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여름, 온 나라를 붉게 물들였던 함성은 서울 변두리의 낡은 아파트까지 닿지 못했다. 세상의 환호성이 메아리처럼 울려 퍼지던 그 순간, 아파트는 깊은 침묵 속에 잠겨 있었다. 그 침묵을 깨고 세상에 알려진 것은 다름 아닌 한 노파의 죽음이었다. 노파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그 죽음은 잠시 세간의 입에 오르내리다 곧 잊혔다. 하지만 아파트는 알고 있었다. 노파의 숨이 끊어진 후, 이곳에 감도는 기묘한 기운을. 마치 깊은 상처에서 피가 배어 나오듯, 아파트 곳곳에서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이 스며 나오기 시작했다.
서른넷의 다큐멘터리 PD 서수현은 커피를 손에서 놓지 못했다. 며칠째 이어지는 편집 작업에 지칠 대로 지쳤지만, 그녀의 눈은 여전히 화면 속 진실을 향한 갈증으로 빛나고 있었다. 동료들은 혀를 내두르며 수현을 ‘독종’이라 불렀다. 하지만 수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다큐멘터리는 단순한 영상 기록물이 아니었다. 세상에 감춰진 진실을 드러내는 무기이자, 스스로를 끊임없이 채찍질하는 숙명과도 같았다.
그녀는 이번 다큐멘터리 주제로 ‘죽음’을 선택했다. 그것도 2002년 여름, 온 나라가 월드컵의 열기에 휩싸였을 때, 세상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스러져간 한 노파의 죽음을. 수현은 노파의 죽음을 둘러싼 소문들, 특히 노파가 죽기 전 며칠 동안 "눈을 감고 귀를 막아야 한다"는 말을 중얼거렸다는 이야기에 강하게 이끌렸다. 마치 무언가 끔찍한 것을 보고 들은 것처럼, 그 공포를 필사적으로 잊으려는 듯한 노파의 모습은 수현의 상상력을 자극하기 충분했다.
수현은 낡은 아파트를 찾았다. 빛바랜 벽지, 어둡고 긴 복도, 녹슨 철문,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 모두가 하나같이 어딘가 불안하고, 지쳐 보였다. 수현은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점점 더 이 아파트를 둘러싼 어둠의 실체에 다가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수현은 아파트 CCTV에 찍힌 기이한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화면 속에서 노파는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는 갑자기 두 손으로 눈과 귀를 막고 주저앉아 몸을 떨기 시작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극심한 공포를 느끼는 듯했다. 그 순간, 수현의 가슴 깊은 곳에서도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며칠 후, 수현은 아파트 주민 중 한 명이 노파와 같은 자세로 숨진 채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주민이, 또 다른 주민이…. 마치 알 수 없는 저주처럼, 아파트는 죽음의 그림자에 잠식되어 갔다. 수현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것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다. 노파가 마지막 순간까지 눈을 감고 귀를 막으려 했던 그 공포, 그 공포가 형체를 갖추고 세상 밖으로 나온 것이다.
수현은 다큐멘터리 촬영을 강행했다. 극심한 불안감과 두려움 속에서도, 수현은 카메라 렌즈를 통해 그 공포를 마주하려 했다. 그리고 마침내, 수현은 아파트 지하실에서 그 형체와 마주하게 된다. 눈을 감고 귀를 막아도 소용없었다. 이미 그 공포는 수현의 내면 깊숙이 침투해 있었다. 수현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화면은 검은색 노이즈로 가득 찼고, 오직 수현의 거친 숨소리만이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며칠 후, 수현의 다큐멘터리가 방송되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수현이 마지막에 마주했던 그 공포의 실체를 알 수 없었다. 수현은 그 후 다큐멘터리 제작을 그만두었다. 그녀는 여전히 매일 밤 악몽에 시달리고 있다. 눈을 감으면 나타나는 검은 형체, 귀를 막아도 사라지지 않는 섬뜩한 속삭임…. 수현은 알고 있다. 그 공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그리고 언젠가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올 것이라는 것을.
Comments
Comments · 0