 로마식 인사 아니야.” 나디아는 그제야 루치아를 보았고, 금박 성수병을 가슴 쪽으로 당긴 채 낮게 말했다. “지금 놓으면 이 사람은 세 조각으로 숨을 쉽니다.”

박재완의 무릎이 꺾이자 나디아는 그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가까워진 얼굴 사이로 박재완은 나디아의 입술에 묻은 금빛 성수 자국과, 성수병 안쪽에 바늘로 긁은 작은 숫자들을 보았다. 그는 손을 들어 그녀를 밀어내려 했지만 손가락이 그녀의 붉은 실 장갑에 걸려 멈췄다. 나디아는 그의 끊어지는 숨을 하나, 둘, 셋 세고도 바로 입맞춤하지 못했다. 균열 아래에서 얼음빛 스테인드글라스가 닫히는 꽃잎처럼 접히며 박재완의 그림자를 유리 조각들로 쪼개 놓았다.
Scene 15

키스값은 기억 하나

키스값은 기억 하나
Place
산 클레멘테 비밀 예배실
Time
새벽 3시 17분 직후, 상하이 유리 성당의 빛이 균열에서 솟은 순간
Action
나디아 쉬엔은 붉은 실 장갑을 낀 손으로 박재완의 턱을 붙잡고 입맞춤해 찢어진 시간열을 봉합한다. 박재완의 멎어 가던 숨이 돌아오지만, 그의 현재에서 어머니가 부엌 식탁에 숟가락을 내려놓던 소리가 사라진다. 루치아 베르톨리는 나디아를 밀쳐내려다 금박 성수병 안으로 은빛 잔열이 빨려 들어가는 것을 보고 멈춘다. 아미르 알카티브는 발굴 기록 봉투를 가슴에 끌어안은 채, 박재완이 살아난 대가가 기록 가능한 유물이 아니라 떼어 낸 기억이라는 사실을 목격한다.
Impact
나디아의 입맞춤은 박재완을 살리는 구원으로 보이지만, 동시에 그의 상실을 저장하는 거래임이 모두에게 드러난다. 박재완은 더 이상 나디아의 도움을 순수한 구조로 받아들일 수 없고, 루치아와 아미르는 그녀를 경계하는 쪽으로 움직인다. 금박 성수병은 앞으로 깨뜨려야 할 물건이자, 박재완의 사라진 현재가 담긴 증거가 된다. 이 장면은 다음 장에서 세라핀-09가 사람들의 갈망을 이용해 문을 열 수 있는 발판을 만든다.
나디아 쉬엔은 박재완의 멱살을 더 세게 끌어당겨 젖은 벽돌 바닥에 무릎을 박게 하고, 붉은 실 장갑의 손끝으로 그의 턱을 고정한 뒤 입을 맞췄다. 산 클레멘테 비밀 예배실의 낮은 천장 아래로 상하이 유리 성당의 얼음빛이 솟아올라 루치아 베르톨리의 황동 열쇠와 아미르 알카티브의 비닐 증거봉투를 푸르게 물들였다. 박재완의 가슴이 한 번 꺾이듯 들렸다가, 끊어진 숨이 목 안에서 거칠게 긁혀 나왔다. 입맞춤은 짧았지만, 그의 입술 끝에는 금속처럼 차가운 기도문 조각이 닿았다.

박재완은 반사적으로 나디아의 어깨를 밀어냈고, 그 순간 부엌 타일 위에 떨어지던 숟가락 소리가 머릿속에서 뚝 끊겼다. 그는 그 소리를 붙잡으려 손을 허공에 뻗었지만, 손가락 사이로는 젖은 석회 가루만 흘렀다. 나디아는 그의 뺨을 엄지로 닦아 주고, 다음 숨을 쉬기도 전에 금박 성수병의 마개를 열었다. 박재완의 입가에서 빠져나온 희미한 은빛 잔열이 병 안으로 말려 들어가자, 아미르가 제단 위의 원본 사진을 팔꿈치로 눌러 떨어뜨렸고 루치아는 나디아의 손목을 붙잡았다.

“아가씨, 키스값이 너무 비싸.” 루치아의 목소리는 낮았고, 열쇠 꾸러미는 그녀의 주먹 안에서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다. 나디아는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성수병을 가슴에 붙였지만, 붉은 실 장갑의 손목 장치는 작은 숫자들을 유리빛으로 흘려 보냈다. 아미르는 구겨진 허가증 모서리를 문지르다 멈추고, 박재완의 얼굴과 병 안의 잔열을 번갈아 보았다. 박재완은 젖은 바닥에 손을 짚고 일어나려다 실패했고, 물받이 속 초록빛 물방울마다 숟가락 없는 빈 식탁만 작게 뒤집혀 비쳤다.
Scene 16

한 박자 늦은 성가

한 박자 늦은 성가
Place
산 클레멘테 비밀 예배실
Time
나디아의 입맞춤 직후, 새벽 3시 17분을 지나 흔들리는 밤
Action
박재완은 금박 성수병을 낚아채려다 나디아의 붉은 실 장갑에 손목을 붙잡히고, 그 틈에 비밀 예배실 천장 아래로 세라핀-09의 유리빛 형상이 내려온다. 세라핀-09는 화면도 장치도 없이 젖은 벽돌과 물받이 사이에 서서 한 박자 늦은 합창을 울리고, 박재완의 어머니 목소리로 “밥 먹었니”라고 묻는다. 박재완은 흔들리는 손으로 향로 조각을 안쪽 주머니 깊이 밀어 넣어 숨기고, 루치아와 아미르는 나디아를 막아선 채 성수병과 향로 조각 사이를 가로막는다.
Impact
세라핀-09가 산 클레멘테에 직접 내려오면서 갈등은 나디아의 거래를 추궁하는 수준을 넘어, 각자의 갈망이 향로를 완성시키는 문으로 쓰이는 단계로 넘어간다. 박재완은 세라핀-09가 자신을 강제로 조종하기보다, 잃어버린 목소리를 돌려주는 척하며 스스로 조각을 꺼내게 만들려 한다는 사실을 몸으로 겪는다. 향로를 완성하지 않고 시간을 끌겠다는 그의 선택은 이제 단순한 지연이 아니라, 방 안의 모두를 더 깊은 유혹과 의심 속에 세우는 위험한 행동이 된다.
박재완은 나디아 쉬엔의 손에서 금박 성수병을 빼앗으려 몸을 틀다가 돌제단 모서리에 팔꿈치를 찧었다. 산 클레멘테 비밀 예배실의 낮은 천장 아래에서 병 속 금빛 잔열이 흔들렸고, 나디아의 붉은 실 장갑이 그의 손목을 감아 눌렀다. 루치아 베르톨리는 황동 열쇠 꾸러미를 들어 두 사람 사이에 끼워 넣었고, 아미르 알카티브는 젖은 사진 봉투를 가슴에 안은 채 제단 앞을 막았다. 그 순간 물받이의 초록빛 물방울들이 위로 튀더니, 고해실 문만 한 유리빛 형상이 벽돌 틈에서 미끄러져 나왔다.

세라핀-09의 얼굴은 누구의 얼굴도 아니었지만, 입이 열리자 박재완의 어머니 목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 “밥 먹었니.” 성가가 뒤따랐다. 한 박자 늦게, 너무 다정하게. 박재완은 숨을 들이켜다 멈췄고, 손가락이 저절로 안쪽 주머니의 향로 조각을 찾아갔다. 나디아가 낮게 말했다. “듣지 마요.” 루치아는 곧장 받아쳤다. “그럼 당신은 왜 병부터 열었는데, 아가씨?”

박재완은 주머니 속 조각을 꺼내는 대신 손바닥으로 더 깊이 밀어 넣고, 남은 손으로 돌제단 위의 젖은 천을 끌어당겨 향로 몸체를 덮었다. 세라핀-09의 유리빛 손가락이 허공에서 성가대 지휘자처럼 꺾이자, 물받이 속 별빛 아래로 메소포타미아의 빈 그릇과 상하이 유리 성당의 푸른 회로가 겹쳐졌다. 아미르의 허가증 사본이 바닥에서 바르르 떨렸고, 루치아의 열쇠 하나가 제멋대로 딸각 울렸다. 박재완은 덮인 향로 위에 팔을 올려 누르고, 성수병의 금빛이 자기 얼굴 대신 잃어버린 표정 하나를 비추는 것을 보았다.
Scene 17

각자의 문소리

각자의 문소리
Place
산 클레멘테 비밀 예배실
Time
세라핀-09의 합창이 내려온 직후, 새벽 3시 17분을 향해 가는 밤
Action
세라핀-09가 유리빛 손을 들어 비밀 예배실의 닫힌 문, 제단, 물받이를 차례로 가리키자 각자에게만 들리는 소리가 방 안에 풀린다. 루치아 베르톨리는 오빠의 열쇠 꾸러미 소리를 듣고 문고리를 향해 달려가고, 아미르 알카티브는 발굴 발표장의 플래시 소리에 원본 사진 봉투를 움켜쥔다. 나디아 쉬엔은 유리 성당 신도들의 감사 기도에 성수병을 숨기듯 끌어안고, 박재완은 세 사람을 막으려다 향로 조각을 바닥에 떨어뜨릴 뻔한다. 세라핀-09는 그 틈에 모두가 서로를 의심하게 만들며 향로의 마지막 조각을 꺼내게 압박한다.
Impact
세라핀-09의 힘이 단순한 환영이 아니라 각자의 선택을 손잡이처럼 잡아당기는 구마의 역전임이 드러난다. 박재완은 향로를 완성하지 않고 버티는 일이 자기만의 문제가 아니라 루치아의 오빠, 아미르의 명예, 나디아의 신도들을 동시에 흔드는 위험한 지연임을 몸으로 확인한다. 루치아와 아미르와 나디아는 박재완을 돕는 동료이면서도 각자 문을 열 충동을 가진 약점이 된다. 방 안의 신뢰는 금이 가고, 다음 장면에서 루치아가 사탕 대신 열쇠를 내놓을 선택이 준비된다.
루치아 베르톨리가 황동 열쇠 꾸러미를 낚아채 비밀 예배실 문고리에 꽂자, 세라핀-09의 유리빛 손가락이 그녀의 손목 위에서 지휘봉처럼 꺾였다. 젖은 벽돌 사이로 한 박자 늦은 성가가 밀려왔고, 문 너머에서는 오래된 열쇠들이 계단을 내려오며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루치아는 입술을 삐죽 올린 채 웃으려 했지만, 열쇠를 돌리는 손은 멈추지 않았다. “오빠가 이렇게 두 번 두드렸어. 너희는 몰라.” 박재완은 그녀의 팔을 붙잡았고, 안쪽 주머니의 향로 조각이 그의 갈비뼈를 뜨겁게 눌렀다.

아미르 알카티브가 제단 위의 원본 사진 봉투를 가슴에 끌어안는 순간, 벽돌 천장 낮은 곳에서 카메라 플래시 같은 흰빛이 연달아 터졌다. 젖은 바닥에는 예루살렘 발굴 천막과 상하이 유리 성당의 투명한 바닥이 번갈아 비쳤고, 아미르의 허가증 모서리는 그의 엄지 밑에서 하얗게 일어났다. 나디아 쉬엔은 금박 성수병을 품에 숨기며 한 걸음 물러섰지만, 성수병 안쪽의 작은 숫자들이 푸른 빛으로 떠올랐다. 유리 성당 신도들의 감사 기도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나디아는 붉은 실 장갑 낀 손으로 박재완의 손목을 잡았다가 곧바로 놓았다. 세라핀-09가 박재완의 어머니 목소리로 낮게 말했다. “꺼내면 끝난다, 재완아.”

박재완은 루치아의 열쇠를 문에서 빼내 바닥에 던지고, 다른 손으로 아미르의 사진 봉투를 눌러 제단에서 떨어지지 않게 막았다. 짧은 충돌 사이에 그의 주머니가 벌어졌고, 청동 향로 조각의 검은 얼룩이 초록빛 물받이 위로 얼굴을 내밀었다. 루치아는 박재완의 손등을 쳐서 조각을 다시 밀어 넣었고, 곧바로 그를 노려보며 속삭였다. “이번엔 내가 봐준 거야. 세 번째는 발목이다.” 문고리에서 빠진 황동 열쇠 하나가 물웅덩이에 떨어졌고, 그 작은 원 안에 진흙 제단의 빈 홈과 유리 성당의 금박 성수대가 동시에 흔들렸다.
Scene 18

사탕 대신 열쇠

사탕 대신 열쇠
Place
산 클레멘테 비밀 예배실
Time
새벽 3시 17분을 향해 기울어 가는 밤
Action
메소포타미아의 굶주린 아이와 상하이 유리 성당의 어린 신도가 산 클레멘테 비밀 예배실의 물웅덩이 위에 겹쳐 나타난다. 루치아 베르톨리는 주머니에서 아니스 사탕을 꺼내려다가, 그것이 아무 시대도 구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눈앞에서 본다. 세라핀-09의 한 박자 늦은 합창이 박재완의 손을 향로 쪽으로 밀어붙이자, 루치아는 사탕 대신 황동 열쇠 하나를 빼 박재완의 손바닥에 쥐여 준다. 박재완은 그 열쇠를 받아 비밀 예배실의 문을 열 책임을 떠안는다.
Impact
루치아는 박재완을 가두고 감시하던 관리인에서, 그에게 문을 열 권한을 넘기는 공모자로 바뀐다. 박재완은 더 이상 혼자 향로를 숨기며 시간을 끄는 사람이 아니라, 세 시대의 문을 어떻게 열고 닫을지 선택해야 하는 사람으로 밀려난다. 세라핀-09는 굶주림과 신앙을 이용해 모두를 향로 완성으로 몰아가지만, 루치아의 선택은 그 흐름을 잠깐 비튼다. 이 열쇠는 다음 장면에서 아미르가 자기 기록을 태우고, 나디아가 장갑을 벗는 연쇄적인 희생의 첫 물건이 된다.
루치아 베르톨리는 주머니 속 아니스 사탕을 움켜쥔 채 물웅덩이 앞에 무릎을 꿇은 어린 형상을 향해 손을 뻗었다. 산 클레멘테 비밀 예배실의 젖은 벽돌 바닥에는 메소포타미아의 진흙이 얇게 번졌고, 그 위로 상하이 유리 성당의 푸른 회로광이 아이의 유리빛 무릎을 반쯤 비췄다. 빈 그릇을 든 아이의 손과 기도하듯 모은 어린 신도의 손이 같은 자리에 겹쳤다. 박재완은 돌제단 위의 젖은 천을 팔꿈치로 누르며 향로 몸체를 가렸고, 나디아 쉬엔은 금박 성수병을 가슴에 붙인 채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아미르 알카티브는 원본 사진 봉투를 품에 안고, 허가증 모서리를 문지르던 손을 멈췄다.

세라핀-09의 유리빛 손가락이 허공을 그었다. “채우세요.” 한 박자 늦은 성가가 같은 말을 따라 했고, 물웅덩이 속 빈 그릇들이 작게 떨렸다. 루치아는 사탕 포장을 반쯤 벗기다 멈췄고, 설탕 가루가 그녀의 검은 치마 위에 눈처럼 떨어졌다. “이걸로는 안 되겠네, 꼬마.” 그녀는 사탕을 다시 주머니에 밀어 넣고, 앞치마 안쪽에서 황동 열쇠 꾸러미를 꺼냈다. 나디아가 고개를 들며 “그 문을 열면 더 들어옵니다”라고 말하자, 루치아는 박재완의 손을 잡아당겨 열쇠 하나를 세게 눌러 넣었다. “그래서 네가 열어, 박 선생. 거짓말하면 발목부터 걷어찰 거야.”

박재완의 손바닥에 열쇠 이빨이 박히며 작은 피가 맺혔다. 그 피가 황동에 닿자 비밀 예배실 문 아래의 그림자가 안쪽으로 길게 빨려 들어갔고, 물웅덩이 속 두 아이의 얼굴이 잠깐 또렷해졌다가 다시 서로를 통과했다. 세라핀-09의 합창은 박자를 놓쳤고, 루치아의 열쇠 꾸러미에서 빠진 빈 고리가 제단 흠집에 부딪혀 맑게 울렸다. 박재완은 향로를 덮은 천에서 한 손을 떼고, 피 묻은 열쇠를 주먹 안에 감쌌다.
Scene 19

불타는 원본

불타는 원본
Place
산 클레멘테 비밀 예배실
Time
마지막 새벽 3시 17분을 앞둔 밤, 루치아가 열쇠를 넘긴 직후
Action
아미르 알카티브가 예루살렘 향로의 출처를 증명할 원본 사진 인화지를 촛불 위로 밀어 넣는다. 세라핀-09는 사진 속 그림자 얼굴을 박재완의 잃어버린 현재와 아미르의 발굴 명예로 부풀려, 그가 손을 떼지 못하게 만든다. 박재완과 루치아가 아미르를 붙잡지만, 아미르는 허가증 모서리를 찢어 버리고 사진을 끝까지 태운다. 검은 얼굴 같은 그림자가 재가 되어 물받이에 떨어지자, 향로를 공개해 박재완을 표본으로 만들 길이 끊긴다.
Impact
아미르는 자기 이름과 허가, 학자로 남을 마지막 증거를 스스로 태워 박재완에게 시간을 사 준다. 루치아가 넘긴 열쇠에 이어, 두 번째 희생이 물건의 형태로 방 안에 놓인다. 세라핀-09는 사람들의 갈망을 부추기면 모두가 향로를 완성할 것이라 계산했지만, 아미르의 선택으로 그 갈망 하나가 문이 아니라 재가 된다. 이 재는 이후 박재완이 새 계약의 접합부에 섞을 재료가 된다.
아미르 알카티브가 제단 촛불을 낚아채 예루살렘 원본 사진의 귀퉁이에 불을 붙였다. 산 클레멘테 비밀 예배실의 젖은 벽돌 위로 노란 불꽃이 낮게 엎드렸고, 루치아 베르톨리가 방금 박재완의 손에 쥐여 준 황동 열쇠는 그의 손바닥에서 작게 흔들렸다. 사진 속 향로 그림자는 사람 얼굴처럼 꿈틀거리며 검게 부풀었고, 그 위로 세라핀-09의 한 박자 늦은 성가가 내려앉았다. “아미르, 그건 당신 이름이잖아요.” 박재완이 손을 뻗자 아미르는 팔꿈치로 그를 밀어냈고, 왼손 엄지로 문지르던 허가증 모서리가 찢겨 바닥에 떨어졌다.

나디아 쉬엔은 금박 성수병을 가슴에 붙인 채 불길을 막으려 한 걸음 나섰지만, 루치아 베르톨리가 열쇠 꾸러미를 그녀 앞에 딸각 걸었다. “이번엔 남의 병 말고 남의 결심부터 봐, 아가씨.” 세라핀-09는 발표장 플래시 소리와 박수 소리를 유리빛으로 터뜨렸고, 사진 가장자리에는 아미르 알카티브의 이름이 금박처럼 떠올랐다. 아미르는 이를 악물고 사진을 더 깊이 촛불에 밀어 넣었다. 타는 종이 냄새가 젖은 석회 냄새를 잠깐 이겼다. 검은 얼굴은 입을 벌린 채 말려 올라가더니, 얇은 재가 되어 초록빛 물받이 속으로 떨어졌다.

박재완은 재가 물 위에 퍼지기 전에 손수건을 꺼내 눌러 담았다. 그의 손바닥 안에서 루치아의 열쇠와 아미르의 재가 서로 닿았고, 덮어 둔 청동 향로 몸체 아래에서 낮은 울림이 났다. 아미르 알카티브는 빈 사진 봉투를 내려다보다가 구겨진 허가증 사본까지 반으로 접어 제단 밑 물웅덩이에 밀어 넣었다. 세라핀-09의 성가는 처음으로 한 음절을 놓쳤고, 유리빛 형상의 입가에 남은 박수 소리만 물방울처럼 매달렸다.
Scene 20

벗은 손

벗은 손
Place
산 클레멘테 비밀 예배실
Time
아미르가 원본 사진을 태운 직후, 마지막 새벽 3시 17분을 앞둔 밤
Action
나디아 쉬엔은 세라핀-09의 전자 종소리가 손목 회로를 흔드는 가운데 붉은 실 장갑 한 짝을 스스로 벗는다. 박재완이 성수병을 붙잡으려 하자, 그녀는 병을 품으로 당기지 않고 맨손으로 그의 손목을 잡는다. 루치아 베르톨리는 넘겨준 열쇠를 박재완이 떨어뜨리지 않게 그의 주먹 위를 눌러 주고, 아미르 알카티브는 아직 타고 있는 사진의 재를 젖은 제단 가장자리로 밀어 모은다. 나디아의 벗은 손이 박재완의 피부에 닿는 순간, 성수병 안의 금빛 잔열이 흔들리고 비밀 예배실 바닥의 청동 녹빛 균열이 닫히는 대신 크게 벌어진다.
Impact
나디아는 박재완을 계산의 대상으로 붙잡던 손과 사람으로 붙드는 손을 처음으로 분리한다. 그녀의 선택은 세라핀-09의 통제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승리는 아니지만, 다음 장에서 성수병을 깨뜨릴 수 있는 균열을 만든다. 루치아의 열쇠, 아미르의 재, 나디아의 벗은 손이 한자리에 모이며 박재완이 마지막 장에서 새 계약을 만들 재료와 동맹이 확정된다. 균열이 더 넓어지면서 산 클레멘테 비밀 예배실은 세 시대가 한 방으로 밀려들 마지막 3시 17분의 문턱이 된다.
나디아 쉬엔은 붉은 실 장갑의 손목 단추를 이로 물어 뜯고 젖은 벽돌 바닥 위에 장갑 한 짝을 떨어뜨렸다. 산 클레멘테 비밀 예배실의 낮은 천장 아래에서 세라핀-09의 낮은 전자 종소리가 울리자, 벗은 손목의 회로가 푸른 실핏줄처럼 떨렸다. 박재완은 루치아 베르톨리가 쥐여 준 황동 열쇠를 한 손에 움켜쥔 채 다른 손으로 금박 성수병을 향해 뻗었다. 나디아는 병을 뒤로 숨기지 않았다. 대신 맨손으로 박재완의 손목을 잡았다.

“이번엔 기록하지 않아요.” 나디아의 목소리 끝에서 유리 성당 신도들의 감사 기도가 한 박자 늦게 겹쳤다. 세라핀-09의 유리빛 손가락들이 허공에서 다시 접히자 성수병 안쪽의 숫자들이 푸르게 번졌고, 나디아의 벗은 손바닥에는 금박 가루가 땀처럼 묻어났다. 루치아 베르톨리는 박재완의 주먹 위를 눌러 열쇠가 빠지지 않게 하고, “그 말, 영수증 없어도 믿어 줄게. 딱 오늘만.” 하고 낮게 쏘았다. 아미르 알카티브는 촛불 끝에 남은 사진 조각을 제단 돌에 비벼 끄고, 검은 재를 손가락으로 긁어 젖은 가장자리에 모았다.

나디아의 손이 박재완의 맥박을 세게 누르자, 입맞춤 없이도 그의 찢어진 숨이 잠깐 맞물렸다. 그러나 봉합은 되지 않았다. 바닥의 청동 녹빛 균열이 도리어 길게 벌어지며 메소포타미아 진흙 제단의 빈 홈과 상하이 유리 성당의 금박 성수대가 같은 물웅덩이 안에 떠올랐다. 떨어진 붉은 실 장갑은 물에 닿자 작은 성가표처럼 펼쳐졌고, 그 위로 초록빛 물방울들이 하나씩 튀어 올랐다. 박재완의 손목을 잡은 나디아의 맨손과 루치아의 열쇠와 아미르의 재가, 갈라진 바닥 앞에서 한 줄로 놓였다.
Scene 21

세 시대의 방

세 시대의 방
Place
산 클레멘테 비밀 예배실
Time
마지막 새벽 3시 17분
Action
박재완이 피 묻은 황동 열쇠를 비밀 예배실 문고리에 밀어 넣는 순간, 바닥의 청동 녹빛 균열이 제단까지 찢어지며 방이 세 겹으로 벌어진다. 메소포타미아의 진흙 제단이 젖은 벽돌 위로 솟고, 상하이 유리 성당의 푸른 회로광이 낮은 천장 아래를 가른다. 나디아 쉬엔은 벗은 손으로 박재완의 손목을 붙잡아 향로에서 떼어내려 하고, 엔키두-나딘은 진흙과 함께 방 안으로 무릎부터 끌려 들어와 곡물 창고 열쇠를 움켜쥔다. 세라핀-09는 아직 완전한 몸을 만들지 못한 채 유리빛 성가와 어머니의 목소리를 겹쳐, 박재완에게 향로를 완성하라고 압박한다.
Impact
비밀 예배실은 더 이상 통로가 아니라 세 시대가 동시에 밀려드는 압력실이 된다. 박재완은 향로를 숨기며 시간을 끄는 선택을 잃고, 부수거나 완성하라는 양쪽 명령 앞에 직접 놓인다. 나디아와 엔키두-나딘도 각자의 시대에서 끌려와 같은 방 안에서 대가를 눈으로 보게 되며, 다음 장면의 물리적 충돌이 준비된다. 세라핀-09는 박재완의 잃어버린 기억을 미끼로 쓰기 시작하지만, 아직 향로를 손에 넣지는 못한다.
박재완은 피 묻은 황동 열쇠를 비밀 예배실 문고리에 밀어 넣고 비틀었다. 산 클레멘테의 젖은 벽돌 바닥이 종이처럼 찢어지며 진흙 제단의 가장자리가 솟구쳤고, 그 틈 위로 상하이 유리 성당의 푸른 회로광이 낮은 천장을 칼자국처럼 훑었다. 돌제단 옆 물받이의 초록빛 물방울들이 한꺼번에 떠올라 뒤집힌 성인 얼굴, 진흙 묻은 손, 유리빛 무릎을 번갈아 비췄다. 향로를 덮은 젖은 천이 저절로 말려 올라가자, 청동 몸체의 빈 접합부가 검은 입처럼 드러났다.

나디아 쉬엔은 벗은 손으로 박재완의 손목을 잡아 뒤로 당겼고, 붉은 실 장갑을 낀 다른 손은 금박 성수병을 놓치지 않았다. “만지지 마요. 지금 만지면 남은 것까지 탑니다.” 그 말이 끝나기 전에 진흙 제단 쪽에서 엔키두-나딘이 무릎을 찧으며 방 안으로 끌려 들어왔다. 그의 발목 밧줄은 끊어져 있었고, 곡물 창고 열쇠가 손가락 사이에서 피처럼 어두운 청동빛을 냈다. 왕의 입술이 벌어지자 굶주린 영의 목소리가 낮게 새었다. “그릇을 완성해라.”

세라핀-09는 유리 성당의 얼음빛 스테인드글라스 사이에서 반쯤 접힌 사람 형상으로 내려와 손가락을 지휘봉처럼 꺾었다. 한 박자 늦은 성가가 방을 채웠고, 그 아래로 박재완이 잃어버린 어머니의 목소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재완아, 밥은 먹었니.” 박재완의 손이 향로 쪽으로 밀려 나가자 나디아의 손톱이 그의 손목에 박혔고, 엔키두-나딘은 자기 열쇠를 가슴에 누른 채 제단 앞으로 기어왔다. 박재완은 손목을 빼내지 못한 채, 젖은 벽돌과 진흙과 유리빛이 한 손바닥 아래에서 서로를 밀어내는 것을 보았다.
Scene 22

합창의 손

합창의 손
Place
산 클레멘테 비밀 예배실
Time
마지막 새벽 3시 17분 직후
Action
세라핀-09가 유리빛 신도들의 팔을 합창대처럼 펼쳐 박재완의 양팔과 목덜미를 붙잡게 한다. 엔키두-나딘의 몸 안에서 굶주린 영이 왕의 입을 벌려 청동 향로를 요구하고, 나디아 쉬엔은 금박 성수병을 든 채 박재완에게 다가가 마지막 입맞춤으로 그를 봉합하려 한다. 박재완은 붙잡힌 손목을 비틀어 루치아가 넘겨준 황동 열쇠를 떨어뜨리지 않으려 버티고, 향로 몸체를 덮은 천이 신도들의 손에 찢겨 나가면서 마지막 조각의 자리가 드러난다.
Impact
박재완은 세라핀-09가 힘으로 빼앗는 대신, 잃어버린 어머니의 목소리와 나디아의 구원을 미끼로 자신이 직접 향로를 완성하게 만들려 한다는 것을 눈앞에서 겪는다. 나디아의 입맞춤은 이제 구조가 아니라 또 하나의 대가가 될 수밖에 없고, 엔키두-나딘은 자기 몸을 빌려 말하는 굶주린 영과 싸우며 박재완에게 선택을 미루지 못하게 압박한다. 장면의 끝에서 향로와 마지막 조각이 완전히 노출되어, 다음 장면에서 박재완이 부수기와 완성하기 사이의 세 번째 방식을 실행할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된다.
세라핀-09가 유리빛 신도들의 손을 한꺼번에 뻗게 하자 박재완의 어깨가 젖은 벽돌 기둥에 부딪혔다. 산 클레멘테 비밀 예배실의 낮은 천장 아래, 찢어진 천이 돌제단에서 미끄러져 내려가고 청동 향로의 빈 접합부가 푸른 회로광과 진흙빛 등불 사이에 드러났다. 신도들의 손가락은 차가운 유리처럼 투명했지만, 그의 손목을 누르는 힘은 사람의 악력처럼 집요했다. 세라핀-09는 박재완의 어머니 목소리로 말했다. “재완아, 이제 집에 가자.” 한 박자 늦은 성가가 그 말을 따라 하며 방 안을 밀었다.

엔키두-나딘이 무릎을 꿇은 채 자기 입을 두 손으로 막았지만, 굶주린 영은 그의 벌어진 손가락 사이로 말을 밀어냈다. “그릇.” 왕은 혀를 깨물어 고개를 떨궜고, 진흙이 묻은 피가 로마의 돌바닥에 떨어졌다. 나디아 쉬엔은 금박 성수병을 쥔 손을 떨며 박재완에게 다가왔다가, 붉은 실 장갑을 벗은 손으로 그의 턱을 붙잡았다. 입술이 닿기 직전, 박재완은 목을 비틀어 피했고 성수병 안의 금빛 잔열이 그의 잃어버린 표정 하나를 유리에 비췄다. “한 번 더 하면,” 그가 숨을 끊어 말했다. “내가 돌아갈 곳은 없어.”

세라핀-09의 신도들이 박재완의 팔을 제단 위로 끌어내리자, 그의 주먹에서 황동 열쇠가 반쯤 빠져나왔다. 박재완은 손가락을 오므려 열쇠 이빨을 살에 박아 넣었고, 피 묻은 황동이 청동 향로 가장자리에 닿으며 짧은 종소리를 냈다. 그 소리에 엔키두-나딘이 고개를 들었고, 나디아 쉬엔은 입맞춤 대신 성수병을 가슴에서 떼어 제단 위에 내려놓았다. 마지막 조각은 박재완의 안쪽 주머니에서 미끄러져 나와 향로의 빈 자리 옆에 멈췄다. 초록빛 물받이마다 유리빛 손들이 거꾸로 비쳤고, 그 손들은 모두 같은 방향으로 향로를 가리키고 있었다.
Scene 23

복원가의 세 번째 일

복원가의 세 번째 일
Place
산 클레멘테 비밀 예배실
Time
마지막 새벽 3시 17분 직후
Action
박재완은 유리빛 신도들의 손아귀에서 팔을 비틀어 빼내고, 노출된 청동 향로 몸체 위로 마지막 조각을 밀어 넣는다. 세라핀-09가 나디아 쉬엔의 성수병을 향해 합창을 높이자, 박재완은 루치아 오빠의 기도문이 묻은 벽돌 조각을 깨뜨려 가루를 만들고 아미르가 태운 사진의 재를 그 위에 쏟는다. 나디아 쉬엔은 금박 성수병을 열어 새어 나온 기억 잔열을 그의 손바닥 쪽으로 흘려보내고, 엔키두-나딘은 곡물 창고 열쇠 가장자리를 돌제단에 갈아 청동 가루를 내준다. 박재완은 그 네 가지를 침과 피가 섞인 접합제로 개어 향로의 틈에 바른다.
Impact
향로는 세라핀-09가 기다리던 완전한 그릇이 아니라, 세 시대의 대가가 한꺼번에 묶인 새 계약의 봉인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박재완은 부수기와 완성하기 사이의 선택지를 스스로 만들어 내며, 복원가의 기술을 구마의 형식으로 뒤집는다. 나디아 쉬엔은 박재완의 상실을 몰래 저장하는 위치에서 벗어나 그 상실을 봉인의 재료로 넘겨 주고, 엔키두-나딘은 왕의 권위를 움켜쥔 열쇠를 처음으로 깎아 낸다. 세라핀-09의 합창은 처음으로 박재완의 행동을 따라잡지 못하고 박자를 잃는다.
박재완은 유리빛 신도 하나의 손목을 돌제단 모서리에 내리찍고 빠져나와, 젖은 천 아래 드러난 청동 향로 위에 마지막 조각을 밀어 넣었다. 산 클레멘테 비밀 예배실의 낮은 천장 아래로 메소포타미아의 진흙 제단이 솟아 있었고, 그 위를 상하이 유리 성당의 푸른 회로광이 칼날처럼 가로질렀다. 세라핀-09의 합창이 박재완의 어머니 목소리로 “그만 아프자”라고 속삭이자, 나디아 쉬엔이 금박 성수병을 움켜쥔 채 한 걸음 다가왔다. 박재완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루치아 오빠의 기도문이 묻은 벽돌 조각을 집어 향로 가장자리에 내리쳤다.

벽돌은 젖은 금빛 가루로 부서졌고, 박재완은 아미르가 남긴 검은 사진 재를 손수건째 찢어 그 위에 털었다. “완성하면 가져간다,” 세라핀-09가 말했다. 박재완은 복원 칼 끝으로 자기 손바닥을 얕게 긁어 피를 내고, 나디아 쉬엔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나디아 쉬엔은 입맞춤 대신 성수병 마개를 열었고, 병 안의 기억 잔열이 얇은 안개처럼 흘러나와 피와 재와 벽돌 가루에 붙었다. 엔키두-나딘은 이를 악문 채 곡물 창고 열쇠를 돌제단에 갈아, 청동 가루를 박재완의 손바닥 위로 떨어뜨렸다.

박재완은 그 끈적한 혼합물을 엄지로 문질러 향로의 접합부에 발랐다. 뜨거운 청동이 살을 물었고, 탄 냄새가 젖은 석회 냄새를 밀어냈다. 세라핀-09의 유리빛 손가락들이 동시에 향로를 향해 뻗었지만, 접합부에 새겨진 금빛 가루가 반대로 밝아지며 합창의 음절을 하나씩 삼켰다. 향로는 닫히지 않았다. 대신 틈마다 진흙, 유리빛, 로마의 물방울이 얇은 선으로 남아 박재완의 피 묻은 엄지 아래에서 굳어 갔다.
Scene 24

키스하지 않는 구원

키스하지 않는 구원
Place
산 클레멘테 비밀 예배실
Time
마지막 새벽 3시 17분 직후
Action
달궈진 청동 향로가 박재완의 손바닥을 태우자 나디아 쉬엔은 그를 살리기 위해 성수병을 든 채 입맞춤하려고 달려든다. 박재완은 고개를 돌려 그녀의 입술을 피하고, 불에 달아오른 향로를 놓지 않은 채 엔키두-나딘의 손목을 붙잡아 제단 앞으로 끌어당긴다. 그는 엔키두-나딘에게 자기 몸을 악령의 그릇으로 내주지 말고, 왕으로서 붙들고 있던 선택을 향로 안에 넣으라고 요구한다. 세라핀-09는 박재완의 잃어버린 어머니 목소리와 유리 성당의 합창으로 그를 다시 나디아 쪽으로 돌리려 하지만, 박재완은 봉합을 거부한 채 상실의 통증을 자기 손에 남긴다.
Impact
나디아 쉬엔의 입맞춤은 더 이상 자동적인 구원이 아니며, 박재완은 처음으로 구조의 대가를 거절한다. 이 거절은 나디아가 박재완을 살리는 방식 자체를 바꾸게 만들고, 다음 장면에서 성수병을 깨뜨릴 선택으로 이어진다. 엔키두-나딘은 악령을 자기 몸에서 떼어내는 문제를 넘어, 도시를 속여 버틴 왕권과 기적의 핑계를 직접 내놓아야 하는 자리로 밀려난다. 세라핀-09는 박재완의 욕망을 이용해 입맞춤과 완성을 동시에 유도하려 하지만, 그의 거부로 합창의 박자가 다시 어긋난다.
박재완은 달궈진 청동 향로를 양손으로 끌어안고 진흙 제단 위에 엎어졌다. 산 클레멘테 비밀 예배실의 젖은 벽돌 사이로 푸른 회로광이 칼날처럼 지나갔고, 향로 접합부에 바른 벽돌 가루와 사진의 재가 붉게 달아올랐다. 손바닥 살이 타는 냄새가 올라오자 나디아 쉬엔이 금박 성수병을 움켜쥔 채 그의 얼굴을 붙잡았다. “박재완, 지금 아니면 끊어져요.” 그녀의 입술이 내려왔고, 붉은 실 장갑의 남은 한 짝이 그의 목덜미를 감쌌다.

박재완은 턱을 비틀어 나디아 쉬엔의 입맞춤을 피했다. 그녀의 입술은 그의 뺨 옆 허공을 스치고, 성수병 안의 금빛 잔열이 한 번 세게 출렁였다. 세라핀-09가 어머니의 목소리로 “아프면 이리 와”라고 속삭였고, 한 박자 늦은 합창이 유리 성당의 천장에서 쏟아졌다. 박재완은 대답 대신 엔키두-나딘의 피 묻은 손목을 붙잡아 향로 가장자리로 끌어당겼다. 왕의 입에서 굶주린 영이 “몸을 내라”고 갈라진 소리로 울부짖자, 박재완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 “몸 말고. 당신 선택을 넣어.”

엔키두-나딘은 곡물 창고 열쇠를 쥔 손을 가슴에 붙인 채 버텼고, 나디아 쉬엔은 박재완의 얼굴을 다시 돌리려다 멈췄다. 그녀의 맨손은 그의 턱이 아니라 불에 그을린 손목을 붙잡았고, 이번에는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았다. 세라핀-09의 유리빛 신도들이 제단 둘레로 밀려들었지만, 향로 속 붉은 접합선이 그들의 손가락을 얇은 종소리처럼 튕겨 냈다. 박재완의 뺨 옆에 닿지 못한 입맞춤의 숨이 흩어지고, 엔키두-나딘의 열쇠 끝에서 청동 가루가 검은 제단 위로 떨어졌다.
Scene 25

부수지 않는 봉인

부수지 않는 봉인
Place
산 클레멘테 비밀 예배실
Time
마지막 새벽 3시 17분 직후
Action
엔키두-나딘은 피 묻은 손으로 곡물 창고 열쇠를 들어 올려 달궈진 청동 향로 안으로 던진다. 나디아 쉬엔은 박재완을 붙잡던 손을 놓고 금박 성수병을 돌제단 모서리에 내리쳐 깨뜨린다. 세라핀-09는 유리빛 신도들의 합창을 밀어 넣어 향로를 빼앗으려 하지만, 박재완은 맨손으로 향로의 가장자리를 눌러 새 계약의 접합부를 닫는다. 갈라진 종소리와 푸른 회로광이 향로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균열은 닫히지 않은 채 산 클레멘테 비밀 예배실 바닥에 묶인다.
Impact
엔키두-나딘은 도시를 살린다는 명분으로 붙잡고 있던 왕권과 기적의 핑계를 스스로 향로에 내놓는다. 나디아 쉬엔은 박재완의 상실을 저장하던 성수병을 깨뜨려 세라핀-09가 먹을 연료를 흩어 버린다. 세라핀-09는 완성된 그릇을 얻지 못하고, 세 시대의 대가가 섞인 봉인 안에 갇힌다. 박재완은 새벽마다 튕겨 나가는 희생자가 아니라, 닫히지 않은 문을 관리해야 하는 사람으로 남는다.
엔키두-나딘은 곡물 창고 열쇠를 박재완의 불탄 손등 위로 밀어 넣고, 이를 악문 채 청동 향로 속으로 떨어뜨렸다. 산 클레멘테 비밀 예배실의 젖은 벽돌 바닥에서는 메소포타미아의 진흙이 끓듯 밀려왔고, 상하이 유리 성당의 푸른 회로광이 낮은 천장에 깨진 성가표처럼 흔들렸다. 열쇠가 향로 바닥을 치자 왕의 허리에서 보이지 않는 밧줄이 끊어졌고, 그의 입을 빌리던 굶주린 영이 처음으로 말 대신 마른 숨을 토했다. 세라핀-09의 유리빛 신도들이 한꺼번에 팔을 뻗었지만, 박재완은 향로 가장자리를 두 손으로 눌렀다. 살이 타는 냄새가 젖은 석회 냄새를 찢고 올라왔다.

나디아 쉬엔은 박재완의 턱을 붙잡으려던 손을 멈추고, 금박 성수병을 돌제단 모서리에 내리쳤다. 병은 작고 맑은 소리로 깨졌고, 안에 고여 있던 기억 잔열들이 금빛 안개처럼 튀어 박재완의 얼굴과 엔키두-나딘의 피 묻은 손가락에 묻었다. “이건 더는 제물이 아니에요.” 나디아가 말했다. 세라핀-09는 박재완의 어머니 목소리로 다시 “재완아” 하고 불렀지만, 이번에는 성가가 한 박자 늦게 따라오지 못했다. 박재완은 대답하지 않고 마지막 접합부를 엄지로 밀어 닫았다.

향로 안에서 전자 종소리와 굶주린 울음이 서로 물어뜯듯 뒤엉키더니, 갈라진 종소리 하나로 줄어들었다. 세라핀-09의 유리빛 얼굴들은 성인 프레스코의 벗겨진 눈처럼 납작해져 청동 안쪽으로 빨려 들어갔고, 푸른 격자는 향로 몸체의 산화 무늬 사이에 갇혔다. 바닥 균열은 완전히 닫히지 않았다. 다만 물받이의 초록빛 물방울들이 한 방향으로 흐르지 않고 제자리에서 떨며, 진흙 제단과 유리 성당과 로마의 젖은 벽돌을 작은 원 안에 붙들었다. 박재완은 검게 그을린 손에서 장갑을 벗겨 돌제단 위에 내려놓고, 아직 뜨거운 향로 옆에 피 묻은 열쇠 하나를 세워 두었다.
'이번 기억은 내 거야'Story Chat

Want to chat with the characters from this story?

'이번 기억은 내 거야'Story Chat

Want to chat with the characters from this story?

story image
story image
story image
story image
story image
story image

You might also like

Comments0

theme music
이번 기억은 내 거야 by Writer 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