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흘째 장맛비가 이어지던 밤, 류은중은 현관문 아래로 스며드는 물을 걸레로 막다가 문틈 바깥에 놓인 낡은 노란 우비와 젖지 않은 성냥갑을 발견한다. 우비 안주머니에는 한 줄만 적힌 종이가 들어 있다. “첫 배수 사이렌 전까지.” 은중이 문을 열자 천상연이 복도 끝에 서 있다. 병원 팔찌를 잘라낸 손목에 하얀 자국이 남아 있고, 숨은 차오르는데 손은 이상하리만치 말라 있다. 상연은 사과도 설명도 없이, 자신을 일영의 옛 배수터널까지 데려가 달라고 말한다. 오빠 천상학의 이름을 세 번 불러야만 열리는 길이 오늘 밤 다시 열린다고, 이번에는 봉인하지 못하면 정말 사람이 하나 남는다고. 은중은 문을 닫으려 하지만, 복도 바닥에 번진 젖은 손자국이 자기 발등 바로 앞에서 멈추는 순간 손을 떼지 못한다.
은중은 상연을 차에 태우지 않고 우비를 던져 준 채 빗속을 걸어가게 만든다. 도중에 재개발 공터 앞 컨테이너 경비실에서 오명숙이 둘을 막아선다. 명숙은 딸 얼굴을 보자마자 젖은 수건부터 쥐여 주지만, 상연이 터널 이야기를 꺼내자 국자 대신 손전등을 집어 들고 문고리를 안쪽에서 걸어 잠근다. 이제 와서 들어가 봐야 나오는 건 사람 살릴 말이 아니라 순서뿐이라고, 그 순서를 잘못 입에 올리면 또 하나 묻힌다고. 그러나 상연은 명숙이 1990년대 그 여름 이후 비만 오면 하수구 뚜껑부터 확인한 이유를 알고 있다는 듯, “아줌마가 먼저 바꿔 말한 이름이 있었잖아요”라고 찌른다. 명숙의 얼굴이 굳고, 은중은 처음으로 어머니가 자기에게 숨긴 것이 있다는 확신을 갖는다.
셋이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김상학이 경비실 창문을 두드린다. 그는 재개발 철거 직전 상가 지하 창고에서 나온 필름 상자를 들고 있다. 상자 안에는 대학 시절 상연과 은중, 그리고 그들이 애써 피하던 장소들이 찍힌 사진뿐 아니라, 1990년대 날짜가 찍힌 젖은 네거티브 한 롤이 섞여 있다. 김상학은 누군가 그 필름을 일부러 콘크리트 먼지와 함께 숨겨 놓았다고 말한다. 더 이상 사진으로만 보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도, 그는 벌써 카메라를 목에 걸고 있다. 상연은 그를 보자마자 표정이 흔들린다. 죽은 오빠와 같은 이름을 가진 남자가 비 오는 밤 터널 앞에 선 순간, 규칙이 자신까지 붙잡을 것을 알기 때문이다.
백찬모는 그들을 돌려세우려 공터 입구에 나타난다. 퇴직 공무원다운 점잖은 말투로 오늘은 맨홀 수위가 위험하다고, 내일 시청 사람들과 같이 열어 보자고 달랜다. 그러나 은중은 그의 장화 바닥에 묻은 진흙이 공터 흙이 아니라 지하 배수로의 흰 석회가 섞인 회색이라는 것을 본다. 이미 아래를 다녀왔다는 뜻이다. 김상학이 필름 상자를 들어 보이며 설계 변경 결재선 문서도 찾았다고 말하자, 찬모의 웃음이 먼저 꺼진다. 그는 끝까지 사람을 해치지 않으려는 얼굴로 우산대를 가로 세우지만, 상연은 그 우산을 발로 밀어내며 길을 연다. 그 짧은 몸싸움 끝에 성냥갑이 진흙에 떨어지는데도 성냥은 젖지 않는다. 은중은 그 이상한 건조함이 오늘 밤 상연이 쥔 유일한 우위라는 걸 직감한다.
네 사람은 명숙의 무전기와 찬모가 숨기고 있던 오래된 배수도 일부를 들고 봉쇄된 맨홀 아래로 내려간다. 터널 안은 낮고 축축한데, 상연이 오빠 이름을 세 번 부르자 갈라진 벽 한쪽에 물기 없는 회색 면이 갑자기 젖은 손자국으로 번진다. 김상학과 명숙은 같은 자리를 보지만 찬모는 길을 놓치고 맴돈다. 관계 없는 사람은 길을 잃는다는 규칙이 바로 드러난다. 그러나 찬모는 아예 무관한 사람은 아니다. 그가 더듬거리며 따라붙는 것은, 자신이 이름과 책임의 마지막 칸에 도장을 찍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길은 그를 받아들이지 않으면서도 내쫓지도 않는다.
숨겨진 분기점으로 가는 길목마다 과거의 거짓말이 물건으로 튀어나온다. 김상학이 든 필름 케이스 안쪽에 갑자기 습기가 맺히고, 은중이 주머니에 넣어 둔 메모지는 글씨가 번지지 않은 채 축축해진다. 상연이 들고 온 성냥은 여전히 불지 않는데, 명숙은 그것을 보자 얼굴이 하얘진다. 그 성냥갑이 1990년대 사고 현장에 있던 공사장 비품과 같은 것임을 알아본 것이다. 터널 깊숙한 막다른 곳에는 학생용 철제 사물함이 벽에 반쯤 박힌 채 남아 있고, 그 옆에는 깨진 수조 유리가 검푸르게 반사한다. 은중은 그 사물함이 자기네 학교에서 사라졌던 물건이라는 기억을 더듬는다. 상연은 먼저 열지 못하고, 김상학이 손잡이를 당기자 문은 물먹은 금속 소리를 내며 열린다. 안에는 젖지 않은 캠코더 테이프 하나, 아이들 이름이 적힌 출석부 한 장, 그리고 반쯤 썩은 우비가 나온다.
이 물건들 앞에서 처음 거짓말이 벗겨진다. 천상학의 죽음은 단순한 익사가 아니었다. 1990년대 여름, 신도시 공사장 아래로 난 임시 배수로에서 아이들이 몰래 들어가 놀았고, 수조와 사물함은 물길을 막아 비밀 아지트처럼 쓰였다. 갑자기 물이 불어나자 천상학이 안에 있던 아이들을 밀어 올려 내보냈고, 마지막에 혼자 남았다. 그런데 그 밤 아이들 중 누군가가 출석부 한 장과 캠코더 테이프를 숨겼다. 공사장 출입과 설계 변경, 안전펜스 철거 시간을 확인하면 천상학이 왜 빠져나오지 못했는지 누가 알면서도 입을 다물었는지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상연은 줄곧 은중이 그날 무언가를 보고도 외면했다고 몰아세워 왔지만, 사물함 안쪽 뚜껑에 붙은 낡은 스티커가 뒤집히며 사실이 바뀐다. 거기에 적힌 것은 상연의 필체로 쓴 짧은 문장이다. “엄마 오기 전에 닫아.” 상연은 어린 자신이 오빠를 붙잡으려 간 것이 아니라, 어머니에게 들키지 않으려 먼저 사물함과 수조를 정리하자고 재촉했음을 떠올린다. 그녀는 그 한 문장을 기억에서 지워 버린 채 평생 다른 순서를 만들고 살아온 것이다. 은중은 처음으로 상연의 독설이 단순한 악의가 아니라, 자기 손으로 밀어 넣은 한순간을 견디지 못해 생긴 통제욕이었다는 걸 본다. 하지만 연민만으로는 봉인할 수 없다. 순서를 정확히 말해야 한다.
터널은 더 깊은 값을 요구한다. 분기점 너머로 가는 길이 막히자 상연은 은중에게 대신 말해 달라고 한다. “네가 그날 들은 소리, 네가 말하면 길 열려.” 남의 기억을 대신 말하면 자신의 사적인 기억 하나가 바뀐다는 규칙을 명숙도 안다. 명숙은 말리지만, 은중은 물이 차오르는 소리와 상연의 거칠어진 호흡을 듣고 결국 입을 연다. 은중은 그 여름 밤, 공사장 울타리 밖에서 들었던 금속 부딪히는 소리와 아이들 비명, 그리고 명숙이 자기 입을 막고 집으로 끌고 갔던 감각을 대신 말한다. 길은 열린다. 대신 은중의 머릿속에서 아주 개인적인 기억 하나가 미세하게 뒤틀린다. 대학 시절 상연과 처음 화해했던 날 누가 먼저 웃었는지, 자기가 왜 그 장면을 평생 붙들고 있었는지가 흐릿해진다. 은중은 바로 그 상실을 몸으로 느끼고 분노한다. 이번에도 남의 상처를 대신 받았다는 사실이 아니라, 상연이 그것을 너무 쉽게 부탁했다는 사실 때문에.
그 분노가 두 번째 진실을 끌어낸다. 명숙은 더는 숨기지 못하고 1990년대 사고 직후 자신이 아이들 중 한 명의 이름 순서를 바꿔 말했다고 털어놓는다. 그 아이가 은중이었다. 실제로는 은중도 울타리 안으로 한 발 들어갔지만, 명숙은 딸을 빼내기 위해 “우리 애는 밖에 있었다”고 먼저 소리쳤다. 찬모는 그 말을 받아 적으며 사고 보고를 임시 배수로 무단침입 사건으로 축소했고, 안전펜스가 열려 있던 시간과 설계 변경 후 배수량 계산 실수는 묻혔다. 천상학의 죽음에 직접 손을 댄 사람은 없었지만, 어른들은 각자 한 칸씩 책임을 밀어낸 셈이다. 상연이 평생 은중을 미워한 이유도 여기에서 갈라졌다. 은중만은 진실을 알면서 선택받아 밖으로 나온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은중은 어머니를 바라보지만, 명숙은 눈을 피하지 않는다. 그날 한 번 거짓말해 딸을 살렸고, 그 대가로 평생 비 냄새만 나면 하수구를 확인하며 살았다고 말한다.
김상학은 필름을 현장에서 꺼내 빛에 비춘다. 네거티브 몇 컷에는 사고 전 공사장 수문이 열려 있는 시간, 천상학이 아이들을 밀어 올리는 순간의 그림자, 그리고 찬모가 현장에 먼저 도착해 사물함 문을 닫는 모습이 흐리게 남아 있다. 찬모는 결국 무릎을 꿇고 인정한다. 그는 그날 아이를 구하러 간 것이 아니라, 설계 변경이 들통나면 단지가 멈춘다는 공포에 먼저 증거를 치우러 갔다. 그런데 수문을 다시 닫는 몇 분을 허비하는 바람에 물길이 바뀌었고, 그 몇 분이 천상학에게는 전부였다. 그는 이후 재개발이 시작될 때마다 같은 방식으로 책임을 콘크리트 아래 묻어 왔다. 그래서 이번에도 먼저 아래로 내려와 사물함과 필름을 없애려 했던 것이다.
새벽 배수 사이렌까지 시간이 거의 남지 않자 터널은 마지막 규칙을 집행하기 시작한다. 젖은 손자국이 벽 전체로 번지고, 분기점 바닥에서 흙탕물이 역류한다. 가장 깊이 부인한 한 사람을 남겨 두려는 듯 길이 상연 발밑에서만 미끄럽게 열렸다 닫힌다. 상연은 오히려 침착해진다. 그녀는 처음부터 자신이 남을 생각으로 은중을 불렀다고 털어놓는다. 시한부인 자신의 몸을 죽은 자의 자리와 맞바꾸면 끝날 거라고, 그러면 오빠도 은중도 더 이상 자기를 기억하지 않아도 된다고 믿었다고. 그러나 터널이 고르는 기준은 죽을 사람의 사정이 아니라, 가장 끝까지 순서를 비튼 사람의 부인이다. 지금 그 자리에 가장 가까운 사람은 상연만이 아니다. 찬모도, 명숙도, 은중도 각자의 방식으로 자리를 나눠 갖고 있다.
은중은 여기서 처음으로 상연의 부탁을 거절한다. 대신 살려 주는 방식으로는 끝나지 않는다고, 누구 기억 하나를 더 잃고 누구 몸 하나를 더 남겨도 결국 같은 비가 다시 온다고 말한다. 그녀는 사물함에서 나온 출석부와 테이프, 김상학의 네거티브, 명숙의 증언, 찬모의 자백을 한 줄의 순서로 묶어 소리 내기 시작한다. 누가 먼저 들어갔고, 누가 위험을 알고도 막지 않았는지, 누가 증거를 숨겼는지, 누가 이름을 바꿨는지. 상연은 그 옆에서 처음에는 끼어들어 순서를 고치려 하지만, 기침 끝에 무릎을 꿇고는 결국 가장 어려운 이름을 자기 입으로 낸다. “천상연이 먼저 닫으라 했다.” 이어 명숙이 “오명숙이 은중 이름을 뺐다”고 말하고, 찬모가 “백찬모가 수문보다 서류를 먼저 봤다”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김상학이, 죽은 자와 이름이 같은 산 사람으로서 이 기록을 없애지 않고 남기겠다고 선언한다. 그 순간 불지 않던 성냥 하나가 짧게 붙고, 젖은 손자국이 벽에서 서서히 마른다.
하지만 봉인은 말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역류한 물이 사물함을 밀어 쓰러뜨리며 출구를 막고, 상연이 미끄러져 깨진 수조 틈 사이로 다리가 끼인다. 은중과 김상학이 몸으로 사물함을 밀고, 명숙은 철제 사다리에 몸을 걸쳐 버팀목이 된다. 찬모는 도망치지 않고 맨손으로 유리 조각을 치우다 손을 베인다. 네 사람이 같은 진흙 속에서 상연을 끌어내는 동안 첫 사이렌이 멀리서 울리기 시작한다. 출구가 닫히기 직전, 은중은 상연의 마른 손을 잡고 마지막으로 끌어올린다. 죽은 자의 자리는 비어 있지 않지만, 그 자리를 산 사람이 대신 채우는 일은 멈춘다. 천상학이 남긴 젖은 이름은 더 이상 누군가를 끌어당기지 않는다.
비가 그친 뒤, 재개발 공터는 봉쇄되고 터널 입구는 공식적으로 콘크리트로 막힌다. 그러나 이번에는 묻는 방식이 다르다. 김상학은 네거티브와 테이프를 공개하지 않고 없애지도 않는다. 그는 일영의 작은 전시 공간에 물 먹은 사물함 손잡이, 복원한 사진 몇 장, 사고 기록의 빈칸들을 함께 걸어 둔다. 누가 누구를 죽였다고 단정하는 대신, 비어 있던 순서를 보이게 만드는 전시다. 찬모는 공식 조사에서 설계 변경과 현장 은폐를 증언하고, 명숙은 딸에게 처음으로 그날 자기를 끌고 뛰던 손이 떨렸다고 말한다. 상연은 병원으로 돌아가지만, 마지막 장면을 혼자 연출하려 들지 않는다. 은중에게 더는 대신 기억해 달라고 부탁하지도 않는다.
은중은 하나의 기억이 희미해진 대가를 끝내 되찾지 못한다. 대학 시절 어느 저녁, 누가 먼저 웃었는지 끝내 분명하지 않다. 대신 그녀는 처음으로 그것이 없어도 자기 판단이 서는 순간을 맞는다. 상연을 용서했다고 쉽게 말하지 않고, 미워하지 않는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다만 비 오는 날 누군가의 이름이 불릴 때마다 자동으로 달려가던 삶에서 한 걸음 비켜선다. 얼마 뒤 다시 장마가 시작되지만, 이번에는 현관문 아래 젖은 손자국이 번지지 않는다. 은중은 끓는 주전자 소리를 들으며 문 앞에 놓인 오래된 성냥갑을 쓰레기통에 버리지 않고 서랍에 넣는다. 불이 붙지 않던 그 성냥은 이제 쓸모가 없지만, 한 번도 다 타지 못한 밤이 있었다는 증거로는 남는다.
Comments
Comments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